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14일 수요일

《2016 한여름밤의 작은극장》에 다녀와서

성지수


여름밤의 연극 잔치를 만나다

‘빨간 건물’을 찾아가는 길. 예매했던 공연의 시작은 30분이나 남았는데, 길을 건너기도 전에 음악과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급한 마음에 괜스레 신호등을 노려보다가 파란 불이 들어오자마자 뛰어가 ‘빨간 담벼락’의 구멍에 눈을 대 본다. 가야금 옆에서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한복차림의 여자와 그 앞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보인다. 미니 야외극장! 도둑 관람을 계속 할까 하다가 가야금에 돛이 달려있는 것을 발견하곤 정문으로 달려간다. ‘이건 제대로 봐야 한다!’
  그렇게 들어선 국립극단 마당 곳곳에는 다양한 형태의 극장들이 펼쳐져 있었다. 평소에는 부대시설이나 빈 공간이었던 곳에 저마다의 이름을 주고 약간의 조명을 세워 여러 개의 ‘극장’을 만든 것이다. 각 극장에는 ‘객석’도 있었는데, 마당 한 가운데 큰 세트를 놓고 세워진 ‘작큰극장’에는 캐릭터 방석이 깔린 원기둥 모양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고, 등나무 아래 평상을 무대 삼은 ‘등나무극장’과, 담 사이 구멍으로 훔쳐볼 수 있었던 ‘느티나무극장’에는 층이 낮은 계단식 객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공연을 보는, 극장 사이를 뛰어다니는, 주저앉아 블록놀이를 하는―하여간 자기 일에 매우 정신을 집중한―수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그저 지인의 공연을 보러 갔다가 <2016>을 만난 것이다. 
<한여름밤의 작은극장>은 어린이청소년극 축제로, 1인극 작품 개발과 어린이청소년극 배우의 창작 역량 강화, 지역 예술 활성화 등을 목표로 한다.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의 창작인큐베이팅 프로그램 ‘작은극장 프로젝트’를 통해 창작된 작품들을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자리이다. 프로그램 참여자로 선발된 배우, 이야기꾼, 독립예술가, 그림책작가, 예술교육자 등이 워크숍을 통해 이 ‘잔치’를 준비한다고 한다. 올해에는 어린이연극인 작은극장 참가작 11작품, 청소년 대상 연극인 청소년작은극장 4작품과 자발적 창작모임인 ‘씨앗모임’의 6작품, 그림책 작가들의 8작품 등등이 국립극단 공간 곳곳을 채웠다. 해를 거듭하면서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도 입소문이 퍼져, 많은 가족들이 찾는 잔치로 자리매김하였다.

‘축제다운’ 축제

함께 공연을 보러 간 친구도 도착하자마자 감탄사처럼 외쳤다. “여기 완전… 완전… 아비뇽이잖아!” <한여름밤의 작은극장>이 풍문으로나 주워들은 외국지명을 떠오르게 한 것은 그 자리가 “연극 축제”에 대한 특정한 기대들을 실현시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여름밤의 작은극장>을 통해 충족된 기대 중 하나는 다양한 공연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상에선 스쳐갔을 공간들 여기저기에서 많은 공연이 동시에 상연되었고, 각 공연은 판소리, 인형극, 가야금 등 저마다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 자주 관람할 수 없었던 형태의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으며, 모두 무료였다. 입장료도 없이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 짧게는 25분에서 길게는 50분 남짓 되는 여러 공연을 보러 다닐 수 있었다. 한 공연이 끝나면 다음 공연들 안내 피켓을 든 크루들이 관객들을 한줄기차로 세워 다음 공연의 ‘극장’으로 이동시켜 주었다. 관객들은 여러 피켓 아래에서 다음엔 무엇을 볼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했다.
 (야외공연에 한해서는) 공연 중간에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다. 이뿐 아니라 프로시니엄 극장에서 관객들에게 의무화되었던 ‘매너’들이 불필요해졌다. 그래서 아이들은 (눈은 공연자에게 고정시킨 채) 누워서 보기도 했고, 집에서 싸온 김밥 도시락을 먹으면서 보기도 했다. 한참 뛰어놀다 와서 공연의 중간부터 관람하기도 하고, 다른 공연을 보러 가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껏’ ‘자유롭게’ 공연예술을 만끽하고 있었다.
 단출하지만 다채로운 부대시설과 부대활동들 역시 <한여름밤의 작은극장>이 지닌 큰 매력이었다. ‘작큰극장’ 앞 인조잔디가 깔린 공간은 ‘휴게마당’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여기엔 부직포 안에 솜을 넣어 만든 징검다리와 각종 블록, 젠가가 놓여 있었다. 아이들은 신발을 벗고 징검다리를 오갔고, 블록을 쌓고 무너뜨리고를 반복했다. 하늘색 티셔츠를 입은 어른들도 놀이에 함께 했다. 공연 시작 전에는 극장 안내를 맡던 크루들이 공연 중에는 아이들과 여러 가지 놀이를 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징검다리의 발판 하나를 차지하고 가위바위보하기, 술래잡기, 담요를 해먹처럼 만들어 그네 타기 등을 함께 했다. 때문인지 ‘휴게마당’은 일행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한 많은 아이들이 한데 섞여 노는 공간이 되었다. 다음 공연 시작을 기다리다가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할 사람!”하는 크루들의 부름에 “저요!”하고 같이 놀고 싶은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크루들이 당황할 것이 걱정되어 단체 놀이엔 참여하지 않았지만, 블록은 아이들 못지않게 잘 가지고 놀았다.)
 천막 아래 설치된 본부 한쪽에서는 솜사탕을 만들어 나눠주었고, 페이스페인팅도 해 주었다. 부모님들은 의자에 앉아서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보면서 담소를 나눴다. 이제 그만 집에 가자는 엄마들과 아직 한참 신난 아이들 사이의 의견 충돌은 실랑이로 번지기도 전에 아이들의 압도적인 승리로 마무리되곤 했다. 때문에 가족들은 근처에서 마련한 햄버거 세트와 테이크아웃 커피로 식사를 했고, 더 준비성이 철저한 집은 야외에서 도시락과 컵라면을 나눠 먹었다. 아이들은 배를 채우면 다시 ‘휴게마당’으로, 자기가 원하는 ‘극장들’로 달려 나갔다.
 먹거리나 기념품 하나 팔지 않는 <한여름밤의 작은극장>은 분명 편리성이 부족했다.   작게라도 수익 사업을 하면 대박이 날 것 같았다. (어렸을 적에 올림픽예술극장에 가면 ‘철사에 매단 악어 인형’을 사 달라고 그렇게 졸랐었다.) 하지만 다양한 테마를 가진 축제들이 여기저기에 많이 생겼음에도 메인 행사장 몇 군데를 제외하곤 획일화되고 상술에 치중한 현실을 생각해보면, <한여름밤의 작은극장>의 부대시설/행사는 오히려 현명한 선택이었다. 아이가 내는 다양한 소리들이 민폐라 여겨져서 첫돌이 되기 전부터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며 조용히 놀아야 했던 세대의 아이들이 몸으로 놀 수 있도록, 또래와 함께 놀 수 있도록 놀이를 가르쳐주고 같이 놀아주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장난감을 얻는 대신, 땀에 녹은 페이스페인팅을 하고 새로 사귄 친구와 “내년에 또 만나”같은 실없지만 살가운 인사를 하며 그곳을 떠났다.
 별 생각 없이 <한여름밤의 작은극장>에 간 건 토요일이었고, 다음날인 일요일에는 오후부터 갑자기 비가 왔다. 비가 오는데도 어제 같은 잔치를 할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국립극단으로 향했다. 전날의 그곳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보지 못한 공연들도 더 많이 보고 싶었다. 일요일 오후에는 야외극장에서의 공연을 실내로 옮겨서 공연을 하였다. 한정된 실내극장에서 여러 공연들을 소화하다보니 각 공연의 시작 시간이 조금씩 지연되고, 공연 간 로테이션 시간이 촉박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큰 혼란 없이 진행되었고, 어둠이 짙어지고 비가 그친 후에는 몇몇 야외극장과 부대시설을 다시 오픈하였다.

 다음은 <한여름밤의 작은극장>에서 관람했던 작품들에 대한 간단한 관람평 혹은 단상들이다.

안네의 일기/최민경[만두]/청소년작은극장 참가작/동굴극장(야외)/8월27일21시

‘휴게 마당’에서부터 <안네의 일기> 팻말을 든 크루를 따라 국립극단 메인 건물 뒤편으로 이동하면 ‘동굴극장’에 갈 수 있다. 평소였다면 거기에 있는지도 몰랐을, 건물과 담벼락 사이 후미진 쪽 길에 공사용 경고등이 줄줄이 반짝이고 있었다. 관객들은 머리를 숙이고 도랑에 발이 빠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이동했고, 거기서 안네 이야기를 들려 줄 ‘만두’를 만났다. ‘만두’는 벽과 건물 사이의 좁은 공간에 놓인 작은 평상에 앉아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고, 사람들은 평상 앞 방석 몇 줄에 모여 앉았다.
 ‘동굴극장’의 안네는 매우 역동적이고 기운 넘치는 소녀였다. 동그란 체형에 활기찬 목소리로, 멜빵바지를 입고, 일기장에 쾌활하게 자신의 하루를 적어 내려가는 안네는 일기장에 이름을 붙이고 행복해하는 장면이나, 이웃집 소년 페터와 가까워지며 기뻐하는 장면에서 결코 에너지를 아끼지 않았다. ‘예쁘게’ 웃기보다는 크게 웃었고, 작은 평상을 온몸으로 누비며 감정을 표현했다. 혹자는 배우가 캐릭터의 나이 설정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흡사 7세 이하를 연기하는 것 같다고 평할 수 있는 에너지를, 안네는 아낌없이 내뿜었다.
 그렇지만 이를 이전의 안네들이 만들어낸 틀 뿐 아니라 15살 사춘기 소녀에 대한 클리셰 이미지도 극복한 적극적인 선택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원작 <안네의 일기>가 비극적인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으며,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실존 인물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동안 만난 연극 속 안네들은 가냘픈 외양을 하고 어딘가 모르게 아파보였다. 물론 그네들도 어두운 현실 속에서 희망을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부질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의 희망이었다. 더 어린 아이처럼 보일 정도로 가감 없이, 하루의 감정을 일기장에 쏟아내는 ‘동굴극장’의 안네는, 신선하면서도 설득력을 지녔다.
 ‘동굴극장’의 공간적 특성이 이 너무 아이 같은 캐릭터를 ‘안네’로 완성시켰다. 해진 밤의 어둠, 사람 키를 두 배는 훌쩍 넘는 담벼락, 그 위의 철조망, 건물을 옭아 맨 여러 굵기의 파이프, 벌레 떼 등은 실제 역사 속 안네가 처한 ‘현실’을 떠올리게 했다. 안네의 역동적인 웃음소리는 어린 아이처럼 밝았지만, 이 밝음이 여름밤을 이기지는 못했다. 안네가 사용하는 스탠드 전등과 손전등은 안네의 기운찬 움직임을 드러냈지만, 이 때 생긴 그림자조차 높은 담벼락을 넘어가지 못하였다. 오히려 이 그림자들은 원래 사물보다 크게 드리워져 ‘동굴극장’을 덮치곤 했다. 때문에 극이 안네의 비극적 상황이나 결말을 직접적으로 그려내지 않았음에도 관객들은 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극은 ‘만두’로 돌아온 배우가 관객들에게 이 이야기를 통해 삶의 희망을 나누고 싶었다는 짧은 고백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일기에서 연극으로의 매체 변화에 대한 고민이 더해지면 좋겠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하루의 일기가 끝날 때마다 암전을 했기 때문에 암전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희망을 전하고 싶다는 ‘만두’의 의도에 맞추어 몇몇 날짜를 선정하였기 때문에 주제는 잘 전달이 되었지만 ‘공연 자체의 줄거리’는 산만한 편이었다. (늘 혼자 외롭게 놀다가, 이웃집 남자 애를 사랑하다가, 그 애 때문에 엄마랑 싸웠다가, 엄마랑 화해하였다.)
 빛의 사용도 조금 더 다듬을 여지가 있었다. 어두운 야외극장에서 스탠드와 손전등을 사용하였는데 둘 중 하나로 통일하고, 그 빛을 활용하는 방법을 더 많이 찾아 세분화시키면 좋을 것 같다. 가령 담벼락에 손가락을 대어 그림자를 보게 만드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림자놀이를 시작할 것 같았던 그 순간, 다른 장면으로 전환되었다. 암전의 방식도 조금 아쉬웠다. 암전은 무대 위 배우가 직접 스탠드를 끄는 것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작동 때문에 관객들은 불필요한 움직임을 볼 수밖에 없었다.
 빛 사용은 집중하고 세분화시키는 대신, 소리의 사용은 다양화시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의 육성을 제외한 모든 소리는 노트북에 연결된 몇 개의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전달되었다. 페터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나타내는 음악과, 안네를 숨게 만드는 공습경보 소리가 같은 차원에서 들렸던 것이다. 야외의 가설극장인 만큼 제약이 많았기 때문에 남는 아쉬움이기도 했지만, 공습경보의 경우 오퍼레이터가 확성기의 비보 음을 틀어서 생소리로 관객 귀에 꽂아주었다면 안네가 겪은 두려움이 더 생생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두더지 家 잡기!/김윤희[춘향이언니]/작은극장 참가작/스튜디오 둘(야외극장인 느티나무 극장에서 상연될 예정이었으나, 비가 와서 실내극장으로 이동)/8월28일17시30분

관객들은 여행사의 ‘춘향이 언니’와 함께 땅속 마을을 여행한다. 거기서 만난 두더지들은, 자기들을 괴롭히는 여우를 몰아내기 위해 회의를 하고 있다. 이 회의에서 “여우보다 더 강하고 무서운 분께 여우를 쫓아내 달라고 부탁하자”는 꼬마 두더지의 제안이 채택되고, ‘꼬마 두더지’는 이제 땅 밖으로 나가 차례로 햇님, 구름, 바람, 바위 등을 만나면서 힘을 합친 여러 마리의 두더지들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두더지들은 함께 힘을 모아 여우를 몰아낸다. ‘춘향이 언니’는 이 잘 알려진 전래동화를 소리와 소소한 소품 등을 사용하여 관객들 앞에 펼쳐놓는다.
 창작 판소리 <두더지 가 잡기>는 관객들의 참여를 유도하여 이를 토대로 극을 진행시키는 관객 참여형 연극이다. 먼저 관객들은 ‘춘향이 언니’에게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배운다. 그와 함께 들어간 땅 속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살고 있는데 이 동물들로 지목되는 것도, 이 동물의 특성을 듣고 어떤 동물인지 맞히는 것도 관객의 몫이다. 또한 무서운 여우를 몰아내기 위해 두더지들이 연 회의에서는 관객이 두더지 한 마리로서 손을 들고 자기 의견을 말할 수도 있다. 꼬마 두더지와 함께 여우를 몰아내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두더지들끼리 힘을 합치기 위해 무대 위로 초대 받는다. 이 ‘두더지’들은 다른 관객들의 응원 아래 동그랗게 여우를 에워싸고 노래를 하며 땅을 파고, 여우를 쫓아내는 데 성공한다.
 관객 대부분이 어린이인 연극에서 관객의 참여를 토대로 극을 진행시키는 것은 상당히 용기 있는 선택이다. 수줍어서 참여를 못 하는 어린이도 걱정해야 하는 동시에 (두더지가 뭍으로 나와 만난 토끼로 지목되었던 한 어린이 관객은, 귀가 길쭉하고 잘 뛴다는 자기의 특징을 듣고 “누구예요?”라는 질문을 수차례 받았음에도 쑥스러운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너무 적극적인 참여’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요청 받지 않은 순간에도 말을 길게 하고 싶어 하는 어린이 관객 등). 극의 진행을 위해 참여를 독려하는 한편 참여를 제지해야 하는 셈이다. 얼마만큼의 참여를 어디에서 요구하고 어디에서는 관람만 요구할 것인가 하는 기본 틀을 마련하는 것도, 매 상연마다 새로운 어린이들을 만나 새롭게 발생하는 상황들에 대처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상연 전과 상연 시 모두에서 고려해야 할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적절한 수준에서 참여와 극의 진행 모두를 나쁘지 않게 해 낸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관객의 참여를 필요로 하지만 너무 적극적인 참여는 방해가 되는 공연의 형태들이 가지는 일반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두더지 회의에서 아이들은 열심히 손을 들어 여우를 혼내 줄 방법들을 제안했지만, 결국 배우가 분한 ‘꼬마 두더지’가 제안한 방법이 최종 선택되었다. 선택 역시 관객들의 참여로 결정되었는데, ‘대장 두더지’가 앞선 아이들의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은 물구나무를 서 보라고 하는 등 어려운 요구를 하고, ‘꼬마 두더지’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은 박수를 쳐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큰 목소리로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던 한 친구가 쑥스러운 듯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뭐야~”라고 말했지만, 이것은 박수소리에 묻혔다. 다른 친구가 자기 의견을 너무 장황하게 이야기할 때 배우는 몸짓과 표정으로 아이의 이야기를 끊고 정리하려는 시도를 여러 차례 할 수밖에 없었다. 어른 관객들이 배우의 적극적인 요청에도 굳이 연극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가, 더 나아가 관객에게 어떤 형태든 참여를 요구하는 공연들을 피곤하게 느끼는 이유가 공연을 통해 너무 잘 확인된 셈이다.
 그럼에도 <두더지 가 잡기>는 관객 참여가 중요한 1인극이면서 부채, 북 등 판소리에서 사용되는 오브제들을 활용하여 무대를 꾸민다는 점에서 판소리를 근래의 어린이 연극으로 잘 풀어낸 작품이다. ‘춘향이 언니’가 둘러 멘 작은 북은 소리의 반주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꼬마 두더지’로 변신하기 위해 머리에 쓰는 작은 인형이 등장하는 ‘동산’으로 쓰이기도 한다. 공연 시작 전부터 무대 위에는 나뭇잎이 없는 나무 세 그루가 서 있고 그 위에 각각의 해, 바람 등이 그려진 부채들이 놓여 있다. 배우가 ‘햇님’ 역할을 할 때는 해 그림 부채를 들고 소리를 하고, 손으로 부채를 들고 ‘꼬마 두더지’와 ‘햇님’ 사이의 대화를 연기하기도 한다. ‘햇님’이 ‘구름’에 의해 가려지자, 배우는 ‘햇님’ 부채를 접어 나무 뒤 통 속으로 넣었다. 이어 ‘구름’보다 강한 ‘바람’이 나타나고, 그 보다 더 강한 ‘바위’가 나타나 이전 것을 이기면, 각 부채들은 접혀서 사라졌다.
 정통 판소리 오브제들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쫓겨난 여우는, 추를 단 풍선으로 표현되었다. 관객들, 아니 두더지들이 무대 중앙에서 강강술래를 하고 꼬마 두더지의 지휘에 맞추어 땅을 파는 시늉을 하자, 추와 풍선 사이를 잇는 끈이 끊어졌고, ‘여우’ 풍선은 하늘 높이 올라갔다. 야외극장이었으면 정말 하늘 높이 올라가 영원히 사라져버렸을 텐데, 비 때문에 실내 극장으로 옮기면서 천장의 극장 설비들 사이로 숨어들어가는 것에서 만족해야 했다. 다음 공연 때문에 끝나자마자 끌어내리기 쉽게 하려고 했는지 몰라도, 끈 길이도 길게 해서 끊었던 점도 매우 아쉬웠다. 그럼에도 무대 위와 객석의 관객들은 날아가는 여우 풍선을 보며 기뻐했고, 다시 함께 노래를 불렀다.
 다만 배우가 메고 치는 작은 북과 미리 녹음된 국악이 반주로 사용되었는데, 조금 버거워 보이는 점은 아쉬웠다. 배우가 소리도 하고 춤도 추고 북도 쳐야하기 때문에, 관객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도 사운드가 비는 순간들이 많이 발생했다. 때문에 올라온 흥을 더욱 북돋울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날아가곤 해서 안타까웠다. 사용되는 북은 배우의 다양한 움직임을 염두에 두어서 그런지 작은 편이었고, 때문에 높고 가벼운 소리를 내었는데 어떤 장면에서는 어울리지 않았다. 때문에 판소리에서의 ‘고수’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해보였다. (이번 <한여름밤의 작은극장>은 기본적으로 1인극들로 구성되어서 배우 한 명이 혼자서 한 게 아닌가 싶다.)

리처드 3세/황기연[오마카세]/청소년작은극장 참가작/스튜디오 둘/8월28일18시

움직임을 기본으로 하는 1인극이었다. 연기를 잘 하는 배우가 부리는 고집은, 관객의 취향과 상관없이 열심히 볼 수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한 작품이었다. 자기 장점을 잘 아는 공연예술가가 본인이 잘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잘 버무려 놓은 듯했다.
 이 작품은 각기 형태가 다른 세 개의 검은 우산만을 사용해서 리처드 3세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을 표현해낸다. 연극이 시작되면 장사익의 <찔레꽃> 노래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배우가 무대 중앙에 서서 눈물을 흘린다. 이후 펼친 우산을 무대로 손가락 움직임으로 <리처드 3세>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이야기해주고, 그런 다음 다양한 움직임을 통해 여러 인물들을 보여준다. 이 세 개의 구성 각각은 나쁘지 않았지만, 같은 이야기가 한 배우의 몸 활용이라는 그리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세 번이나 제시되었다.
 앞 장면에서 사용된 노래 <찔레꽃>은 공연 내내 사용되는데, 이 또한 의도는 알겠지만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원하는 바를 쟁취하기 위해 인간적 감정을 애써 무시하고 달려가는 악인의 근원적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아주 적절한 노래였다. 하지만 장사익의 목소리와 음악적 색깔이 매우 ‘한국적’이었고, 이미 1절 이상을 첫 장면에서 들은 관객들은 이 노래가 반복해서 나올 때마다 드라마가 노래에 압도당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리처드 3세>의 주제 의식은 ‘동서양을 가로질러’ 느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장사익과 셰익스피어 사이의 이질감이 다소 장사익으로 기울어버리지 않았나 싶다.
 무대 한쪽에 일렬로 세운 나무 대도구 세 개는 우산걸이와, 새로운 파발마로 움직임을 바꿀 때 배우가 그 주위를 돌아 나오는 것 이상으로 사용되지 않은 점도 의아했다. 분명 배우는 극이 시작하기 전에 관객들이 있는 상태에서 무대 정비를 하면서 그 대도구들의 위치에 상당히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긴 나무상자를 세워두고 까만 구멍이 한쪽에 뚫려있는 형태였는데, 얼굴 부근을 뚫어 놓은 관 같기도 했고, 속박용 고문도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심장하면서도 작품과 맞닿아 있는 물건이 공연 속에서 충분히 사용되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시선을 아주 오래 준다던가, 나무 구멍 속 어둠을 들여다본다던가 하는 간단한 것들이라도 더 있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신체적 장애를 무대화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을 남겼다. 리처드 3세가 악한 것을 추구할수록, 그가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무시하고 인간적으로 추해질수록 그의 ‘장애화된 몸짓’은 더욱 과장되었다. 즉 인물이 지닌 장애의 특징을 더 과장시킨 움직임을 구현하였다. 이는 인물의 추악한 내면을 시각화하고자 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원작의, 실제 역사 속의 리처드 3세가 장애를 가지고 있으니 이를 무대 위의 움직임으로 (아주 ‘사실적으로’ 잘) 구현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크게 문제가 없다. 그러나 장애의 신체적 특징을 ‘정말 장애인처럼’ 재연하는 방식이 연극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윤리적인 표현양식이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다시금 생각해볼 지점을 남긴다. 친족들을 죽이고 곧 왕이 될 기쁨에 신나서 달려갈 때 더욱 뒤틀리는 몸통과 더욱 팔랑이는 사지는 ‘정말 장애인 같았고,’ ‘더욱 추해 보였다.’ 뒤틀린 신체와 뒤틀린 인간성을 바로 연결시키는 이 무대화 양식이, 실제 신체적 장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고착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지는 않은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장애를 재연할 수 없는, 재연해서는 안 되는 무언가로 신성화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지만 드러내고자 한 것과 이를 위해 택한 방식을 놓고 더 세심한 고민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길게 아쉬웠던 점들에 대해서만 열심히 이야기한 형국이 되어버렸는데,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공연이 좋았다는 것이다. 한 공간에 있는 다양한 인물들로 순간순간 변신하는 움직임들은 재미있을 뿐 아니라 수준급이었다. 극 중간에 언어유희를 사용한 풍자(“그-은혜를 모르는”)도 큰 웃음을 주었다. 순전히 왕위를 위해 청혼하는 장면에서 관객 중 한 명이 청혼 대상자가 되었는데, 운이 좋게도 (혹은 나쁘게도) 내가 선택되었다. 눈을 맞추고 걸어와서는 우산 손잡이를 내밀어 자신을 찌르라고 요구하던 리처드 3세는, 관객이 망설이자 “찔러야 진행돼요!”라고 외치기도 했다. 이후 건넨 반지는 종이로 된 것이었는데, 그 위에 사인펜으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내 파마 귀엽쥐?’
 여러 악행을 거쳐 왕위에 오른 뒤 전쟁으로 몰락하는 리처드 3세의 모습을 하나의 이미지로 보여준 마지막 장면도 기억에 오래 남는다. 빗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뒤틀리는 몸으로 비를 피하려고 이리저리 움직이다 우산을 발견한다. 안심이 되어 우산을 펴고 서지만, 우산의 천은 날아가 버리고 우산 틀만 남는다. 비 한 방울 가려주지 못하는 우산을 든 채 인물은 이제 멈춰 서서 관객을 응시한다. 허망한 표정. 빗소리가 점차 강해진다. (그리고, 장사익의 <찔레꽃>도.)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이런 저런 아쉬움을 남기긴 했지만, 위트 있으면서 좋은 공연이었다. (“그래, 너 하고 싶은 거 해. 다 해.”) 혹은 좋은 공연이라 아쉬운 점을 더 열심히 찾아냈는지도. (받은 반지는 아직 가지고 있다. 고이고이 간직할 예정이다.)

할아버지의 창문/차선희[하루]/작은극장 참가작/블록극장(야외, 8월27일20시), 백장로비(8월28일20시)

토요일에 크루를 따라 ‘동굴극장’에 입장하다가 ‘블록극장’에서 상연 중인 <할아버지의 창문>을 얼핏 보았다. 스케치북 하나를 둔 배우의 움직임에 따라 관객들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탄성을 지르는 순간이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객석 맨 앞줄에 미취학 아동으로 보이는 남자아이 한 명이 긴 방석 하나를 다 차지하고 옆으로 누워서 공연을 보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도 무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제목이 무엇인지만 알아둔 채, 토요일에는 이 공연을 보지는 못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 작품을 제대로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이 일요일에 한 번 더 국립극단을 방문한 이유 중 가장 큰 요인이 아니었나 싶다. 일요일에는 백장극장 로비를 무대로 삼은 ‘백장로비’에서 상연되었는데 앞 공연들의 지연 때문에 시작이 30분가량 늦춰졌다. 극장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배우 바로 옆에서 기쁜 마음으로 대기했다. 로비 바닥에 긴 방석이 깔리고, 화장실 벽과 극장 입구를 무대 삼아 극은 진행되었다.
 스케치북 동화인 <할아버지의 창문>의 줄거리는 큰 사건 없이 간단하다.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가 가족과 함께 지내다가 (꿈에서, 혹은 정말로) 자유로이 떠나고 난 어느 날, 창가에 할아버지가 살아생전 약속했던 빨간 배가 나타나고, 할머니와 손자 하루는 이 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한다. 공연은 줄거리를 전달하는 것보다는 가족의 삶 속 장면들을 잔잔히 소개한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이야기와 화자(배우)가 관계 맺는 방식이다. 이 작품에서 배우는 (다른 공연들 대부분이 선택한) 액자 형식으로 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이 아니다. 관객들에게 자신을 ‘할머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스케치북 그림 속 할아버지와 손자 ‘하루’(인형)를 소개한다. 배우의 몸 자체가 이야기 속 인물의 것이 되는 것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많이 아프셔서 누워 있고, 많은 시간 주무신다고 잔잔한 목소리로 이야기해준다. 할아버지 밥상을 차리기 위해 텃밭에서 즐겁게 일을 하고 할아버지의 식사를 돕는다. 할아버지가 이불에 실례를 해도 “우리 할아버지 큰일 보셨네. 잘하셨어요.” 하고는 치운다.
 좀 더 역동적인 반응은 인형 ‘하루’를 통해 전달된다. 할아버지가 아기처럼 변해버리고, 주변 사람들은 가족을 걱정한다는 말이 (배우가 들고 이야기하는) 솜 인형 하루에 의해 발화되기 때문이다. 즉 공연의 모든 행위자는 이야기 속 인물이다. 공연이 끝나면 할머니는 “아직도 할머니와 하루는 여행 중이랍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자신들의 사진을 찍어 줄 관객이 없느냐고 묻는다. 누군가 이들의 사진을 찍어주면 할머니는 이제 “같이 사진을 찍을 분들”은 나와서 함께 사진을 찍자고 말한다. 다시 말해 공연이 끝나는 순간까지, 그리고 끝난 후에도 배우는 ‘할머니’, 인형은 ‘손자 하루’로 남는다. 관객들에게 커튼콜 개념으로 박수를 칠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이는 작품 전체에 독특한 미감을 더한다. ‘할머니’가 ‘하루’를 품에 안아 어르는 장면이나 할아버지를 극진하게 보살피는 장면은, 이야기꾼이나 배우에 의해 제시되었을 때에는 전달하지 못했을 어떤 먹먹함을 준다. ‘할머니’는 휠체어에 의지하던 할아버지가 자신의 꿈속에서 집을 망가뜨리려는 어떤 트럭에게 일어나 소리치는 것을 본다. 그리고는 “우리 할아버지가 밤마다 우리 집을 지키느라 낮에 그렇게 주무시는구나.”라고 이야기한다. (그냥 할아버지 말고 우리 할아버지가 말이다.) ‘할머니’는 공연 내내 스케치북에 그려진 ‘할아버지’를 애정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본다. 또 다른 장면에서 바다를 여행하던 할아버지는 하얀 눈길을 빨간 고무신을 신고 사뿐사뿐, 사뿐사뿐 걸어 들어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 말을 이야기 바깥의 어떤 화자가 했다면, 작품은 그렇게까지 모든 관객들이 숨죽이게 만들지는 못했을 것 같다. 어린이 연극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큰 목소리나 과장된 몸동작 없이, 미소를 지으며 차분한 어투로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어요.”라고 했을 때 극장에 만들어졌던 그 미묘한 공기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검은 스케치북 오브제의 높은 완성도와 다양한 활용 역시 주목할 만하다. 텃밭 그림에 뿌리 식물들의 이파리만 나와 있는데, 할머니가 관객들의 도움으로 채소를 찾아 수확하자 (이파리 그림을 잡아당기자) 종이 홈 속에 숨어있던 당근, 무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엌 그림을 배경으로 밥상을 차리고 스케치북을 다음 장으로 넘겼는데, 밥상은 그대로 있고 배경만 할아버지의 방으로 바뀌기도 했다.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나는 할아버지는 종이로 만든 관절 인형을 낚싯줄에 걸어 작동하였다. 할아버지가 이불에 한 ‘실례’는 천을 걷자 종이로 놓여있다. ‘할머니’는 휴지로 이 똥 모양 종이를 치우고 천을, 아니 이불을 빨아서 이젤 앞에 걸어 말린다. 토요일에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냈던 것은 자유롭게 바다를 여행하는 할아버지 장면이었다. 다채로운 색으로 팝업 페이지를 만들기도 했고, 할아버지와 함께 춤추는 고래는 몸통 가운데만 고정된 채 빙글빙글 돌릴 수 있었다. 눈길 속으로 걸어간 할아버지는 하얀 눈 숲을 배경으로, 막대에 단 빨간 신발 그림을 움직이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신발 그림은 그렇게 사뿐사뿐 걸어서 스케치북의 접힌 쪽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스케치북 그림이라는 다소 평면적일 수 있는 오브제를 활용해서 다채로운 표현을 해 내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젤을 세워 검은 스케치북을 넘겨가며 진행되는 이 작품은 간단한 줄거리와 오래 남는 여운을 특징으로 한다. 이젤 아래쪽에는 오르골 몇 개가 설치되어 있어서 필요한 음악을 틀 수 있게 되어 있다. 할아버지가 파도를 타고 여행하는 장면은 물결이 그려진 부채를 통해 구현되며, 이 부채는 관객들 눈앞까지 다가온다. 하루가 걸터 앉아있던 검은 물체는 여행가방임이 마지막에 밝혀지는데, ‘할머니’가 하루를 안아 들고 검은 천을 휙 걷으며 “할머니와 하루는 아직도 여행 중이랍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객석에 따뜻한 웃음이 번졌다.
 배우의 창작 역량 강화를 목표로 하는 축제였기에 어떤 작품들은 ‘좋음의 씨앗’을 공유하는 정도에 그쳤으나, <할아버지의 창문>은 단연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다른 공연들이 음향과 조명을 끄고 켤 오퍼레이터의 도움을 받았던 반면에 <할아버지의 창문>은 배우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구성되었기 때문에 ‘정말로 1인극’이기도 했다. 이번에 본 여섯 작품 중에서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할아버지의 창문>을 선택하겠다. ‘하루’와 ‘할머니’가 지금도 빨간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여행 중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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