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17일 화요일

무대 위에 떠 다니던 그 말들은, 누구의 말일까.


극단 코끼리만보, <말들의 무덤>, 김동현 구성, 연출, 
Hanpac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by 산책


공연을 보러 가기 전, <말들의 무덤>의 “말”이 동물인 줄 알았다는 사람들의 후기를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 말이, 그 말이 아님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이 무덤 속의 말, 그러니까 죽은 사람들의 말이라고 생각하고 공연을 보러 갔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극장에 앉아 미리 읽은 프로그램에서 읽은 다음의 문장은 내 지레 짐작을 죽은 사람들의 말을 무대에서 보겠구나, 하는 기대로 바꾸어 주었다.

 “극장에서 무덤을 열고, 그 안에 있던 ‘말들’을 꺼내 들려줌으로써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 가상의 대화를 나누게 하려는 것이다(프로그램 17쪽).”


공연이 시작되기 전 소란스럽던 극장이 한 소녀의 등장으로 일순간 정적이 되었다. 누가 봐도 죽은, 과거의 아이, 그러니까 귀신이다. 나는 저 아이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다 하지 못한 말, 죽어서도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했다. 올해로 정전 60주년을 맞았으니, 살아 있다면, 호호 할머니가 되었을 그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하지 못한 말들, 그래서 지금이라도 하고 싶은 그런 말들을 기대했다.

하지만 나는 그 소녀에게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

이 작품은 한국 전쟁 당시 벌어졌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배우들은 일종의 증언자가 되어 그 말을 재연한다(이에 대해 연출은 “재현”이 아니라 “재연”이라고 분명히 그 둘을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 이 작품을 통해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들의 증언은 사실적이었고, 그들이 목격한, 또는 가담한 그 순간들은 끔찍하고, 안타까웠다. 아직도 분단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억울한 죽음들은 모두 위로 받지 못했으며, 종북이니 빨갱이니 하는 말들이 난무한 지금, 관객들은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까지 떠 올려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증언들을 극장에(까지) 가서 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다가 나는 이런 의문이 생겼다. 제작자들에게도 이 문제가 큰 고민거리였는지, 프로그램 곳곳에 소통, 관객과의 대화 등등의 부연 설명들을 통해 제작자의 소망을 밝히고 있지만, 그 설명들끼리도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느껴질 뿐 아니라 무대 위의 장면과 그 설명들은 쉽게 짝을 이루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런 의문이 슬금 슬금 내 마음을 차지하고서 부터는 배우가 이야기 하는 방식, 무대 위에서 만들어지는 장면, 장면과 장면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런 것들을 보게 되었다. 나는 이 작품을 이해하고 싶었고, 죽은 말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극장을 나오는 순간까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 그 의문을 해결하지 못했다. 배경막에 투사된 보도사진은 끔찍한 당시 상황을 고스란히 전해 주었다. 배우들의 대사는 실감났다. 그렇지만,

“그래서 뭐?”

연출이 밝힌 것처럼 “극장의 이중성과 동시성”은 “과거와 현재, 산 자와 죽은 자”를 동시에 보여줄 수 있다. 그렇게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을 무대 위에 함께 펼침으로써 연출이 바라는 바와 같이 “실로 고립된 고독의 말들이 응답받”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들을 수 있는 말은 모두 그 무서운 순간, 살아 남은 자들의 증언이다. 정말 묻혀진 말, 사라진 말들은 들을 수 없다. 그 말들은 어떤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살아 남은 이들의 회한, 두려움, 증언이 무덤 속의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말을 대신할 수 있을까? 적어도, 그들의 이야기를 상상하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들의 말이 궁금하다. 또 말로는 다 전해지지 않을 그 마음들이 궁금하다. 이 말과 마음들을 무대 위에서 만날 수는 없었을까. 슬프다는 말로 다 할 수 없겠지만, 죽은 사람과 만나 함께 웃어 볼 수는 없었을까. 나는 계속 그런 생각을 했다. 한 번이라도 날 웃겨 주길, 죽음과 살아 남은 사람의 죄책감으로 무겁게 눌린 극장 안에서 나는 웃고 싶었다.

나의 이런 마음은 마지막 장면에서 정점에 다다랐는데, 배우들이 들고 나온 상자가 너무나 끔찍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얼굴이 희미하게 새겨진, 노란 빛이 어른거리는 그런 상자였다. 사람들의 얼굴이 상자 안에 갇혀 있었다. 그 상자들이 무대 위를 빙빙 돌다가 바닥에 놓여졌을 때, 나는 무덤에서 그의 얼굴만 꺼내 준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얼굴은 꺼내졌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 사람들의 억울한 말과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