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16일 일요일

‘장애 연극’에서 ‘장애’ 문제를 보는 것과 말하는 것

‘장애 연극’에서 ‘장애’ 문제를 보는 것과 말하는 것
-“애인과 휠 산에서 만나다 1탄”, <제물포 별곡>

글쓴이_최희범

어린 시절에 가끔씩 길에서 휠체어를 탄 사람을 마주치면, 우리 엄마는 나에게 “쳐다보지 마라”고 하셨다. 엄마 나름대로 그들을 배려하고, 내가 실수하지 않도록 교육하신 것이다. 하지만 쳐다보면 안되는 사람이라는 그 찰나의 판단과, 서둘러 거두어버리는 시선에는 저 사람을 모든 시선에 쉽게 상처 받을 약한 존재로 여기는 전제가, 혹은 나와는 다른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겸연쩍음이 들어있던 것은 아닐까? 이는 물론 대상화시키는 시선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대상화를 전제로 하는 통념적인 도덕 의식을 벗어나서는 어쩔줄 모르는 나의 어려움 혹은 어리석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봐도 된다.” 혹은 “보면 안된다”는 판단들을 넘어서면,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의문이 남는다. 나는 아직도 차이를 통해 다른 사람을 보는 것 이외의 다른 방식을 잘 모른다.

“어떻게 볼지”에 대한 문제 의식은 장애인들이 만드는 연극을 볼 때에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연기자들은 기본적으로 보여질 것을 전제하고 무대에 서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이것은 사실 “쳐다 보면 안된다”는 통념적인 윤리 의식에 완전히 반하는 기획이다. 또한 이러한 통념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관객이라고 해도, 연기자들이 재현하는 인물과 연기자 본연의 몸이 겹쳐지는 이중적인 대상을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어떻게”에는 단순히 연기자의 신체적 특성을 무시할지, 혹은 인물의 특성으로 포함시켜서 볼지에 대한 인식의 문제와 함께, 이렇게 보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관한 윤리적인 문제가 겹쳐져 있다. 그의 손상(impairment)을 보는 것이 옳은가? 혹은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 옳은가?

이 문제를 연극을 만드는 입장에서 바꿔 생각하면, “장애인들이 무대에 서는 연극이 ‘장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또는 “‘장애’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하는 질문과 연결 될 것이다. ‘장애’를 직접적으로 거론하거나, 연극의 내용이 장애 혹은 이와 연관된 문제들을 다루지 않을 수 있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장애’라는 이름이 붙은 몸이 무대에 서는 연극은 당연히 ‘장애’와 관련된 것일 수밖에 없다. 다른 모든 연극들이 그 무대 위의 모든 몸들에 대해 어떻게든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결국 장애인들이 만드는 연극은 ‘장애’라는 요소에 대한 특정한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 입장은 의식적으로 취해지고, 의도적으로 표명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만드는 이들의 의도성과는 별개로 관객들에게 명확하게 드러날 수도 있고, 은근하게 숨겨질 수도 있으며, 때로는 불명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작품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음, 곧 ‘장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애인들이 무대에 오르는 연극은, 어떻게든 ‘장애’에 대한 연극이라는 의미에서 ‘장애 연극(disability theatre)’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물포 별곡> 역시 장애인 연기자들이 출연하는 작품으로서 ‘장애’에 대한 그만의 입장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각색한 작품의 이야기 자체는 ‘장애(의학적인 의미, 사회적인 의미 모두에서)’와 연관된 언급을 거의 담고 있지 않을 뿐더러, 대사나 지시적 행동과 같이 설명적인 요소들을 통해 연기자들이 지닌 특성들을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첫 장면에서 무대가 밝아지면 두 남자가 어깨동무를 하고 무대 위로 들어선다. 이 둘의 다리는 심하게 꼬이고 휘청거린다. 다리와 함께 온 몸이 흔들린다. 이 둘은 술에 취해 있다. 이들의 몸이 흔들리는 것은 술 취한 상태를 연기하기 때문일까? 혹은 저들의 몸은 무대 밖에서도 상당히 지금과 비슷하게 움직일까? 술 취한 몸의 불안정함과 겹쳐지는 연기자들의 신체적 특성은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불편함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들의 몸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런 불편함은 극중 인물 “긴 다케시”(백우람 분, 원작에서의 샤일록)가 구만석 일가가 자신을 “병신 취급”했으며, “몸과 마음을 망가뜨렸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이 대사는 직접적으로 ‘장애’를 거론하는 것은 아니지만, 연기자의 신체적 특성과 강하게 결부되며 그렇기에 ‘장애’와 관련된 관객들의 문제 의식을 자극한다. ‘장애’라는 문제에 대해서 특정한 주장이나 진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자의 현존이 드러내는 ‘장애’의 요소를 재현된 세계에 대한 관객의 인식 가운데로 소환하기 때문이다. 관객으로서 느끼는 재현과 현존 사이의 혼란스러움은, 이것이 쉽게 판단되어서는 안되는 문제임을 인식하게 한다. 어쩌면 이 작품은 연기자들을, 그리고 그들이 만드는 극중 인물을 장애인으로 혹은 비장애인으로 결론지어 버리는 것을 유보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아닐까? <제물포 별곡>은 이렇게 무대 위 장애인 연기자의 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장애’를 이야기 한다. 답을 지시하지 않는 질문은 “어떻게” 볼지에 대한 풍부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질문들이 작품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제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작품 곳곳의 세부적인 요소들은 ‘장애’ 혹은 이를 포함하는 ‘소수성’에 대한 작품의 입장을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사실 이 연극의 내용 자체는 ‘소수자’ 문제와 연관된 이야기들을 다분히 포함하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같은 작품에 대한 앞선 리뷰인 “휠+애인+산, 제물포 별곡”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원작이 담고 있는 동성애 문제나 민족적 소수자의 문제를 작품의 서사에서 단순화시켜서 다루는 것은 창작자들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캐스팅이나 관객 참여 문제와 같이 관객의 연극 경험의 인상에 영향을 주는 세부 사항들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비장애인 연기자들과 장애인 연기자들이 협업을 하는 작품에서, 서로 사랑에 빠진 선남 선녀(조영운과 이정랑)의 역할을 모두 비장애인 배우들이 맡은 것은 캐스팅의 이유나 의도와는 상관 없이 불편한 사실이다. 또한 영운과 정랑의 결혼식 장면에서 관객 한 사람에게 주례를 부탁하는데, 연기자가 굳이 중년 남성 관객에게 주례사를 부탁한 것은 소수자 문제에 대한, 결과적으로 ‘장애’라는 소수성에 대한 문제 의식 마저 약화시킨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장애 연극’이 ‘장애’에 대해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면, 더 일관된 입장을 취하길, 더 세심하게 그 입장을 보여주기를 바라는 것은 관객의 이기적인 욕심일까?

“어떻게 보여 줄 것인가?” ‘장애’의 문제를 대하는 것은 부담스럽다. 그리고 이 무거움을 연극이 직접 이야기하지 않아도 관객들은 이 무게를 느낀다. 관객들도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볼 것인가?” 그렇기에 어떤 종류의 장애 연극이든지 어느 순간 이 무게를 짊어지는 것을 포기하면, 그 무게는 온전히 관객들의 짐이 된다. 반대로 이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연극은 이제껏 당연하게 여겼던 관객으로서 나의 시선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장애’라는 낙인을 찍으려고 하는 내 시선의 폭력성과, 재현과 현존을 무자르듯 나누는 데 길들여진 편협함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장애’라는 낙인은 장애 연극이 지닌 가능성이 될 수도, 자칫하면 내가 지각하는 연행자의 말과 몸짓을 퇴색시키는 색안경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나는 <제물포 별곡>과 같은 연극들에서 ‘장애’ 혹은 소수성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 더 명확하게 드러나기를 바란다. ‘장애’ 문제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는 선택에서 소극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혹여 ’장애’에 대한 문제의식이 작품을 틀짓는 것을 관객들이 부담스러워 할 것이라는 걱정이 있다면, 이를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관객은 이미 어떤 식으로든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 연극은 시종일관 무겁고 심각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이 무게를 짊어지는 것은 어떤 거창한 메시지나 주제의식이 아니다. 오히려 연극을 틀짓는 모든 선택들에 대해 이 불편한 문제 의식을 적용하려는 노력과 그 순간들을 채색하는 세심한 배려에 그러한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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