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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4일 토요일

다큐라는 형식을 이용한 자기 옹호식의 일기, <밤의 해변에서 혼자>


이예은

홍상수 감독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의 형식을 따라 이 글도 1부와 2부로 구성하였다. 감정적인 크리틱 1부와 관찰자적인 크리틱 2부로 이 글을 구성한 것은 파렴치한 감정 선과 자기 냉소적 관찰 선을 모순적으로 공존케 하는 영화의 형식을 따르기 위함이다. 그러나 정작 이 글의 방향성은 에필로그에 있다. 

크리틱 1부


나의 존재함이 섬세한 만큼 타인의 존재함도 섬세하게 다루어지고, 타인의 존재함이 거친 만큼 나의 존재함도 거칠게 다루어지는 시선. 그 시선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어떠한 세계가 창조되는 것. 작가가 어떠한 서사를 통해 발휘할 수 있는 진실의 비밀은 여기에 숨어 있다. 극적인 서사이든 다큐적인 서사이든, 무대 위의 서사이든 영상 안의 서사이든 말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타인의 감정과 존재는 ‘남의 것’이라 쉽게 비웃으면서 자신의 감정과 존재는 지독히 세심하게 천착하는 형식을 따라간다. 이를테면 명수(정재영 분)의 여자 친구를 ‘여편네’의 전형으로 전락시켜 ‘그런’ 여자들과 사는 ‘그런’ 남자들을 허식적이고 피곤한 존재들로 유형화한다. 그렇게 유형화시킨 인물들을 한 데 잡아 ‘너희들’이라고 지시하며-‘나’는 ‘나’로 표현되지만, ‘너’는 ‘너’라는 개인이 아니라 ‘너희들’이라는 무리로 표현된다- ‘너희들’과 다른 ‘나’의 섬세한 정체성에 함몰되어 세상을 ‘나 vs 너희들’로 이분한다. 하여 ‘너희들’과 달리 최소한 분노할 줄 아는 개인인 ‘나’는 숭고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영화는 시종 분노를 터뜨린다. 1부 술자리에서 소리를 지르는 영희(김민희 분)의 모습은 이 영화가 드러내는 끔찍하리만치 편파적이고 피상적인 시선이 극단적인 민낯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여기에는 나와 너 사이의 어떠한 가능함도 없다. 현실에서는 이원화되어 있던 ‘나와 너’가 ‘나를 넘어선 나’와 ‘너를 넘어선 너’가 되어 영화 안에서 만나 현실을 초월한 어떤 시선을, 어떤 인물을, 어떤 가능함을, 어떤 세상을 만드는 가능성은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영화는 어떤 풍랑이 지나간 후 고요만 남은 듯한 김민희의 선(禪)적인 연기 스타일로 진행되어 따분하리만치 차분한 듯하지만 따라가다 보면 결국 매친 분노에 도달한다. 영화를 보다보면 관객 역시 자연스레 분노를 느끼게 되는데 그 분노는 영화 속에 배치된 철저히 ‘나’를 옹호하는 분노에 동조하는 분노도 아니고, 당연히 홍상수-김민희의 리얼한 관계가 자극하는 어떤 지점과도 전혀 상관없는 분노이다. 관객의 일인으로서 내가 느낀 분노는 현실의 프레임을 영화의 표면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서 스스로가 욕지거리를 해대는 이 영화의 태도에 대한 분노이다. 영화로써 현실의 ‘나’를 옹호하려는 ‘나’, 고작 인터넷 기사에나 대응하려고 만든 정도에 지나지 않는 피상적인 ‘나’만 있을 뿐 영화로 인해 무언가를 향해 보다 확장된 나, 보다 가능한 나, 그리하여 보다 정확해진 나란 찾을 수 없어 보인다.

그래서 영화가 시종 담아내고 있는 것은 제목 그대로 ‘밤 (유예된 시간의 저편 속)’의 ‘해변 (유예된 공간의 저편 속)’에서 ‘혼자’뿐이다. 현실과 관계 맺는 예술이 아니라 현실 속에 함몰된 이 영화는 현실과 예술 사이에서 가능한 일들을 오로지 ‘나 혼자’라는 비좁은 영토 속으로 환원함으로써 작품으로부터 관객을 배제시킨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런 일을 하고 있다. 어쩌면 이 영화의 형식은 ‘너희들’ 모두로부터 단지 ‘혼자’가 되기 위한 ‘나’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 영화로부터 배제되고 소외되어 역시 ‘혼자’가 되어버린 관객 1人인 나는 이 영화의 형식이 의도한 바를 더 없이 충실하게 따라간 것일지도.

크리틱 2부


그러나 거기, ‘밤의 해변’에는 결국 아무도 없다. ‘혼자’라고 표현된 ‘나’ 자신조차도 말이다.   이 작품은 영화를 통해 현실의 ‘나’를 옹호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에 여기에서의 ‘나’는 영화와 현실 그 사이 어디에도 없는 그저 ‘나일뿐인 나’ 밖에는 없다. 그래서 심지어는 그토록 ‘너희들’과는 다르다고 주장한 ‘나’ 자신도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영희라는 인물을 시종 자취 없이 사그라지기를 바라며 이방의 도시들을 유령처럼 떠도는 인물로 만든 이유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라는 존재로서도 그녀는 부재하고 말 것이라는 암시이다. 이러한 암시는 1부의 마지막 장면, 해변에 혼자 서 있던 영희가 급작스럽게 프레임 바깥으로 제거되는 장면으로 시각화된다. (이 장면에서 영희를 프레임 바깥으로 끌어내는 배우는 상징적이게도 영화의 실제 카메라 감독인 박홍열씨이다.) 결국에는 혼자 남았으나 혼자서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그녀의 상태를 말해 주는 장면이다. 시종 상복처럼 검은 옷을 입고 검게 늘어뜨린 긴 머리를 한 여인의 이미지로 영희를 그려낸 것도 시종일관 그녀를 따라다니고 있는 혹은 그녀가 따라다니고 있는 죽음의 욕망, 부재하고 싶어 하는 끈질긴 욕망의 투사이다. 2부에서 해변가 호텔에 들어가자 1부 마지막 장면에서 영희를 프레임 바깥으로 제거시킨 사내가 저승사자처럼 등장하여 열심히 창문을 닦는 행위를 하는 것 또한 아무도 아는 척 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사실, 영희는 열렬히 이곳으로부터 사라지고 싶어 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호소한다.


이 지점에 들어서자 이 영화의 형식에 대한 판단이 전환된다. 이 작품이 그토록 ‘너희들’과 ‘나’를 이분하면서도 더 나아가서는 ‘나’라는 존재 자체도 부정하고 마는 것이라면, 영화는 자신이 구사하고 있는 형식 자체를 냉소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영화의 사이를 그토록 조야하게 비하시켜 놓고 작가는 스스로 자신이 만든 그 형식을 비웃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 다시금 한 줄기 의혹스러운 희망이 생긴다. 현실의 프레임을 영화의 형식으로 이용하면서 그 프레임 안에서 너와 나를 구분하고 거기에서 모자라 ‘나’를 옹호하는 문법은 다큐인 척 하는 그러나 사실은 채 현실을 보조해주기 급급한 현실미만의 치졸한 것들이 저지를 수 있는 극단의 파렴치함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반전은 그 파렴치함을 펼쳐놓고는 스스로가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당히 변태적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현실과 영화, 현실과 예술이라는 경계 위에서 다큐라는 흥미로운 방식을 다시금 새로이 접하게 한다. 이제까지의 홍상수가 저지른 적 없었던 끔찍함이자 그 끔찍함에 대한 졸렬한 자조이다. 하여 이 텍스트는 홍상수라는 인물 전체를 근원적으로 회의하게 만듦과 동시에 언짢은 기분으로 다시금 관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김민희와 홍상수의 리얼한 관계에는 관심 없고, 이 영화를 통해 홍상수가 자기 형식을 끔찍이 이용해 먹고 있는 파렴치한이라는 사실이 시종 실망스러웠음과 동시에 그 실망스러움을 스스로가 전시하고 있는 그의 태도가 다시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다시, 문제는 ‘홍상수의 다큐’라는 형식이다. 단지 영화라는 형식을, 예술이라는 형식을 이용해서 현실에 대고 편파적인 싸움질을 하고 있는 것이 이 영화의 정체성이면서 그와 동시에 현실을 이용하고 마는 이 영화를 작가 스스로가 비웃고 있는 것이 또한 이 영화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정체성이다. 이 지점에서 다큐와 극 사이를 어슴푸레 오고 가며 다큐도 극도 되기를 거부했던 기존의 홍상수는 사라졌다. 아울러 다큐와 극 사이를 망연히 오고 가기 위해 홍상수가 친히 사용해 왔던 반복적인 형식들-꿈 기운과 술기운에 의존한 기묘한 반복적 장면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등-도 사라졌다. 대신 다큐도 이용하고 극도 이용하면서 관객 따위는 됐고 심지어는 영화 따위도 됐다고 선언하며 단지 ‘혼자’가 되고 싶어 사투를 벌이는 홍상수가 새로이 출현한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을 이용하며 자조하고 등지는, 그래서 이제까지 반복적으로 지속시켜 온 숱한 그의 영화적 형식들을 다 내던지고 터럭 하나 걸친 것 없이 혼자가 된 홍상수의 뒤태가 이제까지의 홍상수를 가장 강인하게 드러내주는 본태 같은 것으로 보였다는 사실이다.

에필로그


그러나 영화 전반을 놓고 본다면 영화의 몸체는 양의 비중으로서나 질의 비중으로서나 자기의 형식을 자조하는 관찰 선보다는 자기 형식에 스스로 함몰된 감정 선에 더욱 치중해 있다. 아니 이 둘은 비교의 차원이 되지 못할 정도로 영화는 감정 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영화에서 내 건 관찰 선은 사실 이 모든 감정 선을 다 말해버릴 수 있게 하기 위한 정당방위의 역할을 할 뿐이다.

‘꿈’이라는 프레임을 덧입었을 뿐 영희와 영화감독(문성근 분) 사이의 사랑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뜨거운 술자리나, ‘죽음’이라는 상징적 이미지를 덧입었을 뿐 시종 ‘나’의 정당성을 옹호하며 성난 눈을 치뜬 채 세상을 치받고 싶어 하는 기운은 ‘꿈’이나 ‘죽음’이라는 형식적 외피를 온전히 압도한다. 즉 ‘꿈’이나 ‘죽음’이라는 형식은 작품의 에너지로 전혀 승화되지 못한 채 작품으로부터 이용당할 뿐이며 영화의 내용과 질은 전적으로 ‘너희들’과 분리된 ‘나’의 옹호로 가득 채워져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도 홍상수의 기존 작품들에서처럼 어김없이 술이, 그리고 술을 마시고 취해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의 술은 기존 홍상수 작품에서의 술과는 완연히 다른 기제이다. 이 작품에서의 술은 ‘꿈’, ‘죽음’과 마찬가지로 인물에게 내던져진 것이기는 하나 결코 인물을 훼손시키지 않는다. 이 영화의 영희는 결코 <하하하>와 <북촌방향>의 유준상처럼, <우리 선희>의 이선균처럼 술이라는 장치에 압도당해 끌려 다니지 않는다.      

영화 배후의 사건인 김민희-홍상수의 관계를 이미 전해 들어 알고 있는 대중의 일원인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보는 동안 시종 이 영화가 제발, 부디, 김민희-홍상수의 관계를 넘어서는 영화이기를 열렬히 바랐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나’를 관찰하는 영화적 시선을 형식으로 활용할 뿐 결국 ‘나’를 호소하는 현실적 감정을 텍스트 내용의 요체로 만드는 자기 옹호식의 일기에 지나지 않았다. 영희의 꿈 속 술자리에서 직접 발화되고 있듯이, 우리는 그토록 개인적인 일기만을 늘어놓는 이 영화의 어디로부터 가치(?-가치라는 단어가 이 영화의 리뷰 중간에 개입되는 것이 생경하기는 하지만)를 찾아야 하는지 실로 의문스러워지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의문이 새로이 제기되는 이유는 영화에 내재된 그토록 개인적인 일기에 지나지 않는 진실은 이제까지 홍상수가 보듬어 낸 일기적 가치와는 또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 속의 일기는 자기 질문이 아닌 자기 옹호로 가득 차 있는 일기라는 점에서 말이다. 이 지점에서만큼 홍상수의 다큐는 이 작품으로 인해 한걸음 퇴보하였다. (평단에서는 이 영화로 인해 홍상수의 형식이 한걸음 진보하였다고 입을 모으지만 말이다.) 자기를 질문하는 개인의 나약함은 세상의 어느 저 편과 맞닿을 수 있으나 자기를 옹호하는 개인의 나약함은 세상의 어느 곳과도 맞닿을 수 없다. 다큐에서든 극에서든. 아니 현실에서든 예술에서든.    

결국 이 글은 가치니 성찰이니 초월이니 관찰 선이니 하며 작품을 훈계하는 평면적인 글로 읽혀질 것만 같아 씁쓸하다. 영화를 경험하는 과정과 글을 써 가는 과정에서 정리되지 않았던 혼란스럽고 복합적인 질문들이 기어이 일목요연한 방향성을 틀어 이 글을 만들게 된 것은, 어쩌면 “결코 재현될 수 없는, 그러나 내 속에서 촉발되지 않은 것은 없는” 영화라고 이 작품을 소개한 홍상수가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줄타기를 하면서도 기어이 확고한 하나의 방향으로 영화를 틀어버린 것에 대한 반응이리라. 이 작품을 읽어내는 과정을 통해 다시금 확인하게 된 것은 현실과 예술, 그 사이를 운신하는 다큐라는 형식에 대해 가지는 양가적 감정이다. 현실과 최대한 맞닿아 있으면서 바로, 그 맞닿아 있음으로 인하여 현실을 다시금 바라보게끔 만들어 주는 어떤 예술의 가능성. 하여 현실과 예술 사이의 경계성보다는 현실과 예술 사이의 가능성, 그것이 다큐라는 형식의 미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2014년 3월 28일 금요일

<랑랑 라이브 인 런던>: “무엇이 나와 랑랑 사이를 갈라놓는가?”

by 이진주
메가박스-코엑스에서 2014년 3월 26일 저녁 7시 30분 


1. 목적이 서로 다른 관객들

  어찌하다보니 ‘장애인․노인과 함께하는 GV’의 초대권이 아직 장애인도 노인도 아닌 내 손에 들어왔다. 극장 안을 둘러보니 나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피아노 연주회를 공연장이 아닌 영화관에서 스크린으로 본다는 것에 대해 관객들은 저마다 다른 관점을 가진 듯했다. 얼음 섞인 음료수의 남은 양을 용감하게 후루룩 거리거나 랑랑이 잘생겼다고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진짜 콘서트홀에 앉아있는 것처럼 그런 사람들을 매섭게 쏘아보면서 곡이 끝날 때마다 뜨겁게 박수를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어떤 부류였냐 하면…그냥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그런 관객들을 바라보면서 도대체 라이브 공연을 녹화해서 영화관에서 다른 관객들과 감상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려고 애썼다.

2. 옆 상영관의 포탄소리

  그러던 중에 계속해서 들리는, 피부까지 울리는 초저음. 피아노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고, 연주회 도중에 천둥이 울려서 녹음된 것도 아니다. 돌연 궁금해졌다. 옆방에서 도대체 무슨 흥미진진한 영화가 상영 중일까? 뭔가 ‘구궁’하고 계속 반복되는데… 건물이 무너지거나 포탄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는… <캡틴 아메리카>가 아니었을까?

  실제 공연장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면, 나는 지금 이 공간에서 내가 들을 수 있는(혹은 들을 수밖에 없는) 소리들 중 일부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것은 분명 영화관 측의 ‘배려 없음’에 의한 ‘사고’이다. 다른 영화도 아니고 음악 연주회를 상영하는 방에 다른 사운드가 침범하도록 허용하도록 한 것은 어이없는 실수가 아닐 수 없다. 잊어버릴 만하면 들리는 이 초저음이 나를 자꾸만 랑랑으로부터 떼어 놓았다.

지구를 구하려면 약간의 소음은 어쩔 수가 ...

3. 화려한 카메라 워크

  피아노 공연을 사랑하는 관객들은 공연장에서 자기 나름의 취향의 각도가 있기 마련이다. 연주자의 표정을 보고 싶다면 오른편을 선호할 것이고, 연주자의 들썩이는 뒷모습이 섹시하다고 생각하거나 손가락과 페달 퍼포먼스를 보고 싶다면 왼편이 유리할 것이다. 또 가운데 좌석에서는 연주자의 움직임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연을 촬영한 이번 영상에서는 연주 모습을 왼편, 오른편, 가운데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공중에서 내려다 본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공연장 내부의 구조도 자세히 볼 수 있고, 다른 관객들의 표정도 카메라에 담겨 있었다.

  그렇게 다각도로 랑랑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눈이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손놀림도 다 자세히 볼 수 있었지만, 정작 그의 음악과 소통하지는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수시로 움직이는 앵글은 분명히 그 이유 중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이 콘서트 영화는 모든 각도의 그림을 ‘강제로’ 제공함으로써, 나의 감각이 시각에 더 많이 집중되도록 했다. 청각은 그만큼 주의력을 빼앗겼다. 그리하여 앵글이 이동할 때마다, 즉 화면이 끊어질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는 소리도 같이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4. 쇼맨십의 왕+클로즈업 샷

  랑랑의 쇼맨십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노는 손을 지휘하듯이 살랑거리는 버릇이나 크게 움직이는 몸, 그리고 자신의 연주에 스스로 심취한 듯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내 관객석으로 얼굴을 돌려 동의를 구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지나치게 자주 비추는 클로즈업 샷이었다. 클로즈업된 화면에서, 안 그래도 크고 동그란 눈을 뒤집거나 좌우로 굴릴 때는 대부분의 관객들이 키득거렸다. 설사 랑랑이 아닌 유아인이었다 해도 그렇게 큰 스크린에 클로즈업된 얼굴이 예쁘긴 어려웠을 터. 더구나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동안에 드러나는 다른 이의 표정을 클로즈업 화면으로 보는 일은 강하게 부담스러웠다. 이유는 물론 내가 그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지 않은 까닭일 것이다. 또한 그것이 지시된 극중 연기가 아닌 실제 행위라고 인식하는 데서 오는, 관음적 상황에 대한 불편함일 수도 있다. 나는 차츰 랑랑이 클로즈업될 때마다 목 위로는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클로즈업은 실제 연주회장에서는 볼 수 없는 비현실적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가장 비싼 티켓을 산다고 해도, 혹은 랑랑과 친분이 있어서 피아노 바로 옆에서 지켜본다고 해도 그렇게 확대된 랑랑의 얼굴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다른 영화에서 클로즈업 장면과 달리, 이것은 생생하기보다는 내가 실제 연주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관에서 재생되는 화면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5. 영상과 소리의 미스매치

  클로즈업 샷과 더불어 다소 느끼하고 사색적으로 해석된 듯한 모차르트를 용케 참아내고 드디어 랑랑의 화려한 기교를 볼 수 있는 쇼팽에 이르렀다. 첫 발라드가 끝나고 드디어 나는 한숨을 크게 내뱉고 입가에 미소를 짓는 중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두 번째 쇼팽의 중반부 쯤, 화면이 살짝 삐끗하더니 어느새 소리가 랑랑의 연기를 따라잡지 못하게 되었다. 그 상태로 1분간은 웃겼지만, 더 이상은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상영관을 나와서 땀을 삐질 거리고 있는 관계자에게 “저 영상이랑 소리가…”라고 말하고 있는 사이 몇 사람이 더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티켓 값이 무려 2만원이라던데… ㉦

2014년 3월 21일 금요일

<키스 앤 크라이> - 무대 위에서 실시간으로 만들어지는 영화

by 김재영

영화는 ‘과거'의 이미지를 스크린에 비춰준다. 영화 제작은 영화 상영 이전에 발생한다. 영화관 스크린 속 인물은 지금 내 앞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과거 어느 시점에 이미 카메라 앞에서 움직였다. 나는 항상 카메라보다 늦게 영화를 보는 것이다. 설사 그 영화가 미래의 사건을 다룬 SF영화라 할지라도 그 이미지가  ‘과거’에 속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는, 공연예술이 관객과 같은 시공간을 공유함으로써 현재의 사건을 보여준다는 점과 명확히 구분되는 지점이다. 그런데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그리고 ‘상영’된) <키스 앤 크라이 (연출 : 자코 반 도마엘)>에서는, 카메라맨이 무대 위에서 찍는 영상을 실시간으로 스크린에 투사함으로써 ‘과거’의 이미지가 아닌, ‘현재’ 발생하고 있는 사건의 이미지를 관객에게 보여준다. 따라서 관객은 카메라와 같은 시간을 공유하게 된다.

(사진출처 : LG아트센터)

일반적인 영화 상영이 카메라의 녹화, 재생 기술을 이용하여 과거의 이미지를 현재의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이라면, <키스 앤 크라이>의 카메라는 피사체를 보기만 할 뿐, 본 것을 녹화한 후, 재생하지 않는다. 이는 곧, 공연이 매회 반복될 때마다 카메라맨이 매번 같은 움직임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번째 씬에서 카메라맨이 트랙 인(track in)하여 피사체에 접근했다가 좌상향으로 움직이고, 다시 우하향한 후, 트랙 아웃(track out)하여 피사체에 멀어졌다면, 카메라맨은 매 공연의 첫번째 씬마다 이러한 움직임을 반복해야 한다. 카메라의 녹화, 재생 기술이 제거됨으로써 스크린에 비춰지는 영화 이미지는 과거에서 현재로 바뀌며, 관객은 스크린의 영화를 보면서 동시에, 카메라맨의 디테일한 동작을 공연의 일부로서 바라보게 된다. 이는 비단 카메라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무대 위에 존재하는 영화 스탭들, 이를테면 조명 스탭, 콘솔 컨트롤러, 연출가와 같은 이들의 영화 찍는 행위 자체가 공연의 일부로서 관객에게 보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관객의 눈은, 스크린 상의 영화 이미지와 무대 위  ‘수행자’들의 움직임을 동시에 보게 된다. 무용수들의 손가락 춤은 카메라에 의해 매개되어 스크린 상에 나타나는 동시에, 미디어의 도움 없이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지는 무대 위 동작으로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소품 담당 스탭이 물 속에 잉크를 떨어뜨리는 동작은 무대 위의 행위로서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지는 동시에, 카메라에 포착되어 스크린에 나타난다. (물론 이 경우에, 소품 담당 스탭의 움직임은 카메라 프레임 바깥으로 숨어버리고, 스크린 상에는 화면을 가득 메운 물 속에 잉크 방울이 떨어져 서서히 섞이는 장면만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무대 위 사물들 역시 공연과 영화의 일부로서 동시에 존재하는데, 예를 들면 ‘그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라는 나레이션에 맞추어 장난감 기차가 무대 위에 미리 세팅된 트랙 위를 따라 움직이고, 장난감 기차의 측면에 부착된 초소형 카메라는 트랙을 따라 배치된 여러 오브제들, 조그마한 나무, 가로등, 도로, 동물 등의 모형을 포착하여 스크린 상에 투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화를 볼 때, 카메라 프레임 바깥에 존재함으로써 스크린 상에 등장하지 않았던 스탭들이 이제 자신들이 찍고 있는 영화 이미지와 동일한 무대 공간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 흥미롭다. 영화 이론가인 장 루이 보드리가 지적하듯이, 카메라와 영사기라는 기계 장치의 작동 때문에 관객들은 “객관적 실재”라고 할 수 있는 소재(피사체)로부터 완성된 영화 작품으로의 변형을 볼 수 없다. 관객은 영화관에서 완성된 작품을 볼 뿐이며, 촬영 단계에서의 화면분할과 후반 작업 단계에서의 편집 과정을,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통해 소재(“객관적 실재”)가 완성 작품으로서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진행 과정을 알 수 없다. 하지만 <키스 앤 크라이>에서 관객은 완성된 작품뿐만 아니라 무대 위에 존재하는 재료들이 어떤 방식으로 카메라에 담겨지고 있는지를 볼 수 있으며, 비록 이 경우에 편집 과정은 생략되어 있지만, 적어도 촬영 단계에서 스탭들이 조명과 소품,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의미들을 만들어 내는지를 관찰할 수 있다. 따라서 일반적인 영화의 경우와 달리, <키스 앤 크라이>에서 카메라는 시간뿐만 아니라 관점(피사체를 보는 위치)조차도 독점적으로 점유하지 못한다. 관객은 언제라도 스크린에서 눈을 떼고 무대 위 스탭들과 무용수들, 오브제들로 시선을 돌림으로써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환영적인 이미지로부터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이제 카메라의 시선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무대 위 움직임과 사건들을 바라볼 수 있다.

(사진출처 : LG아트센터)


그렇다면 이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는, 관객들이 스크린과 무대 위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인정하더라도, 스크린을 통하지 않고서, 즉 직접 무대 위 공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공연이(무용수들의 춤이) 만족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무용수들의 손가락 춤은 조명, 특수효과와 더불어 스크린 상에 아름답게(?) 표현될 수 있지만, 무대 위에서 그들의 손가락은 매우 작기 때문에 관객이 스크린을 통하지 않고, 직접 그들의 손가락 움직임을 보기에는 불편함이 있는 게 사실이다. 특히, LG아트센터의 2층과 3층에 앉은 관객이 무용수의 손가락 움직임을 세세히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공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야만 한다. 관객은 영화 이미지가 생산되는 ‘과정’ 자체에 대해서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지만, 여전히 공연 자체의 내용과 무용수의 미세한 동작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스크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바로 이 지점에서 어떤 이는 스크린에 표현되는 이미지에 매혹되어 공연을 만족스럽게 볼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여러 움직임들을 영화가 아닌 공연으로서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점에 대해 불만을 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카메라는 여전히 피사체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가장 중요한 공간상의 위치를 선점하고 있음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아무리 시력이 좋은 관객이라도 무용수의 미세하게 움직이는 손가락 관절의 떨림, 힘을 줄 때마다 변화하는 손등의 핏줄 등을 카메라보다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는 없다. 더군다나 무용수의 손가락은 관객을 향해서 열려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카메라 프레임에 갇혀서 움직이는 것이다. 카메라맨이 매 공연마다 같은 카메라 움직임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듯이, 무용수의 손가락 역시, 카메라 프레임 안에서, 혹은 안으로 혹은 바깥으로 움직이며, 이는 매 공연마다 반복적으로 수행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용수는 카메라가 포착하는 사각틀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제약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무용수의 움직임을 강제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마지막에 가서야 없어진다. 영화 속에서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만나게 된 남녀의 손가락으로부터 카메라가 트랙 아웃하면서 배우의 팔과 가슴, 몸통 전체가 드러나며, 별안간 영화 이미지는 스크린에서 사라진다. 이제 카메라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그리고 두 남녀 무용수는 더 이상 카메라의 화면을 의식하지 않고, 관객석 쪽으로 시선을 두면서 서서히 춤을 추기 시작한다. 카메라 화면 안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무용수의 움직임이 그 프레임을 깨고 나와 관객 앞에 섰을 때, 나의 시선이 꽁꽁 묶여 있던 무언가로부터 해방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무대 위에 존재하고 있던 배우들이 마지막 순간 영상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처럼 느껴졌던 연극 <홍당무>와 반대되는 움직임이다. http://www.drama-in.kr/2014/02/carotte.html) 그리고 무용수들 역시 자유로워 보인다. 작고 미세한 세계로 한정되었던 사각형의 틀이 무한정 줌 아웃(zoom out)되면서 공연장 전체를 담아낼 수 있는 거대한 틀로 바뀌었다고 할까. 아주 잠깐의 장면이지만, 작고 세밀한 세계를 포착하여 스크린 상에 확대시켜 놓았던 카메라가, 이제 거대한 공연장 전체 뒤로 물러나 무대 위에 작지만 자유롭게 움직이는 두 사람을 세워 놓았다는 점에서 연출가의 영화와 공연의 공존에 대한 고민이 잘 드러난다. 혹여나 이 공연이 카메라의 시선 위주로 진행되는 것에 불만을 느꼈을 관객조차도 바로 이 마지막 장면에서만큼은 강렬한 인상을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

2014년 3월 3일 월요일

<셜리에 관한 모든 것> - 시(詩) 쓰기의 어려움에 대하여

by 이예은

+

  호퍼의 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말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호퍼의 회화가 어떠한 느낌이며, 그 느낌이 왜 좋은지. 그것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마치 한 편의 ‘시(詩)’를 설명하라 했을 때 결코 그 ‘시’가 다른 언어로 설명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작년 뉴욕 여행을 하는 기간 동안 휘트니 뮤지엄에서 호퍼의 작품들을 직접 눈으로 만져 보고 온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 그 많은 습작들에서 완성작으로 발전되는 호퍼의 빛, 어둠, 색, 구도, 정서의 추이를 보는 것은 마치 한 편의 연극이 완성되는 과정을 보는 것 같다. 실제로 호퍼의 회화 연출법은 많은 부분이 연극 작업의 연출법과 닮아 있다. 인물들의 블로킹을 구성해 내는 섬세한 표현력하며, 치밀하게 계산된 구도와 명암으로 프레임의 정서와 상황을 창조해내는 능력은 아무런 대사 없이도 표현이 가능한 연극의 장면 연출법 같다. 호퍼의 회화는 운동성이 없어도 이미 연극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짧은 트레일러에서 호퍼식의 구도가 영상 프레임 안에서 정말로 이미지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보고 어떻게 이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있겠나.


트레일러, 혹은 메이킹 필름 


+ 작년 그의 작품들 앞에 서서 썼던 메모들


• Gas, 1940

빛이 안 닿은 곳이 없다. 서 있는 남자가 마치 조각상 같다. 그만큼 빛의 명암이 입체적으로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다. 빛의 과장된 표현이 인물을 실물처럼 느끼게 한다. 이 모든, 곳곳마다에 닿은 빛들이 경건하고, 엄숙하게 느껴져서 그림 전체가 숭고한 조각상처럼 우뚝 서 있는 느낌이다. ‘빛’이 ‘형’의 숭고한 부분(순간)을 빚어낼 수 있는 매체라는 것을 알게 한다. 


• Nighthawks, 1942

빛과 어둠의 영역의 구획이 마치 몬드리안의 도안처럼 정교하게 디자인되어 있다. 가장 ‘비’인간적인 부분, 가장 할 말 없는 부분, 가장 불필요한 부분이 가장 환하게 강조되어 있다. 종업원의 신산한 표정-> 신사의 ‘또’다른 고단한 표정 -> 여자의 먼 곳을 응시하는 표정으로 관객의 시선의 동선을 이끈다. 이 세 명은 마치 한 공간에서 대화를 해야 마땅한 듯한 블로킹을 이루고 있으나 저마다 홀로 있다. 이 세 명의 분열된 정서가 축적되어 있다가 마지막으로 시선이 맺히는 곳은 왼편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이다. 이들의 분열된 정서는 점차 ‘축적’되어 왼편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의 (하필이면) ‘뒷’모습에 맺히는 것이다. 각자 분열되고 따로 노는 표정과 정서들이 이제, 관객을 철저히 외면하기로 한 어느 외딴 남자의 ‘뒷’모습에 맺혀 그 분열감의 정점을 이룬다. 결국 이 그림에서 가장 강조된 것은 가장 할 말 없어 보이는, 가장 흥미 없어 보이는, 가장 이야기(서사) 없어 보이는 벽면이다. 모여는 있으나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세 명의 무리와 그들과 동떨어진 한 명의 남자는 저마다 상대에게 할 말이 없어 보인다. 이들의 분열감의 고조는 가장 할 말 없는 곳이 가장 highlight된 벽면의 ‘공백감의 강조’와 어우러지면서 결국 ‘다다를 곳 없는’ 곳을 향해 있는 느낌이다. 다다를 곳 없는 곳을 향해 농밀하게 축적된 외로운 에너지들의 모임을 그린 것만 같다.

• Manhattan Bridge Loop, 1928

호퍼는 지평선 구도를 좋아한다. 끝나지 않는, 그래서 그것의 한 부분을 표현할 뿐이라는 듯한 구도의 그것. 그 끝나지 않는 수평선 속에서 ‘작게’ 스쳐 지나가는(머물다 가는) 인물을 함께 그린다. 공간 안에 함몰된 인간 생존 조건의 외로움을. 


• New York Movie, 1939

영화관은 암실인데 암실에서도 잔존하는 빛들에 집중하는 아이러니. 가장 있어서는 안 될 빛들-영화관 내부의 몰입도를 방해하는 빛, 단일 광원의 빛과 상충하는 여백의 빛들이 강조된다. 어셔 직원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빛이 가장 강조가 되고, 그 빛은 여자의 머리 위에서 매우 환하게 빛난다. (마치 이 빛은 렘브란트의 빛처럼 어둠 속을 철저히 밝힌다.) 그 다음으로 중요하지 않은 객석 보조등의 빛이 강조가 되고, 그 빛을 따라 ‘혼자’서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의 머리가 반사된다. 혼자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의 얼굴 앵글들 또한 세심하다. 특히 이 사람들의 얼굴 앵글과 어셔의 얼굴 앵글이 서로 대조를 이룬다. 호퍼 속의 인물들은 그 누구도 서로를 마주보거나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이렇게 영화관이라는 공간 안에서 ‘여백’을 차지하는 빛이 가장 전면적으로 강조가 되고, 영화관이라는 군집된 인간들의 틈바구니에서 가장 ‘홀로’인 사람들이 강조가 되는 쓸쓸한 관찰력


• Room For Tourists, 1945

이방의 빛, 
여행의 순간. 
빛으로 할 말을 다 하는구나. 


+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



  호퍼의 회화를 영화화했다기보다는 호퍼의 회화에 ‘시’를 덧입힌 작업을 보는 것 같다. 마치 단편의 ‘시극’들이 모여 회화첩을 이루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회화에 서사를 덧대어 영화화하지 않고, 회화에 시를 덧대어 영화화한 것은 어쩌면 옳은 선택이었다. 회화와 시가 긴밀하게 공유하는 진공의 순간들, 시간과 시간 사이를 섬처럼 떠도는 공백의 순간들이 서사의 자리를 대신해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흐름의 지속보다는 정지된 순간들이 대부분이다. 정말로, 영화의 대부분은 ‘정지’되어 있다.
  이 영화가 호퍼를 ‘영화화’했다고 말하기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도 영화를 보고 난 기분이 안 들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영화의 대부분이 정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pause된 한 순간, 그 순간의 포착, 그 포착의 수직성, 수직의 초월성, 초월의 틈입. 사진과 회화에서 추구하는 대상의 표현‘력’을 최대한 놓치지 않고 영화라는 형태로 재창조하려 한 노력이 역력하다.

  그러면 이 영화에서 이룬 것은 무엇인가? 회화에서 구현해 놓은 수직적 초월의 순간을 굳이 ‘덜’ 완전한 순간으로 지연시킴으로 인해서 이 영화가 이룬 것은? 각색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결절점이, 원작의 생명력을 ‘재’창조해내는 것인데, 이 영화는 그 부분에서 어느 정도를 이루었는가를 질문한다. 원작인 회화에 내재된 호퍼‘적’ 시를 이 영화는 이 영화‘적’ 시로 과연 재창조해내었는가? 영화는 호퍼에서 연상되는 시가 아니라, 이 영화 자체의 시를 창조했어야 했다. 이 영화 자체만으로도 시여야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분명히 예상했던 종류의 쾌감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회화’가 단지 영상 이미지로 ‘운동’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설렘이 약동한다. 마치 매우 은밀한 것과 매우 능수능란한 것이 교합된 듯한 느낌. 이것은 마치 내가 좋아하는 ‘시’의 전문을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육화된 목소리로 들었을 때의 설렘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는 조금 이상한 부끄러움 같은 것이 있다. 시와 회화가 만들어내는 정서의 은밀한 작동은 음악이나 소설이나 연극과 같이 시간의 흐름을 토대로 하는 매체가 주는 것과는 조금 ‘다른’ 설렘이다. 그 단편적이고도 내면적인 소요. 그것은 ‘단지’ 그것이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그 내면적인 소요가 실제로 입 밖의 소란스러운 육성으로 터져 나오고 말 때에 우리는 이상한 쾌감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낀다. 마치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의 은밀한 이름이 물질로 체현된 것을 본 것만 같은 화끈거림이다.

  시를 소리내어 읽는 일, 회화를 영화로 풀어내는 일. 그것은 왜 ‘부끄러운’ 일일까? 십 이 년 동안 가보지 못했던 추억의 장소에 십 이 년 만에 찾아 가 ‘그것’으로 그리워하던 것이 정말로 ‘그것’으로 실재하고 있음을 맞닥뜨렸던 경험이 있다. ‘그것’의 실재는 기이한 반가움이면서 동시에 맹렬하고도 선정적인 폭력이었다. 그토록 향수하고 꿈꾸어 온 ‘그것’은 어쩌면 ‘그것’이 될 수 없는 것을 향한 그리움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문학을, 그래서 연극을, 그래서 예술을 갈망하는 만큼 ‘그것’을 이야기해 버려서는 안 된다는 희미하고도 긴 강박관념은 아직까지도 날 에워싸고 있다. ‘그것’을 말하는 순간 ‘그것’은 상처받기 때문이다. 대학교 국문학과에만 진학하면 문학도, 예술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부푼 열망만을 가지고 살아 온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그토록 열망하던 국문학과에 진학했는데, 그 누구도 문학‘과’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고, 이런 저런 방법으로 문학‘을’ 강간하는 법만 알려주더라. 하며 동기들과 소주잔을 붙들고 울던 때가 생각난다. 예술과 ‘첫’사랑하고, 제도에 ‘첫’상처를 받았던,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그 어린 시절의 진지함. 우리는 정말로 ‘그것’을 말하고 싶지 않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말하지 않으면서 말을 하는 ‘시 쓰기’는 그래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우주를 아우르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호퍼의 회화를 영화화한다는 그 매혹적인 기획은 좋았으나 그 기획이 꼭 넘고 가야만 했던 연출법, 영화의 방법으로 ‘호퍼라는 시’를 쓰는 작업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호퍼를 영화화함으로써 내면적 은밀함을 육화시키는 묘한 쾌감을 주었을지는 몰라도, 이 영화는 ‘그것’을 지켜내지 못했다. 사실 기획이 과하게 매혹적일 때에는 실제 작업이 그 기획을 못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단지 그것이 기획의 단계에 머물렀을 때에만 유효한 매력‘점’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기획의 콘셉트를 체화해내야만 하는 창작의 몸체는 우리의 몸과 같이 연약하고 유동적이다. 그래서 늘 기획 작업을 할 때에는 머리와 입술을 조심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꾸만 연역하려들지 말고 귀납해서 아래로부터 올리고, 올려서 기획을 하는 습관이 중요하다. 기획자는 연출자보다 더 연출자여야 하고, 무엇보다 상상력이 탁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야기가 너무 멀리 갔다. 시를 시로 남겨두어야 하는 것. 순간을 순간으로 남겨두어야 하는 것. 그것이 예술을 가능케 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또 무엇을 기대하고 호퍼를 영화로 보고 싶어 했을까. 이 영화의 연출력에 실망을 하면서도 호퍼의 잔상에 집중했던 그 시간은. 무언가 너머의 것을 창작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 어려움을 함께 알고 있기에 호퍼를 이미 영화로 만든 이 작업 앞에서 또 다른 ‘말’을 보태고 싶지는 않다. 시를 쓰는 이에게 시를 타박하는 말들을 덧붙여 시 ‘쓰기’의 작업을 망쳐버리고 싶지 않은 탓이다. ㉦

 

2014년 2월 18일 화요일

서른을 말하는 무게: <파니핑크>와 <출출한 여자>

by 이예은

+ 8년 후의 <파니핑크>,
‘서른’이라는 나이를 발설하는 것에 대한 오만함

  서른이 되기 몇 해 전, 내 인생에서 손에 꼽히는 보석 같은 영화를 만나 아직까지도 분명히 ‘좋은 영화’라고 각인되어 온 작품이 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 작품의 원제가 사실은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Keiner Liebt Mich, Nobody Loves Me)”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마치 친구의 뒤늦은 부음이라도 접한 것처럼 엉엉 울었던 기억이 있다. 도리스 되리 감독이 1994년도 발표한 <파니핑크>. 검은 드레스를 입고 검고 흰 해골모양의 액세서리로 온통 얼굴과 몸을 휘감은 파니가 ‘서른’에 대해서 논평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세상의 모든 죽음을 탐욕하는 것만 같이 온 몸을 뼈 무늬로 분장한 흑인 게이 친구 오르페오는 끊임없이 어느 누군가의 잠재적 타나토스를 자극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장례 수행에 참가하여 매일 매일 “육신은 흙이 될 것이다”를 읊으며 죽음을 연습하는 파니...


 영화는 온통 분주하게 누군가의, 혹은 무언가의 장례를 치르는 한 편의 장송곡 같다. 영화의 이곳저곳은 비주얼로, 사운드로 그 장송곡의 세부 리듬들을 구현하기에 바쁘다. 실제로 파니의 유일한 친구 오르페오가(그러나 처음부터 ‘실존’하는 인물 같지 않아서 그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파니의 끔찍한 고독함을 영화 내내 느끼게 했던) 달빛을 온 몸에 한껏 담아내며 ‘신화적’ 죽음을 맞이하고, 파니를 둘러싼 온 우주는 하얗게 흔들리면서 한 세계를 떠나보내고, 한 세계를 맞이하며 끝이 난다.

파니가 검은 상복을 입고 영화 내내 그토록 장송하고 싶어 했던 오르페오, 매일 밤 집에 있는 관 속에 묻혀 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은 채 그 안에 그대로 묻혀 있는 것만 같은 하나의 ‘이미지’로서의 파니, 그들은 어쩌면 ‘이십대’라는 은유된 세계 전체를 말하는지 모른다. 이 영화는 스물아홉까지의 거대한 한 세계를 보내고, 서른이라는 거대한 한 세계를 맞이하는 인생의 절기에 관한 신화적 상상력이라고 생각된다.

2014년 2월 13일 목요일

그럼에도, '인사이드' 르윈

by 이예은



  코엔 형제의 ‘최초의’ 음악 영화가 상영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궁금했던 것은 ‘음악이라는 소재가 어떻게 코엔 화되었을까?’였다. 음악이라는 감각적 달콤함도, 예술이라는 열정적 사명도 비껴갈 것이 분명한 ‘코엔 식’의 음악 영화의 전개가 궁금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영화는 지극히 코엔적이면서도, 기존의 코엔적인 것을 비껴가며 그들 나름의 ‘관용’을 베풀었다고 말하고 싶다. ‘음악 영화’라고 말을 하기에 이 영화에는 음악적 순간들이 지극히 빈약하다. 이 영화는 지극히 빈약한 음악적 순간들을 둘러싼, 그 나머지 것들의 팽배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의 제목이 ‘인’사이드 르윈이지만, 정작 영화의 대부분은 ‘아웃’사이드 르윈을 그리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이다.  

영화를 못보신 분을 위한 예고편: 

+ 사실은, ‘인사이드’가 아닌 ‘아웃사이드’ 르윈    


  클럽 공연 무대로 시작되는 오프닝 씬. 무대를 비추는 흔들리지 않는 노란 핀 조명은 건조하고도 안전하다. 안온한 이국성을 풍기는 작은 클럽의 무대. 한 곡의 노래를 긴 테이크로 잡는데, 사실 이 장면은 영화에서 ‘르윈’(오스카 아이삭)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노래를 하게 내버려두는 두 장면 가운데 한 장면이다.

2014년 1월 24일 금요일

개리의 <조금 이따 샤워해> MV가 안타까운 이유

by 시뫄




얼마 전 리쌍의 래퍼이자 작사가인 개리의 첫 솔로 앨범이 나왔다. 어려웠던 시절을 “벚꽃처럼 잠시 피고 졌다”고 추억하고 (‘회상'), 연인에게 “너에게 난 사랑이자 때로는 아픈 가시”라고 고백하던 (‘너에게 배운다’) 리쌍의 노래를 떠올리며, 나는 다른 힙합 음악보다 그의 가사와 랩 방식에 특별히 더 서정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했고, 방송을 통해 본 개리의 이미지는 친근한 외모, 세련된 유머감각과 적절한 겸손함, 즉 이 시대 ‘훈남’의 미덕을 모두 가진 남자의 그것이었다. 개리의 음악와 뮤직비디오를 전혀 듣거나 보지 못한 상태에서, 곽정은 기자(https://twitter.com/ohitwaslove)가 앨범의 타이틀곡인 '조금 이따 샤워해'의 뮤직비디오에 대해 “미학적으로 옳지 않다”고 평한 코멘트가 소위 ‘디스’라고 여겨지며 꽤나 큰 파장을 일으켰다는 뉴스를 먼저 접했다. 곽정은 기자는 코스모폴리탄의 피쳐디렉터, 섹스 칼럼니스트이자 현재 가장 핫한 연애, 성 관련 토크쇼인 <마녀사냥>(JTBC)에 고정 패널로 출연 중이며, 젊은 여성들의 성 관련 전문가로도 불릴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미학’을 운운하며 개리의 뮤직비디오를 비판했다면, 분명 여성의 입장에서 불편하다는 것을 예술의 문제로 돌려서 말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개리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거부감을 느꼈을 여성이 곽정은 뿐만은 아니겠지만, 그렇다면 모든 남성들이 이 뮤비를 반겼을까? 이게 단지 이 뮤직비디오의 선정성 때문일까? 리쌍의 이전 뮤비 역시 19금 판정을 받은 바 있는데다가(‘TV를 껐네’), 그렇다면 UV의 '설마 아닐거야' 뮤직비디오(http://www.youtube.com/watch?v=1xKy_6QUibQ)의 선정성은 어떤가. 가사마저 대놓고 성적인 UV의 그 뮤직비디오가 비록 방송사에서는 부적합 판정을 받았을지언정 대중에게는 큰 거부감 없이 (혹은 상당한 호응과 함께) 수용되었다는 사실에는 단지 성적인 것을 웃음으로 승화시킨 해학성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통 ‘키치’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캠프’인 예술 양식 - 수잔 손택에 따르면 키치가 순진한 캠프, 즉 그것이 세련되지 않다는 사실에 무지한 상태라면, 의도적 캠프는 키치의 전복적인 형식으로서 키치한 것에 대한 개념들을 의도적으로 활용하는 미학이다 - 으로 '설마 아닐거야'의 뮤직비디오가 이해될 여지가 있다면, '조금 이따 샤워해'의 뮤직비디오는 심지어 ‘세련되지 못한’ 것마저 오히려 그 반대로 꽤나 고차원적인 예술로 볼 수 있게 해주는 키치의 기준으로도 가늠할 수 없는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다.

하지만 '조금 이따 샤워해' 뮤직비디오가 범한 가장 큰 오류는 Benny Benassi의 'Satisfaction' 뮤직비디오(http://youtu.be/V5bYDhZBFLA)를 패러디하거나 그것에 대한 오마주로서 연출한 것도 아니라 그저 일부 베낀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원작을 비틀고 조롱함으로써 희화화하는 것인 패러디나 원작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방식인 오마주, 그 어느 쪽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남의 답을 베끼는 학생들이 종종 그러듯이, 개리의 뮤직비디오는 'Satisfaction' 뮤직비디오가 가진 매력의 핵심을 놓치고 말았다. 두 작품 모두에서 몸을 노출한 섹시한 여성들이 연장을 사용하는 모습, 혹은 노동하는 여성의 신체가 클로즈업 되고 반복적으로 비춰지는 등 감각적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Satisfaction'에서의 여성들은 자신들의 몸을 스스로 소유하고 소비하는 주체들로 보인다면, '조금 이따 샤워해'에서의 여성들은 소비되고 대상화되는 성으로서의 몸, 즉 철저히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몸만을 가진다. 전자에서 아주 강하게 제시했던 여성성을 후자에서는 그 반대로 밑바닥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더군다나 전자에서는 여자 모델들의 아무리 수위 높은 노출이라도 그 시각적 자극이 Benny Benassi의 리듬과 어우러져 공감각적인 경험으로 이어지지만, 후자의 비주얼은 개리의 노래와 어울리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음악 감상을 방해하는 요소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뮤직비디오를 본 후 개리의 노래를 ‘듣기 위해’ 다시 음원을 재생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이 뮤직비디오가 그것의 목적 혹은 기능에 합당한가에 대한 의구심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의구심은 개리의 뮤직비디오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뮤직비디오가 음악에 대한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예술형식으로 시작해서 1980년대 MTV의 설립 이후 점차 독립적인 예술장르로 발전해왔다면, 현대의 뮤직비디오는 큰 부분에 있어서 상업적인 목적, 즉 마케팅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라디오보다는 비디오의 시대인 지금, 뮤직비디오는 대중이 음악을 더 풍부하게 감상하고 아티스트의 음악외적인 감각이나 표현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형식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개리의 이 뮤직비디오는 그저 자극적이며 사람들과 언론의 이목을 끌기 위한 노이즈마케팅 수단으로 보일 지경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미 음악으로도 인정받았고 예능방송으로도 대중적 인지도가 충분한 개리가 그런 선택을 해야만 했다면,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현상태가 안타깝고, 만약 정말 이 뮤직비디오가 순수하게 개리의 예술적 창의성의 결과라면, 그건 또 그것대로 참 안타까운 일이겠다.


2013년 12월 19일 목요일

《변호인》이 개봉합니다.

by 에스티


여기 저기서 많은 리뷰가 올라올 것 같습니다. 지금은 말을 아끼고 감상을 대신하여 리어가 죽은 셋째 딸 코딜리어를 안고 외치는 마지막 대사를 옮깁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도 보고 나서도 이 대사가 떠나지 않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변호인> 예매를 서둘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은 하루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내 불쌍한 바보가 목매달려 죽었다.
아냐,
안 돼,
생명이 없어!
어찌하여 개나 말이나 쥐는 살아 있는데 너는 숨을 쉬지 않느냐?
너는 다시 못 오는구나.
결코,
결코,
결코,
결코,
결코.
제발 이 단추 좀 풀어주게.
고맙네.
이것이 보이는가?
이 애를 봐!
봐, 이 애 입술을!
여기를 봐!
여기를 보라고!
(죽는다.)

- <리어 왕> 5막 2장 (김태원 역, 펭귄클래식 코리아, 301-2면)
*산문으로 되어 있는 원문을 인용자가 줄바꿈하였습니다.

2013년 11월 20일 수요일

부유하는 삶을 위한 한 편의 동화 : 영화 <젤리피쉬>

by 백인경


지난 11월 12일부터 17일까지 서울 아트시네마 (http://www.cinematheque.seoul.kr)에서 열린 이스라엘 영화제에서 5년만에 <젤리피쉬>를 스크린에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나는 왠지 이스라엘 하면 모래바람이 부는 노란 빛의 하늘과 서걱거리는 공기를 떠올리며 이것이 LP판이 내는 따뜻한 잡음과 오래된 필름의 낡은 빛과 닮아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대규모도 아니고, 세련된 CG와도 무관한 영화지만 그래서 디지털 디바이스와는 더 어울리지 않는 영화 <젤리피쉬>.

무언가에 ‘대하여’ 쓴다는 것은 해석 보다는 번역의 여정이다. 비언어적인 것을 언어로 번역하는 동안 유실되는 것들. 문장으로 포획할 수 없기에 눈 앞에서 상실되어 가는 것들을 온 마음으로 애도하는 동안, 쉴 새 없이 깜빡이는 커서의 비트에 따라 키보드 위에 얹어진 손가락 끝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이내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영화 <젤리피쉬>를 둘러싼 소소한 이야기들로 영화에 대한 감상을 대신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2013년 8월 20일 화요일

<레드마리아>, 여성의 삶은 배에서 시작된다.


by 김재영

<레드마리아> (2012, 경순 감독)

 여성 노동자에 대한 편견과 오해

 <레드마리아>는 한국, 일본, 필리핀에 살고 있는 다양한 여성들의 삶과 노동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사실, 여성의 몸과 노동의 문제를 남성인 내가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여성의 몸으로 노동한다는 것’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진 적도 없고, 성매매 여성들을 성노동자로 인정하자는 목소리에 공감해 본 적도 없다. 여성의 몸으로 살아본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쯤으로 넘겨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의 이런 무관심은 여성의 문제를 사회, 정치적인 차원의 복잡하고 골치 아픈 문제로 치부해 버리는 선입견에서 비롯된 것 같다. 또한 여성의 문제를 접할 때마다, 남성인 내가 가해자 집단에 속해 있는 것처럼 느껴져 이 문제를 회피하고, 외면하려는 일종의 피해의식이 작용했던 것 같다. 이러한 선입견과 피해의식으로 인해 나는 정작 여성의 삶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무지한 상태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2013년 8월 15일 목요일

<셰임>: 자학하는 몸의 ‘바디 호러’


by 시뫄

여름에는 마치 공식처럼 호러 영화 포스터 한 두 개 정도는 영화관에 걸려 있기 마련이다. 계절에 상관 없이 일년내내 호러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특히 여름처럼 심신을 지치게 하는 무더운 날씨에는 시원한 영화관에서 온몸의 털이 쭈뼛 서고 등골에 서늘한 기운이 흐르게 하는 호러 영화 한 편이면 여느 피서지 부럽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호러 영화는 소재와 내용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되는데, 물론 이 글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감독의 <셰임> (Shame, 2011)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호러 영화는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 속 깊은 곳, 혹은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했던 무의식 속의 공포를 끄집어 올리게 하고 그 공포로 몸서리치게 한다는 점에서 호러 영화의 본질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공포가 몸의 생생한 파괴와 타락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셰임>은 '바디 호러' 영화이다.

2013년 8월 13일 화요일

<은교> : 몸을 보다 / 몸을 읽다


by 백인경


영화 <은교>를 보게 된 건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열일곱 소녀와 일흔 살 노시인의 사랑이 아니라, 나는 일흔 살의 박해일이 궁금했다. 거대한 광고판에서 마주친 노인 박해일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껍데기 같은 피부와 이글거리는 눈을 갖고 있었다.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던 터라 어쩌면 순수하게, 어떠한 상상도 기대도 없이 영화에 집중했던 것 같다. 슬프고 조금 불편하고 아름답고 그래서 아렸다. 은교의 발가벗겨진 몸이, 서지우의 무기력한 런닝 셔츠가, 노인이 ‘되어버린’ 이적요의 불룩한 배가, 피고 지고 시들어가는 꽃송이처럼 스크린의 환영 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손 내밀면 만져질 것처럼.


2013년 7월 11일 목요일

흑백영화에서 과부의 피를 만나다: 영화 <열녀문 Bound By Chastity Rule, 1962>

by 김재영

한국영상자료원은 ‘최은희 특별전(2013년 6월 13일 ~ 30일, 시네마테크 KOFA 1관)’을 통해 영화배우 최은희의 영화 25편을 상영하였다. 그녀는 1947년 <새로운 맹서>라는 영화로 데뷔하여 <로맨스 빠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 수십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으며, 1978년 북한으로 납치되어 남편인 영화감독 신상옥과 북한에서 <불가사리>, <소금> 등의 영화를 제작한 후, 1986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녀의 굴곡 많은 삶의 흔적은, 마치 한국의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영화는 일제강점기에서부터 해방과 남북분단, 한국전쟁, 그리고 냉전시대까지 격변하는 시대에서 충돌하고 갈등하는 우리 사회의 가치관과 그 속에서 반목과 화해를 반복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1962년 개봉하여 제2회 대종상 작품상, 남우주연상 등을 수상한 <열녀문(감독 신상옥)> 역시 과부의 정절을 중시하는 전통적 가치관과 여성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는 근대적 가치관의 충돌을 통해 여성의 행복한 삶은 어떻게 성취되는가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작품은 서양 문물의 도입으로 도시에서부터 농촌으로 빠르게 개화가 진행되고 있던 1920년 무렵, 어린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평생 과부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한 양반집 아씨(최은희 역)의 인생을 그리고 있다. 아씨의 시할머니(한은진 역)는 남편이 죽은 후에도 재가하지 않고 절개를 지켜 나라로부터 열녀문을 하사받는다. 시할머니는 아씨에게 ‘신불사이군 여불사이부(臣不事二君 女不事二夫) 즉, 신하는 두 군주를 섬기지 않고,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유교적 가치에 대해 설명하며, 외부의 유혹으로부터 흔들릴 때마다 허벅지를 은장도로 찌르며 마음을 다스리라고 가르치는 전통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 이 집안의 머슴인 성칠(신영균 역)은 아씨를 연모하고 있는데, 그는 여성이 자신의 사랑과 욕망에 충실해야 하고, 자유의지에 의해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근대적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다. 결국 아씨는 성칠과의 동침으로 아이를 임신하게 되지만, 양반의 체면을 중시하는 시아버지의 반대에 막혀 재가하지 못하고 성칠과 아이를 다른 마을로 떠나보낸다.

이 영화에서 아씨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은 그녀를 다양한 방식으로 구속하고, 대상화한다. 시할머니와 시아버지, 친정아버지 등 양반 가문의 어른들은 자신들의 체면을 위해 아씨의 고독한 인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그녀의 고통과 희생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마을의 남성들은 그녀를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데, 새참을 이고 논을 걸어가는 아씨에게 홀아비인 남성이 ‘홀아비 마음 과부가 알고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알지’라는 노래를 읊조리며 수작을 부린다. 아씨가 새참을 성칠에게 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숲길에서 다른 남성은 아씨를 강간하려고 하다가 성칠에게 맞고 도망간다. 시동생은 비교적 아씨를 잘 따르고 위하지만, 상사병에 걸린 소년처럼 형수를 사모하는데, 형수가 성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배신감에 그녀를 괴롭히고, 모욕하려고 든다. 성칠은 그녀를 가장 아끼고 그녀의 삶에 안타까운 시선을 보이지만, 그 역시 남성 중심적 가치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기나긴 가뭄으로 논이 바짝바짝 말라가던 어느 여름날, 때마침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그는 환희에 젖은 채 아씨를 부둥켜 안게 되고, 이를 거부하며 뿌리치는 아씨를 쫓아가 반강제적으로 성관계를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