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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12일 수요일

To be or not to be ‘Hamlet’, that is the question!

글_김신록

안녕하세요. 배우 김신록입니다. 지난 8월 17일부터 9월 1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된 연극 <비평가>에서, 여자배우인 저는 남자 옷을 입고 ‘스카르파’라는 남자작가를 연기했습니다. 지적이고 밀도 높은 2인극의 리딩 캐릭터를 연습하면서는 ‘내 깜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다’는 두려움과 걱정이 앞섰지만, 막상 공연이 올라가고 관객을 만나고 마무리되는 과정을 거치면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런 인물을 앞으로도 연기하고 싶고, 할 수 있겠다’는 은근한 용기가 생겼습니다.   

작가인 ‘스카르파’는 인정욕구, 정복욕, 승부욕, 명예욕이 강한 인물입니다. 자신의 작품을 좋아하는 대다수의 관객들 뿐 아니라 자신의 작품에 찬사를 보내지 않는 마지막 한 명의 관객인 비평가까지 녹다운 시키지 않고는 견디지 못합니다. 물론 그 욕구의 저변에는 사랑받고 싶은 연약한 마음, 낮은 자존감 등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으나, 겉으로 보기에 그는 오만하고 도발적입니다.

스카르파가 짧게 구현하는 ‘권투경기장면’을 연기하기 위해 저는 잠깐 동안 권투를 배우러 다녔습니다. 관장님은 제게 ‘성격이 남자 같아서 우직하게 시키는 대로 해내니까 실력이 빨리 는다’며 칭찬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제가 기대 혹은 편견과는 다른 모습을 보일 때 ‘남자같다’고 말합니다.

공연기간 중 지인들이 남성인물을 연기하는 어려움에 대해 묻곤 했는데, 저는 스카르파가 ‘남성이기 때문에’ 어려웠던 점은 몇몇 기술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없었습니다. 사실, 10년 동안 절필하다시피하며 스승에게 인정받는 걸작을 쓰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스카르파는 저와 많이 닮았습니다. 우리 모두 ‘세상이 나를 몰라준다’는 억울함이나 패배감, 이겨버리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주는 불안과 고독을 알고 있지 않나요? 제 성격이 특별히 ‘남자 같아서’ 스카르파를 이해하는 건 아닐 겁니다.

오히려 연습 때 ‘남성인물을 표현해야 한다’는 심리적인 부담감이 문제였지요. 부담감을 안고 첫 공연을 올렸을 때, 공연을 본 선배가 ‘남자처럼 하려고 하지 말고 작가처럼 해봐!’라고 조언해 줬는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 이 인물의 핵심은 남자라는 게 아니라 작가라는 거지!’ 그 날 이후 실체 없는 ‘남자처럼 연기해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니 많은 것이 명쾌해졌습니다. ‘남자’가 아니라 ‘작가’를 연기하는 것이 중요했던 겁니다.

<비평가> 공연 내내 여자배우가 남성인물을 연기하는 ‘젠더 프리 캐스팅’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과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여러 SNS에 올라 온 후기와 촌평들을 보면 관객들이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이건 화자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 아닌가?’, ‘이런 이야기를 그동안 왜 굳이 남성인물들이 해왔을까?’하는 의문이 생긴 겁니다. 저 역시 마치 개안하듯, ‘그렇지, 내가 왜 그동안 햄릿이 아니라 오필리어를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라는 신선한 의문을 갖게 됐습니다.

평들 중에는 ‘여자배우가 남성인물을 연기하면서 극이 새로운 관점에서 완성되었다’는 내용도 다수 있었습니다. 관객들의 해석을 접하면서, 어쩌면 이런 방식의 젠더 프리 캐스팅이 고전작품, 혹은 기존의 전반적인 드라마 연극으로 하여금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동시대적 말 걸기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직관적인 방법론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평가> 공연을 통해, 배우와 인물 간의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창작자의 텍스트 해석과 구현, 관객의 해석과 감상에 있어 다층적 관점의 다양한 소통 가능성이 열리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스카르파는 마음의 스승이자 혹독한 비평가인 볼로디아의 마음에 드는 작품을 쓰려다 실패하고, 그에게 대항하는 작품을 쓰려했지만, 결국 극의 말미에 이르러서는 이 역시 그에게 얽매이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저는 그동안 수동적으로 쓰여 진 희곡 속 여성인물들을 조금이라도 더 주체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고 표현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주체적인 오필리어’를 고민하는 것을 넘어, ‘인간 햄릿’을 연기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한 인간으로서, 한 명의 배우로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존재론적인 고민을 무대에서 발화해보고 싶습니다. 저에게는 그 말이 ‘데이지 꽃, 제비꽃, 당신에게 드릴게요’라는 말보다 더 매력적입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데이지 꽃이나 제비꽃이 더 매력적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권이 있느냐 하는 문제겠지요. 무대 위에서 이 선택권이 발현될 때 관객들은 또 설레는 마음으로 여자배우가 발화하는 ‘사느냐 죽느냐’에, 혹은 남자배우가 발화하는 ‘데이지 꽃, 제비꽃’에 존재론적인 사유와 감상을 더해 줄 것입니다.

To be or not to be ‘Hamlet’, that is the question!
이 시대에 여자배우가 햄릿이 될 수 있을까 없을까, 그것이 문제로다!
이 시대에 여자배우가 오이디푸스가, 리처드3세가, 파우스트가, 바냐가, 쟝이, 프락터가, 에스트라공이, 알런이, 살리에리가, 쥬코가 될 수 있을까요?
정말이지, 존재론적인 질문이지요!

<비평가>에서 스카르파를 연기한 김신록 배우
사진 더보기 https://photos.app.goo.gl/WPjvkdtUMUk3pN1B6


<비평가> 프로그램북에 수록된 김신록 배우의 글
(위 앨범 링크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2018년 8월 9일 목요일

a postscript to “애도의 연극, 연극적 애도”

임승태


사계절 연극제에서 만났던 <임영준 햄릿>을 두산아트센터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다. 내 느낌엔 내용이 더 늘어난 것 같은데 연출의 말에 따르면 2분 정도가 추가되었을 뿐이라 한다. 어쩌면 리뷰를 쓴 이후에 다시 보는 것이라 특정 장면이 더 특별하게 느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론 지난 리뷰에서 언급했던 몇 부분이 수정된 것도 발견했다. 그 변화에 내 글이 영향을 끼쳤는지는 확인할 수 없고 그게 중요하지도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반가운 일이다. 그래서 새로운 글을 쓰기보다 지난 해 <인디언 밥>에 썼던 글(http://indienbob.tistory.com/1033)을 약간 다듬어 2018년 공연의 리뷰로 대신한다. 다만 한 해가 지나면서 지하철 효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관객이 파악하는 속도도 느려진 게 아닌가라는 괜한 걱정이 앞선다. 욕심 같아서는 임영준이 5년에 한번쯤은 이 연극을 다시 해주면 좋겠다. 그래서 자칭 ‘대배우’ 임영준이 진정한 대배우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들의 팬들이 함께 보고 축하하며, 또한 우리 사회가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무대와 객석이 함께 되새길 수 있기를 바란다.

***

<햄릿>이 연극에 대한 연극이라는 사실은 그 유명한 극중극을 떠올려 보는 것으로 충분히 확인 가능하다. 다만 메타극(metatheatre)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라이오넬 에이블(Lionel Abel)이 이 작품에 대해 언급했던 한 가지 내용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햄릿은 드라마 역사상 처음으로 극중 인물 스스로 ‘세상은 연극’(theatrum mundi)이라는 인식 하에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물이다. 또한 이 극의 다른 등장인물들 역시 적극적으로 플롯을 꾸미고 다른 인물을 조종하고 움직인다. 내 생각엔 바로 이러한 특성이야말로 <햄릿>을 연기하고 연출하는 연극인들을 자극하여 여러 가지 연극적 실험을 이어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말하자면 <햄릿>은 극중 인물도, 그것을 공연하는 배우와 스태프도 모두 극작가 의식에 충만해야 하는 작품인 것이다. 

<임영준 햄릿>은 공연 중 반복되는 여름 노래 메들리만큼이나 밝고 경쾌한 톤을 유지하려 애쓴다. 하지만 그 과장된 쾌활함 사이에는 데뷔 ‘11년차’ 연극배우 임영준의 자기 연민이 언뜻언뜻 베어난다. 무려 <햄릿>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임영준은 관객이 기대할 법한 연극을 시작하는 대신 자기 얘기, 그중에서도 자기가 해왔던 연극 이야기를 자랑스레 꺼낸다. 하지만 정작 연습할 때 입었다가 무대 의상이 되었다는, 속옷인지 겉옷인지 구분하기 힘든 쫄 반바지 하나 입고 있는 배우의 행색은 우습고 또 서글프다. 근육과 살이 떨리고, 물인지 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액체를 튀기며 자신의 지난 10년(2017년 기준으로 10년이지만, 지난 1년간의 공연 내역이 추가되지는 않았다)을 되돌아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배역도 소화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이 배우를, 심지어 그의 공연을 이미 본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몰라본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한번 각인하면 잊기 어려운 배우가 또한 임영준이라는 것 또한 나는 지난 1년간 경험했다.)

<햄릿>은 지극히 가족극이기도 한만큼 <임영준 햄릿>에 배우의 부모님이 (영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부모의 등장은 그토록 당당하던 임영준을 한순간에 조그맣게 만든다. 선왕의 유령이 복수를 재촉할 때 안절부절못하는 왕자처럼 임영준은 허상에 불과한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날 때 욕조 뒤로 숨는다. (2017년 공연에서는 공간소극장의 구조적 이점을 살려 ‘쥐구멍’같은 공간으로 잘도 숨어 들어갔다.) 흥미로운 건 이 상황이 계획된 것임을 알면서도 그의 반응을 보며 관객도 적잖이 긴장하게 된다는 점인데, 그건 아마도 관객 다수를 차지한 임영준의 또래들이 비슷한 심정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님이 나를 낳았을 때보다도 더 나이를 먹도록 여전히 변변한 자리 없이 제 앞가림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머지않아 TV에 나오는 성공한 배우가 되겠다는 임영준의 다짐을 들으며 관객들은 TV라는 말을 대신할 각자의 단어를 속으로 되새긴다. (극장이 넓어져서인지, 관객 구성이 달라져서인지 전년도 만큼의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 관객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유쾌했다. 어쩌면 그 원인을 배우에게서 찾을 수도 있다. 마침 오늘 공연에는 그의 부모님이 객석에서 ‘직관’하고 계셨다.)

아무튼 이 연극은 배우 임영준에 대해, 그가 해온 연극에 대해 말하며 <햄릿>의 메타극적 특성을 십분 활용해 적잖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으로만 80분을 채웠다면 그의 열성 팬이나 친구들을 제외한 나머지 관객이 끝까지 공감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후안 마요르가의 <비평가>라는 희곡에 이런 대사가 있다. “연극에 대한 연극은 연극을 만드는 사람에게만 재미있습니다.” 제작팀의 지인이 아닌 이상 이 소규모 연극을 보러 올 정도의 관객은 이미 연극에 대한 애정 혹은 애증을 가지고 있을 터이니 무대에서 되풀이되는 연민의 정서가 특별할 건 없다. 모든 연민이 자기 연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배우로 살기의 고됨만 있었다면 이 작품은 임영준 본인이 공연 중에 언급하듯 “제목만 햄릿”이라는 핀잔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임영준의 다재다능함을 한껏 보여준 다음 하수민, 김정 두 연출가는 애도라는 중요한 주제를 적절히 등장시킨다. 애도에 주목하는 것은 적어도 2014년 이후의 한국 <햄릿>의 주된 흐름이다. 우리는 더 이상 라깡의 복잡한 설명 없이도 이 작품에서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슬픔이라는 주제를 찾을 수 있다. 복수를 실행하지 못하고 끝까지 괴로워하는 햄릿의 말과 행동은 비평가들이 오래도록 풀지 못한 수수께끼였지만, 우리 사회는 참사와 그로인한 막대한 슬픔을 맞닥뜨렸을 때 비로소 이 인물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간 국내에서 제작된 <햄릿>은, 예컨대 김현탁의 <망루의 햄릿>과 이성열의 <햄릿아비>와 같이 아버지와 누이를 잃은 인물의 슬픔을 종종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애도와 병치시켰다. 비록 얀 코트(Jan Kott)가 이 말을 하고도 반백년이 넘게 흐르긴 했지만, 세월호를 통해 셰익스피어는 비로소 우리의 “동시대인”이 되었으며, 애도는 가상의 인물이 아닌 실제 대상을 향한 것이 되었다. 그날 이후 유령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 기억하고 애도해야할 대상이 누구인지 찾으라고 요청한다.

무대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우던 임영준은 “배고프다”란 말과 함께 컵라면 한 사발을 비운다. 이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이 어리둥절할 수도 있으나, 앞선 쾌활함이 과장된 것임을 감지했다면 이제 드디어 나올 게 나온다는 느낌으로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을 것이다. 배고픈 예술가의 식상한 상징일 수도 있었던 컵라면 장면은 전동차 효과음 소리가 더해짐으로써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사망한 십대 정비사에 대한 애도로 이어진다. 부정적 지표에서는 여전히 OECD 으뜸을 놓치지 않는 대한민국이기에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 일은 이 나라에서는 유감스럽게도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공교롭게 세월호 희생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1997년생이었던 김 군의 유품 가방에 들어 있었던 컵라면은 많은 사람에게 슬픔과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하여 임영준이 컵라면을 먹는 행위는 자신의 배고픔을 드러내기보다 김 군이 먹지 못한 컵라면을 대신 먹는 하나의 제의로 받아들여진다. 누군가를 대신하는 것이야 말로 배우의 본분이거니와, 그 순간 임영준이 햄릿을 연기하는 목적이 단순히 모든 남자 배우의 로망이라서가 아니라, 여전히 우리가 애도하고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죽음에 있음이 드러난다. 개인적 차원의 살풀이로 시작한 이 연극은 어느덧 사회적 차원의 씻김굿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사회적 책임감 때문일까. 임영준, 그리고 김정, 하수민 두 연출가는 셰익스피어 숭배자들이 보기엔 텍스트를 띄엄띄엄 읽고 A급 작가에 어울리지 않는 저질 B급 코드를 총동원해 공연을 만든 듯 보일지 몰라도 실은 꽤나 성실한 모범생에 더 가깝다. (공연장을 나가며 나는 무대 바닥에 결코 가볍지 않은 셰익스피어 관련 서적이 놓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공연의 첫인상은 대사를 이곳저곳에서 마구잡이로 발췌한 듯한 느낌이 들지만, 이내 햄릿의 주요 대사가 조목조목 사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가장 유명한 제4독백이 빠질 수 없다. 임영준은 오디션을 보는 듯 여러 가지로 연기 톤을 바꿔가며 이 독백을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낭송한다. 그중에서도 햄릿이 단도를 꺼내들기 직전의 대사를 통해 우리는 왜 <햄릿>이 지금 여기서 공연되어야 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개별 오디션은 번번이 이 대사 시작 부분에서 멈추는데 이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아래 대사에 더욱 주목하게 만든다.)

그 누가 견디겠는가, 세상의 채찍과 모욕을,
폭군의 횡포를, 가진 자의 오만함을,
실연의 아픔을, 법의 더딤을,
관리의 교만을, 유덕한 사람이
무지렁이들에게 받아야 하는 모욕을.
이 단도 한 자루면 자신을 말끔히
청산할 수 있는데.

여기서 집중적으로 언급되는 사회적 부조리는 왕자라는 지위에서 쉽게 되뇔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차라리 백성을 개(돼지)로 여기는 거트루드가 그때나 지금이나 더 현실적이다. 일단 왕자가 독일에서 공부를 많이 해서, 아니면 연극을 통해 세상의 아픔을 간접 경험해서라고 해두자. 중요한 건 이 대사가 셰익스피어 당시의 관객도 400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 관객도 여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사실이다. <임영준 햄릿>이 공연된 2017년, 그리고 2018년 여름에 이 대사는 구체적으로 구의역 김 군의 이미지로 구체화됨과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권력을 사유화했던 대통령, 조물주 위에 있다는 건물주의 갑질, 촛불을 탱크로 막으려 했던 계획, 약자에게만 엄격한 법 따위를 떠올리게 한다.

위 대사는 공연의 정확한 워딩을 기억하지 못하는 탓에 졸역을 덧붙였으나, 적어도 이 독백의 첫 마디는 <임영준 햄릿> 프로덕션의 것을 직접 인용해야 한다. “살아남느냐 사라지느냐.” 그동안 살펴본 <햄릿> 번역서와 공연에서도 “To be, or not to be” 를 이 만큼 적절하게 옮긴 사례를 나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느냐가 먼저냐 죽느냐가 먼저냐가 문제였던 시절이 있었다.) 살아남느냐, 사라지느냐가 오늘날 한국 젊은이들의 일상적 질문이라는 사실이 “왜 햄릿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나머지 부분을 구성한다. 이 질문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햄릿을 연기하는 배우 임영준의 질문이자 햄릿을 연구하며 비정규직 교육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나의 질문이기도 하다. 관객들은 경력직만 찾는 구인 공고 앞에서, 무서운 속도로 사라져 가는 통장 잔고 앞에서, 오르지 않는 급여와 오르기만 하는 전월세금 앞에서 이 질문을 떠올린다. 아프다는데 그러니 청춘이라는 둥 붙잡아 주지는 못할망정 더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둥의 정신승리법을 알려주는 기성세대는 슬픔의 원인을 제공하고선 위로하는 척하는 클로디어스를 닮아 있어서 더 밉살스럽다. (물론 임영준 배우가 늘어난 나이와 옆구리 살 때문에 스스로를 햄릿이 아니라 클로디어스와 더 가깝게 느껴진다고 고백하듯 우리도 누군가에게 클로디어스처럼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다만 그러하더라도 임영준과 함께 햄릿의 질문을 되뇌는 동안 우리 모두는 어찌어찌 여전히 살아남았음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존재하는 동안 이 우울한 질문이 계속될 수도 있겠으나, 역설적으로 이 질문이 우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입증해준다. 이게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하지만 <햄릿>은 남아있는 자들이 먼저 가야했던 자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몫까지 살아낼 책임이 있음을 말한다. 선왕의 유령은 햄릿에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말한다. 햄릿 왕자도 마지막 순간 호레이쇼에게 살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 달라고 부탁한다. 호레이쇼에게 맡겨진 임무는 특별히 영웅적이지 못한 우리 대부분의 것이기도 하다.

추신2
지난 1년간 조연출 박정호는 김정 연출의 시그니처 코드 중 하나로 불러도 무방할 수준으로 등장했다. <임영준 햄릿>은 김정 연출의 작품에서 조연출 박정호의 무대 위 역할이 가장 성공적이었던 사례로 언급될 만하다.

2017년 1월 1일 일요일

취지와 치료를 넘어: ‘세월호 엄마들의 연극’을 작품으로 보기


성지수

‘세월호 엄마들의 연극’ 논하기의 어려움


(1) “세월호 참사를 겪은 단원고 피해(희생, 생존) 학생 엄마들이 세상과 소통의 폭을 넓히고자 극단을 만들어...”
(2) “웃음을 잃었던 엄마들 파안대소...”

위의 두 인용문은 극단 노란리본1)의 연극 <그와 그녀의 옷장>을 소개하는 기사들의 표제와 부제다.2) 프로그램 북에도 배우들이 “세월호 가족들”이란 사실이 표지에 명시되어 있으며, 공연 시작 전 무대에 오른 연출은 모든 배우가 ‘연극을 처음 해보는 세월호 엄마들’임을 밝힌다. 공연이 끝나면 “끝까지 밝혀줄게”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나온 배우들이 한 명 한 명 “0반 00엄마”로 자신을 직접 소개한다. 그러니까, 외부의 시선으로 보나 내부의 시선으로 보나 이 연극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면서 가장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은 ‘세월호 엄마들이 직접 무대에 오른다’는 것에 있다. 희곡 <그와 그녀의 옷장>은 세월호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참사 전에 창작된 작품이지만, 극단 노란리본의 연극 <그와 그녀의 옷장>은 반박할 여지없이 ‘세월호 연극’인 까닭이 거기에 있다.

직접 당사자들인 ‘세월호 엄마들의 연극’을 본 후 그 기획 취지나 당사자들에게 미친 긍정적 심리치료 효과 이외의 것에 대해 논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물론 세월호 사건이 아직 종료(철저한 진상규명부터 책임자 처벌, 적절한 보상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까지)되지 않은 시점이기에 이 연극을 ‘날카로운 관객의 눈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 노란리본의 연극 <그와 그녀의 옷장>을 이념 선전도구나 치료 프로그램 정도에 머무르지 않게 하기 위한 한 가지 방안으로서, 이 연극을 다른 공연예술과 동등하게 비평하는 것을, 하나의 개별 예술 작품으로 바라보는 것을 시도하려 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연극 작품으로서 극단 노란리본의 <그와 그녀의 옷장>에서 주목할 지점을 정리하였다.


1. 어색함을 스타일화하기


배우들의 연기는 아주 잘 한다고 보기에 무리가 있다. 그렇지만 어색한 연기가 부족함이 아닌 예술적 선택으로 느껴지도록 하는 장치들이 마련되었고,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어색함은 참고 보아줘야 하는 것이 아닌 즐길 수 있는 양식이 되었다. 우선 읽기만 해도 재미있는 대본이 연극 <그와 그녀의 옷장>에 큰 힘이 되었다.3) 웃음을 주기 위한 대사와 설정이 한 시간 반 동안 끊임없이 반복되고 변주되면서, 처음에는 웃지 않았던 관객들도 어느 순간에는 어이없어서라도 받아들이고 웃게 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물을 마시고 싶다는 호남의 부탁에 순심은 관객 ‘정수기’에게 다가가 물을 뜬다. 이 관객은 극이 끝날 때까지 호남이 출퇴근하면서 수차례 말을 거는 ‘정숙이’로, 집회 현장에 나온 ‘정숙이 위원장’으로 불려 웃음을 자아낸다.)

배우들의 대사와 연기 방향이 관객을 향하고 사투리 등 특정 억양을 과장하여 살리는 양식적인 연기를 선택한 것도 좋은 지점이었다. 소위 말하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추구하였다면 더 크게 느껴졌을 연기 경험의 부족(대사 전달 실패나 ‘발이 바닥에 붙지 않는 것,’ 즉 부산스러운 몸놀림)이 많은 부분 노출되지 않았다. 배우들은 관객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사 전달을 정확히 했다. 처음 해 보는 분들 치고 잘했다, 보다 더 좋은 찬사를 들을 실력이었고, 이는 적절한 대본과 알맞은 연극적 선택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2. 취지와 표현 양식의 연관성


이 작품을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말은 배우들의 도전 취지이자 연출의도인 “세월호 엄마들이 배우가 되어 관객 앞에 선다”일 것이다.4) 이것이 실제 연극과 동떨어진 취지가 되었다면 연극은 그 의도와 달리 교조적이고 불편한 자리가 되었을 것이며, 관객은 ‘엄마들’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 이상의 마음을 가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극단 노란리본의 연극은 양식화된 연기, 관객에게 지속적으로 말을 거는 장면, 관객의 직접 호응을 유도하는 장면, 메타극적 대사 등 연극적 표현 양식을 통해 이를 작품 속에 효과적으로 구현해냈다.

대부분의 장면에서 배우들은 관객을 똑바로 바라보며 서 있었다. 배우들이 상대 배우를 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에 빠져 익살스러운 장면에 웃을 때는 크게 인식하지 못하다가 배우들이 시종일관 관객들을 마주하고 섰던 것을 상기하면 그들이 ‘세월호 엄마’이며, 정치적 주체로서도 사회가 강요하는 희생자 정체성에 스스로를 묶지 않고 적극적으로 다양한 활동들을 주도해 나아왔던 사람들이라는 점을 상기하게 된다. (남성 배역임에도 여성임을 숨기지 않았던 점, 옷이 중요한 연극에서 팔찌, 손수건, 배지 등으로 세월호 표식을 한 것은 이 상기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박수와 함성처럼 관객들의 직접적인 호응을 유도하거나, ‘정수기-정숙이’를 관객으로 설정하여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방식을 택하기도 했다.

희곡의 메타극적 대사들도 “관객 앞에 선 세월호 엄마들”을 잘 구현한 장치가 되었다. 순애에게 사랑에 빠져 매일같이 집회에 참석하는 수일을 보여준 후 “5분 만에 노동자 의식이 성장했구나! 이 연극은 뭐 이리 진도가 빨라!” 한다던가, 5번 이상 반복/변주되는 상황이 마무리될 때 “잠깐, 이 장면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하는 대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사실주의 연극처럼 관객들에게 극중 상황에 몰입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것들이 ‘연극’임을 환기하는 효과를 가진다. 연극 <그와 그녀의 옷장>에서는 이것이 모든 연기자가 ‘세월호 엄마들’이라는 사실과 만나면서 ‘세월호 엄마들이 연극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배우로서 그 대사를 발화한 세월호 엄마들’의 실존이 부각되는 순간을 만들어냈다.


3. 시선의 역전이 일어나는 순간


연극은 불균형한 바라보기가 극대화된 형태의 예술형식이다. 관객은 어둠 속에서 배우를 훔쳐본다. 관객에게 허용된 극장의 언어는 박수와 환호, 웃음뿐이다. 배우들이 ‘세월호 엄마들’일 때 이 불균형은 어쩔 수 없는 죄책감을 낳는다. 세월호 가족들의 다양한 활동을 직/간접적으로 지켜볼 때면 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것은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문구로 약속했던 것을 과연 내가 잘 지키고 있는가, 그런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는가에 대한 마음이기도 하지만, 천일이 가까워지도록 자신의 아픔을 입증해야만 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타인의 고통과 재난은 비극적인 일인 동시에 관음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특성을 지닌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죄책감, 그 어쩔 수 없는 감정이 해소되는 시선의 역전 순간이 있었다. 세 개의 옴니버스 극이 모두 마무리되고 피켓을 든 배우들이 무대 위로 나와 인사를 한 후, 연출까지 무대에 올라 관객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였다. 관객에게 함께 부르자고 청하는 노래는 민중가수 윤민석이 작사, 작곡한 <약속해>다. 관객들에게 가사를 띄워주는데, 그 처음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너희의 엄마다 / 우리가 너희의 아빠다 / 너희를 이 가슴에 묻은 우리 모두가 엄마 아빠다” 쉽게 부를 수는 없는 노래라는 생각이 들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잊지 않겠다,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했음에도 참사를 당한 아이들의 가족이라는 선언(가족이 되겠다, 가 아니라)은 가사를 보자마자 가슴이 먹먹해지게 만들었다. 부를 수 없는 노래를 부르도록 요청받은 순간, 이는 불편함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곧 자발적으로 함께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관객에게 좋은 공연을 보여준 배우들이 불 켜진 객석을 향해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한 시간 반 동안 관객을 즐겁게 해 준 배우들에게 박수나 환호성 이상의 것으로 보답할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선을 다해, 그리고 성공적으로 좋은 공연을 보여준 배우들이 커튼콜 후 “0반 00엄마 000”로서 인사를 하고 소감을 밝힘으로서 ‘세월호 엄마들’로 사람들 앞에 선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작은 다짐을 담아 노래한다. ‘세월호 엄마들’이 객석에 앉은 사람들을 본다는 이 바라봄이 역전되는 순간은 또한 연극을 ‘보면서’ 순간순간 느꼈던 시선 불균형의 죄책감까지 덜어주었다.


취지와 치료 너머를 바라보자, 취지와 치료의 성공이 보이다


글의 처음을 열었던 인용문으로 다시 돌아가 살펴보면, (1)은 이 연극이 ‘예술의 사회적 소통 기능’에 주안점을 두었음을 보여준다. “집회, 간담회, 단식, 삭발까지 해 봤지만, 한계를 느껴 더 자연스럽고 쉽게 국민에게 다가가 소통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창작한 연극이라는 이어진 소개는 이를 더욱 명확하게 만든다. 시민들이 재미있고 즐거운 마음으로 세월호 사건에 마음을 모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연극의 주된 취지이다.

이어서 (2)는 (‘배우’가 느낄 수 있는) 연극의 심리치유 효과가 이 연극에서 작용했다는 것을 말한다. 스브스 카드뉴스5)
는 조금 더 직접적으로 이를 표현한다. “그리고 치료를 위해 연극에도 도전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극에 나오는 여러 감정을 표현하면서 내가 조금씩 치유되고 있다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연출가는 프로그램 북에서 연출의 변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월호 가족들에게 마음껏 웃을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피해 가족들이 억눌리고 외면당해왔던 수많은 감정을 표현하고 이를 상대 배우와, 관객과 나누는 과정에서 예술의 치료 효과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 역시 이 작품의 큰 의의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 그러니까 극단 노란리본의 <그와 그녀의 옷장>의 기획의도이자 가장 큰 의의 앞에서, 세월호 사건의 직접 피해자가 아닌 시민(더 솔직해지자면, 참사 규명을 위해 아주 적극적으로 동참하지는 못했던 나약한 소시민)인 관객에게 문제가 발생한다. 이 연극을 보면서 눈물 끝에 웃음을 보여주시는 ‘엄마들’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 용기를 내 준 것을 감사하는 마음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을까. 연극을 본 후에 ‘세월호 엄마들’만이 아니라 공연 전반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가질 수 있을까.

첫 번째 의문점은 관람자가 상연자를 희생자 정체성으로만 규정해버릴 위험에 대한 염려를 담는다. 상연 전 연출가가 직접 관객들에게 곧 무대에 오를 분들 모두가 연극을 처음 해 보시는 분들이다, 작품 연습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코미디 연극이니 많은 웃음을 부탁한다 등(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많이 부족하지만 예쁘게 봐 주세요.’)의 멘트를 했을 때 이 염려는 증폭된다. 분명 그 분들의 용기는 놀라운 것이지만, 그들이 그 용기로 들고 나온 것이 연극 작품이라면 이를 관람한 관객이 그들을 배우로 보아야 하고, 용기뿐 아니라 연극 자체에 대해 논해야 한다. 무대에 오를 사람들에 대해 안쓰러운 마음 혹은 기특한 마음만을 가지는 관객은 실제 작품의 가치와 상관없이 무대를 학예회로 전락시킨다. 때문에 그들의 용기에만 집중하고 용기만을 평가하는 것은 그 평가가 아무리 긍정적일지라도 명백한 폭력이다. 배우로 선 사람들을 배우로 이야기해야 하지, 불쌍하고 기특한 사람들로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두 번째 의문은 창작자에 대한 선입견에 갇혀 창작물에 대한 평가를 절하하게 될까 걱정하는 마음이다. 예를 들어 정의신의 작품을 보며 재일조선인으로서 겪은 그의 개인적인 아픔만을 느끼고 돌아간다면 이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정의신을 평가 절하하는 태도일 것이다. 누군가 애써 차려준 밥상 앞에서도 그 맛과 행복감은 표현하지 않고 계속해서 차린 이의 정성만을 논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정성을 폄하하는 일이 된다. 또한 극장을 넘어서는 특정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연극작품들이 놓치고 있는 것, 즉 취지만 좋다고 좋은 연극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미학적 의의가 있어야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원래의 취지 달성도 실패한다는 사실, 그러므로 창작자의 희생자 정체성만을 내세운 엉성한 작품을 통해 교조적으로 관객을 가르치려고 들거나 슬픔, 분노를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관객과 연극의 의도 양쪽을 고립시키는 일이라는 것 역시 지적하고 싶다.

때문에 연극의 사회적 소통 기능이나 심리 치유 효과는 연극의 미적 가치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즉 비-세월호 가족 관객(‘일반’ 관객이라는 표현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용어)이 ‘세월호 엄마’를 한 명의 배우로, 이 연극을 개별 예술작품으로 볼 수 있을 때, 좀 더 편안하게 소통하고자 했던 시도도 성공적이었다 할 수 있다. 윤리적 문제라 할 수 있는 창작자-수용자 간 관계의 문제는 연극이라는 매체를 통해 모인 사람들(창작자와 수용자, 직접 피해자와 사건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새로운 담론의 장을 형성하여 사회에 파급효과를 내고자 하는 연극들의 성패 문제와 직결되는 문제인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무시되는 문제이기에 주요하게 다뤄야 한다.

극단 노란리본의 연극 <그와 그녀의 옷장>은 작품의 의도가 형식으로 잘 녹아들어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작품이다. 배우로 선 ‘세월호 엄마들’과 관객으로 찾아 온 사람들이 마주보고 서로에 대한 책임감을 느낌으로써 평등한 관계가 구축될 수 있고, 때문에 진정한 심리치료가 가능한 장이기도 하다. 공연을 본 후 연극의 부족함을 애써 외면하기 위해 취지나 노력만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연극 작품을 본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어떤 사명감으로 극장을 찾은 관객들도 즐겁게 관람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오는 관객들도 마주보고 함께 다짐하는 순간을 경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2017년 새해에 성미산 마을극장을 시작으로 더 많은 곳에서 더 많은 관객을 만날 이 작품이, 배우들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다.

아쉬운 점도 있다. 수일에게 예쁜 목도리 선물을 받은 순애는 밤에 혼자 찾아 온 용역 깡패에게 밀쳐지고 물도 맞는다. 강한 여자와 심약한 남성의 연애 스토리의 스테레오타입을 그대로 따르는 셈인데, (장르를 불사하고 여성은 이전에 강인한 캐릭터가 본격 연애를 시작하기 직전이 되면 갑자기 다른 남성에게 억울하게 봉변을 당하며 유약한 모습을 보인다.) 이야기가 끝나가는 지점에 뜬금없이 등장해서 조금 황당하게 느껴진다. ‘여성성’의 부각, 맞서 싸우는 것의 어려움을 보여줘야 할 필요성, 혹은 그저 둘이 한층 가까워질 계기가 필요했을지 몰라도 불필요한 전개다. 극단 노란리본이 현재로서는 세월호 ‘엄마’들의 극단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굳이 극의 말미에 와서 그녀들이 ‘관객 앞에 배우로 당당히 선 여성들’이라는 점을 희석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작 오세혁 연출 김태현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
2016년 12월 29일 19시 관람, 서울혁신센터 다목적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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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31일 토요일

실패한 어떤 재현에 관하여: 《탈출 ― 날숨의 시간》

글_박종주

0.
의아했다. 이런 주제로 무슨 연극을 만들 수 있을까. 뻔한 고통의 나열이 아닌, 무엇이 가능할까. 궁금했다. 그래서 연극의 1부는 참신했다. 1부 내내 배우들이 하는 일이라곤 무대를 이리 저리 뛰고 걷고 기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국경을 넘고 중국과 베트남과 태국을 거쳐, 마지막으로 문턱을 넘기까지, 배우들은 움직이다가, 숨었다가, 또 움직였다. 무리를 이끄는 이는 이따금 외국어로 협상을 했다. 그 동안 무리는 숨을 죽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움직이기만 할 것인가 싶을 때까지,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1.
극장 입구를 통과하자 무대의 뒤가 나왔다. 덧마루를 쌓아 만든 더미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돌 더미 같기도 했고 참호 같기도 했고 끊어진 도로 같기도 했다. 무대를 가로질러 객석을 향했다. 잠시 후 불이 꺼지고, 어슴푸레한 무대 뒤편의 높은 곳에서 수상스런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허리를 숙인 채 걷거나 뛰는 배우들, 계단인지 비탈인지를 내려와 무대를 가득 채운 수많은 배우들. 무대가 밝아지고, 누군가 허공을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무리는 따라서 허우적허우적,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소리는 뒤늦게 흘러 나왔다. 첨벙거리는 물소리.
몇 번인가 총소리가 울렸다. 총소리가 울리면 무리는 몸을 낮추었지만, 결국 누군가는 총에 맞고 말았다. 팔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무리는, 여러 개의 국경을 넘었다. 끊임 없이 숨고 도망치는 여정이지만, 사람들은 할 일이 많았다. 몰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었다. 짐을 버릴 수도 없었다. 총에 맞은 팔을, 결국 도끼로 잘라내는 순간에, 누군가는 똥을 누었다. 그렇게 살아 남은 이들이, 마지막 국경을 넘었다.
누군가는 만둣집을 차릴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노래를 할 것이라고, 누군가는 춤을 출 것이라고 했다. 꿈을 안고, 국경을 넘었다. 가족을 두고, 고향을 벗어났다. 팔을 잃고, 희망을 구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다. 남한이라는 땅은.

2.
2부가 시작되고, 드디어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뻔한 고통의 나열이 아닌, 무엇이 가능할까. 작가에게도 연출에게도 뾰족한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얽혔다. 만둣집을 열어 자리를 잡은 부부의 이야기와, 그 만둣집에서 서빙을 하며 쌍꺼풀 수술비를 모으는 이의 이야기와, 밤무대에서 돈을 벌어 북에 남은 가족의 치료비를 대고 학비를 저축하는 자매의 이야기와, 그 중 하나를 좋아하는 택시기사의 이야기와, 북한에서 전사를 했던 총잡이 실력으로 주유기를 잡고 싶었지만 일을 구하지 못한 이의 이야기가 얽혔다. 만둣집 주인 쯤의 삶은 넉넉했던 모양이지만, 다른 삶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북한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모욕을 당하고, 남한 물정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사기를 당하고, 북한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임금을 삭감 당하고, 남한에서 달리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장의 폭언을 듣고, 이런 이야기들이 얽혔다. 산만하다는 점만이 참신했을 뿐, 상상했던 그대로의, 우려했던 그대로의 고통의 나열이 무대 위에 펼쳐졌다. 그들은 말했다. 남한에서 쉬운 일이라곤 숨쉬기 뿐이라고. 뿌연 서울 하늘을 생각하면 숨쉬기도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딱 그 정도였다.
“사선을 넘어 우리나라에 새로 터잡은 북한이탈주민. 생존을 위해 넘어왔지만 또 다른 생존과 싸워야 하는 그들의 이야기”라는 공연 소개를 읽었다면, 그리고 티비에서 한 번쯤 탈북 주민들의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면, 2부는, 산만하다는 점을 빼면,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었다.

3.
나는 중국어도, 베트남어도, 태국어도 알지 못한다. 아는 것이 있다면, 무리들이 국경들을 넘는 동안 등장했던 중국인과 베트남인과 태국인의 입에서 나온 그들의 언어가 제대로 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 정도다. 중국인들은 청대의 모자 같은 것을 쓰고 판관 포청천 주제가를 불렀다. 베트남인은 알 수 없는 짧은 문장을 반복했고, 태국인은 코꾼 깝 똠얌꿍이라는 가사의 노래를 불렀다. 탈북 주민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연출은 중국인과 베트남인과 태국인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그 상황이 얼마나 위험했던가, 얼마나 두려웠던가, 얼마나 급박했던가 ― 무대에서 이루 재현하기 힘든 격렬한 정동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같은 이유로 일부로 삐걱거리고 산만한 서사를 구성했는지도 모른다. 이 연극을 관람한 후에도 당사자의 감정은 여전히 알 수 없도록, 알량한 간접 체험 같은 것은 할 수 없도록,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모르는 것들 가운데 내가 아는 것이 있다면, 조각난 서사들 사이사이에는 쉽사리 하나로 이어지는 뻔한 고통의 서사가 있었다는 점이다. 누군가를 맥락 없는 웃음거리로 만듦으로써만 표현할 수 있었을 리는 없다는 점이다.

4.
뻔하게도, 재앙은 여성들에게 돌아간다. 만둣집을 운영하는 부부, 남편은 함께 사선을 넘은 동료들을 믿고 돈을 척척 빌려주는 호인이다. 종업원으로 일하는 이들의 임금을 올려주마는 약속도 한다. 가계를 걱정하는 것은 부인의 일이다. 악역을 자처하며, 삶을 견디는 것이 그의 업이다. 팔을 잃은 남편을 위해 성매매를 하던 이는 임신을 하고 만다. 사기를 당하는 것은 꿈을 품었던 자매 중의 한 명이다. 이 사기는, 자신의 자매를 배신하는 일과 동시에 벌어진다. 뻔하게도, 그들은 밤무대 가수 일을 잃고서 ‘2차’를 하는 가게로 넘어간다. 가장 비참할 수 있도록, 옷을 갈아 입는 것은 텅 빈 무대 위에서다. 이들은 표현할 틈조차 없었던 슬픔을 표현하는 것은, 자매 중 한 명을 사랑했던 택시 기사다.
극이 끝나갈 무렵, 자매는 서로에게 묻는다. 괜찮으냐고. 자매는 서로에게 답한다. 괜찮다고. 택시 기사는 마음에 없던 다른 이와 결혼한 후다. 그가 맡는 일은 술은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고 걱정하는 정도다. 괜찮은, 괜찮아야만 하는, 그래야 슬픈 자매는 노래를 하고 춤을 춘다. 관객들의 감정을, 뻔하게나마, 움직이는 일은 그들에게 맡겨진다. 풍금을 치던 이는 손을 떨게 된다. 포주는 새 사람을 구해야겠다고 말한다. 무대는 텅 비고 만다.
이 삶들이 바닥에 가까운 곳에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닥 또한 고르지는 않다. 팔을 잃은 전사가 의수를 얻는 동안, 전사의 친구가 그 의수를 선물할 만큼의 돈을 버는 동안, 자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기로 잃었던 돈을 메우는 정도다. 그 돈으로 데려 오고 싶었던 아비는 이미 죽은 뒤다. 쌍꺼풀 수술만 하면 정인이 자신에게 관심을 줄 것이라 믿었던 이는, 여전히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택시 기사의 아내가 되었다. 뱃속에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를 키우는 일이 누구의 몫이 될지,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5.
의아했다. 어디가 파격적이고 어디가 실험적인지, 나로서는 알기 어려웠다. 1부는 연극에 서사를 가진 재현적 연극에 익숙한 내겐 참신했지만, 어떤 이들에겐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다. 지난한 탈주를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싶었지만 그렇다고 그 지난함이 와 닿은 것은 아니었다. 재현 불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고 하면 받아 칠 말은 따로 없지만, 재현불가능성을 잘 지시하고 있지조차 않았다. 적어도 하나의 실험인 1부와, 단순하고 뻔한 고통의 나열인 2부가, 어떻게 하나로 묶여있는지, 무대에서 펼쳐지는 일들만 보고서는, 알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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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 날숨의 시간〉
박찬규 작, 고선웅 연출
2016.12.09. ~ 12.25. 국립극장 KB청소년극장
2016.12.18. 15시 공연 관람.


2016년 8월 10일 수요일

그래, 어떤, 평화

박종주

일상의 풍경風景들

불이 켜지면, 연극은 일상적인 풍경에서 시작한다. 평범한 작은 사무실. 네 명의 직원이 등장한다. 대리가 두 명, 과장이 한 명, 그리고 인턴이 한 명. 역시나 평범하게, 그들은 맡은 일을 한다. 대리들은 업무를 진행하고 과장은 시답잖은 농담을 하고 인턴은 커피를 탄다. 역시나 평범하게, 그들은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는다. 여성의 몸매에 대한, 여성과의 교제에 대한, 여성의 꼬리침에 대한.
평범한 공간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일들을 하고 있으므로, 이렇다 할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거래 명세서에 숫자를 잘못 써 넣거나 커피를 탈 때 물 양을 맞추지 못하는 실수조차 없다. 짜증을 내는 사람조차 없이 즐겁다. 시간이 흐르면 누군가는 퇴근을 하고 누군가는 야근을 한다. 시간이 더 흐르면 다시 출근할 것이다. 숫자를 틀리거나 물을 쏟지 않는다면, 내일 하루도 즐거울 것이다.

일상에 풍경風磬 달기

도시 사람들은 바람에 둔하다. 뱃사람들은, 그리고 농부들은 바람에 예민하다. 도시 사람에게 바람은 잠깐의 시원함 혹은 추위일 뿐이지만, 뱃사람들에게 바람은 배를 뒤집는 힘이고 농부들에게 바람은 작물을 쓰러뜨리는 힘이다. 창문을 열어두고 나온 날, 혹은 베란다에서나마 여린 풀잎이 자라는 어느 날, 그런데 강한 바람이 부는 날, 그제야 도시 사람은 바람에 예민해진다. 바람이 자신의 일상을 흔들기 시작하므로.
장면이 바뀌면 네 명의 배우들은 아이들이 되고 사무실은 놀이터가, 집기들은 장난감이 된다. 시장놀이부터 병원놀이까지, 또 한 번 평범한 풍경들이 이어진다. 평범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 어떤 삶에서는 이 또한 평범하지만 ― 아이들이 뱉는 모든 문장 뒤에 욕설이 따라 붙는다는 점이다.
바람에 예민해지는 방법이 하나 있다. 풍경風磬을 다는 것이다. 창문가의 무언가가 쓰러지지 않아도, 베란다의 꽃잎이 떨어지지 않아도, 바람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이들의 풍경風景에 누가 풍경風磬을 달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디선가 종이 울린다. 어떤 욕들 뒤에는 종소리가 따라 붙는다. 여성혐오적인 욕설들에 말이다.
하지만 종소리가 누구에게나 들리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종소리에 귀를 막으며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자연히 그는 놀이에 섞여 들지 못하고, 아이들 사이에는 분란이 인다. 평범한 일상을 위해 사건은 봉합되어야 한다. 싸움을 벌이는 두 아이 사이에서 나머지 두 아이는 노래를 부르고 화해를 주선한다. 누가 왜 화났는지 따질 필요는 없다. 어색한 미소, 엉거주춤한 악수라도 좋다. 화해는 화해이므로.
다시 사무실, 일상은 반복된다. 다행히 종은 아직 매달려 있다. 여전히 평범하게, 그들은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는다. 여성의 몸매에 대한, 여성과의 교제에 대한, 여성의 꼬리침에 대한. 그러나 그때마다 종이 울린다. 사람들은 조금씩 날카로워 진다. 한 번 알게 된 것을 다시 모르기는 어려운 일이다. 한 번 눈에 띈 얼룩이 계속 보이고 한 번 눈치 챈 생채기가 계속 아려 오듯 말이다. 다시 사무실, 일상은 변할 것이다. 머리를 울리는 종소리를 피하기 위해,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그 소리를 피하기 위해.

누가 병신을 위하여 종을 울리나

이런 극이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풍경風磬이 몇 개 더 달렸으면, 그게 아니라면 좀 더 약한 바람에도 움직였으면 싶었다. 극의 주제인 여성혐오, 혹은 이른바 남성혐오와 관련된 발화들은 종을 울렸지만 “병신”이라는 말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종은 내 머리 속에서만 울리고 있었고, 나는 머리가 아팠다.
또 하나 신경이 쓰인 것은 ‘아이들’이 재현되는 방식이었다. 아이들은 동물 모양 모자를 쓰고 나왔다. 배우들은 (어쩌면 당연하지만) 사무실 직원들을 연기할 때와는 다른 발성을 했다. 리플렛에는 “어린이, 상스러운 욕설, 밝고 맑은 종소리 등의 장치를 소재로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기’ 기법을 사용”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나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 하나 가능한 추측이 있다면 욕설과 혐오를 아이들의 순수성과 대비시키는 것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아이를 표현하기 위해 획일적으로 동물 모자를 씌우는 것이 ― 그리고 나의 추측이 맞다면 또한 아이들의 속성을 순수성으로 환원하는 것이 ― 여성을 표현하기 위해 획일적으로 긴 머리 가발을 씌우고 치마를 입히는 것과 무엇이 다를지 알 수 없었다.
여성혐오를 다루는 극에 어린이나 장애인의 재현에 관한 윤리를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과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어린 여성, 장애 여성을 생각하면 여성혐오를 생각하면서도 이를 빼 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풍경風磬이 몇 개 더 달렸으면, 그게 아니라면 좀 더 약한 바람에도 움직였으면 싶었다.

<어떤평화>
연출 성지수
조연출 심하경
드라마터그 백수향, 이준영
출연 김정은, 조민광, 진영화, 최희범
2016년 7월 7-9일, 연세대학교 푸른샘, 서울대학교 인문소극장

2016년 6월 7일 화요일

<민중의 적>,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연출, 샤우뷔네 베를린 제작, LG아트센터, 2016.


by 에스티

기자들이 기사 쓰기 좋을 작품이다. 제4의 벽 따위야 무너진 지 오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무대와 객석이 토론을 펼치는 연극이라니. 이 뭔가 새롭고 흥미진진한 구도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는 것보다 기사를 통해 재현된 모습을 읽고 있는 편이 더 행복하다. 관련 기사에 따르면, 첫날 공연의 토론 시간에선 그나마 사대강, 옥시와 같이 현재 우리 사회의 현안들이 언급되었다(한겨레). 하지만 그것을 "열띤 토론"이었다고 기록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첫날 공연을 관람한 관객들이 SNS에 남긴 증언에 따르면, 중요한 키워드가 나왔을 뿐이지 토론의 수준이 결코 높았던 건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도 트위터에 남긴 관객들의 글을 살펴보면 이 독일 연극은 꽤 만족스러웠던 것 같고, 앞으로도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좋았던 기억은 공유해도 그렇지 않았던 기억은 기록하지 않는 우리의 습성이 반영된 결과이다. 비교적 비판적 입장을 가진 한 트윗을 소개한다. (사족으로, 트위터에선 LG 아트센터가 어느덧 엘아센으로 불리고 있었다. )

유감스럽게도 내가 본 27일 공연의 토론 시간은 참담했다. 이 날 토론에서는 전날과 달리 섹시한 키워드는 나오지 못했고, 다수가 옳으냐 소수가 옳으냐를 놓고 이야기 하는 데 시간을 다 써버렸다. 객석에서 나치가 언급되었으나, 통역사는 관객들의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고, 배우는 그저 곤란해 했다. 차마 토론이라 말하기 민망한 대화가 진행되고 말았다.

이 프로덕션이 처음 시작할 무렵 베를린에 있었던 덕분에 나는 이 작품을 샤우뷔네에서 오픈 리허설로 볼 수 있었다. 그날 나보다 너댓 줄 앞에 앉아서 관객들의 토론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오스터마이어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독일 관객들도 상당히 열심히 토론에 참여 했었다. 그날 나는 그들이 무슨 얘기를 주고 받았는지 거의 알아듣지 못했고, 한국 관객들이라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이번에 LG아트센터가 그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당초 나의 예상 보다 관객들의 참여는 활발했다. 하지만 결코 수준 높은 토론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건 관객들의 잘못이 아니라 연출 탓, 혹은 연출의 의도적 선택으로 보인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주인공 슈토크만 박사에게 감정이입할 수밖에 없는데, 정작 토론은 박사가 무지한 대중을 비난하고 나선 시점, 즉 민중의 적은 바로 민중 너네들이라는 데서 시작된다. 상황 파악이 충분히 되지 않은 상태에서 관객들은 일단 슈토크만 박사의 편을 들게 된다. (대다수가 슈토크만을 지지한다고 손을 들었다.) 보다 큰 문제는 토론이 어떻게 얼마나 진행될지 관객들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토론이 대충 얼마나 진행될지 알고, 발언의 기회가 얼마나 주어져야 하는지 알아야 제대로된 토론이 가능하다. 아직 몸(또는 입)이 풀리지 않은 관객들이 그것도 그 큰 엘아센 극장에서 마이크를 들고 발언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도전이다. 제대로 된 토론이 될 수가 없다. 그나마 여유를 가지고 대화를 시작하려 했던 관객은 서두를 미처 마치기도 전에 토론이 끝나버려 발언을 중단해야 했다. 언제 끝날지 알려주지 않는 토론에 참여했던 관객들은 슈토크만 박사가 다시 마이크를 잡고 이제 그만 자기 대사를 이어가야 한다는 말에 기만당한 느낌을 받게 된다.

관객에게 즉석으로 말하게 하는 이 연극은 과연 혁명일까, 기만일까, 아니면 그러한 양쪽 의견이 서로 맞서는 걸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오스터마이어의 또 다른 게임일까? 조금 더 유익한 토론이 될 수 있게 하려면 지금 상황에서도 몇가지 개선 장치를 마련할 수 있을텐데 그런 생각을 못하는 것일까, 안하는 것일까? 4년전 처음 보았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토론 장면에 앞서 검은 색 무대 벽면을 흰색 페인트로 벅벅 칠하는 장면과, 토론이 끝날 무렵 객석으로부터 날아들기 시작한 물감 풍선들이었다. 블랙 박스 무대 마저 허물고, 형형 색색의 물감이 객석에서 무대로 날아드는 것, 이것은 아마도 오스터마이어와 무대 디자이너(Jan Pappelbaum)가 꿈꾸는 미래 극장의 이미지이리라. 하지만 그러기에 LG아트센터는 너무 크고 웅장하다. 사실 이번 공연에 내가 심적 거리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대에서 멀고 높이 떨어진 3층 객석에 앉아 있었던 나홀로 일행과 떨어져 반대편에 앉아 있었던 탓이 크다. 베를린에서 본 물감 풍선은 뻥뻥 잘 터졌으나, 엘아센에서는 배우들이 무대 위에 올라서서 조심스럽게 물감 풍선을 던지고 있었다. 물감 풍선은 충분히 터지지 않았고, 몇개는 무대 위에 뒹굴고 있었다. 맨 앞자리 관객들은 미리 준비된 비닐 천막으로 몸을 가리느라 분주했다. 급성 독감으로 내한 일정을 취소했다는 오스터마이어는 이 광경을 촬영한 영상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2016년 3월 9일 수요일

빛의 제국

공연 시작 전


무대 위에는 직사각형의 테이블, 의자 8개, 소파 하나, 여성용 핸드백 하나, 스탠드 마이크 하나가 놓여 있다. 커다란 스크린이 정면에 하나, 무대 오른쪽에 하나 설치되어 있다. 테이블 위에는 마이크가 두 개, 배우들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지만 연극의 원작인 <빛의 제국> 소설책이 여러 권, 종이와 연필도 있다. 배우들은 이미 무대 위에 올라와 있는데, 연필로 무언가를 쓰기도 하고, 서로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하며, 중간 중간 서로를 바라보며 웃기도 한다. 관객을 등지고 앉은 배우는 조용히 기타를 연주하며 흥얼거린다. 일찌감치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배우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공연이 시작되기 전이지만, 웅성거리며 공연에 대한 기대를 나누거나, 인사하는 일도 적었다. 나는 지금 그들이 배우로 무대에 앉아 있는 걸까, 등장 인물로 무대에 앉아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한 인물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관람시 유의사항을 안내해준다. 가까운 비상구로 탈출하라는 그 말이 심싱치 않아서 나도 모르게 비상구를 한 번 쳐다 보았다. 같은 옷을 맞추어 입은 두 남자가 천천히 움직이다가 테이블로 다가와 앉는다. 무대 위의 인물들이 모두 두 남자를 응시하면서 공연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관습적인 연극이 아니라더니, 역시 암전 없이 공연이 시작되었다.

충돌들


쉬는 시간 없이 진행되는 140여분의 공연 내내 나는 여러 가지의 충돌들(혹은 혼란들)을 경험했다. 그 중 일부는 연출가와 배우들이 의도한 것일테고, 어떤 것은 내가(김영하 작가를 좋아하고, 이미 원작 소설을 읽었으며, 그래서 어떤 기대 지평을 구축한 내가) 만들어 낸 혼란일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관객들도 명쾌하거나, 쉽게 이 작품을 관극하지 못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공연이 끝난 직후, 뒷자리에 앉은 관객들은 서로 작품이 이해되었는지 물었고, 예술가와의 대화(3월 6일 진행)에서도 관객들이 연출가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싶어 했다. 그 질문들은 “왜”, 혹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원작 소설 <빛의 제국>과 연극 <빛의 제국>


김영하 작가의 원작 소설은 391페이지의 꽤 두꺼운 볼륨을 자랑한다. 아침 7시, 기영의 집에서 시작되어 다음 날 아침 7시 기영의 집 거실에서 끝이 난다. 10년간 소식이 없던 북에서 갑자기 송환 명령을 보내와 기영은 혼란스러운 24시간을 보내게 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려고 하지만 그 실체는 여간해서 포착되지 않고, 결국 마지막에는 더 혼란스러운 진실을 알게 된다. 그의 부인 마리와 딸 현미까지도 어제와는 매우 다른, 이상한 하루를 경험한다.
이상한 하루,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황,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어떤 함정에 빠져 같은 자리를 돌고 있는 느낌, 그렇게 하루가 끝나면, 똑같아 보이는, 그러나 많은 것이 달라진 새로운 하루가 어이없이 시작되던 아침 풍경을 기억하고 있다. 2006년 원작 소설을 읽고, 나는 우리 주변에 정말 간첩들이, 자본주의 시스템이 물들어 권태를 느끼고 살고 있는지 궁금했고, 신용카드와 전화 사용으로 나의 움직임이 손쉽게 포착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자각했다.
이렇게 긴 소설을 연극으로 각색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작품을 조각내게 되고, 어떤 장면들을 선택하게 된다. 프랑스인인 연출가는 분단 상황, 그것이 사람들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사랑이야기라고 밝히고 있다. 외국인이 보는 분단 상황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태도가 신기하다고도 했다. 각색가와 연출, 배우가 읽은 <빛의 제국>은 내가 읽은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래서 작품의 흐름이나 의도에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분단된 상황이 기영과 마리를 헤어지게 한다고 했지만, 그둘은 헤어질 수도 없을 뿐더러, 사랑보다는 절망, 무력한 인간이 보내는 하루의 인상이 더 강렬했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보는 분단 사황은 객관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피상적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장면들은 소설의 내용을 흥미롭게 재현했지만, 어떤 에피소드는 촘촘한 맥락이 사라지고 그 일부만 끼어들어 그 재미를 모두 전달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을 남긴다. 세금 무서운 줄 알라는 마리 아버지의 유언이나, 위 절제 수술을 해서 계속 먹어 줘야 한다는 정팀장의 대사같은 것은 더 웃음을 줄 수 있었을텐데, 서둘러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 의해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 같다.


여러가지 표현 양식들


이 작품에는 다양한 표현 방식을 사용한다. 그래서 극 초반에는 다소 혼란스럽고, 의아했다. 인물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고, 과거를 회상하며 낭독하기도 하고, 자연스러운 연기와 양식적인 연기가 혼재되어 있다. 기영과 마리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배우들의 개인적인 ‘북한에 대한 기억과 체험’이 마이크를 통해 관객에게 직접 전해지기도 한다. 영상도 빈번하게,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여러 표현 방식들은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각각의 표현 방식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고 싶었고, 그래서 열심히 메모를 했으나, 어느 순간 그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하나 밝히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어떤 의도에 따라 분석하기 보다는, 서로 섞여 있는 것들이 만들어 내는 어떤 분위기를 감지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같다.
남자도 여자도 우리 하루도, 북한의 존재를 잊고 살아가는 것도, 원하는 대로 삶이 나아갈거라고, 하루 하루 똑같은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모두 확실하지 않다는 것, 어느 순간에는 확실해 보이지만, 또 어떤 순간에는 너무 낯선 것이 삶이라는 것. 혼재된 표현 양식들의 의도를 포착하기 어렵지만, 그런 다양한 층위들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듯이, 우리의 하루도 쉽게 그 의미를 알 수 없으니까.

영상과 무대


그래도 영상 이야기는 하고 지나가자. <빛의 제국>에는 정말 많은 영상이 사용된다. 이것들은 배경이나 무대를 보충하는 것 그 이상이다. 영상들은 매우 사실적이고, 직접적이다. 극 초반 양치하는 김기영(지현준 분), 장마리(문소리 분)의 맨 얼굴, 마리의 담배 피는 모습, 마리와 고성욱 사이의 카톡 대화 장면 등은 마치 영화같다. 반면 무대 위의 연기는 (사실적이지 않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영화같은 영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주로 마리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무대 위에 앉아 있는 다른 인물들에게, 또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에게 대학 시절의 이야기며, 친구가 죽은 이야기, 자신의 가족 이야기 등을 건네고 있다.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이 어색해서인지, 의도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낭독은 영상에서 보여주는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있다. 영상 속에서 너무나 사실적으로 샤워를 하던 두 남자가 무대 위에서 양식적으로, 마치 제의에 참여하는 신도처럼 움직이며, 마리와의 쓰리썸 장면을 표현할 때도 어떤 기이함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 장면을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겠지만서도) 이러한 느낌은 끝까지 계속된다. 영상 속에서는 그냥 평범하고 자연스러웠던 선생님 소지현(양영미 분)이 무대 위에서 말을 시작하니, 어딘가 낯선,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로 보인다. 기영이 그녀의 말을 대신하며 그녀를 마치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런 낯선 느낌은 마리와 기영의 마지막으로 대화하는 장면에서 폭발했다. 영상 속의 두 남녀는 당황하고, 절망하고, 답답해하고, 울고, 체념한다. 그러나 무대 앞쪽에 선 기영와 마리의 대화는 너무 건조하다. 마리는 지난 15년간, 기영이 바뀔 거라 생각하고 노력하다가 결국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이제서야 기영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억울하고 화도 났을 것이다. 영상 속의 그녀는 한숨도 쉬고, 울고 기영을 외면한다. 무대 위의 마리는 그저 앞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기영은 지워진 존재이니, 자신의 비밀도 담담하게 털어 놓을 수 있다고 하자. 하지만 북으로 가기 직전, 아내를 찾아와 마리가 자신을 붙잡아 주기를 바라면서 목소리에 아무런 욕망을 담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여기에 남고 싶다고 쉽게 말하지 못한다 해도, 북으로 가라는 아내의 말에도 그의 목소리는 건조할 뿐이다. 이 순간 기영은 울고 있었지만, 무대 가까이 앉은 관객이 아니고서야 그의 눈물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영상 속의 기영은 먼산을 바라보고 때로는 한숨을 쉬었다. 무대 위의 기영와 마리는 가만히 서서, 최대한 건조한 체하며 말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서로에게 하는 것인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인지 모를만큼 아쉬운 장면이었다.
예술가와의 대화 때, 어떤 관객은 이 장면에서 몰입할 수 없음을 당당히 이야기했고(많은 관객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혹시 그렇게 장면을 연출한 이유를 물었다. 연출가는 자신의 의도에 대해 길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클로즈업과 같이 무대 앞쪽에 선 인물의 위치, 마지막 순간까지 담담할 수 밖에 없는 두 인물의 성격, 그래서 소리치고 화내는 식의 감정적 표현을 지양한 이유 등, 말로 들은 그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했으나, 무대 위에서 그것이 정말 표현되었는지 궁금하다. (다른 관객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연출의 의도를 느꼈을까) 소리치거나 따귀를 때리지 않는다 해도, 감정이 섞인 목소리의 냉담함, 애절함은 느껴질 것이라고 (물론 어려운 일이겠지만) 생각해 왔는데, 그것이 관객의 부질없는 욕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장면, 그 이후


북으로 돌아갈 줄 알았던 기영이 집으로 들어가 누운 뒤, 무대와 객석 조명이 모두 꺼졌다. 아연실색하는 마리의 표정을 기대했으나, 그 표정과 감정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졌다. 다른 관객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앞서 밝힌 것처럼 조금 혼란스러웠고, 당황했다. 프로그램북을 꺼내 뒤적였는데, 어떤 답을 찾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공연에서 보지 못한 것들이, 친절한 언어로 쓰여 있었다. 이런 것들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내 선입견때문일지 모른다. “연극은 진실과 거짓, 실재와 환영 사이에 놓여 있는 모호한 공간(프로그램북, 15쪽)”이라고 말한 연출이 모호한 연극을 보여주었을지도 모르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많은 이야기와 질문이 떠오르도록 관객에게 여러 방면으로 자극했다는 것이다. 객석에 앉은 관객들이 서로 다른 느낌과 결론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 같다.

책을 읽지 않았다고 걱정하지 말고, 연극을 보러 가는 것을 추천한다. 이미 원작 소설을 읽었다면, 충분히 마음을 열고 다른 이야기로 감상하기를 권하고 싶다. 나는 펜을 내려 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한 번 관극하고 싶다.

2016년 2월 25일 목요일

액션스타 이성용

글쓴이_산책

성공적으로 안착한 <액션스타 이성용>

오랜만에 대학로 소극장 작품을 관극했다. 가족 단위의 관객들이 눈에 띄었고, 공연 내내 크게 웃어 주던 관객들이 인상적이었다. 25세 청년이 자신의 꿈을 찾아 가며, 그 과정에서 오해했던 아버지를 용서하게 된다는 전체 줄거리는 아이들과 함께 보기에도 적절하다. 전체 이야기 안에 촘촘하게 삽입되어 있는 코믹한 요소들은 관객들을 충분히 재미있게 해준다. 작년 11월 첫 공연 후, 4개월간 공연되었고, 3월부터는 오픈 런에 들어간다고 하니 그야말로 대학로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작품인 것 같다.

영상을 사용하는 방법이 신선하고 재미있는데, 공연 시작 전 극장에 상영되는 인터뷰 영상과, 작품 예고편을 둘러싼 짧은 에피소드는 본 작품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연극이 시작되면 화려한 액션 장면과 함께 등장인물을 소개하는데, 이때 자막으로 인물의 이름과 성격을 직접 보여준다.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여 관객을 빠르게 이야기에 끌어 들이고, 서사를 압축해서 진행하는 점도 재미있다.

이소룡 + 성룡 = 이성용

주인공은 이성용은 무술 할 운명을 타고 났다. 처음에는 그 운명에 무심했으나, 예쁜 여자 때문에 영화 촬영 현장에 따라가고, 이것은 무술을 배우게 되는 계기가 된다. 무술을 배우는 이유가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절권도 사부님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고난을 경험하지만, 예상할 수 있듯이 결국 그는 타고난 운명과 무술 재능을 뽐내는 애제자가 된다. 그 가운데 출생의 비밀뿐 아니라 이성용의 아버지와 사부님과 숨겨진 인연까지 드러난다. 서사가 복잡해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미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경험해왔기 때문에 전체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동안 어디선가 보고 들었던 이야기들은 절권도의 세계에서 이성용의 이야기로 다시 전해지고 있다. 여러 이야기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끝없이 변전하는 것은 이야기의 세계에서 자연스러운 것(김영하, 읽다. 205쪽)이기 때문에 기시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해두자.

다만 인물들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고, 아쉽다. 주인공 이성용의 욕구는 매우 단순해서 서사를 지연시키거나 복잡하게 하지 않는다. 때문에 다양한 에피소드가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들의 이름에 이소룡과 성룡을 모두 담고 싶었던 아버지의 마음처럼, 관객들에게 여러 가지 재미를 모두 주고 싶었던 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이성용은 직진할 뿐이다. 무술에도, 소다미에게도, 아버지를 이해하는 과정도 모두 쏜살같이 진행된다.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한 괴로운 과정은 잠깐이며, 무술을 익혀가는 장면도 너무 짧다.

게다가 그가 자신의 운명과 비밀에 다가가는 동안, 그래서 마침내 “내일의 액션 스타”가 되는 동안 그의 주변 인물은 슬쩍 지워진다. 소다미는 강두원을 잊고, 이성용을 선택해 줄 건지, 강두원은 왜 그렇게까지 사부님에게 도전해야 했던 것인지, 사부님은 왜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대역을 자처했던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성용보다 더 액션 배우가 되고 싶었던 장철구는 역시 타고난 사람은 이길 수 없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그의 주변 인물은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속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거나, 이성용보다 더 단순해 보이는 것이 아쉽다.

액션

어제의 액션 스타, 오늘의 액션 스타, 내일이 액션 스타들이 모두 등장하는 만큼, 이야기 곳곳에 무술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 몸을 만들고,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과 숱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안다. 편집을 거칠 수 있는 영화나 TV 드라마도 아니고, 소극장에서 서로 합을 맞춰서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정범철 연출의 전작 <병신3단로봇>을 이미 관극했기 때문일까. <액션스타 이성용>의 적당한 무술 장면들이 다소 아쉽다. 딸을 구하기 위해서 땀을 흘리던 로봇으로 변신하던 상철의 모습, 그가 흘린 땀이 객석으로 날아가기며 반짝이던 장면을 기억한다. <병신3단로봇>의 상철이 보며준 처절한 움직임을 보면서 사람이 로봇으로 변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감동했고, 어떤 관객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강두원과 스승의 대결 장면이나 마지막 영화 촬영 장면은 차치하더라도, 이성용이 아버지를 용서하고 다시 무술 훈련을 시작하는 장면에서는 더 절실하고, 더 몸을 끝까지 사용하도록 했으면 어떨까.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를 이해해야 하고, 자신이 타고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성용의 복잡한 마음이 더 효과적으로 드러났을 것이다. 이성용은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하고 싶고, 동시에 아버지의 거짓말을 원망하고, 아버지의 거짓말을 믿고 20년간 미워하며 살았던 그 시간을 후회하기도 했을 것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그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했을지 다시 생각해 본다. 이런 그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그의 움직임이 더 절실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몸으로 전달되는 강렬함과 에너지는 무대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다. 작은 무대는 늘 한계를 가지지만, 무대 위에서 불쑥 전해지는 진심은 그 무엇보다 객석을 감동시킬 수 있다. 90분간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무척 애쓴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조금 더 힘을 내주었으면 좋겠다.

이미 좋은 평가를 받았고, 앞으로도 많은 관객들이 편안하게 선택할 수 있을 작품이다. 연극을 처음 접하거나, 또 아주 가끔 극장을 찾는 관객들에게 무대의 진심, 무대만이 가지는 힘을 더 강렬하게 보여주면 어떨까.

2016년 2월 2일 화요일

20주년, 《날 보러와요》

글쓴이_산책

극장 로비는 분주했고, 많은 사람들로 혼잡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구면인 것처럼 인사를 나누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공연 시작을 알리고, 객석의 불이 꺼지자마자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20주년 <날 보러와요>의 OB 팀 공연 날이었다. 연극 <날 보러와요>의 20주년 공연에는 1996년 초연부터 참여했던 김뢰하, 유연수 배우를 비롯하여 권해효, 이대연, 황석정 배우까지, 많은 사람들이 쉽게 알만한 유명 배우들이 출연하며,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진 공연이다.

관극도, 글쓰기도 꽤 오래 쉬었다.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해도 변명을 수십 가지 늘어놓고 싶다.) 번뜩임보다는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승부하자고 생각해왔는데, 그마저도 하지 못했더니 극장은 너무나 멀고, 글은 그 보다 더 멀리 느껴진다. 더구나 20주년을 맞은 작품을 마주하자니, 20년이라는 그 시간의 두께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530만 관객이 관람했지만, 영화 <살인의 추억>을 – 자본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 20년간 극장에서 상영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어떻게 20년이라는 두터운 시간을 살아 내면서, 계속 그리고 또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것일까?

무대에는 형사들 뿐.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우리는 2시간 내내 무대 위에서 범행 장면을 목격할 수 없다. 다만 첫 장면에서 무대 뒤로 움직이던 용의자의 그림자, 여자의 비명, 용의자의 신음 소리 등을 들었을 뿐이다. 무대 위를 가득 채우는 것은 형사들뿐이다. 그들은 고군분투하지만, 수사에는 별 소득이 없다. 용의자와 설전을 벌이고, 전화를 받고, 기자와 싸운다. 미스 김이 배달해주는 커피를 마시며 이따금 실없는 소리를 던지며 쉬기도 하지만, 며칠씩 집에 가지 못한다. 범행 장소의 흙을 몰래 퍼 와 터럭 하나 라도 찾아내려고 하는 모습은 우스우면서도 애잔하다. 형사들에게 뾰족한 수가 없는 것처럼 관객들은 용의자에 대한 별다른 힌트를 얻을 수 없다. 여러 힌트를 준다면 나름대로 추리라도 해보겠지만, 그저 형사들이 들려주는 단서를 듣고, 그들의 수사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범죄를 다루는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가 사건 장면, 용의자의 실루엣, 형사들의 현장 수사 장면 등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것과 달리 <날 보러와요>는 경찰서 안에서만 이야기가 진행된다. 중요한 단서라도 찾아내려면 형사는 무대 밖으로 사라져야 한다. <날 보러와요>의 관객들은 끔찍한 살해 장면들을 피할 수 있지만, 용의자를 적극적으로 추리할 수도 없고, 흥미로울 법한 형사들의 수사 과정도 지켜볼 수 없다. 경찰서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연극이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보다 관객을 끌어 들일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보여주는 것 그 이상의 힘은 무엇일까?

여기서 좋은 대답을 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객석에 앉을 때면, 늘 이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사람들은 왜 극장에 올까, 어떻게 극장에 오게 되었을까.

보이지 않는 것들

영화 <살인의 추억>은 연극보다 훨씬 더 잘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연극 <날 보러 와요>에서 형사들은 무대에 매여 있어야 하지만 영화 속 형사들은 어디든 갈 수 있었다. 그러면서 형사들의 고단한 일상은 효과적으로 그려졌고, 언론이며 검찰의 압박들도 더 실감나게 묘사되었다. 전화 한 통, 신문을 보며 터트리는 형사의 분통으로 그러한 것을 모두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연극보다 영화는 훨씬 사실적이며 생생하다. 형사나, 피해자에게 품게 되는 안타까움의 감정도 더 강렬하게 유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이 남기는 순간순간의 인상은 매우 강렬하다. 무대 위에 내리는 비, 빗소리, 범인이 저벅저벅 걷는 소리, 여자와 범인의 신음 소리는 어떤 것도 거치지 않고 그대로 관객의 귀에 꽂히고 만다. 이 소리들은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비, 젖은 길을 걷는 사람의 무게감, 공포의 질감들을 느끼게 한다. 또 김 형사가 사건 장면을 묘사하면서 용의자 정인규를 압박할 때, 용의자 정인규의 점차 일그러지는 표정, 이제 곧 범행을 자백할 것만 같은 용의자의 긴장감, 혐의를 벗었을 때, 소름끼치도록 안도하는 모습도 압권이다. 이러한 장면들은 무대에서 관객에게 직접 전달된다.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실감나는 장면을 볼 때, 공포감을 느끼지만 영화관을 나서면 이 세계는 영화 속 세계보다 안전하다는 안도감을 준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 어떤 상황에서 직접 받은 그 인상을 쉽게 가시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주고받는 기운의 강렬함 때문인 것 같다.

관객들이 자꾸 웃는다.

사건을 목격할 수 없다 해도, 이야기 자체는 끔찍하다. 강간에 연쇄 살인, 그리고 영구 미제 사건이다. 용의자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고, 희생자 가족들은 아직도 원통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날 보러 와요>를 보면서 자주 웃게 된다. 어울리지 않게 형사가 시를 읊는 장면이나, 서랍 속에 자작시를 숨겨 두었다가 들키는 것도 웃음을 야기한다. 불쑥 튀어나오는 욕설들, 미스 김의 애절한 사랑 표현(경찰서에 목소리 변조를 해서 전화한다거나, 말없이 끊어 발신지 추적을 당하는 장면 등), 형사들끼리 주고받는 말도 안 되는 대화와 농담 때문에 관객들은 자주 웃는다. 류태호 배우(용의자 역)의 바보 연기, 술 취한 연기들도 웃음을 자아낸다. <날 보러 와요>와 마찬가지로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tvN의 드라마 <시그널>에서는 도무지 웃을 기회가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더욱 의아한 것이다. 정신 지체인 용의자가 범행 장면을 묘사할 때, 우리는 범행 장면을 들으면서 웃고 있다. 관객들은 웃는 그 순간에, 혹은 결국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고 패잔병처럼 뿔뿔이 흩어진 형사들의 마지막 모습을 몬 후에, 자신과 객석의 웃음을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위에서 말한 것처럼 무대 위에서 만나게 되는 인물 사건은 매우 직접적인 자극이고, 그래서 관객들을 긴장하게 만든다. TV 드라마는 언제든 내가 원할 때 채널을 돌리거나, 꺼버릴 수 있지만, 극장에서는 그 장면이, 그 이야기가 싫다고 해서 벌떡 일어나 나갈 수 없다. 따라서 연극은 그 어떤 서사 장르보다 관객과의 밀당에 능해야 하는데, 밀고 당기기의 한 전략으로 웃음은 매우 효과적인 것 같다. 관객들은 웃으면서 긴장을 풀게 된다. 형사들의 고단함, 풀리지 않는 사건의 답답함 속에서 종종 웃음을 터뜨리면서 여유를 유지할 수 있다. 이 여유는 작품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게 한다.

낡은 것들, 그리고 여전한 것들

20년 전 초연 작품이기 때문에 극중 상황은 꽤 낡은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낯선 풍경이다. 김 형사는 FBI의 과학 수사 기법을 독학해서 가설을 제기하는데, 96년 그때 이 방법은 그 당시로서는 쉽게 용인되지 않는 것이었다. 초등학생도 프로파일링이라는 단어를 아는 지금, 이러한 과거는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라디오에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신청한 용의자의 엽서를 찾기 위해서는 서울로 가야만 하는 장면도 그러하다. 레퀴엠이 흘러나오고 있는 지금, 김 형사의 추론대로라면 곧 살인이 벌어질 터인데, 형사가 경기도 화성에서 서울 방송국까지 가야 한다니. 지금이라면, 범인이 라디오에 사연 같은 걸 보낼 리도 없겠지만, 더 빨리, 더 쉽게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 초고속 인터넷 시대에 익숙해진 관객에게 <날 보러 와요>의 호흡은 꽤 길고 촌스럽게 느껴졌을지 모른다. 빠른 속도의 에피소드식 구성으로 장면들을 진행하며, 빈번하게 암전을 끼워 넣는 작품들과 달리, 장면 장면이 느긋하게, 진행되고, 장면과 장면 사이의 암전이나 무대 전환도 느슨하다. 무대 위에 놓인 성냥, 포터블 카세트, 미스 김의 커피 배달, 과학 수사에 대한 못미더움들 뿐 아니라 극의 진행 속도도 20년이라는 세월을 느끼게 한다.

초연 이후 출연했던 배우, 연출이 같이 한 무대에서 작업할 수 있다는 것, 그들의 작품 생활이 20년을 넘어 서고 있다는 것에 존경심을 표하고 싶다. 시간이 흘러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여전함은 아름답고, 또 의지가 되는 무엇인 것 같다. 시간을 잘 살아내고, 견디어 내면 어딘가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 같다.

2015년 12월 12일 토요일

《비포 애프터》 이경성 연출, 전강희 드라마터그 인터뷰


드라마인에서는 지난 11월 20일 <비포 애프터> 팀의 이경성 연출님, 전강희 드라마터그님을 모시고 이 작품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날의 대화 내용 일부를 정리하여 공개합니다. 

*****

임승태 : 어떤 관객이 얼마나 공연장을 찾았는지요? 우연의 일치일 수 있으나 정부에서 꺼리는 주제를 대기업이 운영하는 극장에서 선택한 형세가 되고 말았는데, 극장이 얻은 수확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경성 : 두산아트센터는 비영리 극장이기 때문에 전석이 만석이 되어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구조입니다. 올해 두산 작업 중에서 관객 점유율은 거의 최고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두산은 일반적으로 20-30대 젊은 관객층이 많은데, 이 작품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왔다는 점이 고무적이었습니다.

임승태 : 연령층이 다양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이경성 : 젊은 극단이기 때문에 특정 관객들이 몰리는 게 있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세대 배우와 같이 작업하면서 이야기의 스케일이 넓어졌고 만날 수 있는 연령대가 다양해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세월호가 특정 연령에만 국한되는 주제는 아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다양한 연령층이 관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공연 오픈 전에 홍보하는 단계에서 세월호라는 말을 쓰는 게 좋을지 아닐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세월호를 쓰는 것 자체에서 선입견을 갖고 보는 사람들이 생기기 때문에, 그리고 세월호에 국한된 연극도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거대한 사건들로 얘기를 했었는데, 진행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것 같습니다.

임승태 : 세월호와 직접 관련이 있는 개인이나 단체도 관람했었나요?

이경성 : 안산에서 왔었고, 유가족은 안 왔는데, 유가족의 친구들이 왔었고, 윤일병의 어머니도 보러 왔습니다.

백인경 : 저는 미리 예매를 했었고, 세월호 때문에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산 도큐멘타>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 때 보질 못해서 궁금한 마음에 예매를 했습니다. <남산 다큐멘타>처럼 이번 작품도 형식적으로는 다분히 포스트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연극이 상당히 드라마적이고, 전통적이라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햄릿>의 극중극을 사용하는 점이나, “연극은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예상과 다른 점이었습니다. 공동창작을 하거나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는 방식에서는 기존의 연극이 가지고 있는 문법을 탈피하는 시도라고 보이는데, 사건 중심의 전개나,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측면은 여전히 전통적인 연극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경성 : 일단 저의 배경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는 전통적이라 할 수 있는 드라마 연극을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강렬한 드라마로 연극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아마데우스>나 <오월의 신부>, <길> 등의 연극을 주로 했습니다. 그런 드라마를 공부하면서 드라마의 한계를 느꼈고, 이것들이 다의적인 해석이 될 수 있을까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의 극단을 만들고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론적 관심은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와 레만(Hans-Thies Lehmann)에 있었고, 논문에서는 두 사람의 연극을 바라보는 관점에 동의하면서도 비판을 시도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레만이나 랑시에르는 연극이라는 것을 내용이 아닌 형식의 문제로 봤고, 감정의 재분할을 얘기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익숙한 감각이 재배치되는 경험이 연극을 통해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메시지가 아니라 형식으로서 연극의 정치성이 획득된다 그런 것들이 이들의 중심 생각이었고, 이런 것을 레만이 하나의 포괄적인 용어로 ‘포스트드라마’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이제는 포스트드라마라는 형식으로 진행됐던 실험의 한계도 명확해진 것 같습니다. 레만이 다루고 있는 작품도 시기적으로는 네오 아방가르드 이후 70, 80, 90년대 작업이지요. 제가 생각하기에 포스트모던, 또는 포스트드라마적으로 해석을 열어두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찾으려고 했던 형식적인 실험은 그것이 다의적인 해석으로 접근이 가능하면서도 관객들이 어떤 식으로든 맥락을 형성해 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식으로 해석하도록 무한정 열어두는 것이 아니라, 창작자가 먼저 말을 거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어떤 영역에서 말을 걸려고 하는지에 대한 맥락들을 어떻게 형성하면서 다의적으로 열 수 있을지를 찾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충돌하고 상호모순적이지만, 그것을 굳이 드라마로 표현한다기 보다는, 컨텍스트를 구조 내에서 유지해 나가느냐, 그러면서 관객들이 그 안에서 자유롭게, 자율적으로, 주체적으로 이 각각의 요소나 재료들을 연결하면서 이 맥락 안에서 의미망들을 형성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포스트드라마, 포스트모던에서의 허무함이랄까 건조함이랄까 그런 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제 작업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되게 포스트모던이라기보다는 모던이다라고 얘기하는 게 그런 이유인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은 제가 드라마를 먼저 하고, 포스트드라마를 하고 그 다음은 어떤 형식적 실험을 할까를 고민하고 있는 단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전강희 : 바키의 배우들이 자기 얘기를 꺼내고 기승전결 스토리가 없는 연극을 만드는 방식에 점차 익숙해 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런 형식을 가지고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드라마적인 것이 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전에 연습을 하면서 더뎠던 부분이 이번에는 없었습니다. 배우들 스스로 정리된 것이 있어서라고 생각되는데, 서로 반응이 오는 시간이 빨라지고 결과물도 빨리 나왔고,  감정도 살아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리 드라이한 연극이어도 자신에게 익숙한 분야면 가지고 노는 것이 더 편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경성 : 감정보다는 정서라는 말을 쓰고 싶은데요. 이번 리허설 도중에 도이체스 테아터(Deutsches Theater)의 관계자가 와서 연습을 보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연극도 다큐적인데, 독일의 다큐멘터리 연극보다는 정서가 굉장히 짙게 배어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정서가 생소하고 낯설면서 마음에 와 닿았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런 차이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저 스스로도 생각을 해 보았고, 만들면서 내가 공감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과, 이것을 작품을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든 이것에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노력했습니다. 뭔가를 할 때 일부러 정서를 안 넣으려고 의도를 하거나 그러지는 않습니다.

임승태 : 이번 작품이 특히 그런 건가요? 직전의 <남산 도큐멘타>와 비교해 보면,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주제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남산에 우리가 감정이입을 할 필요는 없으나, 세월호나 배우들이 자신이 겪은 죽음을 얘기하다 보니까 객관화할 수 없고 객관화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그런 지점이 생긴 것은 아닌가요?

전강희 : <남산 도큐멘타> 같은 경우는 소재가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객관화시키기가 더 쉬웠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자기 이야기라서 그 이야기에 대해 객관적인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기 보다는 자신이 연기하는, 배우라는 역할 수행의 측면에서 객관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성수연 배우는 아버지에 대해서 썼는데, 그것을 연습실이 아닌 다른 곳에 말할 때에는 객관적인 거리를 두지 못했을 텐데, 연습실에서는 배우로서 거리를 두려고 했고, 대사를 쓸 때에도 ‘우리 아빠가’가 아니고, ‘관객에게 이것은’을 항상 떠올렸습니다. 배우의 태도에 있어서 객관적 태도를 잘 갖췄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내용 자체는 객관적이려고 노력해도 불가능한 순간들이 있는 것이라서 거기에서 이전 작품과는 다른 ‘정서’가 발생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백인경 : 다큐멘터리 연극에 대해서 얘기할 때,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사건들에 얘기하거나 개인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세월호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모두 겪은 일이고, 나름대로 자신들의 안에서 숙성된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나한테 세월호에 대해 얘기하라고 해도 뭔가 말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잘 알지 못하는 외국의 관객들이 봤을 때에는 우리와는 다르게 느꼈을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장면처럼 강렬함을 전달하는 경우에는, 사건이 해결되면서 발생하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과는 다르게, 아직 사건이 전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원한 느낌보다는 의문이나 아쉬움같은 감정이 더 많이 발생했던 것 같습니다. 질문이 아닌 의견 제시로 가게 되었네요.

임승태 : 이 의견을 받아서 질문을 하자면, 드라마가 없는 연극에서 드라마터그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가 궁금해집니다.

전강희 : 이러한 작업이나 드라마가 강한 작업이나 드라마터그의 작업은 크게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차이가 있다면 드라마가 없기 때문에 연습실에 더 많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우가 A를 얘기하다가 이번에 B에 대해 얘기를 한다면 그 사이에 변화의 과정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관찰하는 게 중요합니다. 다들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인지하고 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는 이렇게 했는데, 이번에는 이렇게 했다라는 것을 드라마터그가 얘기를 해줘야 해요. 스토리에 대한 것이나, 분석 등과 같은 기본적인 것은 다 하는 것이구요. 이번 작업에서는 연습실에 최대한 많이 가서 앉아 있었습니다. 바키는 연습을 한다기보다는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나오는 결과물이기 때문에, 얼마나 함께 하느냐가 중요하고, 드라마터그는 런을 돌 때, 런을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연습때와는 다른 무언가가 나온다면, 그것이 맞다 안 맞다를 체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함께 있는 것이 이번에는 중요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경성 : 구조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요소 요소를 논리로 엮어야 하는데, 그것을 연출이 하지만 제3자가 필요한 것이죠. 당신이 봤을 때 이 진행이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는가를 봐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배우들이 연기할 수 있는 부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연출의 요청에 따라서 수행해 나가야 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배우들이 굉장히 힘들어 할 수 있었는데, 배우들이 연출과 바로 할 수 없는 순간에 드라마터그가 그 사이에서 배우와 연출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전강희 : 제3자가 되기 위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보통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연습실을 많이 안 가기도 하지만, 저는 연극의 과정을 알지 못하면 제3자도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3자가 될 수 없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많이 가서 봐야 진짜 제3자가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합니다. 바키 작업은 그런 면에서 저는 재미있었습니다. 계속 바뀌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김재영 : 연습 과정에서 많은 장면을 시도하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중 어떤 장면은 깎여 나가고, 어떤 장면은 공연의 큰 줄기 안에 포함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연습한 여러 장면 중 공연의 논리적인 구성에 잘 부합하는 장면들만이 살아남아서 관객들에게 보여졌을 것인데, 연습 과정에서는 훌륭하다고 느꼈지만, 공연의 논리적 흐름 상 배제된 장면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런 장면을 공연에서 제외하기로 판단했을 때, 배우들을 어떻게 설득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이경성 : 두 장면이 생각납니다. 첫 번째는 호흡과 감정에 대한 것인데요. 우리는 흔히 외부의 자극이 우리의 감정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지만, 워크샵을 통해서 호흡과 근육의 작동이 감정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분노나 슬픔과 같은 외부의 자극이 배우에게 올 때, 그것을 배우의 내부에서 어떻게 바꿔낼 수 있는지를 연습했습니다. 모든 배우가 함께 모여서 분노, 슬픔, 화 등의 감정을 호흡으로 표현하는 연습을 했는데,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장면들 사이사이에 그런 감정을 표현하는 연습들을 배치하면 어떨까 하는 고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웃음으로부터 시작해서 감정이 화와 분노로 발전하고, 분노가 다른 방식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집중적으로 연습했는데, 나중에는 너무 연기 수업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결국 공연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두 번째 장면은 ‘환대'와 관련된 장면이었습니다. 워크샵에서 내 옆의 사람, 나의 관련 없는 사람을 어떻게 ‘환대’할 수 있는가, 어떻게 마주하고 대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 사이에 환대가 사라졌을 때, 우리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배우 중 한 명이 백화점이나 주차장에서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감정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예를 가지고 와서 그런 사람들이 대화를 통해 점차 감정을 갖게 되고, 진심으로 다른 사람과 만나게 되는 과정을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어떻게든 이 장면을 살리려고 했는데, 다른 장면들이 들어오면서 이 장면이 들어오면 공연 전체의 그림에서 너무 뜨는 느낌이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배우들도 이 장면을 삭제한 것에 대해 많이 아쉬워 했구요. 장면이 어느 정도 연습이 되어서 형태를 갖춘 시점에서 이것을 살릴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고민하게 되기 때문에 연출 입장에서는 장면을 포기할 때에 허탈하고 아쉬운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공연 전체의 맥락과 흐름이 중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고, 이러한 점에 대해서 배우들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던 기억이 납니다.

전강희 : 저도 한 장면이 생각나는데, 광고를 가지고 만든 장면이었습니다. 연습 기간 중에 보험에 대한 리서치를 많이 했는데, 특히 생명보험은 생명과 자본이 연결되어 있는 독특한 상품이기 때문에 둘 사이의 연관 관계를 파헤치기 위해서 초기 워크샵에서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며칠 동안 연습에 참여하지 못하고 돌아오니 이 장면이 다 빠져있더라구요.

이경성 : 저는 라디오 광고를 듣다보면 나레이터가 금융상품을 신나게 설명하다가 갑자기 마지막에 목소리를 낮게 깔면서 이런 건 안 되고, 저런 건 안 되고, 이런 손실이 날 수도 있고 등등을 설명하는 부분이 재밌게 느껴져서 그 부분을 살릴까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장면을 만들면서 너무 꽁트처럼 흐르는 것 같아서 빼기로 결정했습니다.

백인경 : 얼마전 광주에서 4시간짜리 연극을 봤는데, 연극 중간 중간에 배우가 퇴장하는 순간에 샴푸 광고같은 것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TV에서 본 것과는 다르게, 생경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이경성 : 오늘날 우리가 지각하는 방식이 어떤 건가 고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 여름에 샌들을 하나 사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 와중에 세월호 관련된 기사를 찾다가 샌들 광고 팝업이 떴고, 저도 모르게 기사 읽는 것을 중단하고 광고를 따라 샌들 상품을 찾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각하는 방식이 그렇게 팝업되는 것처럼 바뀌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그런 것이 극장에서는 무척 낯설게 보일지 몰라도 일상에서는 우리가 그런 식으로 지각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강희 : 보험 광고 연습을 했던 것도, 중간중간에 광고를 넣을까라는 맥락에서 연습했던 것이었습니다.

임승태 : 사전 질문 8번을 여쭤보겠습니다(질문지 보기). 세월호에 대해서 연극에서 조금 더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런 질문과 동시에 과연 세월호라는 사건, 그리고 배우들이 겪은 고통의 경험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연극이라는 그릇에 담길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도 들었습니다.

이경성 : 담길 수 있는지라는 말은 당위의 문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임승태 : 세월호를 연극이라는 그릇에 담으려는 행위나, 그릇에 잘 담겨진 세월호를 보고 싶어하는 관객의 마음 한편에 자리한 일종의 ‘순수한 미에 대한 추구’가 한편으로 굉장히 끔찍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문제가 프로그램에서 언급하신 손탁(Susan Sontag)의 <타인의 고통>에 나오는 것처럼, 스펙터클을 원하는 관객의 욕망과도 관계가 있는 것 같구요. 제 경우 세월호 연극을 한다니 보러 가야 겠다는 것이 극장을 찾을 동기였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끔찍하다는 생각이 드는거죠. 고통을 얼마나 “재미있게” 다루는지 보고 싶은 것이 이 연극을 보려고 했던 동기라는 점에서요. 그러면서 이경성 연출이나 바키는 왜 이것을 연극으로 만들려고 했던 걸까? 만들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 건가? 라는 질문도 함께 들었습니다. 작업 과정에서 분명 이러한 고민들을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구요. 사실 저는 세월호를 충분히 다루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 배우들 개인의 아픔이 들어와 있는데요. 내가 애초에 보고 싶었던 것은 세월호의 죽음이었기 때문에, 배우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나는 한편으로 ‘나는 세월호의 죽음을 보고 싶은데, 내가 왜 배우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생각해보니, 눈 앞의 사람이 말하는 고통에 귀기울이지도 못하는 내가 세월호의 죽음에 가지는 관심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이 시점에서 세월호를 다루는 연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실현하는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형식적으로 완결되지 않거나, 더 충분히 말하지 못하는 것 역시 우리가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객관화할 수 없는 동시대의 문제이기 때문 아닐까요? 여전히 진행 중에 있고, 다음날 일어나보면 새로운 뉴스가 또 나와 있는 이런 상황에서는 작품 또한 미완결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이경성 : 제가 하나만 질문해도 될까요? 사전 질문지에 ‘그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고통을 제시하면서 스스로를 부정하는 반(反)연극으로 보입니다.’라고 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요?

임승태 : 세월호의 죽음과 배우들의 경험이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세월호의 직접적인 희생자를 언급하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세월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직접 말하는 것도 아니죠. 온 국민의 관심사인 거대한 죽음이 전면에 있지만, 무대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배우가 직접 겪은 죽음이구요. 어떤 관객이 세월호를 보러 왔다면 이러한 개인적인 죽음의 경험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경성 : 제가 이 작품을 처음 생각했을 때, 저는 <다이빙벨> 같은 다큐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다큐는 세월호에 대한 다큐, 숨겨진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만든 것이구요. 다큐멘터리 필름으로 남을 수 있는, 필름의 매체의 장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방식으로 그 목적성을 획득했던 것이구요. 저는 오늘날 연극이 그러한 점을, 죽음의 숨겨진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나, 그 죽음을 가장 적나라하고 아프게 드러내는 방식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은 다큐멘터리 필름이나 영화가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시당초 이 연극에 세월호라는 라벨을 붙인 것은 언론이나 평론가들이 붙인 것이지, 저희가 아닙니다. 제가 이 연극에 노골적으로 세월호 연극이라고 말하게 된 것도 그 후에 일어난 검열 사태와 같은 맥락 속에서 였습니다. 저는 이 작품이 세월호 연극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세월호를 다뤘지만, 그 너머까지 가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세월호를 통해서 그곳으로 가려고 했던 것이구요. 세월호가 일어난 원인, 죽음이나, 그 후에 국가가 실패한 것은 인터넷을 뒤지면 다 나오는데, 그것을 연극에서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지난번 관객과의 대화에서 연극을 할 때 연극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한계를 정확히 하는 것이 좋다고 얘기한 바 있습니다. 저는 연극 자체가 누군가의 고통을 내가 이해하고 다가가는 효과적인 감정의 연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다고 연극 한 편을 보고 전후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타인의 고통에 대해 어떻게 하면 조금이나마 내 일로 느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는데, 그 이야기를 지금 작품으로 풀어내려고 하는데, 세월호를 제쳐두고는 그 주제를 얘기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죠. 그렇게 때문에 세월호를 다룰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 저도 다른 걸로 얘기를 하고 싶었죠. 제 주제를 얘기하는 데 세월호를 피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이 것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런 분들도 계셨습니다. 왜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어야하나라고 생각하신 관객도 있을 수 있는데요. 저는 기본적으로 극장이라는 장소 자체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와 어떻게 맞닿아 있나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 경험을 연습하기 위해서 극장에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극작가가 쓴 어떤 인물의 이야기이든, 배우 자신의 실제 이야기이든 그 부분에서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작품 만들 때에는 세월호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대해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관객을 생각하지 않고 만들죠. 관객들이라고 하지만, 한 명 한 명은 개별적인 주체이고, 다른 경험과 다른 생각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떤 관객을 생각하고 만든다는 것이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동시대를 생각하면서 만들지만, 어떤 관객이 올 것이다라는 기대를 하고 만들지는 않습니다.

전강희 : 준비 과정에서 달라진 감각에 대한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세월호에 대해서 무대화할 생각은 별로 없었고, 우리의 감각이 어떻게 달라졌나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죽음에 대해 좀 더 예민해지고, 나도 죽을 수 있다라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죠. 예전에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다가 갑자기 맞게되는 것이 죽음이었다면, 이제는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감각들이 굉장히 많이 생겨났고, 그러면서 호흡, 분노, 감정 이런 것들도 그 맥락 안에서 연습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연습을 하면서 안 풀리는 지점이 우리가 세월호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겠다, 감각에 초점을 맞추겠다 하지만 정면으로 들여다봐야 해결되는 지점이 생겨서 그 때 극중극이 들어간 것이구요. 어떻게 보면 세월호가 전체 작품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연극의 한 꼭지처럼 들어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창기에는 감정이 중시되었다면, 후반에는 가장 안 풀리는 것이 세월호이다보니, 나와 세월호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체적인 구도에서 보자면 세월호가 전부는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이경성 : 초반에 세월호 관련된 글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이 와닿지 않고, 혼란에 빠지게 된 부분이 있습니다. 세월호의 의미와 해석을 읽는 것이 혼돈에 빠지게 하더라구요.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먼저 바라보자라고 생각했고, 자연스럽게 국가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국가라는 맥락 안에서 타인의 고통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죠. 즉, 이 세 가지, 그 날 무슨 일이 있었고, 국가는 무엇이고, 그 안에서 한국 현대사의 맥락에서 타인의 고통을, 인권의 유린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느냐의 문제로 연결이 된 것입니다. 세월호에 대해 기대를 많이 했던 부분들은 의외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연극의 목적을 고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더 효과적인 매체가 많기 때문에 그 매체들에 양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심하경 : 저는 준비된 관객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세월호가 굉장히 드리워져 있었다고 느꼈거든요. 처음 안전수칙 장면에서 그 장면을 바꿔버리는 효과도 있었구요. 극중극에서 저는 불편함을 느꼈는데, 국가에 질문을 하는 방식이 그 질문이 저한테 오는 것 같이 느껴졌어요. “왜 나한테 이러지?”라는 생각도 들었구요. 사실 국가는 우리 모두인가 이런 생각도 들고요. 국가 역할의 배우를 관객석에 앉게 한 것이 그런 의도였는지 궁금합니다.

백인경 : 우리 모두가 국가이고, 책임을 추궁하는 사람도 국가인데, 여기에서는 선량한 시민과 난폭한 국가의 대립구도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닌가, 그래서 누군가 나쁜 사람들이 존재한다라는 메시지가 느껴져서 불편했습니다. 국가도 왕관을 벗고, 나도 사람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느낀다고 말하는데, 책임을 국가가 나서서 너네도 국가의 일부이다라고 밀어붙이지 않고, 마치 여기 극장에 모인 우리는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마무리된 것 같아서 아쉬웠습니다.

이경성 : 개념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국가라는 것이 맞지만, 지금 이 시점과 상황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프레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조중동의 프레임인 것이죠. 이것을 누군가에게 정확한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이고, 국가가 실패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누가 잘못했는지를 덮고 가려고 하는, 개념적으로만 도덕적인 프레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명확하게 국가라는 역할을 지정한 것이었구요. 객석에 앉아 있는 분들은 그런 불편함을 느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 <햄릿> 극중극 장면을 생각했던 것은 그 날 세월호와 관련해서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요. <세월호를 기억하다>라는 책을 보니, 그 날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저도 잘 모르고 있더라구요. 구체적인 팩트를 바탕으로 무슨 일이 있었나를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책임 추궁을 해서 어떤 책임이 있는지를 논리적으로 밝히려는 의도가 아니라, 국가는 인격체가 아니면서 또한 인격적인 부분이 있을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슬픔을 얘기하는 것이구요. 실제로 국가는 한 개인이기도 합니다.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국가가 많이 바뀌니까요. 예를 들어 위안부 문제 같은 경우 박유하 교수가 욕을 먹는 것은, 그것은 국가가 제국주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한 것이다라고 얘기하는데, 그 때에는 개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한 것이죠. 한 개인이라고 볼 수 없는 거죠. 국가라는 것이 기관이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개인이기도 하기에 그래서 배우를 국가 역으로 맡긴 거죠. 이런 얘기도 있었는데, 국가에게 질문을 할 때, 국가 역의 배우가 질문을 회피하는 것이 실제 대통령이 사라진 7시간을 얘기하는 것이냐는 말도 있었는데, 그것은 아니었구요. 객석에서 앉아서 보신 분들은 힘들셨을 것 같고, 배우나 연출도 힘들었습니다.

전강희 : 연습 때에도 많이 얘기를 나눴는데요. 특히 선원 캐릭터에 대해서 그를 개인으로 볼 것이냐, 시스템으로 볼 것이냐라는 얘기를 했는데, 우리는 시스템으로 보는 것이 맞겠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관객들은 힘들었겠지만, 개인보다는 국가, 시스템이 문제이다라고 생각한 것이었구요. 처음에는 선원으로 얘기를 하다가 배우가 나중에는 나경민 개인으로 얘기를 하는데, 그런 부분의 조율이 힘들었습니다.

임승태 : 이 문제는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의 대한민국을 제대로 된 민주공화정으로 보면 나도 국가의 일부가 되겠지만, 군주국가로 이해한다면 국가는 특정인을 지칭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카메라를 이용하는 방식에 있어서 관객의 불편을 덜기 위한 노력이 느껴지고, 관객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관객을 카메라로 찍을 때에도 발을 비춘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관객이 안심할 수 있게 한 것 같습니다. 무대가 객석을 넘어 들어오는 지점이 분명히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선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유사한 주제의 다른 공연(무브먼트 당당의 <그날, 당신도 말할 수 있나요?>)에서는 4월 16일에 대한 기억을 배우들이 나가서 얘기하고, 연출자가 배우들을 연결해주고, 마이크가 객석으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말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지 못하기도 했구요. 저는 마이크가 나한테 오면 어떡하지라는 긴장을 했던 것 같고, 나의 기억을 말한다면 그것이 가치가 있나라는 생각도 했구요. 짧은 시간 긴장을 하다가 결국 오지 않아서 다행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두 공연을 다 본 관객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편했던 것이죠.

이경성 : 이것은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그 공연은 제 취향이 아니었고, 제게 마이크가 왔을 때 저는 얘기를 안 했거든요. 나는 관람자인데, 행위자가 관람자에게 굉장히 폭력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프라이버시의 라인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 라인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이 공연에서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일까 고민했던 것이고, 라이브 카메라가 영문없이 관객의 얼굴을 비추는 것은 폭력적이고 강요적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긴장감과 불편함에 대해 고려를 해야 하는데, 맥락을 날카롭게 건드리는 긴장감과 내가 일방적이고 행위자에게 당하는 긴장감과 불편함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후자는 창작자로서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취향의 문제였기 때문에 프라이버시 라인이라기보다는 그저 카메라가 관객의 얼굴을 비추는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관객에게 무엇을 참여시키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인터액티브라고 하지만, 정서적인 참여가 있을 수 있고, 피지컬한 참여의 방식이 있을 수 있는데, 인터액티브라고 해서 피지컬적인 참여를 1차원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무대와 객석이 나뉘어져 있어도 충분히 인터액티브가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굳이 객석을 양면으로 하고 둘러싸지 않고 무대와 객석의 구분을 없앤다고 인터액티브가 아니라, 효과적으로 인터액티브가 일어날 수 있는 방식은 많은데, 너무 1차원적으로 접근할 때 아쉬운 지점이 있습니다.

임승태 : 이 문제가 실은 <햄릿>의 극중극과 연결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햄릿은 연출님과는 달리 일방적으로 관람자를 참여시키잖아요. 자신이 설정한 관객에게 직접적인 질문을 던지는 거죠. 연출님이 던지신 메시지는 관객이 직접 받는 게 아니라 객석에 앉아 있는 국가라는 캐릭터가 대신 받게 되는 것이니까 일종의 필터일 수도 있고, 간접적인 방식일 수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연출님의 취향은 그 쪽이 아닌데, 다루고 있는 내용은 <햄릿>이고, 그 중에서도 극중극이라는 점이죠.

이경성 : 그것은 하나의 연극적인 장치이고, 국가가 받을 때에도 관객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긴장감을 같이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장치일 뿐이지,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햄릿>은 연극에 대한 연극이라고 생각해서 극중극 자체가 햄릿이 “그래 연극이다”라고 하면서 햄릿이 연극을 통해서 현실에 파장을 미치는 하나의 방편으로 쓰는 것이잖아요. 햄릿이 “덴마크는 썩었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햄릿이 인식하는 연극 밖의 현실이 드러나고, 연극을 통해서 현실을 겨냥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연극이 현실을 겨냥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 연극의 무기력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있었구요. 무기력함을 극복하는 것이 저의 화두였거든요. 그래서 <햄릿>을 사용한 것입니다.

전강희 : 김다흰 배우가 <햄릿>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작품에 들어온 것이기도 하구요.

임승태 : <햄릿>의 극중극을 다루고 있지만, <햄릿>의 또 다른 주제인 애도가 이 작품의 형식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햄릿>에 등장하는 아버지를 잃은 다양한 아들, 딸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처럼 이번 연극에서도 배우들 각자의 사연을 들려준다는 점에서요. 포스터에 대해서 짧게 질문드릴게요. 드라마터그와 배우들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이경성 : 먼저 어떻게 느끼셨는지 먼저 듣고 싶은데요.

김재영 : 저는 포스터를 처음 보고 당연히 배우, 중심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연출님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고, 그럼 연출이 극에 등장하나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끝까지 연출이 극에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예상을 깨는 재밌는 부분이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최희범 : 저는 양손 프로젝트의 포스터를 보면서 왜 연출이 여기에 있을까, 그리고 왜 배우 중 한 명은 빠져있고 대신 연출의 얼굴이 들어가 있을까, 왜 연출의 얼굴이 이렇게 의미심장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하는 거지, 나에게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왜 이들의 얼굴을 왜 드러내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포스터라면 공연에 대한 정보를 관객에게 전달해야 할텐데 그러한 기본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임승태 : 두산아트센터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육성’하는 예술가들을 전면에 배치하는 데 대한 나름의 정당성이 있겠지만, 사정을 잘 모르는 관객들은 오해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효인 :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인데, 저도 아무런 정보 없이 연극을 보러 간 사람인데요. 당연히 배우인 줄 알았고, 누구지 하면서 봤는데, 연출가라는 걸 알게 되었고, 연출이 배우로 등장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객들에게는 불친절하거나, 그러나 두산의 전략은 먹힌 포스터였다고 생각합니다. 나름대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이경성 : 두산과 포스터 때문에 충돌했습니다. 잘 포장된 상품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것을 깨는 게 저의 숙제였습니다. 처음 이 포스터에 대한 컨셉 제안을 받고 그 때 얘기했던 것은 일단은 부담스럽다는 얘기를 했구요. 포스터는 작품에서 파생되는 것인데 그게 아니라서 이해가 안 되었고, 제가 연극하는 방식을 절대 반영하지 못하는, 절대 예술가 한 명이 다 만들어내는 듯한 뉘앙스가 싫어서 마지막까지, 제작의 차질을 빚는 순간까지 갔었고, 그래서 내가 너무 신경쓸 일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놓아버린 측면이 있습니다. 두산 입장에서는 작품에서 파생된 시각 이미지를 쓴 포스터가 대학로에 깔려 있는데, 그게 홍보 마케팅에 크게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을 했다고 합니다. “창작자 육성 프로그램 이경성”이라는 말이 이렇게 크게 나와야 하는가, 내가 이 프로그램에서 길러진 아티스트인가라는 생각을 했구요. 그렇게 브랜드 이미지화하는 것에 대해 두산 PD들도 중간자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연강문화재단의 사장님들은 기업 브랜드 이미지 고취가 더 큰 목적이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두산 이미지를 고취하는 방식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중간에 껴 있는 PD들의 입장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구요. 배우들에게 내게 얘기를 직접 못하겠다 같이 얘기하자고 해서 알렸고, 저는 딜레마인 게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는 지원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반면, 내가 생각하는 예술하는 방식을 어느 순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생기는 거죠. 누가 순수하게 젊은 예술가를 지원하겠는가. 창작자 육성 프로그램이란 말이 계속 걸렸는데, 저는 어떻게 이것을 이용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거죠. 누구에게도 지원을 받지 않고 순수하고 고결하게 하겠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명한 것은 아닌 것 같고, 기업 지원의 경우에 나는 어떤 스탠스를 가지고 있어야 하나를 고민했거든요. 그런데 이런 부분만 제외하면 파트너십이 굉장히 훌륭하거든요. 작품에 대해서 신경쓰고, 대화도 많이 하고, 잘 하는 PD들이거든요. 두산아트센터에서 세월호에 대한 연극을 자체적으로 기획한 것은 아니고, 저희가 제안한 것이고, 시기적으로 두산아트센터가 상대적으로 득을 보았죠. 옆에서는 세월호 연극을 못하게 하는데, 두산에서는 하니까 두산아트센터가 필요한 얘기를 하는구나 라는 반응이 나왔고, 극장 측도 뻘쭘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포스터가 나온 것이구요. 합평회 때 저도 적나라하게 두산 측에 의견을 전달했습니다.

전강희 : 배우들은 PD, 극장의 입장을 이해했는데, 창작자 육성 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아티스트에게 너무 많은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PD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구요.

백인경 : PD와 창작자 사이에서 충돌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시스템이 개인을 이끌어가기도 하고, 개인이 자발적으로 시스템에 길들여지기도 하구요.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 있고, 공공기관은 훨씬 그 문제가 복잡하기 때문에 나 개인이 해결할 수도 없고, 내가 투쟁한다고 바뀌지도 않는 것이구요. 그런 것에서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임승태 : 얼마 전, 성북동비둘기가 했던 <망루의 햄릿>의 포스터가 공연이 시작되고  바뀌었습니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 물청소 하는 사진에서 문자 그대로의 “고성의 망루”가 그려진 포스터로 바뀌었었죠. 공연 관계자에게 포스터가 바뀐 이유를 물어보았었는데, 극장(국립극단) 측에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포스터를 바꿔달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국립극단으로서는 정치적 부담이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는 타협이 필요한 경우도 있는 것이고, 두산의 방식이 그런 것이죠. 현재 상황에서 공연이 진행되었다는 것이 오히려 더 놀랍고, 정부의 입맛에 맞추려면 축소되거나 할 수도 있을 이 시점에서 공연된 것이 놀랍습니다. 트위터 반응을 보면 두산아트센터에 경의를 표하는 반응도 많구요. 두산아트센터 입장에서는 이 작품을 한 것이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경성 : 연극하는 사람들이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구요. 너무 나이브하게 접근을 한 작품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 작품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구요. 그래서 저는 팝업씨어터 사태 난 것도 굉장히 안타깝고 힘든 일이지만 저는 세 연출가들이 다른 방식으로 화려하게 입봉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런 일을 겪고 나서 이후에 연극의 형식 등에 어떻게 반영될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구요. 선배 연극인들이 그런 것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참여하는 사람이 소수이고, 가장 잘 나간다는 중견 연출가는 힘을 실어주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런 부분은 참 어렵고 민감한 것이구요. 어떻게 예민하게 접근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고민이 되는 시점입니다.  

백인경 : 창작자 뿐만 아니라 행정가, 기획자 모두가 같이 고민을 해 볼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PD에 대한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은, 조직에서 힘든 일을 겪고 튕겨져 나오는 경우도 많고, 그런 것에 무감한 사람들이 버티고, 그런 사람들이 위로 올라가는 악순환이 벌어지거든요. 창작자들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측면보다 같이 연대해서 얘기도 많이 하면서 행정 일 하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서로 좋게 연대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야 작품도 좋아질 것 같구요.

이경성 : 연대라는 것이 같이 싸우는 것도 있지만 검열이라는 문제를 더 넓은 의미에서 반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공감하는 것, 근접 예술 분야와 시민사회까지 이 검열을 가지고 투쟁하는 것이 누군가의 밥그릇 싸움이 아닌 것인지를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는지가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그 방향성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임승태 : 저희도 내부적으로 논의하고 있는 부분이 있고, 관객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이 무엇이 있을지 고민 중인데, 이 문제는 뒤풀이에서 계속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재영 : 마지막으로 두 분에게 연극이란 어떤 의미인지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

이경성 : 저한테 연극이란 어떻게 흥미롭게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전강희 : 저는 삶의 방식이 연극이 된 것 같습니다. 원래 희곡을 전공했고, 희곡을 하다보니 연극이 하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 때문에 연극을 시작했는데, 연극을 하면서 검열과 같은 잘못된 문제에 대해 내 목소리를 더 크게 낼 수 있다는 점이 좋고, 그것이 제 삶을 더 다양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연극을 단순히 돈을 벌고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경제적인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냥 할 수밖에 없는 것, 내 삶의 한 방식, 그것이 저에게 연극이라고 생각합니다.


2015년 11월 19일 목요일

다양한 신체, 다양한 ‘이완’: 극단 애인의 <무무> 연습 참관기

글쓴이_최희범

지난 11월 7일 토요일, 극단 애인의 2015년 신작 <무무>의 연습실을 방문했다. 극단 애인은 “연기를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극단이다. 연기에 대한 탐구는 애인 작업의 큰 축을 이룬다. 대표 김지수씨가 “배우가 성장하는 극단을 만들고 싶었다”고 극단 창단의 이유를 밝힌 것을 보면, 이 극단에게 장애인 단원들이 연기자로서 성장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연습 참관의 목적은 극단 애인이 작품 연습 이외의 배우 훈련을 어떻게 진행하는지를 직접 보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공연이 임박한 시기라서 그런지, 아쉽게도 장면 연습과 런쓰루(도중에 끊지 않고 전체 작품을 연습하는 것) 외에 내가 보고자 했던 기본적인 배우 트레이닝을 볼 수는 없었다. 대신에 (무려!) 두 번의 런쓰루와 연출과 배우들이 서로 의견을 나누며 장면을 다듬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무무> 연습실, 내가 방문한 날이 극장에 들어가기 전 연습실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하지성 배우의 발전된 모습을 보게 된 것은 이번 연습 참관에서 얻은 의외의 수확이었다. 이 배우는 그를 무대에서 처음 본 2년 전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고, 표정은 풍성해졌으며, 호흡도 안정적이었다. 신체적 특성들로 인해 “원활하게” 말하고 움직이는 것에 ‘장애’가 있는 그의 목소리는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렁차지는 않았고, 발음도 부정확했다. 그가 갑자기 휠체어를 박차고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된 것도 아니고, 그의 근육들이 엄청나게 힘이 붙어서 전보다 확실한 제스처를 수행할 수 있게 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차이, 이런 성장을 만들어낸 것인가? 그는 무엇을 잘하게 되었기에, 나는 그가 연기를 더 잘하게 되었다고 느낀 것일까?

배우들이 트레이닝 하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강예슬 연출에게 평소 배우 훈련을 어떻게 진행하는지를 물어보았다. 강예슬 연출은 주로 “이완”을 목표로 신체 및 발성 훈련을 한다고 답해 주었다. 특히 연습의 초반에는 연습 시간 대부분을 할애할 만큼 이완 훈련을 중요시한다고 한다. 훈련을 통해 배우들은 매 연습에서 실질적인 신체 및 정신적 이완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몸과 마음의 상태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알게 된다. 공연이 가까워지면 신체, 발성 훈련은 배우 개인들에게 맡겨지는데, 초반의 훈련을 통해 자신의 몸에 대해 충분히 인지할 수 있게 된 배우들은 스스로 몸과 마음을 정비하는 시간을 가진다고 했다. 하지성을 비롯한 극단 애인의 배우들이 연기자로서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완’ 훈련 덕분인가? 관객 앞에 서는 배우가 마냥 몸이 늘어지는 식으로 “이완”할 수는 없을진대, 그렇다면 배우에게 있어서 이완이란 어떤 것인가?

<무무> 장면 연습, 오른쪽 뒤가 하지성 배우(스테판 역), 왼쪽 앞이 최종혁 배우(가브릴라 역)

이완 훈련은 극단 애인만의 독특한 훈련 방식은 아니다. 대부분의 배우 및 연출가들이 이를 중요하게 여기며, 많은 연기론이나 연기 훈련법들이 배우의 이완을 목적으로 명상, 호흡, 움직임을 접목시킨 트레이닝 방법들을 제시한다. 최초로 사실주의 연기 훈련법들을 체계화시킨 것으로 평가받는 스타니슬랍스키(Constantin Stanislavsky)는 ‘신체 이완(physical relaxation)’을 자연스럽고 진정성 있는 연기의 전제 조건으로 삼는다. 그는 스스로도 이완을 위해 요가 등을 훈련(수련)했으며, 이를 자신의 훈련법에 포함시킨다. 스타니슬랍스키의 전통을 따르는 많은 사실주의 연기 방법론들이 ‘이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과 유사하게, 코포(Jacques Copeau), 르코크(Jacques Lecoq) 등의 비사실주의 연기론들은 ‘중립(the neutral)’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 두 개념은 모두 어떤 ‘상태’를 지칭하는데, 많은 연기 방법론들에서 이런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적절한” 혹은 “좋은” 연기를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전제 조건이다.

장애 퍼포먼스 이론가이자 활동가인 캐리 샌덜(Carrie Sandahl)은 그녀의 논문 “중립의 독재: 장애와 연기 훈련(The Tyranny of Neutral: Disability & Actor Training)”에서 연기 양식과 상관없이, 한 배우가 인물을 연기하기 위한 기본 조건으로 간주되는 ‘이완’, ‘중립’과 같은 개념들이 장애인 연기자에 대한 배제의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녀는 특히 “중립 상태”라는 비유적 표현이 신체 외형, 움직임의 아름다움과 유연함, 자연스러움 등 이상화된 신체적 지표들에 의해서 평가된다고 말한다. 이로 인해 선천적으로 비대칭적이고 유연하지 못한 근육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 혹은 후천적으로 복구가 어려울 정도로 손상된 몸은 “적합하게 이완할 수 있는 신체(a body able to relax properly)”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적절하게 이완할 수 없는 신체는 연기를 위한 기본 조건이 충족될 수 없는, “연기 불가능한(disabled) 신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연기 교육 방법들에 내재되어 있는 이러한 논리가 장애인 배우들이 겪는 불평등을 “은밀하게” 심화한다고 말한다.

누군가 선천적인 호흡기 질환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깊고, 안정적이고, 자연스러운 “이완된 호흡”을 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다. 또한 선천적으로 굽은 등을 가진 누군가는 아예 운동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고, 아무리 운동을 해도 유연한 근육이 있는, 그래서 아름다워 보일뿐 아니라 안정되어 보이는 어깨 라인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인들에게 ‘이완’이란 도달할 수 없는 무엇인가? 애인의 배우들이 하는 ‘이완’ 훈련은 정확히 어떤 목표를 가지고 수행되는 것인가?

우리는 폴란드의 연출가 그로토프스키(Jerzy Grotowski)의 연기론에서 이 문제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약 어떤 여자의 흉곽이 길고 좁다면 그 여자는 연기를 하면서 대체로 횡경막을 시각적으로 통제하는 호흡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그 여자는 오히려 호흡에 척추를 이용하는 방법을 연구해야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물론 척추를 너무 의식하면 안 되고, 반응과 동시에 척추를 사용해야한다. 마치 뱀이 그러하듯이. 그것이 바로 생명의 반응이다. 척추를 막대기처럼 뻣뻣하게 경직시키면 결코 안 된다. 척추를 유연하게 하면 호흡도 자유로워질 것이다.”(예지 그로토프스키, 『그로토프스키 연극론』, 현대미학사, 2007, 나진환 편역, 84면)

이 부분에서 그로토프스키는 독특한 신체 조건으로 인해 연기자 호흡의 정석이라고 간주되는 복식 호흡이 불가능한 배우의 경우를 제시하고, 그녀의 신체에 맞는 호흡 및 발성법을 통해서 ‘생명의 반응’으로서의 자유로운 호흡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로토프스키는 연기 훈련 메소드를 고정시키고 “기술을 얻기 위한 기술”을 연마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러한 그의 연기론은 두 가지 측면에서 장애인 연기자들을 위한 훈련법 개발의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모든 훈련은 연기자 개인의 신체, 정신적 조건에 맞추어 개별화되어야 한다는 것과, 궁극적으로 모든 훈련은 고정된 형태 혹은 방식의 신체, 목소리, 말투, 호흡, 움직임과 같이 이상화된 목표를 얻어내기 위한 반복 연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두 가지이다.

그로토프스키는 고정된 목표를 추구하며 자신의 신체 작동 메커니즘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려는 것을 기계화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기계화는 부자연스러운 연행이나 가식적인 허행을 낳을 뿐 좋은 연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는 기계화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유기화를 주장하는데, 이는 배우의 신체가 무대 위에서 “본래적”(혹은 “일상적”) 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을 막는 ‘방해물(blocks)’을 제거함으로써 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이 방해물은 배우 개인이 가진 신체적 “약점” 혹은 특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배우들이 특정한 말투, 호흡, 이미지, 나아가 특정한 감정에 매몰되어 훈련이 습관적이고 상투적인 것이 됨으로써 훈련 자체가 방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로토프스키는 배우가 상투적인 연기가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자기폭로(self-revelation)’로서의 연기를 하려면, 매 순간 자신의 ‘방해’를 초월하는 경험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배우의 연행에서 진정한방해 요소는 물리적 약점 자체가 아닌, 무대 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가로막는 모든 신체, 심리, 정신적인 요소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로토프스키의 연극론에서 연기 훈련의 궁극적인 목표는 관객들 앞에서 자기-폭로를 실행하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배우를 양성하는 것이다. 배우의 자기-폭로가 연극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연극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그로토프스키의 연극론은 종종 “다른 사람들 앞에 있는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배우의 현존(즉, 자기-폭로)은 영적, 정신적 해방을 가능하게 한다”는 믿음에 근거한다고 해석된다(Phillip Auslander, From Acting to Performance: Essays in Modernism and Postmodernism, London; Routledge, 1997). 비록 그로토프스키의 연기론은 불확실한 형이상학에 불과하다고 비판받기도 하지만, 그의 연기론은 여전히 다양한 연기 양식을 시도하는 많은 배우 및 연기 교사들에게 활용되고 있다. 특히 그가 특정한 훈련법들이 절대적 효과를 지닌다고 간주되는 것을 경계한다는 점은 기술 및 ‘메소드’에 매몰되어 자칫 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는 연기 훈련들에 제동을 걸며 연기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준다.

그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훈련법들은 장애인 연기자들에게 바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로토프스키와 작업한 배우들의 대다수는 비장애인이었을 것이며, 이로 인해 그가 제시하는 훈련법들은 그와 함께 작업한 배우들의 신체 및 정신적 능력의 범위를 기준으로 만들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연기론은 이상화된 연기 훈련의 목표들, 방법론들을 거부하고 메소드의 개별화를 주장함으로써 다양한 특성 혹은 “약점”을 지닌 몸들 역시 이완된 무대 위 현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나아가 ‘이완’ 혹은 ‘중립’을 특정한 신체적 외형이나 소리, 말투 등의 시청각적 특성들에 국한시키지 않음으로써, 다양한 ‘중립’, 각기 다른 ‘이완’의 상태가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장애인 극단들이 그로토프스키 연기론을 배우 훈련에 적극적으로 도입해야한다거나, 하지성 배우가 틀림없이 이 같은 ‘이완’ 훈련을 통해서 연기자로서 성장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샌덜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그로토프스키를 포함한 기존의 연기 훈련들이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고, 사용되는 용어들로 인해 장애인 연기자들이 겪는 불평등을 심화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들을 앞에 놓고 장애인 배우들 혹은 극단들이 취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기존의 연기론이나 훈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훈련법들이 다양한 신체를 고려하는 부분들을 눈여겨보고 재해석하여 연기 훈련의 방식과 대상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이 아닐까? ‘주변화(marginalization)’된 신체가 무대에 오를 때 찾아오는 인식의 변화야 말로 극단 애인의 작업에서 찾을 수 있는 핵심적 가치이다.


애인에 의해 각색된 <무무>는 지적 장애인인 “게라심”(한정식 分)이 자유를 박탈당한 농노로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빼앗길 수밖에 없던 상황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또 다른 농노인 “에로쉬카”(백우람 分)의 대사, “나는 한 번도 무엇을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해봤단다.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내가 갖지 못한 건 사랑하는 마음이었어. 자유가 없었던 거지. 이 큰 저택에 몸만 묶여있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 갇혀 있었던 거야.”라는 말이 여운을 준다. 배우들의 말과 몸짓이 인간의 자유와 선택에 대한 이야기와 만나, 삶과 연극 및 연기 예술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에게 많은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무>는 11월 13일 금요일부터 12월 5일 토요일까지 성북마을극장에서 공연된다.

2015년 11월 1일 일요일

2015 SPAF 폐막작 <폭주 기관차> - “우리는 폭주하고 있고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글쓴이_최희범



2015년 10월 30일, 그러니까 어제 저녁에 스파프(SPAF) 폐막작인 <폭주 기관차>를 보고 왔다. 시작 15분 전 쯤 도착한 공연장 앞에는 20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각각 손에 피켓을 들고 침묵 시위를 하고 있었다. 내용은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최한 팝업 씨어터 공연의 검열 및 공연 방해에 대한 사과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건물 안에 들어가자마자 관계자가 관객 한 무리를 엘리베이터에 태워서 3층으로 올려보냈다. 스파프 공연에서 처음 받아보는 마중 서비스였다. 공연장 로비 분위기는 이전 스파프 공연들에서와 사뭇 다르게 어수선했다. 객석에서는 시위 내용이 적힌 종이가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오가고, 웅성거리는 소음 가운데서도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드문드문 들려왔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반쯤 정신 나간 듯한, 자신이 희대의 범죄자들이라고 주장하는 기관사와 화부가 열차 전체를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폭주 기관차로 만들어버리는 이야기였다. 스파프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두 대의 피아노를 연주하며 연기하는 두 명의 범죄자는 음악과 긴박한 리듬으로 그들의 심리상태를 탁월하게 표현해낸다. 기관차의 속도가 올라감에 따라 가속되는 극의 리듬, 그리고 그 안에서 얽히는 인물들의 이해관계와 모순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는 말로 이 공연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미안하게도) 앞에 적은 간략한 줄거리 및 배우들이 피아노 연주를 통해 굉장히 시끄럽고 히스테리컬하게 광기를 표현하는 장면들이 이어졌다는 점 외에는 공연에 대해 그다지 생각나는 게 없다. 미숙한 한국어 자막 플레이가 이 공연이 과연 그런 카타르시스를 주는지, 인물들의 심리상태가 “탁월하게” 표현되었는지를 감상하기 힘들게 방해했기 때문이다. 슬로베니아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내가 보기에도 담당자가 졸고 있는 게 아닌지 싶을 정도로 미숙했던 자막 플레이는, 얼마 전 본 로버트 윌슨의 <소네트> 공연보다 한층 심각한 수준이었다.

<폭주 기관차>는 대사의 내용과 발화의 리듬이 매우 중요한 연극이었다. 일단 대사가 굉장히 길고 많았다. 또한 작품의 서사 전달과 인물들의 심리 상태에 대한 묘사가 주로 대사 내용을 통해 이루어졌다. 더욱이 주최측이 강조하는 “긴박한 리듬”은 연주되는 음악의 리듬 뿐 아니라 배우들의 발화의 리듬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즉 인물들의 말과 연주되는 음악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런 작품의 정수를 느끼기 위해서는 한국어 자막 플레이와 배우 발화 간에 긴밀한 연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공연에서 자막 플레이와 공연 진행 싱크로가 계속 어긋나는데, 어찌 공연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겠는가?

자막으로 인해 짜증이 치밀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의 관극은 흥미롭기도 했다. 반쯤 맛이 간 기관사와 화부가 자기들 멋대로 열차 전체를 폭주하게 만든다는 내용은 묘하게 현재의 시국을 연상시켰다. 이러한 연상은 공연장 바로 밖에서 벌어지는 시위로 인해 훨씬 직접적으로 작용했다. 검열 반대 시위 덕분에 이 공연은 일상적인 삶과 분리된 새로운 맥락에 놓이게 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공연은 시위 덕분에 연행을 에워싸는 “축제다운” 맥락을 지니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시위대는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 바로 앞에 진을 쳤다. 이로 인해 공연장에 들어와서 밖의 상황을 떠올릴 때 이 건물을 시위대가 공간적으로 에워싸고 있는 듯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또한 공연 시작 전과 종료 후 시간대에 집중적으로 시위함으로써, 관객들이 공연장에 들어와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전체 과정이 일상적 시간으로부터 분리되었다.

문화 인류학자로서 제의 및 축제성을 연구한 빅터 터너는 이 같은 시간적, 공간적 분리를 통해 ‘리미널(liminal)’한 영역이 형성되며,1) 이 영역은 문화적으로 고정된 형상들이 새로운 것과 결합될 잠재력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이로 인해 그 영역에 속한 사람은 구별된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사건을 일상과 다른 맥락에서 읽게 된다. 터너는 이러한 특성을 ‘리미널리티(liminality)’라고 부르며, 이는 ‘축제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물론 어제의 공연장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 규범들로부터 일시적 해방을 누리는 축제의 장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공연장 전체를 감싸는 긴장감과 어수선한 분위기를 통해, 나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왠지 모를 동요가 많은 관객들의 마음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관객들의 관극 경험에 부여된 새로운 맥락은 연극 작품을, 공연장의 분위기를, 다른 관객들의 태도 등을 비일상적인 맥락에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일상의 구조적 상태를 전복하고 반구조의 상황을 만드는 가운데 상하, 우열, 대립의 장벽을 무너뜨리” 는 것으로서의 ‘축제성’을 경험한 것이다.2)

스파프 공연에서 이 같은 ‘축제성’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말인즉, 스파프는 해마다 나름의 테마를 중심으로 개최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 테마가 무엇인지, 그래서 각 프로그램들이 축제 전체의 어떤 맥락에서 기획되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공연 관람을 통해서 이러한 맥락을 파악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스파프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이와 관련된 정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을 볼 때, 이 테마라는 게 주최측에게도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 않다. 대부분의 정보들은 각각의 공연 단체, 혹은 작품이 얼마나 유명한지, 유서 깊은지, 혹은 “핫”한지 등을 홍보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스파프라는 축제에서는 10월 마다 국내에서는 좀처럼 볼 기회가 없는 해외 유명한 작품 및 극단들의 공연을 대학로에서 볼 수 있는 기회로서의 “축제”성 이상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최측의 기획 의도와는 무관할지언정, 시위대가 이 공연에 끌어온 정치적 맥락은 공연 감상의 경험을 보다 ‘축제’답게 만들었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스파프는 하지 못하는 것을 혹은 하지 않는 것을 해낸 것이다.

이 작품을 만약 국내 극단이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노스페이스 잠바와 수학여행이 무엇인가를 연상시킨다는 것과 같은 이유로 공연 금지되거나 방해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공연에서 대사를 다 빼고 배우들 피아노 연주로만 공연을 하라는 식으로. 그러면서 우리는 “무대를 노래하다”라는 테마를 가지고 이 축제를 기획했고, 그래서 폐막작에서는 “노래”만 나오고 쓸데없는 “말”은 안 나오는 것으로 기획했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붙였을 수도 있다. 이 극단이 외국 단체였던지라 다행히도(?) 이런 혐의를 받지 않고, 무사히 그들이 기획한 공연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닐지. 어제 자막 플레이의 어설픔으로 관객들의 인내심을 극단까지 몰아붙인 것은 적어도 고의적 방해는 아니었으리라 생각해본다. 아무쪼록 오늘 폐막작은 보다 나은 자막 플레이와 함께 무사히 마쳤기를, 또한 보다 대규모 진행된 예술 검열 반대 시위가 작품과 또 한 번 멋지게 협업할 수 있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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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놀드 반 게넵(Arnold Van Gennep)으로부터 빌려온 이 개념은 문지방이라는 의미의 ‘limen’으로부터 파생되었다. 반 게넵은 전이 의례의 세 국면을 분리-전이-통합으로써 설명하며, 여기서 ‘분리’의 국면은 일상으로부터의 시간적, 공간적 분리를 의미한다.

2) Victor Turner, Myth and symbol. Crowell Collier and Macmillan, 1968, p. 277.

2015년 9월 29일 화요일

'덕질'로 연극 읽기: <카포네 트릴로지>

글쓴이_성지수

오, 나의 ‘오빠!’


‘오빠들’ 얘기로 시작해볼까 한다. 물론 친오빠 얘긴 아니다. (친오빠 얘기였다면 ‘오빠 새끼’로 이 글을 열어야만 했겠지.) 누군가에게는 ‘서태지 오빠’이고 누군가에게는 ‘나보다 어린 여진구 오빠’인 그런 ‘오빠들’을 말하려는 것이다. (유사어로는 ‘우리 애기들’이 있다.) 우린 각자의 ‘오빠’를 사모하고 동경하여 인터넷과 대중매체를 누비며 ‘오빠’를 더 가까이서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것들을 긁어모은다. 무대인사, 팬 사인회, 음악방송처럼 직접 볼 수 기회가 생기면 주저 없이 신청하고는 디데이 전후로 몇날 며칠을 설렌다. 지금은 이런 것들에 코웃음을 치는 사람도 너의 ‘오빠’는 누구였었니, 라고 물어보면 눈빛이 아득해지고 목소리가 아련해지면서 “내가 중학교 때 말이야...”라는 말로 썰을 풀기 시작한다. (물론 이런 사람들의 썰은 “그렇지만 이젠 다 졸업했어. 그땐 내가 왜 그랬나 몰라?” 따위의, 시크함을 보여줄 수 있는 대사로 끝이 나곤 한다.) 구질구질한 현실에서 나를 건져 동화 속으로, 환상 속으로 날 이끌었던 ‘오빠’를 더 가까이서 느끼기 위해 내 시간과 돈을 들이는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돌 관련 상품을 사기 위해 몇 백 만원씩 쓰는 십대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차는 어른들도 가만히 과거를 떠올려보면 ‘오빠들’의 노래 테이프를 사는 건 물론이거니와, 오빠들 사진이 붙었다는 것 외에는 별 특별할 것도 없지만 값은 훨씬 더 비싼 다이어리를 덜컥 사고, 멋진 사진을 찾아 컬러 프린트한 후 그걸 코팅까지 해서 간직했던 자신의 ‘흑역사’가 뇌리를 스치게 마련인 것 같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나는 나의 ‘오빠들’을 중학생 때 만났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오빠들’이 내 인생을 “찾아왔다.” 내 십대 시절을 회상할 때 ‘오빠들’을 빼 놓고 얘기한다면 학교와 학원밖에 없는, 참으로 무미건조한 나날들뿐일 것이다. 나는 ‘오빠들’을 보러 갈 시간을 내기 위해 시간관리라는 걸 시작했고 ‘오빠들’을 한 번 더 보려고 열심히 공부했으며 ‘오빠들’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었다. 십대 때의 나의 영웅(!), 나의 ‘오빠들’은 뮤지컬 배우들이었다. 당시엔 뮤지컬이 지금만큼 보편화된 장르는 아니었다. 물론 지금도 뮤지컬은 ‘덕후’들의 세계이긴 하지만, 누군가 뮤지컬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 얘기를 듣던 그룹 중 한 두 명은 자기도 뮤지컬이 좋다고 맞장구를 치며 자기가 본 한 두 작품을 주워섬기는 근래와는 달리, 당시 열 서너 살인 내가 뮤지컬을 좋아해서 적어도 2주일에 1-2편은 꼭 보러간다고 말하면 다들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다.

2주일에 1-2편! 그러니까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공연장에 갔던 셈인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용돈을 많이 받았던 것도 아닌 나로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짓이었다. 나는 사연이 채택되면 초대권을 주는 라디오에 열심히 사연을 써 댔고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갖가지 이벤트에도 응모했다. ‘이번 중간고사에서 1등 하면 뮤지컬 두 개 보여주기,’ ‘3000제(가능한 경우의 수의 문제를 다 모아놓았다는, 악명 높은 수학 문제집)를 일주일 만에 다 풀면 R석 예매 허락해주기’ 같은, 엄마와의 약속을 걸기도 했다. (아 어머니, 불효녀는 웁니다!) 뮤지컬이나 뮤지컬 배우들의 매력이야 요즘은 여러 매체를 통해 잘 알려진 것 같아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하지만, 당시 나의 정신을 빼 놓은 요소 중 하나는 공연이 끝나면 ‘오빠들’을 만날 수 있는데다 심지어 ‘오빠들’이 나를 기억해주기까지 한다는 점이었다.

오빠들이 날 기억해준다! 나를 보면 반갑게 내 이름을 불러준다! 이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세계적으로 수억만 명의 팬이 있는 아이돌을 좋아하던 것과 비교했을 때 더더욱 그러했다. 한 친구가 자기 ‘오빠’의 생일을 맞아 정성스레 ‘오빠’ 사진에 왕관과 케이크를 그려 넣다가 갑자기 휙, 모든 걸 집어 던지면서 (욕설과 함께) “XX! 이 새낀 내가 존재하는 것도 모르는데!”했던 장면이 잊히지 않는 이유는 이것이 내 맘속에서 ‘나의 오빠들의 특별함’을 부각시키는 사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나는 우리 ‘오빠’가 다른 팬에게 사인을 해 주느라 내게 자기 소지품을 잠시 들고 있으라고 맡겼던 어젯밤 일을 회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십 초도 지나지 않아 본인이 던졌던 것들을 주섬주섬 그러모았고, 자신의 더러운 성질 때문에 ‘우리 오빠’ 얼굴에 구김이 갔다며 아까보다 훨씬 더 슬퍼했다.)

고등학교를 입시 집중형 기숙학교로 가게 되면서 나의 팬질은 자연스레 끝이 났지만, 여전히 내 방 한켠 리빙박스 속에는 그 때 모았던 프로그램, 시디, 사인북, 팬 아트 등이 빼곡히 쌓여있다. 십 년 넘게 지속된 엄마의 ‘이제 필요 없으면 버려라!’ 공격을 뚫고 살아남은 나의 추억인 셈이다. 하지만 난 확실히 ‘뮤덕’을 ‘졸업했다.’ 뮤지컬을 본 지도 참 오래됐고, 요즘 ‘뮤덕’ 커뮤니티에서 만들어낸 용어들도 참 생소하다. 누가 나온다고 하면 다섯 번이고 여섯 번이고 같은 공연을 또 보았던 것과 달리 이젠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렇지만 가끔 인터뷰 기사나 페이스북 광고 같은데서 우연히 그들을 마주치면 ‘여전히 잘 있네’ 하는 생각이 들면서 괜스레 미소가 지어지곤 한다. 그때 한창 애인에게 공개 프로포즈하는 걸 봤었는데, 벌써 애 아빠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강산이 변했음에도 여전히 내게 ‘아련아련돋음’을 선물해주는 ‘그 때 그 오빠들’은, 참 어디 가서 얘기하기 쑥스럽고 민망하고 조금 창피하기도 하지만, 내게 참 소중한 존재라 할 수 있겠다.


2015년 4월 11일 토요일

2015년 4월 장바구니

글쓴이_산책

생각해보면, 4월이 즐겁고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학부 시절 도합 10년은 중간 고사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날이 따뜻해지고, 꽃은 피는데, 독서실이나, 학원, 도서관에 앉아 책이나 들여다 봐야 하는 신세를 가끔 한탄하며, 그렇다고 나가 놀 용기도 없이 그렇게 자리를 지켰습니다. 대학원 시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험이라는 지루한 체제에서는 벗어났지만 발표와 과제는 끊임없이 밀려들었고, 아르바이트로 했던 과외 때문에 중간 고사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다 좋은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2014년부터 4월은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프고 잔인한 달로 기억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도 침몰 원인은 규명되지 않았고, 유족들은 얼마 전 울면서 삭발했습니다. 보상금이 4억이니 말이 많지만 유족들의 억울한 그 마음들은 그 누구도 제대로 풀어주지 못한 듯합니다. 사실 이유도 모르고 자식 잃은 슬픔을 그 누가 제대로 보상할 수 있을까요. 오랫동안 슬프고 무기력했지만, 아마 저는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하여 이럴 때, 연극이, 연극을 공부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지, 질문들을 던지다가도 막막한 기분이 듭니다. 분명 서울에서,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데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게 된 것 같은, 그래서 표류하고 있는 기분입니다.

이번 한 달, 극장에 가지 않는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골라 둔 작품을 보고 올 수 있을지 사실 자신이 없습니다.




<노란 봉투> 4월 3일 ~ 5월 10일, 연우 소극장

<노란 봉투>는 “’손해 배상 가압류’문제와 ‘세월호’사건을 다룬 작품’”이며, “잊지 않기 위해 질문을 던진다”고 합니다. “연극은 무엇이고, 극장인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겠지요. 극장에 앉아 같이 고민해보는 것만으로도 기회가 될 수 있을까요?


<돌아 온다> 4월 16일 ~ 4월 26일, 동양예술극장 2관

막걸리를 마시면 그리운 사람이 돌아온다는 액자가 걸린 식당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소문을 듣고 식당으로 몰려옵니다. 그런 식당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뻔한 기대라는 것을 알면서도 위로 받고 싶은 마음에 선택했습니다.

2015년 3월 28일 토요일

실체 없이 이름만 있는 그 무엇

글쓴이_산책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  

공연 내내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이란 단어를 수없이 듣는다. 일반적이지 않게 긴 제목을 공연 제목으로 혹은 누군가를 부르는 이름으로 부를 때마다, 그 집요함, 고의성에 손발이 오그라든다. 이상한 제목이 귀에 딱 붙지 않아 어색하기도 하다. 뭔가 이상하다. 한편, 제목을 외칠 때마다, 지금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이란 연극을 보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긴 제목을 자연스럽게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서두부터 오락가락하는 것은, 작품이, 또 작품을 본 감상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한 공연에 버무려져 있다. 하나씩 맛보았다면, 나름 맛있었을지도 모를 음식이 그야말로 잡탕이 되어, 어떤 맛이 나긴 하는데, 대체 그게 무슨 맛인지 설명하기 어려운 것으로 무대에 올라왔다. 짠 맛 좀 느껴보려고 하면, 매운 맛이 공격하고, 매운 맛을 느끼고 있자면, 시큼한 맛이 올라온다. 솔직한 심정은… 내가 좋아하는 맛은 아니었다.


B급 코드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패러디 한 배달의 민족 광고
언제부터인가, B급 코드(혹은 병맛)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가수 크레용 팝이나, SNL 코리아, “강남 스타일”, 배달의 민족 광고, 가끔 동생이 보며 웃음을 터트리는 <마음의 소리>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아직 보지 못했지만) 영화 <킹스맨>도 그런 맥락 안에 있다. 이런 B급 코드의 효과는 꽤 높다. 대중들, 관객들이 B급 코드의 가벼움, 유머, 신선함에 반응하고 환호한다. 다른 사람이 뛰어다니며, 서로의 이름표 떼는 것을 왜 봐야하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젊고 어린 동생들은 병맛코드를 즐기지 못한다며 안쓰러워했다. 점잖은 체 하지 않는 B급 코드는 젊고, 신선한 것으로도 여겨지기도 한다.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이하 <소뿔>)은 포스터부터 B급 코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극중극 내의 감독은 우리 연극은 아무 생각없이 웃게 만들 것이라고 호언 장담을 하는데, 어떤 부분들은 실제로 그렇다. ‘싼마이 연기의 달인인 황백호의 연기와 대사는 기가막힐 정도로 저렴하며 가볍다. 극중 옹 순경과 황백호의 여자 친구(그녀의 이름도 알지 못하다니!)는 산티와 성적(sexual) 코드를 마음껏(?) 발산한다. “오빤 나의 핫도그야.”같은 성적 농담들도 군데 군데 심심치 않게 삽입되어 있다. 성적 코드는 1차적인 본능을 건드리며 사람들의 웃음을 유도하는 강력한 것이지만, 관객들의 공감을 얼마나 끌어냈을지는 의문이다. 사실 B급 코드 속에, 소고기 개방과 같은 정치 문제, 경찰 수사 문제, 혹은 갑질 문제, 연극에 대한 심각한 고민들을 숨겨 두고 있으니, 마음껏 웃지도 못하고, 진짜 작가나 연출의 속내, 그 의도를 궁금해할 수밖에 없다. 저 맥락없는 섹시 여 경찰은 웃으라고 끼워넣은 것인지, 젠더 문제까지 다루려고 하는지 알기 어렵다. 그녀들은 섹시미, 백치미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보여줄 뿐, 그것을 깰만큼 신선하지 않다. 그래서 웃음도 나지 않는다. 이렇게 판을 깔아 두고 마음껏 B급 코드를 보여주지도 않으면서(청소년 관람 불가 연극도 아니고), 이런 병맛 코드를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를 생각하고 성찰하게 해주지도 않는다. 극중극의 감독은 소떼 퍼포먼스, 소뿔 장례식, 사람들의 시위 장면, 등이 재미를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맥락없이 끼어드는 장면에 실소를 금치 못하게 될 뿐이다. 정부, 빨갱이, 민중과 같은 단어들을 외치지만, 그런 표현들을 굳이 가져다 쓰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만화보다 더 만화같고,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vs 실체 없이 이름만 있는 

분명 “만화보다 더 만화같고,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형식을 통해 연극적 유희성을 획득”하겠다고 소개했다. 이 소갯말은 극중극의 감독의 입을 통해 한 번 더 공언된다. 공연을 보신 다른 관객들은 어떤 점에서 이런 면들을 발견하셨는지 무척 궁금하다. 필자는 만화나 영화를 즐기지 않아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없는 것인지, 그래서 이 재미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인지 생각해봐야 했다. 만화 캐릭터같은 인물들이 무대 위를 돌아다니는 것은 인정한다. 짧은 교복 치마를 입고,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일진 여고생이라든가, 난데 없이 취조 중에 랩을 하는 인물이 있다. 이들은 B급 정서를 드러내면서, 전체 서사의 맥락을 끊어버려, 이야기를 말이 안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이런 표현을 “만화같은”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영화같은”이란 수사에 대한 의문도 남아 있다. 극중극중극이 반복되면서 마치 플래쉬백이 되듯, 이미 본 장면을 반복하고, 관객에게 기시감을 제공하는 것이 영화같은 형식이라 여긴 것일까? 이 작품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극중극중극의 형식은 영화같다기 보다는 연극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기여한다. 극이 극중극이 되고, 여기에 때로 실제 현실—극장 밖에 폴리스 라인을 치라고 지시하는 것 같은—이 난입하면서 (많은 리뷰가 소개하듯이) 무엇이 연극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헷갈리게 하는 척한다. 그런데 마치 현실처럼 무대 위에서 재현되는 것도 실제처럼 보이는 허구일뿐이다. 남산드라마센터에 폴리스 라인이 둘러져 있다 해도, 어느 누가 이것을 진짜 현실이라고 생각하게 될까? 무대 위에 올라가는 순간 그것인 실제인 척 하는 허구, 자연인인척 하는 등장인물일 뿐이다. 현실과 공연이 다르지 않다고 선언하고, 현실과 공연을 혼동하는 극중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반대로 그것이 아님을 알려주기 위해 애 쓰는 모습이 아쉽다. 진짜 B급 코드, 연극적 유희성을 달성하고자 했다면, 관객에게 그것을 애써 전하지 말고, 알아차려도 그만, 그 반대여도 그만이라는 대담한 태도를 보였다면 더 재미있었을 것이다. 다만, 첫 번째 극이 극중극이었음을 알게 되고, 극 바깥의 현실(인척하는 극)이라고 생각했던 겹이 다시 계산된 극중극중극이었음을 알게 될 때, 관객들은 자신이 본 것이 몇 번째 층위에 있는 것인지 다시 따져봐야 하는 인식의 즐거움은 누릴 수 있다. 

첫 번째 보고 있던 극이 연출과 작가가, 수사관이 등장하면서 극중극의 구조가 된다. 3번 층위와 2번 층위가 서로 교차하며 서사가 진행되던 중, '진짜' 수사관이 등장하면서 (3)번과 (2)번을 모두 극중극중극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마지막에 끼어 든 층위도 현실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에 비유했으나, 이 작품은 열면 열수록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처럼 보이는 층위가 끼어들수록 그 구조가 점점 확장되는 형태라 할 수 있다.

연기도 못 바꾸는데 현실을 어떻게 바꿔?

공연 내내 갈피를 잡지 못했던 마음이 마지막 10여분 동안, 그 길을 찾았다. 다소 진부한 에필로그였으나, 작가의 속내를 솔직하게 보여주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연기도 못 바꾸는데, 현실을 어떻게 바꾸냐는 한탄처럼 (내 글은 엉망이면서, 다른 작품에 대해서 뭐라 할 수 있겠냐는 지금의 내 심정처럼) 마지막 10분은 작가와 연출이 이 복잡한 구성, 구조, 인물들을 모두 빠져나오며 정말 하고 싶었던 말, 들려주고 싶었던 주제를 꺼내 놓았다.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는, 당수로 소뿔을 자르고 도망간다는 기상천외한 인간은 어디에도 없다. 공연 중에 길을 잃었던 황백호는 길을 찾기 위해 공연장 밖으로 나간다. 그가 소뿔을 자르고 다니더라는 등의 소문만 무성하다. 사람들은 이름은 있으나 실체가 없는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때로는 그것을 잡아 확인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실체가 없기 때문에 힘있는 어떤 사람들은 꾸며내서라도 그 무엇을 현실화하고 그것을 통제하는 힘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이것은 무대 위의 이야기지만 현실이다. 재미가 주제라거나, 머리를 텅 비우라는 말들은 사실 진심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는, 그래서 두려워하는 그 존재가 과연 관객에게는 어떤 것인지 물으며, 공연은 끝난다. 아니, 극중극중극에 충실하게 위해 이 모든 것을 공연 연습인양 마무리하며, 휴식 시간을 갖자고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배우들은 휴식이 끝나면 다시 연습을 시작할 것이다. 극장 밖을 나서면 공연을 마친 배우들이 담소도 나누고, 담배도 피고 있다. 그 장면에서야 극중극중극중극의 재미가 느껴진다. 그들은 지금 자연인으로 드라마센터 밖에 서 있는 것일까, 등장 인물로 서 있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