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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6일 목요일

당혹감을 사유하기: 참여형 공연 “Opportunity: →→ort → →”

루인

나는 콜렉티브 뒹굴이 기획한 공연 “Opportunity: →→ort → →”가 정확하게 어떤 식으로 시작되고 어떻게 끝나는 작업/작품인지 모른다.

공연이 있는 날 행사장(인사미술공간)에 도착하니 공연을 시작하는 장소로 안내해줬다. 이 공연은 통상 연기자가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모습을 객석에 앉아 구경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전에 참가 신청을 한 참가자가 직접 이 공연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2021 마스 사이언스 시티’를 화성에 건설하기 위해 탐사 로버가 화성의 여러 지역을 탐사한다는 설정으로 시작된 공연의 기획에 따라 나는 탐사 도구를 배포 받았고 화성 탐사 로버 중 로버1호라는 역할(혹은 배역)을 지정받았다. 그다음 화성의 여러 지역(혹은 인사미술공간 내 여러 공간) 중 한 곳을 지정받아 탐사를 시작했다. 새로운 식량 생산의 가능성, 새로운 별자리 관측, 처음 발견한 협곡 등을 탐사하는 작업을 진행했고 그곳이 어떤지 어떤 상태인지를 조사하여 보고했다. 탐사를 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는 과정에서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로버들이 제대로 탐사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지를 평가하고 평가 결과에 따라 일부 로버는 폐기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메시지가 왔다. 성실하게 탐사 작업을 진행하지 않는 로버가 있으니 폐기하는 데 동의하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누군가는 폐기에 동의했고 그래서 폐기되는 로버가 발생했다. 나 역시 폐기되었고 그렇게 나의 로버1호 역할은 종료되었다.

참여형 공연이고 그렇기에 참여한 관객/배우의 반응을 통해 구성되는 공연이었기에 나는 이 공연의 전체 시나리오와 구성 방식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내가 맡은 로버1호 역할이 아닌 다른 로버는 어떤 역할을 했고 어떤 곳을 탐사했는지 모른다. 로버1호에게 주어진 역할이 무엇인지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는데, 폐기되지 않았다면 주어졌을 역할이 더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 자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공연의 기획자가 계획한 혹은 예상했던 최종 결론이 무엇인지 당연히 모른다. 공연이 끝난 직후 ‘나는 이 공연에서 무엇을 했는가’를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상당한 혼란을 느꼈고 그래서 난감했다. 이것은 나만의 감정이 아니었다. 폐기된 다른 로버 혹은 참가자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폐기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이 공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곤혹스러움이 얼굴 표정에 역력했다. 그렇기에 공연 기획자와 참여자가 함께 자리에 앉아 이 공연의 기획이 무엇이고 로버 역할을 한 참여자의 소감은 어땠는지를 공유하는 자리가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내용을 공유하는 자리는 없었다. 공연장을 떠나며 나는 ‘이 공연의 리뷰를 쓰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회의감에 빠지기도 했다.

공연이 끝나고 이 공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를 곰곰이 고민하다 공연 소개글을 다시 읽었다. 전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Opportunity: →→ort → → 
관객이 직접 화성 탐사 로버가 되어 ‘2021 마스 사이언스 시티’ 건설을 위한 역할을 수행하는 참여형 공연이다. 효율성과 경제적 논리에 따라 로버를 비롯한 다양한 존재들이 끊임없이 재배치되거나 포섭, 배제되는 역학에 대해 탐구한다. 현재 화성에는 8개의 궤도선과 탐사 로버가 남아 임무를 수행 중이다.

공연에 참가하기 전 나는 “Opportunity: →→ort → →” 공연의 소개글을 읽으며 이 공연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공연에 참가한 후 느낀 당혹감 혹은 난감함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이 소개글을 다시 읽었을 때, 나는 이 소개글이 공연의 핵심을 담고 있음을 깨달았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은 이 사회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어떤 기획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대신 ‘우리’는 이 사회의 적절한 일부가 되기 위해, 쓸모 있고 가치 있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 혹은 기업이나 조직에 유능하고 쓸만한 인재로 채택/평가되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노력을 하고 있고, 그런 노력을 요구받고 있다. 이 요구에 적절히 부응하지 않는 태도는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위가 되고 그래서 당연히 뒤쳐져야 하고 사회에서 유폐되어야 할 존재로 취급된다. 그러니 아픈 사람,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사회의 해악이다. 이것은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전염병의 확진자와 관련한 기사에 달리는 댓글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확진자 혹은 감염인과 관련한 정보가 나오면 댓글은 확진자가 집에 조용히 처박혀 있지 않고 돌아다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쳤다며 극렬한 분노를 표한다. 감염인 혹은 아픈 사람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을지는 관심 사항이 아니다. 세 번째 확진자가 댓글을 읽고 많은 충격을 받았다는 기사에도 세 번째 확진자를 비난하는 댓글이 난무했다. 타인에게 그 어떤 피해도 끼치지 않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태도만이 이 사회의 윤리이자 규범이다.

공연 “Opportunity: →→ort → →”를 진행하며 등장한 평가 메시지는 정확하게 이 지점을 말해준다. 충분히 열심히 탐사하지 않는 로버를 폐기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공동체 구성원을 평가하는, 재판관처럼 판단하는 존재가 될 것인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공연에 참가한 모두가 폐기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순진한 것이기도 했고 어리석은 것이기도 했다. 많은 로버가 폐기되었고 나/로버1호 역시 폐기되었다. 누군가가 폐기에 동의했다. 폐기에 동의한 공연 참가자가 기존의 신자유주의 질서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이 지금 시대의 윤리라는 뜻이다. 공연 “Opportunity: →→ort → →”는 우리가 어떤 태도를 시대의 윤리로 삼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나는 서두에서 이 공연의 전체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고 지금도 모른다고 적었다. 당연하다. 이 공연에 참가한 나는 익명의 로버1호일 뿐이며 체계의 아주 작은 일부, 내가 폐기된다고 해서 ‘2021 마스 사이언스 시티’ 건설에 일말의 영향도 미치지 않는 사소한 무언가에 불과했다. 누군가는 나를 대체할 것이고, 나를 대체한 누군가 역시 평가받고 폐기될 것이다. 사소한 무언가인 나는 내가 왜 폐기되었는지, 내가 탐색하고 있지 않은 다른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다른 사람은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를 모른다. 공연이 끝나고 나와 다른 참여자/로버가 느낀 당혹감, 난감함, 내가 폐기되었다는 분노는 정확하게 여기서 발생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타인을 평가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를 직면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왜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지 전혀 모르고, 누구도 그것을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인식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연이 끝나고 각자의 소감을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소감을 나누는 자리를 갖지 않는 것이 이 공연의 기획에 더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나는 이 공연의 기획자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모르지만).

공연 “Opportunity: →→ort → →”의 전체 모습이 어떨지 모른다는 말은, 하지만 단순히 공연에 참여한 로버에게만 해당하지는 않는다. 이 공연은 참여형 공연이고 그래서 이 공연을 기획한 사람들 역시 이 공연이 실제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측 불가능성은 이 공연 나아가 이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다. 무엇도 예측할 수 없고, 내가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고 해도 그것이 어떻게 평가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공연이 끝나고 남은 당혹감(예측 불가능성이 감정으로 실체화된 형태)은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당연하게 생각했는지, 내가 이 사회를 어떻게 고민하고 있었는지를 직면하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폐기된 로버는 폐기되었다기보다 질문을 남겼고 이 공연은 그 질문을 계속해서 생산하고 있다.


******
콜렉티브 뒹굴, <오퍼튜니티 :→→ort → → (Opportunity: Stuck in NEXT)>

🔸창작진 : 김정은, 부진서, 성지수, 유솔범, 이준영, 김건우
🔸일시 : 2019년 12월 28일(토) 13:00, 15:00, 17:00 (총 3회)
🔸장소 : 인사미술공간 (인사미술공간 주제기획전시 <막간극> 참여공연)

2019년 5월 29일 수요일

[화학작용 4] 실험관찰보고서 1탄 : 극단 Y, 콜렉티브 뒹굴, 프로젝트 하자


콜렉티브 뒹굴의 실험,
“PC함 신경 끄고 연극하기”에 대한
극단 Y의 관찰

@ 불광역 청년청

▷ 콜렉티브 뒹굴 × 극단 Y 연습현장 스케치 영상(http://bitly.kr/Itvkv8)


콜렉티브 뒹굴의 연습에 참여한 소감을 이야기한다면?


(단원 D) 청년청이라는 미완성의 공간을 (미완이라 함은 그 공간의 구성이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고, 뒹굴 팀조차 입주한지 며칠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서술한다. 뒹굴 팀이 청년청이라는 공간을 어떤 장소로 사용해 나갈지 개인적으로 기대하는 바이다.) 이용해 연습실 참관을 온 외부의 예술가들을 화성탐사 로봇들의 서사로 안으로 끌어들였다. 참여자들은 화성을 탐사하는 로봇들과 일치되며 미지의 공간인 청년청을 탐험하고 자신의 작업실로 만들고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수행하는 임무들 사이에 연극예술을 하고 있는 우리들의 서사가 한 겹 더 덧씌워지는데, 그것은 사실에 대한 관찰에 머무는 로봇들과는 다른 맥락으로 우리 내부에서 생겨나는 것들을 감지함과 동시에 확장시키는 시도였다.

(단원 B) 6-7년을 함께해온 팀이라서 그런지 자치규약이 꽤 세밀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자칫 딱딱해 질 수 있는 내용을 재치 있게 담아내어 열린 감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 그 내용이 상당부분 내가 지향하는 지점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작업 내 역할분담은 수직적 위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항목이 있어서 이 팀은 리더와 팀원들이 어떤 언어로 소통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연습 참여 당시에는 리더의 결정권에 대해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눈 것 같았고 그의 결정을 팀원들은 잘 수용하는 것 같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오늘의 프로그램을 짜고 진행을 맡은 사람이 우연히 리더였던 건가? 물어보고 싶다.
아무튼 현재 우리는 천천히, 충분히 대화를 나누고 결정하는 일을 뒹굴 팀은 성큼 걸어갔다. 짬의 차이인가? 음. 그런 것도 있겠지만 방법이 달랐던 것도 있는 것 같다. 각자의 방식에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번에 느낀 건데 '단원 B'한테는 천천히 가는 것이 안전하다.)
연습공간을 처음 만날 때 제한을 두지 않고 자유롭게 탐사하도록 했는데, 그 덕에 '다른 팀'이라는 거리감을 지우고 참여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그 공간 내에 나만의 작업실을 정하고 꾸미면서 다른 팀의 연습 참관이 아닌 체험학습에 온 것만 같아 마지막 즈음엔 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을 잘 밟을 수 있게 설계 한 것 같다. 개인의 창작능력을 원활하게 이끌어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단원 A)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프로그램 기획자의 커다란 그림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기본 자료로 준 내용들과 결론적으로 도출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오히려 프로그램 하는 동안은 어느 정도 잊고 참여할 수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프로그램의 결과물과 느낌은 내 고유의 도출이기도 하고 기획자가 의도한 도출이기도 했다. 이런 방식은 처음부터 어떤 방향에 갇히거나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는 지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형식이나 세계관(?) 등의 구축을 성실하게 해놓아 소극적이거나 참여를 주저하는 참여자들도 커다란 용기를 낸다기보다는 작은 동기나 의지로도 참여할 수 있었다.

(단원 C) 첫 만남부터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까지 설렘의 연속이었다. 개인적으로 뒹굴 팀은 어떤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그 생각들을 어떻게 발현시킬까 궁금했다. 이런 참여가 처음이라 좋은 긴장감과 부담감을 갖고 있었는데 반대로 더 집중해서 즐길 수 있도록 유도하는 프로그램 방식이 인상 깊었다.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은 나의 다양한 감각을 자연스레 사용하게 하였고, 나에게 더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다. 뒹굴 팀은 이렇게 사람을 만나는구나 처음 느끼는 이 신선한 기분으로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며 그들의 작업 속에 녹아들었던 것 같다.

오늘 본 것을 극단 Y의 언어로 옮겨온다면?


(단원 B) 청년청 공간에서 제한을 두지 않은 점과 시청각을 자극하는 요소가 있었다는 점, 한 달 동안 오를 계단을 하루 만에 올라보았다는 점, 사람의 음성이 아닌 카톡방의 로봇이랑 소통했다는 점 등등의 진행과정들이 잠들어있던 몸의 감각을 조금 깨워주어서 신이 났었다. 또 지향하는 점이 닮은 팀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어와 분위기는 우리와 완전 달라서 신기했다. 하긴 같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돌아가면서 한명씩 프로그램을 짜고 그가 만든 프로그램을 모두가 함께 실행하면서 어떠한 창작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이것도 충분한(충분하지 않을수도 있겠다. 많은-) 대화과정이 있었고, 이제는 어느 정도의 지점에 도달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원 A) 매번 팀원들이 돌아가며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타 팀원들이 참여하게 하는 것은 한 프로그램 당 팀원 수만큼의 새로운 생각, 개념, 언어를 수집할 수 있게 한다. 또 그것은 팀원들은 프로그램에 몰입하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가능해진다. 의식적인 발견, 반복되는 검열이 없어도 말이다. 이것을 거친 언어로, 그 순간만큼은 외부와 잠시 차단되고 기존의 방식들을 망각함으로써 수행되는 방식이라고 표현한다면, 우리 팀은 거꾸로 모든 것을 기억하고 밟아나감으로써 우리를 다시 재정립하고 새로운 언어를 찾아나간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되도록 기록하고, 물어보고, 되돌아가면서 우리만의 기호, 언어, 방식을 찾는다. 이러한 수행방식의 차이로 인해 팀의 분위기나 텐션, 서로를 대하는 방식, 협의하는 방식 등에도 다른 지점이 생겨나는 것이 신기했다.

(단원 C)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을 한곳으로 집중하는 과정이 3-4시간 동안 지루하거나 고통스럽지 않고 설렘과 즐거움으로 꽉 채워질 수 있도록 노력한 뒹굴 팀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단원 D) 극단 Y는 결과만큼 과정을 중요시하고, 구성원들이 평등하고 편안하게 예술 활동을 지속해 나가는 환경을 만들고자 노력해왔다. 뒹굴 팀의 내규는 그런 극단 Y의 지향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뒹굴이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해나가는지 궁금한 지점이 있었다. Y의 시간들 보다 더 긴 시간을 쌓아온 팀이라 상호간에 쌓인 맥락들이 더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PC하려 하지 않고 작업하겠다는 말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 PC하려 하지 않고 다양한 장치를 개발하겠다. 그 장치들을 개발하는 것이 PC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대체 뭘 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연습의 참관이라는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것에 대한 동의는 프로그램에서 생산된 결과물을(그 결과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내어놓는 것에 대한 동의와 등치될 수 없다. 만약 프로그램의 성격상 미리 결과물에 대한 공지를 할 수 없었다면, 끝나고 난 이후에 개개인의 의사를 존중해야 했을 것이다. (발표를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부분들이 무시되었고 이것이 뒹굴에서 말하는 PC하지 않기 위한 노력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음의 창작 다른 결과들을 내기 위해 과정에서 필수적인 어떤 것들을 생략해 버리는 것.


* * *


프로젝트 하자의 실험,
보편성 없이 연극하기에 대한 
콜렉티브 뒹굴의 관찰

@ 문래예술공장 3층

▷ 프로젝트 하자 × 콜렉티브 뒹굴 연습현장 스케치 영상(http://bitly.kr/aqa7hq)

프로젝트 하자의 연습에 참여한 소감을 이야기한다면?


배우 각자의 존(zone)으로 구성된, 참여형 공연에 가까운 연습 오픈이었다. 4개 존의 제목은 각각 ‘디디’s 키친,’ ‘천칭자리,’ ‘모모의 팔레트,’ ‘지구born’이었다. 뒹굴리안들은 프로젝트 하자의 발표 전 첫 참여 관객으로서 연습실 오픈에 함께 했다. 존마다 마련되어있는 팀원 각자가 제시하는 이야기와 방법을 참여자들과 함께 경험해보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디디‘s 키친은 설정된 상황에 퍼포머와 참여자가 관계를 맺는 방법론을, 천칭자리는 하나의 키워드(그 존의 주인이 관심 있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양식으로, 구성되었다.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질문에 그림으로 답해보는 시간을 갖는 모모의 팔레트와, 계단의 층을 활용하여 개인의 기분의 층을 표시한 사진 전시 및 도슨트 퍼포먼스 형식의 지구born도 있었다. 개인의 기억 또는 개인의 감각을 그림이나 논의, 일상적인 방식으로 다정하게 풀어내어, 관객 역시 자신의 감각을 더듬어볼 수 있는 시간에 가닿을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하자는 ‘보편성이 아닌 개별성으로 작품을 만든다’는 실험 주제를 가지고 있다. 집단, 보편이라는 말 아래 쉽게 뭉개버리는 ‘개인’을 조명하기 위하여 하자는 팀원 개개인에게 집중해보는 과정을 거쳐 온 것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견되는 지점을 관객에게도 경험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방법론을 택한 것 같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소소하고 일상적인, 그렇지만 개인이 진심과 애정을 듬뿍 쏟은 각자의 키워드와 재료들이 하나씩 참여자들에게 소개되었다.

프로젝트 하자라는 팀은 ‘따뜻함’이 베이스가 되어있는 팀이라는 느낌도 받았다. (우리 팀에 없는 또는 부족한 질감의 것이었다!) 개별성, 개인에 대해 묻고 답해가는 과정이 매우 정성스럽게 다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게 진심으로 몰두해주고 집중해주는 시간을 가져온 것 같았다. 그런 개별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관객과 만나는 때에도 ‘하자의 힘’이 되리라는 기대도 되었다. 지극히 자기 얘기를 담담히 이어가면서, 관객에게도 그러한 시간을 열어주는 작업이 나오지 않을까.

오늘 본 것을 콜렉티브 뒹굴의 언어로 옮겨온다면?


하자가 팀원 각각의 이야기를 각자의 언어로 풀어내고 그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연결하는 작업을 했다는 점에서 뒹굴의 작업 방식과 유사한 점이 있었다. 그렇지만 피드백 과정에서 두 팀의 색깔이 어떻게 다른지가 관찰되는 것이 재미있었다. 비슷한 연습 방법에서 출발하여 전혀 다른 결의 과정과 결과를 냈다는 생각이 들어 흥미로웠다.

뒹굴도 ‘개별성’이란 키워드로 설명 가능한 지점이 있지만, 이 개별성이란 말이 하자에서 사용될 때와 뒹굴에서 쓰일 때 전혀 다른 질감인 것 같다. 뒹굴에게 개별성은 개별 작업자의 창작 방법론, 콜렉티브를 구성하는 개인 작업자로서 개별 창작 언어가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특징으로 구현된다. 뒹굴의 개별성은 관객을 호명하는 때에도 드러나는데, 섬세하게 타겟팅되어 초청된 (소수) 관객에 초점을 맞추는 작업을 주로 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자가 작업자의 개별성과 참여 관객의 개별성을 만나게 하는 지점이 더욱 흥미롭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1) 뒹굴은 개인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흥미가 있다기보다 개인의 ‘방법론’을 찾고 모으는 데에 흥미가 있으며, 2) 참여자가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여 들어가는 경험보다는 오히려 특수한 개인으로서 거리를 두도록 하여 사회/집단적 맥락을 바라보는 경험을 설계하는 것에 주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프로젝트 하자가 개별성을 키워드로 삼으며 개인의 이야기와 내면이 잘 보이는 작업을 한 것이 뒹굴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나도 그런데’ 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이 있었으며, 피드백 시간에도 ‘힐링’이었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개인의 감각과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개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 대한 갈증이 관객에게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뒹굴이 전반적으로 감정이나 내면세계에 대한 따스함이 매우 부족(하다못해 춥고 시린 작업)하기 때문에, 가끔은 잊는 지점이기도 하다. 참여자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것들’을 꺼내 볼 수 있는 시간, 그것을 꺼낼 수 있도록 적절한 판을 까는 것, 그리고 꺼낸 것을 유의미하게 구성하는 것 역시 작업자가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하자의 작품을 통해 다시금 확인했다.

하자의 퍼포머가 뒹굴에게 ‘퍼포머가 어떻게 할 때 참여자가 마음을 연다고 생각하는지’ 질문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참여자가 in 할 수 있는 환경, 예컨대 퍼포머가 참여자와 관계 맺는 방식, 공간의 빛과 음악 세팅, 타이밍 조절 등을 기획자이자 퍼포머로서 확실하게 ‘결정’하는 것이 도움이 되더라는 이야기를 나누었더랬다. 뒹굴이 퍼포먼스 자체와 더불어 공간 세팅이나 맥락에 관심을 크게 가지는 편이라 그렇게 대답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프로젝트 하자 팀원들과 질문을 주고받고 피드백하며, 동시에 우리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하고 답하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무엇에 집중하고 보아내는지, 우리 팀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작업하는지 까지를 관찰하고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대 동료 작업자들의 문제의식과 방법론을 체험해보고 같이 이야기해보는, 흔치 않은 기회를 가질 수 있어 즐거웠다.

2019년 5월 25일 토요일

[화학작용 4] 함께-인터뷰 3탄 : 극단 Y, 프로젝트 공공연희, 콜렉티브 뒹굴


‘그냥’ 해보기,
감각을 깨우기

- 극단 Y × 프로젝트 공공연희


  극단 Y와 프로젝트 공공연희(이하 공공연희)는 작업자 개인의 주체성과 능동성에 대한 감각을 복구하는 작업들을 이어왔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있다. 거대한 도시의 사이클 속에서 이런저런 복잡한 관계들을 감당하며 살다 보면 온전한 나의 감각을 유지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몸의 예술을 하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나에게 가장 편한 상태가 무엇인지를 잃어버린 채 흘러가는 시간들이 길어질수록 삶과 예술 사이의 괴리는 자꾸만 커지게 된다.

  공공연희는 2018년 결성된 프로젝트 팀이다. 기획자 옥민아를 중심으로 완전히 새로운 멤버들이 모여 2019년, 프로젝트 공공연희로 재탄생했다. 독특한 것은 연극하는 사람들 위주로 구성된 팀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팀이라는 점이다. 연기자, 작가, 음악인, 웹툰 작가, 디자이너, 영상 감독 등이 서로 교류하며 다원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공공연희는 하나의 집약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기 보다는 함께 발굴한 이슈를 놓고 각자의 방식대로 콘텐츠를 만드는 방향을 지향한다. 옥민아 대표는 그것을 하나의 커다란 꾸러미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라 표현한다. 하나로 뭉쳐진 덩어리가 아니라 개별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개체들이 커다란 매듭 속에 엮여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면 되지 않을까 싶다.
  공공연희는 팀원들 자신을 포함해 청년예술을 하는 동료들의 작업이 어느 순간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게 되는 점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신선하고 도전적인 시도를 하거나, 감각적이거나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기획하는 일이 점점 없어지고 타성에 젖어버리게 되는 문제에 경계심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문제의식 속에서 공공연희는 2018년에 감각스트레칭이라 명명한 프로젝트를 감행했다. 반복되는 루틴 속에서 잠들어버린 감각을 두드려 깨워보자는 것이었다. <틔우자 씨:발아> 라는 재치 있는 부제를 달고 있는 감각스트레칭은 기본적으로 멤버들이 함께 도시농업을 하며 24절기의 순서에 따라 처서미식회, 한로상영회 등의 소소한 행사들을 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천천히 변화하는 자연의 리듬에 신체의 리듬을 맞춰 보면서 무뎌진 오감을 하나씩 깨워나가는 과정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딱딱하게 굳은 감각을 바깥쪽을 향해 천천히 늘리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스트레칭이라는 명칭은 매우 적절하게 느껴진다.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는 것은 곧 나 자신으로 온전하게 돌아오는 것이기도 하다.

  Y는 2018년 연극계 미투 운동을 전후로 불어온 새로운 페미니즘의 바람 속에서 개인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고민을 지속해온 것으로 보인다. 자기결정권은 자신의 사적 영역에 관련된 사항들을 다른 주체의 간섭 없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이다. 얼핏 당연한 권리처럼 들리지만, 사실 우리는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매우 많은 부분들을 간섭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외모, 체형, 말투, 행동거지, 사생활 등등. Y는 불쾌하고 부당한 오지랖에 대해 페미니즘이 날카롭게 벼린 비판 의식을 바탕으로 간섭받지 않을 권리에 대해 발언해왔다. 탈코르셋을 다룬 <미의 기준>(2018)이 대표적인 예이다. 美의 기준을 me의 기준으로 수복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긍지를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 
  Y는 한국여성의전화 강연을 들으러 갔다가 리플렛에서 충격적인 문구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실수할 권리가 있다.’ 연습실에서 더 온전하거나 완벽한 존재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거나 ‘잘 모르겠다’ 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으려 애썼던 세월이 무상해지는 순간이었다. 이에 큰 깨달음을 얻은 Y는「권리장전」을 통해 연극을 제작하는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모두에게 완벽하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천명했다. 어쩌면 완벽하지 않을 권리를 통해 역설적으로 우리는 온전한 존재가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 나는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의문을 제기할 권리가 있다.
하나, 나는 거부할 권리가 있다.
하나, 나는 실수할 권리가 있다.
하나, 나는 완벽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 2018년 극단 Y가 작성한 「작업에 앞서, 권리장전(🔗)」

  공공연희는 지원 사업의 사이클에 들어간 예술인은 아직 뭔가를 만들기도 전에 무엇이 부족한지부터 생각하게 된다고 말한다. 사업지원서를 써본 사람들이라면 깊이 공감할 것이다. 내가 심의 기준에 얼마나 미달하는지, 그 기준을 넘기 위해서는 무엇을 극복하고 보완해야 하는지를 집요하게 되물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이 미달태에 놓여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공공연희는 지원 사업에 떨어졌을 때 차라리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고 말한다. 지원 사업은 창작을 시작하는 시점과 발표하는 시점을 결정해버림으로써 예술가들을 정해진 스케줄 속에 가두어버리는 측면이 있다. 떠오른 아이디어를 바로 실행하지 못하고 마냥 기다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공연희는 기다리지 말고 그냥 시작해버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냥 하면 된다. Y의 맥락으로 오면 이 잠언(?)은 조금 다른 색채를 띠게 된다. <그냥 청소하는 것도 필모그래피가 되나요>(2018)의 세 번째 단편인 <그냥요>에는 연습 후 회식 자리에 참석하기를 강요하는 선배에게 거절의 뜻을 밝히며 “그냥 술 마시기 싫어서요.” 라고 말하는 후배가 등장한다. 그럴싸한 핑계를 대는 대신 “그냥 싫다” 라고 말하는 것은 꽤나 망설여지는 일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싫으니까 그냥 싫어, 라고 당당하게 대꾸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Y와 공공연희는 우리에게 온전한 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기다리지도 눈치보지도 말고 그냥, 해보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충고를 건네주고 있는 듯하다.




예술가 비슷한 청년과
연극 비슷한 소통

- 프로젝트 공공연희 × 콜렉티브 뒹굴


  프로젝트 공공연희와 콜렉티브 뒹굴은 이른바 예술하는 인간들의 존재론에 관심을 보이는 팀들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존재론이라는 단어는 다소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바꿔 말하자면 예술하는 인간들이 과연 어떤 인간들인지에 대한 탐구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좀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예술가 일반이 아니라 스스로의 모습과 닮아 있는 특정 세대의 예술가, 즉 청년예술가들이다.

청년예술가, 그들은 누구인가? 세대론의 종언이 운위되고 있는 시대니만큼 ‘청년’이라는 레떼르는 공연히 성가시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청년은 그저 담론의 산물이거나 공모행정의 용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청년(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있지만, 그 논의들은 청년예술가가 누구인지를 사실적으로 설명해주기보다 청년예술가는 어때야 한다는 당위로서 작동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런 까닭에 청년예술가는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그 언어들로 인해 점점 지쳐가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공공연희는 그런 피로감을 가로질러 청년예술가에 대한 탐구를 지속하려 하는 듯이 보인다. 2018년 감각스트레칭 프로젝트를 통해 감각을 깨우는 문제에 초점을 맞췄던 것에서 한걸음 나아가 이번에는 영감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싶다고 말한다. 청년예술가의 영감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공공연희에 따르면 사실 감각과 영감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개념들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영감이 밖에서 번개처럼 찾아오는 것으로 상상하지만, 공공연희는 그것이 어딘가에 보이지 않은 채로 잘 숨겨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워보고 있었다. 곧바로 눈에 띄진 않지만 내 눈이 밝아지면 찾아낼 수 있는 어떤 것.

  공공연희가 꿈꾸고 있는 것은 청년예술가들이 영감을 발굴해내는 어떤 순간들을 포착해내는 것이다. 서울에 살고 있는 어떤 청년예술가로 가정된 사람의 방을 아주 디테일하게 구성해보고, 그 공간을 관객들에게 전시의 형태로 오픈하는 작업을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대담한 관객이라면 그 방에 놓여 있는 노트북을 열어 아이디어를 끄적여 놓은 메모를 읽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청년예술가의 일상적인 공간을 시뮬레이션함으로써 거기에 깃들어 있는 틀 잡히지 않은 영감에 접촉해보는 것. 공공연희는 그러한 실험을 통해 청년예술가가 실제로 어떤 느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지를 나름대로 규정해보고자 하는 듯 했다. 예술에 대한 영감을 향해 서서히 전도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는 청년. 공공연희가 들려준 구상 속에서 보이는 것은 그런 예술가 비슷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각자의 영감은 각자의 작업에 있고, 각자의 작업은 작업을 하는 테이블과 방과 집에 있다면, 굉장히 보통의 존재인 청년예술가 한 명의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은 거예요. 어떻게 사는지, 몇 평에 사는지, 뭘 입고 먹고 사는지, 한 달에 얼마를 벌고 사는지.”
- 사무국 × 프로젝트 공공연희 인터뷰 중

  뒹굴의 경우에는 청년예술가를 둘러싼 상황을 통해 역으로 청년예술가-됨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작업들을 이어왔던 것 같다. <바로 그 얘기>(2016)는 지구가 멸망한 후 신인류가 구인류의 잘못에 대해 재판한다는 내용을 담은 공연이었다고 한다. 1621번째 재판에 이르러 피고석에 선 것은 공연예술가였다. 판사는 지구가 망해가는 판국에 연극이나 올리고 있었던 이유에 대해, 그 연극이라는 것의 가치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심문한다. 공연예술가는 연극의 시대적 소명 내지는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 등을 항변의 근거로 삼지만, 기록으로 남지 않은 것은 물론 연극을 기억하는 관객들도 극히 소수인 상황 때문에 그의 변론은 궁색해져간다. (이상의 내용 정리는 박종주가 drama-in.kr에 기고한 리뷰(🔗) 「어느 재판의 기록」을 참고한 것임을 밝힌다.)

  한편 <연기의 해로움에 관하여 1>(2016)은 연극에 재능이 없지만 지독하게 연극을 사랑하는 청년예술가들이 지원금 20만원을 놓고 싸우는 이야기였다고 전한다. 보지 않아도 능히 짐작이 되는 상황이라 할 것이다. 이처럼 뒹굴은 예술의 가치, 혹은 청년예술가들의 존재의미를 코믹하고 시니컬한 터치로 다루는 작업들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연극이라는 박스box의 효용성을 계속해서 문제 삼는 뒹굴의 작업에서는 메타연극 비슷한 효과들이 발생한다.

  하지만 메타연극도 어쨌든 연극인지라, 연극도 아니고 연극이 아닌 것도 아닌 뒹굴의 공연 형식에 정확히 들어맞는 워딩이라 하기는 어렵다. 의외로 뒹굴의 공연 형식을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은 그들의 초창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을 때 발견된다. <니나노 뒹굴>(2012)을 포함한 연극 비슷한 소통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뒹굴은 그 시절부터 연극 비슷한 것을 하고 싶기는 하지만 연극을 왜 해야 하는지 해결이 되지 않으면 연극을 할 수 없다, 라는 골머리 아픈 숙제를 풀고 있었던 것 같다. 반대로 말하자면 뒹굴의 역사는 그 숙제를 풀어가는 역사였다고 할 수도 있다. 예술하는 인간이라 자존하고 싶다면 우선 그 예술이라는 것의 가치를 찾아내고 증명해야만 한다는 것. 뒹굴에게 연극 비슷한 소통으로 표현되는 어떤 공연들은 그 증명의 수단이자, 증명의 결과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2019년 5월 22일 수요일

[화학작용4] 함께-인터뷰 1탄: 콜렉티브 뒹굴, 프로젝트 하자, 丙 소사이어티


모든 ‘각자들’의 연극,
너와 나의 관계성

- 콜렉티브 뒹굴 × 프로젝트 하자


  콜렉티브 뒹굴(이하 뒹굴)과 프로젝트 하자(이하 하자)의 출발점에는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다. 정극 중심으로 공연을 올리는 대학 극회에서 떨어져나온 이른바 부스러기들이 헤쳐 모여 만들어낸 집단이라는 점이다. 뒹굴은 나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극회에서 활동하다가 정극이 정말 재미있는지, 이 시대에 맞는 연극인지에 대해 회의를 느낀 사람들이 모여든 팀이라고 한다. 하자 역시 비슷했다. 정극을 만드는 과정이 성향상 맞지 않는 데다 단체 생활마저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야합했다. 연극다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서도 연극을 하고 싶었던 두 팀의 결성, 때는 2012년이었다.

  대학 극회를 발판으로 삼아 연극계에 진출하는 청년들은 많다. 이 과정은 흔히 아마추어가 프로로 성장하는 서사로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뒹굴과 하자는 세미-프로 양성소에서 착실히 연극수업을 받으며 성장한다는 줄거리를 조기에 절단했다. 그럼, 이 절단된 단면에서는 과연 무엇이 자랄 수 있을까? 그래도 여전히 생장점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뒹굴과 하자가 삐뚤빼뚤하게 걸어온 길은 그런 질문들과 씨름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왜 항상 내 삶을 버려두고 예술에만 집중하는 식으로, 혹은 예술을 잘 하는 식으로, 혹은 잘 해서 뭔가 대단한 걸 만들어내기 위해서 너무나 큰 압박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지, 의문을 품으며 모이게 되었습니다.”
- 2012년 〈니나노 뒹굴〉공연 당시, 성지수 대표의 발언
  뒹굴과 하자의 다른 공통점은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지길 거부하는 팀이라는 것이다. 무릇 연극이라 하면 텍스트든, 연출의도든, 극단 기조든 간에 구성원들의 신체로 하나로 끌어당기는 소실점을 향해 달려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뒹굴리안들은 초창기 〈니나노 뒹굴〉 때부터 이미 팀원들이 하나의 이상향을 향해 기-승-전-결을 거쳐 가는 작업 방식을 지양했다고 회고한다. 연극이 덩어리로 굴러가기 시작할 때 그 안에서 무언가가 상실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뒹굴이 예술이라는 이름의 덩어리로부터 꺼내오고 싶었던 것은 각자의 것이었다.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을 가져와서 좋은 점을 찾아보고, 그것을 재료 삼아 놀아보면서 발전을 이루는 형태로 작업해왔다고 한다. 2016년에 뒹굴은 그렇게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을 갖고 드나들 수 있는 팀, 혹은 어떤 움직이는 장소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콜렉티브collective를 달게 된다.

  덩어리 상태로 연극을 하지 않겠다는 포부는 하자에게도 중요했다. 단체를 만들지 않고서도 연극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꿈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2012~2014년 대학 동아리로 활동하던 시절 하자가 도전한 것은 위계 서열 없는 수평적 상태였다. 무조건 창작극을 하고, 작업을 위해 모이면 먼저 서로를 인터뷰한 다음 맞물리는 부분을 가지고 주제를 도출한다. 이슈나 주제를 미리 정해놓지 않고 만나서 정해가는 방식을 고집한 것이다. 하자가 방법론적으로 중구난방을 취한 이유는 명확해 보인다. 많은 공연팀에서 연출이 그런 역할을 맡고 있듯이, 이슈 셋업이 가능한 누군가를 상정할 경우 필연적으로 목소리 비중에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신생팀들이 자신들만의 메시지를 찾기 위해 어떤 의식의 단일화를 꾀하는 것과 달리, 하자는 목소리의 다양성을 향해 팀원들의 관계를 느슨하게 풀어서 넓히는 방향을 취했던 것 같다.
  이른바 연극다운 연극들의 성소가 극장이라면, 뒹굴과 하자는 우선 극장을 놓아두고 밖으로 떠나는 방법을 취했다. 뒹굴의 첫 공연은 포이동 화재 재건 1주년을 기념하는 ‘벽돌문화제’(2012)에서 트럭 두 대를 놓고 짧은 퍼포먼스를 가진 것이었다. 초창기에 뒹굴은 관객이 어둠 속의 눈으로만 존재해야 하는 권위적인 극장 공간을 벗어나 관객들과 가깝게 호흡을 나눌 수 있는 장소들 속으로 들어가고자 했던 것 같다. 같은 해 대학교 자치도서관에서 열린 〈니나노 뒹굴〉의 경우에는 관객들과 음식을 나눠먹고 사진을 찍고 체조를 같이 하는 참여 코너가 포함되기도 했다. 이게 연극인지 사회적 프로젝트인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논다면 관객과 함께 놀고 싶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가겠다는 생각은 그 이후로도 죽 이어져온 듯하다. 관객에게 배심원을 시켰던 〈바로 그 얘기〉(2016), 관객에게 요정을 돕는 베타테스터 역할을 시켰던 〈조커카드 베타테스터 파- 티〉(2017), 관객에게 흡연자 노릇을 시켰던 〈제2회 흡연자 인권대회〉(2019) 등등.
  관객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하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공터로 나갔던 하자는 이후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거리극을 하기도 하고, 대안학교나 난곡동 태권도 학원 등등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관객들을 만났다고 한다. 하자는 관객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는 대신 1대1로 봐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1대1의 관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상태로. 뒹굴이나 하자나 그들의 팀을 구성하는 원리를 관객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해보려 노력해온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라는 덩어리로 보는 대신 너와 내가 가진 각자의 것들을 보고자 하는 노력, 혹은 관계성의 실험. 2012년으로부터 7년 간 지속하고 있는 두 팀은 여전히 초창기에 발견했던 생장점을 구불구불 옮기며 자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주류의 몸이
무대 위를 서성일 때

- 프로젝트 하자 × 丙 소사이어티


  프로젝트 하자와 丙 소사이어티(이하 병소)는 팀 이름에 이미 자기정체성이 투사되어 있는 팀들이다. ‘하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연극을 하고 싶은데 왜 못 하지, 하는 푸념만 나누다가 ‘하자!’ 라고 결의했을 때의 에너지를 담고 있기도 하고, 어딘가 조금씩 결함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점에서 하자瑕疵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하자의 전서아 연출은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비주류의 정체성과 감성을 지닌 팀이었던 것 같다고 회고한다.

  병소의 이름에도 그러한 비주류 정체성과 감성이 투사되어 이다. 병소 역시 2012년에 결성되었는데(2012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당시는 한창 병맛이라는 유행어가 인기를 끌던 시기였다. 술병을 굴리며 지병持病을 앓는 사람들, 하지만 그런 자신을 보며 하하하 우습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병맛 감성. 최종적으로는 갑과 을의 먹이사슬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아예 병이 되겠다는 선언으로서 丙 소사이어티는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위계적 중심을 배제하고 천천히 지속하는 팀들은 구성원들에 소속감을 강요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자와 병소 역시 고정적인 멤버를 거의 두지 않고 그때그때 공연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이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체 상태의 집합체가 아니라 느슨하고 액체적인 풀pool의 상태로 놓아두었던 셈이다. 멤버들은 각기 자신의 삶을 살다가 그 시간만큼의 고민을 안고 돌아온다. 병소의 경우에는 6년 만에 돌아와 작업을 하게 된 멤버도 있었고, 하자의 경우에는 멤버들이 각각 졸업과 취직의 관문을 넘은 뒤 2년 만에 다시 만나 작업을 이어가기도 했다. 2016년에 다시 모인 하자는 창작극에 공을 들이다가 2017년 밴드 GRiN과 콜라보한 음악극 〈안녕〉을 선보이게 된다.
  하자의 성격이 다소 변하게 된 계기는 2018년 〈오르막길의 평화맨션〉이라는 공연이었다. 이사를 돕느라 해후하게 된 바이섹슈얼 여성 커플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이었다. 전서아 연출은 하고 싶은 얘기가 정확히 생겨서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말한다. 동시에 하자라는 팀에 처음부터 비주류 의식이라는 뿌리가 있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비주류 의식이라는 말을 달리 번역하자면 어딘가 하자가 있는 사람들, 딱 들어맞는 퍼즐을 이룰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끼리의 공존이 아닐까.

하나: 망가진 인간들끼리 위로가 되나.
유진: 망가진 인간들끼리는 위로가 된다. 난 아직 믿어.
- 2018년 〈오르막길의 평화맨션〉대본 중 

  갑도 을도 아닌 병들의 소사이어티를 자처한 병소는 집도 없고 돈도 없이 가난하게 살아가는 비주류의 모습에 주목했다. 〈노동집약적 유희〉 시리즈는 편의점, 식당, 서점 등의 알바 자리들이 늘어서 있는 커다란 부루마블 말판 위를 움직이며 생존을 꾀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말’의 역할을 하게 되는 참여관객들은 최저임금만큼의 자본과 일정한 체력 수치를 갖고 이 비정규직의 세계를 돌아다니며 살아남기를 도모하게 된다. 한시적으로 어떤 공간에 머무르며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다시 자신이 머무를 공간을 사야 하는 사람들. 그 모습은 터무니없이 적은 돈으로 극장들 사이를 전전하며 무대 위에서 잠시잠깐 현존했다가, 다시 도시 이곳저곳으로 흩어지는 청년연극인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노동집약적 유희〉는 애초에 장기 프로젝트로 기획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애초에 계획했던 사업이 지원금에서 떨어진다든가, 페스티벌에 초청을 받는다든가 하는 우연한 계기들이 겹쳐 이 공연은 2015년~2017년에 걸쳐 총 네 번이나 상연되었다. 물론 모두 다른 극장, 다른 장소에서였다. 병소는 매번 새로운 무대를 만날 때마다 그 공간성에 맞게 공연성을 개조해나갔다. 가령 인천아트플랫폼 같은 단정한 블랙박스 무대를 만나면 방송 중계 현장처럼 만들었고, 연습실 공간을 만나면 관객과 함께 하는 레크리에이션을 삽입했고, 인터넷 공간에 Rodong.zip 파일을 흩뿌리거나 집회 신고를 넣고 보신각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자신의 모습을 현시하기 위해 절룩거리며 새로운 공간을 찾아다니는 비주류 청년연극인들의 몸. 그것은 칸으로 나뉜 부루마블의 세계를 서성이고 있는 말들의 모습과도 같다.
  2018년을 기점으로 하자는 그들의 창작 원천이었던 비주류 의식을 소수성에 대한 감각으로 옮겨놓게 된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소수의 소수의 소수이다. 다수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번역될 수 없는 일인칭적 감각에 대해 사고하기. 그것은 사회적인 것에서 개인적인 것으로, 개인적인 것에서 사적인 것으로 인식의 레벨을 옮겨가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오르막길의 평화맨션〉 공연을 치르면서 하자는 소수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관객을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적어도 소수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확실한 정체성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호출한 관객들이 무대 위에 앉아 있을 때, 어떻게 소수적인 것의 소통에 성공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병소와 마찬가지로 하자 역시 비주류의 몸을 어떻게 무대 위에 올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자가 있는 사람들의 소사이어티는,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것일까? 

인터뷰 정리: 김민조

2019년 4월 1일 월요일

[#fair_play] 콜렉티브 뒹굴 작업 수칙 (2012, 2018, 2019)

드라마인은 연극계의 공정하고 평등한 제작 문화 수립을 위해 해시태그 #fair_play 캠페인을 진행하며, 그 일환으로 그동안 개별 극단과 단체에서 도출한 작업 수칙을 아카이빙하고 있습니다. 전체 연재 목록은 여기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동참을 원하시는 단체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편집부

2012년 7월, <뒹굴의 약속>을 만들었습니다. ‘연극 비슷한 소통’을 해내기 위해-기왕이면 재밌게 제대로 해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약속과 필요 없는 관습이 무엇인지를 적어내려 갔고, 이것은 지난 5년간 팀을 꾸려오는 기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8년 4월, 뒹굴은 약속을 <작업 수칙>으로 개정했습니다. 우리끼리 더 신나게, 마음껏 놀기 위해 만들었던 내규가 2018년에는 한 명의 작업자로서, 한 명의 사람으로서의 성찰을 통해 다시 작성되었고, 처음으로 외부에 공개되었습니다.

  작년에 뒹굴의 내규를 조건 없이 공유했던 것은 변화를 시작하려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용기와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여기, 미약하게나마 작업문화를 바꾸어나가는 움직임이 있고, 그 다짐과 실천의 내용을 공유하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뒹굴의 <작업 수칙>이 곳곳의 작업과 모임에 사용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일견 신기하면서도,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 외에도 많은 작업자들이 안전하고 건강한 작업문화와 환경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며, 힘을 모아 안전한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고자 한다는 연대의 메시지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2019년 2월, 콜렉티브 뒹굴은 다시 한 번 우리의 약속을 다듬습니다. 지난 한 해 우리의 작업들에서 <작업 수칙> 얼마나 실효성이 있었는지, 더 알게 된 것이나 새롭게 보게 된 것들이 있는지, 알았지만 지나쳤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반추해봅니다. 지향점을 세웠지만 그에 맞는 방법론과 책임자가 부재한 탓에 지켜지지 않고 흘러가버린 것들을 발견합니다. 더 발전되어야할 부분과 추가되어야할 부분, 수정되어야할 부분을 이야기하며 올해 우리의 약속들을 <자치 규약>으로 명명하고 다시 공유하려 합니다.

 뒹굴의 새로운 <자치 규약>을 다시 공유하는데 있어 변경된 사항을 알립니다. 개정된 뒹굴의 <자치 규약>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내규를 참고하거나 사용하실 때 출처를 밝히고 사용 주체와 목적을 저희에게 알려주세요. 이는 뒹굴의 소유권을 주장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어디서 이러한 시도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고 싶은, 연대하는 마음이라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연대의 가능성을 높이고 건강한 창작 문화를 일구기 위한 더 나은 방법이라는 판단 하에 새로운 공유방식을 시도하니, 먼저 실천을 시작한 작은 단체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출처를 밝히고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공유하는 내규는 뒹굴의 자치 규약이기에 뒹굴의 상황을 적극 반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작업에 적용 가능한 ‘표준 내규’가 되기엔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하시어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좋은 작품과, 좋은 작업으로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더욱 많은 사람이 더욱 마음껏 뒹굴거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며 작업합시다. 우리 모두를 응원합니다.

콜렉티브 뒹굴
*연락처: doingle.around@gmail.com


1. ‘니나노 뒹굴’ 활동 수칙

2012. 7. 2

 #1 연극은 종교가 아니다

연극은 이래야 한다, 연극의 각 파트들, 요소들은 이래야 한다라는 생각은 개인마다 다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서로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 이상한 것, 안전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인정하고
극복하기 위한 시도를 위해 서로를 격려한다.


#2 하고 싶은 것을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치열하고 깊게 고민한다.
왜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내가 듣지 못했던 내 목소리는 없었는지 살핀다.
아울러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자신에게 /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의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 즉시 중단하고 반추해본다.
하기 싫은 것에 대해서도 위와 같이 돌이켜보고 고민해본다.


#3 듣고 보는 사람이 된다

말하고 표현하고 발산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우리가 장애 없이 말하고 표현하고 발산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먼저 듣고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서로의 이야기에, 표현에 눈과 귀를 기울인다.
만약 불균형적으로 발언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나는 이미 듣고 보는 사람..!


#4 집중은 기본이다

지각, 핸드폰, 쉬는 시간 엄수, 작업 활동에의 집중 등은 굳이 공론화한 적 없지만
따로 벌칙이나 벌금을 마련한 적 없지만
기본으로 지킨다.

***

2. 뒹굴리안과 협티를 위한 콜렉티브 뒹굴의 작업 수칙

2018. 4. 9
콜렉티브 뒹굴 (뒹굴리안 김정은, 박종주, 성지수, 오현지, 최희범)

1. 작업의 목적은 "공연을 만드는 것"으로 한다.
1) 그러나 이 목적은 자연권, 인권, 성적 자기결정권보다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위의 가치가 위협받는 상황이 발생할 시에는 작업 진행을 그 즉시 멈추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의 목표는 작업의 속행이 아니어야 하며, 이러한 분위기를 조장하는 이는 의사진행 발언권을 얻은 이의 진행 하에 즉시 퇴장시킨다.
2) 연습, 회의, 공연 등 작업 전후의 밥/술자리 등의 자리는 의무가 아니며 서로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3) 연극은, 그리고 작업은 종교가 아니다. 필요할 경우 뒹굴은, 문제가 발생한 작업 자체를 중단할 수 있다.

2. 연습에 집중하고, 타인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는다.
1) 연습에 관련한 약속 시간은 꼭 지키도록 한다. 지키지 못하게 되었을 시, 최대한 빨리 사정을 전체 및 진행자에게 공유하고 그 시점에서 가능한 시간을 다시 약속한다.
2) 연습 시작 시점에 스스로의 몸과 마음 상태를 확인하여 공유하는 시간을 가진다. 목적은 작업 모드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체크인]
3) 연습 중 휴대폰 사용을 자제하고, 무음이나 진동모드로 한다.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경우(꼭 받아야 하는 전화 등) 사전에 양해를 구한다.

3. 작업 내 역할 및 권한 이행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1)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고 신뢰한다. 역할에 따른 권한을 존중하되, 한 사람에게 과중한 책임과 업무가 일임되지 않도록 점검하고 소통한다.
2) 작업 내 역할 분담은 업무의 분장이지 수직적 위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3) 특정한 결정권 및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들은 그 역할을 맡은 이유가 개인의 뛰어남 때문이라기보다, 타인이 그를 신뢰해주었기 때문임을 명확히 한다. 하여, 이를 잊은 이가 있다면 누구든 그 즉시 기억나게 해 줄 의무가 있으며, 만일 특정 개인이 이를 인정하지 못 한다면 논의를 거쳐 권한 위임을 철회한다.

4.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를 잊지 않는다.
1) 성별, 나이, 경험 등에 의해 생기는 위계를 인지하고 인정하는 동시에 수평적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한다. 제도적 노력으로는, 매 작업마다 작업이 시작되기 전에 반말/존댓말 통일, 닉네임 사용 등을 전원의 합의로 결정하는 회의를 가진다. 개인적 노력으로는, 상대의 이야기와 표현에 집중하고, 듣고 보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만일 불균형적으로 발언을 많이 하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혹시 그게 나...인가....?
2) 복장, 화장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의 외모를 평가하는 발언은 하지 않는다. 만일 작업/작품을 위해 필요하다고 느껴진다면 ‘평가’하지 않고 언급하는 방법을 충분히 고민한다.
3) 상대방이 성적 불쾌감을 느낄 수 있을 발언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다.
4) 연습을 통해서 알게 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마음대로 외부로 가지고 나가지 않는다.
5) 매 순간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평가하기보다는 질문하고 제안한다.
6) ‘인간에 대한 예의’의 항목과 관련되어 지적을 받았을 때에는 발언 또는 행동을 즉시 멈춘다. 그리고 변명하기보다는 수용하고 사과한다.
7) 필요하다면 누구든 공연 제작 현장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및 권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행동지침 교육이나 관련 워크숍을 제안할 수 있고, 이는 모든 작업 인원이 참여하는 것으로 한다. 만일 예산이 필요하다면 이를 ‘필수적인 제작비’로 보고, 가급적 뒹굴의 예산으로 해결한다.

*본 작업 수칙은 [콜렉티브 뒹굴 내규]의 일부입니다. 전체 문서는 다음 주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facebook.com/doingle.around/posts/2175254476094415

***

3. <콜렉티브 뒹굴 자치 규약> 중 작업 수칙 부분

2019. 3. 31 (3차 개정)
콜렉티브 뒹굴 (뒹굴리안 김정은, 부진서, 성지수, 오현지, 유솔범, 최희범)

제3장 뒹굴의 운영 제도는 


제9조 [운영 제도의 목적] 작업의 목적은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한다. 그러나,
① 이 목적은 ‘이게 뭐라고’ 정신을 잃지 않는 선에서 추구된다. 예술은, 그리고 작업은 종교가 아니다.
② 이 목적은 자연권, 인권, 성적 자기결정권보다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위의 가치가 위협받는 상황이 발생할 시에는 작업 진행을 그 즉시 멈추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의 목표는 작업의 속행이 아니어야 하며, 이러한 분위기를 조장하는 이는 발언을 제한받고 필요시 퇴장당할 수 있다.
③ 필요할 경우 뒹굴은 문제가 발생한 작업 자체를 중단할 수 있다.
④ 연습, 회의, 공연 등 작업 전후의 밥/술자리 등은 작품 창작을 위한 필수요소가 아니므로 서로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제10조 [지속 가능한 창작 활동] 우리는 동료의 작업을 오래 보고 싶다.
① 회의, 연습, 제작, 작품 발표, 워크숍 등 모임이 전제된 활동은 프리 프로덕션 때 고지된 소요 시간을 엄수하기 위해 노력한다. 만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일정이 길어진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프리 프로덕션 및 당일 모임에서 미리 논의한다.
② 모임 이외의 시간에 이루어지는 구상, 작성, 정리, 연습, 제작, 구매 등 개별 창작 활동이 있기 마련임을 인지하되, 개인의 시간을 존중한다. 이는 작업 인원의 휴식을 보장하여 업무의 효율성을 증진하고 노동력 착취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논의를 통해 개별 업무 시간을 확정하고 이를 준수하는 것 등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창작 활동이 삶과 분리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한편, 나도 모르게 그만 동료와 스스로의 삶을 소모하거나 착취할 위험을 예방할 것이다.
③ 뒹굴은 공연 제작 현장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및 권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행동지침 교육이나 관련 워크숍을 진행할 수 있다. 이에 사용되는 금액은 ‘필수적인 제작비’로 간주하며, 가급적 뒹굴의 자체 예산으로 충당한다.

제11조 [집중 가능한 환경]
① 연습, 회의 등 작업은 각 목표에 적합한 활동으로 구성하고, 빠른 시일 내에 그 내용을 작업 참여 인원에게 공유한다.
② 연습, 회의 등 작업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각 활동의 목표에 적합하고 집중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기는 다소 어려울 수 있으나 제공을 약속할 수 있는 그날까지 열심히 물색할 것은 약속)한다.
③ 작업 진행자, 신체 훈련 진행자, 물 당번, 기록 관리자 등 각 작업 별로 필요한 업무를 리스트 업하고 역할을 사전에 분배하여 원활한 진행을 가능하게 한다.
④ ‘작업 모드’, 즉 연습 시 참여 인원들에게 요구되는 상태는 매 작업마다 상이하므로, 작업을 시작하는 시점에 참여 인원 사이에 적절한 작업 모드에 대해 공유하는 시간을 가진다.
⑤ 연습 시작 시점에 스스로의 몸과 마음 상태를 확인하여 공유하는 시간을 가진다. 이는 ‘작업 모드’로 전환하기 위함이다. 이를 <체크인>이라 한다.
⑥ 연습 종료 시점에 작업에서 느낀 것과 더불어 공유하고 싶은 것을 같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진다. 이는 작업을 정리하여 다음 작업을 준비하기 위함이며, 발언권을 보다 수평적으로 분배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이를 <체크아웃>이라 한다.

제12조 [역할 분담] 작업 내 역할 분담 및 권한 이행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① 작업 내 역할 분담은 업무의 분장이지 수직적 위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② 서로의 역할을 신뢰하고 역할에 따른 권한을 존중한다.
③ 작업 내 역할은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각 작업 별로 필요한 업무를 리스트 업 한 후 분담하여 진행한다. 우리는 관습적인 ‘창작자의 역할’에 깊게 밴 권위주의적 질서가 자유로운 창작활동에 방해가 될 것을 경계한다.
④ 특정한 결정권 및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들은 그 역할을 맡은 이유가 개인의 뛰어남 때문이라기보다, 타인이 그를 신뢰해주었기 때문임을 명확히 한다. 하여, 이를 잊은 이가 있다면 누구든 그 즉시 기억나게 해 줄 의무가 있으며, 만일 특정 개인이 이를 인정하지 못 한다면 논의를 거쳐 권한 위임을 철회한다.
⑤ 소수의 인원에게 과중한 책임과 업무가 일임되지 않도록 점검하고 소통한다. 필요에 따라 중간 점검을 통해 진행 상황을 검토하여 필요한 업무를 추가하거나, 한 사람에게 과중된 업무를 재분배 하는 과정을 거칠 수 있다.
⑥ 기존 언어에 적합한 크레딧이 없다면 뒹굴리안과 협티는 필요에 따라 새로운 크레딧을 창작할 수 있다.

제13조 [예술지상주-의☆] 작품의 미적 가치는 작업 참여자의 사회적 조건, 특히 경력, 학력, 나이, 외모, 신체조건,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장애 등이나, 'ZZAM(팀 소속 기간, 참여한 팀 작업의 수, 주 참여 역할)'순에 따라 결정되지 않으므로, 예술성 높은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작업 인원 간 수평적인 의사 구조를 견지한다.
① 작업 참여자의 사회적 조건과 뒹굴 작업 참여 기간에 의해 참여자 간에 위계가 생길 수 있음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동시에 수평적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한다.
② 매 작업마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반말/존댓말과 닉네임 사용 여부 등을 전원의 합의로 결정한다.
③ 체크인/체크아웃 외에도 작업 내 발언 기회를 균등히 하는 데 도움이 되는 다양한 수단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한다. 구체적인 예시로는 ‘작업 노트 정리 및 공유 시간’ 등이 있다.
④ 직접적인 언어로 의사를 전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공동의 ‘언어 지표’를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설정한다. 이때 위계상 취약한 작업 인원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도록 노력하여 언어 지표가 실제로 사용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한다. 구체적인 예시로는 쉬는 시간이 필요한 순간에 “나는 까마귀예요”, 부연 설명이 필요한 순간에 “에디야? 어디야?” “모어모어” “꿰~?que?” 등이 있다.

제14조 [계약]
① 뒹굴은 <콜렉티브 뒹굴 자치 규약>과 표준 계약서를 기반으로 <뒹굴 협티를 위한 계약서>를 마련한다.
② 협티는 뒹굴리안과 함께 협의하여 결정한 내용을 바탕으로 계약서를 작성한다.


제4장 작업 인원의 약속으로는 


제15조 [집중 가능한 상태] 업무 시간에 집중하고 타인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는다.
① 연습, 회의 등의 작업에 관련한 약속 시간은 꼭 지키도록 한다. 지키지 못하게 되었을 시, 활동의 차질 없는 진행을 위해 최대한 빨리 사정을 전체 및 진행자에게 공유하고, 그 시점에서 합류 가능한 시간을 다시 약속한다.
② 연습, 회의 등의 작업 중에는 휴대폰 사용을 자제하고, 무음이나 진동모드로 한다.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경우(꼭 받아야 하는 전화 등) 사전에 양해를 구한다.
③ 연습, 회의 등의 작업에 지장을 줄 수 있는 개인 활동을 현명하게 조율한다. 체력은 창조력과 인류애의 근원임을 잊지 않는다.
④ 뒹굴의 운영 제도가 보장하는 발언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경력, 나이, 성별에 관계없이 작업 과정을 함께 책임지기 위해 노력한다.
⑤ 듣고 보는 것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일임을 인지하고, 서로의 이야기와 표현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한다. 만일 불균형적으로 발언을 많이 하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혹시 그게 나...인가...?
⑥ 작업 중 감정적 동요나 집중력 저하가 닥쳐올 때, 타인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 당과 카페인 충전 상태를 점검한다.

제16조 [기본은 기본]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를 잊지 않는다.
① 복장, 화장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의 외모를 평가하는 발언은 하지 않는다. 만일 작업/작품을 위해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이를 적절히 언급할 방법을 충분히 고민한다.
② 상대방이 성적 불쾌감 등 신체적, 심리적 불편함을 느낄 수 있을 발언이나 행동을 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③ 신체접촉 친숙도는 사람마다 매우 다르므로, 창작과정에서 접촉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면 먼저 상대의 의사를 확인한다.
④ 연습을 통해서 알게 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마음대로 외부로 가지고 나가지 않는다.
⑤ 매 순간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평가하기보다는 질문하고 제안한다.
⑥ ‘인간에 대한 예의’의 항목과 관련되어 지적을 받았을 때에는 발언 또는 행동을 즉시 멈춘다. 그리고 변명하기보다는 수용하고 사과한다.

제17조 [개인과 운영 제도] 운영 제도와 실천이 완전할 수 없기에 부족함을 함께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한다.
① 작업 진행 과정에서 참여 인원 누구나 <콜렉티브 뒹굴 자치 규약>에서 지켜지지 않는 부분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청할 수 있다. 뒹굴리안은 문제 제기된 내용에 대해 토론하여 수정 및 보완한 내용을 참여 인원과 공유해야 한다.
② 작업 진행 과정에서 참여 인원 누구나 <콜렉티브 뒹굴 자치 규약>에 수정 또는 보완되어야 하는 부분을 제안할 수 있다.
③ 필요하다면 참여 인원 누구나 공연 제작 현장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및 권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행동지침 교육이나 관련 워크숍을 제안할 수 있다.
④ 모든 참여 인원은 <콜렉티브 뒹굴 자치 규약>이 견지하는 가치를 위배하거나 제7조 3항, 제8조 2, 3항, 제9조 2, 3항이 보장하는 참여 인원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동 및 상황이 발생할 시, 침묵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⑤ 제17조 4항에 관계된 문제가 발생할 시, 해당 인원 경고/징계/퇴출, 작업 중단 등을 포함한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하는 비상설 대책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
⑥ 제17조 4항에 관계된 문제 상황 중 팀 차원에서 해결하기 어렵거나 적절하지 않은 사안인 경우, 해당 전문기관 또는 전문가를 포함한 작업 외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⑦ 제17조 4항에 관계된 문제가 발생할 시 회복적 정의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며, 이 과정에서 누구든 배제되거나 더 큰 상처를 받지 않도록 유의한다.

[<콜렉티브 뒹굴 자치 규약> 전문 페이스북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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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및 자치 규약 전문 pdf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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