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4일 토요일

이토록 망가진 메데이아

no_name

그래요. 메데이아(a.k.a. 메데아, 메디아)가 이아손의 손에 죽는 게 현실적이겠지요. 맞아요. 갑자기 하늘에서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나타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해요. 이 무슨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소리냐고요. 그런데 현실적인 것을 찾으려면 애당초 2500년 전 이야기를 뭐하러 다시 해요? 게다가 요즘 국립극단은 지금 이곳의 현실, 여기 우리 사는 얘기 하는 거 불편해하잖아요? 아리스토파네스로 입장 곤란해진 거 알아요. 그렇다고 에우리피데스를 가져와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고요? 쫄아 있는 게 너무 보이잖아요. 아직도 쫄아 있으면 어떡해요. 블랙리스트 다 드러났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그러고 있으면 당신이 마지 못해서 그런 거라 누가 믿겠어요? 정치극 안 해도 돼요. 그런데 굳이 리얼한 치정극을 할 건 또 뭐에요? 리얼한 거 좋지요. 그런데 현실을 외면하면서 리얼하려니 스텝이 꼬이잖아요. 아무리 한남충이 득시글거리는 나라라지만 이아손 같은 찌질남이 메데이아를 죽이는 꼴을 왜 무대에서 봐야할까요? 메데이아가 자기 아이들을 칼로 찌르고 피 흘리며 죽는 건 또 왜 봐야 하나요? 여혐이라 욕먹는 에우리피데스도 그건 안 했다고요.

아녜요. 메데이아가 살아서 떠나는 게 더 슬프잖아요. 그게 진짜 비극이잖아요. 그래야 살아 있는 동안 아이들을 죽인 자기 손을 잘라버리고 싶을 테니까요. 아이게우스에게서 낳은 아이를 볼 때마다 자기가 죽인 아이들이 생각날 테니까요. 메데이아 스스로 그러잖아요. 그날 하루만 잊고 평생 울어야 한다고요. 자기도 감당 못 할 잘못을 저지르고 평생 고통받아야 한다고요. 해결되면 안 되는 고통이라고요. 살아있는 게 지옥이라고요. 그런데 한 날 한 자리에서 바로 죽여버리면 어떻게 하냐고요. 아무리 황당해도 용수레 타고 관객이 보는 앞에서 유유히 사라져야 한다고요. 관객들이 좋아서 손뼉 치는 거 아니라는 거 아시죠?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대한 투명 실린더는 괜찮고, 용수레는 왜 안되는데요?

이아손에게 복수할 기회를 줘선 안 돼요. 찌질한 놈이라 그럴 자격도 없는 데다가, 눈앞에서 새신부도 장인도 두 아들도 다 잃었잖아요. 그럼 그 모든 걸 복수할 기회도 잃어야죠. 그래야 아찔하잖아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볼 거 아녜요. 이아손에게 허락된 건 통곡이지 메데이아를 죽이는 손쉬운 분풀이가 아니에요. 뭐 잘했다고 이아손의 소망이 이뤄져야 하나요? 메데이아를 이토록 망가뜨리면 어쩌란 말이에요.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