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푼크툼너머에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푼크툼너머에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4년 7월 30일 수요일

화학작용_선돌편 시리즈와 “일회 공연”

이예은의 푼크툼 너머에


<‘화학작용’ 선돌편 : 7/9~8/31, 선돌극장> 


 스무 개의 극단(혹은 그룹)이 자생적으로 모여 하나의 축제를 만들고 있다. (축제는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지속되고 있고, 아마도 이 글이 게재가 되는 시점에도 끝나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7/9~8/31, 선돌극장) 이들이 만들고 있는 축제의 이름은 ‘화학작용’이다. 예기치 않은 극단들이 우발적으로 만났을 때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가. 이 질문을 시작으로 기획된 축제의 프로그래밍은 오롯이 우발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토너먼트 식으로 제비뽑기를 하여 편성된 두 개의 팀이 한 회 차의 공연을 구성하는 식이다. 현재 네 번째의 공연 순서까지 진행이 되어 총 여덟 개의 작품이 공연되었다.

  ‘화학작용’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이 공연들의 프로그래밍은 어쩌면 독립된 기획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일 수도 있겠다. 기획적 컨셉을 축제의 이름으로 내 건 숱한 ‘축제식’ 공연들은 기획이 과잉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즉 기획이 작품을 압도하여 정작 작품의 색채는 기획의 그늘 아래 퇴색되어버리고 마는, 작품의 목소리가 기획이라는 테두리선에 부식되어버리고 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은 비단 축제 공연만의 문제가 아니다. 공연의 목소리가 기획의 틀에 의존해버리고 마는 요즘의 숱한 과잉 기획의 공연들 가운데 오히려 기획의 독립성이 부재한 ‘화학작용’ 속 공연들은 솔직한 움직임으로 다가왔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화학작용이란 조금 우연하고도 계산되지 않은 채로 발생한다. 이것은 으레 축제 혹은 기획이라는 틀 거리 안에서 하나로 규정되어 왔던 것들, 그러나 규정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기대감을 전면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채 계산되지 않은 스무 개의 공연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의 층위가 흥미롭다. 그리하여 이것은 더욱 축제로 다가온다. 스무 개의 극단이 조금 거칠고 솔직하게 모여 있고, 그럼으로 비로소 ‘모여 있다’라는 느낌, ‘우리’가 ‘여기, 이곳’에 ‘모여 있다’라는 느낌을 실물로 전달하는 힘을 지닌 축제.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굳이 이 공연의 묶음을 축제라고 명명하고 싶다. 이 공연 전체에 대한 리뷰는 축제가 끝나갈 즈음에 다시 쓸 것을 기약하며, 이 글에서는 세 번째 공연 팀에 속해 있던 구자혜 연출의 <일회 공연>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일회 공연>
일시 : 7/20~7/24, 선돌극장
관극일시 : 7/21, 선돌극장
연출 : 구자혜
작가 : 고연옥, 김민정, 백하룡, 이리, 전소영, 오세혁, 정소정, 구자혜, 윤성호, 미하엘 뮐러
출연 : 이리, 장윤실, 박경구, 전박찬, 최순진, 김석기

공연화된 대본의 조각들 :
2006년   고연옥 작 <칼디의 열매>
2007년   김민정 작 <검은 입들의 집>
2013년   구자혜 작 <침입>
    년    미하엘 뮐러 작
2012년   윤성호 작 <미인> 그리고 <미인> 중 공연되지 않은 <누수공사를 기다리며>
2012년   이리 작 <배우L의 독백 - 훈제란과 자전거 도둑에 대하여>
2012년   전소영 작 <오늘의 날씨>
2010년   정소정 작 <뿔>
2001년   백하룡 작 <행복이 가득한 집>
2008년   윤성호 작 <당신에게>
흥얼거림 : 미하엘 뮐러 중 마지막 페이지 노래 부분 (미하엘 뮐러 부름)


#
  <일회공연>에서는 발표는 되었으나 무대 위에 상연되지 못한, “태어났으나 태어나지 못한 문장들”을 모아서 무대 위 장면으로, 혹은 무대 위 장면이 되어 가는 과정으로, 그 미완의 생명들을 소생시킨다. 고연옥, 윤성호, 전소영, 정소정, 백하룡, 이리 작가 등의 작품 가운데 무대 위에 오르지 못했던 작품의 파편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무대 위에 꺼내어 놓는다. 시작부터 날카롭게 집중력을 모으게 했던 것은 바로 작품이 꺼내어 놓은 이 시선 자체가 지닌 힘 때문이었다. 탄생했던 것의 죽음, 죽은 것의 소생, 탄생과 죽음과 소생 그 사이를 둘러싼 것들. 혹은 탄생과 죽음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조차 없는 생략과 복원, 미완과 완성, 그것들의 사이를 오고 갈 시선의 힘이 왠지 몹시 반가웠다. 이 공연을 보는 동안 무언가를 애써 에둘러 갈 수 있지 않을까, 그 시선의 힘으로 어떤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작품이 취하는 생략과 복원, 미완과 완성 사이를 떠도는 시선은 채 무대 위에 오르지 못한 무대의 잠재 혹은 무대의 잔재들을 손으로 직접 만져 보게 하는 쾌감을 자극한다. 그것은 관객의 입장에서 결코 구경할 수 없었던 분장실 속 물건들을 손으로 직접 만져보는 불가능하고도 은밀한 쾌감 같은 것이다.


# 윤성호 작 <미인>의 한 장면
  한창 사랑을 하고 있는 듯한, 그러나 (까닭모를) 이별을 앞두기라도 한 듯한 연인이 등장한다. (사실 이 이별은 군 입대를 앞두고 하는 이별이지만, 군 입대라는 상황에 대한 서술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데다가 더욱이 이 장면은 문맥이 생략된 채로 보여지는 만큼 이 둘의 이별은 까닭 모르게 다가온다.) 그렇게 문맥을 알 수 없는 두 명의 연인이 등장한다. 이 둘은 그들이 처음 호감을 가지게 되었던 순간을 회상하고 재연한다. 모든 연인에게는 처음이 있다. 그것은 돌이켜 보고 난 후에야 아는 것이지만. 모든 연인에게는 첫 순간과 마지막 순간이 있다. 그것은 명백한 장면으로 존재한다. 그 장면으로 인해 그들이 보낸 한 시절은 마치 명백한 사실로서 존재한 듯 느껴지기도 한다.
  장면과 기억, 기억과 또 다른 기억, 사실, 사실과 기억된 사실, 망각. 그들은 첫 순간을 복원해내며 이 단어의 사이와 사이를 떠돈다. 이 둘은 그토록 선명했(으리라 믿었)던 첫 순간을 복원하려 들지만, 그들이 서 있는 관계의 문맥을 알 수 없는 관객으로서는 그 첫 순간이 한없이 불투명하다. 이것은 어쩌면 모든 ‘순간’에 대한 정의가 아닐까. 그들이 서 있는 관계의 문맥을 안다한들, 아니 그것이 설령 우리 스스로의 사건이라 한들, 우리는 어느 순간 순간들의 행방을 투명하게 알 수 있을까.
  이 작품이 말하려 하는 생략, 어느 소소한 망각, 그래서 알려지지 않은 죽음들과 그것들을 소생시키려 하는 의지와 같은 것이 작품의 초반을 여는 이 장면에서 가늘고도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이 장면을 둘러싼 모든 까닭모를 미완성과 그 미완성 한 가운데 서 있는 어느 한 순간의 미완성이 한데 전해진다. 그럼에도 이 장면 안에서는 어떤 맺혀진 순간의 힘이 강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것, 존재했던 것, 기억을 초월한 기억. 어쩌면 이 공연은 생략된 문장들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 사라졌으나 존재하는 것, 흔들리면서도 고요한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 이어지는 윤성호 작 <미인> 가운데 “누수 공사를 기다리며”
  반복되는 말들, 정착하지 못하고 떠다니는 말들, 점증되는 짜증과 불신, 그럼에도 또 다시 반복되는 헛소리들, 계속해서 지연되는 시간, 끝내 마무리되지 않는 그 상태. 이 장면이 시작될 때 배우들이 지면 속의 카툰처럼 벽면에 붙어 서 있다가 차츰 연극 속의 인물로서 호흡을 찾아가며 무대 위로 서는 동작이 흥미로웠다. 텍스트에서 연극으로, 그 테두리를 넘는 행위를 보여주는 움직임. 죽어 있던 것의 호흡, 생략된 것의 복원. 그리고 바짝 무대 앞 선까지 나온 이들이 한 줄로 정렬하여 반복되는 대사를 읊고 그 대사들의 반복은 시간과 정서의 점증을 빚어내는데, 이 장면에서 만들어내는 에너지의 방식 또한 흥미로웠다. 그토록 정지된 화면 속 인물들처럼 서 있으면서도 정서와 시간의 부피를 증폭시켜내는 힘이란! 객석을 향해 일렬로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들은 지극히 제시적이면서도, 폭발적이다. 이것은 마치 소리 없는 텍스트가 빚어내는 감정과 시간의 증폭 같았다. 다시 말해 연극의 형식으로 제시되는 독서의 행위 같았다. 관객은 무대 위 장면을 마주하고 있으나, 이 장면이 만드는 효과는 독자가 텍스트를 마주할 때의 효과였기 때문이다. 독자가 텍스트를 묵독할 때 텍스트 속의 기호는 낱낱한 문자들일 뿐이나, 독자가 그 기호의 결 사이 사이에서 숨을 쉬며 기호라는 질료를 자신의 감정으로 증폭시키는 묵독의 과정, 그 내면의 행위를 무대 위로 뽑아 표현한 듯한.
  이 대목 즘에서 생각했다. 이 연극 왜 이렇게 재미있지? 그 이유는 (그 숱한 메타 연극들이 저지르고 마는 식상한 화법들처럼) 나 이렇게 논다, 하고 자기가 얼마나, 어떻게, 무엇을 하며 놀고 있는지를 제시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연극 자체가 텍스트와 노닐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고 다양하게. 반복되고 늘어지고 지연되고 인내하는 언어의 힘으로 장면의 운동을 만들고, 그 운동 안에서 다시 언어는 지루하고도 의뭉스럽게 몸을 비벼대고 있다. 텍스트가 연극 안에서 놀고, 그 놀이 안에서 연극은 장면이 만들어낼 수 있는 능청스러운 몸짓을 보여준다.


# 이리 작 <배우 L의 독백>
  정말 잘 하고 싶어하‘는데’, 정말 잘 해 보려 했‘는데’, 갑작스럽게 (혹은 별 뜻 없이) 파토가 나버린 일처럼. 이를테면 다이어트를 열심히 해서 공연 때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무대 위에 서자 했‘는데’, 갑작스럽게 내일 포스터 촬영을 한다고 하고. 그래서 다이어트를 하루라도 해 보려고 훈제란을 샀‘는데’, 그 훈제란을 갑작스럽게 혹은 별 뜻 없이 혹은 너무 쉽게 바닥에 떨어뜨려버린 일처럼.
  세상에 정말 잘 나오려 했‘는데’, 그렇게 잘 나와서 잘 살려 했‘는데’........... 나오자마자 의미를 상실해버린, 혹은 의미를 박탈당해버린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언어. 그래서 ‘그냥’ (별 각인 없이) 죽어버린 역을 맡은 배우의 목소리로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곧 연극 자체가 되게 하는 연출의 방향이 흥미롭다.
  이 공연의 전체적인 할 말을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고 싶은 말은, 그 스토리텔링을 너무 ‘잘’했다는 것이다. 스토리텔러가 이 공연 전체의 공기를 오롯이 자기의 이야기 속에 실어내었다. 이 연극은 이런 연극입네, 특히나 이 연극은 이런 ‘메타’ 연극입네, 하면서 연출자나 배우가 직접 나서서 서사를 풀어 놓는 그 숱한 연극 놀이들을 만나 왔지만, 이 작품만의 표현 방식은 특별했다. 지극히 재미없을 수도, 복잡하기만 할 수도 있었던 첩첩 쌓인 메타 서사를 특별하지 않게 풀어내면서도 귀에 유유히 전달되게 하는, 자연스러움과 집중력. 아 좋은 스토리텔러의 힘이란!
  이 장면의 연기를 한 배우가 사실은 이 장면의 언어들을 만든 작가(이리) 본인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고 난 후, 이 장면에서 만들어 낸 ‘메타의 메타의 메타 속 이야기’는 ‘작가의 작가의 작가 속 작가’로 다가왔다. 우리는 이 공연조차도 관객의 입장에서 관객에게 드러나지 못했을 법한 것들이 구태여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인식을 하면서 보고 있지만, 이 모든 사라질 뻔한 것들의 운명은 어떤 글을 세우고 부수고의 연속선 안에서 때로는 살아남았고, 때로는 사라졌을 어느 창작의 형체를 둘러싼 것들이다. 창작의 입장에서 창작이란 이토록 불명확한 과정임에도, 수용자에게 창작은 마치 그것이 명확한 테두리를 지닌 무언가로 여겨진다. 하여 미완된 작품의 생략을 복원해내고, 완성된 작품의 허물을 허물어뜨리는 이 공연의 행위는 이토록 불완전한 창작자와 이토록 명백한(듯 보이는) 수용자 사이의 시선과 시차를 희미한 발짓으로 거스르고, 에둘러가는 데에 있다. 이 공연의 엔딩도 (윤성호 작 <당신에게>의 부분) 이러한 작가의 희미한 정체성에 화두를 실고 있다.

# 백하룡 작 <행복이 가득한 집>
  곧고 차가운 벽. 그 얇고도 단단한 벽이 너무도 잘 보인다. 서로 자기의 편에서 단 한 발도 저 편으로 섞이려 들지 않는. 아무리 그 방에서 괴로워하고 꿈을 꾸고 소통을 갈망해도 현실은 그 얇고도 단단한 벽이다. 그 차가움과 냉담함과 단절이 너무도 안정적이다. 빗금으로 그어진 조명 분리선. 그 선에 대한 인식 하나로 표현된 일련의 움직임들. 단절된 소통을 다급한 분노로 표현해내는 움직임과 다시 그 방 안으로 들어가 무언가(소통 같은 것)를 습기 차게 갈망하면서도 몸으로는 다시 단절을 인정하고 감내하는 자포. 그것의 반복이 너무도 안정적이고 차갑다. 여고생을 상처받은 사슴 같은 남자 배우가 연기한 것도 이 장면에서 전해지는 그 철저한 단절, 그 꿰뚫을 수 없는 냉기를 표현하고 있어서 좋았다. 가느다란 빗금 조명등과 가늘게 삽입된 crack 사운드. 단 두 가지의 질료만 있었을 뿐이다. 하나의 장면일 뿐인데, 이 파편의 유희에서 작품의 질긴 공기를 맛볼 수 있게 하는 건. 이토록 파편의 시가 해 낼 수 있는 것을 미완의 연극으로 그려내는 건.


#
  발표되었으나 상연되지 못한, 상연되었으나 생략된 장면과 언어들을 ‘일회 공연’으로 올려 낸 이 작품. 이 작품의 소개를 받았을 때에는 그 생략된 것들에 생명성을 부여하는 연극이려니 했다. 그런데 연극을 보는 동안 내내 조금 특별했다. 그 이유는 이 연극이 자꾸만 빚어내는 어떤 사이를 떠돌고 있는 힘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생략이 아닌 생략이 되기까지의 것, 그래서 또한 부활이 아닌 그것이 되살아나기까지의 것. 우리의 인생처럼 이 연극은 순간이 아닌 순간과 순간 사이를 떠돌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작품 속 장면들은 오롯이 대본과 유희하고 있다. 대본을 연극으로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라 연극 자체가 대본과 함께 놀고 있다. 그 대화가 즐겁다. 대본과 연극 사이의 유희의 대화가. 그래서 두텁고, 새롭고, 줄기차다. 기대할 수 있는 연출과 배우와 작가들을 만나게 되어 오랜만에 즐겁다. ㉦

2014년 5월 17일 토요일

<엔론>

이예은의 푼크툼 너머에

사진출처: http://fb.com/doosanartcenter

#

  (필자가 본) 이수인 연출의 전작들 <오이디푸스왕>, <노부인의 방문>, <왕과 나>에서 일관되게 표현된 소거법이 이 작품에서도 당당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텍스트랄지, 소재랄지, 공연 ‘이전’에 존재하는 질료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언가의 재료들이 당당하게 ‘소거된’ 채로 공연을 대면하고 있는 느낌. 나는 이것을 이수인 연출 특유의 소거법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도 일관된 느낌의 소거법이 무대 연출로 전면화되어 있다.

  그리고 장면 중간 중간에 난데없는, 사실 자주 불필요하게도 느껴지는 이질적 언어들의 삽입법. “ㅆㅂ”, “ㅆ” 같은 욕이랄지 난데없이 쌀랑한 바람 한 줄기 지나갈 것 같은 엉뚱한 유머나 엉뚱한 리액션의 삽입. 특히 이번 작품에서 의도적으로 삽입된 손발이 오그라드는 ‘헐리우드’ 액션. 이것 역시 앞서 말한 전작들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느껴 온 이수인 연출의 스타일이라고 느끼고 있다. 마치 체홉의 언어 가운데 “차가 식었네요.”와 같은 대사가 주는 이상하고도 쓸쓸한 효과. 그 어떤 짤막한 생경한 틈새를 굳이 삽입하여 장면의 전체 형세를 순간 정지 화면으로(pause) 만들어 놓는 것.

  기존에 느껴 온 이수인 연출의 이 두 가지 연출법이 이 작품에서도 지속적으로 드러나 있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이 작품에서의 소거법은 잘 꾸며진 배경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었고, 난데없는 이질감의 삽입 역시 철저하고 계산적이었다. 그래서 그가 구현해내는 연출법들이 더욱 공들인 성찬이 되어 차려져 있었다.    

# 음악적인 리듬으로 배열된 장면들의 미학 : 비트처럼 떠도는 욕망들의 미술

  작품 초반부터 주식시장의 생리와 용어들이 발설되는 이 연극은 분명 관객들을 몰입할 수 없게 하는 생경한 요소들을 가득 안고 있다. 그러나 주식 시장의 생리를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인간들의 욕망을 표현해내는 능력, 텍스트를 넘어선 미학적인 표현 능력이 결코 한 순간도 이 작품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장면마다 시종 음악과 운동이 겸비되는 비트가 모티프를 이룬다. 무릎을 까딱 까딱거리는 배우들의 몸, 인물들 사이에 까딱 까딱 분절되는 대사들, 복잡하게 깜빡 깜빡거리는 주식 시장의 조명등, 금방 나타났다가 빠르게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장면들의 명멸성 전환. 무대 위의 모든 율동들이 명멸하는 비트의 미감을 입어 다양한 장면들의 성찬을 이루어낸다. 특히 주식시장을 묘사하는 코러스의 막간 장면들은 비트감 넘치는 단체 쇼트의 효과를 준다. 욕설과 긴장과 욕망이 비협화음처럼 부딪치고 화음처럼 섞이며 떠돈다.

 무대 위의 모든 명멸은 비트처럼 떠도는 욕망들의 미술로 다가온다. 다시 말해 자본 논리 안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욕망의 명멸로 다가온다. 이 연극 속의 공간은 주식 시장의 공간과 아울러 자본 시장의 공간성, 그리고 우리 욕망의 공간성마저 확장적으로 표면화시키고 있다. 미술적인 언어, 음악적인 언어가 매우 심플한 지대에서 어려운 경제 용어들을 넘어선, 그리고 복잡한 텍스트를 넘어선 간단한 것들을 발설한다.

# 우리 욕망 속의 해부도 : 텅 빈 상자 속의 텅 빈 상자 속의 텅 빈...

  이 작품은 비단 엔론을 둘러싼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엔론이 부여한 생존의 논리, 그것은 자본주의 논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욕망의 논리를 닮았다. 다시 말해 엔론이 만들어 놓은 그 ‘텅 빈’ 상자는 자본주의 논리 안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욕망꼴이다. 우리는 제각기 실체는 텅 비어 있는 상태로‘라도’ 어떤 한 상자를 소유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것이 텅 빈 상자인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다시 그 안의 또 다른 텅 빈 상자를 소유하려 한다.

  우리 욕망의 종착점, 혹은 실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엔론이 만들어 놓은 아주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연극에서는 이 아주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을 깜빡 깜빡 명멸하는 빨간 등으로 연출된다. 이 작은 빨간 등의 명멸이 무대 전체에 명멸하는 조명 효과를 주면서 언제라도 이 모든 우주를 폭파시킬 수 있는 위태로운 핵처럼 표현된다.

  이 작품은 엔론이 만들어 놓은 욕망체이자 사실은 가시화되지 않았을 뿐, 혹은 이토록 큰 덩어리가 되지 않았을 뿐 우리 모두가 가담하고 있는 이 욕망체의 실제를 무대화한다. 여러 개의 텅 빈 상자들과 아주 작은 크기의 빨간 등, 그리고 빨간 등에 투사된 이 무대 전체의 명멸감, 그리고 이 모든 욕망체가 붕괴될 위기 마다 초현실적으로 등장하는 세 마리의 쥬라기 공룡들, 공룡들이 뱉어내는 기분 나쁜 (그것마저 비트감이 탁월했던) 소음들로.

  공룡들이 뱉어내는 소음은 폭탄이 터지기 직전의 초침 소리를 닮았다. 무대에서 비트감으로 표현된 사운드 가운데 하나이다. 엔론의 사장 제프리는 공룡의 소리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의 초침 소리인지 모를 것에 시달린다. 그가 보안 요원을 불러 바닥에 대고 소리를 들어보라고 하는데, 보안 요원이 그건 당신의 손목시계 초침 소리가 아니냐고 하는 장면이 있다. 이 대목 즈음이다. 이 작품에 희미하게 <맥베스>의 모티프가 흘러가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건. 욕망이 광기가 되어버린 한 사내. 그렇다면 제프리를 추동하여 텅 빈 상자를 가지게 한 앤디는 레이디 맥베스? 더 거슬러 올라가 제프리가 사장의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모함했던 클로디아는 뱅코우를 의식한 인물인가.

  맥베스의 입김이 이 작품 안에 서려 있는 것을 감지하게는 하였으나, 그것은 지극히 희미한 것이었기에 오히려 이 작품을 빛나게 했다. 결코 맥베스를 맥베스‘적’인 모티프로 활용하지 않고, 맥베스의 입김을 희미한 망령처럼 미약하게 서려놓게 한 것. 그래서 돈, 혹은 돈과 비슷한 무언가에 착종된 현재 우리 모두의 욕망체가 맥베스가 품었던 욕망과 어렴풋이 연결되게 하면서 조금 더 욕망이라는 근원적인 실체가 의식된다.

  예고했던 대로 텅 비어 있던 거대한 상자는 결국 아주 작은 빨간 등에 의해 폭파되어버리고 만다. 얼마 전 커다란, 텅 빈 상자가 아주 작은 등의 폭파로 붕괴되어버리는 사태를 경험한 우리 모두는 이 작품 속의 논리를 단지 미국 시장에서 벌어진 사태라고 받아들일 수만은 없다.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모든 논리는 지금 우리의 현재를 장악하는 논리들 그것 자체의 모습이다. 의도적으로 한 장면에서 엔론의 사장을 “선장”이라 지칭하고 “바지나 입으시죠”라는 대사를 삽입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관객은 이 연극을 보는 내내 그 누구도 아닌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며 보았을 것이다. ㉦

2014년 4월 13일 일요일

극단 뛰다 <바후차라마타>

극단 '뛰다'의 <바후차라마타>
연출 : 배요섭
공연장 : 남산드라마센터
관극 : 4/12 (토) 7시
by 이예은



  '뛰다'의 공연은 단지 하나의 작품으로 다가오지 않고 순례 중에 있는 여행의 한 부분으로 다가온다. 공연이 이루어지는 시간 동안 나는 잠깐이나마 그 여행에 동행하고, 공연이 끝나면 여전히 이들은 어딘가에서 그 여행을 멈추지 않아주기를 하는 마음으로 박수를 보낸다. 그래서 관객으로서 '뛰다'의 공연을 기다리고, 기대하는 마음은 그 어떤 작품적인 것을 조금 넘어서는, 작품을 대하는 자세, 그리고 작품을 보듬는 마음에 대한 것이 더욱 크다. 이번에는 또 무엇을 느끼게 할까, 또 무엇을 반성하게 할까. 연극이란 것이 이런 것일 수 있겠구나, 연극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일 수 있겠구나. 그리고 연극이 이런 것이라면 참 해 볼만한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용기를 가지게 해 주는...

  사실 '뛰다'는 내가 연극과 첫사랑에 빠질 무렵, 연극이라는 아름다움을 나의 감각 속에 깊숙이 각인시켜 준 극단이다. 하륵, 하륵 하면서 음악 같기도 춤 같기도 한 그 하나의 단어로 결국 세상의 모든 언어를 뛰어넘어버렸던 <하륵 이야기>는, 분명 작은 무대이면서 하나의 큰 우주였다. 단 하나의 단어로도 세계를 뛰어넘을 수 있음을 말하는 서사의 상상력이 아름다웠고, 동시에 그 상상력의 공간을 채워 넣는 정성 어린 소리들과 율동들의 세밀함이 빛났다. 어떠한 세계의 초월을 거뜬하게 이루어내고 있으면서도, 그 거뜬함을 지극히 정성 어린 습기들로 일구고 있는 농부 같은 견실함이 아름다웠다. 이어지는 <커다란 책 속 이야기가 고슬고슬>, <또채비놀음놀이>를 기다리고 만나면서 그 어느 어린이 관객보다도 커다랗게 기뻐할 준비를 하며 무대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들여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항상 다시 기다렸다. 그 어떤 새로운 작품을 무대 위에 올려줄지. 마치 팀 버튼을 처음 만났을 때, 조금 커서는 코엔 형제와 미셸 공드리를 처음 만났을 때, 이 세상의 다양한 드라마들을 최대한 많이 이 감독들의 연출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처럼, '뛰다'를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러했다. 연극으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을 최대한 많이 이 극단의 작업으로 만나고 싶었다. 이러한 기대가 든 것은 연극 집단으로서는 처음이었다. 그만큼 '뛰다'가 표현하고 드러내려 하는 것은 단지 무언가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진심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말로 할 수는 없으나, 이들이 품고 있는 그것. 다 말로 할 수도, 다 말해질 수도 없는 정신과 정성. 그것이 장면 장면마다에 결코 거짓말 하는 법 없이 묻어 있어서 좋았고, 그 진심은 배요섭 연출이 이 공연 프로그램북에 쓴 말처럼 “어떤 화려한 미장센이나 감동적인 이야기”로는 환원될 수 없는 무언가임을 안다.

  이 공연에서도 '뛰다'는 그 어떠한 화두 혹은 장치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그 어떤 주제나 형식으로 따지자면, 이 공연에서 다루고 있는 성 정체성, 성 전환 수술, 트랜스젠더, 동성애 등의 화두를 발설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새롭지도, 위험하지도 않은 일인지 모른다. 이 공연은 이 화두를 발설하거나 질문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다. 그렇다고 이 화두와 관련된 그 어떤 아픔을 이입시키거나 이해시키거나 강요하는 것에 있지도 않다. 그러면 이 화두를 둘러싼 무엇에, 어디에 이 공연은 존재할까?

  작품 초반부에 공연은 무던히도 관객과 배우, 그리고 배우와 캐릭터 사이를 소통케 하려고 애쓰는 듯 보였다. 그럼으로써 현실과 서사, 사실과 사실 가능성, 그리하여 나와 타자 그 ‘사이’에 대해서 많은 것을 호소하고 표현하고 싶어 했다. 배우들은 저마다 어떠한 캐릭터를 맡아서 연기를 하고 있었으나 그 연기의 대부분은 스토리텔링이었기에 허구와 현실 사이를 호소하였고, 장면의 중간 중간에 연출이 “연출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닌 연출로서” 등장하여 무대 위에 허구가 ‘아닌’ 것들을 개입시키며 관객에게 끊임없이 다가오고 싶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 초반부의 이 모든 호소들은 표현되고, 보여지고, 질문되고, 그리하여 호소되는 것을 벗어나지 못했다.


  공연이 중반부 즈음에 달했을 때 연출이 관객에게 제안을 하나 한다. 이 무대 위에서 한 번 객석을 바라보면 어떻겠느냐고. 마치 힘겹게, 힘겹게 이야기를 끌고 나가다가 ‘이 모든 이야기를 잠시 내려놓고 술이나 한 잔 하자’와 같은 태도였다. 초반부의 모든 장면들이 어느 경계선 위를 아슬아슬 걸으며 채 율동을 터뜨리지 못한 터라 그 제안에 흔쾌히 자리를 일어나 무대 위로 걸어갔다.

  관객들이 자리를 옮겨 앉았을 때 연출은 이 공연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결국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의 문제에 봉착했다는 고백을 한다. 그것은 그제까지 이 공연을 보던 관객들이 객석에서 느꼈던 고민과 같은 것이었다. 공연이 시작되고 연출이 몇 번 관객에게 말을 걸어 왔지만, 그의 말이 비로소 처음으로 몸으로 들어 왔다. 이어서 그는 그 과정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기이한 체험을 하기에 이르렀다는 말을 한다. 이 공연의 순간 역시 그러했다. 관객의 몸이 무대의 몸속으로 들어 온 그 순간. 이토록 간단한 몸의 이동이 그토록 어렵게 느껴졌던 정신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공연의 창작 과정에서의 경험들이 이 공연을 보는 관극 과정 안에서 다시 고스란히 체험되고 있었다.

  무대 위로 관객을 초청한 것은 저 너머의 세계를 한 번 넘어와 주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무대 위에서 바라본 객석, 그리고 무대 위에서 바라 본 무대, 그리고 무대 위에서 바라본 이 공연은 이 공연이 그토록 넘어보고 싶었던 그 너머의 세계였다. 관객이 무대의 몸 속으로 들어오면서 공연도 실제와 합치되고, 이 모든 재료 안에서 글래디가 고백을 한다. 자신이 성을 바꾸게 된 역사를. 그 고백은 실제이다. 우리는 함께였다. 무대 안에서, 상처 안에서. 너무도 간단한 몸의 움직임이 그토록 어렵게 느껴졌던 정신의 움직임을 가능케 했다. 공연 초반부에 그토록 어렵게 호소했으나, 그럼에도 체화되지 못했던 이 공연 속의 화두들. 그 화두들이 체험이 되어, 아픔이 되어, 상상 너머의 것이 되어 이 공간 속에 낭자하다. 공연 초반부에 쌓여 온 것들은 어쩌면 이 순간의 전환점을 만들어 내기 위한 축적의 노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체험이라는 것, 예를 들면 간단히 이곳에서 저곳으로 몸을 이동하는 행위. 그 행위는 무대와 객석이 분리된 선 위에서는 그 어떠한 표현이나 발설이나 그림으로도 풀어내지 못하는 영역의 공감을 너무도 간단하게 끌어낸다. 세상의 모든 화두나 담론들 그 바닥에 서려 있는 아주 간단한 진리, 예를 들면 우리 모두는 사랑을 하고 싶고, 우리 모두는 상처 받으면 아프다 라는 사실 같은 것. 이토록 간단한 진리란 어쩌면 매우 간단한 체험만으로 체득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예를 들면 객석에서 무대로 건너오라고 한 이 공연의 제안처럼. 단, 체험은 그 간단함 속에 오로지 한 가지의 전제를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그 어떠한 거짓도 없는 진심일 것. 그렇기에 체험이란 그 어떠한 표현이나 주제, 방법론을 뛰어넘는 것이다. 진리란 사실 매우 간단해서 그 어떠한 강요도, 유혹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진리란 매우 간단하고 보편적이어서 그 어떠한 화두들에도 적용이 된다. 이 공연에서 성 정체성이라는 화두를 걷어내면, 이 공연의 자세는 고스란히 우리 모두의 어그러진 삶 속에 적용된다.

  참 오랜만에, 연극을 보았다기보다 연극을 체험하고 온 기분이다. 나는 정말로 오랜만에 극장 안에서 크게 숨을 쉬었다. 공연이 다 끝나고 배우들과 연출이 이 날의 공연이 어떠했는지 스스로 느낀 점을 이야기한다. 보통의 공연 같으면 너무도 당연히 관객들이 다 빠져나간 후에야 노트를 들고 연출을 중심으로 모여 앉아 이 날의 공연 모니터링을 하는데, 그 모습을 관객 앞에서 자연스럽게 꺼내는 태도가 예쁘다. 이 공연은 그 안에 담고 있는 정신이 공연으로 만들어지는 과정, 그리고 그 안에 담고 있는 정신 안에서 벌어진 정신적인 것들을 오롯이 관객 앞에 꺼내고 싶어 한다. 그 순수와 그 자연스러움이 관객에게까지 유출될 수 있는 힘이란, 연출이 공연에 개입을 해서도 아니고, 모든 배우들이 스토리텔링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건네서도, 관객을 무대 위로 초대해서도 아니다.

  이 공연이 해 낸 몫은 그 어떠한 방법이나 내용적인 카테고리가 아니다. 그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힘, 체험의 힘을 이루어내었다는 점에 고마움을 느낀다. 연극에서 체험을 끌어내는 일은 왜 이리 어려운 일일까? 보는 입장에서는 늘 기다리고, 만드는 입장에서는 늘 고민한다. 관객과 가장 몸이 맞닿아 있으면서도 단지 그 몸의 열기만으로는 결코 이끌어낼 수 없는 그것. 오히려 우리의 몸이 이토록 가까이 있으면서도 얼마나 우리는 먼 곳에 있는가를 느끼며 극장 문을 나설 때가 대부분이다. 체험을 만나는 일은 마치 진짜 사람을 만나고 오는 일처럼 어렵고, 또 불가해하다. 우리가 ‘함께’라는 것의 체험. 그것은 극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순간, 극장 밖의 세상으로도 흘러들어간다.

  <노래하듯이 햄릿>, <앨리스 프로젝트>, <내가 그랬다고 너는 말하지 못한다>를 보면서 '뛰다'의 새로운 모습들에 새로운 기대를 가졌었는데, 오늘의 이 공연은 '뛰다'에게 또 다시 새로운 기대를 가지게 만든다. 체험의 에너지와 진실의 깊이와 무게감의 질감이 전작들과 조금 다르다. 더디게, 부디 오래 오래 성장하고, 건강하고, 계속 살아나가길. ㉦

2014년 3월 3일 월요일

<셜리에 관한 모든 것> - 시(詩) 쓰기의 어려움에 대하여

by 이예은

+

  호퍼의 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말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호퍼의 회화가 어떠한 느낌이며, 그 느낌이 왜 좋은지. 그것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마치 한 편의 ‘시(詩)’를 설명하라 했을 때 결코 그 ‘시’가 다른 언어로 설명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작년 뉴욕 여행을 하는 기간 동안 휘트니 뮤지엄에서 호퍼의 작품들을 직접 눈으로 만져 보고 온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 그 많은 습작들에서 완성작으로 발전되는 호퍼의 빛, 어둠, 색, 구도, 정서의 추이를 보는 것은 마치 한 편의 연극이 완성되는 과정을 보는 것 같다. 실제로 호퍼의 회화 연출법은 많은 부분이 연극 작업의 연출법과 닮아 있다. 인물들의 블로킹을 구성해 내는 섬세한 표현력하며, 치밀하게 계산된 구도와 명암으로 프레임의 정서와 상황을 창조해내는 능력은 아무런 대사 없이도 표현이 가능한 연극의 장면 연출법 같다. 호퍼의 회화는 운동성이 없어도 이미 연극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짧은 트레일러에서 호퍼식의 구도가 영상 프레임 안에서 정말로 이미지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보고 어떻게 이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있겠나.


트레일러, 혹은 메이킹 필름 


+ 작년 그의 작품들 앞에 서서 썼던 메모들


• Gas, 1940

빛이 안 닿은 곳이 없다. 서 있는 남자가 마치 조각상 같다. 그만큼 빛의 명암이 입체적으로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다. 빛의 과장된 표현이 인물을 실물처럼 느끼게 한다. 이 모든, 곳곳마다에 닿은 빛들이 경건하고, 엄숙하게 느껴져서 그림 전체가 숭고한 조각상처럼 우뚝 서 있는 느낌이다. ‘빛’이 ‘형’의 숭고한 부분(순간)을 빚어낼 수 있는 매체라는 것을 알게 한다. 


• Nighthawks, 1942

빛과 어둠의 영역의 구획이 마치 몬드리안의 도안처럼 정교하게 디자인되어 있다. 가장 ‘비’인간적인 부분, 가장 할 말 없는 부분, 가장 불필요한 부분이 가장 환하게 강조되어 있다. 종업원의 신산한 표정-> 신사의 ‘또’다른 고단한 표정 -> 여자의 먼 곳을 응시하는 표정으로 관객의 시선의 동선을 이끈다. 이 세 명은 마치 한 공간에서 대화를 해야 마땅한 듯한 블로킹을 이루고 있으나 저마다 홀로 있다. 이 세 명의 분열된 정서가 축적되어 있다가 마지막으로 시선이 맺히는 곳은 왼편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이다. 이들의 분열된 정서는 점차 ‘축적’되어 왼편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의 (하필이면) ‘뒷’모습에 맺히는 것이다. 각자 분열되고 따로 노는 표정과 정서들이 이제, 관객을 철저히 외면하기로 한 어느 외딴 남자의 ‘뒷’모습에 맺혀 그 분열감의 정점을 이룬다. 결국 이 그림에서 가장 강조된 것은 가장 할 말 없어 보이는, 가장 흥미 없어 보이는, 가장 이야기(서사) 없어 보이는 벽면이다. 모여는 있으나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세 명의 무리와 그들과 동떨어진 한 명의 남자는 저마다 상대에게 할 말이 없어 보인다. 이들의 분열감의 고조는 가장 할 말 없는 곳이 가장 highlight된 벽면의 ‘공백감의 강조’와 어우러지면서 결국 ‘다다를 곳 없는’ 곳을 향해 있는 느낌이다. 다다를 곳 없는 곳을 향해 농밀하게 축적된 외로운 에너지들의 모임을 그린 것만 같다.

• Manhattan Bridge Loop, 1928

호퍼는 지평선 구도를 좋아한다. 끝나지 않는, 그래서 그것의 한 부분을 표현할 뿐이라는 듯한 구도의 그것. 그 끝나지 않는 수평선 속에서 ‘작게’ 스쳐 지나가는(머물다 가는) 인물을 함께 그린다. 공간 안에 함몰된 인간 생존 조건의 외로움을. 


• New York Movie, 1939

영화관은 암실인데 암실에서도 잔존하는 빛들에 집중하는 아이러니. 가장 있어서는 안 될 빛들-영화관 내부의 몰입도를 방해하는 빛, 단일 광원의 빛과 상충하는 여백의 빛들이 강조된다. 어셔 직원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빛이 가장 강조가 되고, 그 빛은 여자의 머리 위에서 매우 환하게 빛난다. (마치 이 빛은 렘브란트의 빛처럼 어둠 속을 철저히 밝힌다.) 그 다음으로 중요하지 않은 객석 보조등의 빛이 강조가 되고, 그 빛을 따라 ‘혼자’서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의 머리가 반사된다. 혼자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의 얼굴 앵글들 또한 세심하다. 특히 이 사람들의 얼굴 앵글과 어셔의 얼굴 앵글이 서로 대조를 이룬다. 호퍼 속의 인물들은 그 누구도 서로를 마주보거나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이렇게 영화관이라는 공간 안에서 ‘여백’을 차지하는 빛이 가장 전면적으로 강조가 되고, 영화관이라는 군집된 인간들의 틈바구니에서 가장 ‘홀로’인 사람들이 강조가 되는 쓸쓸한 관찰력


• Room For Tourists, 1945

이방의 빛, 
여행의 순간. 
빛으로 할 말을 다 하는구나. 


+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



  호퍼의 회화를 영화화했다기보다는 호퍼의 회화에 ‘시’를 덧입힌 작업을 보는 것 같다. 마치 단편의 ‘시극’들이 모여 회화첩을 이루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회화에 서사를 덧대어 영화화하지 않고, 회화에 시를 덧대어 영화화한 것은 어쩌면 옳은 선택이었다. 회화와 시가 긴밀하게 공유하는 진공의 순간들, 시간과 시간 사이를 섬처럼 떠도는 공백의 순간들이 서사의 자리를 대신해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흐름의 지속보다는 정지된 순간들이 대부분이다. 정말로, 영화의 대부분은 ‘정지’되어 있다.
  이 영화가 호퍼를 ‘영화화’했다고 말하기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도 영화를 보고 난 기분이 안 들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영화의 대부분이 정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pause된 한 순간, 그 순간의 포착, 그 포착의 수직성, 수직의 초월성, 초월의 틈입. 사진과 회화에서 추구하는 대상의 표현‘력’을 최대한 놓치지 않고 영화라는 형태로 재창조하려 한 노력이 역력하다.

  그러면 이 영화에서 이룬 것은 무엇인가? 회화에서 구현해 놓은 수직적 초월의 순간을 굳이 ‘덜’ 완전한 순간으로 지연시킴으로 인해서 이 영화가 이룬 것은? 각색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결절점이, 원작의 생명력을 ‘재’창조해내는 것인데, 이 영화는 그 부분에서 어느 정도를 이루었는가를 질문한다. 원작인 회화에 내재된 호퍼‘적’ 시를 이 영화는 이 영화‘적’ 시로 과연 재창조해내었는가? 영화는 호퍼에서 연상되는 시가 아니라, 이 영화 자체의 시를 창조했어야 했다. 이 영화 자체만으로도 시여야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분명히 예상했던 종류의 쾌감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회화’가 단지 영상 이미지로 ‘운동’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설렘이 약동한다. 마치 매우 은밀한 것과 매우 능수능란한 것이 교합된 듯한 느낌. 이것은 마치 내가 좋아하는 ‘시’의 전문을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육화된 목소리로 들었을 때의 설렘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는 조금 이상한 부끄러움 같은 것이 있다. 시와 회화가 만들어내는 정서의 은밀한 작동은 음악이나 소설이나 연극과 같이 시간의 흐름을 토대로 하는 매체가 주는 것과는 조금 ‘다른’ 설렘이다. 그 단편적이고도 내면적인 소요. 그것은 ‘단지’ 그것이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그 내면적인 소요가 실제로 입 밖의 소란스러운 육성으로 터져 나오고 말 때에 우리는 이상한 쾌감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낀다. 마치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의 은밀한 이름이 물질로 체현된 것을 본 것만 같은 화끈거림이다.

  시를 소리내어 읽는 일, 회화를 영화로 풀어내는 일. 그것은 왜 ‘부끄러운’ 일일까? 십 이 년 동안 가보지 못했던 추억의 장소에 십 이 년 만에 찾아 가 ‘그것’으로 그리워하던 것이 정말로 ‘그것’으로 실재하고 있음을 맞닥뜨렸던 경험이 있다. ‘그것’의 실재는 기이한 반가움이면서 동시에 맹렬하고도 선정적인 폭력이었다. 그토록 향수하고 꿈꾸어 온 ‘그것’은 어쩌면 ‘그것’이 될 수 없는 것을 향한 그리움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문학을, 그래서 연극을, 그래서 예술을 갈망하는 만큼 ‘그것’을 이야기해 버려서는 안 된다는 희미하고도 긴 강박관념은 아직까지도 날 에워싸고 있다. ‘그것’을 말하는 순간 ‘그것’은 상처받기 때문이다. 대학교 국문학과에만 진학하면 문학도, 예술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부푼 열망만을 가지고 살아 온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그토록 열망하던 국문학과에 진학했는데, 그 누구도 문학‘과’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고, 이런 저런 방법으로 문학‘을’ 강간하는 법만 알려주더라. 하며 동기들과 소주잔을 붙들고 울던 때가 생각난다. 예술과 ‘첫’사랑하고, 제도에 ‘첫’상처를 받았던,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그 어린 시절의 진지함. 우리는 정말로 ‘그것’을 말하고 싶지 않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말하지 않으면서 말을 하는 ‘시 쓰기’는 그래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우주를 아우르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호퍼의 회화를 영화화한다는 그 매혹적인 기획은 좋았으나 그 기획이 꼭 넘고 가야만 했던 연출법, 영화의 방법으로 ‘호퍼라는 시’를 쓰는 작업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호퍼를 영화화함으로써 내면적 은밀함을 육화시키는 묘한 쾌감을 주었을지는 몰라도, 이 영화는 ‘그것’을 지켜내지 못했다. 사실 기획이 과하게 매혹적일 때에는 실제 작업이 그 기획을 못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단지 그것이 기획의 단계에 머물렀을 때에만 유효한 매력‘점’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기획의 콘셉트를 체화해내야만 하는 창작의 몸체는 우리의 몸과 같이 연약하고 유동적이다. 그래서 늘 기획 작업을 할 때에는 머리와 입술을 조심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꾸만 연역하려들지 말고 귀납해서 아래로부터 올리고, 올려서 기획을 하는 습관이 중요하다. 기획자는 연출자보다 더 연출자여야 하고, 무엇보다 상상력이 탁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야기가 너무 멀리 갔다. 시를 시로 남겨두어야 하는 것. 순간을 순간으로 남겨두어야 하는 것. 그것이 예술을 가능케 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또 무엇을 기대하고 호퍼를 영화로 보고 싶어 했을까. 이 영화의 연출력에 실망을 하면서도 호퍼의 잔상에 집중했던 그 시간은. 무언가 너머의 것을 창작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 어려움을 함께 알고 있기에 호퍼를 이미 영화로 만든 이 작업 앞에서 또 다른 ‘말’을 보태고 싶지는 않다. 시를 쓰는 이에게 시를 타박하는 말들을 덧붙여 시 ‘쓰기’의 작업을 망쳐버리고 싶지 않은 탓이다. ㉦

 

2014년 2월 18일 화요일

서른을 말하는 무게: <파니핑크>와 <출출한 여자>

by 이예은

+ 8년 후의 <파니핑크>,
‘서른’이라는 나이를 발설하는 것에 대한 오만함

  서른이 되기 몇 해 전, 내 인생에서 손에 꼽히는 보석 같은 영화를 만나 아직까지도 분명히 ‘좋은 영화’라고 각인되어 온 작품이 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 작품의 원제가 사실은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Keiner Liebt Mich, Nobody Loves Me)”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마치 친구의 뒤늦은 부음이라도 접한 것처럼 엉엉 울었던 기억이 있다. 도리스 되리 감독이 1994년도 발표한 <파니핑크>. 검은 드레스를 입고 검고 흰 해골모양의 액세서리로 온통 얼굴과 몸을 휘감은 파니가 ‘서른’에 대해서 논평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세상의 모든 죽음을 탐욕하는 것만 같이 온 몸을 뼈 무늬로 분장한 흑인 게이 친구 오르페오는 끊임없이 어느 누군가의 잠재적 타나토스를 자극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장례 수행에 참가하여 매일 매일 “육신은 흙이 될 것이다”를 읊으며 죽음을 연습하는 파니...


 영화는 온통 분주하게 누군가의, 혹은 무언가의 장례를 치르는 한 편의 장송곡 같다. 영화의 이곳저곳은 비주얼로, 사운드로 그 장송곡의 세부 리듬들을 구현하기에 바쁘다. 실제로 파니의 유일한 친구 오르페오가(그러나 처음부터 ‘실존’하는 인물 같지 않아서 그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파니의 끔찍한 고독함을 영화 내내 느끼게 했던) 달빛을 온 몸에 한껏 담아내며 ‘신화적’ 죽음을 맞이하고, 파니를 둘러싼 온 우주는 하얗게 흔들리면서 한 세계를 떠나보내고, 한 세계를 맞이하며 끝이 난다.

파니가 검은 상복을 입고 영화 내내 그토록 장송하고 싶어 했던 오르페오, 매일 밤 집에 있는 관 속에 묻혀 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은 채 그 안에 그대로 묻혀 있는 것만 같은 하나의 ‘이미지’로서의 파니, 그들은 어쩌면 ‘이십대’라는 은유된 세계 전체를 말하는지 모른다. 이 영화는 스물아홉까지의 거대한 한 세계를 보내고, 서른이라는 거대한 한 세계를 맞이하는 인생의 절기에 관한 신화적 상상력이라고 생각된다.

2014년 2월 13일 목요일

그럼에도, '인사이드' 르윈

by 이예은



  코엔 형제의 ‘최초의’ 음악 영화가 상영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궁금했던 것은 ‘음악이라는 소재가 어떻게 코엔 화되었을까?’였다. 음악이라는 감각적 달콤함도, 예술이라는 열정적 사명도 비껴갈 것이 분명한 ‘코엔 식’의 음악 영화의 전개가 궁금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영화는 지극히 코엔적이면서도, 기존의 코엔적인 것을 비껴가며 그들 나름의 ‘관용’을 베풀었다고 말하고 싶다. ‘음악 영화’라고 말을 하기에 이 영화에는 음악적 순간들이 지극히 빈약하다. 이 영화는 지극히 빈약한 음악적 순간들을 둘러싼, 그 나머지 것들의 팽배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의 제목이 ‘인’사이드 르윈이지만, 정작 영화의 대부분은 ‘아웃’사이드 르윈을 그리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이다.  

영화를 못보신 분을 위한 예고편: 

+ 사실은, ‘인사이드’가 아닌 ‘아웃사이드’ 르윈    


  클럽 공연 무대로 시작되는 오프닝 씬. 무대를 비추는 흔들리지 않는 노란 핀 조명은 건조하고도 안전하다. 안온한 이국성을 풍기는 작은 클럽의 무대. 한 곡의 노래를 긴 테이크로 잡는데, 사실 이 장면은 영화에서 ‘르윈’(오스카 아이삭)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노래를 하게 내버려두는 두 장면 가운데 한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