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9일 월요일

염소 혹은 실비아는 누구인가, 혹은 언제인가?

임승태

성공한 건축가 마틴(박윤석)이 50세 생일을 맞아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TV 진행자인 로스(이준영)와 인터뷰를 하기로 한 날. 마틴은 놀라운 이야기를 꺼낸다. 실비아라는 이름의 염소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 잘못 읽은 게 아니다. 염소다. 그리고 마틴이 말하는 사랑은 여느 반려 동물과 보호자의 관계가 아니라, 성관계를 포함한 것이다. 로스는 이 사실을 마틴의 부인 스티비(김수아)에게 편지로 알리고 그 결과 마틴과 스티비, 그리고 그들의 아들 빌리(박지훈)가 누리던 평화는, 무대가 난장판이 되듯, 산산조각난다.

아들 빌리가 게이라는 설정이 곁들여 있지 않았다면 이 이야기는 충격적일지언정 그리 흥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틴과 스티비 부부는 아들의 게이 정체성을 존중해왔고 그것은 이 가족에게 어떠한 문제도 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이렇게 읽힐 수 있다: 남자가 남자와 성관계를 맺는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면 수간도 허용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것은 마틴이나 그를 지지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일 수 있지만, 작가가 이 말을 하기 위해 작품을 쓴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마틴의 어떤 말도 스티비의 반론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비아에 대한 마틴의 진심은 충분히 전달되지만 그 관계에 염소가 동의했음을 마틴은 입증할 수 없고 그래서 그 관계는 일방적이고 진지하기에 더욱 병리적이다.

이 논쟁이 동성애에 대한 ‘메타포’의 성격을 가진다고 보는 게 더 합당할 것 같다. (메타포라는 단어가 실제로 대사로 여러 번 반복되는 것은 작가가 혹시라도 이 극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까 염려한 노파심의 반영일 수 있다.) 전선이 이종간(異種間)의 사랑에서 펼쳐짐으로써 동성간(同姓間)의 사랑은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쿠쉬너의 <미국의 천사들>이 그 전선에서 벌어진 격렬한 전투를 그리고 있다면 <실비아>는 마치 원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너무나 평화롭다.

하지만 여전히 이 작품이 2000년에 쓰인 작품이란 점을 감안해야 수간-동성애 메타포가 유의미하다. 20년 가까이 지난 현 시점, 특히 미국을 비롯하여 가까이는 대만까지 동성간의 결혼이 허용된 시점에서 보자면 마틴/스티비 같은 부모가 특별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 미국에서 이런 부모는 결코 흔한 일은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이 작품의 논점이 살아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이 극을 마틴이 아니라 빌리를 위해 (어쩌면 젊은 시절의 자기 자신을 위해) 썼다고 말할 수 있다.

공연은 작품의 메시지를 충분히 잘 전달했다. 다만 지난 20년 동안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이나 제도가 많이 변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시대를 특정하는 작업이 동반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공연 초반 로스가 인터뷰 녹화를 위해 꺼내는 카메라가 DSLR 카메라가 아닌 ENG 카메라였으면 어땠을까. DSLR가 설치되는 순간 동시대라는 느낌이 드는데 이 이야기가 동시대라고 하면 특별히 새로울 게 없고 그래서 다소 지루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홍석천, 난 “호모다””라는 헤드라인이 스포츠신문 첫면을 크게 장식한 2000년 혹은 그 이전 어느 때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보면 모든 상황이 훨씬 더 흥미로워진다. 올비는 의문사 WHO를 유난히 좋아하는 작가이지만, 이 공연에서는 WHEN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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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 혹은 실비아는 누구인가?>
에드워드 올비 작, 라성연X베타프로젝트
2019년 8월 7일-11일 선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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