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13일 일요일

공연의 시간과 공간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Drama-Out 1
최희범 (<지극히, 퍼포먼스> 연출)

드라마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드라마(drama)의 어원으로서 행동하다는 뜻의 dran을 들며, 드라마가 다른 예술 양식들과 구별되는 점은 실제 인물들이 행동한다는 데 있다고 한다. 지난 5월 서울대학교 두레문예관에서는 출연자들의 행위들로 꽉꽉 채워진 연극이 공연되었다. 서울대학교 공연예술학과 학생들이 만든 세 번째 공연 <지극히, 퍼포먼스>가 그것이다. 공연된 지 이미 한참 지나기도 했고, 공연 자체가 굉장히 유명해지거나 한 것도 아니지만, 이 웹진(drama-in)의 필진 대부분이 공연에 참여했고, 공연준비 및 공연 후유증으로 인해 한 동안 글이 많이 올라오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약간은 변명이 될 것도 같은 공연 제작 후기를 써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첫 문장을 두서없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면서 시작한 이유는 이 글을 첫 번째로 하여 새로 시작해보려고 하는 연재의 제목을 drama-out*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행위로 꽉 찼던 우리의 공연이 그가 말하는 ‘드라마’는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 연출로서 참여했던 <지극히, 퍼포먼스> 제작에서 시도해본 연극 혹은 드라마에 대한 일종의 실험의 내용과 나름의 결과를 소개하고, 이러한 것들을 계기로 앞으로 이 연재에 실릴 리뷰들이 공연을 보는 어떤 관점을 취하고 있는지를 간략히 소개하려고 한다.

* 이 제목이 우리 웹진의 이름과 운을 맞춘 것은 사실이지만, drama-in의 “drama”가 어떻게 특정되어 있는지가 확실한 상태에서 그에 반하는, 혹은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내가 곧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이라고 생각해버리는 조금 더 일반적인 의미의 drama를 생각했는데, ‘극적이다’ 혹은 ‘드라마틱하다’고 할 때 그런 드라마나 연극에서 공연의 측면보다 희곡 텍스트의 측면이 강조된 의미로서 사용할 때의 드라마 같은 것이다.

<지극히, 퍼포먼스>는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미에서 드라마라고 불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출연자의 행위는 있을지언정 플롯이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인물들의 행동의 결합이 플롯이며 비극과 희극과 같은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플롯이라고 말하는데, <지극히, 퍼포먼스>에서는 행동들이 나열되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어떠한 의도 혹은 목적 하에 촘촘하게 구성/결합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처음 화두는 “빈 공간, 2시간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들이 주어진다면 나는 무엇을 할까?”였다. 즉, 의식적으로 ‘드라마’가 아닌 것을 추구 했다기보다는 우리가 만들 공연의 기본 요소에 드라마가 속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드라마는 없는 공연의 현장성(liveness)에 대한 실험의 성격이 강한 ‘연극’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이 공연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 이러한 요소들이 이렇게 표현되었고 결국 그 의미는 이러이러한 것이야’ 하고 이야기 될 수 없는 무엇인가, 그 시간에 그곳에 있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는 무엇인가가 주인공이 된 공연이 가능한가?’ 현장성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이런 질문에 가까웠다. 비록 잘 짜인 스토리나 플롯이 없어도, 잘 생기고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가 매력적인 인물(character)로서 존재하지 않아도 무대에서 행위를 하는 사람과 그 시간과 그 공간에만 속한 멋진 순간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를 실험하고 거기에 도달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각각의 출연자에 대해서 공연이 이루어질 시간과 공간에 진짜로 속할 수 있는 행위들을 찾아나갔는데, 이는 비단 공연에서 ‘연기’를 배제하겠다는 취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연기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에 대한 실험을 했다는 편이 더 적합할 것이다. 과연 연기는 관객의 존재로부터 시작되는가, 내가 아무리 무대에서 실제로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해도, 나를 보는 누군가가 존재할 때 그것은 그저 밥 먹기의 수행(performance)일까, 아니면 밥 먹는 퍼포먼스(performance)일까? 어쨌든 출연자들에게서 ‘과한’ 상상력을 동원해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환영을 만들어 줘야 하거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처럼 보여야 하는 부담을 덜어주기로 하고, 이런 기준으로 우리 무대에서 ‘진짜로’ 할 수 있는 행동들을 찾아서 공연을 구성했다. 이 행위들을 찾아서 장면을 만들고 그것들을 일련의 순서로 구성하는 작업은 무작위로 여러 개의 질문을 뽑아서 출연자들에게 질문하고, 그 중에서 앞서 말한 ‘진짜로’ 할 수 있는지의 기준에 맞는 다양한 행위들을 골라서 그것들을 흥미롭게 배치하는 과정이었다. 많은 시간이 할애되고 재미있는 과정이었지만, 그 과정이 우리의 관심의 대상도 공연의 핵심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만 소개 하겠다. 더 중요한 것은 출연자들이 각각의 행위를 무대에서 ‘진짜로’ 할 수 있게 하는 것, 혹은 ‘진짜로’하기 위해 한 가지 과제에 계속해서 집중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의도를 말하는 것 말고는 별로 할 수 있는 말이 없기에 결과적으로 공연이 어떤 형태였는지 묘사해보자면, 출연자들은 자신이 하고 싶던 것을, 혹은 좋아하거나 잘하는 것을 반복해서 했다. 인사를 계속 하기도 하고, 노래의 한 구절을 반복해서 부르기도 하고, 발레 턴을 계속해서 연습하기도 했다. 이야기를 하는 경우에도 굳이 같은 내용을 반복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결국은 한 가지 과제를 지속적으로 수행한다는 점에서 본질은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과제를 계속해서 하는 과정에서 출연자(연행자)는 그것을 ‘진짜로’하기 위해서 고군분투 했다. 때로는 고군분투하는 중에 그들의 과제가 다른 것으로 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애초에 선택한 그 과제가 공연 전체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담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러한 연행자의 충동은 존중받았다. 그것은 바뀐 과제로서 그대로 수행되었다. 이렇게 기본적으로는 하나의 과제를 수행하지만 그 과제는 하는 사람의 충동에 의해서 달라지기도 하는 장면들이 자잘하게 모여서 이 공연을 채웠다. 때로는 각자의 과제를 수행하는 출연자들이 동시에 무대에 존재하면서 그 결합이 특정 공간, 시간에 대한 연상이나 특정 상황을 암시하는 것 같아 보일 때도 있지만 그러한 연상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즉, 이 공연에서는 무엇인가를 진짜로 수행(performance)하는 것이 중요하지, ‘무엇’을 하는지, 그것을 언제, 어떤 상황에서 하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지극히, 퍼포먼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이 객관적인 눈을 가지기는 힘든 입장에서 맘대로 써본 우리 공연의 이상적인 형태이다. 실제로는 매번의 공연이 모두 조금씩 달랐고, 이 조금씩 다른 것은 어제와 오늘 공연 사이에 큰 차이를 불러오기도 했다. 다른 형태의 공연에 대한 기록을 원하는 분들을 위해 세 번의 공연을 촬영하여 편집한 동영상 링크를 첨부한다. (공연 동영상 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5fW9GmPu-2k) 기왕에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었으니 무엇인가를 ‘진짜로’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상적인 이야기를 해보겠다.



이 ‘진짜로’가 진짜로 걸리는 단어다. ‘진짜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 연기하지 않는, 최대한 ‘일상적’인 상태가 ‘진짜’ 인가? 다양한 주장이 있겠지만 묻어두고 우리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는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게 하는 것’ 혹은 ‘본연에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서 겁나게 노력하는 것’을 ‘진짜로’ 하는 것으로 특정했다. 어쩌면, ‘진짜로’라기 보다는 ‘제대로’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광장에서 누군가를 위해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목소리와 기교를 뽐낼 수도 있고, 노래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 호소하는 데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시킬 수도 있다. 나는 여기서는 후자가 ‘진짜로’ 사랑고백을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 사람이 콩쿨에 나가서 노래 실력을 펼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연의 목적인 사랑 고백에 충실한 것이 진짜라는 것이다.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다면 그 사람이 완전히 음치에 박치라고 해도, 그 광경은 기분 좋은 것, 감동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기분 좋은 광경’을 만들기를 바랐다. 어쩌면 조금은 무리한 기대일지도 모르겠지만 무대 위에서 우리가 최소한, 내가 하는 것의 본질을 알고 그 것으로 다가가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기를, 그리고 그 과정을 관객들이 ‘기분 좋게’ 바라봐 주는 상황, 그러한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기를 바랐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을 때, 그 시선이 없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선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고 내가 할 일에 계속해서 집중하는 것은 굉장히 도달하기 힘든 상태일 것이다. 그 상태는 수련을 하는 것과 비슷한 어떤 상태 같다. 비슷하긴 하지만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닌, 조금 더 장난기어린, 그래서 놀이에 가까운 어떤 것을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그 과제 자체는 변해도 괜찮은 어떤 것, 실패해도 괜찮은 어떤 것이지만 일단 과제가 정해지면 그 안에서 신나게 놀 수 있는 어떤 것이기를 바랐다.



이러한 바람과 이상들 속에서 공연이 만들어졌고, 공연이 되었고, 이제는 끝났다. 사실 만드는 우리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지만, 우리가 한 것은 어쩌면 무대라는 공간에서 할 수 있는 것들 중 각자에게 가장 쉬운 것들이었다. 많은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특정한 것을 ‘제대로’ 혹은 ‘진짜로’ 하기를 요구받지만, 우리는 아무거나 ‘진짜로만’ 하면 되었으니까. 작업인원 중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작업의 다른 점은 숨을 구석이 없다는 것이랄까. 어차피 뭘 하든 겪게 될 불인데, 잘 비껴가는 게 아니라 불꽃 한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저 불 한가운데에 가면 뭐가 있는지 알고 싶어! 우리 몸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 뭐가 있긴. 재가 된 내가 (혹은 나였었던 무엇인가가) 있겠지. 어떻긴. 개 뜨겁겠지. 내가 그 두려움만 벗어던진다면, 그래서 진짜 활활 타올라버린다면 공연은, 좋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흥미로울 것 같긴 하다.” 여기서 ‘뭘 하든 겪게 될 불’이라는 말을 나는 어떤 형태의 공연을 하든지 ‘진짜로’ 할 때 겪을 수밖에 없는 고군분투라고 해석했다. 나는 드라마가 있든, 없든, 뭐가 되었든 그 공연이, 그 공연에 출연하는 사람들이 활활 뜨겁게 타오르길 바란다. 겁나게 뜨겁게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기를 바란다. 겁나게 집중해서 자신의 과제를 하고 있는 누군가를 공연의 현장에서 보고 그 에너지를 느끼기를 원한다. 확실히 이런 것들은 앞서 말한 일반적인 의미의 드라마에 연관된 것은 아니다. 텍스트나 어떠한 의미를 위해 봉사하는, 그 의미나 이야기를 향해 위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요소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불타오르지 않아도 연극의 의미망은 구축될 수 있고, 관객은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살아있는 공연 현장에서만 볼 수 있는, 드라마에 봉사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기억되기에 가치 있는 그러한 순간들을 보고 싶고 기억하고 싶다. drama-out 연재를 이러한 순간들을 기억하기 위해, 혹은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공연들에 대한 이야기를 쌓는 통로로 삼고자 한다. 비슷한 지점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과의 대화도 고대해본다. ㉦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