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6일 토요일

연극 태교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예은

  열 달 동안 태교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찾다보니 태교에 좋은 예술 작품을 찾는 일이란 무던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특히 태교에 좋은 연극을 찾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임신 기간 동안 그리스 시대에서부터 20세기까지 연극사 강의를 해야 했던 터라 시대별 주요 희곡 작품들을 다시 한 번 씩 통독해야만 했는데, 시대를 불문하고 태교에 좋은 연극 작품을 찾아내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다.

  복수의 심연을 거슬러 인간의 한계를 마주하고 그 한계성 속에서 단지 신의 필요를 호소하는 아이스퀼로스, 혹은 그 한계성 속에서 철저히 인간의 파멸을 욕망하는 에우리피데스에게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인간의 한계성으로부터 신과 조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살피는 소포클레스에게서마저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생명체와 연결 지어 줄 만한 적당한 지점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저열한 욕망이나 교조적인 도덕으로 점철된 로마 비극은 물론이고 와 닿지 않는 관념들의 나열인 중세 종교극에서도 아무 것도 모르는 생명체에게 전해 줄 에너지를 찾기는 힘들었고. 진실은 지금-여기의 현실에 있지 않고 인공적으로 구축된 어떠한 숭고한 체계 속에 분명한 형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반성하고 세상을 훈계하려 드는 라신의 고정관념이나,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이분법적인 가치들을 혐오하면서도 그 이분법적인 프레임을 무시할 수 없어 작품의 배경에 넌지시 깔아 놓고는 그 중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해 점점 미쳐가는 햄릿, 맥베스, 리어, 오셀로의 침잠으로부터도 태교의 지점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로 다른 이유와 형태로 시종 죽고 싶어 하거나, 아니면 죽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극복한 대신 세상을 전면적으로 훈계하려 들거나 세상을 불신해버리는 20세기 이후의 작가들. 무엇이 되었든 그 무언가와 화해하지 못한 수많은 인간들을 창조해내며 존재를 세상과 구분 지으려 하거나 존재를 자체적으로 분열시키려 하는 현대 작가들에게서 태교의 단서를 찾기란 더욱 만무했다. 이 모든 회의감과는 다른 차원에서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관조적이지만은 않은 시력을 가진 체홉에게서도, 현실과 이상 사이의 연결에 고군분투하는 내 사랑 괴테에게서조차도 태교의 수준까지를 바랄 수는 없었다.

  왜? 왜일까? 왜 연극은 좋은 태교가 되기 힘들까? 여기에서 말하는 ‘좋은’ 태교란 당연히 목적성이 뚜렷한 교훈이랄지 환상적인 해피 바이러스를 좇는 동화 속 서사 같은 것으로 충족되는 태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연극이 ‘좋은’ 태교가 되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다르게 말한다면, 이제 막 탄생기에 접어든 생명체와 예술이 접점을 이룰 수 있는 ‘좋은’ 순간이란 연극에서 왜 이토록 만들어지기가 어려운가라는 질문 정도가 될 것 같다. 쉽게 말하면 대충 이런 말이다. 연극에서는 왜 그리 ‘기쁨’이라는 걸 만나기가 힘들까? 무턱대고 향해가는 기쁨이 아니라 자기 성찰적이면서도 분명하게 맺혀지는 기쁨 같은 것 말이다. 대상을 섬세하고 정확하게 묘파해내면서도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거부할 수 없이 따뜻하게 터져 나오거나 흔들림 없이 신뢰를 주는 아주 실제적인 기쁨 같은 것. 복잡하고 미묘하고 아슬아슬한 것들의 층위가 두텁게 첩첩 쌓인 어떤 고지대 위에서 비로소 터뜨릴 수 있는 희망이나 떨림 같은 것. 태교에 좋은 예술이란 티끌만큼의 의심도 들지 않을 만큼 존재와 세상을 나름대로 정확하게 바라보면서 그와 동시에 흔들림 없는 기쁨을 바라보고 있는 예술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의 가능성을 경험하면서 존재와 세계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단지 태교의 마음만이 아니라 예술과 현실을 이어내어 ‘다시 한 번’ 살아보고 싶어 하는 인간 보편의 소망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태교에 좋은 예술이란 곧 인간에게 좋은 예술이 되기도 한다.

  나에게 태교라는 barometer가 들어 선 이후 예술의 정의를 다시금 생각해 보며 이 글을 쓰게 된 것인데, 사실 내가 만난 연극 중에서 태교에 좋은 연극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들이 없지는 않다. 개인적으로 베케트와 프리엘의 작품들이 그렇다. 두 작가의 일부 작품들만큼은 “티끌만큼의 의심도 들지 않을 만큼 존재와 세상을 나름대로 정확하게 바라보면서 그와 동시에 흔들림 없는 기쁨을 바라보고 있는 예술”로 받아들여지는 지점이 있다. 더 구체적인 사례를 떠올려 본다면 콜린 히긴스의 작품 <해롤드 & 모드>에서 노년의 죽음을 눈앞에 둔 모드가 자살하고 싶어 하는 청년 해롤드에게 “그래도 우리에겐 친구가 있잖아”라고 말하자 해롤드가 “누구요?”라고 물으니 다시 모드가 “인.류”라고 분명하게 발음하던 순간 같은 것도 내가 경험한 태교에 좋은 순간이다. 어딘가에는 분명 내가 미쳐 만나본 적 없는 태교에 좋은, 아니 다시 한 번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연극들이 무궁무진하리라 믿는다. 다만 나의 어마어마한 무지가 문제일 뿐.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이것이다. 분명히 어딘가에는 우르르 쏟아져 나올 만큼 무수히 존재할 그 작품들을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 항상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고프다. 그 풍성한 세계와 이 빈약한 세계 사이에는 늘 거대한 간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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