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1일 토요일

처의 감각, 연극의 감각

이예은, "깨어나 살아있는 ‘연극의 감각’에 대해서"

<처의 감각>
고연옥 작
김 정 연출
남산예술센터
2018년 4월 13일

친화력 

  신화적이거나 상징적인 서사로 난해함이 개입될 줄 알았는데 작품은 시작부터 끊임없이 다방면의 친화력을 발산한다. 어떤 식으로 말을 걸어야 한 공간 속 관객들의 마음이 열릴까 궁금해 하며 작가와 연출자, 배우들이 합심하여 시종 열심히 말을 건네는 느낌이다. 작품이 집중하고 있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공연 프로그램북에는 ‘약자’로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한 작품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으나 더욱 정확히는 ‘생명체’로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한 작품이다. 작품은 ‘곰’이라는 동물의 상징성에 국한되어 민족적인 정서를 그려내지 않고 그저 인간과 인간이 아닌 동물 사이의 흐릿한 경계를 응시하면서 진정 살아 있는 호흡을 가지고 살아나가는 일에 대해 고민하고 명상한다.
  그러나 작품은 이러한 메시지에 끌려 다니지 않고 매우 현실적인 감각의 이야기를 채워낸다. 근원적인 생명성에 대한 명상을 지향하지만 정작 작품의 주된 내용은 각자 다른 곳에 이상을 품은 채 그다지 마음에 차지 않는 현실을 얼떨결에 (한 동굴 속에 있었다는 이유로) 맞이하게 된 남녀가, 그 이상을 망각하지 않으면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부차적인 현실을 부단히 열심히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이다. 한 부부의 공허와 열심. 이 지극히 보편적이고 가능한 세계상을 아주 단순하고 담담하게 그러나 예상된 틀 없이 풀어낸다. 이를테면 아이를 너무 사랑해서 그 어떠한 삶도 흘려버릴 수 있는 여자와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떠한 현실도 참아내야만 하는 남자가 서로 다른 지위에서 가족-됨을 풀어내는데, 이러한 시선이 매우 보편적인 서사의 미덕을 획득한다.
  또한 이 작품은 어떠한 순간에도 여자와 남자의 서사를 어떠한 담론으로도 환원하지 않으려는 정성을 보여준다. 비록 엔딩에서 남자는 이상을 향해 떠나가고 남겨진 여자 역시 자신이 속해 있던 곳으로 떠나가기 위해 아이까지 죽이는 뚜렷한 결론을 보여주지만, 생각해 보면 이러한 극단적인 결말은 작품 전체의 구조 안에서 그다지 확고한 지위를 가지지는 못한다. 작품의 전반은 그럼에도 열심이었던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생이었거나 그 생 안에 들어 차 있던 공허와 어려움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결코 존재들을 무언가로 환원하지 않고 신중하게 응시하려는 정성은 여자와 남자를 동등하게 그려내는 시선에서도 읽을 수 있다. 즉 생명을 상징하는 여자를 현실을 상징하는 남자보다 우위에 두지 않고 이 두 존재에게 동등한 정성을 부여한다.

남자

  여자와 남자에게 부여되는 정성은 동등하나 이 둘에 부여된 서사의 결은 다르다. 정작 이 작품에서 생생하게 살아 피어오르는 인물은 작품의 제목(‘처’)으로 내세워진 여자가 아닌 남자이다. 마음에 품은 이상은 삶과는 전혀 다른 어떤 곳에 있으나 구차하고 치열하게 살아내 보려는 남자(백석광 배우 分). 그가 갖지 못한 이상적인 사랑의 대상은 비현실적인 분장과 액팅으로 치장된 코러스 중의 한 명으로 설정되었기에 비록 그것이 진실한 생의 갈망인지 아니면 오로지 그가 품은 미지의 환상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보여주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극명하리만치 생생하게 제시된다. 그 생생함은 작품의 결말부에 터져 나오는 그의 독백 장면에서 돋보인다. 이 장면에서 남자는 동굴에서부터 서서히 세상 밖을 향해 나오는 동선을 보여주듯, 칠흑처럼 까만 조명 에어리어(area)에서 서서히 밝아져 오는 공간으로 진입하며 폭발적으로 “도망 칠거야”라고 외친다. 이 한 마디의 대사에는 그가 상실한 어떤 다른 곳에 있을 진실한 삶에 대한 그리움, 그럼에도 살아내 보려 하는 초미시적인 삶에 대한 집착, 그리고 공허하고 지루하고 당연하게 반복되는 부부 관계 속에서의 외로움이 모두 한꺼번에 전달된다.
  남자의 생생한 묘사는 최순진 배우 分의 경우에도 돋보였다. 가련하리만큼 끔찍한 인간의 외로움에서부터 맹렬한 욕구의 포악함까지, 푸념에서 애원에서 폭력으로 발전, 아니 변질, 아니 폭로되는 그 전부가 한 인간의 보잘 것 없는 진실임을 보여주는 그의 스펙트럼. 이것 역시 한 절망적인 인간의 생생함을 엿보게 한다. 그의 장면을 도사리는 한 인간의 파장은 버릴 것이 없다. 이 장면은 인간의 생생함이란 동물의 생명성과는 달리 이리도 교묘하고 책략적인 잔혹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자

  여자는 살아있는 인물도, 그렇다고 상징화된 어떤 의미도 아니고 단지 하나의 이미지로 감각된다. 누구도 공감해 줄 수 없는 경험치인 곰과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그 곰과의 재회를 생의 간절한 열망으로 품은 채 산다는 점에서 그녀는 비현실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이후 남자 인간과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며 살고, 또 다른 남자 인간에게 겁탈을 당하지만 이러한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큰 흔들림 없이 곰과의 사랑을, 곰과의 사랑에서 얻은 반인반수의 아이를 상실한 기억을 생의 중심에 두며 그 부재감을 대체해 줄 존재를 찾는다. 그 유일한 존재가 바로 남자 인간에게서 낳은 다른 아이이며, 이 아이를 양육하며 살아가는 일로써 자신의 모든 생 의미를 충족시키려 한다. (어떻게 보면 남자-백석광 배우 分-는 이 여자의 현실화된 버전의 인물이다. 그는 곰과의 사랑이 어떤 다른 인간 여자와의 사랑으로 대치된 이 여자의 또 다른 버전일 것이다. 이 작품은 보다 현실적인 남자의 서사를 통해 여자의 서사를 관객에게 체감될 수 있는 것으로 병행시킨다.)
  여자에게서 감각되는 것을 굳이 단어로 설명하면 희미하지만 인간과 인간 간의 가장 보편적이고 강렬하고 은밀하게 존재할 수 있는 유대인 모성일 것이다. (작품에는 이 여자를 모성의 상징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다른 시각들도 존재한다. 여자는 공연 내내 시종 한 명의 딸로서 호명되기를 강요당하는 것, 정작 그녀의 어머니는 초자아적인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제시되는 것이 그 경우이다.) 그러나 작품에서 보듬고 있는 모성이란 종국에까지 가서 살아남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본능적인 버팀목으로 주제화되지도 않고, 신화적으로 비약되지도 않는다. 단지 동물적인 숨과 피처럼 공연의 전반을 돌아다니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특정한 주제나 상징으로 부각되기보다는 외려 공연의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그릇처럼, 하나의 공간처럼, 하나의 숨결처럼. 여자는 물처럼 어떤 공간 속의 공기를, 인물과 인물 사이의 어떤 마음을, 혹은 자기와 세계 사이의 어떤 갈피를 떠돌며 흘러가듯 존재하여서 극을 보는 내내 잡혀지지 않고, 설명되지 않으며, 상징적으로 형상화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여자는 관객에게 공감되거나 심지어 낯설어지지도 않는데, 이는 인물의 의도적인 공백화 혹은 부재화라고 감각된다. 여기에는 무용수로서만 무대에 서 온 윤가연 배우의 관습화되지 않은 모든 몸짓과 표현의 몫도 분명히 있었다. 이 배우의 가다듬어지지 않은 몸짓과 발성과 표현들은 ‘연극’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곧잘 설명이나 상징이 되어버리고 마는 관습적 표현들을 거세시켜버린다. 작품을 다 보고 난 이후에는 정작 빼곡하게 들어 차 있던 남자 캐릭터들과 장면마다 생생하게 들어 차 있던 작품의 골격들은 희미해지고 텅 비어있는 어떤 공간 같은 것이 기억을 장악하게 된다. 그 공간 같은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여자의 존재 자체이다. 실로 작품에서 ‘처’는 부재하며 오로지 ‘처’를 향하는 모든 뜨거움들을 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부재하는 ‘처’의 감각이 공연의 전반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공연을 다 보고 난 이후에는 무엇으로도 주제화되거나 신비화되거나 상징화되지 않은, 그래서 추앙되지도 강조되지도 않은 듯 담담하게 존재했던 것이 조용히 바라다 보인다. 공연을 다 보고 난 후 작품 어딘가에 무언가 바라다 볼 수 있는 구석이 있다는 사실은 작은 위안을 준다.

공간성

  동굴에서 만나 산장에서 잠자리를 가진 남녀가 이제는 집이라는 현실 공간으로 내려 와 부부 생활을 시작할 때 텅 빈 무대 위에는 거대한 전환이 일어난다. 무대 바닥의 한 가운데가 전체적으로 들어 올려진다. 이제 안과 바깥으로 구분된 제도 안으로 들어 온 두 남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남자는 돈을 벌러 나가고 여자는 집에서 살림을 하며 아기를 돌보는 태곳적부터 전해 내려온 설화적 현실 무대가 공연의 무대 위에 들어차는 것이다. 경계 없던 땅에 구획선이 생기자 고작 선 하나 그어졌을 뿐인데 전체의 땅은 힘을 잃고 그저 구획선만이 삶의 근거가 되는 이 헛헛한 삶의 사실이 설명되는 것 같다. 또 이런 구획선이 생기자 배우들이 객석 안으로 난입하거나 무대 가장자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동선이 더욱 명확한 도발로 보이기도 한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예상처럼 구획선 안에서 벌어졌던 삶을 자연의 힘으로 깔아뭉개듯 다시 무대는 육중하게 하강한다. 흙에서 난 인간이 다시 흙이 되어 돌아가는 순간이다. 재에서 재로. 이 인간 보편의 신화가 사실은 우리 모두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단 한 번의 무대의 상승과 하강만으로 거대한 세계를 열고 닫는 박력 있는 무대 연출이다. 그 거대한 판이 상승하고 하강하는 과정 동안의 시간, 그리고 잡음 섞인 움직임의 사운드가 많은 서사를 대신한다.
  장면들을 만들 때 남산예술센터 특유의 공간성이 빛을 발한 대목이 있다. 남산예술센터의 공간성이라 한다면 객석 어느 곳에 앉아 있어도 모든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한 데 쉽게 바라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공간에는 아무리 객석이 만석이 되어 관객들이 빼곡히 차 앉아 있다 하더라도 내가 아는 지인들의 얼굴이 몇 초 만에 낱낱이 발견된다는 특이점이 있다. 이렇게 객석에서 객석이 잘 들여다보이는 시각성 덕에 남산예술센터의 공간에서 배우가 무대에서 객석의 공간으로 진입을 하는 순간에는, 여느 극장에서라면 단지 일차원적인 경계 넘기에 머무를 이 동선이 상당한 힘을 발휘하곤 한다. 최순진 배우가 객석으로 돌진하여 객석 한 가운데의 열을 휘젓고 다니면서 ‘정말 외로워 죽겠다’는 몸부림을 칠 때에는 정말이지 이 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사멸할 것만 같이 외로운 한 개인의 사투를 보여주는 듯했고(심지어 리어왕의 미친 외로움이 보이기도 했다), 이 많은 사람들을 다 의식하면서 무대의 끝과 끝에서 대화를 나누는 백석광과 그의 옛 여인 장면에서는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너’라는 환상적인 모티프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 밖에도 잦은 조명의 변화로 무대와 객석이 율동감 있게 하나가 되었다가 서서히 분리되는 숱한 순간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공간 속에서 두 시간 동안의 관극을 하자니 한낮의 운동장 안에 서 있는 것처럼 역동적인 기분을 느꼈다. 극장이 지닐 수 있는 공공성, 그 역동적인 가치에 대해서 생각한다.

젊음

  작품은 결이 다른 여자와 남자의 서사를 두 축으로 흘러가는 드라마이지만 끊임없이 쇄도하는 코러스들의 반란이기도 하다. 코러스들은 이 작품에 배치된 정형화된 극 구조를 구태여 에피소드 식으로 교란시키려 노력한다. 각 챕터를 다양한 방식으로 호명하고 시작케 하는 코러스의 재기발랄함과 챕터와 챕터 사이의 입체적인 전환들. 코러스들은 드라마적 구조를 나열적 구조로 해빙시키고 다시 나열적 구조를 드라마적으로 몰입케 하는 흔치 않은 힘을 발휘한다. 인물과 내레이터는 물론이고 한 배우의 몸체들이 되기도 하고, 공간과 음악을 만들기도 하고, 연극 바깥으로 나와 연극을 바라보기도 하고, 그들 스스로가 연극 자체가 되기도 하는 이 풍부한 코러스들! (17년 전 아룽구지 소극장에서 보았을 때와 전혀 다를 것 없었던, 늙지 않는 이수미 배우의 기개에 박수를 보낸다.) 텅 빈 무대 공간을 현란하고 소란하리만치 가득 채운 음악과 조명과 코러스들의 무용적 합(合)은 몇 번이고 반복된다. 빼곡한 상상력이 낭자함에도 모든 표현들이 닫혀 있지 않고 개방성과 건강함과 귀여움을 내포할 수 있는 힘. 작품을 받아들이기 쉽게, 즐기기 쉽게, 응원하기 쉽게, 신뢰하기 쉽게, 사랑하기 쉽게 만드는 이러한 힘은 많은 부분 코러스들이 만들고 있다.
  실로 이 공연은 무용적이라는 인상이 든다. 그 이유는 율동감 있게 공간을 연출해서만도 아니고, 오프닝과 엔딩을 포함해서 윤가연 배우와 백석광 배우가 코러스들과 함께 연극임에도 무용에 더욱 가까울 정도의 완성도 있는 움직임을 보여주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무용적이라는 인상은 연출자의 열려 있는 상상력 덕분이다. 연극적이면서도 자기만의 연극성에 매몰되어 있지 않은 개방성이 돋보이는 연출. 과도한 연극성을 추구하는 연출자들이 흔히 범하고 마는 배타적 숭고함이 없다. 나는 이것이 젊음의 탄력성으로 느껴졌다. 튕겨져 나올 것 같이 기운차고 기분 좋은 표현과 표현력. 그렇다고 빤히 ‘나 젊다’ 식의 선언을 함으로써 자칫 ‘어쩔래’ 식의 도발적 표어를 내거는 것도 아니다. 으스대지도 않고 과시하지도 않으며 숭고한 가름막을 쳐 놓지도 않고 그렇다고 눈치 보지도 않는 이 상큼함. 아니 이 솔직함. 아니 진솔함. 젊은이다운 기상으로 감각되는 이 진솔함. 예를 들어 여자와 남자가 술에 취해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에 들어 차 있는 명랑하고 성긴 기운들. 오색 미러볼이 만드는 바닥의 문양과 예쁘게 반짝거리는 빨간 알전구 등, 기분 좋은 취기를 머금은 듯한 재미있는 음악과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해 가는 두 남녀. 사랑도 당위도 책임감도 없이 취해버리는 그 밤의 현실을 이토록 귀여운 환상으로 접근하다니. 생각해 보면 이토록 귀엽고 무의미한 순간으로 인해 그토록 녹록치 않은 현실을 길게 길게 살아내야만 했던 것은 참으로 어이없지만 또한 이러한 것이 삶이라는 사실은 더욱 그럴 법하다. 술이 깨고 바로 다음 날 장면에 객석까지 환하게 들어 온 째한 조명은 정말이지 바로 ‘술 깬 다음 날’ 기분을 이 공간에 들어차게 한다.

‘연극의 감각’

  공연을 보면서 이 작품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를 궁금해 하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끝이 보이는, 심지어는 이미 끝을 내린 채로 극이 시작되는 숱한 연극 작품들에 지쳐 있으니 말이다. 상상력의 면에 있어서나 작품을 풀어내는 태도에 있어서 말이다. 작품이 도달할 수 없는 결론에 섣불리 도달해 버린 채로 극을 진행하며 관객에게 어떠한 단단한 틀 안에서 관극 시간을 버티고 견뎌내게 하는 숱한 연극 작품들. 그 작품들이 극복하지 못한 성급한 폐쇄성을 이 작품은 차고 넘치는 풍부함으로 대신한다. 이것은 배우가 만들고 또 연출이 만들고 그 안에 작가가 존재하고, 이 모든 것을 휘어 감싸는 무용과 젊음이 있었기에, 아니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한 건강한 개방성이 있었기에 이루어진 일이다. 연극의 힘을 다시 한 번 믿게 하는 이토록 소박한 순간이구나라고 생각하며 박수를 보낸다.


2018년 3월 12일 월요일

‘안전함’과 ‘재미있음’에 대하여 : ⟪소녀가⟫ 오픈 리허설 리뷰

⟪소녀가⟫ 오픈 리허설 리뷰
2018/02/26 오후 4시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_

이예은

첫 인상 

  17세기 유럽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라는 소개로 시작되고 끝을 맺는 서사의 형식이나 키쉬, 까슈, 마들렌 등등 첫 장면을 열자마자 쏟아져 나오는 유럽 문화를 환기시키는 단어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캬바레 공연의 모티프를 수용한 듯한 무대와 의상은 지극히 유럽적인 것을 판소리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것과 접합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접합은 명백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명백한 표현들이 그러하듯 인위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다. 작품의 장면 장면마다에 뚜렷한 기획적인 의도가 서려 있으면서도 매 장면이 기획된 것 이상의 활력으로 넘칠 수 있었던 것은 글로 쓰기에는 구차한 살아있는 표현들 덕분이다. 이 공연은 그저 ‘재미있다’는 말 한 마디로밖에는 표현될 수 없다. 그리고 ‘재미있다’라고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을 글로써 기술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혹자는 이 작품의 재미있음을 글로써 찬미하기 위해 ‘신세계’, ‘일대실험’, ‘성스럽기까지 하다’ 등의 표현을 쓰며 몸부림치는 것을 보았는데, 이 표현들은 과장이거나 억지이다. 이 공연을 포함하여 이자람의 작품들은 ‘신세계’나 ‘일대실험’ 등의 수식으로 표현 받을만한 단서들은 가지고 있으나 이러한 수식으로 찬미받기에는 사실 거리가 먼 곳에 있다. 이자람의 작품은 늘 예상의 범위 안에 있다. 그 범위 안에서 재미있다. 여기에 미덕이 있다. 안전한 기획의 테두리 안에서 이토록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바로 이 두 영역, 안전한 것과 재미있는 것이 실제로 결합할 수 있다는 데에서 이자람의 작은 위대함을 느낀다.
  작품의 내용은 ⟪소녀가⟫ 라는 제목에서부터 이미 예상할 수 있듯이 제도적, 관습적 담론으로 무장된 ‘소녀’라는 이미지를 전복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이다. 그저 아이와 여자가 결합된 상태에서 티끌 하나 자신의 존재를 결박할 수 없게끔 만들고 마는 한 소녀가 ‘소녀’라는 단어에 깃든 소녀를 비웃는 이야기이다. 재미있는 것은 작품 속 소녀는 ‘소녀’라는 관습에 대항할 생각도, 그 관습과 경쟁할 생각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기존 관습에 대항하여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보통의 성장가와는 다르다. 작품 속 소녀에게는 관습마저도 ‘미지의 숲’과 다를 것 없는 미지의 것이다. 자신이 벌이는 행동의 의미를 모른 채, 작품 속 대사와도 같이 “멈추지 않고 뭐에 홀린 듯 정말이지 굉장히 열심히” 생의 모든 절기에 몰입하는 소녀의 행동은 관습을 그저 무시할 뿐이다.
  작품은 이렇게 형식적으로는 유럽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의 접합, 내용적으로는 제도적인 것과 자유로운 것의 대비라는 뚜렷한 모티프들로 읽히지만 이 작품의 중요한 미덕은 명확하게 기획된 이 모티프들이 결코 안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기획‘된’ 것이라는 말은 미안한 표현일 만큼 이 작품만의 스타일로 명확한 말들을 외치고 있다. 명확하지만 안일하지 않은 것. 안전하지만 흥미로운 것. 대중적이지만 작가적인 것. 몹시 이루기 힘든 그 양자들 간의 공존을 이룩하고 있는 이 작품의 세계가 견실하게 느껴진다. 환상적이지는 않지만, 다시 말해 무대 위의 세계를 증발케 하여 그 이상의 영역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주지는 않지만, 다시 말해 매혹적인 꿈을 꾸게 하거나 지독한 상상력을 자극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미지 

  동그란 무대를 세 명의 악사가 둥글게 에워싸서 앉고 빨간 드레스와 슈즈를 신은 배우가 무대 위에 입장했을 때,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와- 무대 좀 봐!” 했다. 이것이 공연이 그려내는 이미지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고체적으로 주름 잡힌 겹겹의 커튼이 거대한 곡선을 그리며 만든 무대 프레임은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작고 은밀한 이야기들을 기대하게 한다. 장면이 변할 때마다 이 육중한 커튼이 조명에 닿아 다채로운 세계의 질감을 만들며 그 안의 이야기들을 힘차게 형상화해 낸다. 커튼 왼편에는 불투명한 빨간 전구줄이 야무지게 두 줄로 장식되어 있다. 붉은 조명과 흰 조명, 그리고 푸른 조명이 닿았을 때 명확하게 변화되던 커튼의 다채로운 질감과 함께 빨간 전구줄의 반짝거리던 빛을 기억한다. 반닥반닥 빛나는 재질로 제작된 아담하고 동그란 무대는 경사가 져 있고 바닥에 손을 대면 미끄러질 것처럼 보인다. 무대 오른편 위에 오뚝 솟아 있는 작은 단상이 있는데, 이 공간은 경사진 무대 위에서 유일하게 경사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설 수 있는 단호한 공간이다. 그리고 배우가 율동을 만들 때 날 서게 회전하기도 하고 납작하게 펼쳐지기도 하는 빨간 치맛자락의 곡선은 무대를 보는 내내 다채롭게 변화하는 명랑한 이미지들을 돋운다. 이 작품은 눈으로 씹어 먹는 즐거움이 있는데 이는 마치 재미있고 아름답기까지 한 사람의 다양한 표정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또 기대하게 되는 느낌이다. 눈으로 차곡차곡 소화하는 진귀한 이미지들과 함께 귀를 열게 하는 숱한 소리들, 철로 만든 드레스를 입을 때 나는 소리 “캉 찰캉 찰캉 차르르”, 철로 만든 드레스를 부술 때 나는 소리 “뿌셔뿌셔”, 미지의 숲에 들어가기 전에 “두근두근두근두근”하고 “가슴이 쓰르르르”하는 소리는 또한 이 작품의 내용을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공연을 보면서 많은 순간 작품에 흡인된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러한 시각, 청각 이미지들이 축적되면서 정말 똑 소리 나게 터져 나오는 표현! 표현! 덕분이었다. 거칠 것 없이 노골적이고 요염하기도 하고 천진하며 우매하기도 한, 그래서 엄청 웃기기도 한, 그러나 앙큼하게 감추어진 속내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이 모든 이질적 느낌들이 놀이를 만들고 있는 표현, 표현들. 아주 놀기 좋은 놀이터를 작품의 테두리로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정말로 아주 잘 놀고 있는 표현, 표현들. 이를테면 “찰캉!” 소리가 나는 철로 만든 드레스를 입기 전 자유로운 혼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아이의 시선이 무대 오른 편 단상 위에서 만들어졌을 때에는 바람으로 불어오듯 자유가 촉각적으로 느껴진다. “찰캉! 찰캉!”하는 철 드레스가 몸에 입혀지는 순간 커튼에 닿아 반사된 백색 조명에서는 쇳소리가 나고 그 순간 고조되는 북소리는 그 공간과 시간에 폐쇄적인 테두리를 재빨리 둘러치는 듯하다. 숲을 발견한 소녀가 “멈추지 않고 뭐에 홀린 듯 정말이지 굉장히 열심히 멈추지 않고 뭐에 홀린 듯” 사방군데 몸을 비벼댈 때에는 너무도 천진하고 야해서, 동시에 자신이 천진한지도 야한지도 모른 채 너무도 필사적이어서 폭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다. 소녀가 “무엇인지 몰라도 가슴이 설레는” 미지의 숲을 기어코 활보하며 “두근두근”대는 장면은 어떠한 관습적 지(知)도 압도해 버리는 미지의 지적 상태를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어 사랑스럽다. 소녀가 늑대에게서 달아나 숲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장면에서는 푸른 조명과 함께 저녁 공기를 머금은 듯한 시원한 숲의 바람이 불어오는데 여기에서도 다시, 자유가 느껴진다. 이렇게 풍성한 이미지들과 함께 구성진 대사 몇 마디가 칼을 꽂듯 흘러가는 장면을 멈추어 서게 하는 순간들이 있다. 마치 작품의 한 가운데에 작가가 자신의 존재를 칼을 꽂듯 호소하는 순간들처럼 말이다. 이토록 작가가 자신을 호소하면서 작품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것. 관객과 동반하면서 작가가 할 말을 하고 마는 기술이 놀랍다.   

서사

  작품이 지닌 몇 몇 강인함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서사는 지나치게 전형적인 상징으로만 이어진다. 철로 만든 드레스가 상징하는 것, 미지의 숲이 상징하는 것, 나무의 길과 물의 길이 상징하는 것, 느끼한 목소리의 늑대가 상징하는 것. 순차적으로 제시되는 이 명징한 상징들은 온갖 제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이 작품의 열망과 대조적이다. 결국 작품의 열망은 제압적인 것들을 우스꽝스럽게 허물어버리는 것에 있지만 그 열망을 실현하기 위한 서사를 볼 때, 왜 이토록 제압적인 틀에 매달려서 자유를 꿈꾸어야만 하는가? 질문하게 된다. 제압적인 것과 자유로운 것을 철저히 이분하다보니 전형적인 상징들이 자연스럽게 채택된 것이다.
  서사의 내용을 채우고 있는 상징들 뿐 아니라 서사의 구조 또한 지나친 전형성을 따르고 있다. 보통의 여자 아이로 태어나서 철로 만든 드레스를 입게 되고, 그 드레스를 부수어 미지의 숲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숲에서 늑대를 만나게 되고, 늑대에게 희롱을 당할 뻔한 위기에 처했다가, 도리어 늑대를 희롱하게 된다는 서사의 얼개는 전형적인 동화 다시 쓰기의 구조이다. 기존의 동화 다시 쓰기 구조를 따른다 하더라도 그 구조에 대하여 이 작품만이 취하는 어떠한 태도가 있었더라면 보다 생각할 거리가 있는 스토리텔링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구조로부터는 어떠한 재발견도 각성도 할 수 없다. “이 이야기는 17세기 유럽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는 지독한 수미상관식의 대사가 서둘러 에필로그를 장식했을 때에는 설마 이대로 끝을 맺을까 라는 탄식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마지막 인상

  그 많은 매혹적인 순간들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엔딩 장면이 끝나고 ‘서사가 싱겁다’는 인상과 함께 보다 큰 차원에서 작품의 전체를 되돌아보게 된다. 다시 안전함과 재미있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안전한 틀 거리 안에서 재미를 확보하는 것이 위대한 작업으로 느껴지면서도 이토록 안전한 틀 거리 안에서 누리는 재미란 과연 어떠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질문을 하게 된다. 혹은 이와 반대로 이토록 안전한 틀 거리 안에서 누리게끔 만들어진 작품이기에 이토록 재미가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도 생각해 본다.
  이 작품을 계기로 예술 행위를 함에 있어서, ‘안전함’이라는 것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생각해 본다. 새롭거나 실험적이지 않은 것이라 하여 부정적인 단어로 받아들여지기 이전에, 동시에 대중적이거나 명확한 기획 의도를 확보한 것이라고 하여 긍정적인 단어로도 받아들여지기 이전에 그저 예술이라는 영역에 있어서 ‘안전함’이라는 것은 뭘까. 동시에 ‘재미’라는 것은 뭘까 라는 질문도 해 본다. 그리고 작품에 고찰이 없다면 재미란 무슨 의미일까? 라고도 질문한다. 여기에서 고찰이란 앞서 말한 이 작품에 부재하는 서사적, 주제적인 고찰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표현에도 고찰은 있을 수 있다. 이 작품 속 표현들은 시종 관객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끈끈한 줄로 이어 관객과 함께 가려 하다 보니, 관객들에게 모든 표현들을 다 주어 버리고 만다. 모든 것을 다 주어 버리는 바람에 어떤 표현에 머물러 관객이 생각에 빠져 들 수 있는 것, 나눌 수 있는 질문은 없다. 작품이 관객에게 주지 않고 남겨두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작가가 했던 말 가운데 “관객을 믿는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이 말은 작가가 토대를 두고 있는 판소리의 정신에서부터 발로된 것이라 생각한다. 판소리는 창자와 관객 사이의 끈끈한 탄성을 다져가며 철저히 공감의 영역 안에서 그 정체성을 찾아가니 말이다. 무대와의 끈끈한 탄성 안에서 진심으로 즐거웠던 50분의 상연 시간이 끝나고 극장 문을 나서며, 나는 ‘공연과 관객 사이의 끈끈함을 너무 믿으려 하다 보니 기껏해야 정성 어린 우정 외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하고 있었다. 눈과 귀가 지극히 세심하게 열리면서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어떠한 세계와 정말이지 열심히 맞닿았지만, 익히 예상할 수 있는 서사와 상징들을 매우 안전하면서도 매우 재미있는 표현들로 이끌어낸 이 작품으로부터 ‘무엇이 남았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 이 질문은 이를테면 ‘잊을 수 없는 무언가가 과연 작품 안에 존재했는가?’와 같은 질문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예술의 가치로 체감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