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8일 월요일

[화학작용 4] 과정공유 시연회 리뷰 (1): 과정을 만드는 과정, 그 나선형의 시간들

김민조 (화학작용 4 사무국)

과정, 우리 안의 소수적인 기억들

타인에게 과정을 노출한다는 것은 창작자라면 누구나 꺼려할 만한 일이다. 필자 역시 작성 중인 글을 누군가가 들여다보는 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혼란스러운 문장과 지워내야 할 사고의 흔적들을 들키는 일만큼 낯부끄러운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과 ‘과정’을 ‘공유’한다는 말이 모순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어떤 것을 노출시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관객은 왜 그것을 보기 위해 먼 걸음을 해야 하는 것일까.

연극 생산의 과정은 무수히 많은 다발로 엮여 있다. 정치적 층위의 결정에서 미학적 층위의 결정까지, 참여자 개인만 감각할 수 있는 사적 레벨의 층위부터 공개적인 장에서 교환되는 공적 레벨의 층위까지, 인간적 소통의 층위에서 시스템의 층위까지. 이 모든 과정들의 총합은 그저 ‘삶’이라고 칭해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넓고 무한하다. 그래서 과정은 ‘결과’를 무엇으로 놓느냐에 따라 상대적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개념이기도 하다. 만약 정식 공연을 결과로 놓는다면 공연을 만들기 위해 밟아온 모든 절차가 과정에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인식소(素)를 세분화하는 정도에 따라 하루 6시간 단위의 연습을 독립적인 과정으로 떼어낼 수도 있고, 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수행된 에튀드 연습도 과정으로 칭해질 수 있다.

따라서 과정은 그저 중립적으로 거기 주어져 있는 실재적 시(공)간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과정은 어떤 단계를 ‘결과’로 인식하는 순간에 사후적으로 발견되는 것, 일종의 비판적 인식을 통해 정립되는 관념적 단위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것은 사건화되지 않은 위기(crisis)들에 대한 성찰을 동반한다. 발화되지 않은 위기 혹은 소통되지 않은 채 내속되고 있는 결함에 대한 재인식이 과정에 대한 사유를 촉발한다. 그래서 과정을 드러내는 행위는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하고, 인식할 수 없었던 내부의 잔여들을 다시 감각하고자 하는 열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처럼 과정의 재발견이 우리 안의 ‘소수적인 것’을 구제하기 위한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과정에 대한 숙의가 2015년 이후의 페미니즘 리부트와 2018년 연극계 미투 운동의 자장 내에서 출현한 맥락을 새롭게 구성해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연극계를 지배하고 있던 권위주의적인 성장 모델은 많이 흔들렸다. 연극계 미투 운동이라는 혁명적 사건을 통과하며 의도적인 무지의 장막 너머에 감추어져 있던 어두운 현장들의 모습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은폐되거나 망각되어 온 수많은 과정들의 귀환이기도 했다. 증언과 고백의 릴레이 속에서 수많은 연극인들이 자신의 기억 속에 침전되어 있던 과정들의 대륙을 떠올려냈다. 최근의 지각변동을 통해 우리가 서서히 알아가고 있는 것은 그러한 과정들이 매순간 우리 자신의 몸과 정신에 선연한 영향을 남기는 ‘현재들’이라는 점이다. 미투 운동은 그러한 현재적 기억들에 정당한 발언권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인식과 함께 기성 연극계가 그러한 발언을 허용치 않는 구조로 위계화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을 촉발했다.

그러나 이 글에서 보다 관심 있게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소수의 연극인이 제도적·물질적으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구조의 문제보다 그것을 하부에서 떠받치고 있는 우리 안의 권위주의, 즉 내면화된 기율(紀律)의 문제이다. 대안적인 창작환경을 지향하고 실천하는 젊은 연극인들조차도 권위주의적 성장 모델과 내적으로 결별하는 데 있어서는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프로 연극인’으로 성장하는 직업적 루틴을 자연화하는 기율과 관련되어 있다.   

통상적으로 ‘프로’란 과정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스스로 책임지고 해결하는 성년 주체로 상상된다. 관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상품을 내놓는다는 목적을 위해 숙련된 기술을 연마하고 제작 공정을 빈틈없이 컨트롤할 수 있는 생산 주체가 되어가는 것. 선배들이 축적해놓은 자산 위에 자신의 창조력을 덧쌓으며 한 명의 프로 예술가로 성장한다는 비전. 조금 더 개인주의화된 버전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흠잡을 데 없는 직능을 구비한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꿈이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이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생존 이데올로기, 그 중에서도 ‘돈 안 되는 예술’의 생존을 정당화하는 특정한 논리 회로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설명은 여기에서 자세히 다루지 않기로 한다.)

명목상으로 이러한 모델은 개인의 실현을 보장해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프로화’ 모델은 그들을 훈련시키는 구조의 문제점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한다. 그들에게 붙여지는 죄목은 다양하다. 이 바닥의 관습과 생리를 잘못 학습한 죄, 선생님의 숨은 뜻을 알아듣지 못한 죄, 혹은 구조상의 문제점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유연하게 해결하지 못한 죄 등등. 경직된 위계 구조 내에서 자유로운 예술가로 성장하겠다는 모순된 비전을 품은 사람들은 구조의 결함을 벌충하는 것을 다시 개인의 품성과 능력의 문제로 회수하고, 자신이 습득한 ‘생존 기술’을 후배들에게 교육시키며 엇비슷한 표정과 자세를 지닌 프로 연극인으로 성장하곤 한다.

물론 권위주의적 성장 모델 내에서 이루어진 모든 성과들을 도매금으로 폄하할 수는 없다. 또한 그러한 모델 내부에서 폭력성을 견제해 온 개인들을 손쉽게 낡은 예술가로 치부하는 것도 합당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이 간직해온 혼종적인 경험과 기억들, 사건화되지 않은 위기들에 대한 감각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과정 중심주의’의 역할이자 효능일 것이다. 그러나 요점은 우리 안의 소수적인 기억을 억압하는 기율 자체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과정의 중요성에 대해 논의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프로화 모델 내에서 과정은 단지 밟고 올라가야 할 사다리 정도로밖에 이해될 수 없다. 극복했거나 앞으로 극복해야 할 미완성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많은 경우에 과정은 종종 과거 시제 내지는 가정법 미래 시제로 이야기되곤 한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즐겁게 반추하는 시행착오의 추억, 미숙했던 시절에 관한 후일담, 혹은 해결해야 할 부끄러운 방황 상태로서.

그러므로 과정 공유라는 형식에 대해 급진적으로 논의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 한국 연극계의 상부와 하부를 순환하고 있는 보수적 기율의 문제를 가지고 들어오지 않을 수 없다. 과정이란 무엇인가, 과정은 왜/어떻게 노출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들은 결코 추상적인 지대에서 솟아오른 것이 아니다. 이 글은 과정 공유라는 형식이 최근 연극계에 현안으로 떠오른 구조, 기율, 이념의 문제들을 직시하고 해결하기 위한 실용주의적 목표에 의해 입안된 것으로 간주하고, 마찬가지로 그러한 목표에 입각하여 [화학작용 4] 과정공유 시연회의 의의와 한계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비평의 준거들




[화학작용 4] 축제의 최종 발표 행사로 기획된 과정공유 시연회(이하 ‘시연회’)는 5월 17일과 18일 양일에 걸쳐 개최되었다. 기존 [화학작용] 시리즈와 달리 이번 시연회는 공연이 아닌 전시 및 퍼포먼스의 형태로 준비되었다. 축제에 참여한 극단 배우들, 극단 Y, 丙 소사이어티, 콜렉티브 뒹굴, 프로젝트 공공연희, 프로젝트 하자 6개 팀이 무악파출소 2~4층에 걸쳐 전시 공간을 나눠 갖는 방식이었다. 시연회는 관객들이 1층에서 체크인을 하고 도슨트의 안내를 받아 순차적으로 전시 공간을 둘러보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오프스테이지 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화학작용 4]는 공연을 만들어가는 연습실 현장에서 팀들 간의 양방향 교류를 일으키는 데 주력한 축제이다. 연습실에서 이루어진 실험팀과 관찰팀의 교류 현황은 드라마인(drama-in.kr)에 게재된 실험관찰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화학작용 4]가 창작의 산물이 아닌 창작의 과정에 초점을 둔 축제인 만큼, 그 과정을 외부에 발표하는 시연회 행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복잡한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과정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과정을 결과로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이 가능한가? 만약 과정에 대한 실험이 특정한 결과물로 산출된다면, 그 결과물을 보는 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관람과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다시 말해 [화학작용 4] 축제 측의 입장에서 시연회는 ‘과정’에 대한 숙의를 넘어 ‘공유’에 대한 고민에 직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실 ‘과정 공유’는 예술지원기관이나 프로그램 기획자의 언어이기도 하다. 창작 과정을 외부에 공개하는 행사 내지 프로그램들의 연원을 따져보면 2000년대 초반의 벤처 붐을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적 지원책들이 뒤늦게 공연예술계로 유입되면서 창작 보육(incubating) 시스템이 하나둘씩 출현하던 200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신진예술가 양성이라는 취지를 내걸고 시작된 창작 보육 시스템은 예술가가 창작 단계별로 결과물을 제출해 피드백을 받는 관리 체제를 정착시켰다. 소수의 심사위원이 창작자를 단계별로 심사, 관리하는 지원 체제는 이후 창작자가 일반 관객들을 대상으로 예비 상태의 결과물을 발표하는 ‘과정발표회’로 진화하게 된다. 이러한 지원책의 변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시점은 2017년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창작산실 창작실험활동지원 ‘과정과 공유’, 남산예술센터의 ‘서치라이트’, 서울문화재단의 ‘최초예술지원 창작준비형’ 등 과정 공유를 표방한 굵직한 기획 프로그램들은 공교롭게도 전부 2017년경에 출범했다.

이 프로그램들은 쇼케이스, 워크숍, 리서치, 낭독공연, 프레젠테이션 등등 창작자가 자신의 예술적 구상을 선보일 수 있는 다양한 발표 형식을 허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들의 공통점은 과정을 공유한다는 워딩을 사용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외부에 선보일 수 있도록 잘 갈무리된 형태의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일반에 잘 알려진 과정발표회들은 대체로 극장 비수기 시즌에 편성되어 있거나 거대한 공연 프로그램의 부대 행사로 편성되어 있으며, 여기에 선정되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률을 뚫어내야 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렇다면 창작자의 입장에서 과정발표회가 일반적인 공연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구별해내기란 모호해진다. 보육 내지 관리 체제의 문법 내에서 과정은 결과에 가깝게, 공유는 상연에 가깝게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편의상 이러한 성격의 과정발표회를 ‘쇼케이스 유형’으로 분류하도록 하자. 쇼케이스 유형이 창작 생태계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들을 부정할 필요는 없으며 그 공과를 일일이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러나 [화학작용 4]가 지향하는 ‘과정 공유’가 쇼케이스 유형의 그것과 차별성을 두려 했던 점은 명백하다. 초창기 단계부터 각 팀의 실험계획서를 공유하고, 연습 현장을 직접 참여/참관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실제 창작 과정 내에서 팀들 간의 화학작용이 일어날 수 있도록 유도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연회라는 최종 발표 행사는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한 쇼케이스가 아니라 축제 기간 내 수행해온 과정 실험의 경로를 정직하게 전시하는 자리가 되어야 했다. 동시에 그러한 과정 실험의 경로가 관객에게 유의미하게 ‘공유’될 수 있는 형식을 창안하는 것이야말로 이번 시연회에 참여한 팀들의 과제였을 것이다.

이 글은 일차적으로 [화학작용 4]에 대한 비평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화학작용 4]를 시금석 삼아 과정 공유에 대한 비평의 준거들을 제안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기도 하다. 공연 작품에 대한 비평의 준거들은 이론으로 구축할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축적되어 왔다. 그러나 과정에 대한 비평의 준거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합의는 거의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과정은 판단이 개시되는 장소일 뿐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과정 공유라는 공적 체험에 관해서는 그 체험의 질적 성과를 따질 수 있는 비평의 준거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글은 ‘과정 공유’를 연극 제작에 있어서 억압, 망각, 은폐되었던 기억을 성찰적으로 발굴하기 위한 정치적 실천의 일환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목적성은 각 팀의 개별적인 공유 실천을 비평하는 데 있어 하나의 준거가 될 수 있다. 특히 “우리의 연극은 그렇지 않다” 라는 슬로건 아래 진행된 축제인 만큼 “그렇지 않음”의 대안적 체험을 제시하는 파상력(破像力) 또한 하나의 척도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전통적인 공연이나 쇼케이스 유형과 달리 각 팀에서 준비한 시연회가 과정을 과정 그 자체로 음미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시의적이리라 판단된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이러한 준거들을 바탕으로 [화학작용 4] 시연회에 참여한 극단 배우들, 극단 Y, 丙 소사이어티, 콜렉티브 뒹굴, 프로젝트 공공연희, 프로젝트 하자 6개 팀의 전시 및 퍼포먼스를 비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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