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일 월요일

예) 하고 흔들다.

장 혜 경 (https://blog.naver.com/myeongmyeolga)


 사과는 장하다.
꼭 이상적인 사과가 아니더라도 사과에는 가죽도 있고 속살도 있고 뼈도 있어서, 곧추세운 척추뼈 꼭대기에 올려놓아도 깔끔하게 관통할 듯싶으니 말이다. 뼈는 가지런하게 어질러져 있어야 한다. 무작정 팔뼈를 앞으로 뻗어 줄을 맞추자, 옆으로 누워 껍질만 덮고 과육은 빼낸 일자허리 제물이 된다. 차갑고 딱딱한 제단에서 구른다.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성스러운 빛에 잘 쪼여야 한다. /바치기에 족한가요/ -내셨잖아요 /제 뼈가 그렇게 고아한가요/ -과하다 할 정도는 아니고요 오래 앉아서 문서 작업을 하세요 /사무직이냐고요/ -아뇨 이제 공연 기술 좀 하시라고요 그만 딴짓하고
예?


<잃어버린 몸을 찾아서>는 감각하랴, 기능하랴 바쁜데 아프기까지 한 신체를 한탄하는 몸의 책임자가 등장하는 극이다. 각기 다른 몸 셋 깊숙이 같은 몸 하나가 묻혀 있는 느낌을 준다. 그것이 잃어버린 몸이라면, 단서가 될 몸을 파헤쳐야 한다. 몸을 찾기 위해 몸을 해치다니, 지독히 의학적이지 않은가. 과연, 하루 8시간을 앉아서 근무하는 사무직 종사자는 허리가 아프다. 누구도 통증을 받고 싶지는 않다. 돈을 바치고, 몸을 바친다. 병원 측 재량에 따라 나누어 찍고, 나누어 뽑고, 문제만 추린다. 돈은 진료로 돌려받고, 통증은 평온에의 고대로 돌려받는다. 그래서, 몸은 돌아오는가? 돈은 바꿔 먹으라고 있는 것이고, 통증은 버린다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끈질기게 좇아오겠지만). 몸은 돌려받을 수 없다. 몸은 돌아와야만 한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다. 문제 있는 부분을 자료로 설명받을 뿐이다. 

TV로 송출된 척추 엑스레이 사진을 곁에 두고, 병명을 밝히기까지의 여정은 배우1 (이동영 분)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배우2 (정나무 분)가 보라색이고 초록색인 우유 박스 하나당 주어진 네 개의 옆면을 돌려가며 차별 없이 바닥에 내려쳤고, 이는 매우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배우2가 우유 박스를 소리 내서 선별하는 반복은 노동이고, 차차 생긴 리듬의 빈 구간을 찾아 말을 끊어 연골로 넣는 배우1의 요령은 적응이다. 노동은 적응할 생각이 없다. 요란스레 걸러낸 박스를 바닥에 ‘1’ 자로 길게 나열하면, 배우2와 배우3 (박정근 분)이 위를 밟으며 부적합한 박스를 쳐낸다. 척추관협착증은 사진으로 체감된다. 병으로부터 죽어라 도망치고 싶을 때쯤 의사가 물증을 들이민다. 누가 진단명으로 머리를 뎅 치고 간 것 같다. 직후 나온 가톨릭 성가는 이러한 환자의 심정을 잘 헤아렸다.

사과는 비장하다. 단지 일자로 높게 쌓인 우유 박스 탑 위에 군림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빼놓을 수 없는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자신이 아닌 것이 자신으로 비유되는 일을 묵과해야 한다. 배우2는 우리가 이미 진짜 사과를 알고, 먹어본 적 있으므로 우유 박스 탑 위의 비대한 사과가 가짜임을 안다고 했다, 몸에 들어 있는 체계로 판단한다고. 그러면서 진짜를 깨문다. 신체는 비참하다. 단지 일자로 높게 세운 뼈대 구조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빼놓을 수 없는 대상물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내 몸 아닌 신체가 내 몸으로 여겨지는 일을 묵인해야 한다. 누구나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몸은 모두의 것이다. 모두가 다른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몸은 지극히 혼자의 것이다. 사과의 경험이 베어물지도 않은 사과를 가짜라 판단하듯, 몸의 경험은 겪어보지도 않은 몸을 선뜻 기각한다. 다각도로 바라보면 해결될까? 어느새 배우1은 캔버스 같은 것에 사과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하고 있다. 세잔이라는 화가는 온 방향에서 묘사한 사과를 탁상 하나에 올려놓았다는 이야기. 뻑뻑한 물감으로는 매끄럽게 사과를 그릴 수 없다. 그러다 옆의 배우3에게 묻는다, 가짜 사과를 얼마에 샀냐고. 자그마치 구만 구천 원! 진짜 사과도 하나에 만 원이나 했댄다. 라면 몇 개를 살 수 있는 금액인데,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비발디 사계 중 봄 1악장이 짧게 흘러나오고) 비스듬한 각도로 우측에 앉아 사과를 먹는 배우2의 얼굴이 앞에 놓인 카메라로 촬영되어 TV에 송출되며 그 맛있어하는 표정을 벚꽃이 일찍 개화할 만큼 심각한 기후변화와 심각하게 치솟는 과일값과 심각하게 감소한 수확량에 관한 뉴스 기사 제목들이 날개 돋친 듯 긁고 지나간다 (숨). 미학적 사과를 논하다 말고 어디 가냐 물을 것도, 세잔의 의견을 들을 것도 없다. 이것이 우리네 사과 ‘각’이기 때문이다. 생중계되는 그는 자신이 오른손잡이라 말하며 왼손으로 사과를 깎기 시작한다. 익숙하고 전형적인 오른손과 달리 왼손은 살아있는 일을 한다면서. 손흥민이 왼발을 훈련했듯, 쓰면 쓸수록 단련되는 왼손의 감각을 좋아하는 그의 손놀림은 아슬아슬하다. 아니, 딱히 그 부위가 클로즈업되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다시 사계 중 봄 1악장, 짧게).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가느다란 전신거울 같은, 그런데 많이 두꺼운, 접이식인, 투명한 듯 그렇지 않은, 뭔가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반지러운 재질의 은빛을 표면으로 두른. ‘그것’이 왔다. 그것은 무대 좌측 구석에 놓이고, 볼록할 철(凸) 모양으로 쌓인 우유 박스 구조물 오른편에 배우3이 앉는다. 배우1은 흰색 물백묵으로 배우3의 얼굴을 그것에 그리기 시작한다. 단, 대상물의 설명에 의존할 것. 대상물3은 이목구비 이모저모를 털어놓는다. 순간, 조목조목 말하던 그가 우물우물한다. 그리는 사람1은 되묻는다. 뭐라고요? 대상물은 마지못해 분다. 그 설명에는 불만이 섞여 있다. 낯부끄러워 고객 센터에 접수하기는 그른 불만이다. 아무리 생김새에 창피함을 느낀대도 TV는 가차 없다. 이 광경은 대상물1과 그리는 사람2 간에도 펼쳐진다. 관객의 눈알은 무대 가로선 끝에서 끝으로 굴러다닌다. 순수 설명으로 그려지는 얼굴과 순수 기술로 송출되는 얼굴. 몸은 그 사이에 끼어 안중에 없다. 관객에게 희끄무레한 ‘진짜 얼굴’은 뒷전이 된다. 마지막 순서인 대상물2와 그리는 사람3에게 장면이 그대로 운반되지 않는 것으로, 몸은 더 찌그러진다. 대상물2가 변칙적으로 “메롱” 했기 때문이다. 이목구비 설명하다 말고 어디 가냐 물을 것도 없이 “메롱”이다. 혓바닥을 내미는 수만큼 혓바닥이 그려진다. 관객은 웃는다. “메롱” “하하하” “메롱” “하하하”. 대사 사이에 낀 지문을 펴서 보면 이렇다. “메롱” (관객이 TV의 혓바닥을 본다) (그리는 사람이 혓바닥을 그린다) (관객이 그려지는 혓바닥을 본다) “하하하”. “메롱”으로 TV는 관객 충성도를 얻었다. ‘그것’에는 차곡차곡 쌓인 가짜 얼굴 셋이 남고, 그것을 보기 위해 등진 배우 셋은 “사과 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하지요 눈도 반짝 코도 반짝 입도 반짝반짝”을 부른다. 사과 삼중창은 화음이 없어 하나씩 그만두어도 싱겁지는 않다지마는, 홀로 남겨진 배우3은 헛헛해 노래를 멈췄을지 모를 일이었다.

TV는 잠시 고전 프랑켄슈타인 영화를 튼다. 영화가 끊기기 무섭게 중앙에 세팅된 우유 박스 무리가 무대 역을 맡았다. 구겨진 돌 같은 얼굴을 쓴 배우3. 아니, 괴물의 이야기가 무성영화 형식으로 전개된다. 배우들은 등장인물 역을 맡아 우유 박스 위나 주위에서 연기를 하고, TV는 인터타이틀 역을 맡아 내용을 내보내는 것이다. TV: 생김새 탓에 배척당하던 괴물이 어느 날 창문으로 보인 한 가정집 풍경을 동경하게 된다. 괴물은 열심히 가족을 모방하고, 방문하기에 이르렀으나, 구타당한다. 짓밟힌 괴물은 우유 박스에 걸터앉아 탈을 벗고, TV는 인터타이틀 역을 벗는다. 배우3. 아마, 괴물은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괴물이라 불리고, 자신은 그 모습을 “너”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어 배우3. 혹은, 괴물은 말한다. “허리가 아픈 거예요. 아니, 고통은 허리에서 오는 거예요. 아니, 제 허리가 아픈 거예요. 아니, 제 고통은 허리에서 오는 거예요. 아니, 제가 아픈 거예요.” 불가역적 변화를 일으킨 몸은 여전히 나로 감각되지만, 통증은 끊임없이 잃어버리기 전을 상기시키며 “너”로 분리되기를 권한다. 현존을 강제하는 동시에 한사코 반대하는 얄궂은 감각이다. 아픔은 몸을 모아 이름을 알린다. 하지만 아픔이 곧 몸이 될 수는 없다. 아픔의 이름이 몸의 이름을 대체하게 둬서는 안 된다.

배우들은 우유 박스를 계단처럼 좌우로 쌓아 마주 앉는다. 자, 어딘가 아픈 곳을 떠받들고, ‘아야아야’ 희랍 비극같은 울음을 내는 가면 쓴 현대인들이 납신다! 물론 가면은 ‘그것’에 그려진 ‘가짜 얼굴’들이고, 울음은 말소리지만 말이다. 대화가 아닌 말소리다. 재건축이라든가, 입봉작이라든가, 요양원에서 일하며 만난 치매 환자라든가. 저마다 하고픈 말만 하기 때문이다. 기껏 마주 앉아 놓고 마주 보지 못하는 노릇이다. 그게 영 갑갑했는지, 배우2는 가면을 벗고 일어나 관객을 마주한다. 요양원 이야기를 잇는다. 치매 예방에 좋은 손벽치기, 손등치기, 손끝치기 (배우는 관객에게 따라하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좋은 것은 스킨십이랜다 (배우는 객석에 돌격해 열마다 목차처럼 선다). -우리 서로 옆자리 분과 손을 잡아볼까요 /예?/ -악수 말고 손을 잡으시라고요 /예/ -어떤가요 차가운가요 /예/ -지금 내가 손을 만지는 걸까요 상대가 내 손을 만지는 걸까요 /예/ -손을 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마다의 울음은 마주치지 않아 관객에게 튄다. 어리둥절하다. 본 극에서 주된 긴장을 유발하던 구도는 TV와 몸이라는, 가로선이 아니었던가? 가로용지를 긴 쪽으로 넘기듯 객석으로 덮쳐온 장면이 버거웠다. 시종일관 변해버린 몸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화자가, 당신들은 몸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부탁이라도 하려던 것이었을까? 아픈 허리를 이야기하기에 딱 좋은 의자였다. 통증은 유사 경험자 간의 공감을 매개로 거리를 좁혀 밀착시킨다. 불꽃이 튄다. 아픔을 나누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부지불식간에 어떤 ‘몸’으로 분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불똥이 튄다. ‘손잡기’를 요구한 맨얼굴의 배우들은 무대라는 가면을 쓰고 있어 대화 아닌 말소리를 낸다. 멀찍이 떨어지고픈 관객이 된다.

TV는 600타 타자 실력을 가진 사람의 스크립트와 내레이션을 튼다. 키보드를 바꾸고 나니 타자가 느려져 할 일을 시간 내에 마칠 수 없어 곤란하다는 말. 당장이라도 도로 600타를 칠 수 있는 키보드가 필요하다는 말. 몸은 당위에 진다. 해야만 하는 일에 무뎌져야 하고, 무뎌지지 못하면 걸러진다. 600타를 치는 나는 원래의 몸, 600타를 못 치게 하는 키보드는 변해버린 나의 몸. 비친 나를 “너”라고 부르던 그처럼, 우리는 병들어 가는 몸을 수긍하기 어렵다. TV는 신체검사 결과지를 튼다. 배우1: 참여 등급, 배우2: 3등급, 배우3: 2등급(민첩성 평균 이하). 무대 가운데를 천천히 줄지어 도는 배우들이 있다. 배우2: 앞, 배우3: 중간, 배우1: 뒤. TV는 그들의 모습과 내레이션을 튼다. 길을 가다 한 사람이 주저앉으면 주변인은 웃게 된다는 말. 주저앉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출 영상 속도가 빨라지고, 뒤이어 배우들도 빨라진다). 습관은 속도를 정했고, 그 속도를 바꿨어야 했다는 말 (배우2가 갑자기 신발끈을 묶는 바람에 배우3이 넘어지고, 배우3의 발에 걸려 배우1까지 넘어진다). 내레이션이 끝나고 (나머지 배우들 사이로 우뚝 선 배우3은 대략 이렇게 고함친다). “이게 다 내 탓이라고? 내 부족한 민첩성 하나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나는 2등급이야. 이 사람들보다 더 높은데. 어우!!!!! 으아아아아!!! 그래. 다 내 잘못이다!!!” 측정 도구가 세밀해질수록, 개인의 몸은 우거진 병명에 가려진다. 철저한 자기 관리로 속죄하게 한다. 비록 키보드에 적응할 시간도, 넘어진 뒷사람을 살필 여유도 주어지지 않을지라도. 

나는 ‘잃어버린 몸’에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몸은 돌아오지 않는데. 몸에 주렁주렁 열린 과실로 믿어온 수식어와 의미, 의미. 그놈의 의미들이 사실은 치렁치렁 매달아둔 과욕이 아니었을까? 너도나도 결실을 맺기를 원하잖아, 안 그런 척해도 다 알아. 이 일도 저 일도 맺고 맺고 또 맺고 끝맺지 못하는 몸은 필요 없어. 움직여! 움직이라고!

가로로 긴 TV, 가로로 긴 무대, 가로로 긴 우유 박스
가운데
세로로 긴 엑스레이 사진, 세로로 긴 그것, 세로로 긴 사람들.
떠받치기 지쳐 가로만큼 드러눕고 싶댄다.
여행보다 먼저 여행 브이로그를 튼다거나, 영화보다 먼저 영화 요약 영상을 튼다거나.
날 것의 반응은 줄어들고, 그마저도 감각 기관에 굴려져 뭉툭해지고.
어쩌면 나에게 영원을 약속해 줄 것은 통증뿐일지도 모른다는
그래도 가로로 가만히 맞잡고 있기보다는
세로로 흔들어 악수하고 싶다.
그것이 당신이든
통증이든 간에,
잘 지내고
싶으니까.


이 이미지는 필자가 공연을 감상하고 글과 한 쌍으로 작성한 두 개의 그림과 그림 제목이 담긴 이미지이다.

위 그림은 예하고 흔들기1이라는 제목이 달려있고아래 그림은 예하고 흔들기2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두 그림 모두 한국어 글자 예의 이응과 여이 예 자를 분리해 늘어놓은 모양이다.

 

하고 흔들기1

이응 하나를 꼭대기에 두고여이 예 자를 아래로 지그재그처럼 찍어두어 세로로 길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

 

하고 흔들기2

이응 하나 밑에 여이 예 자 하나를 쓴 조합을 옆으로 지그재그처럼 찍어두어 가로로 길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





[역사시비 4월] <잃어버린 몸을 찾아서>

2024. 4. 5. (금) ~ 4. 14. (일)

만드는 사람들
공동창작
연출_정유진
출연_박정근, 이동영, 정나무
조명디자인_전규상
목소리 출연_송정화
기록 촬영_한문희
그래픽디자인_워크룸
기획_나유진, 노지상
공동기획_창작주체 예술공간 혜화
제작_그린피그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주체 지원사업







2024년 3월 28일 목요일

보기해 보기

장 혜 경 (https://blog.naver.com/myeongmyeolga)


18개의 의자로 객석, 한 개의 의자로 무대, 옆의 모니터는 뻐끔뻐끔 열심히 빛으로 말을 뱉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지 1분 이상은 흐른 신촌극장의 객석이 무대보다 먼저 막을 올리며 “해설자”를 선보인다. 해설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맨 뒤 높은 의자의 관객으로서, 그의 해설이 시작되고 1분 이상이 흐른 후에야 이것이 스피커의 음성이 아님을 깨달았다. 해설자는 “상상해 보기” 문장을 차곡차곡 쌓아 사북 삼고, 극장의 살을 탄탄하게 펼쳐 관객의 상상을 부채질한다.


우리는 곧잘 공연을 ‘보러 간다’는 말을 사용하고, 말은 곧장 공연을 ‘보고 온다’는 말로 읽히지만, 상상해 보자. ‘보고 온다’와는 다르게, ‘보러 간다’에는 관람, 즉 ‘보기’가 암시되지만, 보장되지는 않는다. 공연을 보려고 교통수단을 이용해 몇 시간이고 소모했어도, 간발의 차로 입장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예매한 줄 알았는데, 예매한 줄만 알았던 매진 공연일 수도 있다. 우리가 쥘 수 있는 것은 ‘가기’뿐이다. “상상해 보기”로 기억된 수많은 “보기” 해설에서 이러한 ‘미완결’이 느껴졌다. ‘보러 가기’가 곧 ‘보기’가 아닌 ‘가기’를 보장하는 것과 같이, “상상해 보기”도 “상상하기”가 아닌 “해 보기”만을 보장한다는 사실에서.


해설자는 수신인으로서 극장에 도착한 투명한 편지봉투 속 사만 구천 개의 조각 난 편지를 읽어내기 위해 발신인 재현 역으로서 행위자를 소개한다. 해설자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말이 현재, 행위자의 말이 과거를 대변한다고 한다. 자막으로 표시되는 말은 서체로 구분되고, 반투명한 글씨는 음성이 닿으면 테두리 안이 차올라 불투명해진다. 영적인 존재는 투명하다는 인상을 지니므로, 본 극의 특수한 자막 형태는 우선 “강령술”이라는 시놉시스 속 용어를 상기시킨다.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는 것인지, 해설자는 들쑥날쑥한 번호가 적힌 편지를 스마트폰 이미지 번역 기능을 써서 번역하려 든다. 번역 후에도 여전히 뜻 모를 말로 한가득하니 도리 없이 행위자에게 발신인 행세하게 한다. 처음은 빙의다. 행위자는 귀신으로서 얼마나 집중해서 좌표를 고정하는지를 설명하고, 해설자가 러닝타임을 인질 삼아 독촉하는 인터뷰에 어쩔 수 없이 극장에 편지를 보낸 이유를 발설한다. 다음은 회상이다. 행세는 온전한 빙의가 될 수 없었으므로, 행위자는 발신인의 기억 속 세 가지 상황의 세 명의 상대방을 연기한다. 발신인의 친구, 발신인의 애인, 발신인의 집을 방문한 보험사 직원. 행위자의 대사로부터 발신인이 상대방 셋에게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셋은 자신의 죽음을 고하는 발신인에게 합리적 ‘증명’과 합당한 ‘서사’를 요구한다.


친구의 입에서 나오는 정신질환자와 성소수자를 향한 너그러운 폄하들,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하라면서 거론되는 과거의 트라우마가 행위자를 재현 속 재현으로 이끈다. 발이 추워 온몸을 긁는, 문 잠긴 화장실에 9년이나 갇힌 사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되풀이되는 말은 문을 넘지 못한다. 화면에서 보라색 글씨가 나오는데 열린 입은 없다. 벌어진 일을 대하는 주변 분위기가 자신과 동떨어져 공감되지 않는다는 음성이 스피커에서 울릴 뿐이다. 폭언을 퍼붓는 애인을 넘어 방문한 보험사 직원은 이미 사망했다는 발신인의 말을 믿지 않지만, 업무상 답변과 끄덕거림을 거둘 수는 없다. “고개를 위아래로 흔든다”라는 해설자의 지시에 따라 목을 굽히던 행위자는 어느덧 분노로 재현을 멈춘다. 대사를 외우지도 않고 편하게 읽기만 하는 해설자를 나무라고 지시문에서 벗어나 해방감에 겨운 춤을 춘다. 춤사위는 글씨를 걸친 보라색 클럽, 입은 다시 스피커의 몫이다. 노는 곳에서 추모하는 분위기가 거북하다는 음성이 들린다. 행위자는 숨이 가쁜 몸부림을 치고 있다.


본 극은 사회적 참사 희생자를 기억하는 산 사람을 다룬다. 앞서 설명한 해설자와 행위자의 위치를 되짚어 보자, 어떤 경우에서든 해설자는 현재에, 행위자는 과거에 몸담는다. 자막의 특수성도 되새겨 보자, 발화로 불투명해지는 글씨. 알아보자, 자막을 보는 관객에게 해설자는 이미 현재를 지났다는 사실을. 해설자가 관객의 현재로 기능하려면 자막은 그의 발화에 따라 나타나야 했다. 따라서 해설자를 일종의 ‘메타현재’라고 불러 보자. 그는 애써 대사를 암기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초침 소리”를 “초오오오치이이이임소오오오리이이이”라고 발음하며 시간을 양껏 늘어뜨린다. 힘껏 대사를 달달 외고, 시간이 없다며 재촉당하는 행위자와는 처지가 다르다. 현재는 존재만으로 충분하지만, 과거는 그 존재가 없어 고달프다. 존재가 없어 자리할 수 없고, 자리할 수 없어 “이상한 기분”이다. 하지만 잊으면 안 된다, 해설자는 현재가 아니다. 진짜 ‘현재’인 관객이 넓은 아량으로 “상상해 보기”를 베풀어야 행위자와 구별될 수 있다. 현재에 대한 현재, 현재가 인식하는 현재. ‘메타현재’를 ‘현실’로 풀어써 보자.


현실은 지금을 ‘지이이이그으으음’으로 발음한 것만 같다. 현재라는 말보다 현실이라는 말에 묻힐 수 있는 순간이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통탄스러운 현실을 비판할 때 저마다 다른 양을 퍼담는다. 그러므로 ‘밈’에서 제목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숏츠’를 넘기는 행위자가 등장하는, 말 많은 해설자가 정신없이 통설하는 본 극 역시 누군가에게는 MZ세대의 산만함을 지적할 거리가 될지 모른다. 단시간 콘텐츠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한 주의 집중력을 탓하곤 한다. 따라서 “스와이프”하는 행위자의 모습은 관객에게 반성의 시간을 삽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는 빠르게 ‘업데이트’된 사람만을 원한다. 한 정보에 머무를 여유는 없다. 애도도 마찬가지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산 사람의 지금으로 이루어진다. 현재를 누리는 산 사람의 감정은 점점 짧아진다. 다음으로, 또 다음으로 넘기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래서 발신인은 거부한다. 극장에 “불러오기”를 금지한다. 급박하고 존중 없는 강령술을 거절한다.


사람은 고운 입자로 만들어져 고운 입자로 만들어진다. 어디에나 들어갈 수 있는, 들어가도 탈을 내지 않을, 부딪혀도 시끄럽지 않을, 고운 입자. 어디까지나 고와야 한다. 빛나야 한다. 특별해야만 하니까. 오색 빛깔 조명에 행위자의 오로라 이야기가 쏟아지고 있다. 태양에서 지구로 밀려든 무수한 조각이 마찰하며 내는 빛을 설명하고 있다. 과학적 사고로 부정된 “귀신”들은 증명된 오로라의 증명되지 않은 안으로 든다. 그곳은 “클럽”이다. 소리가 없는, 보이지 않는, 냄새가 없는, “만져지지 않는” 존재들이 부대낀다. 기꺼이 부닥침은 어울림의 증거다. 짧은 입자가 부딪혀 긴 반짝임을 이룬다. 성급한 이해를 내려놓은 행위자는 마이크를 든다. “귀신은 사디스트”라 주창한다. 오색 빛깔 미러볼에 악보를 표시하는 노래방 모니터. 행위자는 마이크를 건네며 “귀신은 사디스트”라 관객과 제창한다. 과거, 현실, 현재가 반투명한 가사에 음성을 부닥쳐 불투명하게 만든다. 불가해함을 인정하고, 불충분함을 인정하고, 불투명한 확신을 앞세우지 않기. 박자를 놓치고, 실수로 다른 버튼 누르기. 미래만 불참한 노래방에서 다가올 가사를 불안해하고, 지나간 가사를 기억하며 불러 ‘보기’.


해설자는 수신인에서 발신인이 된다. 그는 현실이 아닌 자신을 해설하기 시작한다. 조각 편지 아닌 산문 편지를 짚고 숲으로 들어간다. 이제는 수신인이 된 당신과 죽은 나무를 보고, 맛없는 담배를 말아 문 이야기를 한다. 당신과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내고 뗏목에 태워 이별하는 이야기를 한다. 한 사람과 오래오래 작별하는 내용과 피어오르는 안개가 자연스레 제사를 상상하게 했다. 다만 제사는 주로 고인과 생전 가까웠던 이들이 치르지만, 발신인과 수신인 사이 그러한 관계 서술은 찾기 어려웠다. 만난 적 없는 존재와 헤어질 수 있는가? 매체의 다양화로 주고받음 없이 유대감을 제공하는 콘텐츠가 늘고 있다. 공연도 마찬가지다. 관객은 왜 현재인가? 이들은 반응을 내놓는 대가로 현재를 받아왔다. 비대면 공연은 현재를 맡은 관객에게서 반응을 덜어냈다. 일방향적 감상(感想)으로도 충족되는 감상(鑑賞)의 유대감이 확산된다. 이는 관계 정의가 중요한 유대와는 다르다. 따라서 유대감만으로 이루어지는 애도가 언제나 신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애도할 겨를도 없이 보랏빛으로 질려 떠나가는 무리도 있기 마련이다. 극 중 편지는 일방향적 감상(感想)의 던지기일 수 있다. 사만 구천 개의 조각난 편지가 사람 아닌 극장에 닿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반응 없는 산 자가 여전히 관객이라면, 반응 없는 망자가 관객이 못될 이유는 또 뭔가? 관객은 이미 반응하기에서 반응해 ‘보기’로 퍼지고 있다. 산 자가 반응 아닌 존재만으로 현재를 받아낸다면, 망자는 현재만 아닌 관객이렷다. 산 자가 망자를 상상해 볼 때, 정중함의 결여를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망자의 ‘관객됨’이 불가결하다. 더듬더듬 거친 무례한 강령술이 낯선 자와 오래오래 작별할 수 있게 했을 테다.

 

사실, 극은 초장부터 결론을 내고 있다. “투명한 편지봉투도 봉투”라는 결론을 말이다. 간발의 차로 입장하지 못한 공연도, 예매한 줄만 알았던 매진 공연도 ‘보러 가기’라는 ‘미완결의 완결’이다. 그러나 상상해 보기, 기승전결을 뿌리치려 한 창작자를. 상상해 보기, 순서 정렬을 밀어내려 한 필자를. 오로라와 숲이 내뿜는 반투명한 안개 속 나는 가장 불투명했다. 불쾌했다. 안개와 함께 섞여 보고 싶었다. 미완결되고 싶다. 완결로 증명을 요구받고 싶지 않으므로.

 

그러니 상상해 보기…해 보기…해 보기해…보기 해…




[ 극장 지평좌표계에 귀신을 고정시키는 방법 X 최현비 ]
2024년 1월 12일(금) - 1월 20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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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정한별 #김수려 #이유라 #최현비
구성/연출#최현비
미술#김수려
음향/음악#정한별
음악도움#홍석영
출연#이유라 #김현재
진행#김현빈
제작#임시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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