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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1일 일요일

셰익스피어 일러스트 소극장

임승태

희곡은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이름난 작품들도 막상 책을 펼치면 쉽게 읽을 수가 없다. 좋은 소설은 ‘단숨에 읽었다’,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라는 독자들의 반응을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희곡은 그렇지 않다. 나만 이런 경험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하도 명성 있는 작품이라 마냥 안 읽고 버틸 수 없어서 드디어 책을 펼쳤다가 1막을 겨우 읽고 서둘러 인터미션을 가지는 그런 경우 말이다.

등장인물이 많고 플롯이 복잡할수록 이런 문제는 심각해진다. 소설도 희곡도 모두 작가의 머리 속에서 구상한 결과이지만, 소설가가 서술자를 통해 인물의 겉과 속을 두루 우리에게 알려주는 반면, 극작가는 철저히 인물의 겉만 다룬다. 우리는 희곡을 읽을 때 인물이 내뱉는 말을 통해 각 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욕망을 품는지 추측하고 상상해야 하는데, 작품을 처음 읽을 땐 이 작업을 하다가 이내 머리에 과부하가 걸리기 십상이다. 심지어 누가 누구인지조차 입력이 쉽지 않은 경우도 많다. 셰익스피어의 사극이나 체홉 같은 러시아 작가의 작품처럼 등장인물 목록(dramatis personae)에 쓰여진 이름과 장면에서 사용되는 이름이 제각각일 경우엔 더욱 그러하다.

그게 희곡이다. 웬만큼 훈련받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한 번에 작품의 진가를 충분히 파악하는 건 여간 어렵지 않다. 어쩌면 처음 읽었을 때 다 파악되지는 않더라도 어딘가 강렬한 힘이 느껴져서 다시 읽고 싶어진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희곡은 많은 것이 비워져 있고, 또 감춰져 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희곡의 활자는 매번 배우들의 말과 몸짓을 통해 독특하게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희곡을 쉽게 읽는 비법이 있을까?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지금껏 내 경험상 희곡은 소설이나 영화와는 달리 스포일러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물론 나는 소설이나 영화도 재탕 삼탕에서 진정한 맛과 멋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지만, <식스 센스>를 보고 나오는 길에 극장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결말을 외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영화가 정말 좋은 영화라면 결말을 다 알고 봐도 재미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어쨌거나 희곡은 이런 점에서도 시에 더 가깝다. 한번 읽고 좋지 않은 시가 있을 수는 있어도 좋은 시를 한번만 읽지는 않는다. 좋은 희곡은 줄거리, 플롯, 인물, 결말 등을 다 알고서 읽어도 흥미롭다. 아니 알고 봐야 특정 상황에서 특정 인물이 내뱉는 대사의 적절성과 탁월함을 비로소 느낄 수 있다. 리허설은 수개월 동안 이 과정을 반복하는 작업이라서 그런지 한창 리허설 중인 배우들은 그 희곡의 아주 세밀한 부분에까지 매료되고 공연이 끝나고 한참 지난 후에도 예전에 했던 공연의 대사 한 토막을 가지고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한다.

읽고 또 읽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초행길에는 가이드가 함께 하는 것 또한 유익하다. <셰익스피어 일러스트 소극장>은 스스로 표방하는 바 “위대한 작가의 대표작이 한눈에 펼쳐진다”는 말을 제법 실현하고 있다. 이 책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역사적 배경, 작가의 전기 및 당시 공연장 환경 등 셰익스피어를 읽는 데 유용한 기본 정보를 시작으로 그의 주요 작품을 역사극, 비극, 희극 순으로 소개한다. 개별 작품으로 들어가면 작품 소개를 간단히 한 다음, 등장인물과 줄거리가 깨알같은 일러스트와 함께 제시된다. 그림책의 특성상 이 책은 어린이 청소년용으로 분류되겠지만, 이 정도 내용이면 대학생이나 성인 독자들에게도 꽤 유용할 것 같다. 이 책에 소개된 셰익스피어 작품 중 4대 비극과 <로미오와 줄리엣> 정도를 제외하면 책 좀 읽는 독자들이라도 이런 다이제스트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읽다보면 의외로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작품들에서도 새롭게 느껴지는 세부 사항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어떤 경우에는 무대 밖에서 일어난 사건을 요약적으로 정리하다보니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설명들도 있다. (그럴 때에라도 찰스 램의 <셰익스피어 이야기>보다는 원작에 가깝다.) 예를 들어 <리어 왕> 항목에서 “코딜리어는 감옥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된다”는 문장은 오독의 소지가 있다. 한 문장으로 써야 한다면 나는 이렇게 쓰겠다. “코딜리어는 감옥에서 몰래 처형된다.”  

여전히 더 좋은 셰익스피어 번역이 필요하다. 그런데 최근 급증한 번역서의 양과 질을 고려한다면 이제는 이런 입문서가 더 확충될 차례가 온 것 같다. 다른 작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이 책의 저자 카롤린 기요(Caroline Guillot)가 올해 동일한 컨셉으로 <몰리에르 일러스트 소극장>을 프랑스에서 출간했다고 하니, 이 또한 우리 서점에서 보게 될 날을 기다려 본다.


<셰익스피어 일러스트 소극장>
카롤린 기요 지음, 김자연 옮김, 클, 2017.




덧붙임) 출판사에서 출간 기념으로 종이 인형을 부록으로 끼워준다. 인물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일러스트 종이 인형을 무대에 직접 세워볼 수 있고, 다른 작품 속 인물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도 있는 흥미로운 선물이다. 다만 기왕 무대에 세울 수 있도록 하려면 삽화 중 글로브 극장 이미지를 함께 제공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드윅 홀이 선택된 것은 아쉽다.

2017년 6월 3일 토요일

오태석의 우리식 번역 ≪로미오와 줄리엣≫

임승태

전반부는 흡사 민속촌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다. 텍스트와 퍼포먼스가 잘 맞아떨어진다기 보다는 다양한 잔기술이 쉴새없이 전개되는 게 다소 부담스럽다. 일차적으로 나의 무지 때문이다. 다양한 전통 예술을 즐길 만큼의 지식이 부족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쫓아가기 바쁘다. 아마 나 같이 전통에 무지한 관객들이 많다는 걸 알기에 더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결말은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적폐청산이다. 원작은 두 사람의 죽음으로 오랜 두 원수 집안이 화해를 이루게 되지만, 오태석은 그런 화해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붉은 색 거대한 천이 미리 바닥에 미리 깔린 것이 이유가 있었다. 나로서는 예상하지 않았던 반전이었던 터라 허공을 가르는 칼놀림이 흡사 <킬빌>이나 <자토이치>에서 피가 튀고 수족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잔인하게 느껴졌다. 다 죽이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커튼 콜을 하는 호방함이란.

큰 틀에서 보면 두 가문 사이의 오래된 반목과 복수가 두 인물의 죽음을 불러왔다고 하겠지만, 두 주인공이 이승에서 다시 만날 수 없게된 결정적 원인은 연극사에서 가장 악명높은 배달사고 때문이다. 로렌스 수사의 원래 계획은 줄리엣이 자기가 만들어준 물약을 마시고 잠들어 있는 동안 로미오에게 편지로 이 사실을 알린다는 것이었지만, 편지는 마침 발발한 전염병 때문에 로미오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1592년에 창궐했던 흑사병은 94년까지 계속되었고, 런던 인구의 4분의 1정도가 사망했다고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흑사병으로 인해 폐쇄되었던 극장이 재개장한 직후에 공연되었다.)

그런데 오태석이 페스트를 ‘메르스’로 바꿔 읽는 순간 원작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불편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페스트를 나와 무관한 역사적 사건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이 장면을 오태석처럼 무대 위에서 보여주지 않고 무대 밖에서 일어난 일로 처리한 것 역시 당시 관객들이 그 장면을 직접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 추정할 수 있다. 메르스는 동시대 관객들에게 전염병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이름이지만, 이야기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이웃의 불행을 소모하는 것으로 느껴지기에 적잖이  불편하다. 가장 서글픈 상황에서도 웃을 거리를 던져주는 오태석의 연출은 대체로 미덕으로 여겨지지만, 이 장면에서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극장 하우스 매니저나 국립극단 관계자에게 묻고 싶다. 최근 어느 극장에서나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번 공연에서도 커튼콜에 사진 촬영이 허용되었다. 이때 찍은 사진을 저마다의 사회관계망에 공유하는 것이 공연 홍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극장에선 ‘커튼콜에만’ 촬영을 허락했으나, 관객들은 ‘커튼콜부터’ 찍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어셔들도 이런 오해를 예상하고 있었는지 커튼콜이  끝나자 마자 매우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이제 사진을 찍으면 안된다고, 사진 찍지 마시라고 크게 외친다. 방금 피바다를 이루며 다 허물어진 무대를 굳이 사진으로 남겨서 뭘 하겠느냐마는, 그걸 기어코 제지하고자 객석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비좁은 객석으로 뛰어 들어오는 어셔들의 대응도 이해할 수 없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볼 때 이것이 극장의 방침인 것 같아 우려스럽다. 이게 그렇게 큰 소리와 빠른 동작으로 제지해야 할 일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호들갑인가?  만약 저작권 보호 때문이라면 커튼콜에선 왜 또 허용하는가? 최소한 극장 문을 나설 때까지는 관객이 공연에서 얻은 정서와 질문들을 정리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셔의 임무가 아닐까? 국립극단은 자신들을 소개하는 글 말미에 “그 땀과 열정의 무대가 관객 여러분의 가슴 속에서 진한 감동으로 완성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쓰고 있다. 이 바람이 실현될 수 있는 극장 환경을 조성해주기를 부탁드린다.



2017년 6월 1일 목요일

리어왕, 누가 왕을 가장 사랑하는가

임승태

1.
등장인물과 플롯에서 몇 가지 주요한 변경이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너릴과 리건의 남편인 올버니와 콘월 공작, 그리고 글로스터의 장남 에드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에드거가 배제됨으로써 몇 가지 사건의 변화가 불가피했다. 두 눈을 잃은 글로스터는 도버 해협에서 리어와 만나고, 곧 절벽에 몸을 던진다. 에드거가 눈먼 아버지의 자살을 막고자 거짓말하는 장면을 해석적 입장에 따라 부차적으로 취급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충성스런 신하인 글로스터가 왕의 면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광대가 더는 익살을 부리지 않고 진지해지는 것 역시 아마도 등장인물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고육지책이었겠으나 광대 본연의 역할을 포기한다는 측면에서 이질적이다. 마지막 장면은 에드거의 공백이 크게 느껴진다. 에드먼드가 전투에서 패배한 코딜리어를 곧장 칼로 찔러 죽이고 이어 켄트는 활로 에드먼드, 거너릴을 차례로 쏴 죽인다.
한편 다른 배역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에드먼드가 더 많은 역할을 흡수했다. 서두에서 에드먼드는 원작의 버건디 공작을 대신하여 코딜리어의 구혼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바로 직전 사생아라는 이유로 아버지 글로스터에게 차별 대우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 터라, 그가 리어가 가장 사랑했던 딸인 코딜리어의 구혼자 자격을 얻었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인다.

2.
이러한 시도가 더 많아져 마침내 국악에서도 바그너와 같은 거대한 종합예술작품이 등장하는 날을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각각의 요소를 안배하고 완급을 조절할 연출가와 프로덕션에 맞춤하게 드라마를 다듬어줄 드라마터그의 역할이 강화되어야 하겠다. 지금은 프로덕션을 받치고 있는 각 바퀴가 제각기 움직이는 바람에 편안한 승차감을 제공한다고 말하긴 어려운 형편이다. 하나씩 뜯어보면 국악의 다채로운 매력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축약되고 각색된 <리어>는 원작의 응집력을 떨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각각의 연희를 연결해주지도 못했다. 음악이나 소리는 전문적이었으나 드라마와 동떨어져 있거나, 없으면 더 좋았을 법할 때에도 배경으로 깔린다. 풍물을 통해 전투 장면을 표현한다는 취지는 좋았고 연희단의 공연도 흥겨웠다. 하지만 풍물 공연이 어떤 방식으로 전투를 의미하는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오직 스크린에 비친 영상과 전쟁 효과음이 그런 역할을 담당했는데, 때로는 풍물 소리와 뒤섞여 없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임현빈이 맡은 소리는 애초 이러한 유형의 공연에 대해 내가 기대했던 바이지만, 그가 등장하는 소수의 대목에서만 셰익스피어와 국악이 직접 만날 뿐이라는 게 아쉬웠다. 나머지 배우들의 연기는 대체로 TV 사극을 생각나게 했고, 대사나 몸짓에서 국악과 어울리는 측면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시종일관 사용되는 영상은 비단 이 공연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셰익스피어를 공연할 경우 재고해야 할 일이다. 영화가 아닌 이상 셰익스피어를 사실적으로 접근해서는 본전을 찾기 어렵다. 빈 무대나 자연광, 변장 등 한국 연극 전통과 맥이 닿아 있는 셰익스피어 본연의 요소들을 이러한 성격의 공연에서 버려야 할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하겠다.

2017년 5월 31일 이화여대 삼성홀
주최: 문화가있는날, 문화체육관광부
작곡 및 음악감독: 박경훈, 이아람
작창 및 소리광대: 임현빈
연주: 박경훈, 이아람, 성시영, 이정석, 전계열, 최태영
안무: 박준희, 소광웅
무용: 소광웅, 이세미, 유지희, 김병훈, 김우정, 조연정
풍물: 평택연희단
배우: 손성호, 남성진, 신현종, 윤상호, 이영숙, 김지은, 원종철, 윤도훈, 김진영, 김성진

2017년 5월 25일 목요일

≪말 잘 듣는 사람들≫의 찝찝함

임승태

나는 이 연극의 바탕이 된 실제 사건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켄터키주 맥도날드 장난전화 사건”은 이미 나무위키에도 소개되어 있으며, 2012년 “Compliance”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제작된 꽤나 유명한 사건이었다. <말 잘 듣는 사람들>은 적어도 나 같이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이 아닌 이상 이 사건을 단순히 소개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초연이 2014년이었다는 점이나 연출의 변에 언급된 내용을 볼 때, 이 연극을 세월호, 특히 “가만히 있으라”에 대한 반응으로 볼 여지는 충분하다. “가만히 있으라”가 남긴 상처는 우리 사회에 여전하기에 이 말이 연극이나 영화에서 변주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데, 이제 검열관이 사라졌으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라”에 대한 반응으로서 <말 잘 듣는 사람들>은 어딘가 고약한 데가 있다. 연출가나 배우들은 이 작품을 통해 가만히 있지 않음, 혹은 말 잘 듣지 않음을 실천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보는 관객은 가만히 잘 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각하지 말라는 담탱이의 조회 시간 잔소리는 매번 제 시간에 온 학생들이 듣게 마련이다. 과거 어느 공연에서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죽이려는 순간 한 관객이 일어나 오셀로를 권총으로 쏴버렸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일반적인 관객은 그 사람보다 정의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알기에 무대에서 벌어지는 불의한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재미나 감동과 같은 반대 급부를 얻기 위한 유보이다. 그런데 이 연극은 끝까지 봐도 도무지 즐겁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말 잘 듣는 게 우리 사회의 고질적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가만히 있었던 학생들, 시키는 대로 옷을 벗었던 루이스 오그본(Louise Ogborn) 혹은 차예슬을 나무라는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일차적 책임은 선장과 선원, 해경, 대통령에게 있고, 형사를 사칭했던 데이비드 스튜어트(David Stuart) 혹은 최대한과 같이 시킨, 혹은 마땅히 시켜야 할 일도 시키지 않은, 사람에게 있다. 커튼 콜 당시 내 뒤의 한 관객은 웃음 지으며 퇴장하는 최대한을 향해 “나쁜 새끼”라고 외쳤다. 비록 이 말이 내가 관람한 저녁에 나온 관객 반응의 최대치였지만, 점잖은 관객들도 속으로는 그 이상을 외쳤을 것이다.

얼마 전 지인이 보이스 피싱에 당해 삼천만원을 잃었다. 옆에서 당하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보이스 피싱이 퍽치기 강도와 마찬가지로 불가항력임을 알게 되었다. 일단 듣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나면 핸드폰을 보조 배터리에 연결해서 여섯 시간씩 범죄자의 말을 듣고 따르는 일이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말을 잘 들어서 문제라고 하는 것은 마치 이리에게 당하는 양의 약함을 문제삼는 것과 흡사하다. 비극이 주인공의 결함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아고의 악함을 문제삼지 않고, 오셀로의 귀 얇음과 데스데모나의 지나친 친절을 문제삼는다. 이아고나 최대한은 수퍼 빌런이지, 간단히 헤치울 수 있는 조무라기 악당이 아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오그본/차예슬을 감금하고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이야 말로 이 사건/연극에서 주목할 문제이다.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인 이들이야 말로 관객이 동일시하게 되는 비극적 인물들이다. 박종주의 표현대로  “불필요하게 자극적인 사건을 불필요하게 자극적으로 재현”하는 이 연극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볼 가치가 있다면, 그건 스튜어트/최대한의 사악함이나 오그본/차예슬의 불쌍함 때문도 아니고, 바로 그 중간에서 이 끔찍한 일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지극한 평범성 때문이다. 범인(凡人)들은 하루의 삶 속에서 정의가 바로 서는 것보다 내게 손해가 없기를 바라며, 내게 이익이 된다면 정의를 잠시 외면할 준비도 되어 있다. 이 연극을 보고 있기 불편한 것은 바로 나의 비열함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 아닐까?  관객은 이 연극을 끝까지 참고 봄으로써 카타르시스 없는 불편함을 얻게 된다. 나 역시 어느 순간 이러한 사건에 연루될 수 있을 것이라는 공포와 (부)매니저 도나 서머스(Donna Summers)/김미옥과 그의 배우자 월터 닉스(Walter Nix Jr.)/강성기를 비난하면서도 일말의 연민을 거둘 수 없는 어정쩡함이 주는 불편함은 배우들이 단체로 펠라치오 시늉을 하는 것을 강제로 훔쳐봐야 하는 순간 정점에 이른다. 이 사건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으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지만, 85분에서 90분간 극장에 앉아서 그것을 접하는 것 만큼 강렬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전혀 즐겁지 않은 사건에 무언의 배우로 참여하기 위해선 먼저 우리 안의 사도/마조키즘 성향을 활성화 해야 한다.

미국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한국의 시공간으로 옮겨 왔다는 점에서 이 작품에 김수정의 저자권(authorship)을 부여하는 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 Compliance 와의 관계를 조금 더 분명히, 선제적으로 밝히는 것이 불필요한 오해를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말 잘 듣는 사람들>은 Compliance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전자가 후자를 레퍼런스로 삼고 있는가? 몇몇 대사를 비롯하여 몇가지 설정—Compliance의 금발 머리, 치킨 샌드위치 가게와 <말 잘 듣는 사람들>의 노란 머리, 삼계탕 집—상의 유사성은 단순한 우연이라 보기에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2016년 6월 7일 화요일

<민중의 적>,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연출, 샤우뷔네 베를린 제작, LG아트센터, 2016.


by 에스티

기자들이 기사 쓰기 좋을 작품이다. 제4의 벽 따위야 무너진 지 오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무대와 객석이 토론을 펼치는 연극이라니. 이 뭔가 새롭고 흥미진진한 구도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는 것보다 기사를 통해 재현된 모습을 읽고 있는 편이 더 행복하다. 관련 기사에 따르면, 첫날 공연의 토론 시간에선 그나마 사대강, 옥시와 같이 현재 우리 사회의 현안들이 언급되었다(한겨레). 하지만 그것을 "열띤 토론"이었다고 기록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첫날 공연을 관람한 관객들이 SNS에 남긴 증언에 따르면, 중요한 키워드가 나왔을 뿐이지 토론의 수준이 결코 높았던 건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도 트위터에 남긴 관객들의 글을 살펴보면 이 독일 연극은 꽤 만족스러웠던 것 같고, 앞으로도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좋았던 기억은 공유해도 그렇지 않았던 기억은 기록하지 않는 우리의 습성이 반영된 결과이다. 비교적 비판적 입장을 가진 한 트윗을 소개한다. (사족으로, 트위터에선 LG 아트센터가 어느덧 엘아센으로 불리고 있었다. )

유감스럽게도 내가 본 27일 공연의 토론 시간은 참담했다. 이 날 토론에서는 전날과 달리 섹시한 키워드는 나오지 못했고, 다수가 옳으냐 소수가 옳으냐를 놓고 이야기 하는 데 시간을 다 써버렸다. 객석에서 나치가 언급되었으나, 통역사는 관객들의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고, 배우는 그저 곤란해 했다. 차마 토론이라 말하기 민망한 대화가 진행되고 말았다.

이 프로덕션이 처음 시작할 무렵 베를린에 있었던 덕분에 나는 이 작품을 샤우뷔네에서 오픈 리허설로 볼 수 있었다. 그날 나보다 너댓 줄 앞에 앉아서 관객들의 토론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오스터마이어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독일 관객들도 상당히 열심히 토론에 참여 했었다. 그날 나는 그들이 무슨 얘기를 주고 받았는지 거의 알아듣지 못했고, 한국 관객들이라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이번에 LG아트센터가 그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당초 나의 예상 보다 관객들의 참여는 활발했다. 하지만 결코 수준 높은 토론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건 관객들의 잘못이 아니라 연출 탓, 혹은 연출의 의도적 선택으로 보인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주인공 슈토크만 박사에게 감정이입할 수밖에 없는데, 정작 토론은 박사가 무지한 대중을 비난하고 나선 시점, 즉 민중의 적은 바로 민중 너네들이라는 데서 시작된다. 상황 파악이 충분히 되지 않은 상태에서 관객들은 일단 슈토크만 박사의 편을 들게 된다. (대다수가 슈토크만을 지지한다고 손을 들었다.) 보다 큰 문제는 토론이 어떻게 얼마나 진행될지 관객들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토론이 대충 얼마나 진행될지 알고, 발언의 기회가 얼마나 주어져야 하는지 알아야 제대로된 토론이 가능하다. 아직 몸(또는 입)이 풀리지 않은 관객들이 그것도 그 큰 엘아센 극장에서 마이크를 들고 발언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도전이다. 제대로 된 토론이 될 수가 없다. 그나마 여유를 가지고 대화를 시작하려 했던 관객은 서두를 미처 마치기도 전에 토론이 끝나버려 발언을 중단해야 했다. 언제 끝날지 알려주지 않는 토론에 참여했던 관객들은 슈토크만 박사가 다시 마이크를 잡고 이제 그만 자기 대사를 이어가야 한다는 말에 기만당한 느낌을 받게 된다.

관객에게 즉석으로 말하게 하는 이 연극은 과연 혁명일까, 기만일까, 아니면 그러한 양쪽 의견이 서로 맞서는 걸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오스터마이어의 또 다른 게임일까? 조금 더 유익한 토론이 될 수 있게 하려면 지금 상황에서도 몇가지 개선 장치를 마련할 수 있을텐데 그런 생각을 못하는 것일까, 안하는 것일까? 4년전 처음 보았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토론 장면에 앞서 검은 색 무대 벽면을 흰색 페인트로 벅벅 칠하는 장면과, 토론이 끝날 무렵 객석으로부터 날아들기 시작한 물감 풍선들이었다. 블랙 박스 무대 마저 허물고, 형형 색색의 물감이 객석에서 무대로 날아드는 것, 이것은 아마도 오스터마이어와 무대 디자이너(Jan Pappelbaum)가 꿈꾸는 미래 극장의 이미지이리라. 하지만 그러기에 LG아트센터는 너무 크고 웅장하다. 사실 이번 공연에 내가 심적 거리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대에서 멀고 높이 떨어진 3층 객석에 앉아 있었던 나홀로 일행과 떨어져 반대편에 앉아 있었던 탓이 크다. 베를린에서 본 물감 풍선은 뻥뻥 잘 터졌으나, 엘아센에서는 배우들이 무대 위에 올라서서 조심스럽게 물감 풍선을 던지고 있었다. 물감 풍선은 충분히 터지지 않았고, 몇개는 무대 위에 뒹굴고 있었다. 맨 앞자리 관객들은 미리 준비된 비닐 천막으로 몸을 가리느라 분주했다. 급성 독감으로 내한 일정을 취소했다는 오스터마이어는 이 광경을 촬영한 영상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2015년 8월 8일 토요일

휠+애인+산, 제물포 별곡

제물포 별곡: 조선판 베니스의 상인
오유아트홀 (도곡2 주민센터)
2015.8.7

글쓴이_임승태

극단 휠과 애인이 함께 <베니스의 상인>을 한다고 했을 때,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minority’였다. 이 드라마에는, 작가 자신이 여기에 동조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반유대주의 정서가 뚜렷이 드러난다. 반면, 이 극의 타이틀 롤인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것이 친구 바사니오에 대한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고 추정할만한 근거는 다분하다. 아무튼 서로 적대적인 관계인 안토니오와 샤일록이 채무관계로 얽히면서 이 극의 갈등은 시작된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이 극의 결말은 한쪽에서 보면 모든 문제가 행복하게 해결된 코미디로 보이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법관을 사칭한 채무자의 ‘제수씨’에 속아 재산을 몰수당하는 민족적 소수자의 서러움이 어려있다.

이번 공연에서는 원작이 1930년대 제물포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전환됨으로써 샤일록의 이름은 긴 다케시로 바뀌었다. 뚜렷한 친일행적을 보이지 않는 그의 이름을 굳이 일본식으로 개명시킨 것은 관객들이 마음 놓고 그를 미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사실 극중 인물이 원작의 인물 성격을 대부분 유지하고 있는데, 새 한국식 이름을 암기하며 따라가려니 낯설고 불편한 점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 관객들에게 더욱 얄미운 이름인 ‘긴 다케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샤일록이든 긴 다케시이든 그를 마음껏 미워하긴 힘들다. “제물포 별곡”이 마이너리티의 문제를 그들의 문제로 해석하는 것 또한 바로 긴 다케시를 통해서이다. 긴 다케시(백우람 分)는 구만석(안토니오, 호종민 分)의 부친에 의해 “자신의 몸과 마음이 망가졌다”고 말한다. 이 대사는 고리대금업자가 돈을 마다하고 채무자의 살을 취하기 원하는 동기를 제공해준다. 그런데 "몸이 망가졌다"라는 말은 이 극에서 하나의 전환을 가져온다. 이전까지 관객이 배우의 핸디캡을 지우고 극적 가상에 몰입하려고 노력했다면, 배우가 이 대사를 반복해서 하는 순간 관객은 더이상 배우의 신체적 장애를 모른 척 할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병신 취급”, “왜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가”와 같은 대사 역시 단순히 극적 상황에 머무르지 않고 관객으로 하여금 새삼스레 배우들의 몸을 지각하게 만든다. 긴 다케시의 대사는 그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린 게 어쩌면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일 수도 있다는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제물포 별곡”을 끝까지 집중해서 볼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은 온전히 배우들의 연기에 있다. 이들의 연기는 비장애인 배우들과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어떤 측면에서 장애인 배우는 무대 위에서 비장애인 배우를 압도한다. 장애인 배우들의 표정과 동작은 배우 자신에 의해 완전히 제어되지 않지만, 관객들은 이점이 그들로서는 불가항력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때문에 그것을 문제삼기 보다는 매순간의 의외성에 경탄하게 된다. 그에 비하면 비장애인의 연기는 발성이나 표정 등에서 예측가능한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상투적이라고 느껴진다. 무대 위의 환상을 배격하고 몸의 현존에 주목한다면, 이들의 작업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극단 애인과 극단 휠이 풀어가야할 과제가 앞으로도 많이 있겠지만, 앞으로도 몸성(corporeality)이 관객을 매혹하는, 관객들로 하여금 재현과 현존을 오고가게 만드는 공연을 이어가길 기대한다.


2014년 12월 20일 토요일

가려진 것을 보기: 케이티 미첼의 《노란 벽지》

임승태

죽음의 시선

연극 <노란 벽지>에는 샬롯 퍼킨스 길만의 원작 소설에 본래 없던 시 한편이 삽입되어 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가 이 작품에서 언급되는 방식은 다분히 극적이고 징후적이다. 시를 기억하지 못하던 주인공이 점차 기억을 회복함으로써 “무지의 상태에서 지의 상태로 이행”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1452a 30),  이 발견(아나그노리시스)은 안나의 운명을 바꾸는 급전(페리페테이아)을 동반하고 있다. 안나가 처한 상태(신경쇠약)와 원작으로부터 달라진 이 연극만의 결말(안나의 자살)을 놓고 보면, 시에 대한 망각이 중요한 징후이자 복선으로 작용함을 알 수 있다. 사건의 결과를 놓고 보면 “죽음death”이란 마지막 시어는 신경쇠약을 앓는 안나가 이 시를 망각했던 그리고 애써 그것을 다시 기억해내고자 했던 이유가 된다. 원작 소설에서 ‘나’가 벽지 뒤의 여인을 의식하기 시작하고 종국에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는 추세를 보여준다면, 연출가는 여기에 시를 망각했다가 다시 발견하는 흐름을 겹쳐 놓음으로써 그 여인이 주인공 자신의 죽음 충동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를 이미 알고 있는 관객들은 안나보다 지적으로 우월한 입장에서 극적 아이러니를 확보하고, 이후 그것을 애써 기억하려는 안나의 모습에서 불길한 결말이 다가오는 서스펜스를 경험한다.  이처럼 이 시는 하나의 소설이 연극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마치 제목을 대신하는 첫 행을 의식한 듯, “한줄기 빛”을 제공한다.

한편 시의 마지막 행에는 원작 소설과 이 연극을 매개하는 또 하나의 특별한 시어가 자리하고 있다. 안나가 망각하고 있던 “시선 (the) look”이라는 단어는 시를 다시 기억해내기 전에 이미 벽지 뒤의 여인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혹은 벽지의 문양으로부터 그 죽음의 사자를 읽어내는 망상의 형태로 이미 자리하고 있다. 시의 마지막 문장에서 초점을 잃은 채 먼 곳을 쳐다보고 있는 망자의 시선을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바로 이 마지막 구절로부터 이 연극이 라이브 카메라, 즉 시선을 조작하고 조정하는 행위를 이끌어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수의 역설

2년 전 베를린 샤우뷔네 극장에서 케이티 미첼의 <줄리 아씨>를 보고 나서 나는 블로그에다 “TV 드라마를 좋아하는 한국에서 공연된다면 큰 호응이 기대”된다고 감상을 남겼었다.  케이티 미첼의 또 다른 작품이 올 해 SPAF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움에 예매를 서둘렀지만, 티켓을 확보하고 나니 그제야 한편에 자리한 걱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이런 방식의 퍼포먼스가 다시 봐도 흥미로울까? <줄리 아씨>를 보고 나올 때 옆에 있던 한 관객이 했던 말—“이런 건 한번도 본 적이 없어 I’ve never seen this before.”—이 나에게도 적절한 반응이었다면, 이제 이런 걸 ‘다시’ 보게 되는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제목과 이야기가 바뀌었을 뿐 같은 형식이 되풀이될 위험성이 농후한 연극을 기다리던 나에겐 공연이 시작될 때까지 기대보다 걱정이 앞섰다.

극장이란 우리말 단어가 여전히 연극 공연장과 영화관을 동시에 지칭할 수 있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케이티 미첼의 “라이브 시네마 쇼”는 이 둘의 병존과 상호작용을 특징으로 한다. <줄리 아씨>도 <노란 벽지>도 무대가 크게 상하로 구분된다는 점은 동일하다. 매우 사실적인 세트가 펼쳐지는 아래쪽 무대는 배우들의 연기 공간이자 촬영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스크린은 바로 그 무대 위에 설치되어 있으며, 복수의 촬영 스태프가 카메라를 들고 무대에서 장면을 촬영하면 무대 밖 어디에선가 그 영상을 실시간으로 이어 붙여 스크린에 영사함으로써 관객들은 한 편의 연극과 영화를 동시에 관람할 수 있다. 관객이 촬영 현장과 그 결과물을 위 아래로 동시에 볼 수 있는 환경 자체가 TV 화면 한 켠에서 자주 목격하는 “LIVE” 표식 같은 역할을 하며 현장감을 극대화한다. 여기에 더불어 음향 기사는 이렇게 만들어진 영상이 더욱 그럴듯하게 느껴지도록 필요한 소리를 만들어 덧입힌다. 영화의 효과음이 그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지만, 그러한 작업이 관객의 눈 앞에서 실시간으로 이루어짐으로써 흥미가 더해진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는 연극적인 것과 영화적인 것,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 매개 없이 직접적인 것과 매개화된 것들이 경합을 벌인다. 이 광경은 그저 고가의 장비를 이용한 신기한 볼거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관객은 마치 대위법 음악을 들을 때와 같이, 아니면 피카소의 입체적 초상화를 볼 때와 같이, 복수의 채널로부터 전달되는 시청각의 자극에 대해 시종일관 선택하고 종합하면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 공연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찾기 위해서는 무대를 편안하게 관조하는 대신 순간순간 어느 부분에 주목할 것인지를 결정하면서 눈과 머리를 분주히 굴려야 한다.

배우들과 촬영 스태프, 그리고 그것을 교차 편집하는 조정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그 합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구경거리(show)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케이티 미첼이 라이브 시네마 쇼를 통해 접근하고자 하는 것은 엔터테인먼트라기 보다는 실험적인 연극에 가깝다. 무엇보다 이 연극은 구성원의 실수나 기계 오작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라이브 카메라가 사용되는 많은 공연에서 기계 오작동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사실 이 미스터리는 학교나 사무실에서 노트북과 빔 프로젝터를 연결하는 가장 단순한 형태에서도 빈번히 발생하는 일종의 도시 괴담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무대 위의 실수에 자신의 비슷한 경험을 투사하게 되면서 긴장이 증폭된다. 그런데 이러한 결함들을, 무대 위에 등장하는 배우 이외의 스태프들과 더불어, 없는 것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 물론 촬영상의 실수나 오작동이 의도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만약 그 실수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결점 같은 것이었다면, 케이티 미첼의 라이브 시네마 쇼는 마치 실패할 확률이 높지만 성공하면 큰 가산점을 얻는 트리플 악셀로 승부하려는 어떤 피겨 스케이트 선수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본 첫날 공연에도 작은 실수가 있었다. 찰나였지만 카메라 스태프 한 사람이 맞은편 카메라의 앵글 안에 들어왔고 그래서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 순간 관객들은 마치 안나가 벽지 뒤에서 여자의 형상을 보는 것처럼 스크린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한 남자를 보고 말았다. 그런데 공연을 곱씹을수록 이 순간이 하나의 망상처럼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 오늘날의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카메라를 들고 종횡무진 하는 스태프들을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위치에 있을 뿐이라 생각하여 지각을 거슬러 ‘없는 것처럼’ 여기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스크린에 나타나는 영상에서는 마치 우리의 관습화된 시선이 물화된 것인 양 그들이 깨끗이 지워져 있다. 스크린에 투사되는 영상을 얻기 위해선 그들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스크린은 그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치 가부키의 구로코(黑子)처럼 그들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배우와 이야기에 집중하려는 우리의 습관같이 스크린은 그들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돌발 상황이 폭로하는 것은 연극과 영화를 보는 우리의 시선이 관습이라는 필터를 거쳐 여과된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카메라 스태프가 스크린에 등장하는 순간은 앞서 그 스케이트 선수가 점프에서 실패하고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위태롭고 불안하기만 하다. 훈련된, 혹은 관습에 무뎌진, 관객은 가장 이상적인 상황을 상상하면서 이런 실수를 그저 없는 것처럼 너그럽게 봐줄 수 있다. 물론 제작진의 연습 부족을 나무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실수를 있는 그대로 응시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탈은폐된 이 연극의 실체에 접근하게 된다.

더 나아가 설령 공연 중에 실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공연을 보는 것이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실수를 기다리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베를린에서 <줄리 아씨>를 볼 때, 나는 더 이상 발표 당시의 긴장감을 기대할 수 없는 스트린드베리의 텍스트에서보다 무대의 일사불란한 움직임과 영상의 매끄러운 흐름이 혹여 실수나 돌발 사고로 끊어지진 않을까를 긴장하며 보아야 했다. 드라마 외부로부터 만들어지는 이 서스펜스에 주목함으로써 나는 연극을 보는 습관적 태도를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다. 케이티 미첼의 카메라는 무대 위에 분명히 있거나 없지만 우리가 그것을 관습적으로 없거나 있는 것으로 여겨 왔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도 우발적으로도 드러낸다. 프로이트를 따라 사소한 말 실수로부터 억압된 무의식을 찾아낼 수 있듯이 우리는 이 연극의 공연에서 발생하는 실수로부터 그 저변에 놓여 있는 문제적 연극성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려서 보여줌: 스크린의 이중성

<노란 벽지>는 분명 <줄리 아씨>의 연장선상에 있으나, <노란 벽지>에서 카메라와 무대를 활용하는 방식에서는 전작에 비해 더욱 진전된 연출가의 문제의식을 읽을 수 있다. <줄리 아씨>에서는 다섯 대의 카메라를 사용하여 배우의 앞, 뒤, 옆, 위 등 배우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담아냈다. 이 작업은 단순히 여러 대의 카메라가 배우를 둘러싸고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역 배우와 둘 이상의 부분—뒷 모습이나 손만 비치는 식의—대역이 순차적으로 촬영되고 몽타주 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케이티 미첼은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매끄러운 영상이 사실은 몸을 조각조각 분할하고 다시 재조합한 분절의 결과임을 폭로함으로써 미디어가 사실임직한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가하는 조작을 드러낸다. 이런 방식은 <노란 벽지>에서도 부분적으로 활용되었으며, 여기에 초점거리를 달리한 두 대의 카메라가 나란히 하나의 피사체를 촬영하여 서로 다른 화각의 영상이 교차 편집되는 방식이 추가된다. 카메라 사이의 각도가 좁혀짐으로써 마치 관절이 하나 더 생긴 것처럼 더 많은 분절이 일어나고, 그만큼 인물의 모습은 더 섬세하게 포착된다. 카메라의 병치는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에게 운동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위치에서 바라보더라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시선의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관객의 시선에 대한 유비를 심화시킨다.

공연 중 간헐적으로 무대 전면을 완전히 닫아버리는 것은 <줄리 아씨>에선 사용되지 않았던 새로운 전술이다. 이 기간 동안 관객은 가려진 무대를 오직 카메라와 스크린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데, 연극사를 통틀어 이토록 대범하고 노골적으로 제4의 벽을 관객 앞에 노출시킨 순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고지식한 제4의 벽은 카메라가 객석 방향을 촬영하기 위함과 같은 기능적인 목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관객들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지점에 이르면 우리는 욕실이나 계단과 같이 처음부터 오직 스크린을 통해서만 확인해야 하는 공간도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은 어쩌면 관객을 문자 그대로 벽 뒤에 배치함으로써 벽지 속 그녀가 관객에 대한 은유임을 드러내는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목적이라면 단 한 번으로도 충분할 장난을 연출가는 여러 차례 반복하는 걸까? 관객을 적잖이 성가시게 만드는 이 장치가 노리는 것은 관객이 시선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들기 위한 이화(異化) 효과임이 분명하다. 물론 관객 앞에 벽이 가리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고개를 조금만 들면 그 벽 바로 위에 걸려 있는 스크린을 통해 벽 뒤쪽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이 벽은 여전히 있지만 없는 듯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 이중성은 스크린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 즉 무언가를 보여주는 막이면서 동시에 가리기 위한 막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로 이어진다. 스크린은 우리가 즉각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편리한 도구이지만, 이 간편함 때문에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이 촬영자가 프레임에 담고 편집자가 취사선택한 욕망의 몽타주란 사실을 쉽게 망각하고선 만들어진 영상을 사실로 곧잘 믿어버린다. 이렇게 길들여진 관객의 시선이 미디어를 지배하는 권력자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것은 자명하다. 케이티 미첼은 일시적으로 무대를 가림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스크린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의 불편과 답답함을 경험하게 한다. 이를 통해 그 잠깐이 불편하다면 미디어에 완전히 포위되어 살고 있는 우리의 삶 또한 진실로부터 얼마나 차단될 수 있을지 질문하게 만든다.

닫힌 본무대가 관객의 시선을 스크린으로 유도한다고 해서 관객의 시선이 그곳에만 머무를 필요는 없다. 관객은 이 일방성에 저항하고자 그 동안 열려 있던 본무대 때문에 충분히 주목할 여유가 없었던 주변의 작은 부스들로 시선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무대 중앙의 작은 부스에서는 한 여성 배우가 내레이터로서 목소리 연기를 펼치고 있고, 우측에는 음향 효과를 만들기 위한 부스가 마련되어 있다. 음향 장치가 무대 전면에 노출되어 있었던 <줄리 아씨>에서 음향 담당자들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퍼포먼스를 제공했는데, 그에 비해 <노란 벽지>에서는 부스가 이러한 기회를 차단시킨다. 이런 점에선 부스 또한 음향 기사와 관객 사이에 둘러쳐진 또 다른 형태의 스크린으로 볼 수 있다. 기술적 측면에서는 보다 정밀한 소리를 만들기 위해 독립적인 부스가 필요했을지도 모르지만, 내레이터나 음향 기사가 부스 안에 들어감으로써 우리는 이 공연을 그 출발선에서부터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음향 기사가 라이브로 소리를 만들고 있긴 한 걸까? 그냥 소리를 만드는 시늉만 하고, 실제 소리는 이미 녹음된 것을 재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현장에서 만드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우리 귀에 자연스럽게 들리는 저 소리가 사실은 그렇게 믿도록 조작된 소리임을 부정할 방법은 없다. 이 연극은 라이브 공연과 그것을 녹화하고 편집한 영상을 동시에 보게 함으로써 관극 행위 자체를 질문하게 만든다. 그리고 극단적인 동시성과 현장성이 주는 쾌감이 점차 사라질 때, 그 쾌감을 이어가는 동력이 불신을 중지하고 싶은 나의 의지였음 또한 분명해 진다.

스크린 너머로

나는 위에서 일부러 ‘연극’이란 말을 골라 썼다. 왜냐하면 이 공연을 연극이라 부르기에 주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말이 들리기 때문이다. 어쩌면 (라이브) 카메라의 은유는 그 비판의 대상과 수위가 더욱 강력하고 통렬해야 할지도 모른다. 반대로 그러한,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메시지는 현란한 장치 없이 그저 “가난한” 방식으로도 충분히 전달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해 내용은 없이 형식에만 집착한다고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형식이 돋보이면 내용을 문제삼고 내용이 뛰어날 땐 형식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 비평가가 갖춰야 할 객관적 시각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선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의 반연극적 편견에 맞서 연극을 옹호하면서도, “비극의 효과는 공연이나 배우 없이도 산출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 이후로 얼마나 오랫동안 내용을 감각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을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게 했던가를 기억해야 한다 (1450b 17-8).  케이티 미첼의 연극은 분명히 공연이나 배우 없이는 산출될 수 없는 어떤 효과에 대한 실험이다. 만약 <노란 벽지>의 문학적 의미가 궁금하다면, 서재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그것도 아니면 간단히 “스파크 노트”의 친절한 해설을 참고할 수도 있다.  소설의 연극화는 그 자체가 형식의 실험이며, 연극에서 소설을 이용하는 것은 내용을 빌어 형식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적어도 소설을 전유하는 연극에서 형식에 매료되고 거기서부터 의미를 찾아가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연극과 영화의 경계선에서도 불만이 들려온다. 이 또한 연극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겠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연극의 경계를 허물고 조롱하는 듯한 모습에 대해 불쾌감을 표했다고 한다. 나는 이 글에서 이 작품이 다루는 많은 문제들이 연극성에 대해 더욱 깊은 성찰로 이끌지 연극성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조금이나마 드러내 보이고자 했다. 케이티 미첼의 잡종적 시도로부터 우리가 환기해야 하는 것은 연극이나 영화 그 어디에도 결코 침해 받아선 안 되는 경계 따위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적 연극이 혹시라도 불쾌했다면 그건 마치 라스 폰 트리에의 연극적 영화 <도그 빌>을 보면서 느낀 쾌감과 한 쌍을 이루는 것 아닐까. 물론 기술이란 언제나 자본의 손을 놓기 어렵다는 점에서 영세한 연극이 거대한 영화와 접목되는 것을 무작정 반길 수만은 없다. 하지만 연극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연극의 잠재력과 범위를 축소시키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벽지의 색이 하필 노란색이었다는 사실은 다른 곳에선 몰라도 지금 이순간 대한민국에서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이것은 작가나 연출가 또는 축제 기획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저 <노란 벽지>가 2014년의 대한민국에 초대됨으로써 만들어지는 돌발적인, 그렇지만 강력한, 의미이다. 전국이 노란 색으로 도배된 세 계절을 지내면서 우리에게는 안나에게 처방된 휴식 요법, 즉 “가만히 있기”가 결코 낯설지 않게 되었다. 상처를 낫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치명적 망상을 만들어내는 부작용을 일으킨 이 19세기 처방을 고집하는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이제 찾아 보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 방법이 그 옛날 전쟁 통에 서울을 몰래 벗어난 대통령에 의해, 그리고 가라앉는 배를 빠져나가는 선장과 선원에 의해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서울에 남아 있던 시민들은 서울 수복 후 부역자로 숙청당했고, 세월호에 남아 구조를 기다리던 승객들과 학생들은 한 사람도 구조되지 못한 채 수장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거의 전적으로 미디어를 통해 접하게 되는데, 현실의 카메라와 스크린이 얼마나 투명하게 가려진 무대를 중계하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이미 60년 전에 라디오는 서울을 빠져나간 대통령이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다고 믿게 만들었으며, 시민들의 지식과 의식이 성숙하는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미디어가 권력자의 욕망을 몽타주하는 기술도 교묘해졌다. 기성 매체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은 SNS나 외신을 더 신뢰하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전지구적 권력자들의 욕망이 경합하는 모습을 더 자주 만날 뿐이다. 이 연극에서 무대 전면이 통째로 덮이고 스크린만 쳐다 보아야 하는 그 순간을 우리 사회의 알레고리로 읽는 것이 나 혼자만의 지나친 상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가 SPAF에서 초청한 해외 작품을 기다리는 이유는 그 작품들을 통해 오늘 이 시점의 한국연극이 나가야 할 바를 점검하고 반성하기 위함에 있다. 지난 여름 적지 않은 연극인들도 시민의 일원으로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에 동참했었다. 연극인들의 참여가 특별법 제정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잠시 극장 밖으로 나왔던 연극인들은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수십 년을 이어온 연극제가 내용이 부실하다는 이유로 대관 신청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재 상황에서 우리는 극장 앞에 가로 놓인 거대한 가림막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억압된 것은 반드시 되돌아 온다는 프로이트의 말이 옳다면, 지금 스크린으로 가린 그 어떤 것도 결국은 다른 스크린을 찾아 나타나게 되어 있다. 관객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연극이 필요한 때이다. 애도를 충분히 하지도 받지도 못한 오백여 명의 학부모에게 작은 위로라도 될 수 있다면 <햄릿>이라도 하고, 스크린 뒤에서 곪고 있는 상처를 바라보고 어루만져 줄 수 있어야 한다. 연극이 혁명적이라면 그것은 나라를 뒤집어 엎기를 기도해서가 아니라, 나라는 한 인간이 바라보는 방식과 그리하여 사유하는 방식의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나는 <노란 벽지>라는 밖에서 온 연극 하나가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그 다음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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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회 젊은비평가상 공모 관계로 게재가 늦어졌습니다. 후보작으로 거론해주신 심사위원께 감사를 드립니다.
** 드라마인으로 젊은비평가상 공모 지원작을 보내주시면 게재해드립니다. 페이스북 메시지를 이용해주세요.

2014년 11월 23일 일요일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 관객과의 대화 (11월 22일)

김재엽 작/연출의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내 안의 김수영을 찾아서" (2014.11.04-30,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11월 22일 공연을 마치고 있었던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나눈 질문과 대답을 일부 소개합니다. 이날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는 김재엽 연출과 두 배우 (오대석, 김원정) 를 비롯하여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 여사와 시인 맹문재 안양대 교수가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좌측부터 김재엽 연출, 맹문재 시인, 김현경 여사, 오대석 배우, 김원정 배우


백석 시인에 나타난 여인 나타샤 처럼 그런 중요한 의미셨을 텐데, 그게 지금 돌아가신 이후에도 엄청난 추억으로 삶의 힘이 되시는지, 선생님과 사셨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얼마만큼 행복한, 사실은 살아내기가 쉽지 않으셨을텐데, 지금까지의 영향은 무엇인지요.

김현경 여사

김 시인은 하루가 똑같은 날이 없었어요. 매일매일 정말 좋게 말하면 충동적이고 또 그런가하면은 꼭 봄날같이 따뜻한 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같이 같은 날이 없으니까 감동의 연속이었어요. 시에도 나타나지만 시를 똑같은 영감으로 쓰지 않으셨어요. 꼭 시는 그 다음에 쓰는 시는 거기서 벗어나야 된다고 그런 말을 하고 시 한편을 쓰면 큰 산고를 겪었다 하셨어요. 시를 한편 쓰면은 초고를 쓰고 난 다음에 나한테, “여편네한테”  꼭 필사를 시켰어요. 원고지에다. 근데 하나, 무지무지 섬세하고 깐깐한 양반이에요. 그렇게 충동적이고, 술도 폭음을 많이하신 양반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고쓸 때만은 그렇게나 엄숙했어죠. 딱 옆에다 앉혀 놓고 미리 원고지를 다 준비해놓고, 그 다음에 만년필까지 준비하고, 만년필을 특별히 말하는 건 잉크 빛깔까지도 이 양반을 신경을 씁니다. 잉크 빛깔도 맞지 않으면은 쓰지를 않으세요. 그러니까 그 파이로트 잉크를 사기 위해서 마포에서 충무로 체육관까지 나와야 해요. 그 정도로 준비가 단단해요. 그리고 제가 옆에서 쓰는데 그냥 이거 베껴라가 아니에요. 옆에 앉으셔가지고 내가 그 원고를 보면서 시 제목 쓰고 김수영 쓰고 그 다음 제가 베끼기 시작하면 꼭 한줄 띄고 점찍고 행 바꾸고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거의 다 썼는데 저 같으면 그동안 쓴 게 아까워서 틀린 데만 고쳤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됩니다. 다시 쓰기 시작해야 하니까 몹시 힘들 때도 있었어요. 그러니 말하자면 그렇게 엄숙하게 다루시거든요. 돌아가신 지가 벌써 50년이 가까워 집니다. 46주기에요. 저는 46년 동안 반세기를 뻔뻔스럽게 살고 있는 여편네죠. 그래도 아직도 제가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건 47셉니다. 돌아가신 나이가. 그 젊은 나이가 아깝고. 또 하나는 진짜 빈틈없는 공부벌레에요. 공부하는 태도 책읽는 태도 번역하는 태도 시를 쓰는 태도는 생활하고 일치합니다. 그래서 제가 정말 남편한테 어리광같은 거 부려본 적도 없어요.  그게 용납이 안되니까. 그리고 그때도 그것이 하나도 괴로움이라든지 무슨 생활고로 연결을 안시켰습니다. 그냥 대단한 양반을 둘도 없는 남편을 모신 데는 게 큰 자랑이었어요. 그 당시에 무슨 동창회 같은 모임에 나가면 야 너 학교 때 꽤 허영심도 크고 그랬는데, 어떻게 지금 이러고 사느냐. 닭을 기른다며 이러면서 무시를 하는 거에요. 그게 반발이 되어서. (그당시에는 1960년대만 해도 김수영은 그저 참여 시인이지 이렇게 위대한 시인이라는 걸 잘 인식을 못해요. 그 당시만해도 서정시 청록파 시인이 으뜸입니다. 그런데 그 양반은 모든 관념이라든지 서정 같은 걸 다 부인하잖아요. 혹시 시 구절에도 조금 낭만적이고 흐름이 좀 조용하고 그래서 내가 옆에서 베끼면서 아 이게 좋다 하면 거칠게 또 고칩니다. 그 당시에 제가 한 말이 있어요.) 그래 내가 김수영 시인하고 사는데, 김수영은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시인이야 이렇게 큰 소리를 뻥 쳤어요.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40주기가 2008년도였어요. 그때 그 친구가 그 소리를 듣고 감명을 듣고 신문에서 광고를 보고 신문회관까지 찾아왔어요. 신문회관에서 40주기 학술대회를 했거든요. 그래서 그 친구가 그 말을 다시 확인시켜주더라고요. 그래서 아 내가 참 그런 말을 했지. 그런 긍지로 살았어요. 그러니까 더 없는 감동의 연속이고 정말 나를 이렇게 오늘날까지 지켜주고 또 그 에스프리로 나를 이렇게 생활을 유지해 나간다는 거. 그러니까 상식적인 행복을 넘어서서 진짜 대단한 행복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섯 분한테 드리고 싶은 질문은 연극 보면 연출자가 배우들과 고민 많이 하면서 만든 연극 같아요. 준비하시면서 혹시 가장 좋아하는 시가 하나 있다면 알려주시구요. 연출자님께 드리고 싶은 질문 두개가 있는데, 지난번 알리바이 연대기 때도 재엽님 역할을 정원조 배우가 하셨고, 이번에도 또 하셨잖아요. 혹시 굳이 재엽님의 역할을 정원조 배우에게 맡기시는 이유가 있으신지 궁금하고요. 대사중에 “재엽아 너는 연극을 왜 하냐”이런 대사가 있는데, 이번 연극을 준비하시면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원정 배우

저희가 1월에 워크샵을 했을 땐 저도 시대적 배경을 많이 알지 못했어요. 그 당시엔 “거미”라는 시가 저한테는 되게 와닿았습니다.

오대석 배우

대답을 하기 전에 여기 다 계신 분은 김수영 시인의 시를 읽어보셨을테고 좋아하시니까 남아계실 것 같은데요. 꼭 발화해서 읽으시길 권해드립니다. 눈으로만 읽지 마시고 꼭 정답은 없으니까 그날 느낌대로 시를 꼭 소리내어 읽다보면 저도 이번에 하면서 많은 걸 배우고 있는데, 매일 매일 달라요. 제가 시를 계속 하잖아요. 저의 대사들은 거의다 산문에서 나온 말들이거든요. 이걸 매일 계속 발화를 하다 보니까 그때마다 조금 달라지는 것 같아요. 최근엔 “저 하늘이 열릴 때”가 그런 거 같은데. 여기 계신 분들은 집에 돌아가셔서 시를 한번 그냥 소리 내서 자기가 가장 편한 곳 있잖아요. 샤워하다가 아니면 술 드시다가 정말 그 시를 만끽을 한다는 건 눈이 아닌 거 같아요. 내가 말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오거든요. 그게 여러분들 안에 김수영을 찾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김현경 여사

남편의 작품 중에서 최고 작품 같다고 생각하는 건 “도취의 피안”이라는 시에요. 그게 정말 시를 쓰는 시의 방법론이라든지 이미지라든지 에스프리라든지 이런 것이 대단히 높은 시로 알고 있습니다. 너무 이미지가 추상적이고 그래서 물어봤어요. 시가 감동이 큰데 정말 누가 흉내낼 수도 없는 정도의 시라 생각하는데, 도대체 무슨 얘기냐 했더니, 이건 이 양반이 사회주의에 대한 하나의 향수라고 그러시더라고요. 사회주의라는 게 인도주의에서 왔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양반이 의용군을 갔다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돌아와서 정말 사경을 헤매었어요. 정말 죽을 고비를 두 번 이상 넘기면서 살아남은 게 신통하죠. 물론 참여시도 많고 “풀”도 있고 하지만 정말 시작으로서 시 자체로서 평가 받을 때 제가 제일로 생각하는 게 “도취의 피안”이구요. 그리고 또 제가 그렇게 47세에 요절하셨지만 좀 아깝죠. 지금 46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그 젊은 나이와 그 공부 벌레, 진짜 시인입니다. 학문도 깊어요. 철학 서적도 칸트서부터 하이데거까지 원서로 읽으시거든요. 노는 걸 못봤어요. 늘 책만 들고 있었지. 그렇게 간단없이 열심히 공부하셔서 그런지 아쉽다고 하는 양반들이 많습니다. 얼마나 더 좋은 시를 썼을까. 또 시절에 있어서도 경고를 많이 하셨잖아요.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글은 지금 읽어도 누구한테든지 영원한 시인에 있어서는 교과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만서도 제가 생각할 때는 초기시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쓴 시 하나하나가 다 완성이에요. 미완성이라는 건 없습니다. 하나하나 다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합니다.

맹문재 시인

저는 "눈"이라는 시를 제일 좋아합니다. 눈은 김수영 전집에 세 편이 있어요. 처음에 있는 시.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데고 기침을 하자. 눈 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을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뱉자.” 라는 시인데요. 제가 20대 때 김수영을 처음 보면서 저하고 시 같이 습작하던 친구가 저보다 이 시를 먼저 외워서 멋있게 낭송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젊은 나이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80년대 상황이니까요. 뭔가 이렇게 망설이고 눈치보고 문학을 한다는 저도 뭔가 이렇게 어떤 사회적 발언을 했을 때 나에게 불이익이 있지 않을까 이런 걸 망설였을 때 친구가 이 시를 담담하게 낭송하는 걸 보고 제가 시쓰는 방향을 새롭게 가져서 외웠던 시입니다. 눈은 기침을 하자는 젊은이 다운 부르짖음도 좋지만, 김수영 시는 철저히 관념을 배격한 시여서 눈이라는 게 어떤 관념이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직접 눈을 보면서 김수영 자신이 눈에게 자신의 마음을 동화 내지는 투사한 인식의 산물이란 생각이 들어요. 제가 이 시를 문학사상에다 내가 읽은 한편의 시에서 그 때도 이 시를 소개하면서 저의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김수영의 이 시를 읽으면서 시라는 것에 대해서 어떤 시적인것 이런 것이 아니고 자기 눈으로 보고 느끼고 그것을 보면서 자기가 주체성을 가지고 해석하고 나름대로 상징화할 수 있는 것 그런 자신감을 얻게 된 계기를 준 시입니다.

김재엽 연출

저는 작품 쓰기 위해 여러가지 시와 산문을 읽게 됐는데, 희곡을 써야 하는데 자꾸 시를 읽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한 때가 많았습니다. 연극에도 나오는데 제가 대본을―   보통 때도 늦게 쓰는 편이긴 한데―많이 지체가 돼서, 과연 김수영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쓰기 시작했는데, 많이 못 찾은 이유 중에 하나도 시를 한번 씩 읽고 나면 약간은 정지상태가 옵니다. 똑바로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시인이 계속 이렇게 자기 삶에 대해서 투명해지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모습이 많이 나와서 그걸 타인을 보면서 자기를 반성하고, 다른 사물을 보면서 자기 마음을 투영하는 힘이 굉장히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강가에서”라는 시가 있는데, 자기 보다 남루해보이는 어떤 사내를 보면서 대화를 합니다. 그런데 자기보다 훨씬 힘들어 보이는데, 이 사내가 가지고 있는 생의 어떤 건강한 기운은 도대체 뭘까. 자유롭고 그럴 수 있는 힘은 뭐지 이런 걸 반추하는 건데. 연극하는 것도 사실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훔쳐서 이렇게 곁눈질 하면서 만들어내는 건데 거기에 내 자신은 얼마만큼 정직한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던져줘서 고민만 하다가 공연이 이렇게 배우들 몫으로 고스란히 올려진 것 같아서 상당히 송구스러운 그런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저보다 훨씬 멋있게 생긴 정원조라는 배우를 캐스팅하게 되었구요. 정원조 배우가 사실은 두번째 제안할 때 부담스러운 제안이었는데, 흔쾌히 좋아해주었고 서로 오픈한 상태에서 얘기도 들어줄 수 있는 좋은 친구라서 계속 해서 같이 가고 있습니다. 물론 이번에 끝나고 나서는 어떻게 생각이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다음에는 또 얘기를 새롭게 해볼 생각입니다.

저는 시에 대해서도 문외한이고 김수영 시인에 대해서도 오늘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연극을 사랑하는 청년인데요. 남산에서 하는 연극을 자주 챙겨보고 있는데, 작가님에 드리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저와 같이 시와 김수영시인에 대해 잘 모르는 제 또래 관객층에게 이 작품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말씀하시고 싶었는지 그리고 두 번째로 작품 중에 김수영 시인과 강신일 배우의 마지막 장면이죠. 철조망 뒤편에서 마지막으로 휴전협정을 맺은 지 6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우리는 변한게 없다고 말씀하시는 걸 보았는데, 어떤 부분에서 반세기가 지난 이 시대가 변함이 없다고 생각하셨는지가 궁금합니다. 

김재엽 연출

작품 초반에 광화문 광장이 나오구요. 광장과 청와대 앞을 시를 읽으면서 걷는 행위는, 지금 김수영 시인의 시를 읽을 때도 우리는 결국 동시대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읽는다면 그런 모습일 거 같다는 측면에서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과거와 소통을 해보려고 하는 이유가 지금 현재 많은 사회적인 모순이나 갈등들이 50년대 60년대 김수영 시인의 시대들의 갈등들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미루고 미루고 못본척하고 지나쳐 온 것들이 있기 때문에 저는 그런 것들이 분단이나 한국전쟁 언론의 자유 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표현의 자유라고 생각한 거 같아요. 그런 부분들이 시인이 몸부림치면서 얘기했던 부분들인데 사실은 우리는 50년이 지나서도 그때 당시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지거나 혹은 시인이 온몸으로 괴로워 했던 예술가의 모습들이 우리는 어떤 부분은 간과하면서 내가 예술하려고 하는 부분만 생각하고 있지 세상과 자기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지 않나 이렇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리고 메시지라고 할 건 없지만, 이 시대 후배들 혹은 세상에 대해서 자기가 자신을 아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이 들어요. 나는 모르고 있다. 혹은 모른다라는 사실 때문에 위축되어서 말 못하고 있는 게 많은 거 같은데, 내가 느끼고 내가 아는 것 만큼 내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느냐, 사실은 그게 큰 문제인거 같고요. 알아야지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르는 거 궁금한 건 또 물어볼 수 있는 거고, 그래서 시인한테서 제일 많이 발견했던 게 세상과 맞서 싸우는 투사의 이미지라기 보다도 내 자신한테 얼마만큼 솔직한지 내가 정당하지 못한 거에 대해서 내가 얼만큼 괴로워 할 줄 아는지 자기 양심의 문제로부터 세상을 변화시키고 혁명을 꿈꾸는 것이 내 양심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제일 크게 다가왔기 때문에 혁명이란 말도 어릴 때는 사회적으로 뭔가 대단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뭔가 부담스러웠는데, 사실은 그게 내 자신을 내가 속이지 않고 지내는 것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맹문재 시인

우리 김수영 시인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격랑 격변의 시대를 온 몸으로 헤쳐나가려고 했던 시인이죠. 그래서 한마디로 말한다면 김수영 시인이 온몸으로 지향했던 건,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국적 모더니티를 추구했던, 한국적 근대화를 추구하려고 했던 시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는 외적인 환경들, 분단이라든가 언론의 자유라든가 기존의 유교적 인습이라든가 제도 이런 것들에 대항하려 했던 거 같아요. 오늘 김현경 여사가 여편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하나의 단어를 통해서 한국적 근대화를 추구하려고 했던 면모를 설명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김수영 시인이 여성을 일컫는 호칭 중에서 여편네가 가장 많아요. 여인 여성 그녀, 영자 등의 구체적 이름도 있지만, 여편네가 제일 많아요. 이 여편네를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해서 여기 앉아계신 사모님을 보고 시에서는 여편네라 했지만 시인은 여편네를 하나의 시적인 상징체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만용에게”라는 시가 있어요. 그 시는 양계장을 하면서 경영 적자가 나니까 여편네가 김수영 자신에게 나무랍니다. 계란 값이라든가 모이값을 가지고 나무라는데, 거기에 대항하는 시거든요. 나는 여편네에게 질 수 없다라고 외치니까 언뜻 그 시를 읽어보면 자전적인 이야기여서 사모님을 지칭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데, 그 때 여편네라고 하는 것은 그런 자본주의의 속물근성을 가지고 있는 대상인 것이죠. 근데 이 자본주의라는 게 우리가 속물근성으로 따라가는 그런 근대화를 이루어선 안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는 근대화여야 하는데,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의 대상으로서 여편네라고 칭한 거에요. 그렇다면 만약에 다른 언어로 예를 들어 사장놈이라든가 이런 말도 있는데 왜 여편네라고 했을까라는 것이 궁금한데, 바로 그런 점이 김수영 시인이 공부를 많이하고 시대를 온몸으로 저항하는 나름대로의 전략이죠. 왜냐면 자본주의라는 적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기 때문에 대항하는 전략도 단순해선 안되요. 사장 이렇게 쓰면 단순하잖아요. 사장이 어떻다라는 건. 여편네라는 말은 두 가지 속성이 있는데, 하나는 친밀하죠. 부모 형제보다도 친밀한 말이면서 또 여편네라는 말은 고용주와 고용인처럼 계약관계로 되어 있어요. 이혼을 하면 완전히 남남이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여편네라는 말은 아주 친밀하면서도 아주 객관적인 언어인 거에요. 그랬을 때 여편네라는 말을 통해서 그 속성을 자본주의가 우리 생활에 얼마나 침투되어 있어요. 우리를 속물근성으로 만들어 주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나를 옭가매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칭할 수 있는 말로 여편네라고 하는 것이죠. 그 대항체로 객관화하니까 그 대항체로서 적으로 삼을 수 있는 말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언뜻 읽으면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김수영 시인이 그렇게 자유정신을 지향하고 근대적 시정신을 가지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반여성주의적 언어를 사용했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김수영 시인은 여성을 비하하려 했던 게 아니라 자본주의 속성에 물들어 가는 자신에 순응하지 않고 대항하기 위해 여편네라는 호칭으로 저항하려고 했던 것이죠. 물론 여성주의 입장에서 보면 잠재된 내면의 남성주의적 면이 있다든가, 어디까지나 그것은 반여성주의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엔 그건 지나쳐 보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김수영 시인은 한국적 근대화를 추구하려 했던 것이고 그것이 관념이나 추상화가 아니라 지금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처럼 철저히 자기 반성적이고 자기 성찰을 통해서 나가려고 했던 점에서 구체성을 띄고 시적인 힘을 받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김수영의 시어들은 명사들이 많지만 여운이 많이 남고 인상이 짙게 있는데, 그것은 김수영 시인이 쓴 시어들이 명사로 화석화된 게 아니라 다 움직이는 동사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온몸으로 한 단어가 시대에 저항하려고 했던 근대화를 지향하려고 했던 산물이 아닐까 그렇게 봅니다.

직접 한번 확인을 해봐야 겠습니다. 그 사모님, 댁에서 김수영 시인이 사모님을 부를 때 여편네란 말을 한 적이 있는지요?

김현경 여사

집에서 여편네 소리는 안해요. 여보 소리 제일 많이 한 거 같고요. 인간적으로 인격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죠. 정말 가슴으로 존경할만한 대시인입니다.

 요즘 언론의 중립성도 문제지만 그런 것들이 예술에까지도―광주비엔날레나 부산 국제영화제등 처럼― 침범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작품을 준비하시면서 그런 고민은 없으셨는지요. 그리고 제목이 연극에서는 “내안의 김수영을 찾아서”라고 되어 있는데, 제목을 왜 지금의 시 구절로 바꾸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재엽 연출

“어느날 고궁에 나오면서”가 제일 강력한 모티브를 주었던 거 같아요. 작은 일에 분개한다는 게 서로가 조금 양립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분개한다는 건 솔직한데  작은 일에만 분개한다고 해서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질문이 저는 결국 그게 그냥 답인 거 같았거든요. 그 말 자체가. 자기 모습에 대해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그 문장에서 다 나와버린 것 같아서 그렇다면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시인의 모습이 우리한테, 나한테는 있는가. 부제는 그런 면에서 붙여 봤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뭐 이 정도 작품하는 건 아직까지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요새는 압박을 가하거나 할 때 대놓고 하지 않거든요. 지원금 신청하면 떨어뜨린다든지 6개월이 지났는데 기억하고 있다든지 이런 식으로요. 어떤 일이 있겠죠. 있을 거 같고. 지금도 연극계에서는 연극인들이 세월호 관련해서 천막 농성하고 단식을 길게 하는 바람에, 뭐 꼭 그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문화예술위원회 쪽에서 35년동안 멀쩡하게 해왔던 (서울)연극제를 대관 심사에서 떨어뜨린 일도 있습니다. 나란 되게 소심한 사람입니다. 대범하게 잡아가든지 이러면 확 눈에 띄기도 하고 관객도 좀 많이 올 것 같은데, 철저히 무관심합니다. 조선 일보 기자들도 보고 가셨는데 기사는 안써주시고. 사람들한테 대화할 수 있는 브릿지(bridge)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뭘하자고 충동질하거나 제가 뭘 하겠다고 주장하는 것도 전혀 아니구요. 오히려 우리가 대화할 수 있는 하나의 길로서 극장이란 게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보여주고 보고 가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면, 우리도 사소하게 뭔가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정도의 차원이었지 이 작품이 대단한 걸 하는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문제는 없었습니다.


최근에 희곡아닌 문학작품들이 연극무대에 많이 올려지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소설을 연극화하고 또는 소설을 낭독하는 공연도 있고, 이번엔 시가 중심이 되는 그런 공연인데, 극작가이자 연출을 겸하시는 입장에서 극작가로서 시가 자신에게 주는 가능성 또는 무게감, 반대로 연출가로서 시가 가진 가능성들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김재엽 연출

소설을 가지고 연극을 한 적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김소진 소설가님의 『장석조네 사람들』이란 작품을 가지고 연극을 한 적이 있는데요. 저는 기본적으로 소설은 내러티브에, 영화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고 시가 오히려 연극에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김소진 소설가의 작품은 대사가 구어체로 방언을 사용하셔서 언어 자체가 그냥 그대로 살아 있었기 때문에 바로 연극이 되었던 거 같아요. 이번에 시 같은 경우는 세상이 하도 회귀를 하니까 정치라든지 세상을 통치하는 방식에서 너무 옛날 목소리가 나오니까 저희들 세대만 하더라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목소리 사고 방식이라서 여기에 대해 과거의 우리 선배 선생님들은 어떻게 외쳤고 어떻게 대응을 하셨는지가 궁금해서 옛 시인들의 시를 읽어 봤습니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 부담스러운 목소리를 가졌던 어르신들, 접어 놓았던 시인들을 다시 꺼내서 봤는데, 그때 부담을 느꼈던 건 거기서 제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던 게 가장 컸던 거 같아요. 그들이 그 목소리를 내서 일종의 스스로 존재하려고 애썼다는 그 모습이 그때는 단지 하나로 어떤 수양의 관점에서 보였다면, 지금은 내가 하루를 살더라도 내 스스로 존재해야 한다라는 그 목소리가 되게 실존에 걸린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시가 좀 읽히기 시작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그 전에는 읽지 못했던 시들이 이제는 읽히는 걸 느끼면서 시가 만약 무대에서 발휘된다면 관객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겠구나, 그리고 좋은 배우님들하고 같이 시가 공감대를 울릴 수 있으면 어떤 드라마적인 구성이나 잘 만들어진 연극 이런 거 말고 그냥 그 목소리 자체만 가지고도 충분히 우리에게 동시대적으로 살아 있을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극 중에서도 김수영 시인의 시론이 소개되었습니다. ‘시는 머리로 쓰는 것도 아니고 가슴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쓰는 것이다.’ 라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연출 선생님께서는 이 몸이란 것이 어떤 것일까,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하고, 오대석 배우님께 그렇다면 연기라는 건 어떤 것이라 생각하시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김재엽 연출

全존재라는 말도 많이 하지만, 존재 그 자체인 거 같아요. 머리나 생각을 하는 것과 느끼는 것 그것 자체를 구별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 자체로서 사실은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지프의 신화를 말하는 것 처럼 존재하는 하나의 방식이 시를 쓴다는 것이고 예술 한다는 것도 사실은 예술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내가 존재하는 방식이 예술이다. 이렇게 받아들여지더라구요. 그런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과연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그런 상황을 겪었다라는 느낌이거든요. 과연 진짜 전존재로 온몸을 받쳐서 작품을 마주해본 적이 있는가라는 생각이 그 말 속에서 반성하게 되더라구요.

오대석 배우

가장 중요한 기본은 자기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것이 기초가 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가지고 있는 연기에 대한 생각은, 우선 인간은 누구나 똑같이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똑같다라는 건 예를 들어 인간의 성격이 백만 가지가 있다고 한다면 모두가 똑같은 퍼센테이지로 태어나는 거죠. 흔히 우리가 보고 있는 나쁜 성질, 좋은 성질들이 백만 가지라 해도 모두 똑같이 가지고 태어나지만, 어디서 어떤 환경에서 자랐느냐에 따라서 퍼센테이지가 옮겨지는 거죠. 그후에 사회적으로 해선 안된다는 게 있으면 그 비율을 바꾸게 될 거고, 물론 바꾸지 않는 사람도 있어서 그래서 지금의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나온 것이겠지요. 하지만 제가 전제하는 건 어쨌거나 사람은 다 똑같은 거에요. 우리가 길을 가다가, 저는 남자니까, 섹시한 여자를 보고 흥분하기도 하고, 때로는 화가나서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그런 걸 한다는 것에서 내 안에 그 성질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거죠. 단, 내가 사회적인 제한에 따라서 그런 걸 감추고 있는 거라는 거죠. 그런 전제하에 제가 생각하는 연기를 하는 방법은 첫번째로 절 믿는 것인데 (예를 들면 살인자 연기를 하려면) 저도 살인자라는 걸 인정해야 해요. 그러면 살인자 역할을 맡을 때 저에게 남아 있는 0.0001 프로 남아 있는 이 살인자의 성질을 배우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 프리즘을 통해서 백프로로 만드는 거죠. 백프로로 만들면 제가 무대에서 살인자가 되는 거에요. 그 다음에 공연이 끝난 다음에 분장을 지우면 그 프리즘을 통해서 다시 나로 돌아오게 되는 건데, 제가 후배 배우들이나 선배 배우들에게 자주 하는 얘기는 제가 알고 있는 세상의 유일한 면죄부의 공간이 종교가 아니고 무대라는 겁니다. 여기서는 역할에 따라 살인을 잔인하게 할수록 박수를 받게 되더라구요. 이 시작점은 나를 믿고 나를 사랑하는 것인데, 그만큼 사람들을 믿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해요. 그래야 제가 가지고 있는 성질을 키워서 하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되게 극단적인 역할을 맡은 경우에 그분들이 그 역할을 너무 잘 수행하고 나서 길을 잃어버려서 잠깐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거나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시잖아요. 저 개인적으로는 중간과정의 프리즘을 좀더 잘 끊임없이 연마하고 있다면 이 (프리즘을) 오고가는 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녹취 정리 임승태

2014년 10월 10일 금요일

<황금 연못>과 사랑의 올바름

에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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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조재현이 대학로에 세운 새 극장에서 <황금연못>이란 미국 드라마를 하고 있다. 이순재와 신구라는 걸출한 시트콤 스타 원로 배우가 더블 캐스트로 주인공 역할을 맡고, 여기에 그들의 부인 역으로 맞춤한 나문희가 출연한다. 덕분에 평소 대학로 극장에서는 보기 드문  중년 부부나 가족 단위의 손님들이 객석을 채우고 있었다. TV는 연극 무대에서 관객과 배우를 빼앗아 가기도 하지만 다시 데려오는 요물임에 분명하다.

스키장 리조트를 운영하는 기업의 극장이라 그런지 객석은 초보용 슬로프처럼 길고 완만하게 펼쳐져 같은 규모의 극장보다 많은 관객을 받을 수 있는 반면, 무대 폭은 좁아 무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이 자못 가파르게 펼쳐진다. 그곳을 자주 왕래해야 하는 노만 역의 신구 선생에게는 물론 누구에게도 인체공학적인 계단이 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미국 응접실 연극의 환경을 갖추고 있는 무대에 또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뒷무대 전체에 그려져 있는 커다란 '연못'의 이미지이다. 제목에서 즉각적으로 환기되는 것이지만, 엄밀히 말해 그 이미지가, 그리고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과연 연못이라 할 수 있는지는 조금 더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전에 따르면 연못이란 "연꽃을 심은 못"이고, 다시 못이란 "넓고 오목하게 팬 땅에 물이 괴어 있는 곳", 간단히 말해 작은 물 웅덩이를 일컫는다. 못이란 늪보다 작고, 늪은 다시 호수보다 작은 규모의 웅덩이를 지칭한다는 국어사전의 기준을 한편에 두고, 다른 한편으로는 pond를 영어사전에서 찾아본다. Webster 사전에 따르면 pond란 보통 lake보다 "작은" 물 웅덩이를 일컫는 것이다. 실제로 극에서는 집배원 찰리가 보트를 타고 우편물을 배달하고 있고, 첼시는 거기서 수영을 하고 있으며, 노만과 빌리는 릴 낚시를 하고 있다. 무대 배경 그림 역시 이러한 활동이 가능한 정도의, 그래서 우리가 보기엔 분명 호수로 보이는 것이 그려져 있다는 것 또한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확성을 기하고자 "황금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원작 제목의 전치사까지 살리지 않는 이상 황금못은 같은 색상의 망치가 먼저 떠오르고 말 것이다. 번역의 옳고 그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제목을 옮기는 것도 이렇게 복잡한 일이라면, 미국에서 만들어진 이 연극이 한국 배우에 의해 한국어로 공연되는 순간 상당히 다른 의미로 전달되고 변형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예를 들어, 극중에서 노만은 펜실베니아 대학 영문과 명예교수로 소개되고 있는데, 대부분의 한국 관객에게는 그 대학의 학풍은 커녕 그곳이 좋은 곳인지 아닌지도 전달되지 못한다. 또한 노만이 비록 자신에게 곧 다가올 죽음을 의식하면서 냉소적인 말들을 내뱉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부인의 아름다움에 반해있는, 꽤나 전형적인 가정적인 미국남자임을 머리로 알 수 있지만, 그러면서도 신구를 통해 (그리고 아마도 이순재를 통해) 내 눈 앞에 나타나는 노만이 자꾸만 한국의 아버지상과 겹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이 문제는 이 극의 중심 갈등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는다. 노만은 자기가 사랑하기로 선택한 여자에게 순정을 바치며 그 사랑을 표현하지만, 선택하지 않고도 사랑하는 또 다른 여자인 자신의 딸과는 잘 지내지 못한다. 첼시는 마흔이 넘도록 유년 시절에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은 아버지에게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고, 노만 역시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상태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네 상황에서는 딸바보란 말이 유행하듯 부인에게는 인색해도 딸에게는 너그러운 아버지들이 더 많다는 점에서 이런 상황이 낯설 수도 있다. (물론 대학교수는, 게다가 명문대 교수는, 누구든 잘 인정하지 못한다는 점을 덧붙이면 충분히 납득가능한 이야기가 된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기 까지가 어려울 뿐 갈등은 별로 특별한 계기 없이 해결된다. 미국의 한 리뷰에서 이 극을 "소박하고 아름답다"고 했다면 바로 이 심심한 갈등 해결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짧은 극은 사랑이란 주제를 다층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보다 문제적인 작품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 이 극에는 부부 간의 사랑이라는 적법하고 '정상적인' 사랑이 중심에 놓여 있으나, 그 주변으로는 실패한 사랑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랑도 함께 배치되어 있다. 에셀을 통해, 사실은 찰리의 전언을 다시 한번 중계하는 형태이긴 하지만, 언급되는 레즈비언 커플은 정도에 있어서는 노만과 에셀에 뒤지지 않고 시간에 있어서는 더 오랫동안 사랑하고 이제 세상을 떠나지만,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사랑이라 그들의 삶도 사랑도 이 황금못가에 숨기고 있어야 했다.

찰리와 첼시의 관계는 그저 찰리가 첼시에게 몇 차례 추파를 던지고 첼시가 거절하는 것 이상의 서브텍스트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공연에선 생략된 것으로 기억되지만) 찰리와 첼시는 어릴 적 서로에게 관심과 호감을 가지고 있던 사이였으나, 명문대 교수 아버지에겐 시골 마을에서 신문이나 배달하는 집배원이 결코 자기 딸의 짝으로 생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에셀이 찰리의 (이상한) 웃음까지도 사랑스럽게 보고 그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것은 이처럼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해 어머니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상 같은 것으로 보인다. 서양 드라마 전통에서 전령messenger이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줄 뿐 극의 중심에 놓여질 수 없는 운명이니(실제로는 그래선 안되겠지만) 찰리의 실연은 드라마적으론 대단히 정당한 일이다. 자꾸만 실없이 내뱉는 그의 웃음은 결코 웃을 수 없는 그의 심적 상태를 반어적으로 표현하는데, 다만 이번 공연에서는 그에게 주어진 얼마 되지 않는 출연 분량을 보충하기 위한 제스쳐로 느껴지기도 한다.

비록 영화 버전에 대한 리뷰이긴 하지만 로저 에버트가 이 극에서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은 부분은 첼시의 남자 친구 빌 레이가 노만과 둘이서 나눈 대화이다. 여기서 빌은 노만에게 그의 딸과 같은 방에서 자도 되냐고 허락을 구하는데, 여기서 빌이 구하는 것은 사랑의 적법성을 다시 한번 환기시킨다. 이 이상한 대화가 필요한 이유는 이후로 드러나듯이 두 사람의 사랑은 일반적이지도 적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유럽 여행 중 브뤼셀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돌아온 다음 빌은 그제서야 자기 아들의 엄마, 그러니까 전 부인과 관계를 정리하러 떠난다. 막장 드라마로 발전할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이 상황은 노만이 그 둘을 아무렇지 않은 듯 받아줌으로써 별일 아닌 것으로 정리된다. 노만이 자기 커플도 처음부터 적법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 결코 가볍지는 않다. 하지만 이 문제가 최소한의 정보만으로 어물쩍 넘어가지 않았더라면, 관객들의 비난을 면하긴 어려웠을 테지만, 이 극이 노년 커플의 소박한 사랑 이야기 이상으로 기억될 수 있었을 것이다. 입센 이후로 사실주의극은 언제나 관객을 불편하게 (해야) 한다. ㉦

로저 에버트의 영화 리뷰 링크
http://www.rogerebert.com/reviews/on-golden-pond-1981

한편, 진선미 의원이 동거를 법으로 인정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http://omn.kr/ahcw

postscript

이 글을 공개하고 난 뒤 뭔가 석연치 않아서 급기야 구글 맵에서 메인 주에 있다는 Golden Pond를 찾아보았다. 실제로 이 이름의 못은 검색되지 않지만, 이 지역은 크고 작은 pond와 lake가 아주 많이 있다. 아마도 석양에 황금빛이 된다고 해서 Golden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이를 통해 이 지역이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노만과 에셀 부부에게 매우 적합한 장소임도 밝혀진다. 흥미로운 것은 각각의 물 웅덩이의 이름들이다. 그곳에는 백두산 천지호 만한 크기에 버젓이 "pond"란 이름을 붙이고 있다. 물론 그것도 오대호에 비하면 연꽃이나 심을 작디작은 못에 불과하다.


2014년 9월 5일 금요일

인터렉티브와 미래의 연극

2014 두산아트랩 리뷰 8
에스티

약 한 세기전 전기 조명이 처음 등장했을 무렵, 아돌프 아피아는 장차 조명이 연극 무대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지 내다보았다: "라이트는 거의 기적적인 유연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밝기를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으며, 팔레트처럼 색깔도 자유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그것은 음영을 창조할 수도 있고, 음악이 그러는 것처럼 공간에 진동의 조화를 퍼뜨릴 수 있다. 우리는 조명에서 공간의 표현력 전부를 추출할 수 있다. 물론 그때 공간은 연기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1954, 파비스 <연극학 사전>에서 재인용). 다른 곳에서도 아피아는 조명의 "무한히 크고 다양한 효과"를 강조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당시 전기 조명은 그야말로 걸음마 단계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피아는 무대의 모든 요소들이 "유기적 통일성"을 갖춘 미래의 연극을 구상했고, 크레이그 역시 무대 위에서의 이미지, 동작, 리듬 등으로 이루어지는 장면이 연출가에 의해 총체성을 획득한 새로운 예술을 기대했다. 그들의 시대에 그것은 기대에 불과했고 그후로도 오랫동안 그러했다. 하지만 그들이 꿈꾼 미래가 우리에게는 이미 현실로 자리하고 있다.

카입/황정은/이경화가 함께 만든 "타토와 토"를 보면서 우리 역시 아피아나 크레이그처럼 미래의 연극을 꿈꾸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물론 이번 공연 제목 앞에 "다원"이란 레테르가 붙어야 한다는 건 아직 아피아/크레이그의 미래 조차 도래하지 않았음을 알리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무대 예술이 다원적 요소들의 종합 혹은 총합으로 이루어지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다원연극"이란 말이 필요없을 것이다. 다원이란 접두어는 여전히 연극이 텍스트와 배우의 연기 중심의 예술임을 방증한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무대에서 시도되는 "인터렉티브 미디어 아트"는 미래 연극에서 시각적 요소가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될지 내다보게 해주는 기회로는 충분하다. 공연 중간에 하드 웨어 문제로 잠시 중단 되었던 것도 불편하기 보다는 그러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말끔한 미래를 꿈꾸게 해준다는 점에서 공연의 일부같이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주 같은 공간에서 터져버린 조명기는 상당히 시대착오적이다.

우리가 좀더 나이가 든 미래에 보게 될 연극에서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영화관에서 보고 있는 현란한 CGI(computer-generated imagery)가 사용될지도 모르겠다. 어떤 측면에서 영화의 제작 환경이 연극에 더 가까이 다가왔다는 느낌이다. 장면을 촬영하고 편집하는 방식과는 별개로 배우가 실제로 연기하는 환경이 그러하다는 말이다. 스틸컷으로 보게되는 영화 제작 현장은 우리가 스크린에서 최종적으로 보게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배경은 온통 초록색 스크린 (크리스토퍼 리브가 수퍼맨이던 시절만 해도 파란색이었는데, 헐크가 만들어지는 지금은 초록색이다) 으로 뒤덮여 있고, 배우들은 텅 빈 공간에서 앞으로 후반작업에서 채워질 그 영상들을 상상하며 연기를 펼친다. 이순신 장군에게 열두척의 배가 남아 있었다고 하나, 명량은 단 세 척의 배만 제작한 다음 복사하기와 붙여넣기--훨씬 더 복잡한 실제 작업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로 채워넣었다고 한다. 10여년 전에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 빌>이 나왔을 때, 연극 공부를 갓 시작한 나로서는 그 영화가 무척 흥미로웠다. 영화가 마땅히 보여줘야 할 사실적 일루젼을 취하지 않고 믿기로 하기 make-believe 의 방식으로 그냥 거기 집이 있는 걸로 한다, 또는 무시무시한 셰퍼트가 짖고 있는 걸로 한다는 식으로 장면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0년 뒤 우리가 보는 많은 영화들이 그런 식으로 촬영된 다음 후반 작업이란 걸 하면서 일루젼을 만들어 내고 있다. 사실같은 CGI를 보는 것도 분명 재미있는 일이지만, 나는 그 장면이 촬영되던 순간의 연극적 상황을 상상해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바로 그 촬영장의 상황이 그대로 무대로 옮겨져 와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본다. 무대 위에 그린스크린을 설치해 두고 배우들이 연기를 펼친다. 관객들은 아무 것도 없이 연기하는 배우들을 온전히 즐긴다. 그런 다음 집에 돌아가, 혹은 돌아가는 길에 유튜브로 CGI가 채워진 버전을 다시 보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난 지금 2100년대를 얘기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20세기 초기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시도된 키노드라마가 기술의 발달로 요즘 재활성화된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만큼 무대연극과 영상의 접목은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 속에서도 예술가들에게 하나의 도전 과제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인터렉티브 연극이 더 많아지길 기대한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좀더 잘 알려진 텍스트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텍스트가 낯설 수록 관객은 텍스트에 주의하게 되고 결국 텍스트가 주도하는 연극이 될 수밖에 없다. 제작하는 입장에서야 수개월간 그 텍스트가 익숙해졌겠지만 처음 보는 관객은 이야기를 따라가느라 많은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다른 요소들은 부차적인 '나머지 요소'들로 전락한다. 무대 위에서 오로라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는 것은 황홀한 일이다. 하지만 텍스트가 오로라를 반복적으로 선창하고 ("오로라, 라, 라, 라 ...") 그것을 비쥬얼로 보여준다면, 그러한 인터렉티브는 잠시 신기할지언정 그동안 재현적인 연극에서 해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쪼록 건투를 빈다. ㉦



***
이것으로 저의 2014 두산아트랩 리뷰 연재를 마칩니다. 함께 해주신 예술가 여러분과 독자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14년 8월 31일 일요일

모호, 이런 꿈을 꾸었다.

by 에스티

"몽유병환자처럼 잠시 동안 걷는 작가의 경로를 따라온다면 아마도 꿈의 뚜렷한 혼잡함과 삶의 환경들의 다루기 불가능한 뒤섞임의 유사점을 발견할 것이다"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꿈 연극> 작가의 말에서 (조성관, 홍재범 역, 연극과인간, p.7)

조명기, 사다리, 청소기. 본 공연이 시작되기전 오프닝 매치가 한 차례 있었다. 공연 시작 전 갑자기 뻥하는 소리와 함께 조명기 하나가 터졌고, 램프 파편이 무대에 흩어졌다. 관객들은 깜짝 놀랐고 무대 위에서 졸면서 꿈을 이야기해주려고 기다리던 배우도 하마터면 부상을 입을 뻔 했다. 잠시 졸린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던 배우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은, 남윤일 PD가 곧 설명한 것처럼, 공연이 아니라 사고였다. 공연 시작은 잠시 지연되고 무대 위엔 커다란 사다리와 청소기가 나타났다. 이런 돌발 상황이 배우나 관객들의 집중력을 떨어뜨린 측면은 분명히 있었겠지만, 이런 식으로나마 극장의 생얼을 구경하는 것도 관객으로선 색다른 재미다. 다들 무대의 fantasy를 기대하면서도, 환상이 제거된 민낯을 보고 싶은 욕망도 함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번 공연은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다. 원작인 나쓰메 소세키의 <몽십야>도, 윤성호 전진모 두 작/연출가의 이전 작품도 접해본 적없고, 심지어 출연하는 배우들도 대부분 낯설다. 나는 첫대면에서 말을 잘하는 편은 못된다. 그럼에도 어떤 형태로든 글을 쓰기 위해 생각을 정리하고, 심지어 <몽십야>도 인터넷에서 찾아 급하게 읽었다. 이 공연의 제목이자 첫 대사이기도 한 "이런 꿈을 꾸었다."는 소설을 시작하는 문장이었다. 거칠게 나마 낭독 공연의 형식과 장면의 극화가 접목된 형식으로 난 받아들였는데, 솔직히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았다. 이유를 몇가지로 생각해보았는데, 우선 이 공연은 나보다 더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을 모델 관객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 같고, 최소한 원작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즐길만한 공연을 만들고자 했던 것 같다.

이 작품의 주제인 "꿈"의 속성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뭔가 집중이 잘 안되고 '졸립다면' 그건 그만큼 꿈을 잘 그리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객석에 앉아서 조는 걸 즐기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꿈 이야기인데 너무 말똥말똥하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진짜 꿈 같은 연극이라면 일단 졸리게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어떤 공연이 관객의 의식을 몽롱하게 만드는 걸 무의식이 활동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아무튼 지금 내 기분은 어제밤 어떤 꿈을 꾸었는데,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을 하지 못해 갑갑해 하는 그런 심정과도 닮아 있다. 어쩌면 다가가기 어려웠던 이유는 '내 꿈'이 아니었기 때문일른지도 모르겠다. 소설 원작의 에피소드나 그걸 가져온 공연에서 서술되는 꿈들은 흥미로운 게 많았다. 다만 무대에서 서술자를 통해 꿈이 이야기될 때 그 이야기는 관객을 직접 청자로 놓고 이야기 되기 보다는 어딘가 비껴 있다. (배우가 앉아 있는 의자의 각도가 이미 45도로 틀어져 있다.) 객석에 앉은 나는 그 이야기를 훔쳐 듣게 된다. 스토리텔링을 훔쳐 듣고 있는 느낌이랄까. 화자는 육신을 입었으되 청자는 명확하지 않다. 1인칭 화자와 eye contact이 되지 않으니 (소설에서는 독자가 문자를 응시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도 있겠으나) 나의 우둔한 내 머리는 이내 집중을 놓쳐 버린다. 연출이 이번 공연에서 의도한 것은 생생한 꿈이 아니라 '아스라한' 꿈이었다고 하는데, 내가 느낀 것도 이 아스라함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까?


2014년 8월 22일 금요일

별일없이 화려했던

이파리드리, 별일없이 화려했던

에스티의 첫날밤에

약 4개월 간의 휴식이 끝나고 아트랩 공연이 재개되었다. 그 4개월 동안 대한민국은 밑바닥으로 계속 가라앉고 있다. 애써 감춰왔던 우리의 밑낯이 그야말로 낱낱이 드러난 것만 같다. 40일간 단식을 하는 사람, 그와 함께 단식을 하는 사람, 그를 대신해서 단식을 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러한 시위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 이제 그만 지겹다고 하는 사람도 목소리를 높인다. 온 나라가 짜증과 분노와 우울증에 빠져들고 있다.

맛있는 걸 먹는 것도, 아니 배고프다고 느끼는 것도 미안한 상황이다보니, 주변 사람에게 연극 보러 간다고 말하기 민망할 뿐더러 나 자신도 마음이 흥하지 않는다. 관객들만의 느낌은 아닌 것 같다. 영화인들에 이어 연극인들마저 광화문에서 단식에 들어갔다. 영화 <명량>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관객들이 영화속에서나마 현실의 리더쉽 부재를 보고 싶어서 뿐만 아니라, 이 영화가 단 한순간의 희극적 이완도 허락하지 않을만큼 엄숙하기에 이 상황에서 영화를 보며 즐긴다는 게 그나마 덜 미안하게 느껴져서이리라.

이파리드리의 "별일없이 화려했던"은 내 또래의 두 남자가 살아온 10여년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사소한 부분들이 너무나도 친숙하다. 오늘 극장을 찾은 관객의 절반 정도는 아마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것 같다. 장면 마다 최소 한번 쯤은 공감의 웃음을 이끌어 낸다. 그야말로 별일 없지만 80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무대 위에서 특별한 '극적' 사건은 벌어지지 않지만, 11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은 조금씩 벌어져 있다. 원하는 것을 하고 살지만 뜻한 대로 잘 되지 않는 것 같은 기현과, 인생 재미로 사는 게 아니라며 순응하되 열심히 살고 번듯한 직장을 얻은 성우. 이 둘은 매 장면마다 옷을 바꿔 입으면서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상대에게도 관객에게도 속내를 직접 털어놓지는 않는다. 관객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기현에게서 좋은 직장에서 돈을 많이 버는 성우를 부러워하는 기색을 읽을 수 있고, 직장도 있고 이제 가장이 되는 남부럽잖은 성우가 청춘이 마감됨을 안타까워 하는 것도 눈치 챌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게 특별한 것도 아니다. 좋게 말하면 보편적 정서를 섬세하게 다루는 것이지만, 다르게 말하면 "줄거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텅빈 무대에서 장면마다 큐브를 통해 장소를 암시한다. 연출은 "지극히 일상적인 극을 몇 가지 큐브로만 표현한다는 것이 자칫 위험한 선택일 수"도 있다는 우려를 표했는데, 기타, 노트북에 서류 더미들을 비롯하여 카스 맥주, 맛동산, 신라면과 같은 세세하고 리얼한 소품이 위험성을 다 덮어 버린다. 그러한 소품들이 관객들에게 즉각적으로 정서를 불러 일으키는 데 효과적인 건 사실이지만, 한입 먹고 남겨진 신라면처럼 일회적으로 소모된다면 큐브를 통해 얻고자 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 의문이 든다.

이야기는 2010년에 시작해서 1999년으로 갔다가 다시 2010년에 끝을 맺는다. 각 에피소드에서는 그 해를 기억하게 하는 인물들, 물건들이 언급된다. 몇년 후 이 작품이 다시 공연되면서 2014년, 그들이 서른 넷이된 해가 덧붙여지면 어떨까? 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로 그려질까? 그때 그들이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오늘은 어떤 모습일까?㉦

사진제공: 두산아트센터

2014년 8월 2일 토요일

뒤늦게 스텔라의 "마리오네트" 뮤비를 보다

에스티

1.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별star과 별자리constellation의 어원적 연관성을 설명하기 위해 라틴어 어원 stella를 얘기하던 중이었다. 나는 스텔라 얘기를 하면서 그 아이들은 소문으로만 들어 겨우 알고 있는 현대 스텔라를 예로 들고 싶었다. 그런데 앞에 앉아 있던 한 학생이 내가 스텔라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내자 마자 자동적으로 미묘한 탄식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이윽고 다른 아이들도 뭔가 음흉한 웃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7세 남자 고등학생들이 그런 일관된 반응을 보이는 건 단 한가지 밖에 없는데, 불행히도 나는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스텔라를 알려주려고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 택시로 쓰이던 차를 예로 들려고 했던 나의 불찰이 컸다.

이제 내가 학생들에게 배워야 하는 상황이 왔고, 학생들은 기꺼이 필요한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스텔라—공식 스펠링은 Stellar인 듯한데, 통상 Stella라고 쓰이고 있다—는 걸그룹의 이름이며, 그 이름은 무척이나 선정적인 그들의 뮤직 비디오를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얼마나 야하길래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해져서 오늘 집에 돌아가서 확인해보겠다고 했더니, 학생들은 나에게 세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하나는 부인 몰래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소리는 들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아마도 소리를 죽이고 엄마 몰래 본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진심어린 충고가 아닐까 생각된다.) 마지막 조언은 다름 아니라 “성인 인증을 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2.
“참혹하다. 한국 대중음악은 외형적으로는 'K-pop 한류'라고 해서 대중음악 산업이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의 일원이 되었는데, 이는 진정한 의미의 음악을 학살하고 난 뒤 얻은 대가다. 링컨이 그런 말을 했다. "한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있고 모든 사람을 순간적으로 속일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이지는 못한다"라고. 한국의 음반 산업은 IMF를 지나면서 한번 몰락했다 '다이내믹 코리아'답게 극적 도약에 성공했지만, 음악이 아닌 소녀들의 옷을 벗기고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자라야 할 청년들에게 가혹한 복근을 강요함으로써 성공을 거뒀다. 이런 것은 역사의 시간으로 보면, 한순간 존재하는 페이크(fake)일 뿐이다. 이제 음악은 휴대전화 컬러링처럼 아무 때나 바꾸는 배경음악을 만드는 자나 소비자에게나 그냥 1회성 소비재일 뿐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대중음악 평론가이자, 나 스스로 대한민국의 몇 안되는 1급 문화예술 비평가라 평가하는 강헌 선생이 한 인터뷰에서 2014년 현재 우리 대중음악에 대해 한 말이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이 기사를 읽으면서 “음악이 아닌 소녀들의 옷을 벗기고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자라야 할 청년들에게 가혹한 복근을 강요함으로써”라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복근을 언급함에 있어서는 스스로를 “걸신”이라 부를만큼 미식가, 혹은 음식 애호가인 강헌 선생이 남자 아이돌을 바라보는 시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소녀들의 옷을 벗기고”의 대목에서는 일차적으로 소녀란 말에서 소녀시대가 떠올랐지만, 그와 함께 그제서야 스텔라가 떠올랐다.

3.
이 뮤비가 공개된 지 거의 반년이 지나고서야 나에게 소식이 들려왔다는 건 이 프로모션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흥미로운 점은 유튜브의 조회수가 470만을 넘겼다는 것보다 시청자들이 남기고 간 흔적에 있다. 이 뮤비에 대해 시청자 중 3만 2천여명이 '좋아요'를 클릭했는데, 그에 못지 않게 2만 9천여명이 이 뮤비가 싫다고 표하고 있다. 이 수치는 비슷한 접근을 하고 있는 개리의 “조금 이따 샤워해” 뮤비나 가인의 “피어나” 뮤비와 비교했을 때 큰 차이를 나타낸다. 이 두 뮤비에도 '싫어요'가 없지 않지만 '좋아요'에 비해 지극히 작은 수에 불과하다. 보통 정치적으로 논쟁 거리가 있을 때에나 찬반이 비슷한 숫자로 표시되기 마련인데, 도대체 이 뮤비는 뭐가 문제였길래 시청자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안좋았음’을 표하게 만들었을까?

가사를 대충 살펴보면, 화자는 헤어진 연인에 대해 아직 미련이 남아 있는 상태인데, 그 연인은 다시 돌아올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연락을 한다. 옛 연인에게 놀이감 밖에 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화자는 자신을 “너에게 찢기고 아프고 아픈 인형” 마리오네트에 비유한다. 실연의 아픔과 자기 연민을 노래하는 것은 특별할 것도 없다.

안무 또한 제목과 가사 내용에 호응하여 끈에 메달린 인형을 재현하는 동작이 적지 않게 들어가 있다. 그렇지만 모두가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멤버들의 몸매를 부각시키는 나머지 동작들이다. 무엇보다 “지울 수가 없는 너니” 부분에서 반복되는 움직임, 즉 두 팔을 등 뒤로 뻗어 잡고, 오른 발을 한 걸음 앞으로 내 딛은 다음 엉덩이를 반시계방향으로 느리게 3회전 하는 대목과, 뒤로 돌아 자기 엉덩이를 손으로 밀어 올리는 동작은 요즘 언론이 즐겨 쓰는 표현대로 “충격적”이다. 게다가 카라가 “미스터”에서 선보인 엉덩이 춤이 펑퍼짐한 의상을 입고 이루어진 반면, 스텔라는 이 춤을 레오타드를 입고 추고 있으니 이 정도면 국내 심의가 허용하는 최대치라 할 수 있다. 이 영상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의 언론 반응을 보면 이 정도면 19금이 아니라 “29금”이라는 제목의 기사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관련된 대부분의 기사는 노이즈 마케팅을 조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텔라 멤버들이 이 뮤비에서 마리오네트를 재현하는 것은 텍스트의 요구로 보인다. 노래 가사를 대충이나마인지한 시청자들은 미련 때문에 여전히 끌려다니는 (아마도) 여성 화자에게 감정 이입을 시도하게 되고, 그리고 그게 윤리적으로 옳은 선택이라 여기게 된다. 하지만 멤버들의 몸과 그것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키는 그들의 춤은 그 자체로 상품화된 인형으로 다가온다. 여기서 몸의 관능성이 텍스트와 충돌을 일으킨다. 마리오네트 같은 처지의 화자의 마음에 공감하기는 커녕 기획사 사장님이 내건 줄에 자기 몸을 맡긴 네 명의 인간 인형을 보게 되니, 이 모순은 결코 즐거운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마리오네트”라는 제목은 역설적이지만 이 뮤비의 핵심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4.
순전히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눈높이에 다가가고자 “마리오네트” 뮤비를 찾아보았으며, 순전히 이 글을 쓰기 위해 반복해서 보았음을 힘주어 밝힌다. 나는 무려 데뷔한 지 3년이나 된 스텔라를 오늘에야 알게 된 문외한이다. 혹 스텔라의 팬들이 이 글을 읽고 불쾌했다면 “미안하다~”라고 말하고 싶고, 어떤 점이 좋은건지 알려주길 희망한다.

참고자료

마리오네트 공식 뮤비
http://www.youtube.com/watch?v=NCQpzHPYRUc

No Cut Version
http://www.youtube.com/watch?v=ObmOW5GZRP8

http://heungseon.com/5704 (가사 참고)

강헌 인터뷰 전문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9049

2014년 6월 28일 토요일

뺑뺑뺑 pros & cons

by 에스티
Pros

- 김은성의 새로운 시도
- 드림팀 앙상블: 달나라 동백꽃, 떼아뜨르 봄날, 놀땅, 드림플레이, 제12언어, 이루, 그린피그 배우들이 한자리에
- 인물 이름을 외울 필요없는 간편함
- 연극적 상상력이 충만한 두 시간
- 선돌만의 아늑함
- 단언컨대 의자는 최고의 소도구

Cons

- 김은성의 새로운 시도
- 정치권에 빼앗겨 버린 철수
- 웃을수록 서글프다
- 사운드를 다 받아내지 못하는 극장 환경
- 짧은 공연 기간
- 이 시각에도 계속되는 뺑뺑뺑 한국사 

2014년 6월 26일 목요일

바보 햄릿

에스티의 첫날밤에



대학로에 문제적인 포스터가 하나 걸렸다. 공연 포스터라는 이름을 하고 있지만 사실상 초상화 그 자체이다. 밀집모자를 쓴 한 남자가 웃고 있다.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그려져 있다. 한국 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이 도상을 그저 한 시골 촌부로 여길 순 없을 것이다. 여기에 초상화 상단에는 그의 별명 ‘바보’가 쓰여져 있으니 이 그림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너무나 명백해진다.

그(의 얼굴)에 대한 반응은 극명하게 나뉜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얼굴이 들어간 달력이나 걸개 그림을 자신의 가정이나 일터에 두고 지내고 있다. 이런 행동이 그에 대한 추모의 방식이라면, 반대로 그를 혐오하는 사람들 또한 나름의 방식으로 그를 소비한다. 이들은 주로 포토샵이라는 기술을 통해 그를 전혀 새로운 맥락 속에 배치시킨다. 그들은 가라앉는 세월호 유리창에서도 그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한다. 망자를 욕보임으로써 쾌감을 얻는 그들의 심리는 한편으로는 屍姦症(necrophilia)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어느 곳에나 그의 얼굴을 기입하는 충동을 느끼는 그들은 표면적으론 그를 조롱하는 듯 하지만 사실상 누구보다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해 말 <변호인>이란 영화가 개봉했을 때 제작사 측에서는 실존 인물의 이름을 좀처럼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감독이나 주연배우는 가급적 그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 않음으로써 이 작품이 특정 정치인과 세력의 전유물이 되지 않도록, 그래서 그를 지지하거나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의 노력은, 비록 뒤이어 개봉한 <겨울왕국>이 알 수 없는 대흥행을 이루면서 약간 빛이 바래긴 했지만, 관객수 1100만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반면, 지난 5월에 김기덕 감독은 <일대일>이라는 영화를 극장에 걸면서 이 영화가 “[그 분]에게 드리는 고백이자 자백”이라 밝혔다. 이 영화는 그를 직접 언급하거나 그의 일대기를 그린 것도 아니지만 감독은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라는 의제가 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불행히도 이 영화는 크게 실패했다. 관객수 7000명이라는 초라한 숫자로 개봉 8일차에 영화를 내려야 했다. 실제로 <일대일>은 감독이 말하듯 우리 사회에 결여된 상식에 대해 이야기 한다. 비록 때로는 영화밖 현실을 너무 노골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변호인>을 본 1%도 공감하지 못할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극장을 찾을 7000명이 김기덕의 팬인지 영화에서 그가 꿈꾸던 세상을 보고 싶었던 사람들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분명한 건 그 변호인의 실명을 직접 거론한다고 해서 관객들이 김기덕이라는 문턱을 쉽사리 넘어오진 않는다는 점이다.

<바보햄릿>은 이러한 흐름의 연장에 있다. 일단 첫날 공연에서는 포스터가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한 것 같다. 객석은 거의 만석이었고 적지않은 관객이 그에게 우호적인 그룹에서 단체로 극장을 찾은 것 같았다. 공연 중 객석은 더웠다. 난방도 냉방도 되지 않는 이 무렵 소극장이 늘 그럴 수도 있지만 배우들이 내뿜는 에너지에 관객들은 열심히 반응했다.

추모의 성격이 강한 공연임에는 분명했다. 극의 말미에는 그가 남긴 유명한 연설이 동영상으로 재생된다. 이미 관객들은 전반부에서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모난 돌이 정맞는다.”가 언급될 때 그 영상을 떠올릴 수 있는데, 마지막에 오리지널 버전이 재생되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에 무대 바닥에 놓여진 국화는 그를 추모하는 직접적인 제스쳐이기도 하고,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것이기도 하다.

<햄릿>의 주제를 애도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연결은 꽤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를 애도하는 것은 단순히 그를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으로 머물지 않는다. 극에서 직접 언급되기도 하거니와 그는 햄릿의 아버지 처럼 “나를 기억하라”하지 않고 “나를 버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버리는 일은 그대신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기억하고 슬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이번 공연에서 바깥 프레임을 이루는 기사 정정 에피소드는 결국 한 소시민의 각성과 변화된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실천을 강조한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겠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이 시점에서 이 연극은 먼저 간 그들을 남은 자들이 어떻게 기릴 것인지 질문한다.

“햄릿” 그 자체는 새롭지 않았다. 최근 트렌드에 따라 Shakespeare retold 방식의 설정, 테넌트의 <햄릿>에서 집중적으로 사용된 CCTV 등이 이 공연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무엇보다 이윤택의 <햄릿>과 닮은 점이 많다. 극 초반에 햄릿이 벗은 몸을 보여준다든지, 왕과 오필리어의 관계, 그리고 Closet Scene에서 햄릿이 어머니를 겁탈하려는 모습 및 왕비가 왕자를 달래주는 장면은 이윤택 버전의 되풀이라 할 수 있다. 햄릿이 오필리어에게 보내는 편지의 문구에서도 닮은 점을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 연출 자신이 이윤택 <햄릿>의 초대 햄릿이란 사실을 기억할 때 이런 아이디어들을 단지 이윤택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해아래 새로운 햄릿은 없다. 하지만 꿈이라는 상황 설정이 이 점을 가중시키는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러한 장면들의 정당성이 쉽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

7월 20일까지
대학로 아름다운극장 (070-8776-1356)

2014년 6월 21일 토요일

공존을 위한 말걸기: <배수의 고도>

by 에스티



언제부터인지 소위 웰메이드 드라마에서 어떤 불편함을 가지게 되었다. 얼핏 보기엔 톱니가 딱딱 맞물려 매끄럽게 돌아가는 듯하지만 연결 부위가 되면 배우들의 동작이 왠지 어색해보이고 리듬이 흐트러지는 느낌이랄까? 어쩌면 사실주의를 표방하는 연극들에 대한 괜한 반감이 작동해서 그런 부분만 주목해서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올해 상반기에 가장 기대하고 있던 <배수의 고도>가 ‘사실주의적 문제극’의 외형을 갖추고 있음을 극장에서 확인한 순간 약간의 실망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소재가 가지는 무게감 때문에 위기와 절정에 이르기 위해 발단과 전개를 차근차근 밟아가는 것을, 그것도 두번씩이나, 보고 있는 것은, 비록 그 사이에 코믹 릴리프가 적지 않게 주어짐에도 불구하고, 다소 지루한 일이었다. 쯔나미 직후를 시점으로 하는 1부와 그로부터 12년후를 배경으로 하는 2부 각각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발동하기까지 배우들의 잦은 등퇴장과 필수적인 정보들이 찔금찔금 흘러 나오는 것을 보고 있는 일은 아주 즐겁지만은 않았다.

특히나 나 자신도 그렇게 느꼈지만 많은 사람들이 1부와 2부를 두 편의 연극이 인터미션을 사이에 두고 연달아 공연되는 것처럼 보았다. 이 공연을 호의적으로 본 사람들에게서마저 2부가 사족처럼 느껴졌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드라마트루그에게서 들은 바에 따르면 원작에서는 인터미션 없이 연달아 이야기가 진행된다고 하는데, 아마 이렇게 했다면 양 파트의 연관성이 좀더 분명하게 드러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2부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은 그 자체가 나빠서라기 보다는 너무 만족스럽게 끝난 1부 탓이 큰 것 같다. 특히나 1부 마지막에서 하성광이 연기한 노자키씨의 고백이 큰 울림을 만들어냈는데, 거기서 이미 충분한 만족을 얻었기 때문에 인터미션 이후 다시 시작하는 듯한 리듬이 부담스럽게 다가오고, 정작 그렇게 시작한 미래가 머리를 건드리되 가슴으로 다가오긴 어렵다는 점 또한 작용한다.

안좋은 이야기로부터 시작한 것은 이 작품을 결코 폄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 작품의 저점이라 생각되는 부분들을 재빨리 언급하고 본론에 들어가기 위함이다.

작년에 같은 극장에서 타다 준노스케 연출의 <가모메>를 보면서도 어렴풋이 생각했었다. 일본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후쿠시마 대재앙은 어떤 의미이고 앞으로 어떻게 그들의 작품에 등장할 것인가? 타다의 <가모메>의 무대에서는 쯔나미를 직접 언급할 일은 없었지만, 그때 무대는 내 눈에 너무나도 건조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 건조함은 쯔나미가 지나가고 나서 바싹 말라버린 것 같은 건조함이었고, 연출 스스로도 무대 구성에 있어서 쯔나미를 염두에 두었다고 밝힌 바 있었다. 누이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레어티즈의 첫 반응은 이미 너무 많은 물을 먹었으니 자신은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결핍을 표현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이미 그것이 충분하다는 반증인 것이다.

작품에 대한 정보를 보다가 놀란, 어쩌면 조금은 의아했던, 지점은 이 작품이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고 6개월만에 초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정도면 놀라운 속도이다. 남들이 이 사건의 여파에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을 때 작가로서 자신의 임무가 그 문제를 다루는 데 있다는 것을 빨리 자각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달성할 수 없는 신속함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작가는 3.11 이후 6개월만에 12년 후의 일본을 상상한다. SF 팬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일지 모르지만, 미래 세계라는 설정이 무색할 정도로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아이패드의 세대 수가 두 자리가 충분히 넘어갈 시점이지만 여전히 두껍고 무거워 보이는 아이패드를 사용한 것을 보면 연출이나 디자이너 역시 그 부분에 대해 특별한 비전을 가지진 않았던 것 같다. (안 한 걸 못했다고 하면 안된다. 하지만 더 잘못된 것은 안 한 걸 한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불변성이 2막이 보여주는 주제일지도 모른다. 그때도 지금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 말이다.

1막에 등장한 인물들이 2막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다시 등장하는 것은 분명 '의도적인' 억지 설정이다. 이 정도면 1막 이후 카타오카 다이고의 죽음으로 2막에서는 등장하지 못한 선종남 배우도 등장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런 엉뚱함을 받아들이고 나면, 작가가 인물을 선악의 구도로 나누거나 특정한 입장을 대변하는 꼭두각시로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보인다. 옳고 그름의 대결이 아니라 옳음과 옳음 사이의 갈등이라는 연출의 표현대로 이 연극엔 악당이 없다. 있다면 쯔나미라는 거대한 괴수일테고, 이 괴수에게 상처받은 사람들과, 어떻게든 살아남아보려는 사람들만이 보인다. 노자키씨와 유우 사이에 있었던 일은 일반적인 극 세계에서도 실제 세계에서도 용서받기 힘든 일이지만, 그 날이 다 용서한다. 노자키씨와 유우의 고백에 의해 먼저 관객이 용납하니, 이시즈카 선생님도 용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심지어 정치인 오다기리마저 공공의 선을 위한다는, 우리 현실에서는 있을 것 같지 않은, 진정성이 느껴진다. 사실 갈등이 벌어질 수 있는 인물 구성이 아니다보니 1막이나 2막의 중심 사건은 사실상 처음부터 좋게 해결될 수 있는 수준에서 벌어지는 갈등이고, 이점은 사실주의적 드라마트루기로서는 약점일 수도 있다.

주제나 형식에 있어서나 입센의 문제극이 떠오르는 이번 작품은 특히나 <민중의 적>을 떠올리게 한다. 2년 전 샤우뷔네 베를린에서 토마스 오스터마이어의 <민중의 적>을 볼 수 있었다. 원작의 2막 2장에는 스토크만 박사가 온천 개발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강연을 하는 장면이 있다. 원작에도 스토크만이 객석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관객을 향해 직접 연설하도록 고안되어 있는데, 이날 공연은 이러한 방식을 따르면서 아예 관객들로 하여금 스토크만 박사에게 직접 질문하고 장내에서 즉석 토론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었다. 관객들이 참여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이 시간은 다행히 토론하기를 좋아하는 독일 관객들에 의해 차고도 넘쳐났다. 2막의 타이요는 자신이 공공의 적이 될지언정 거대한 악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믿는 투사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스토크만 박사와 유사하다. 물론 그는 이 문제가 토론이나 데모로 해결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급진주의자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작가 자신이 타이요의 방식을 지지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극 전체가 생각할 문제를 던져주는 발제문 같다. 여기에 연출가의 에필로그가 이 발제문을 읽고 토론해야 할 쪽은 이웃나라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우리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전세계에서 원전밀집도가 가장 높은 나라는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고, 그 원전이 크고 작은 고장을 일으키는 와중에도 새로운 원전이 지워지고 또 계획중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2014년 5월 9일 금요일

국립극단 <템페스트> 프레스 리허설

에스티의 첫날밤에

국립극단 450년만의 3색 만남 III <템페스트>
2014년 5월 9일(금)-25일(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연출 김동현
무대 여신동
조명 최보윤

일부러 폭풍을 일으켜 배를 조난 시키는 이야기. 어쩌면 이 시점 아니 시국에 도저히 해선 안될 연극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든 걸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프로스페로의 힘은 그저 부럽기만 하다. 한동안 우리는 연극을 보면서 바다, 배, 침몰 등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우리의 상처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 공연이 이번 사고를 맞춰서 기획된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이 시국에 '이런 연극'을 하는 것 또한 우리 사회가 아픔을 기억하는 한 방식이 되길 기대한다. 그리고 앞으로의 <템페스트>는 2014년 4월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이나 <템페스트>를 통해 연극을 죄지은 사람을 반성하게 만드는 힘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 힘은 주로 말을 통해 전달되는데, 특히나 이 작품은 "말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작품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에서 윤색을 맡은 김덕수 작가에 따르면 그 이유는 이 작품 자체가 "프로스페로 연출의 연극"이기 때문이다:

바다 한가운데 섬에서 벌어지는 <템페스트>의 모든 사건은 섬주인 프로스페로의 말에서 시작하고 그의 말로 끝난다. 나폴리 왕 일행의 배가 난파당하는 첫 장면을 비롯해 작품 전체가 프로스페로 연출의 연극이기 때문이다. 내 말대로 하라는 연출자 프로스페로의 지시와 말씀대로 했다는 무대감독 에어리얼의 보고가 사건들마다 반복된다. 둘이 주고받는 말은 부부의 눈짓과도 같은 신뢰의 언어이다. 친밀한 신뢰의 말은 처음 만난 청춘남녀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조난당한 나폴리 왕자 페르디난드는 낯선 섬에서 만난 미랜더가 자기 나라 말을 쓰는 것을 듣고서야 그냐가 여신이 아니라 지상의 처녀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그 말로 사랑을 나눈다. (프로그램, 4)
아쉽게도 8일 오후에 있었던 프레스 리허설에서는 세 장면 정도를 부분적으로 시연했기에 그 말들이 구체화되는 모습은 부분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배가 난파되는 첫 장면에서 그 긴박한 상황을 배우들이 무대 앞에 있는 마이크 앞으로 나와 '말함으로써' 보여준다는 점이나, 캘리번이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 '스피커'라는 점은 그의 '괴물성'을 말에서 찾고 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오달수의 캘리번에 대해 많은 관객들이 궁금해할 것임이 분명하지만, 이날 리허설에서는 맨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 아주 잠깐 출연할 뿐이었다.) 그외에 여러 배우들이 함께 약속된 움직임을 사용해서 장면을 만들어가는 방식이나 다양한 소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은 김동현 연출의 이전 작품들의 스타일을 공유하고 있다. 무대에는 쓰러져 가는 극장 무대가 펼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또한 이 작품이 프로스페로의 연극임을 드러내고 있다. 프로스페로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서 옷을 갈아입는 것 역시 지극히 '연극적'이다. ㉦







2014년 4월 18일 금요일

<알리바이 연대기> 리뷰를 대신하여

by 에스티

지난 해 많은 관심과 호평이 있었던 <알리바이 연대기>의 재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월초에 오늘 첫공연을 예약했었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극장에 갈 기분이 아니었지만 공연을 보고 나왔습니다. 가는 길에도 새로운 뉴스를 열어보고 무소식에 실망하는 일을 반복했었습니다. 화가 났고 지금도 화가 납니다. 이것 밖에 되지 않는 우리 모습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 부끄럽고, 아이들이 어른들의 잘못을 떠안는 게 너무 미안합니다. 기자들은 이번 사건과 관련한 모든 팩트들을 찾느라 분주합니다. 정치인들은 자기를 뽑아주면 이런 일이 없을 것처럼 기웃거립니다. 죽은 자들과 유가족 앞에서 자기들은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역겹습니다. 하지만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것밖에 되지 못하도록 만들고 방치해온 우리들 모두의 탓입니다. 천안함, 공주사대부고 해병대 캠프, 경주 리조트 붕괴 사고 때 내 잘못은 아니라며 우리가 만들었던 알리바이의 결과를 우리는 오늘 보고 있습니다.

ⓒ권은비 http://omn.kr/7u4h

2014년 4월 5일 토요일

[에스티의 첫날밤에] 노래하는 샤일록

450년만의 3색 만남 II - 노래하는 샤일록

공연기간 2014년 4월 5일(토)-20일(일)
화-금 20시, 토/일 15시, 월 쉼
원작 윌리엄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극본/연출 정의신

국립극단의 셰익스피어 연작. 지난 달 <맥베스>에 이어 이번에는 <베니스의 상인>이다. <베니스의 상인>은 셰익스피어의 국내 수용 초기에 가장 인기 있었던 작품이기도 한데, 특히나 이 작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인 샤일록은 지금도 거의 주인공처럼 여겨진다. 사실 나머지 인물들의 이름은 상당히 까다롭다: 안토니오, 밧사니오, 포샤, 로렌조, 제시카 정도가 그나마 기억할만 하고 나머지 이름들―그라시아노, 사리니오, 사루니오, 네릿사 (프로그램에 따라 표기)―은 발음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그라치아노Gratiano 라든지, 레오나르도Leonardo 같은 이름들은 이 이야기의 배경이 베네치아라는 점과 코미디라는 사실을 강하게 드러낸다. 아마 지금 우리식으로 하면 인물의 이름이 카푸치노, 마키아토 정도일테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아무튼 중요한 것은 우리는 <베니스의 상인>하면 샤일록이 먼저 떠오른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누가 샤일록이 제목에서 말하는 바로 그 베니스의 상인이라고 말하더라도 이상한 점을 쉽게 눈치채지 못한다. 그만큼 비록, 프로그램에서 강태경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베니스의 '상인'은 안토니오이고, 샤일록은 '고리대금업자'이지만, 우리에게는 이 작품에서 샤일록이 중요하게 느껴진다는 말일테다.



3색 만남의 제목이 <베니스의 상인>이 아닌 바람에 서두가 길어졌다. 정의신 연출은 이번 공연의 제목을 <노래하는 샤일록>이라 이름 붙였는데, 결과적으로 이 제목은 공연의 특징을 잘 요약하고 있다. 기본적인 이야기 줄거리는 원작을 따라가지만 샤일록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고자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고, 일부 장면은 뮤지컬에 준할 정도로 노래와 음악 사용이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번 공연은 이 작품이 흔히 비판받는 반유대주의적 시각을 수정하기 위해 극작가이기도 한 연출가가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고쳐쓰고 있으며, 그에 따라 제시카와 로렌조의 서브 플롯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아버지의 재산을 훔쳐 로렌조와 함께 달아났던 제시카는 로렌조의 망나니짓에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고 아버지 곁으로 다시 돌아간다. 원작에서 샤일록이 딸의 도주보다 재산을 잃은 것을 더 마음 아파했다면 이번 공연은 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좋은 아버지로 그려진다. 심지어 돈 대신 안토니오의 살점을 떼내는 일에 있어서도 원작에서는 안토니오의 반유대주의적 고리대금업 방해 행위에 대한 앙심을 동기로 설정했다면, 정의신의 샤일록에게 있어 그의 살을 요구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망가진 딸에 대한 복수로 그려진다. 반면 로렌조는 사랑하는 여자의 재산을 도박으로 탕진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샤일록의 인간미가 부각되는 만큼 로렌조는 나쁜 남자가 될 수밖에 없다.




정의신 연출은 인터뷰에서 안토니오의 우울증을 설명하기 위해 동성애를 가져왔다고 밝히고 있다(25). 동성애는 직접적인 언급이나 재현으로 나타나기 보다는, 안토니오가 밧사니오를 비롯한 친구들이 보이는 유대인 혐오에 동참하지 않고 오히려 샤일록에게 연민을 보이는 태도에서 그 또한 또다른 의미에서 소수자임을 표명한다. 포샤 또한 죽은 아버지가 남겨놓은 유언 때문에 자기 뜻대로 삶도 사랑도 누리지 못한 불만을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희극이 이렇게 진지해도 되는 걸까? "희극적 카타르시스"를 바라고 온 관객들이 결말에 당황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정의신은 상관 없다며, 오히려 관객이 당황하기를 바란다고 답했다(24). 어쩌면 정의신의 이름을 보고 극장을 찾는 관객들은 이 정도로 당황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재일교포 출신의 작가가 이 문제에 무감각하다면 더 이상하게 느껴졌을 테니까. 대신 이 진지함과 함께 공연은 시종일관 웃음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어릿광대 란슬롯은 원작의 재담 대신 슬랩스틱으로 관객에게 웃음을 제공한다. 여기에 안토니오의 네 친구들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가며 관객들을 즐겁게 해준다. 그리하여 전체적인 정서적 흐름은 희극과 비극을 오가는 걸로 느껴지는데, 그만큼 그 두 장르는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임을 보여준다.

이번 작품에서 모로코는 보라색 의상을 입고 있지만, 원작에서는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모로코 군주에 대해서만 "위아래로 흰옷을 입은 황갈색의 무어인"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Enter Morochus a tawnie Moore all in white,"   

그중에서도 단연 큰 웃음을 선사하는 인물은 구도균이 연기한 그라시아노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웃음은 무대 위에 구현된 베니스의 지형 지물 (다리와 곤돌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만들어진다. 또한 전반부에서 연기했던 모로코대공의 강렬한 이미지가 후반부의 그라시아노에게 겹쳐짐으로써 그의 말과 행동은 하나 하나가 웃음을 만들어낸다. 코미디를 기대하고 온 관객들에게는 그의 연기만으로도 세 시간이 즐거우리라. 하지만 모로코대공이 만들어내는 웃음은 가장 성공적이기에 곧바로 이번 공연의 방향성과 직결되는 질문을 만들어낸다. 샤일록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과 모로코대공에 대한 웃음은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단순히 구도윤의 뱃살과 헐떡거리는 숨소리에서 웃음을 참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검게 칠한 몸 색깔과 손에 쥔 언월도, 수건으로 대충 말아 올린 터번이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는 반아랍 정서를 건드리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고 해도, 배 나온 사람은 웃음거리가 되어도 괜찮은 걸까? 과연 도덕적으로 완벽한 웃음이란 가능한 것일까? ㉦

덧붙임
벨몬트 포샤의 집으로 설정된 공간에 등장하는 촛대는 그 형태가 유대인의 상징인 메노라(Menorah)를 강하게 시사한다. 혹시나 싶어 관계자에게 포샤를 유대인으로 설정한 것인지 물어보았으나,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들었다. 애초 샤일록의 집에 사용될 것으로 만들어졌다가 리허설 과정에서 새주인을 만난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공연 사진 더보기:
https://www.facebook.com/media/set/?set=a.541617609290750.1073741830.472276802891498&type=3&uploaded=26


2014년 3월 15일 토요일

<정물화>와 <오필리어>

by  에스티
존 애버렛 밀래John Everett Millais, <오필리어>, 런던 테이트 미술관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에서 공연한 <정물화>(유미리 작, 성기웅 연출)에는 실제로 등장인물들이 정물화를 그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리고 실제로 무대 전면에는 하얀 액자틀이 설치되어 있어서 관객들이 액자 속 움직이는 그림을 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무대 뒷면에는 또다른 '프레임'--창틀--이 삼중, 사중으로 겹쳐져 있다.) 그런데 작품 속 대사들을 듣고 있자니 작가가 생각한 정물화는 위의 그림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유미리의 희곡은 오필리어를 언급하면서 시작한다고 하는데, 작품 속에서 나나코가 쓰는 글은 이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지점들이 많고, 또한 극의 마지막 부분에 히가시 수녀가 나나코의 죽음을 전하는 대목에 등장하는 손에 꽃을 쥔 모습 또한 정확하게 이 그림을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유미리의 <정물화>는 이 그림을 극으로 표현한 시도였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근데 이 그림이 정물화인가? 아니다. 그럼 풍경화일까? 모르겠다. 작품 수업 놀이에서 창밖을 보면서 정물화를 그리라고 했던 나츠코가 정물화와 풍경화를 헷갈려했던 것처럼, 이 그림 역시 풍경을 묘사한 듯 하지만 정물화 같은 느낌을 받게한다. 정물화를 영어로는 Still life, 독일어로는 Stilleben이라고 하는데, 17세기에 유행했던 정물화들은 대체로 '꽃과 죽은 생물'로 채워져 있다. 왜 그렇게 랍스터가 자주 등장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물 안에 있어야 할 가제가 식탁 위에 꽃과 함께 놓여진 것처럼, 물 밖에 있어야 할 오필리어가 꽃을 쥐고 물에 떠 있는 이 모습은 둘 다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 그래서 소리없이 조용한(still) 생명체인 것이다. ㉦

Anne Vallayer Coster, <랍스터가 있는 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