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4일 금요일

연극 너머의 만남, <낫심>

글쓴이_장영지

매일 다른 배우가 공연 당일 대본을 받고 무대에 선다는 신선한 설정과 초호화 캐스팅*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낫심>에 쏟아졌다. 정시에 티켓팅에 참여했지만 오류 경고만 몇 번 만나고 예매하지 못했다. 아이돌 공연도 아닌, 두산 인문극장 시리즈를 예매하지 못하다니, 처음 경험한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나중에 두산이 패키지 구매자를 대상으로 추가 예매를 열어준 덕에 겨우 류덕환 배우 회차 한 장을 손에 넣었다.
** 김선영 전석호 한예리 이석준 우미화 김꽃비 손상규 권해효 진선규 박해수 문소리 나경민 김소진 전박찬 고수희 오만석 구교환 유준상 이화룡 류덕환 이자람 (매회 다른 배우, 출연일순)
  하지만 막상 공연이 시작되니, 호평보다는 혹평이 눈에 띄었다. 당일 대본을 받는 배우들의 자유로운 선택과 즉흥적인 연기 등을 기대한 사람들은 도무지 배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다소 실망했다. 게다가 작가가 배우를 압도해버리는 대부분의 순간들 때문에 생소한 이란 작가 낫심 술리만푸어보다 (내) 배우를 기다린 관객들에게 적잖이 화를 불러일으킨 것 같다.
  작가의 이런 태도는 2017년 SPAF 초청작 <하얀 토끼 빨간 토끼>에서 이미 확인되었다. 나 역시 배우의 즉흥적인 연기를 기대하며 작품을 예매했지만, 작가는 배우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대신 읽어주는, 작가와 관객을 이어주는 존재 정도로 생각하듯 했으며, 작가 자신을 끊임없이 드러내고 싶어 했다. 몇몇 문장에 감정을 넣어, 배우답게 읽어주는 것 외에는 배우로서 할 수 있는 것도 거의 없었다. 대본을 읽는 중간 중간 왜 이런 말/행동을 시키는지 불평(?)하기도 했지만 대본을 집어 던지고 나가는 배우는 없었고, 작가가 시키는 대로, 대본 그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정치적인 이유로 이란을 떠나지 못한다는 작가는 답답하겠지만,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반복해서 말하게 하면서 메일을 보내달라 요구하는 작가에게 공감이나 연민, 그런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하얀 토끼 빨간 토끼>를 보고 나와서는 작가를  ‘배우와 관객을 다 자기 마음대로 해버리는 심술궂은 사람’ 정도로 판단하고 그런 태도에 대해 투덜거렸다. ‘이럴 거면 대본이 아니라 소설을 쓸 것이지.’ 다만 즉흥적인 상황을 대면한 배우들이 각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순간들에 감동하고, 공연 후 배우와 관객이 나눈 짧은 대화들 때문에 <하얀 토끼 빨간 토끼>를 즐겁게 기억하고 있다.
  <낫심>에서도 역시 배우가 텍스트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자유는 없었다. 배우는 대본에 있는 글자를 남김없이 읽으면서 작가의 질문, 지시, 요구에 응해야 한다. 무대 뒤에서 실시간으로 대본을 넘겨주고 있는 작가는 배우가 다 읽지 않으면 다음 장으로 넘기지 않거나, 잘못 읽으면  X표시를 했다. 게다가 <낫심>은 그야말로 작가 낫심의 이야기였다. 엄마와 이란어를 배우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정치적인 이유로 고국에 가지 못하는 이방인의 심정을 토로한다. 또 낫심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배우가 그의 어머니에게 이란어로 동화를 읽어주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위해, 어머니에게 효도하기 위해 훌륭한 배우를 소비할 뿐이라고 불평했다. 누군가는 매일 같은 시간에 전화를 받는 어머니의 존재와 그 순간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하지만 배우가 당일 대본을 받는다는 설정을 잠시 제쳐둔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는 작가의 강력한 욕망, 텍스트를 충실히 따르는 배우, 어머니 역으로 섭외된 누군가, 이 모든 것은 공연 <낫심>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대는 아무리 진짜처럼 보여도 언제나 가짜였다.
  그러나 몇몇 순간들이 “진짜”였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진정성에 대한 의심과 불평이 가능하다.  <낫심>은 어쩌면 단순히 연극, 혹은 공연이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작가와 배우, 관객의 만남, 친교, 경청의 순간들로 80분이 채웠졌다. 낫심은 세련된 한국어와 욕을 묻고 그 단어들을 수첩에 적었으며 배우와 이란 풍습대로 차를 마셨다. 배우는 눈시울을 붉히고 때로 울먹이고 말을 잇지 못하면서 낫심의 어린 시절과 현재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들려주었다. 또 낫심은 우리에게 예크부드 예크나부드(옛날 옛날에), 머먼(엄마), 델람탕쇼테(마음이 구깃구깃해요, 보고 싶어요) 같은 몇몇 이란어를 가르쳐 주었고, 우리는 한국어로 표기된 이란어들을 더듬더듬 읽었다.
  이란 사람 낫심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낫심은 외국인들의 이란어를 들을 때, 마음이 이상하다고 했다. 이 말은 배우를 통해 한국어로 전해졌다. “이상하다” 란 한국어로 표현한  낫심의 마음들을 상상해본다. 어떤 사람은 놀이처럼, 어떤 사람은 그저 공연의 지시사항이기에 스크린의 글자를 따라 읽은 것뿐인데. 어디서든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그에게 이런 순간들이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니 그의 외로움이 새삼 실감된다. “잠시 동안 아무도 이방인이 아니었다.”는 말을 이란어로 들었을 때 마침내 그를 훨씬 더 이해하게 되었다. 차근차근 여기까지 왔다.
  그 “진짜” 순간들 때문에 <낫심>과 낫심을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 친구가 되고, 서로 이해하게 되는 과정들을 돌아본다. 때로 우리는 같은 언어를 공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서로 만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국어로 둘러싸인 순간에도 자주 외로움을 느끼고, 이방인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만남과 이해가 가능했던 것은 일부 오늘의 배우 덕분이다. 스크린을 보고 대본을 읽느라 자주 객석과 등져야 했지만, 배우는 최선을 다해 관객과 눈을 맞추고, 관객을 살폈다. 작가가 시키는 대로 모든 것을 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텍스트에 압도되지 않고 순간순간 자신을 드러내며, 작가와 관객을 열심히 만났다. 처음 마주하는 즉흥의 상황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었던 배우의 결. 그의 다정함 덕분에 나도 낫심에게 더 다가갈 수 있었다. <낫심>을 연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만남, 깊은 이해, 이런 것들이 연극을 연극답게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2018년 4월 29일 일요일

가공되지 않은 드라마를 꾸려가는 힘의 진실함

<말뫼의 눈물>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김수희 작/연출 
2017/04/06

시작은 오해 

  두 여배우가 억지스러운 고등학생 분장을 하고 등장하여 둘만이 아는 암호 동작을 과장되게 주고받으며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대사로 나누는 첫 장면을 대했을 때 작위적인 드라마가 시작될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조선소 홍보 영상을 제작하는 장면 다음 버스 정류장 앞에 간이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지럽게 제시되는데, 이 장면에서는 모든 등장인물이 한 명 씩 나와 자기소개를 하고 이들이 서로 어떤 관계인지 한꺼번에 보여주려는 듯 쉴 틈이 없었다. 첫 공연이어서 더욱 그랬겠지만 미리 계산된 분주함으로 이곳저곳에 배치된 설정들을 정신없이 보여주는데 이러한 떠들썩함은 조금의 침묵도 어색해서 참지 못하고 끊임없이 말을 하는 사람의 인상으로 다가왔다. 많은 정보들을 인물들의 대사와 행위 곳곳에 알차게 설정시켜 놓고 가는 작품의 시작부는 전체적으로 차분하지 못했고, 꽤나 계산된 드라마를 만들어 갈 것이라는 인상이었다.

신뢰의 끈   

  그러나 간이식당에서 룸펜으로 나왔던 여자가 맨 앞 장면에 등장했던 수현이었음을 알게 되고 세월이 지나 20대 초반의 나이가 된 수현과 미숙이 재회하는 장면에서 이 두 인물의 달콤하지만은 않은 우정이 감지되면서 일단 이 드라마에 몰입하기로 한다. 이 장면에서 작품을 달리 볼 수 있는 것은, 수현과 미숙이 오프닝에서 설정되었던 느낌으로 성장하기는 하였으나 어떠한 전형성도 탈피한 인물로 컸다는 사실이다. 시골 마을에 들어 선 조선소 따위에는 세상 관심이 없다는 듯 현실에 냉소적이고, 아니 세상살이에 냉소적이며, 아니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냉소적인 수현은 어정쩡한 조건부를 단 성인으로 크고 있었고, 어린 시절 크레인 위에 올라 세상을 내려 보겠다던 미숙은 돈 잘 버는 조선소 하청업체 직원이 되어 (기껏해야 십대 초반의 그것이었겠지만) 자신의 포부를 (이십대 초반의 그것이었겠지만) 세파를 끌어안는 힘으로 성장(?)시키고 있었다. 보다 정확하게 이 대목에서 작품을 이해하고 싶어 마음이 열린 이유를 말하자면 이 두 인물이 전형성을 탈피한 인물들일 것이라는 기대감보다도 작품이 이 두 인물 가운데 어느 한 명도 질타를 하거나 편들지 않을 것이라는, 그러면서도 이 두 인물을 나란히 애착 어린 시선으로 추적해 갈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런 기대감은 점점 더 실제적인 것이 되어 커다란 신뢰로 바뀌었고 극은 결국 나의 깊은 내면과 손을 맞잡았다. 알고 보니 작품은 이 두 여자만의 드라마가 아니었고,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아버지 빽으로 조선소 하청업체 직원으로 취업한 진수, 그리고 시종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아버지, 크레인이 들어 온 후 마을을 드나드는 사모님들을 보고 인생의 비애를 느낀 은옥, 마을에 돈이 돌자 어떻게든 기회 삼아 돈을 벌어보려는 은옥의 남편 등-의 동등한 드라마를 두루 살피며 참 착하게도 여러 고통과 여러 열망, 아니 고통과 열망이 채 되기도 전에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각자의 여러 당연함들-녹록치 않은 삶에서 저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는 그 당연함-을 어떠한 폐쇄적인 주장 없이 평등하게, 그러나 집요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시종 작품 속 그 어느 인물의 드라마에도 작가는 편을 들지 않으며 동시에 모든 이의 드라마에 정성을 쏟고 있기에 누구에게나 어려운 삶의 몫이 있다는 그 당연한 사실이, 작품을 만나가는 과정 안에서 흔쾌히 체감된다. 명백한 드라마를 구축하면서도 관객에게 어떠한 드라마도 주입시키지 않는 태도는 일종의 산뜻함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태도는 외면할 수 없는 세계이기는 하나 검은 먹물 같은 인물과 사건, 드라마, 작가의 할 말에 관객을 전부 가두어 놓고 질식케 하는 기존 드라마 연극의 태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안도감을 주었으며 나아가서는 이렇게 산뜻할 수 있기 위해서는 (동일인이기는 하지만) 작가와 연출자가 연극을 넘어 삶을 응시하는 진지한 노력을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즐겁다    

  그리고 즐겁다. 우선 작품은 탄력적인 연극성을 구사하며 즐거움을 자극한다. 작품 초반에 옆에 앉은 관객과 손을 잡으라고 했던 과감한(!) 제안, 은옥의 스토리텔링-은옥은 그 추레한 얼굴에 걸맞지 않는 과도한 화려한 의상을 입고 핀 조명을 받으며 자기 고백을 하는데, 이 장면은 그 어느 장면보다 호소력이 짙다. 그 이유는 점층적으로 강렬해지는 핀 조명과 스토리텔링이라는 형식이 가진 고백적 권위도 있겠지만 그녀가 풀어내는 이야기가 지닌 생생함의 파장 덕분이다. 호미로 밭을 매다가 시내로 가는 셔틀 버스를 타게 된 경위를 서술하는 이 장면에는 한 개인이 바라 본 한 마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두 번 명시된 뮤지컬적인 장면 연출-이 작품에는 은옥이 댄스홀에서 남편을 마주쳤을 때와 할매가 죽었을 때 뮤지컬적인 장면이 개입되는데 이 두 장면은 <어둠 속의 댄서>에서처럼 가장 곤혹스럽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가장 살맛나는 상상으로 제시된다.-, 버스 씬-은옥, 할매, 수현과 미숙이 하나의 프레임에 잡히는 버스 씬. 버스 씬에서 조각된 여자들의 풍경을 보며 이 연극은 진정 아무럴 것 없는 남루한 여자 인물들의 돋보임이라고 생각한다.-이 연극적인 의미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연극적 즐거움은 정형화된 드라마를 따르는 척하면서 결코 정형화되지 못하는 생의 균열들에 힘을 모으고 있는 지점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서사의 점핑-미숙의 남편이 죽었다는 대사와 함께 붙는 다음 장면은 그 말을 한 할머니의 장례 장면이었던 것-, 구조의 컨트라스트-미숙과 수현의 관계는 기승전결로 완결되지만 작품의 전체 드라마는 결코 정박자로 굴러가지 않는 것-, 작품의 결말까지 발설되지 않는 비밀을 하나쯤 품고 있는 것-은옥의 행방- 등이 그렇다. 무엇보다도 가장 주인공 같은 인물을 가장 설득력 없는 인물로 설정한 것이 작품 속의 드라마에 균열을 가한다. 작가 자신을 모델로 삼은 수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가장 잘 모르는 불투명한 인물로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지 않으며 극의 처음에서 끝까지 가장 설명되지 않는 인물로 제시된다. 얼핏 보면 작품의 서사적 화자 기능을 하는 듯한, 작가의 자아를 투영한 인물이 전체 극에서 가장 희미한 아웃사이더로 밀려 나 있는 설정은 작품을 구태여 만들어진 극에 순응시키지 않으려는 신중함으로 비쳐진다. 
  이토록 뚜렷한 드라마를 구사하면서 만들어내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에 천착하는 힘으로부터 신중함과 따뜻함을 넘어서 절실함 마저 느낀다. 탄력적인 연극성으로 즐거움을 주는 노력 너머에는 오롯이 사람, 사람에게 정성을 쏟아내려 하는 마음이 만져진다. 특히 남미정 배우가 연기한 할매의 모든 순간들이 그렇다. 버스 정류장 간이식당을 운영하는 할매는 이곳에서 스치듯 만나 빚어지는 사람들 간의 소소하고 거대한 싸움들, 저마다 절실하고 이질적인 사람들이 만나 빚어내는 그 숱한 싸움의 순간들마다 막간처럼 개입한다. 드라마가 누군가의 혹은 어딘가의 우물에 함몰되려 할 때마다 빠짐없이 개입되어 허투루 내뱉는 듯 하는 할매의 대사는 매 번 웃기지만 그 어느 정식 대사들보다도 진실하고 진지하다. 누구에게도 진지하지 않은 것 같지만 누구의 곁에도 에둘러 가 앉아 주고, 그러면서 또 이기적인 그녀는 결코 추상에 빠지지 않으면서 작품 전체를 떠받든다. 

작품의 선함에 대하여

  악인은 아무도 없다. 작품은 전반적으로 모든 삶의 선함을 믿는다. 작품이 직시하는 것은 오로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구조’라는 악한일 뿐이다. 무대 위에는 제각기 이질적인 인물 군상이 한 데 공존하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결국 삶을 잘 살아내 보려 하는 마음만이 존재한다. 이것은 단지 이기적인 계산도 아니고 현실적인 치열함도 아닌 공동의 선함으로 비쳐진다. 모든 진정한 것들은 보편적이고 순수하다. 이를테면 사랑이나 잘 살아보려는 마음 같은 것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이며 순수한 감각치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동의할 수 있다. 이 모든 이질적인 사람들이 지닌 개개의 선함에 대해서. 커튼콜을 할 때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와 마지막 인사를 할 때 저 한 사람, 한 사람이 내일을 잘 살아내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삶과 연극의 경계 위에 서서 박수를 쳐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