2019년 9월 9일 월요일

염소 혹은 실비아는 누구인가, 혹은 언제인가?

임승태

성공한 건축가 마틴(박윤석)이 50세 생일을 맞아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TV 진행자인 로스(이준영)와 인터뷰를 하기로 한 날. 마틴은 놀라운 이야기를 꺼낸다. 실비아라는 이름의 염소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 잘못 읽은 게 아니다. 염소다. 그리고 마틴이 말하는 사랑은 여느 반려 동물과 보호자의 관계가 아니라, 성관계를 포함한 것이다. 로스는 이 사실을 마틴의 부인 스티비(김수아)에게 편지로 알리고 그 결과 마틴과 스티비, 그리고 그들의 아들 빌리(박지훈)가 누리던 평화는, 무대가 난장판이 되듯, 산산조각난다.

아들 빌리가 게이라는 설정이 곁들여 있지 않았다면 이 이야기는 충격적일지언정 그리 흥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틴과 스티비 부부는 아들의 게이 정체성을 존중해왔고 그것은 이 가족에게 어떠한 문제도 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이렇게 읽힐 수 있다: 남자가 남자와 성관계를 맺는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면 수간도 허용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것은 마틴이나 그를 지지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일 수 있지만, 작가가 이 말을 하기 위해 작품을 쓴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마틴의 어떤 말도 스티비의 반론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비아에 대한 마틴의 진심은 충분히 전달되지만 그 관계에 염소가 동의했음을 마틴은 입증할 수 없고 그래서 그 관계는 일방적이고 진지하기에 더욱 병리적이다.

이 논쟁이 동성애에 대한 ‘메타포’의 성격을 가진다고 보는 게 더 합당할 것 같다. (메타포라는 단어가 실제로 대사로 여러 번 반복되는 것은 작가가 혹시라도 이 극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까 염려한 노파심의 반영일 수 있다.) 전선이 이종간(異種間)의 사랑에서 펼쳐짐으로써 동성간(同姓間)의 사랑은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쿠쉬너의 <미국의 천사들>이 그 전선에서 벌어진 격렬한 전투를 그리고 있다면 <실비아>는 마치 원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너무나 평화롭다.

하지만 여전히 이 작품이 2000년에 쓰인 작품이란 점을 감안해야 수간-동성애 메타포가 유의미하다. 20년 가까이 지난 현 시점, 특히 미국을 비롯하여 가까이는 대만까지 동성간의 결혼이 허용된 시점에서 보자면 마틴/스티비 같은 부모가 특별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 미국에서 이런 부모는 결코 흔한 일은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이 작품의 논점이 살아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이 극을 마틴이 아니라 빌리를 위해 (어쩌면 젊은 시절의 자기 자신을 위해) 썼다고 말할 수 있다.

공연은 작품의 메시지를 충분히 잘 전달했다. 다만 지난 20년 동안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이나 제도가 많이 변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시대를 특정하는 작업이 동반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공연 초반 로스가 인터뷰 녹화를 위해 꺼내는 카메라가 DSLR 카메라가 아닌 ENG 카메라였으면 어땠을까. DSLR가 설치되는 순간 동시대라는 느낌이 드는데 이 이야기가 동시대라고 하면 특별히 새로울 게 없고 그래서 다소 지루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홍석천, 난 “호모다””라는 헤드라인이 스포츠신문 첫면을 크게 장식한 2000년 혹은 그 이전 어느 때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보면 모든 상황이 훨씬 더 흥미로워진다. 올비는 의문사 WHO를 유난히 좋아하는 작가이지만, 이 공연에서는 WHEN이 더 중요하다.


***
<염소, 혹은 실비아는 누구인가?>
에드워드 올비 작, 라성연X베타프로젝트
2019년 8월 7일-11일 선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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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8일 월요일

“~없이 연극하기”: 대안적 작업환경을 위한 성찰 - 콜렉티브 뒹굴과 화학작용4의 커뮤니타스를 중심으로

작성: 배서현, 손연수, 이담, 조준하
정리: 김민조 (화학작용 4 사무국)

* 이 글은 2019-1학기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전공 수업 <공연예술의 인류학>에 제출된 보고서를 [화학작용 4] 사무국이 간추린 소개글입니다. 보고서 전문은 아래 전문 보기 링크에서 pdf 파일을 내려 받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문 보기 링크:
https://drive.google.com/file/d/1ljifCdEyIukJcFHTx_txtao3I_kttTzZ/view?usp=sharing 

이 글은 젊은 연극인들의 자발적, 수평적 네트워크를 표방한 연극 축제 [화학작용 4]의 성격을 인류학적 관점에서 해명하고자 시도한 글이다. 작성자들은 축제 프로그램 및 개별적인 연습 과정에 대해 참여관찰을 수행했고, 축제에 참여한 6개 팀 중 ‘콜렉티브 뒹굴’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화학작용 4] 축제 전반의 특성에 접근하는 방법을 취했다.

[화학작용 4]는 “~없이 연극하기” 라는 방법론을 통해 기존 연극계의 규범을 성찰하고 대안적인 작업환경을 모색한 축제이다. 이 글은 [화학작용 4] 축제의 형태적 측면을 분석하기 위해 상징인류학자 빅터 터너가 제안한 “리미널리티” 및 “자발적 커뮤니타스” 개념을 원용한다. 리미널리티란 잠재성과 가능성을 내포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자발적 커뮤니타스란 다양한 사람들이 개별적 정체성을 드러내며 직접적, 즉각적, 총체적으로 상호 대면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두 개념은 “~없이 연극하기” 라는 축제 방법론에서 발생하는 규범 부재의 상황, 아울러 그러한 기반 위에서 새로운 공동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화학작용 4]는 “우리의 연극은 그렇지 않다” 라는 슬로건 아래 진행되었다. 2018년 연극계 미투 운동을 거치며 젊은 연극인들은 그동안 ‘연극’이라고 불려왔던 틀에 권력적인 언어와 규범이 스며들어 있음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화학작용 4]는 “~없이 연극하기” 라는 형식을 부여해 기존의 언어와 규범을 의도적으로 박탈했고, 개별적인 창작언어를 지닌 팀들 간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규범을 형성하고자 했다. 이 과정은 새롭게 형성된 커뮤니타스 안에서 대안의 문화를 만들되 그 안에서 개별성을 보존하는 시도로 설명된다.

콜렉티브 뒹굴은 기존의 권력적인 작업환경에 대해 성찰하고 팀원 각자의 개별성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활동해온 팀이다. 이 글에서 콜렉티브 뒹굴은 자발적 커뮤니타스의 장점을 드러내고 있는 팀이자 [화학작용 4]의 축제 기조와 맞닿아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서 분석되고 있다. “뒹굴리안”들은 서로를 별명으로 부르며 현실 세계의 지위에서 분리되는 대안적 정체성을 만든다. 또한 뒹굴리안들은 연습에 들어가기 전 “체크인”이라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또 다른 나’ 라는 가상의 정체성으로 전이되며, 연습이 끝난 후에는 “체크아웃”을 통해 현실로 돌아온다. 이러한 연습 과정은 종전의 사회구조나 문화적 조건으로 이루어진 “직설법적 세계”와 그러한 구조가 무화되는 “가정법적 세계” 사이의 전이 과정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자발적 커뮤니타스는 기본적으로 불안정한 성격을 갖고 있기에 지속적으로 재통합의 요구를 받게 된다. 콜렉티브 뒹굴의 경우에도 개별적이고 수평적인 관계성과 공식적인 연출의 권위가 혼합되어 있는 양상이 관측된다. [화학작용 4] 역시 창작팀들의 교류 과정에서 기존의 규범적 언어를 대체할 새로운 규범적 언어를 찾아가는 양상을 보였다. 예컨대 “열정 없이 연극하기”를 주제로 한 ‘극단 배우들’의 워크숍에 참여한 ‘프로젝트 하자’는 열정이라는 개념을 박탈한다면 이와 반대되는 개념인 냉정을 정의해야 하지 않을지를 제안하기도 했다.

다만 이 글은 리미널리티 안에서 새로운 규범이 모색되고 있는 상태를 “규범적 커뮤니타스”가 형성되어 있는 상태와 구별 짓고 있다. 규범적 커뮤니타스는 영속적인 규범을 중시하며 개인의 자발성을 그 규범 안에 포함시킨다. [화학작용 4]에 참여한 팀들의 경우에는 서로의 연습실을 공개하고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대안적 규범을 만들어나가지만, 그러한 규범을 불변하는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자발적 커뮤니타스 특유의 리미널리티는 새로운 규범에 의해 곧바로 해소되지 않고 연습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형성된다.

[화학작용 4] 축제의 최종 행사에 해당하는 ‘과정공유 시연회’는 완성된 연극이 아니라 과정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시연회는 관객의 참여를 통해 완성되는 형식으로 미완과 완성의 경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관객이 시연회에 참여함으로써 작업환경의 문제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며, 시연회를 통해 개별성과 수평성을 중시하는 [화학작용 4]의 커뮤니타스가 젊은 연극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관객의 층위로까지 확장된다고 보고 있다.

[화학작용 4] 과정공유 시연회 리뷰 (1): 과정을 만드는 과정, 그 나선형의 시간들

김민조 (화학작용 4 사무국)

과정, 우리 안의 소수적인 기억들

타인에게 과정을 노출한다는 것은 창작자라면 누구나 꺼려할 만한 일이다. 필자 역시 작성 중인 글을 누군가가 들여다보는 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혼란스러운 문장과 지워내야 할 사고의 흔적들을 들키는 일만큼 낯부끄러운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과 ‘과정’을 ‘공유’한다는 말이 모순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어떤 것을 노출시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관객은 왜 그것을 보기 위해 먼 걸음을 해야 하는 것일까.

연극 생산의 과정은 무수히 많은 다발로 엮여 있다. 정치적 층위의 결정에서 미학적 층위의 결정까지, 참여자 개인만 감각할 수 있는 사적 레벨의 층위부터 공개적인 장에서 교환되는 공적 레벨의 층위까지, 인간적 소통의 층위에서 시스템의 층위까지. 이 모든 과정들의 총합은 그저 ‘삶’이라고 칭해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넓고 무한하다. 그래서 과정은 ‘결과’를 무엇으로 놓느냐에 따라 상대적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개념이기도 하다. 만약 정식 공연을 결과로 놓는다면 공연을 만들기 위해 밟아온 모든 절차가 과정에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인식소(素)를 세분화하는 정도에 따라 하루 6시간 단위의 연습을 독립적인 과정으로 떼어낼 수도 있고, 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수행된 에튀드 연습도 과정으로 칭해질 수 있다.

따라서 과정은 그저 중립적으로 거기 주어져 있는 실재적 시(공)간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과정은 어떤 단계를 ‘결과’로 인식하는 순간에 사후적으로 발견되는 것, 일종의 비판적 인식을 통해 정립되는 관념적 단위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것은 사건화되지 않은 위기(crisis)들에 대한 성찰을 동반한다. 발화되지 않은 위기 혹은 소통되지 않은 채 내속되고 있는 결함에 대한 재인식이 과정에 대한 사유를 촉발한다. 그래서 과정을 드러내는 행위는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하고, 인식할 수 없었던 내부의 잔여들을 다시 감각하고자 하는 열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처럼 과정의 재발견이 우리 안의 ‘소수적인 것’을 구제하기 위한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과정에 대한 숙의가 2015년 이후의 페미니즘 리부트와 2018년 연극계 미투 운동의 자장 내에서 출현한 맥락을 새롭게 구성해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연극계를 지배하고 있던 권위주의적인 성장 모델은 많이 흔들렸다. 연극계 미투 운동이라는 혁명적 사건을 통과하며 의도적인 무지의 장막 너머에 감추어져 있던 어두운 현장들의 모습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은폐되거나 망각되어 온 수많은 과정들의 귀환이기도 했다. 증언과 고백의 릴레이 속에서 수많은 연극인들이 자신의 기억 속에 침전되어 있던 과정들의 대륙을 떠올려냈다. 최근의 지각변동을 통해 우리가 서서히 알아가고 있는 것은 그러한 과정들이 매순간 우리 자신의 몸과 정신에 선연한 영향을 남기는 ‘현재들’이라는 점이다. 미투 운동은 그러한 현재적 기억들에 정당한 발언권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인식과 함께 기성 연극계가 그러한 발언을 허용치 않는 구조로 위계화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을 촉발했다.

그러나 이 글에서 보다 관심 있게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소수의 연극인이 제도적·물질적으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구조의 문제보다 그것을 하부에서 떠받치고 있는 우리 안의 권위주의, 즉 내면화된 기율(紀律)의 문제이다. 대안적인 창작환경을 지향하고 실천하는 젊은 연극인들조차도 권위주의적 성장 모델과 내적으로 결별하는 데 있어서는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프로 연극인’으로 성장하는 직업적 루틴을 자연화하는 기율과 관련되어 있다.   

통상적으로 ‘프로’란 과정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스스로 책임지고 해결하는 성년 주체로 상상된다. 관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상품을 내놓는다는 목적을 위해 숙련된 기술을 연마하고 제작 공정을 빈틈없이 컨트롤할 수 있는 생산 주체가 되어가는 것. 선배들이 축적해놓은 자산 위에 자신의 창조력을 덧쌓으며 한 명의 프로 예술가로 성장한다는 비전. 조금 더 개인주의화된 버전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흠잡을 데 없는 직능을 구비한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꿈이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이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생존 이데올로기, 그 중에서도 ‘돈 안 되는 예술’의 생존을 정당화하는 특정한 논리 회로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설명은 여기에서 자세히 다루지 않기로 한다.)

명목상으로 이러한 모델은 개인의 실현을 보장해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프로화’ 모델은 그들을 훈련시키는 구조의 문제점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한다. 그들에게 붙여지는 죄목은 다양하다. 이 바닥의 관습과 생리를 잘못 학습한 죄, 선생님의 숨은 뜻을 알아듣지 못한 죄, 혹은 구조상의 문제점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유연하게 해결하지 못한 죄 등등. 경직된 위계 구조 내에서 자유로운 예술가로 성장하겠다는 모순된 비전을 품은 사람들은 구조의 결함을 벌충하는 것을 다시 개인의 품성과 능력의 문제로 회수하고, 자신이 습득한 ‘생존 기술’을 후배들에게 교육시키며 엇비슷한 표정과 자세를 지닌 프로 연극인으로 성장하곤 한다.

물론 권위주의적 성장 모델 내에서 이루어진 모든 성과들을 도매금으로 폄하할 수는 없다. 또한 그러한 모델 내부에서 폭력성을 견제해 온 개인들을 손쉽게 낡은 예술가로 치부하는 것도 합당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이 간직해온 혼종적인 경험과 기억들, 사건화되지 않은 위기들에 대한 감각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과정 중심주의’의 역할이자 효능일 것이다. 그러나 요점은 우리 안의 소수적인 기억을 억압하는 기율 자체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과정의 중요성에 대해 논의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프로화 모델 내에서 과정은 단지 밟고 올라가야 할 사다리 정도로밖에 이해될 수 없다. 극복했거나 앞으로 극복해야 할 미완성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많은 경우에 과정은 종종 과거 시제 내지는 가정법 미래 시제로 이야기되곤 한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즐겁게 반추하는 시행착오의 추억, 미숙했던 시절에 관한 후일담, 혹은 해결해야 할 부끄러운 방황 상태로서.

그러므로 과정 공유라는 형식에 대해 급진적으로 논의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 한국 연극계의 상부와 하부를 순환하고 있는 보수적 기율의 문제를 가지고 들어오지 않을 수 없다. 과정이란 무엇인가, 과정은 왜/어떻게 노출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들은 결코 추상적인 지대에서 솟아오른 것이 아니다. 이 글은 과정 공유라는 형식이 최근 연극계에 현안으로 떠오른 구조, 기율, 이념의 문제들을 직시하고 해결하기 위한 실용주의적 목표에 의해 입안된 것으로 간주하고, 마찬가지로 그러한 목표에 입각하여 [화학작용 4] 과정공유 시연회의 의의와 한계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비평의 준거들




[화학작용 4] 축제의 최종 발표 행사로 기획된 과정공유 시연회(이하 ‘시연회’)는 5월 17일과 18일 양일에 걸쳐 개최되었다. 기존 [화학작용] 시리즈와 달리 이번 시연회는 공연이 아닌 전시 및 퍼포먼스의 형태로 준비되었다. 축제에 참여한 극단 배우들, 극단 Y, 丙 소사이어티, 콜렉티브 뒹굴, 프로젝트 공공연희, 프로젝트 하자 6개 팀이 무악파출소 2~4층에 걸쳐 전시 공간을 나눠 갖는 방식이었다. 시연회는 관객들이 1층에서 체크인을 하고 도슨트의 안내를 받아 순차적으로 전시 공간을 둘러보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오프스테이지 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화학작용 4]는 공연을 만들어가는 연습실 현장에서 팀들 간의 양방향 교류를 일으키는 데 주력한 축제이다. 연습실에서 이루어진 실험팀과 관찰팀의 교류 현황은 드라마인(drama-in.kr)에 게재된 실험관찰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화학작용 4]가 창작의 산물이 아닌 창작의 과정에 초점을 둔 축제인 만큼, 그 과정을 외부에 발표하는 시연회 행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복잡한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과정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과정을 결과로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이 가능한가? 만약 과정에 대한 실험이 특정한 결과물로 산출된다면, 그 결과물을 보는 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관람과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다시 말해 [화학작용 4] 축제 측의 입장에서 시연회는 ‘과정’에 대한 숙의를 넘어 ‘공유’에 대한 고민에 직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실 ‘과정 공유’는 예술지원기관이나 프로그램 기획자의 언어이기도 하다. 창작 과정을 외부에 공개하는 행사 내지 프로그램들의 연원을 따져보면 2000년대 초반의 벤처 붐을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적 지원책들이 뒤늦게 공연예술계로 유입되면서 창작 보육(incubating) 시스템이 하나둘씩 출현하던 200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신진예술가 양성이라는 취지를 내걸고 시작된 창작 보육 시스템은 예술가가 창작 단계별로 결과물을 제출해 피드백을 받는 관리 체제를 정착시켰다. 소수의 심사위원이 창작자를 단계별로 심사, 관리하는 지원 체제는 이후 창작자가 일반 관객들을 대상으로 예비 상태의 결과물을 발표하는 ‘과정발표회’로 진화하게 된다. 이러한 지원책의 변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시점은 2017년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창작산실 창작실험활동지원 ‘과정과 공유’, 남산예술센터의 ‘서치라이트’, 서울문화재단의 ‘최초예술지원 창작준비형’ 등 과정 공유를 표방한 굵직한 기획 프로그램들은 공교롭게도 전부 2017년경에 출범했다.

이 프로그램들은 쇼케이스, 워크숍, 리서치, 낭독공연, 프레젠테이션 등등 창작자가 자신의 예술적 구상을 선보일 수 있는 다양한 발표 형식을 허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들의 공통점은 과정을 공유한다는 워딩을 사용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외부에 선보일 수 있도록 잘 갈무리된 형태의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일반에 잘 알려진 과정발표회들은 대체로 극장 비수기 시즌에 편성되어 있거나 거대한 공연 프로그램의 부대 행사로 편성되어 있으며, 여기에 선정되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률을 뚫어내야 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렇다면 창작자의 입장에서 과정발표회가 일반적인 공연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구별해내기란 모호해진다. 보육 내지 관리 체제의 문법 내에서 과정은 결과에 가깝게, 공유는 상연에 가깝게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편의상 이러한 성격의 과정발표회를 ‘쇼케이스 유형’으로 분류하도록 하자. 쇼케이스 유형이 창작 생태계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들을 부정할 필요는 없으며 그 공과를 일일이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러나 [화학작용 4]가 지향하는 ‘과정 공유’가 쇼케이스 유형의 그것과 차별성을 두려 했던 점은 명백하다. 초창기 단계부터 각 팀의 실험계획서를 공유하고, 연습 현장을 직접 참여/참관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실제 창작 과정 내에서 팀들 간의 화학작용이 일어날 수 있도록 유도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연회라는 최종 발표 행사는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한 쇼케이스가 아니라 축제 기간 내 수행해온 과정 실험의 경로를 정직하게 전시하는 자리가 되어야 했다. 동시에 그러한 과정 실험의 경로가 관객에게 유의미하게 ‘공유’될 수 있는 형식을 창안하는 것이야말로 이번 시연회에 참여한 팀들의 과제였을 것이다.

이 글은 일차적으로 [화학작용 4]에 대한 비평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화학작용 4]를 시금석 삼아 과정 공유에 대한 비평의 준거들을 제안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기도 하다. 공연 작품에 대한 비평의 준거들은 이론으로 구축할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축적되어 왔다. 그러나 과정에 대한 비평의 준거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합의는 거의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과정은 판단이 개시되는 장소일 뿐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과정 공유라는 공적 체험에 관해서는 그 체험의 질적 성과를 따질 수 있는 비평의 준거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글은 ‘과정 공유’를 연극 제작에 있어서 억압, 망각, 은폐되었던 기억을 성찰적으로 발굴하기 위한 정치적 실천의 일환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목적성은 각 팀의 개별적인 공유 실천을 비평하는 데 있어 하나의 준거가 될 수 있다. 특히 “우리의 연극은 그렇지 않다” 라는 슬로건 아래 진행된 축제인 만큼 “그렇지 않음”의 대안적 체험을 제시하는 파상력(破像力) 또한 하나의 척도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전통적인 공연이나 쇼케이스 유형과 달리 각 팀에서 준비한 시연회가 과정을 과정 그 자체로 음미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시의적이리라 판단된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이러한 준거들을 바탕으로 [화학작용 4] 시연회에 참여한 극단 배우들, 극단 Y, 丙 소사이어티, 콜렉티브 뒹굴, 프로젝트 공공연희, 프로젝트 하자 6개 팀의 전시 및 퍼포먼스를 비평할 것이다.

2019년 6월 1일 토요일

[화학작용 4] 실험관찰보고서 3탄 : 丙 소사이어티, 프로젝트 공공연희, 극단 Y

프로젝트 공공연희의 실험,
공동연출 없이 연극하기에 대한 
丙 소사이어티의 관찰

@ 홍대 옥탑 작업실


프로젝트 공공연희의 연습에 참여한 소감을 이야기한다면?

조촐한 규모였다. 작은 방에 4명이 모여 앉았다.
  • 우리는 동시 연출을 시도하려고 했다. 하나의 텍스트와 세 명의 다른 연출.
  • 다만 셋 다 만족할 수 있는 텍스트여야만 한다. 지금의 ‘이십억 광년의 고독’을 찾기까지 어마어마한 과정을 거쳐 왔다. (일수 연출 멋지게 시를 낭송) 결국 우리의 합의는 바로 ‘이십억 광년의 고독이 라면’ 이다.
  • 동시연출을 위한다면 해석의 여지가 많은 최소한의 텍스트만 가져오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래서 라면 뒷면의 기재된 조리법, 그만큼의 텍스트만 취하고 싶었다. 그 텍스트와 이 시 전반에 깔린 정서를 합쳐보려 한다.
  • 우리가 하려는 동시연출이란 그 누구도 방관자가 되지 않는 그런 환경인데,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아 오히려 더 방관자가 되어가는 것 같아 슬프다.
  • 동등한 연출의 위치에서 함께 작업하며 다른 이의 태도를 지척에서 볼 수 있다는 것, 무척 좋았으나, 책임감이 1/n 이 된다는 것. 부담을 덜 수는 있지만 그만큼 작품에서 한 걸음 떨어져 버리는 것이 딜레마였다.
  • 이번 화학작용은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취지지만, 관객들이라 함은 결과에 무척 익숙한 사람들이라 (다른 팀들 또한 알게 모르게 결론 혹은 결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이 있는 것 같다) 준비를 하는 데 쉽지 않다.
맥주 12캔을 비웠다.

오늘 본 것을 丙 소사이어티의 언어로 옮겨온다면?

일수 연출님이 명언을 남겼다.
나는 철학이 하늘을 향해 뻗는 가지라면 예술은 그 가지에 달리는 열매라고 생각한다.

이 열매를 위해 여러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누군가는 연출 누군가는 배우 누군가는 작가가 되겠지. 또 이 중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예술에 기생하기도, 혹은 강요하기도 하겠지.

동시연출로 완성된 공연을 만들어 내기가 쉽지 않을 것은 알지만
지켜본다는 것은 무척 기대되는 일이다.

이들의 과정에 하루 정도 개입해보았다는 게 즐거울 따름이다.


* * *


극단 Y의 실험,
가부장 없이 연극하기에 대한 
프로젝트 공공연희의 관찰

@ 동숭아트센터

▷ 극단 Y × 프로젝트 공공연희 연습현장 스케치 영상

극단 Y의 연습에 참여한 소감을 이야기한다면?

과정에 집중한다는 말은 사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결과를 평가하고 그 가치를 재화로 환산하는 것이 익숙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결국 좋은 결과물을 토해 내었을 때라야 만이 자신을 평가하는데 있어 부끄럽지 않았다.
정말 그러한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자리였다.
창작자로서 늘 염려하는 바이다. 나 역시 과정에 집중하여 과정이 아름답기를 바란다. 나는 그것을 끊임없이 유예했다. 더 나은 결과물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시간과 노력 그리고 주변사람들의 시간과 노력, 그리고 마음과 정성이었다.
나의 작업은 종종 사람을 다치게 하고 마음을 상하게 했다.

이번 극단 Y의 연습 공개에 참여하면서 ‘과정에 집중한다.’는 태도로 작업에 임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과정이 아름다우려면 우리의 태도는 어때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되뇔 수 있었다. 일종의 정신적인 사치를 선물 받았다.
과정에 집중한다는 것은 각오가 필요한 일이다.
과정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을, 관계를, 사건과 사고를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먹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불의와 불화. 강제와 강요. 미심쩍음과 침묵. 누군가의 희생. 억압과 묵과. 무언의 합의와 배제.
내가 익숙해져 있던 것들에 대한 딴지에 기꺼이 참여했다. 곰곰하게 고려해야할 이슈를 선물받았다.

유난하고 사소한, 섬세하고 예리한 발언이 난무하는 자리에서 발견한다. 우리 팀 스스로를 관찰해야 할 소실점의 좌표를 다소 확인한다.

오늘 본 것을 프로젝트 공공연희의 언어로 옮겨온다면?

팀 내에 갈등이 발생한다면,
대리인을 당사자 외부에서 선정하여,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부여한다.
- 권리장전 中

감동적인 문구였다.
갈등에 대해 진지하게, 그 해결 방안에 대해 접근한 적이 있었던가.
하는 자성을 하게 하는 결정적인 한마디를 꼭 언급하고 싶다.

2019년 5월 31일 금요일

[화학작용 4] 실험관찰보고서 2탄 : 프로젝트 하자, 극단 배우들, 丙 소사이어티


극단 배우들의 실험,
“열정 없이 연극하기”에 대한
프로젝트 하자의 관찰

@ 이대 하람 스튜디오

▷ 극단 배우들 × 프로젝트 하자 연습현장 스케치 영상(http://bitly.kr/fkc6Gf)


극단 배우들의 연습에 참여한 소감을 이야기한다면?


1. 극단 배우들 팀은 ‘열정 없이 연극하기’를 시도하며, 전시 형태의 발표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열정을 명분으로 한 착취, 부당한 폭력이 없는 연극이 무엇일지 고민하며 배우들의 생각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전시 역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같이 고민하고, 생각을 떠올리게 만드는 질문들, 인터뷰 위주로 구성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2. ‘열정이란 무엇일까?’ 라는 질문으로 함께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열정은 추상적이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각자의 개념이 다를 것입니다. 크게는 1) 사랑하는 마음, 애정 2) 뜨겁고, 온도가 높은 것 3)에너지원, 동력 이라는 개념이 ‘열정’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는 지점이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문제가 될까요? 왜 우리는 열정 없이 연극하기에 대해 고민할까요?
2-1. 문제는 ‘열정’ 그 자체가 아니라, 열정을 왜곡 또는 강요하며 ‘착취’하려는 시스템이라는 쪽으로 의견이 정리되었습니다.

3. 열정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 연극하는 롤 모델이 없어서, ‘열정 없이 연극하기’가 잘 상상되지 않았습니다. 열정 없이 연극하는 주변 연극인들을 보면, 목적이 사라지고 수단만 남은 모습뿐이었습니다. 열정 없이 창작하기는 모든 세대를 아울러 창작자라면 고민해봐야 할 명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냉정으로 연극하기를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냉정으로 연극하기라는 것은 규약, 계약, 이성, 비판 등의 가치를 연극의 새로운 시스템 구축에 활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4. 행복 지수처럼 열정을 수치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열정의 수치가 낮다면, 그 사람은 어떠한 작업을 하고 있는지 조사해보는 것이 ‘열정 없이 연극하기’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열정의 기준점은 각자 다르기에, 열정을 이루고 있는 요소를 세분화 시켜 개인별로 공식을 만든 후 열정 지수를 도출해낼 수 있다면 열정 없이 연극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어떤 모습일지, 또한 열정으로 연극하는 사람들은 꼭 문제인지 다양한 롤모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하나의 가치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창작의 언어, 작업 방식을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오늘 본 것을 프로젝트 하자의 언어로 옮겨온다면?


1. 행복 지수라는 말이 나와서, 참관 다음 날 프로젝트 하자의 행복지수 요소들을 정리해봤습니다. 다들 요소, 중요도가 달랐습니다 1) 같이 하는 사람들: 가치관, 관심 분야, 작품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비슷한지, 수평적 작업이 가능한지 2) 돈, 경제적 대가: 지금 나의 경제적 여건과 작업을 통해 기대되는 수입을 동시에 고려 3)작업을 통해 얻는 즐거움 정도 4) 현재 나의 몸, 마음 건강 정도 (생각보다 중요한 변수였습니다) 이를 공식으로 정리한 예시는 아래와 같습니다.

 Ex) 작품과 나의 접점 개수 * 구성원(수평적 작업 가능성+몰입도) + 돈(기대수입+현재수입)/시간
 Ex) 건강(몸+마음)+구성원(가치관의 비슷한 정도+존중, 인정 가능성) + (나의 작품 애정도 * 너의 작품 애정도) + 기대 수입

2. 그동안 개인의 희생으로 ‘열정’이 유지되어 왔다는 점에서 프로젝트 하자는 깊이 공감하고, 실제로 이러한 문제점을 경계하며 화학작용 페스티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자는 ‘다수성, 보편성 없이 연극하기’를 시도하고 있는데, 다수성과 보편성이라는 단어 안에는 열정을 강요하는 집단의 폭력성, 기존 연극 시스템이 젊은 창작자들에게 바라는 온도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정이란 말로 포장된 착취 없이, 각자의 영역을 지키고 존중하며 적절한 거리감(냉정)으로 연극 만들기를 시도해보고 있습니다. 극단 배우들의 연습실 참관은 동시대의 창작자들끼리 맞닿는 지점을 고민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로운 시간이었습니다.



* * *

丙 소사이어티의 실험,
진정성 없이 연극하기에 대한 
극단 배우들의 관찰

@ 혜화 작업공간 섬


▷ 丙 소사이어티 × 극단 배우들 연습현장 스케치 영상(http://bitly.kr/qHoHwV)


丙 소사이어티의 연습에 참여한 소감을 이야기한다면?


‘진정성 없이 연극하기’를 맡은 丙 소사이어티의 팀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 팀은 연극 <신토불이 진품명품>의 워크샵을 ’진정성 없이 연극하기‘로 화학작용4 페스티벌에서 시연할 계획이라고 한다. 전시와 퍼포먼스 위주의 공연형식을 띠며 진정성 없이 비극을 다루는 연극을 기획 중이라고 한다.

‘진정성 없이 연극하기’는 어떻게 진행될 수 있을까? 우리가 코미디를 연극으로 시연한다고 할 때 웃기려고 하기 보단 진지하게 했을 때 오히려 웃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진정성’이란 ‘진지함’으로 연결되기도 하며, 예술에선 떼어놓을 수 없는 단어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에, 丙 소사이어티 팀은 이 진정성을 깨부수고자, ‘장난감’으로 연극하는 것을 선택하였다고 한다. 장난감으로 연극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지, 장난감으로 연출을 하는 것인지의 대한 뜨거운 토론들이 오갔으며, 장난감 기차와 고무 찰흙과 도미노가 부딪히면서, 아무 의도가 없는 것들이 부딪히며 그 장면들이 비극을 일으키며 연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들로 공연을 구상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에 각자가 생각하는 연극적인 것과 비극성들의 대해서 다뤄보고, 관객이 보고 느끼는 것이 진정성이 나타나지 않을 거면 어떻게 해야할 지 의논하는 시간들을 가졌으며, 유명한 희곡의 장면들을 아무 의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게 하면서 비극을 나타내면 어떨지의 대한 토론들도 이어갔다.

이에 ‘극단 배우들’은 ‘진정성’이란, 관객들이 이것을 보고 어떤 마음을 들게 하는지와, 결국 연극과 예술은 주제를 향해 달려간다고 하는데, 그 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조금 더 고민하면 모든 것들이 쉽게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자신들의 언어로만 토론해왔던 丙 소사이어티 팀도 참고해보겠다며 관찰을 마치게 되었다.

오늘 본 것을 극단 배우들의 언어로 옮겨온다면?


사실 ‘진정성 없이 연극하기’ 와 우리가 맡고 있는 ‘열정 없이 연극하기’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열정’이란 단어와 ‘진정성’이란 단어가 가지고 있는 힘이 비슷하며, 열정으로 임하고, 진지하게 임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렸을 적부터,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기 위해서 늘 들어와야 했던 말이라고 생각한다.

‘극단 배우들’ 역시 진지함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뭉쳐서 만든 집단이고, 이에 작업방식도 치열하고 진지하게 진정성으로 작업에 임했다.

이번 참관을 하면서 제일 많이 느낀 것은, 연극의 기초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연극의 기초, 연극은 즉 play, 놀이이다. 뛰어 놀고 그 안에서 몰입하면서 주제를 나타내는 것인데, 우리는 어느 순간 대단한 예술을 하기 위해서, 기초적인 것보다는 어떻게 창의적인 더 좋은 예술을 보여줄까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번 丙 소사이어티 팀을 보며, 연극의 기초. 사람들이 보고 놀이라고 생각하면서 진정성 없이 바라보는 것이 너무 어렵다 라는 생각도 들고, 화학작용 4를 발전시켜서 어떤 작업이 나오게 될 지 궁금하기도 한 시간이었다.

2019년 5월 29일 수요일

[화학작용 4] 실험관찰보고서 1탄 : 극단 Y, 콜렉티브 뒹굴, 프로젝트 하자


콜렉티브 뒹굴의 실험,
“PC함 신경 끄고 연극하기”에 대한
극단 Y의 관찰

@ 불광역 청년청

▷ 콜렉티브 뒹굴 × 극단 Y 연습현장 스케치 영상(http://bitly.kr/Itvkv8)


콜렉티브 뒹굴의 연습에 참여한 소감을 이야기한다면?


(단원 D) 청년청이라는 미완성의 공간을 (미완이라 함은 그 공간의 구성이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고, 뒹굴 팀조차 입주한지 며칠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서술한다. 뒹굴 팀이 청년청이라는 공간을 어떤 장소로 사용해 나갈지 개인적으로 기대하는 바이다.) 이용해 연습실 참관을 온 외부의 예술가들을 화성탐사 로봇들의 서사로 안으로 끌어들였다. 참여자들은 화성을 탐사하는 로봇들과 일치되며 미지의 공간인 청년청을 탐험하고 자신의 작업실로 만들고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수행하는 임무들 사이에 연극예술을 하고 있는 우리들의 서사가 한 겹 더 덧씌워지는데, 그것은 사실에 대한 관찰에 머무는 로봇들과는 다른 맥락으로 우리 내부에서 생겨나는 것들을 감지함과 동시에 확장시키는 시도였다.

(단원 B) 6-7년을 함께해온 팀이라서 그런지 자치규약이 꽤 세밀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자칫 딱딱해 질 수 있는 내용을 재치 있게 담아내어 열린 감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 그 내용이 상당부분 내가 지향하는 지점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작업 내 역할분담은 수직적 위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항목이 있어서 이 팀은 리더와 팀원들이 어떤 언어로 소통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연습 참여 당시에는 리더의 결정권에 대해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눈 것 같았고 그의 결정을 팀원들은 잘 수용하는 것 같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오늘의 프로그램을 짜고 진행을 맡은 사람이 우연히 리더였던 건가? 물어보고 싶다.
아무튼 현재 우리는 천천히, 충분히 대화를 나누고 결정하는 일을 뒹굴 팀은 성큼 걸어갔다. 짬의 차이인가? 음. 그런 것도 있겠지만 방법이 달랐던 것도 있는 것 같다. 각자의 방식에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번에 느낀 건데 '단원 B'한테는 천천히 가는 것이 안전하다.)
연습공간을 처음 만날 때 제한을 두지 않고 자유롭게 탐사하도록 했는데, 그 덕에 '다른 팀'이라는 거리감을 지우고 참여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그 공간 내에 나만의 작업실을 정하고 꾸미면서 다른 팀의 연습 참관이 아닌 체험학습에 온 것만 같아 마지막 즈음엔 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을 잘 밟을 수 있게 설계 한 것 같다. 개인의 창작능력을 원활하게 이끌어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단원 A)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프로그램 기획자의 커다란 그림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기본 자료로 준 내용들과 결론적으로 도출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오히려 프로그램 하는 동안은 어느 정도 잊고 참여할 수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프로그램의 결과물과 느낌은 내 고유의 도출이기도 하고 기획자가 의도한 도출이기도 했다. 이런 방식은 처음부터 어떤 방향에 갇히거나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는 지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형식이나 세계관(?) 등의 구축을 성실하게 해놓아 소극적이거나 참여를 주저하는 참여자들도 커다란 용기를 낸다기보다는 작은 동기나 의지로도 참여할 수 있었다.

(단원 C) 첫 만남부터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까지 설렘의 연속이었다. 개인적으로 뒹굴 팀은 어떤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그 생각들을 어떻게 발현시킬까 궁금했다. 이런 참여가 처음이라 좋은 긴장감과 부담감을 갖고 있었는데 반대로 더 집중해서 즐길 수 있도록 유도하는 프로그램 방식이 인상 깊었다.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은 나의 다양한 감각을 자연스레 사용하게 하였고, 나에게 더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다. 뒹굴 팀은 이렇게 사람을 만나는구나 처음 느끼는 이 신선한 기분으로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며 그들의 작업 속에 녹아들었던 것 같다.

오늘 본 것을 극단 Y의 언어로 옮겨온다면?


(단원 B) 청년청 공간에서 제한을 두지 않은 점과 시청각을 자극하는 요소가 있었다는 점, 한 달 동안 오를 계단을 하루 만에 올라보았다는 점, 사람의 음성이 아닌 카톡방의 로봇이랑 소통했다는 점 등등의 진행과정들이 잠들어있던 몸의 감각을 조금 깨워주어서 신이 났었다. 또 지향하는 점이 닮은 팀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어와 분위기는 우리와 완전 달라서 신기했다. 하긴 같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돌아가면서 한명씩 프로그램을 짜고 그가 만든 프로그램을 모두가 함께 실행하면서 어떠한 창작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이것도 충분한(충분하지 않을수도 있겠다. 많은-) 대화과정이 있었고, 이제는 어느 정도의 지점에 도달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원 A) 매번 팀원들이 돌아가며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타 팀원들이 참여하게 하는 것은 한 프로그램 당 팀원 수만큼의 새로운 생각, 개념, 언어를 수집할 수 있게 한다. 또 그것은 팀원들은 프로그램에 몰입하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가능해진다. 의식적인 발견, 반복되는 검열이 없어도 말이다. 이것을 거친 언어로, 그 순간만큼은 외부와 잠시 차단되고 기존의 방식들을 망각함으로써 수행되는 방식이라고 표현한다면, 우리 팀은 거꾸로 모든 것을 기억하고 밟아나감으로써 우리를 다시 재정립하고 새로운 언어를 찾아나간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되도록 기록하고, 물어보고, 되돌아가면서 우리만의 기호, 언어, 방식을 찾는다. 이러한 수행방식의 차이로 인해 팀의 분위기나 텐션, 서로를 대하는 방식, 협의하는 방식 등에도 다른 지점이 생겨나는 것이 신기했다.

(단원 C)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을 한곳으로 집중하는 과정이 3-4시간 동안 지루하거나 고통스럽지 않고 설렘과 즐거움으로 꽉 채워질 수 있도록 노력한 뒹굴 팀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단원 D) 극단 Y는 결과만큼 과정을 중요시하고, 구성원들이 평등하고 편안하게 예술 활동을 지속해 나가는 환경을 만들고자 노력해왔다. 뒹굴 팀의 내규는 그런 극단 Y의 지향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뒹굴이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해나가는지 궁금한 지점이 있었다. Y의 시간들 보다 더 긴 시간을 쌓아온 팀이라 상호간에 쌓인 맥락들이 더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PC하려 하지 않고 작업하겠다는 말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 PC하려 하지 않고 다양한 장치를 개발하겠다. 그 장치들을 개발하는 것이 PC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대체 뭘 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연습의 참관이라는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것에 대한 동의는 프로그램에서 생산된 결과물을(그 결과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내어놓는 것에 대한 동의와 등치될 수 없다. 만약 프로그램의 성격상 미리 결과물에 대한 공지를 할 수 없었다면, 끝나고 난 이후에 개개인의 의사를 존중해야 했을 것이다. (발표를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부분들이 무시되었고 이것이 뒹굴에서 말하는 PC하지 않기 위한 노력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음의 창작 다른 결과들을 내기 위해 과정에서 필수적인 어떤 것들을 생략해 버리는 것.


* * *


프로젝트 하자의 실험,
보편성 없이 연극하기에 대한 
콜렉티브 뒹굴의 관찰

@ 문래예술공장 3층

▷ 프로젝트 하자 × 콜렉티브 뒹굴 연습현장 스케치 영상(http://bitly.kr/aqa7hq)

프로젝트 하자의 연습에 참여한 소감을 이야기한다면?


배우 각자의 존(zone)으로 구성된, 참여형 공연에 가까운 연습 오픈이었다. 4개 존의 제목은 각각 ‘디디’s 키친,’ ‘천칭자리,’ ‘모모의 팔레트,’ ‘지구born’이었다. 뒹굴리안들은 프로젝트 하자의 발표 전 첫 참여 관객으로서 연습실 오픈에 함께 했다. 존마다 마련되어있는 팀원 각자가 제시하는 이야기와 방법을 참여자들과 함께 경험해보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디디‘s 키친은 설정된 상황에 퍼포머와 참여자가 관계를 맺는 방법론을, 천칭자리는 하나의 키워드(그 존의 주인이 관심 있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양식으로, 구성되었다.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질문에 그림으로 답해보는 시간을 갖는 모모의 팔레트와, 계단의 층을 활용하여 개인의 기분의 층을 표시한 사진 전시 및 도슨트 퍼포먼스 형식의 지구born도 있었다. 개인의 기억 또는 개인의 감각을 그림이나 논의, 일상적인 방식으로 다정하게 풀어내어, 관객 역시 자신의 감각을 더듬어볼 수 있는 시간에 가닿을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하자는 ‘보편성이 아닌 개별성으로 작품을 만든다’는 실험 주제를 가지고 있다. 집단, 보편이라는 말 아래 쉽게 뭉개버리는 ‘개인’을 조명하기 위하여 하자는 팀원 개개인에게 집중해보는 과정을 거쳐 온 것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견되는 지점을 관객에게도 경험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방법론을 택한 것 같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소소하고 일상적인, 그렇지만 개인이 진심과 애정을 듬뿍 쏟은 각자의 키워드와 재료들이 하나씩 참여자들에게 소개되었다.

프로젝트 하자라는 팀은 ‘따뜻함’이 베이스가 되어있는 팀이라는 느낌도 받았다. (우리 팀에 없는 또는 부족한 질감의 것이었다!) 개별성, 개인에 대해 묻고 답해가는 과정이 매우 정성스럽게 다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게 진심으로 몰두해주고 집중해주는 시간을 가져온 것 같았다. 그런 개별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관객과 만나는 때에도 ‘하자의 힘’이 되리라는 기대도 되었다. 지극히 자기 얘기를 담담히 이어가면서, 관객에게도 그러한 시간을 열어주는 작업이 나오지 않을까.

오늘 본 것을 콜렉티브 뒹굴의 언어로 옮겨온다면?


하자가 팀원 각각의 이야기를 각자의 언어로 풀어내고 그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연결하는 작업을 했다는 점에서 뒹굴의 작업 방식과 유사한 점이 있었다. 그렇지만 피드백 과정에서 두 팀의 색깔이 어떻게 다른지가 관찰되는 것이 재미있었다. 비슷한 연습 방법에서 출발하여 전혀 다른 결의 과정과 결과를 냈다는 생각이 들어 흥미로웠다.

뒹굴도 ‘개별성’이란 키워드로 설명 가능한 지점이 있지만, 이 개별성이란 말이 하자에서 사용될 때와 뒹굴에서 쓰일 때 전혀 다른 질감인 것 같다. 뒹굴에게 개별성은 개별 작업자의 창작 방법론, 콜렉티브를 구성하는 개인 작업자로서 개별 창작 언어가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특징으로 구현된다. 뒹굴의 개별성은 관객을 호명하는 때에도 드러나는데, 섬세하게 타겟팅되어 초청된 (소수) 관객에 초점을 맞추는 작업을 주로 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자가 작업자의 개별성과 참여 관객의 개별성을 만나게 하는 지점이 더욱 흥미롭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1) 뒹굴은 개인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흥미가 있다기보다 개인의 ‘방법론’을 찾고 모으는 데에 흥미가 있으며, 2) 참여자가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여 들어가는 경험보다는 오히려 특수한 개인으로서 거리를 두도록 하여 사회/집단적 맥락을 바라보는 경험을 설계하는 것에 주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프로젝트 하자가 개별성을 키워드로 삼으며 개인의 이야기와 내면이 잘 보이는 작업을 한 것이 뒹굴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나도 그런데’ 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이 있었으며, 피드백 시간에도 ‘힐링’이었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개인의 감각과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개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 대한 갈증이 관객에게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뒹굴이 전반적으로 감정이나 내면세계에 대한 따스함이 매우 부족(하다못해 춥고 시린 작업)하기 때문에, 가끔은 잊는 지점이기도 하다. 참여자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것들’을 꺼내 볼 수 있는 시간, 그것을 꺼낼 수 있도록 적절한 판을 까는 것, 그리고 꺼낸 것을 유의미하게 구성하는 것 역시 작업자가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하자의 작품을 통해 다시금 확인했다.

하자의 퍼포머가 뒹굴에게 ‘퍼포머가 어떻게 할 때 참여자가 마음을 연다고 생각하는지’ 질문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참여자가 in 할 수 있는 환경, 예컨대 퍼포머가 참여자와 관계 맺는 방식, 공간의 빛과 음악 세팅, 타이밍 조절 등을 기획자이자 퍼포머로서 확실하게 ‘결정’하는 것이 도움이 되더라는 이야기를 나누었더랬다. 뒹굴이 퍼포먼스 자체와 더불어 공간 세팅이나 맥락에 관심을 크게 가지는 편이라 그렇게 대답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프로젝트 하자 팀원들과 질문을 주고받고 피드백하며, 동시에 우리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하고 답하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무엇에 집중하고 보아내는지, 우리 팀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작업하는지 까지를 관찰하고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대 동료 작업자들의 문제의식과 방법론을 체험해보고 같이 이야기해보는, 흔치 않은 기회를 가질 수 있어 즐거웠다.

2019년 5월 25일 토요일

[화학작용 4] 함께-인터뷰 3탄 : 극단 Y, 프로젝트 공공연희, 콜렉티브 뒹굴


‘그냥’ 해보기,
감각을 깨우기

- 극단 Y × 프로젝트 공공연희


  극단 Y와 프로젝트 공공연희(이하 공공연희)는 작업자 개인의 주체성과 능동성에 대한 감각을 복구하는 작업들을 이어왔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있다. 거대한 도시의 사이클 속에서 이런저런 복잡한 관계들을 감당하며 살다 보면 온전한 나의 감각을 유지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몸의 예술을 하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나에게 가장 편한 상태가 무엇인지를 잃어버린 채 흘러가는 시간들이 길어질수록 삶과 예술 사이의 괴리는 자꾸만 커지게 된다.

  공공연희는 2018년 결성된 프로젝트 팀이다. 기획자 옥민아를 중심으로 완전히 새로운 멤버들이 모여 2019년, 프로젝트 공공연희로 재탄생했다. 독특한 것은 연극하는 사람들 위주로 구성된 팀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팀이라는 점이다. 연기자, 작가, 음악인, 웹툰 작가, 디자이너, 영상 감독 등이 서로 교류하며 다원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공공연희는 하나의 집약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기 보다는 함께 발굴한 이슈를 놓고 각자의 방식대로 콘텐츠를 만드는 방향을 지향한다. 옥민아 대표는 그것을 하나의 커다란 꾸러미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라 표현한다. 하나로 뭉쳐진 덩어리가 아니라 개별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개체들이 커다란 매듭 속에 엮여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면 되지 않을까 싶다.
  공공연희는 팀원들 자신을 포함해 청년예술을 하는 동료들의 작업이 어느 순간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게 되는 점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신선하고 도전적인 시도를 하거나, 감각적이거나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기획하는 일이 점점 없어지고 타성에 젖어버리게 되는 문제에 경계심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문제의식 속에서 공공연희는 2018년에 감각스트레칭이라 명명한 프로젝트를 감행했다. 반복되는 루틴 속에서 잠들어버린 감각을 두드려 깨워보자는 것이었다. <틔우자 씨:발아> 라는 재치 있는 부제를 달고 있는 감각스트레칭은 기본적으로 멤버들이 함께 도시농업을 하며 24절기의 순서에 따라 처서미식회, 한로상영회 등의 소소한 행사들을 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천천히 변화하는 자연의 리듬에 신체의 리듬을 맞춰 보면서 무뎌진 오감을 하나씩 깨워나가는 과정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딱딱하게 굳은 감각을 바깥쪽을 향해 천천히 늘리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스트레칭이라는 명칭은 매우 적절하게 느껴진다.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는 것은 곧 나 자신으로 온전하게 돌아오는 것이기도 하다.

  Y는 2018년 연극계 미투 운동을 전후로 불어온 새로운 페미니즘의 바람 속에서 개인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고민을 지속해온 것으로 보인다. 자기결정권은 자신의 사적 영역에 관련된 사항들을 다른 주체의 간섭 없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이다. 얼핏 당연한 권리처럼 들리지만, 사실 우리는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매우 많은 부분들을 간섭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외모, 체형, 말투, 행동거지, 사생활 등등. Y는 불쾌하고 부당한 오지랖에 대해 페미니즘이 날카롭게 벼린 비판 의식을 바탕으로 간섭받지 않을 권리에 대해 발언해왔다. 탈코르셋을 다룬 <미의 기준>(2018)이 대표적인 예이다. 美의 기준을 me의 기준으로 수복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긍지를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 
  Y는 한국여성의전화 강연을 들으러 갔다가 리플렛에서 충격적인 문구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실수할 권리가 있다.’ 연습실에서 더 온전하거나 완벽한 존재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거나 ‘잘 모르겠다’ 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으려 애썼던 세월이 무상해지는 순간이었다. 이에 큰 깨달음을 얻은 Y는「권리장전」을 통해 연극을 제작하는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모두에게 완벽하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천명했다. 어쩌면 완벽하지 않을 권리를 통해 역설적으로 우리는 온전한 존재가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 나는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의문을 제기할 권리가 있다.
하나, 나는 거부할 권리가 있다.
하나, 나는 실수할 권리가 있다.
하나, 나는 완벽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 2018년 극단 Y가 작성한 「작업에 앞서, 권리장전(🔗)」

  공공연희는 지원 사업의 사이클에 들어간 예술인은 아직 뭔가를 만들기도 전에 무엇이 부족한지부터 생각하게 된다고 말한다. 사업지원서를 써본 사람들이라면 깊이 공감할 것이다. 내가 심의 기준에 얼마나 미달하는지, 그 기준을 넘기 위해서는 무엇을 극복하고 보완해야 하는지를 집요하게 되물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이 미달태에 놓여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공공연희는 지원 사업에 떨어졌을 때 차라리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고 말한다. 지원 사업은 창작을 시작하는 시점과 발표하는 시점을 결정해버림으로써 예술가들을 정해진 스케줄 속에 가두어버리는 측면이 있다. 떠오른 아이디어를 바로 실행하지 못하고 마냥 기다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공연희는 기다리지 말고 그냥 시작해버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냥 하면 된다. Y의 맥락으로 오면 이 잠언(?)은 조금 다른 색채를 띠게 된다. <그냥 청소하는 것도 필모그래피가 되나요>(2018)의 세 번째 단편인 <그냥요>에는 연습 후 회식 자리에 참석하기를 강요하는 선배에게 거절의 뜻을 밝히며 “그냥 술 마시기 싫어서요.” 라고 말하는 후배가 등장한다. 그럴싸한 핑계를 대는 대신 “그냥 싫다” 라고 말하는 것은 꽤나 망설여지는 일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싫으니까 그냥 싫어, 라고 당당하게 대꾸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Y와 공공연희는 우리에게 온전한 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기다리지도 눈치보지도 말고 그냥, 해보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충고를 건네주고 있는 듯하다.




예술가 비슷한 청년과
연극 비슷한 소통

- 프로젝트 공공연희 × 콜렉티브 뒹굴


  프로젝트 공공연희와 콜렉티브 뒹굴은 이른바 예술하는 인간들의 존재론에 관심을 보이는 팀들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존재론이라는 단어는 다소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바꿔 말하자면 예술하는 인간들이 과연 어떤 인간들인지에 대한 탐구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좀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예술가 일반이 아니라 스스로의 모습과 닮아 있는 특정 세대의 예술가, 즉 청년예술가들이다.

청년예술가, 그들은 누구인가? 세대론의 종언이 운위되고 있는 시대니만큼 ‘청년’이라는 레떼르는 공연히 성가시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청년은 그저 담론의 산물이거나 공모행정의 용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청년(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있지만, 그 논의들은 청년예술가가 누구인지를 사실적으로 설명해주기보다 청년예술가는 어때야 한다는 당위로서 작동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런 까닭에 청년예술가는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그 언어들로 인해 점점 지쳐가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공공연희는 그런 피로감을 가로질러 청년예술가에 대한 탐구를 지속하려 하는 듯이 보인다. 2018년 감각스트레칭 프로젝트를 통해 감각을 깨우는 문제에 초점을 맞췄던 것에서 한걸음 나아가 이번에는 영감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싶다고 말한다. 청년예술가의 영감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공공연희에 따르면 사실 감각과 영감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개념들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영감이 밖에서 번개처럼 찾아오는 것으로 상상하지만, 공공연희는 그것이 어딘가에 보이지 않은 채로 잘 숨겨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워보고 있었다. 곧바로 눈에 띄진 않지만 내 눈이 밝아지면 찾아낼 수 있는 어떤 것.

  공공연희가 꿈꾸고 있는 것은 청년예술가들이 영감을 발굴해내는 어떤 순간들을 포착해내는 것이다. 서울에 살고 있는 어떤 청년예술가로 가정된 사람의 방을 아주 디테일하게 구성해보고, 그 공간을 관객들에게 전시의 형태로 오픈하는 작업을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대담한 관객이라면 그 방에 놓여 있는 노트북을 열어 아이디어를 끄적여 놓은 메모를 읽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청년예술가의 일상적인 공간을 시뮬레이션함으로써 거기에 깃들어 있는 틀 잡히지 않은 영감에 접촉해보는 것. 공공연희는 그러한 실험을 통해 청년예술가가 실제로 어떤 느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지를 나름대로 규정해보고자 하는 듯 했다. 예술에 대한 영감을 향해 서서히 전도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는 청년. 공공연희가 들려준 구상 속에서 보이는 것은 그런 예술가 비슷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각자의 영감은 각자의 작업에 있고, 각자의 작업은 작업을 하는 테이블과 방과 집에 있다면, 굉장히 보통의 존재인 청년예술가 한 명의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은 거예요. 어떻게 사는지, 몇 평에 사는지, 뭘 입고 먹고 사는지, 한 달에 얼마를 벌고 사는지.”
- 사무국 × 프로젝트 공공연희 인터뷰 중

  뒹굴의 경우에는 청년예술가를 둘러싼 상황을 통해 역으로 청년예술가-됨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작업들을 이어왔던 것 같다. <바로 그 얘기>(2016)는 지구가 멸망한 후 신인류가 구인류의 잘못에 대해 재판한다는 내용을 담은 공연이었다고 한다. 1621번째 재판에 이르러 피고석에 선 것은 공연예술가였다. 판사는 지구가 망해가는 판국에 연극이나 올리고 있었던 이유에 대해, 그 연극이라는 것의 가치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심문한다. 공연예술가는 연극의 시대적 소명 내지는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 등을 항변의 근거로 삼지만, 기록으로 남지 않은 것은 물론 연극을 기억하는 관객들도 극히 소수인 상황 때문에 그의 변론은 궁색해져간다. (이상의 내용 정리는 박종주가 drama-in.kr에 기고한 리뷰(🔗) 「어느 재판의 기록」을 참고한 것임을 밝힌다.)

  한편 <연기의 해로움에 관하여 1>(2016)은 연극에 재능이 없지만 지독하게 연극을 사랑하는 청년예술가들이 지원금 20만원을 놓고 싸우는 이야기였다고 전한다. 보지 않아도 능히 짐작이 되는 상황이라 할 것이다. 이처럼 뒹굴은 예술의 가치, 혹은 청년예술가들의 존재의미를 코믹하고 시니컬한 터치로 다루는 작업들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연극이라는 박스box의 효용성을 계속해서 문제 삼는 뒹굴의 작업에서는 메타연극 비슷한 효과들이 발생한다.

  하지만 메타연극도 어쨌든 연극인지라, 연극도 아니고 연극이 아닌 것도 아닌 뒹굴의 공연 형식에 정확히 들어맞는 워딩이라 하기는 어렵다. 의외로 뒹굴의 공연 형식을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은 그들의 초창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을 때 발견된다. <니나노 뒹굴>(2012)을 포함한 연극 비슷한 소통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뒹굴은 그 시절부터 연극 비슷한 것을 하고 싶기는 하지만 연극을 왜 해야 하는지 해결이 되지 않으면 연극을 할 수 없다, 라는 골머리 아픈 숙제를 풀고 있었던 것 같다. 반대로 말하자면 뒹굴의 역사는 그 숙제를 풀어가는 역사였다고 할 수도 있다. 예술하는 인간이라 자존하고 싶다면 우선 그 예술이라는 것의 가치를 찾아내고 증명해야만 한다는 것. 뒹굴에게 연극 비슷한 소통으로 표현되는 어떤 공연들은 그 증명의 수단이자, 증명의 결과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2019년 5월 23일 목요일

[화학작용 4] 함께-인터뷰 2탄 : 丙 소사이어티, 극단 배우들, 극단 Y


진정성은 어디에 있고,
열정은 어디에서 오나?

- 丙 소사이어티 × 극단 배우들


  丙 소사이어티와 극단 배우들(이하 배우들)은 청년연극인들을 종종, 아니 꽤 자주 후려치곤 하는 어떤 언어들을 의심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팀들이다. 현재 호명되고 있는 청년 세대가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청년연극인들은 착취적인 환경에 대해 점점 예민해지는 감각과 변하는 것이 없는 현실 사이의 간극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 중이다. 사회에 진입한 청년들에 대한 착취는 비단 임금 체불이나 신체적 폭력 같은 물리적인 측면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어떤 기만적인 논리가 위아래를 순환하며 작동하고 있다. 기성이 되어가는 연극인들은 자기들도 가진 게 없다고 주장하며, 연극판에서 살아남으려면 너희들도 무언가를 내놓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무엇을 내놓으라는 것일까?   

  병소는 그 물음의 진위에 진정성에 대한 요구가 깔려 있다고 본다. 진정성은 정의하기 쉬운 개념은 아니다. 병소에 따르면 사람들은 무엇이 진정성인지는 몰라도 진정성 없는 것이 무엇인지는 기가 막히게 잘 안다. 그러니까 뭔지는 몰라도 요구할 수는 있는 것이 진정성인 것이다. 그래서 진정성을 내놓으라는 요구에 대한 대답도, 그것이 대체 뭔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도 난망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한편 배우들은 청년연극인들이 늘 열정을 내보이라는 요구에 시달리고 있다고 본다. 연극이 너무나 하고 싶었던 배우들끼리 모여든 팀이라 오히려 그런 문제를 조기에 파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배우들의 멤버들은 극단에 들어가거나 오디션을 본다고 해서 바로 공연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팀을 만들었다. 병소와 마찬가지로 배우들 역시 초창기에 프린지 페스티벌을 거쳐 갔다. 2017년에 프린지에서 <죽음과 소녀>의 일부를 발췌해서 용서와 죄책감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공연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신생 청년팀이 지속적으로 공연을 이어가는 건 쉽지 않았다. 열심히 고민해서 지원서를 내도 듣보잡은 쳐주지 않는 현실, 연극을 자꾸 멈춰야 하는 현실 앞에서 유일하게 지속되는 것은 연극을 사랑하는 자기 자신들의 마음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마음은 양날의 검이 되기 마련이다. 어쨌든 계속 연극을 해야겠다는 열정은 스스로를 인질화한다. 임금이 무이자 할부마냥 찔끔찔끔 지불되어도, 이름 있는 연출이 연습실에서 재떨이를 집어던지려 들어도 참아야 한다. 참지 못하는 자에게 돌아오는 최후의 질문은 “너 열정이 부족한 거 아니야?”일 뿐. 우리가 이쯤 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열정이든 진정성이든 그것을 내보이라고 요구받는 것은 언제나 권력 관계의 약자들이라는 점이다.

  프린지 페스티벌 등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던 병소는 2014년 아오병잉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된다. 아오병잉은 아시아+오프+병맛+잉여를 줄인 말로, 병맛 감수성이 인터넷을 넘어 하나의 문화로 형성되고 있던 시점에 연극도 잉여성이나 무용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서 열린 축제였다. 병소는 적절한 판이 깔린 만큼 제대로 되지 않은, 한 마디로 진정성이란 걸 갖추지 않은 연극을 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저한테 왜 그러세요>였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사람들을 던져놓았을 때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는 3부작 꽁트였다.

  1부에서는 강의실에서 볼 수 있는 일체형 책상의 앞뒤를 돌려 뒷사람이 앞사람의 책상을 써야 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앞사람이 움직이면 뒷사람이 글씨가 자꾸 삐뚤어지는 식이었다. 2부에서는 차분한 요가 교실에 뽁뽁이를 깔아놓은 상황을, 3부에서는 좁디좁은 입시 무용학원에서 아이들이 발레 연습을 하는 상황을 보여줬다. 한 마디로 주어진 시추에이션 탓에 자꾸 억울해지는 사람들을 코믹하게 보여주는 공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메시지를 주려는 강박 없이, 자꾸 망하고 어긋나는 병맛스러운 상황만을 보여주고 거기에 연극이라는 이름을 붙여본 것이다. 병소는 그것이 진정성이라는 것에 대한 강박 없이 연극을 만들어보았던 초기의 시도 중 하나라고 회상한다. 이때 진정성은 예술을 대하는 예술가의 미적/윤리적 태도로서의 진지함, 또는 심각함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열정과 진정성은 예술가에게 내장되어 있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상상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병소는 한국에서 진정성이라는 말은 영어에서 진실된 마음을 뜻하는 Sincerity와 진품인 것을 뜻하는 Authenticity가 결합된 상태로 통용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나한테 너의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너는 텅 빈 가짜일 것이다, 라는 논리가 암암리에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배우들이 말하는 열정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열정과 진정성은 평가 권력을 지닌 누군가에게 보여주어야 할 자기증명의 수단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반대로 말해서 내가 열정이 있는지 없는지, 진정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정할 수 있는 권한이 나를 지켜보고 평가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라면, 열정과 진정성은 처음부터 내 안에 내장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여기에 있음과 동시에 또 저기에 있음을, 혹은 잠시나마 여기를 저기로서 경험하기 위해 만들어낸 게 이 연극이라는 가상이 아닐까?”
- 2018년〈의자, 눈동자, 눈먼 예언자〉공연 대사 중
  그러면 이 익숙하고 기묘한 단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병소는 진정성이 구성되거나 발생하는 것이라고 본다. 내 안에서 끄집어내어 보여주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생기는 어떤  가상적 효과로서 진정성을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책상을 무대로 썼던 <꼬마 짱꼴라>(2015)에서 인간을 말로 다룬 <노동집약적 유희>, 이오네스코의 <의자들>에 나오는 빈 의자들의 사물성을 차용한 <의자, 눈동자, 눈먼 예언자>에 이르기까지 공간과 사물과 신체가 특정한 방식으로 만났을 때 발생하는 독특한 효과들을 탐구해온 병소는, 이제 진정성 또한 그러한 효과들 중 하나로 볼 수 있는지를 실험해보고자 하는 듯하다.


   

우리가 가부장 없이
협력하려면

- 극단 배우들 × 극단 Y


  극단 배우들과 극단 Y(이하 Y)는 작업 환경 내에 존재해온 권위주의와 수직적인 위계의 문제를 직시하고 대안을 모색 중인 팀들이라는 점에서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얼핏 보면 연습실은 평평한 것처럼 보이지만, 젊은 집단으로 분류되는 팀 내에서도 보이지 않는 위계와 불평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역할과 보직에 따라, 나이와 서열에 따라, 소속과 성별에 따라…… 함께 작업을 하다가 문득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만드는 요인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작업 환경 내의 위계와 불평등으로부터 파생되는 문제를 인간적으로 쇼부 쳐서 해결하는 식 말고, 구조적 대안을 고민하는 팀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배우들은 말 그대로 배우들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팀이라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2017~2018년경에는 ‘창작집단 위선자’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팀이지만 2019년에 이르러 스스로의 정체성을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이름인 ‘극단 배우들’로 개칭했다. 연출이나 기술 스탭 등의 보직을 한 사람이 고정적으로 맡지 않고 매 공연마다 상의를 통해 정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대화를 통한 공동창작을 기본 베이스로 한다는 점도 이 팀이 멤버들 간의 평등한 관계를 지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집마차>(2018)는 멤버들 각자의 에피소드를 모아 풀어낸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배우들은 연출자나 대표자에게 위계적인 중심을 부여하는 대신 배우 간의 평등한 소통을 중시하며 작업을 해온 것처럼 보인다.
  강윤지 연출의 1인 극단인 Y는 매 작업마다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러브콜을 보내 팀을 꾸리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Y는 수직적인 위계질서와 권위주의를 상징하는 존재로서 가부장을 지목한다. 가부장은 기본적으로 한 가족을 대표하는 사람을 가리키지만, 보다 의미를 확장하여 어떤 공동체 내에서 의사결정의 권한과 책임을 독점하고 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Y는 연극계가 가부장에 의한 규율과 관리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측면들을 들여다본다. 페미니즘과 젠더감수성의 문제를 가장 중요한 화두로 가져가고 있는 Y는 가부장에 의한 통치의 문제를 폭력적인 기율紀律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백스테이지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위계 폭력들은 선배님이니까, 연출이니까, 어디 학과 교수니까, 연극은 계속 되어야 하니까 하는 이유 등등으로 정당화되곤 한다. 가부장은 가해행위를 정당화하고 피해호소를 억압하는 바로 그 힘을 상징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Y가 이야기하는 가부장제, 혹은 가부장성의 문제는 연출 중심주의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현재 연극계에서 하나의 팀을 대표하는 존재로 간주되는 것은 대부분 연출이다. 연출은 공연의 미학적 완성도를 책임지고 감독할 뿐만 아니라 작업에 있어서의 의사결정과정을 이끄는 직책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모든 결정권은 연출에게로 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권한이 막대한 만큼 책임도 막대하다. 마치 가장이라 불리는 존재가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처럼, 가부장에 의한 통치를 당연시하는 연극 사회 내에서 연출직을 맡는 사람은 한 팀을 책임질 만한 능력과 카리스마를 가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곤 한다. 강윤지 연출은 나이가 어린 + 여성 연출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연습실에서 엄격하고 냉정하고 잔인하게 디렉션을 하는 편이 유리할 때가 많았다고 말한다.
  고정적으로 연출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는 배우들의 경우에는 팀의 수평적인 관계성 자체가 가부장성을 중화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디렉션을 담당한 멤버와 디렉션을 받는 멤버 사이의 소통이 즉각적으로 솔직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소통이 가능한 이유는 이 팀이 기본적으로 배우라는 존재를 연출이 조종하는 인형이나 표현 도구가 아니라 독립적인 크리에이터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연을 만드는 작업은 누군가의 안배에 의해 미리 결정된 사항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배우라는 크리에이터들이 매번 새롭게 부딪혀가며 바꿔가는 과정 속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배우들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즉흥적인 에뛰드 연습을 통해 대본상에 없었던 장면들을 그때그때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한다.
“저희끼리 있으면 기본적으로 즐겁긴 해요. 포지션 상 동등하고, 서로의 어려운 점을 잘 알고 있어요. 다른 팀에서 할 때에는 연출부와 배우진 사이의 마찰이 있거나 선이 있게 마련인데, 저희 팀에서는 그 선 자체가 둥글게 되어 있는 것 같아요. 관계성이 편하다고 해야 할까요.” 
- 사무국 × 극단 배우들 인터뷰 중
  Y는 2018년 11월 평등한 제작환경을 위해 「작업에 앞서, 권리장전」을 작성한 바 있다. 가부장성으로 대표되는 작업 내 위계폭력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를 넘어 구조의 문제임을 인지하고, 이를 예방하기 위해 구성원들 각자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권리들의 세목을 명시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세상에 완전히 수평적인 관계라는 것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수직적인 위계, 서열, 권위의식이 거의 자연화되어 있는 이 연극판에서 대안적인 모델을 찾고자 하는 두 팀의 시도는 귀하고 소중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가부장 없이도 되던데? 라고 쿨하게 대꾸할 수 있는 팀들이 늘어날수록 우리가 하는 일들을 사랑하는 것이 좀 더 편해지지 않을까.

인터뷰 정리: 김민조

2019년 5월 22일 수요일

[화학작용4] 함께-인터뷰 1탄: 콜렉티브 뒹굴, 프로젝트 하자, 丙 소사이어티


모든 ‘각자들’의 연극,
너와 나의 관계성

- 콜렉티브 뒹굴 × 프로젝트 하자


  콜렉티브 뒹굴(이하 뒹굴)과 프로젝트 하자(이하 하자)의 출발점에는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다. 정극 중심으로 공연을 올리는 대학 극회에서 떨어져나온 이른바 부스러기들이 헤쳐 모여 만들어낸 집단이라는 점이다. 뒹굴은 나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극회에서 활동하다가 정극이 정말 재미있는지, 이 시대에 맞는 연극인지에 대해 회의를 느낀 사람들이 모여든 팀이라고 한다. 하자 역시 비슷했다. 정극을 만드는 과정이 성향상 맞지 않는 데다 단체 생활마저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야합했다. 연극다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서도 연극을 하고 싶었던 두 팀의 결성, 때는 2012년이었다.

  대학 극회를 발판으로 삼아 연극계에 진출하는 청년들은 많다. 이 과정은 흔히 아마추어가 프로로 성장하는 서사로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뒹굴과 하자는 세미-프로 양성소에서 착실히 연극수업을 받으며 성장한다는 줄거리를 조기에 절단했다. 그럼, 이 절단된 단면에서는 과연 무엇이 자랄 수 있을까? 그래도 여전히 생장점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뒹굴과 하자가 삐뚤빼뚤하게 걸어온 길은 그런 질문들과 씨름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왜 항상 내 삶을 버려두고 예술에만 집중하는 식으로, 혹은 예술을 잘 하는 식으로, 혹은 잘 해서 뭔가 대단한 걸 만들어내기 위해서 너무나 큰 압박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지, 의문을 품으며 모이게 되었습니다.”
- 2012년 〈니나노 뒹굴〉공연 당시, 성지수 대표의 발언
  뒹굴과 하자의 다른 공통점은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지길 거부하는 팀이라는 것이다. 무릇 연극이라 하면 텍스트든, 연출의도든, 극단 기조든 간에 구성원들의 신체로 하나로 끌어당기는 소실점을 향해 달려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뒹굴리안들은 초창기 〈니나노 뒹굴〉 때부터 이미 팀원들이 하나의 이상향을 향해 기-승-전-결을 거쳐 가는 작업 방식을 지양했다고 회고한다. 연극이 덩어리로 굴러가기 시작할 때 그 안에서 무언가가 상실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뒹굴이 예술이라는 이름의 덩어리로부터 꺼내오고 싶었던 것은 각자의 것이었다.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을 가져와서 좋은 점을 찾아보고, 그것을 재료 삼아 놀아보면서 발전을 이루는 형태로 작업해왔다고 한다. 2016년에 뒹굴은 그렇게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을 갖고 드나들 수 있는 팀, 혹은 어떤 움직이는 장소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콜렉티브collective를 달게 된다.

  덩어리 상태로 연극을 하지 않겠다는 포부는 하자에게도 중요했다. 단체를 만들지 않고서도 연극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꿈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2012~2014년 대학 동아리로 활동하던 시절 하자가 도전한 것은 위계 서열 없는 수평적 상태였다. 무조건 창작극을 하고, 작업을 위해 모이면 먼저 서로를 인터뷰한 다음 맞물리는 부분을 가지고 주제를 도출한다. 이슈나 주제를 미리 정해놓지 않고 만나서 정해가는 방식을 고집한 것이다. 하자가 방법론적으로 중구난방을 취한 이유는 명확해 보인다. 많은 공연팀에서 연출이 그런 역할을 맡고 있듯이, 이슈 셋업이 가능한 누군가를 상정할 경우 필연적으로 목소리 비중에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신생팀들이 자신들만의 메시지를 찾기 위해 어떤 의식의 단일화를 꾀하는 것과 달리, 하자는 목소리의 다양성을 향해 팀원들의 관계를 느슨하게 풀어서 넓히는 방향을 취했던 것 같다.
  이른바 연극다운 연극들의 성소가 극장이라면, 뒹굴과 하자는 우선 극장을 놓아두고 밖으로 떠나는 방법을 취했다. 뒹굴의 첫 공연은 포이동 화재 재건 1주년을 기념하는 ‘벽돌문화제’(2012)에서 트럭 두 대를 놓고 짧은 퍼포먼스를 가진 것이었다. 초창기에 뒹굴은 관객이 어둠 속의 눈으로만 존재해야 하는 권위적인 극장 공간을 벗어나 관객들과 가깝게 호흡을 나눌 수 있는 장소들 속으로 들어가고자 했던 것 같다. 같은 해 대학교 자치도서관에서 열린 〈니나노 뒹굴〉의 경우에는 관객들과 음식을 나눠먹고 사진을 찍고 체조를 같이 하는 참여 코너가 포함되기도 했다. 이게 연극인지 사회적 프로젝트인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논다면 관객과 함께 놀고 싶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가겠다는 생각은 그 이후로도 죽 이어져온 듯하다. 관객에게 배심원을 시켰던 〈바로 그 얘기〉(2016), 관객에게 요정을 돕는 베타테스터 역할을 시켰던 〈조커카드 베타테스터 파- 티〉(2017), 관객에게 흡연자 노릇을 시켰던 〈제2회 흡연자 인권대회〉(2019) 등등.
  관객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하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공터로 나갔던 하자는 이후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거리극을 하기도 하고, 대안학교나 난곡동 태권도 학원 등등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관객들을 만났다고 한다. 하자는 관객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는 대신 1대1로 봐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1대1의 관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상태로. 뒹굴이나 하자나 그들의 팀을 구성하는 원리를 관객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해보려 노력해온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라는 덩어리로 보는 대신 너와 내가 가진 각자의 것들을 보고자 하는 노력, 혹은 관계성의 실험. 2012년으로부터 7년 간 지속하고 있는 두 팀은 여전히 초창기에 발견했던 생장점을 구불구불 옮기며 자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주류의 몸이
무대 위를 서성일 때

- 프로젝트 하자 × 丙 소사이어티


  프로젝트 하자와 丙 소사이어티(이하 병소)는 팀 이름에 이미 자기정체성이 투사되어 있는 팀들이다. ‘하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연극을 하고 싶은데 왜 못 하지, 하는 푸념만 나누다가 ‘하자!’ 라고 결의했을 때의 에너지를 담고 있기도 하고, 어딘가 조금씩 결함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점에서 하자瑕疵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하자의 전서아 연출은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비주류의 정체성과 감성을 지닌 팀이었던 것 같다고 회고한다.

  병소의 이름에도 그러한 비주류 정체성과 감성이 투사되어 이다. 병소 역시 2012년에 결성되었는데(2012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당시는 한창 병맛이라는 유행어가 인기를 끌던 시기였다. 술병을 굴리며 지병持病을 앓는 사람들, 하지만 그런 자신을 보며 하하하 우습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병맛 감성. 최종적으로는 갑과 을의 먹이사슬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아예 병이 되겠다는 선언으로서 丙 소사이어티는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위계적 중심을 배제하고 천천히 지속하는 팀들은 구성원들에 소속감을 강요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자와 병소 역시 고정적인 멤버를 거의 두지 않고 그때그때 공연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이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체 상태의 집합체가 아니라 느슨하고 액체적인 풀pool의 상태로 놓아두었던 셈이다. 멤버들은 각기 자신의 삶을 살다가 그 시간만큼의 고민을 안고 돌아온다. 병소의 경우에는 6년 만에 돌아와 작업을 하게 된 멤버도 있었고, 하자의 경우에는 멤버들이 각각 졸업과 취직의 관문을 넘은 뒤 2년 만에 다시 만나 작업을 이어가기도 했다. 2016년에 다시 모인 하자는 창작극에 공을 들이다가 2017년 밴드 GRiN과 콜라보한 음악극 〈안녕〉을 선보이게 된다.
  하자의 성격이 다소 변하게 된 계기는 2018년 〈오르막길의 평화맨션〉이라는 공연이었다. 이사를 돕느라 해후하게 된 바이섹슈얼 여성 커플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이었다. 전서아 연출은 하고 싶은 얘기가 정확히 생겨서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말한다. 동시에 하자라는 팀에 처음부터 비주류 의식이라는 뿌리가 있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비주류 의식이라는 말을 달리 번역하자면 어딘가 하자가 있는 사람들, 딱 들어맞는 퍼즐을 이룰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끼리의 공존이 아닐까.

하나: 망가진 인간들끼리 위로가 되나.
유진: 망가진 인간들끼리는 위로가 된다. 난 아직 믿어.
- 2018년 〈오르막길의 평화맨션〉대본 중 

  갑도 을도 아닌 병들의 소사이어티를 자처한 병소는 집도 없고 돈도 없이 가난하게 살아가는 비주류의 모습에 주목했다. 〈노동집약적 유희〉 시리즈는 편의점, 식당, 서점 등의 알바 자리들이 늘어서 있는 커다란 부루마블 말판 위를 움직이며 생존을 꾀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말’의 역할을 하게 되는 참여관객들은 최저임금만큼의 자본과 일정한 체력 수치를 갖고 이 비정규직의 세계를 돌아다니며 살아남기를 도모하게 된다. 한시적으로 어떤 공간에 머무르며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다시 자신이 머무를 공간을 사야 하는 사람들. 그 모습은 터무니없이 적은 돈으로 극장들 사이를 전전하며 무대 위에서 잠시잠깐 현존했다가, 다시 도시 이곳저곳으로 흩어지는 청년연극인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노동집약적 유희〉는 애초에 장기 프로젝트로 기획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애초에 계획했던 사업이 지원금에서 떨어진다든가, 페스티벌에 초청을 받는다든가 하는 우연한 계기들이 겹쳐 이 공연은 2015년~2017년에 걸쳐 총 네 번이나 상연되었다. 물론 모두 다른 극장, 다른 장소에서였다. 병소는 매번 새로운 무대를 만날 때마다 그 공간성에 맞게 공연성을 개조해나갔다. 가령 인천아트플랫폼 같은 단정한 블랙박스 무대를 만나면 방송 중계 현장처럼 만들었고, 연습실 공간을 만나면 관객과 함께 하는 레크리에이션을 삽입했고, 인터넷 공간에 Rodong.zip 파일을 흩뿌리거나 집회 신고를 넣고 보신각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자신의 모습을 현시하기 위해 절룩거리며 새로운 공간을 찾아다니는 비주류 청년연극인들의 몸. 그것은 칸으로 나뉜 부루마블의 세계를 서성이고 있는 말들의 모습과도 같다.
  2018년을 기점으로 하자는 그들의 창작 원천이었던 비주류 의식을 소수성에 대한 감각으로 옮겨놓게 된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소수의 소수의 소수이다. 다수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번역될 수 없는 일인칭적 감각에 대해 사고하기. 그것은 사회적인 것에서 개인적인 것으로, 개인적인 것에서 사적인 것으로 인식의 레벨을 옮겨가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오르막길의 평화맨션〉 공연을 치르면서 하자는 소수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관객을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적어도 소수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확실한 정체성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호출한 관객들이 무대 위에 앉아 있을 때, 어떻게 소수적인 것의 소통에 성공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병소와 마찬가지로 하자 역시 비주류의 몸을 어떻게 무대 위에 올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자가 있는 사람들의 소사이어티는,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것일까? 

인터뷰 정리: 김민조

2019년 4월 22일 월요일

7번국도 단상

임승태

  무대 위에는 자동차 한 대가 해체되어 있었다. 뼈대를 앙상하게 드러낸 메인 프레임을 비롯하여 시트와 같은 큰 부품들은 뒷무대 구석에 있고 나머지 작은 부품들은 무대 바닥 전체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공연이 시작되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무대는 조명을 제외한다면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 무대는 무언가를 제시하기 보다는 관객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이미지를 스스로 떠올리도록 한다는 점에서 ‘매직 아이’ 그림과 같다. (지나간 유행을 비유로 든 것에 대해 젊은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
  공연에서 직접 사용하는 가장 주도적인 이미지는 길이다. 제목이기도 하거니와 여러 장면의 배경이 되는 7번 국도, 그리고 인물과 인물이 만나고 헤어지는 여러 상황 속의 길이 (특히 조명을 통해) 무대에 그려진다. 무대 바닥의 자동차 부품이 만들어 내는 격자를 따라 움직이는 배우들을 보고 있으면, 그리고 그들의 절제된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정해진 길로만 가다가 죽거나 죽여야 하는 체스판 위의 말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크고 작은 기계 조각들의 배열은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점차 다른 이미지를 소환한다. 지영이 이야기를 할 때면 직접 언급은 되지 않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그 공장에서 생산하는 반도체, 혹은 그 반도체가 장착된 전자 기판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주영이 이야기 때에는 밥먹으러 갈 때도 맞추어야 하는 군의 대오가 떠오른다.
  하지만 텍스트가 감추고 있던 모든 죽음이 드러나고 나면 앞서 일었던 기계에 대한 적대감을 계속 가져가기 어렵게 된다. 조각난 자동차의 잔해는 어느덧 마치 생명을 다한 유기체가 서서히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부품들이 무작위로 놓여 있었다면, 혹은 어느 순간 대오가 헝클어진다면 그 느낌이 더 강하게 전달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배우가 무대 위에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만지거나 들거나 옮길 법도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2018년 낭독극을 못 본 입장에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번 공연은 거대한 무대 오브제 위에서 벌어지는 낭독극 같은 인상을 준다. 배우들은 부품들 사이를 조심스레 걸어 들어오고 나가며 거의 변함없이 부동 자세로 대사를 관객에게 전달했다. 격행대화(stichomythia)의 향연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많은 양의 대화가 오고가지만, (의도적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는 배우들이 고함치듯 내뱉는 대사들은 그것이 극적 대화이길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극단적인 부동성이나 배우들의 절규, 그리고 사이사이 긴 침묵은 이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아는 관객에게 희생자 및 피해자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단단한 방식이었고, 사회적 참사를 다루는 연극에서 ‘연극적 재미’를 추구하지 않겠다는 의지로도 읽히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관객을 힘들게 만드는 선택이기도 하다. 지루함, 피로함을 토로하는 관객 반응도 적지 않고, 나 역시 공연 후반 5분에 한번씩 핸드폰을 열어본 한 관객의 ‘관크’를 당해야 했다. 최소한 지난 5년간 연극이 사회적 참사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고민해 왔고 이번 작품은 그 고민의 결과물 중 하나라 생각된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기도 하다. 어쩌면 참사와 연극은 정확히 반대되는 사건이기에 전자를 후자에 담는 시도에 정답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 문제를 다루는 건 조금 더 긴 호흡이 필요해 다음 기회로 미룬다.

7번국도
2019.4.17~2019.4.28
남산예술센터
http://www.nsac.or.kr/Home/Perf/PerfDetail.aspx?IdPerf=1195

2019년 4월 2일 화요일

[#fair_play] 극단 Y, 작업에 앞서, 권리장전

드라마인은 연극계의 공정하고 평등한 제작 문화 수립을 위해 해시태그 #fair_play 캠페인을 진행하며, 그 일환으로 그동안 개별 극단과 단체에서 도출한 작업 수칙을 아카이빙하고 있습니다. 전체 연재 목록은 여기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동참을 원하시는 단체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편집부

극단 Y

작업에 앞서, 권리장전


하나, 나는 나 자신을 우선순위로 둘 권리가 있다. 즉, 내가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거나 존중받지 못하다고 느낀다면 언제든 작업을 중단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작업을 중단했을 시 가급적 대화를 제안한다. 대화를 제안하고 싶지 않다면 퇴장할 수 있다.

하나, 나는 누군가가 외적으로 평가하는 발언을 하거나 성적 불쾌감을 느끼는 발언을 하거나 위계를 작동시킨다고 느낀다면(모든 혐오발언 포함), 그를 저지하거나 나의 입장과 의견을 발화할 권리가 있다.

하나, 성별·나이·경력 등에 의해 생기는 위계가 발생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작업이 시작되기 전 반말/존댓말 및 호칭에 대하여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작업에 앞서 반말/존댓말 및 호칭에 대하여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

하나, 나는 나의 의견을 제시하고, 그 의견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하나, 나는 사생활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작업 전후의 밥/술자리 등의 자리는 의무가 아니며 서로에게 강요할 수 없다.

하나, 나는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의문을 제기할 권리가 있다.

하나, 나는 거부할 권리가 있다.

하나, 나는 실수할 권리가 있다.

하나, 나는 완벽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하나, 나는 타인의 역할을 존중하고 신뢰한다. 역할에 따른 권한을 존중하되, 한 사람에게 과중한 책임과 업무가 일임되지 않도록 점검하고 소통한다. 구성원들이 나의 역할 및 권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경우 함께 토의한다.

하나, 나는 연습 및 공연에 관련된 약속 시간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할 시, 구성원 전원에게 최대한 빨리 상황을 공유하고 시간을 조율한다.

하나, 나는 공연제작과정 전반에 걸쳐 타작업자들을 존중한다. 평가하기보다는 질문하고 제안한다.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해 혐오 발언 및 욕설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하나, 나는 공연제작과정 중 이야기하게 되는 나의 사적인 이야기를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연습실에서 알게 된 타작업자들의 이야기를 외부에서 발설하지 않는 것을 약속한다.

하나, 공연제작과정 중 문제가 발생했을 시 당사자는 대리인을 내세울 권리가 있다. 대리인은 당사자가 외부에서 지정할 수 있으며, 외부의 대리인은 당사자가 지정한 내부의 구성원과 함께 문제해결방안을 모색하고 조율할 수 있다.

하나, 공연제작과정 중 문제가 발생했을 시 누구나 문제와 관련된 교육 및 워크샵(ex-성폭력예방교육)을 제안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를 위한 예산은 공적인 제작비로 지출한다.

하나, 공연제작과정 중 상해가 발생했을 시, 공연(연습)과 연결된 공적인 사안이라면 이를 위한 치료비는 공적인 제작비로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공적인 사안’에 대한 판단기준은 다수의 의견에 따른다. 이에 의견이 분분하다면 외부의 자문을 구한다. 단, 자문은 전원동의하에 결정되어야 한다.
모든 상황에 있어 공적인 제작비가 없을시 해결방안에 대하여 구성원 전원과 논의하는 시간을 가진다.

2019년 5월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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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1일 월요일

[#fair_play] <우리가 고아였을 때> 제작팀, 평등한 공연 제작을 위한 작업 수칙

드라마인은 연극계의 공정하고 평등한 제작 문화 수립을 위해 해시태그 #fair_play 캠페인을 진행하며, 그 일환으로 그동안 개별 극단과 단체에서 도출한 작업 수칙을 아카이빙하고 있습니다. 전체 연재 목록은 여기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동참을 원하시는 단체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편집부


연극 <우리가 고아였을 때> 제작팀 (김민주, 김슬기, 김연재, 박예슬 외 12명)
평등한 공연제작을 위한 작업 수칙
2018년 8월

  1. 서로의 역할 혹은 이름 뒤에 ~님으로 호칭 붙이기
  2. 서로 나아가는 속도가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3. 공적인 자리에서는 상호존대하기
  4. 자신이 위임받은 권한이 자신의 뛰어남 때문이 아니라 타인이 신뢰해주기 때문임을 기억하기
  5. 본인의 동의 없이 조언하지 않기, 먼저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작업분위기 만들기
  6. 그 날의 연습계획 미리 공유하기
  7. 작업 외의 자리에서 작업에 대한 중요한 얘기가 나오지 않도록 하고 이를 위해 체크아웃 시간을 적극 활용하기
  8. 연습실 뒷정리를 다같이 하기
  9. 외모, 복장, 성별, 나이, 성정체서에 대한 조롱, 위계적 발언을 듣게 되면 "딩동"으로 알려주기
  10. 누군가 위 수칙을 잊었을 경우 그것을 상기시켜줄 의무가 있음


* 본 수칙은 "페미씨어터, 페미니스트연극인연대"에서 제작한 "평등한 연극 제작문화를 위한 질문과 제안"을 참고하였습니다.
* '뒹굴리안과 협티를 위한 콜렉티브 뒹굴의 작업 수칙'을 참고하였습니다.
* 다른 개인이나 단체가 이 문서를 사용하고자 할 경우엔 출처와 팀 이름을 밝혀주십시오. 







[#fair_play] 페미니스트 연극인 연대, 평등한 연극 제작문화를 향한 질문/제안/다짐/규칙

드라마인은 연극계의 공정하고 평등한 제작 문화 수립을 위해 해시태그 #fair_play 캠페인을 진행하며, 그 일환으로 그동안 개별 극단과 단체에서 도출한 작업 수칙을 아카이빙하고 있습니다. 전체 연재 목록은 여기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동참을 원하시는 단체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편집부

평등한 연극 제작문화를 향한 질문/제안/다짐/규칙


2018년 4월 15일
페미씨어터, 페미니스트 연극인 연대

페미니스트 연극인 연대는 #me_too 이후 평등한 창작환경을 만드는 데 필요한 질문/제안/다짐/규칙을 함께 논의하기 위해 4월 9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아래 내용은 이날 공유한 질문과 제안들입니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팀원들과 내용을 공유하고 팀 안에서 논의/합의된 규칙을 만들어 보시길 권합니다.


연습실에서

-동료의 사생활(결혼 여부, 연애, 주거지, 출신지역)을 아는 것이 작업하는 데 필요합니까?
-사과 한 번 이상의 지속적인 개선과 반성
-나이, 위계에 따라 연습시간을 나누지 않는다.
ex) “늦게 오셔도 돼요~”
-자유로운 분위기의 연습실이 유지되려면 어떤 약속이 필요한지 사전에 합의한다.
ex) 시간약속, 상호 존대, 의견 존중
-연습 시작할 때 각자의 역할을 명확히 한다.
-탈의를 하는 행위는 동의를 얻고 행하는 게 당연해져야 하지 않을까?
-자세 교정, 연기 지도 등의 핑계로 동의 없는 신체 접촉이 발생하지는 않나요?
-옷을 갈아입을 때 지정된 장소에서 서로에게 불편을 주지 않게 갈아입거나 뚫린 공간에서 부득이하게 갈아입는다면 사전 동의를 구한다.
-연출을 포함한 상대적으로 권력을 많이 가지고 있는 팀원을 규제할 근거/규칙 제정하기.
ex) 연출 탄핵, 남성 배우 직무 정지, 출연 정지 등.
-작업에 대한 피드백을 빙자한 고함치기나 폭언을 하지는 않나요?
-자기 컵은 자기가 씻나요?
-연습실 뒷정리를 다 같이 하나요?
-뒷정리, 청소를 모두 분담한다.
-극단/프로젝트팀/프로덕션 내에 성폭력 교육 실시 및 상시적인 성폭력 전담 팀 구성. 극단 내 상시적 감시. 사건 발생 시 대응에 대한 역할, 매뉴얼(팀 내 사람이 아닐 수도)
-말의 내용을 중심으로 생각한다. 그 사람이 말하는 때의 태도, 감정상태, 평소 행실 이런 걸로 말의 핵심을 가리지 않는다.
(“너는 그런데 말을 왜 그렇게 싸가지 없게 하니?” 등)
-커피를 타주지 않는다고 서운해 하지 않는다.
-가깝지 않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에게 자신의 성생활에 대해서 계속 말하고 있지 않나요?
-설득하지 못했다고 해서 합의되지 않은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예술을 빙자해서 노출을 강요하지는 않나요?
-성적인 것이 예술적인 거라고 강요하지는 않나요?
-신체 접촉이 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을 연습 시에 사전에 배우들 모두에게 동의가 이루어졌나요?
-연습시간 지키기, 변경 시(늦게 끝나는 것) 동의 구하는 절차가 있는가?

공연장에서


-나의 컨디션으로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는다. 본인의 선택으로 한 발 물러나 있는 모습을 억지로 어찌하려 들지 않는다.
(무리한 화이팅 강요, “왜 그러고 있어 힘내!”, 자신의 스타일을 강요)
-공연 직전 배우가 컨디션 조절을 할 수 있게 한다.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자신의 소품이나 물 등 공연 전, 후 준비에 들어가는 것들을 스스로 한다.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도 동의를 구하고.
-폭력적인 장면을 공연할 때, 해당 장면을 연기하는 배우 비롯 공연 팀과 충분히 상의하였으며, (이를 관객에게 공지) 했나요?
-공연장 스탭과 공연 제작팀 전체의 극장 룰, 제작팀 룰 공유하기
-여성 관객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지 않나요?
-늦은 시간까지 ‘공연을 위해’ 작업을 강요하지는 않나요?
-사람보다 작품이 우선되지는 않았나요?
-스탭이 보여주기식 군기잡기로 공연장 분위기를 만들고 있지 않나? 일명 푸닥거리.
-셋업 때 빨리빨리 끝내야한다는 이유로 덜 숙련된 스태프들을 욕하고 다그친 적은 없나요?

계약 관련


-다음 공연에서 캐스팅or페이를 준다고 하고 현재 공연에서 착취하지는 않나요?
-계약서를 꼭 쓰고, 계약 시 받는 금액, 세금 금액 등 세세히 밝힌다. (식사는 어떻게 하는지)
-계약일과 지급일에 대해 공유했는가?
-계약서를 작성하는 이유는, 공연을 완성하기 위함 보다 자신이 안전한 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함이다.
-보험에 들지 않은 경우 안전사고 발생 시 공식적 대비책이 있는가?
-연습 전 총 예산과 임금에 대한 논의가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졌나요?
-프로덕션/극단의 수입, 지출 내역 투명하게 공유하기(정기적이면 더 좋음)
-계약은 연습 시작 전 이루어져야 하고, 불가피 시작 후 이루어 져야 할 상황이라면 미리 양해를 구하고 며칠에 하겠다 공지. (수일 내, 빠른 시간으로X, 며칠! 얘기하기)
-탈세하지 말기. 탈세의 공범자로 배우 스탭 활용하지 말기
ex) 100만원 입금할테니 50만원 페이백 해.
(구체적으로 상황 공유하고 동의 구하기, 정산까지 공유하기.)
-모든 참여자의 페이(원고료, 디자인료) 책정하기, 연출료(공연비, 연습비 따로) 책정하기.

사석에서

-술자리에서는 자유롭게 마시고 싶은 자리, 사람과 마실 수 있어야 한다.
-술자리에서는 ‘남아있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술자리 셋팅은 특별한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면, 스스로 한다.
-사적 자리의 자기결정권 절대, 우선 존중
-약속과 의리는 다르고, 존경보다 존중이 아래일 수 없다.
-설거지, 뒷정리 등을 하는 사람만(후배, 여성)하지 않나요?
-‘난 쿨해’ 라는 착각으로 개똥철학을 강요하지 않나요?
-담배 피울 때나 술자리에서 공연에서 얘기 되어야 할 중요한 얘기 하지 않기. (참여 안하는 사람에게 소외감 주지 않기)
-술자리에서만 할 수 있는 얘기가 따로 있나요?
-친해지고 싶다는 욕심으로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침해하지는 않나요?
-귀가를 어렵게 하는 술자리 분위기를 만들지는 않나요?
-술 마시면서 같이 울거나 했다고 충성이나 의리를 이야기 했다고 문제가 해결되었다 생각하지 않는다.
-술자리에 함께 하도록 강요 혹은 은연중에 술 안마시고 간다는 얘기로 불편하게 하지 않기
-어린 사람이 수저를 놓거나 술을 따르거나 심부름을 하지는 않나요?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사석에서의 셋팅(수저 놓기 등)을 무의식, 의식적으로 하고 있지 않나요?
-비하 개그는 창피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나요?
-내가 좋아서, 예뻐해서라는 이유로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나요?
-나도 모르게 상대방의 외모를 평가하지는 않나요?
-상대방 의사는 안중에 없으면서 옆 자리에 앉으라고 권유하지는 않나요?
-편한 사이라고 해도 남녀 따로 자기. 거실에서 다같이X

성차별

-작품의 성차별 요소에 대해 경력, 나이, 역할에 의한 억압 없이 문제 제기, 내부 비평할 수 있는 자리나 과정이 작업에 공식적으로 있나요?
-여자가 사귀는 사람을 ‘남자친구’, 남자가 사귀는 사람을 ‘여자친구’라고 가정해서 말 하지 않기.
ex.여친 있으세요? 남자친구가 좋아하겠네요.
-이성애 중심적인(연애 중심 포함) 태도/표현 삼가기
ex.여자 친구 있어? 최근 연애는 언제니? 이상형이 어떻게 돼?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제 3자가 불쾌한 정도의 언어 사용도 성희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마음대로 커플을 만들어 조롱하지는 않나요?
-사생활에 대한 자세한 질문이나(남친, 여친 유무), 미래계획(결혼, 자녀 계획)을 묻지 않고, 특정성별에 고정적인 역할과 태도를 요구하지 않는다.
-친하다는 이유로 상대방과의 신체 접촉을 하고 있지는 않나요? (어깨동무, 손잡기, 포옹 등)
-옷이나 화장, 머리 스타일 등을 지적하고 평가하지는 않나요?
-성차별적 농담, 음담패설에 웃지 않고 정색한다. 불쾌함을 표현한다.
-‘음양의 조화’ 같은 말로 남녀에 고정된 성 역할을 요구하는 것을 합리화하지 않는다.
-성별에 따라 할당 작업을 차별하지는 않나요?
ex) 남자는 셋업, 여자는 회식자리 식당 모색
-남성 작업자와 비남성 작업자, 비장애인과 장애인 작업자, 연장자와 나이 적은 사람들이 비슷한 정도의 발언권을 가지나요?
-‘여성’, ‘배우’가 지켜야 한다는 덕목 등을 강요하지 않는다. 여자배우 외모, 성 역할, 여자다움 강요 아닌 경우 사내자식이라며 비하, 조롱X(여성으로 인식X)
-‘여자답다’, ‘남자답다’ 등의 말을 쓰며 성 고정관념을 공고히 하지는 않나요?
-‘여배우’, ‘여류배우’등의 남성중심적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나요?


성폭력 발생 시 대응


-생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호칭 고쳐서 쓰기(‘선생님’이 그러실 리 없어, 같은. ‘막내’야 니가 아직 뭘 몰라, 같은)
-발생 시, 제작팀 외에 상의, 처리할 기구나 인력이 있는가?
-성차별에 관련된 문제 제기를 ‘작은 것’,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피해, 가해자에 대한 사적 판단 금지. 전문가 상담 할 것.
-상황을 파악하면서 최대한 빨리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한다. (물리적, 정신적으로 차단)
-사건의 사후 처리가 완료될 때까지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한다.
-피해자/가해자 즉각 분리하기
-공연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이런 이야기는 소모적이며 쓰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한 적은 없나요?
-“걔가 그럴 사람이 아닌데..”라고 하지 않기
-동료보다 전문가에게 먼저 문의한다.
-‘나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지만 니가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해’ 따위의 사과를 하지 않는다.
-(성)폭력의 크기 비교하지 않기
ex) 이 정도면 사소한~ . 어느 정도로 어떤 식으로 당했니?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다면 그 의견을 존중해주세요.
-위계 폭력이나 성폭력의 어려움에 처한 동료를 모른 척 하고 있지는 않나요?
-‘혹시, 괜찮다면’ 등의 존중을 최대한 제외하고 이야기한다. (폭력은 존중받을 수 없다.)
-피해 당사자의 책임을 절대 묻지 않기
-‘중립’, ‘객관’, ‘화해’, ‘원만’, ‘호의’ 라는 단어들이 가진 위험성을 항상 인식하고 발언하기.
-Show must go on(쇼는 계속 되어야 한다.) 라는 환상/신화 깨뜨리기.
-성폭력 문제 발생 시 전문가의 필요성, 집단 외부사람인 협력자. (축제, 지원사업, 큰 극단)


작업태도

(위계)
-나이 많은 사람이 말을 놓는 거나 ‘오빠’라는 호칭을 씀으로써 친해졌다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팀은 모두의 의견을 존중해. 라고 말만 하고 있지는 않나요?
-피해자가 불쾌감을 드러낼 수 없도록 분위기를 조성하지는 않았나요?
-나이가 어리다는 혹은 후배라는 이유로 내가 먼저 위계질서를 만들고 있진 않나요?
-소통 과정에서 문제 발생 시 합당성과 상관 없이 위계 권력이 높은 사람의 편을 들지는 않나요?
-화해가 아니라 아랫사람이 사과를 해야 한다고 감정적으로 나온 적은 없나요? (동료 인식 부재)
-선배님, 선배, 오빠, 형 등등 나이나 경험, 성에 따른 고정관념이 이미 들어 있는 단어로 서로를 부르지 않나요?
-경력이나 나이, 지위 등으로 우위에 있다는 생각(무의식)을 지양하고, 서로 의견 존중을 위해 존대한다.
-동의 없이 반말을 사용하거나 선배님, 선생님 등 호칭을 강요하지는 않나요?
-상대방이 모른다고 가정하고 가르치려는 태도를 취하지는 않나요?
-언어 사용 시 같은 높이의 언어를 사용한다. (다 같이 반말, 다 같이 존댓말)

(상대 의사 존중)
-‘나’의 기준으로 상대방의 의견을 판단하고 해석하지 않기
-‘나’의 기준을 ‘너’에게 적용하지 않는다.
-Yes는 Yes, No는 No. 상대방의 의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서로의 작업 영역을 존중해주기. (예. 배우->디자이너, 디자이너->배우) 작업의 과정상 불편함을 연출을 통해 해결한다.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해 주는’일로 생각하지 않았나요?
-연습시간에는 연출, 배우 모두 시행착오, 원하는 것을 시도해 볼 시간 포함된다. 결과를 위해 달려가는 시간이 아니다.
-한 번 두 번 받을 수 있는 고마운 일들을 당연히 특정 누군가(ex.어린 여자) 해 줘야 하는 일로 생각하지 않는다.
-거의 반자동 수준으로 ‘괜찮다’라고 얘기하고 있지 않나요?
-‘요즘은 말조심해야 하잖아?’등의 말로 상대방의 입을 막고 있지는 않나요?
-작업에 대한 나의 생각/불편함 등에 대해 솔직히 말한다. (작업시간, 연습시간에)
-작가의 동의 없이 대본을 임의로 삭제하거나 고쳐버리진 않았나요?

(합리화)
-‘배우의 이미지’라는 포장으로 외모를 평가하지는 않았나요?
-인사말은 외모가 아니라 다른 이야기로 시작한다.
-커플링해서 ‘장가보내기’, ‘시집보내기’ 하지 않는다.
-미투 운동을 농담거리로 소비하거나 ‘조심 한다’ 식의 펜스룰 등이 있지 않았나요?
-연극은 종교가 아니다.
-‘불행 배틀’로 자신이 한 나쁜 행동 합리화 하는 건 금지
-구구절절 사연팔이 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이해/인정 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우리는 안 유명한 극단이니까(우리는 친하니까 or 젊은 집단이니까) 작업 과정상 문제는 용인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나요?

(사생활 존중)
-재미(?)있다며, 신고식이라며 구린 상황극(폭력적, 성희롱적)하지 않는다.

(기타)
-소수자 비하, 혐오발언 등을 ‘그냥 지나가는 말이니까’, ‘그게 요점이 아니니까’ 문제제기 하지 않고 여러 번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나요?
-여성혐오, 성차별, 장애인 비하, 어린이 청소년 노인 비하, 소수자 비하의 욕이나 표현을 사용하지 않나요?

기타

-비평/리뷰를 작성할 때 작품성을 치켜세우면서 작품의 차별/폭력 문제를 가볍게 퉁치지 말기. 반대로 작품의 차별/폭력을 비평 대상의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하기
-(비평 시) 표절이나 성폭력 문제에 대해 명시, 기록. 작업과정에 대한 비평이 필요.
-우리가 ‘대작’이다 평가한 것에 대한 재고,
-경력에 따른 차등페이 문제
-무의식중에 중요한 배역은 다 남자로 상정하고 있지 않나요?
-성폭행 당하는 여성캐릭터의 사건을 과하게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지 않나요?
-깊은 고민 없이 젠더만 치환하면 퀴어극이 되나요?
-엄마 캐릭터에게 희생과 사랑, 용서 등의 덕목만 강조하고 있지 않나요? 모성애만 있는 엄마를 남자주인공의 큰 일을 위한 기폭제로 사용하지 않나요?
-여성이나 성 소수자, 장애인을 대상화한 캐릭터를 만들지는 않았나요?
-작품의 웃음 코드로 사회적 약자(여성, 성 소수자, 장애인) 희화화를 이용하고 있지는 않나요?
-약자(여성, 장애인)에 대한 특정 이미지를 부각해 희화화 하지 않는다. 내용과 맥락에 상관없이 남배우가 여성 역할을 한다고 가슴, 화장 이런 걸 과장되게 하는?
-본인의 권력(젠더, 위계, 나이 등)을 인지하고 있나요?
-폭력을 재현 수단으로 삼고 싶을 때는 평소보다 100배 더 배우/관객의 입장에서 고려하기. 폭력적인 세상을 고발하는 방법에 꼭 재현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명심하기. 재현의 위험성 인식하기.
-(대학/학교 내) 작업할 때, 교수님/선생님/선배/후배 호칭 사용 X
-부러 다른 문제를 제기하면서 성 소수자, 여성, 장애인 인권을 덮어버리는 태도를 취하지는 않나요?(세월호는? 노동자는? 총선은? 박근혜는? 검열은?)
ex.해일이 오는데 조개를 줍고 있다.
-소수자 비하/혐오 표현은 자제하기. (대부분의 경우, 그런 표현 없어도 큰 지장 없으니 다른 표현 찾기)
-대부분의 관객을 여성으로 생각하고, 그 여성 관객들이 남성 배역을 좋아하기 때문에 남성 캐릭터 중심으로 극을 쓴다고 하지 않나요? 관객, 배우 모두를 이성애자, 시스젠더로 생각하지 않나요?
-자기 스스로도 합당하게 이유를 말할 수 없는 관습들을 ‘예의 범절’이라는 단어로 얼버무려 강요하지 않나요?

원문 링크
https://www.facebook.com/feyeonyeon/posts/184523835504484 

[#fair_play] 극단 문, 성평등 및 바람직한 연극문화를 위한 프로덕션 생활수칙

드라마인은 연극계의 공정하고 평등한 제작 문화 수립을 위해 해시태그 #fair_play 캠페인을 진행하며, 그 일환으로 그동안 개별 극단과 단체에서 도출한 작업 수칙을 아카이빙하고 있습니다. 전체 연재 목록은 여기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동참을 원하시는 단체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편집부

극단문
2017년 3월

성평등 및 바람직한 연극문화를 위한 프로덕션 생활수칙


  1. 성희롱과 친밀감을 구분한다.
  2. 자율적으로 동료들간에 존칭을 사용한다.
  3. 성차별적 농담, 음담패설에 웃지 않고 정색한다.
  4. 성희롱으로 인한 불쾌한 감정은 분명히 표현한다.
  5. 상대방의 싫다는 표현에 대해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6. 동료의 사생활에 대한 루머를 퍼뜨리지 않는다.
  7. 동료의 신체에 대한 성적인 평가나 비유를 하지 않는다.
  8. 성희롱 이슈를 희화화하지 않는다.
  9. 고정된 성역할과 나이를 강조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10. 주위에 피해자가 있을 때는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 연극계 종사자를 위한 관용적 해석 (2018년 삭제)


  1. 현재 연극계는 위와 같은 생활수칙이 수용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를 강력하게 적용하고 해석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음을 서로가 이해하고 조심한다.
  2. 이해는 하되, 무리한 용서나 양해의 강요는 하지 않는다.
  3. 과거의 문제에 대해 가해자는 반성한다.
  4. 피해자는 문제라고 느껴지는 사안이 발생한 경우, 이를 프로덕션 채팅방에 즉각 알린다.
  5. 생활수칙의 준수가 어려운 경우에는 사전에 모두에게 그러함을 밝히고 양해를 구한다.
  6. 양해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에는 프로덕션에서 하차한다.
  7. 중도 하차하는 멤버에 대해 비난하거나 모욕하지 않는다.
  8. 바람직한 연극창작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명제는 작품을 잘 만들어야 한다는 명제보다 우선 한다.
  9. 바람직한 연극창작 문화는 인권존중, 성평등, 환경보호의 가치에 기반한다.
  10. 성희롱 문제와 그 이외의 문제를 연관시키지 않는다.
(본 수칙은 영화 <걷기왕> 콘티북에서 참고하였음을 밝힙니다.)

*** 
추가사항

1.  본 수칙은 극단문의 공연대본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2.  본 수칙 중 “연극계 종사자를 위한 관용적 해석”은 2018년 연극계 미투 운동이후, 삭제하였습니다.
3.  2019년에는 본문 아래, “NED(사고징후 소통채널)”의 존재를 설정하고, 그의 연락처를 기입하고 있습니다. 극단문은 NED를 프로덕션 내부가 아닌,  배우가 원하는 이웃극단의 신뢰할만 외부인으로 지정하였습니다.


직장내 성희롱, 성차별 상담
국가인권위원회 국번없이 1331
한국여성민우회 고용평등상담실 02-706-5050

성폭력상담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02-335-1858
한국여성의 전화 성폭력상담소 02-2263-6465

[#fair_play] 콜렉티브 뒹굴 작업 수칙 (2012, 2018, 2019)

드라마인은 연극계의 공정하고 평등한 제작 문화 수립을 위해 해시태그 #fair_play 캠페인을 진행하며, 그 일환으로 그동안 개별 극단과 단체에서 도출한 작업 수칙을 아카이빙하고 있습니다. 전체 연재 목록은 여기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동참을 원하시는 단체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편집부

2012년 7월, <뒹굴의 약속>을 만들었습니다. ‘연극 비슷한 소통’을 해내기 위해-기왕이면 재밌게 제대로 해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약속과 필요 없는 관습이 무엇인지를 적어내려 갔고, 이것은 지난 5년간 팀을 꾸려오는 기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8년 4월, 뒹굴은 약속을 <작업 수칙>으로 개정했습니다. 우리끼리 더 신나게, 마음껏 놀기 위해 만들었던 내규가 2018년에는 한 명의 작업자로서, 한 명의 사람으로서의 성찰을 통해 다시 작성되었고, 처음으로 외부에 공개되었습니다.

  작년에 뒹굴의 내규를 조건 없이 공유했던 것은 변화를 시작하려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용기와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여기, 미약하게나마 작업문화를 바꾸어나가는 움직임이 있고, 그 다짐과 실천의 내용을 공유하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뒹굴의 <작업 수칙>이 곳곳의 작업과 모임에 사용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일견 신기하면서도,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 외에도 많은 작업자들이 안전하고 건강한 작업문화와 환경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며, 힘을 모아 안전한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고자 한다는 연대의 메시지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2019년 2월, 콜렉티브 뒹굴은 다시 한 번 우리의 약속을 다듬습니다. 지난 한 해 우리의 작업들에서 <작업 수칙> 얼마나 실효성이 있었는지, 더 알게 된 것이나 새롭게 보게 된 것들이 있는지, 알았지만 지나쳤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반추해봅니다. 지향점을 세웠지만 그에 맞는 방법론과 책임자가 부재한 탓에 지켜지지 않고 흘러가버린 것들을 발견합니다. 더 발전되어야할 부분과 추가되어야할 부분, 수정되어야할 부분을 이야기하며 올해 우리의 약속들을 <자치 규약>으로 명명하고 다시 공유하려 합니다.

 뒹굴의 새로운 <자치 규약>을 다시 공유하는데 있어 변경된 사항을 알립니다. 개정된 뒹굴의 <자치 규약>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내규를 참고하거나 사용하실 때 출처를 밝히고 사용 주체와 목적을 저희에게 알려주세요. 이는 뒹굴의 소유권을 주장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어디서 이러한 시도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고 싶은, 연대하는 마음이라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연대의 가능성을 높이고 건강한 창작 문화를 일구기 위한 더 나은 방법이라는 판단 하에 새로운 공유방식을 시도하니, 먼저 실천을 시작한 작은 단체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출처를 밝히고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공유하는 내규는 뒹굴의 자치 규약이기에 뒹굴의 상황을 적극 반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작업에 적용 가능한 ‘표준 내규’가 되기엔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하시어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좋은 작품과, 좋은 작업으로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더욱 많은 사람이 더욱 마음껏 뒹굴거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며 작업합시다. 우리 모두를 응원합니다.

콜렉티브 뒹굴
*연락처: doingle.around@gmail.com


1. ‘니나노 뒹굴’ 활동 수칙

2012. 7. 2

 #1 연극은 종교가 아니다

연극은 이래야 한다, 연극의 각 파트들, 요소들은 이래야 한다라는 생각은 개인마다 다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서로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 이상한 것, 안전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인정하고
극복하기 위한 시도를 위해 서로를 격려한다.


#2 하고 싶은 것을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치열하고 깊게 고민한다.
왜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내가 듣지 못했던 내 목소리는 없었는지 살핀다.
아울러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자신에게 /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의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 즉시 중단하고 반추해본다.
하기 싫은 것에 대해서도 위와 같이 돌이켜보고 고민해본다.


#3 듣고 보는 사람이 된다

말하고 표현하고 발산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우리가 장애 없이 말하고 표현하고 발산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먼저 듣고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서로의 이야기에, 표현에 눈과 귀를 기울인다.
만약 불균형적으로 발언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나는 이미 듣고 보는 사람..!


#4 집중은 기본이다

지각, 핸드폰, 쉬는 시간 엄수, 작업 활동에의 집중 등은 굳이 공론화한 적 없지만
따로 벌칙이나 벌금을 마련한 적 없지만
기본으로 지킨다.

***

2. 뒹굴리안과 협티를 위한 콜렉티브 뒹굴의 작업 수칙

2018. 4. 9
콜렉티브 뒹굴 (뒹굴리안 김정은, 박종주, 성지수, 오현지, 최희범)

1. 작업의 목적은 "공연을 만드는 것"으로 한다.
1) 그러나 이 목적은 자연권, 인권, 성적 자기결정권보다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위의 가치가 위협받는 상황이 발생할 시에는 작업 진행을 그 즉시 멈추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의 목표는 작업의 속행이 아니어야 하며, 이러한 분위기를 조장하는 이는 의사진행 발언권을 얻은 이의 진행 하에 즉시 퇴장시킨다.
2) 연습, 회의, 공연 등 작업 전후의 밥/술자리 등의 자리는 의무가 아니며 서로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3) 연극은, 그리고 작업은 종교가 아니다. 필요할 경우 뒹굴은, 문제가 발생한 작업 자체를 중단할 수 있다.

2. 연습에 집중하고, 타인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는다.
1) 연습에 관련한 약속 시간은 꼭 지키도록 한다. 지키지 못하게 되었을 시, 최대한 빨리 사정을 전체 및 진행자에게 공유하고 그 시점에서 가능한 시간을 다시 약속한다.
2) 연습 시작 시점에 스스로의 몸과 마음 상태를 확인하여 공유하는 시간을 가진다. 목적은 작업 모드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체크인]
3) 연습 중 휴대폰 사용을 자제하고, 무음이나 진동모드로 한다.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경우(꼭 받아야 하는 전화 등) 사전에 양해를 구한다.

3. 작업 내 역할 및 권한 이행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1)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고 신뢰한다. 역할에 따른 권한을 존중하되, 한 사람에게 과중한 책임과 업무가 일임되지 않도록 점검하고 소통한다.
2) 작업 내 역할 분담은 업무의 분장이지 수직적 위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3) 특정한 결정권 및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들은 그 역할을 맡은 이유가 개인의 뛰어남 때문이라기보다, 타인이 그를 신뢰해주었기 때문임을 명확히 한다. 하여, 이를 잊은 이가 있다면 누구든 그 즉시 기억나게 해 줄 의무가 있으며, 만일 특정 개인이 이를 인정하지 못 한다면 논의를 거쳐 권한 위임을 철회한다.

4.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를 잊지 않는다.
1) 성별, 나이, 경험 등에 의해 생기는 위계를 인지하고 인정하는 동시에 수평적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한다. 제도적 노력으로는, 매 작업마다 작업이 시작되기 전에 반말/존댓말 통일, 닉네임 사용 등을 전원의 합의로 결정하는 회의를 가진다. 개인적 노력으로는, 상대의 이야기와 표현에 집중하고, 듣고 보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만일 불균형적으로 발언을 많이 하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혹시 그게 나...인가....?
2) 복장, 화장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의 외모를 평가하는 발언은 하지 않는다. 만일 작업/작품을 위해 필요하다고 느껴진다면 ‘평가’하지 않고 언급하는 방법을 충분히 고민한다.
3) 상대방이 성적 불쾌감을 느낄 수 있을 발언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다.
4) 연습을 통해서 알게 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마음대로 외부로 가지고 나가지 않는다.
5) 매 순간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평가하기보다는 질문하고 제안한다.
6) ‘인간에 대한 예의’의 항목과 관련되어 지적을 받았을 때에는 발언 또는 행동을 즉시 멈춘다. 그리고 변명하기보다는 수용하고 사과한다.
7) 필요하다면 누구든 공연 제작 현장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및 권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행동지침 교육이나 관련 워크숍을 제안할 수 있고, 이는 모든 작업 인원이 참여하는 것으로 한다. 만일 예산이 필요하다면 이를 ‘필수적인 제작비’로 보고, 가급적 뒹굴의 예산으로 해결한다.

*본 작업 수칙은 [콜렉티브 뒹굴 내규]의 일부입니다. 전체 문서는 다음 주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facebook.com/doingle.around/posts/2175254476094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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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콜렉티브 뒹굴 자치 규약> 중 작업 수칙 부분

2019. 3. 31 (3차 개정)
콜렉티브 뒹굴 (뒹굴리안 김정은, 부진서, 성지수, 오현지, 유솔범, 최희범)

제3장 뒹굴의 운영 제도는 


제9조 [운영 제도의 목적] 작업의 목적은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한다. 그러나,
① 이 목적은 ‘이게 뭐라고’ 정신을 잃지 않는 선에서 추구된다. 예술은, 그리고 작업은 종교가 아니다.
② 이 목적은 자연권, 인권, 성적 자기결정권보다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위의 가치가 위협받는 상황이 발생할 시에는 작업 진행을 그 즉시 멈추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의 목표는 작업의 속행이 아니어야 하며, 이러한 분위기를 조장하는 이는 발언을 제한받고 필요시 퇴장당할 수 있다.
③ 필요할 경우 뒹굴은 문제가 발생한 작업 자체를 중단할 수 있다.
④ 연습, 회의, 공연 등 작업 전후의 밥/술자리 등은 작품 창작을 위한 필수요소가 아니므로 서로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제10조 [지속 가능한 창작 활동] 우리는 동료의 작업을 오래 보고 싶다.
① 회의, 연습, 제작, 작품 발표, 워크숍 등 모임이 전제된 활동은 프리 프로덕션 때 고지된 소요 시간을 엄수하기 위해 노력한다. 만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일정이 길어진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프리 프로덕션 및 당일 모임에서 미리 논의한다.
② 모임 이외의 시간에 이루어지는 구상, 작성, 정리, 연습, 제작, 구매 등 개별 창작 활동이 있기 마련임을 인지하되, 개인의 시간을 존중한다. 이는 작업 인원의 휴식을 보장하여 업무의 효율성을 증진하고 노동력 착취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논의를 통해 개별 업무 시간을 확정하고 이를 준수하는 것 등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창작 활동이 삶과 분리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한편, 나도 모르게 그만 동료와 스스로의 삶을 소모하거나 착취할 위험을 예방할 것이다.
③ 뒹굴은 공연 제작 현장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및 권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행동지침 교육이나 관련 워크숍을 진행할 수 있다. 이에 사용되는 금액은 ‘필수적인 제작비’로 간주하며, 가급적 뒹굴의 자체 예산으로 충당한다.

제11조 [집중 가능한 환경]
① 연습, 회의 등 작업은 각 목표에 적합한 활동으로 구성하고, 빠른 시일 내에 그 내용을 작업 참여 인원에게 공유한다.
② 연습, 회의 등 작업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각 활동의 목표에 적합하고 집중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기는 다소 어려울 수 있으나 제공을 약속할 수 있는 그날까지 열심히 물색할 것은 약속)한다.
③ 작업 진행자, 신체 훈련 진행자, 물 당번, 기록 관리자 등 각 작업 별로 필요한 업무를 리스트 업하고 역할을 사전에 분배하여 원활한 진행을 가능하게 한다.
④ ‘작업 모드’, 즉 연습 시 참여 인원들에게 요구되는 상태는 매 작업마다 상이하므로, 작업을 시작하는 시점에 참여 인원 사이에 적절한 작업 모드에 대해 공유하는 시간을 가진다.
⑤ 연습 시작 시점에 스스로의 몸과 마음 상태를 확인하여 공유하는 시간을 가진다. 이는 ‘작업 모드’로 전환하기 위함이다. 이를 <체크인>이라 한다.
⑥ 연습 종료 시점에 작업에서 느낀 것과 더불어 공유하고 싶은 것을 같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진다. 이는 작업을 정리하여 다음 작업을 준비하기 위함이며, 발언권을 보다 수평적으로 분배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이를 <체크아웃>이라 한다.

제12조 [역할 분담] 작업 내 역할 분담 및 권한 이행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① 작업 내 역할 분담은 업무의 분장이지 수직적 위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② 서로의 역할을 신뢰하고 역할에 따른 권한을 존중한다.
③ 작업 내 역할은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각 작업 별로 필요한 업무를 리스트 업 한 후 분담하여 진행한다. 우리는 관습적인 ‘창작자의 역할’에 깊게 밴 권위주의적 질서가 자유로운 창작활동에 방해가 될 것을 경계한다.
④ 특정한 결정권 및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들은 그 역할을 맡은 이유가 개인의 뛰어남 때문이라기보다, 타인이 그를 신뢰해주었기 때문임을 명확히 한다. 하여, 이를 잊은 이가 있다면 누구든 그 즉시 기억나게 해 줄 의무가 있으며, 만일 특정 개인이 이를 인정하지 못 한다면 논의를 거쳐 권한 위임을 철회한다.
⑤ 소수의 인원에게 과중한 책임과 업무가 일임되지 않도록 점검하고 소통한다. 필요에 따라 중간 점검을 통해 진행 상황을 검토하여 필요한 업무를 추가하거나, 한 사람에게 과중된 업무를 재분배 하는 과정을 거칠 수 있다.
⑥ 기존 언어에 적합한 크레딧이 없다면 뒹굴리안과 협티는 필요에 따라 새로운 크레딧을 창작할 수 있다.

제13조 [예술지상주-의☆] 작품의 미적 가치는 작업 참여자의 사회적 조건, 특히 경력, 학력, 나이, 외모, 신체조건,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장애 등이나, 'ZZAM(팀 소속 기간, 참여한 팀 작업의 수, 주 참여 역할)'순에 따라 결정되지 않으므로, 예술성 높은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작업 인원 간 수평적인 의사 구조를 견지한다.
① 작업 참여자의 사회적 조건과 뒹굴 작업 참여 기간에 의해 참여자 간에 위계가 생길 수 있음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동시에 수평적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한다.
② 매 작업마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반말/존댓말과 닉네임 사용 여부 등을 전원의 합의로 결정한다.
③ 체크인/체크아웃 외에도 작업 내 발언 기회를 균등히 하는 데 도움이 되는 다양한 수단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한다. 구체적인 예시로는 ‘작업 노트 정리 및 공유 시간’ 등이 있다.
④ 직접적인 언어로 의사를 전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공동의 ‘언어 지표’를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설정한다. 이때 위계상 취약한 작업 인원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도록 노력하여 언어 지표가 실제로 사용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한다. 구체적인 예시로는 쉬는 시간이 필요한 순간에 “나는 까마귀예요”, 부연 설명이 필요한 순간에 “에디야? 어디야?” “모어모어” “꿰~?que?” 등이 있다.

제14조 [계약]
① 뒹굴은 <콜렉티브 뒹굴 자치 규약>과 표준 계약서를 기반으로 <뒹굴 협티를 위한 계약서>를 마련한다.
② 협티는 뒹굴리안과 함께 협의하여 결정한 내용을 바탕으로 계약서를 작성한다.


제4장 작업 인원의 약속으로는 


제15조 [집중 가능한 상태] 업무 시간에 집중하고 타인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는다.
① 연습, 회의 등의 작업에 관련한 약속 시간은 꼭 지키도록 한다. 지키지 못하게 되었을 시, 활동의 차질 없는 진행을 위해 최대한 빨리 사정을 전체 및 진행자에게 공유하고, 그 시점에서 합류 가능한 시간을 다시 약속한다.
② 연습, 회의 등의 작업 중에는 휴대폰 사용을 자제하고, 무음이나 진동모드로 한다.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경우(꼭 받아야 하는 전화 등) 사전에 양해를 구한다.
③ 연습, 회의 등의 작업에 지장을 줄 수 있는 개인 활동을 현명하게 조율한다. 체력은 창조력과 인류애의 근원임을 잊지 않는다.
④ 뒹굴의 운영 제도가 보장하는 발언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경력, 나이, 성별에 관계없이 작업 과정을 함께 책임지기 위해 노력한다.
⑤ 듣고 보는 것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일임을 인지하고, 서로의 이야기와 표현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한다. 만일 불균형적으로 발언을 많이 하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혹시 그게 나...인가...?
⑥ 작업 중 감정적 동요나 집중력 저하가 닥쳐올 때, 타인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 당과 카페인 충전 상태를 점검한다.

제16조 [기본은 기본]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를 잊지 않는다.
① 복장, 화장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의 외모를 평가하는 발언은 하지 않는다. 만일 작업/작품을 위해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이를 적절히 언급할 방법을 충분히 고민한다.
② 상대방이 성적 불쾌감 등 신체적, 심리적 불편함을 느낄 수 있을 발언이나 행동을 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③ 신체접촉 친숙도는 사람마다 매우 다르므로, 창작과정에서 접촉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면 먼저 상대의 의사를 확인한다.
④ 연습을 통해서 알게 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마음대로 외부로 가지고 나가지 않는다.
⑤ 매 순간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평가하기보다는 질문하고 제안한다.
⑥ ‘인간에 대한 예의’의 항목과 관련되어 지적을 받았을 때에는 발언 또는 행동을 즉시 멈춘다. 그리고 변명하기보다는 수용하고 사과한다.

제17조 [개인과 운영 제도] 운영 제도와 실천이 완전할 수 없기에 부족함을 함께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한다.
① 작업 진행 과정에서 참여 인원 누구나 <콜렉티브 뒹굴 자치 규약>에서 지켜지지 않는 부분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청할 수 있다. 뒹굴리안은 문제 제기된 내용에 대해 토론하여 수정 및 보완한 내용을 참여 인원과 공유해야 한다.
② 작업 진행 과정에서 참여 인원 누구나 <콜렉티브 뒹굴 자치 규약>에 수정 또는 보완되어야 하는 부분을 제안할 수 있다.
③ 필요하다면 참여 인원 누구나 공연 제작 현장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및 권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행동지침 교육이나 관련 워크숍을 제안할 수 있다.
④ 모든 참여 인원은 <콜렉티브 뒹굴 자치 규약>이 견지하는 가치를 위배하거나 제7조 3항, 제8조 2, 3항, 제9조 2, 3항이 보장하는 참여 인원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동 및 상황이 발생할 시, 침묵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⑤ 제17조 4항에 관계된 문제가 발생할 시, 해당 인원 경고/징계/퇴출, 작업 중단 등을 포함한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하는 비상설 대책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
⑥ 제17조 4항에 관계된 문제 상황 중 팀 차원에서 해결하기 어렵거나 적절하지 않은 사안인 경우, 해당 전문기관 또는 전문가를 포함한 작업 외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⑦ 제17조 4항에 관계된 문제가 발생할 시 회복적 정의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며, 이 과정에서 누구든 배제되거나 더 큰 상처를 받지 않도록 유의한다.

[<콜렉티브 뒹굴 자치 규약> 전문 페이스북 링크:
https://www.facebook.com/1789823777970822/posts/2439429986343528/

서문 및 자치 규약 전문 pdf 링크:
bit.ly/doingle-190401

2019년 3월 25일 월요일

고시원의 햄릿공주

임승태

<햄릿>은 이제 거의 포화상태라고 해도 될만큼 많은 버전이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도 계속 새로운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아직도 해볼만한 게 남아서일까, 아니면 하는 사람에게도 보는 사람에게도 만만하고 익숙하기 때문일까. 웬만큼 잘해선 특별히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게 문제이기도 하지만, 특별한 걸 하나라도 가지고 있거나 또 관객이 건질 수 있게만 해도 나름의 성취를 이루는 게 또한 이 <햄릿> 판이다. 올 상반기에도 벌써 여러 <햄릿>이 공연될 예정이고 올 하반기, 그리고 내년 상반기에 공연될 <햄릿> 소식도 들려온다. 모쪼록 각각의 <햄릿>이 나름의 방식으로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기를 기대해 본다.
 <고시원의 햄릿공주>(홍승오 작, 이상범 연출)는 햄릿을 제목에서 언급하는 게 적절한가 싶을 정도로 <햄릿> 텍스트의 사용 비율은 낮다. 하지만 원작의 핵심 대사인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가 우리시대 청년 예술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본격적으로 다룸으로써 함량과 관계 없이 ‘햄릿 맛’이 나는 작품이었다.
2010년대 <햄릿> 들에서는 “사느냐 죽느냐”로 시작하는 제4독백을 중심으로 다루더라도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말하는 후반부의 대사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단식농성 중인 임재춘 콜텍 해고노동자가 오필리아로 출연했던 <구일만 햄릿>이 그러했고, 구의역 김군의 죽음을 애도했던 <임영준 햄릿>이 또한 그러했다. <고시원의 햄릿공주> 역시 “(건물) 가진 자의 오만”을 장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같은 노선을 취한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 햄릿의 제4독백은 삶과 죽음, 잠, 꿈을 언급하는 전반부에 집중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삶을 이어가거나 죽음을 택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외부적인 요인이 있겠으나 결국 자기 자신이 선택할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
<햄릿> 플롯을 취하는 이상 이 질문에서 극이 끝나는 경우는 드물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고시원의 햄릿공주>는 드문 선택을 한 사례에 해당한다. 초반 두 명의 저승사자(남태관, 김영호 분)가 코믹한 톤을 이끌어가서 그렇지 정소정(이새날 분)이란 인물은 처음부터 이미 사느냐 죽느냐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린 상태다. 청년 자살자가 급증한 바람에 저승의 영혼 수용 능력에 문제가 생겨 자살을 막으라는 명령을 받고 이승에 내려온 두 저승사자는 정소정의 마지막 순간에 여러가지 방식으로 개입해 보지만 그의 죽음에의 의지를 막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저승사자(특히 공경)와 더불어 관객은 죽음을 선택하는 것 또한 한 인간의 존엄한 결정임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공연이 마무리 된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위험하다. 공공지원금 심사를 받았다면 자살을 미화한다며 우려를 표하는 심사위원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 역시 공연을 보는 순간에는 그런 걱정을 설핏했다. 하지만 이날 객석을 채운 20대 관객들의 반응은 전반적으로 호의적이었다. 청년들에게 헬조선, 지옥고(=‘지’하방 + ‘옥’탑방 + ‘고’시원)가 어느덧 일상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햄릿은 죽는 것은 잠을 자는 것이지만, 잠을 자면 꿈을 꿀 텐데 그 꿈이 어떤 꿈일지 알 수 없어 죽음을 선택하길 주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눈 뜨고 있는 현실이 이미 지옥인 상황에서는 현실보다 더 나쁜 꿈을 상상하기도 어렵다. 비록 짧은 일정이지만 이 작품이 재공연될 수 있었던 것은 정소정의 선택이 여전히 설득력을 가지는 현실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