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5일 수요일

연기, 연극의 경계에 서다: 뒹굴, 《담배[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

이준영

입구에서 논문 표지처럼 생긴 리플렛을 받고 공연장에 들어가면, 별다른 세트가 없는 무대에 두 명의 배우가 등장한다. 한 명의 배우는 자기소개 후 연극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다른 배우가 요가매트를 깔고 몸을 풀기 위한 일련의 동작을 반복한다. 연극에서 강연을 듣는 것이 익숙한 상황은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크게 특이하거나 이상한 부분을 발견할 수 없다. 또한 연극에서 배우의 연기에 관한 강연을 듣는 것은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둘의 역할이 바뀐다. 몸을 풀던 배우는 담배연기의 해로움에 관하여 강의를 하기 시작하고, 강연을 하던 배우는 자신이 설명하는 동작의 예시를 보여주기 위하여 요가매트 위에서 동작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곧 관객들을 당혹케 하는 상황이 나타난다. 관객들은 강연에서 담배연기의 해로움에 대해 듣는 대신 강연자(를 연기하는 배우)가 강의의 맥락에서 벗어난 부인과의 부정적인 관계, 개인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바닥을 치고 신발을 집어 던지며 극단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다가 마치 돌림노래를 하듯이 한 배우가 요가매트를 차지하면 다른 배우는 자신이 하던 강의를 다시 이어서 시작한다. 다른 배우가 담배연기의 해로움에 관한 강의를 하는 동안 요가매트 위에 한참동안 누워있던 다른 배우가 일어나 깜빡 잠이 들었다고 말한 후, 연극에 대한 강연을 이어나간다. 이 모든 과정은 서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전환된다.
만약 실제 강연 도중에 강연자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잠을 잔다면 강연을 듣는 이들은 공포감을 느끼거나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껴서 그 곳을 떠날 것이다. 강연 도중에 잠을 자는 것, 감정이 격해져서 바닥을 치며 화풀이를 하고 신발을 벗어던지는 등의 행위는 실제 강연 도중엔 용납될 수가 없다. 하지만 같은 행위를 해도 우리는 이것이 연극이라는 이유만으로 안심한 채로 그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연극 안에서라면 강연자라는 본분에서 벗어나 넘치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강연자’로서의 연기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는 그저 ‘분을 이기지 못하는 체’하는 연기를 하는 상태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연극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통해 연극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안전한 틀 안에 있다는 사실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극이 정말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객석 맨 앞줄에 앉아있던 연출자가 등장하여 배우들의 강연자 연기에 대해 코멘트를 한다. 연출자가 코멘트를 하는 상황을 보면서 관객은 두 사람의 강의와 연극을 위한 몸풀기 동작 전체가 연기였음을 명확히 알게 된다. 비판의 내용은 듣는 관객들 또한 수긍할 만하며, 그 내용이 딱히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따라서 관객은 ‘이제 극이 끝났구나’라고 안심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연출가가 간혹 보여주는 약간의 과장된 모션은 관객으로 하여금 아직 극이 진행되는 중인지 의심을 품게 만듦으로써 관객을 다시금 상황 안으로 끌어들이고, 연극의 안과 밖을 구분 짓는 경계를 다시 와해시킨다.
연출가는 자신의 코멘트를 마친 후 관객에게 코멘트를 요청하는데, 필자는 ‘방금 이 장면도 연극의 일부이냐’고 묻는 어찌 보면 어리석은 질문을 함으로써 스스로가 이 극에서 하나의 역할을 맡고 말았다. 결국 코멘트 시간이 끝나고 연출가가 마지막 인사를 함으로써 극은 정말로 끝나게 된다. 리플렛에는 배우가 두 명이라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마지막에 등장한 인물은 공식적으로는 이 극의 배우가 아님에 확신을 가진 관객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극을 보기 전에 리플렛을 주의 깊게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모든 것이 연극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의 의미를 그제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별 의미 없이 써 놓은 문구가 아니라, 실제로 이 모든 것이 연극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연출가의 행동이 극의 일부인지 의문을 품고 극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가지고 극의 안과 밖을 계속 나누려고 하는 관객은 완전히 모든 것이 박수소리를 듣고서야 깨달음을 얻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연극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이것이 연극인지 아닌지 규정하려는 시도 자체일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연극을 구성하는 암묵적인 요소들을 이용하고, 그것이 정말 ‘연극적’인 것인지에 대해 효과적으로 질문을 제기한다.
배우가 정해진 무대 밖으로 나가서 관객석을 이용한다든가 관객의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극의 경계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시도는 연극에 대해 공부해 본 바가 없는 사람이더라도 이론으로도 실제로 극을 감상함에 있어서도 많이 접해왔기 때문에 익숙하다. 즉, 연극의 경계 밖으로 나가서 보다 많은 요소들을 연극에 포섭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놀라움을 느끼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미 존재한다고 상정된 경계를 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담배[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는 의도적으로 그 경계 위에서만 극을 진행한다. 이 점에 있어, 연극과 관객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는 것은 단순히 관객이 존재하는 공간을 침범해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관객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관념을 허무는 것일 수 있으며, 그를 위해서 반드시 배우가 관객석에 들어오거나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할 필요는 없다. <담배[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는 오로지 연극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재배치함으로써 관객의 머릿속으로 들어간다. 배우들의 강연과 몸 풀기, 감정 표출은 연기인가 아닌가? 이는 중요하지 않다. 두 배우 중에 누가 주인공인가? 연극에 대한 강의를 하는 배우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아니면 몸을 풀다가 담배 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 강연을 하는 배우가 더 중요한가? 연출자도 배우인가? 코멘트를 하는 관객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것들 또한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결과적으로 배우와 관객, 연출자 모두가 연극의 규정성을 파괴하는 일종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그 역할들은 단순히 ‘연극 외적인 것들이 연극에 참여한다’는 진부한 주제를 표현한다기보다는, ‘이것을 지켜보는 당신이 생각하기에 연극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눈앞에 아무리 황당한 광경이 펼쳐져도,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이 예술이라는 범주 안에 있으면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해오지 않았던가? 예술을 감상하다 보면 형식에 대한 도전을 끊임없이 목격하지만 머릿속에서 예술의 범주가 깨어지는 순간을 경험하는 순간은 아주 드물다. 이 연극은 그것을 성공적으로 해낸다. 편의상 글에서는 연극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담배[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는 연구 프로젝트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연구일 수도 있고 연극일 수도 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모든 것이 뒤집어지는 상황에 빠진다. 결국 배우들이 연기를 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감정 표출을 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담배[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 –아마추어 연기자의 배우 훈련을 중심으로-
9월 23일 17시 서울대학교 인문소극장
9월 24일 16시, 19시 연세대학교 푸른샘
제작 ‘뒹굴’, 각색/연출 최희범

9월 23일 공연

9월 24일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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