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4일 수요일

어느 재판의 기록: 뒹굴, 《바로 그 얘기》

글_박종주

1621번째 재판


‘연극 비슷한 소통 프로젝트 뒹굴’의 〈바로 그 얘기〉는 지구 멸망 후 새 행성에 터를 잡은 ‘신인류’들의 재판을 다룬다. 이들은 이를 테면 ‘구인류’가 지구 멸망을 막을 수는 있지 않았을지를, 그 개개인들이 무언가 할 수 있지는 않았을지를 고민한다. 오늘의 피고는 바로 창작에 몰두했던 ― 그러나 지구 멸망의 전조가 된 사건을 주제로 삼았던 ― 한 예술가, 그것도 공연예술가이다. 그리 급한 재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 재판은 상아탑 속에서 현실을 방관했던 대학원생 신 모씨의 재판에 이어, 1621번째로 열리는 재판이다.

지구의 위기를 마주한 시점, 작가는 무엇을 했어야 하는가, 작가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를 〈바로 그 얘기〉는 묻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모의재판’임을 유의해야 한다. 피고 ― 어쩌면 예술가답게,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은 바로 그 예술가 ― 와 판사, 검사는 역할을 바꾸어 가며 서로를 비난하고 또 옹호한다. 연극적으로 진행되는 재판, 어떤 판결이 나오든 그 또한 연극의 일부일 뿐이다. 판결을 판결답게 만들고자 한다면, 연극을 현실과 뒤섞어야 하리라.

뒤섞기 위해, 〈그때 그 얘기〉는 아우구스투 보아우(Augusto Boal)가 제한한 ‘포럼 연극’의 형식을 취한다. 관객들은 배심원이 된다. 각자는 판사에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한편 ‘평결 양식’이라는 제목의 설문지를 작성하고 유죄 혹은 무죄에 투표한다. 지금 현실 어딘가에서 또한 위기라는 것이 진행되고 있다면, 배심원들을 설득하려 애쓰는 피고(들)과 검사(들)은 객석을 떠난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예술가를, 적어도 공연예술가를 심판할 수 있을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피고, 밍기적


피고는 밍 씨 성을 가진 ― 듣기에 따라 민 씨로도 들리는 ― 기적이라는 이름의 인물이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일으키는 작은 기적”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그 자리가 작업실인지 극장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검사에 따르면 그는 지구를 멸망으로 이끈 갈등이 점점 심화되어 가는 시점, “자신의 작업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겨우 멸망 직전에야, 이 주에 걸쳐 극장에서 자신의 작품을 올렸을 뿐이다.

그가 작업실에서 나오지 않은 이유는 다름 아닌, 그가 예술가라는 사실 때문이다. “예술은 시대정신을 비추는 횃불이자 희망”이며, 그런 예술을 다루는 예술가가 작업실에 틀어박힌 것은 현실에 대한 방관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예술가의 역할, 예술가의 임무, 예술가의 사명”을 다하기 위한 침잠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창작”한 작품으로 그는 두 주 동안 사백 명의 관객을 만났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관객들이 눈물 흘리게 했다고, 그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열어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검사는 묻는다. 눈물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를, 새로운 관점을 열었음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를. 예술가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다. 공연 예술의 특성상 그것을 알기는 쉽지 않다고 둘러 댈 뿐이다. “잘 봤다”, “이런 시기에 이런 민감한 문제를 다루어 주어 고맙다”는 말들을 들었다고 답해 보지만 검사는 믿지 않는다. 인사치레일 뿐은 아니냐고 되묻는다. 연극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던 이 예술가는 법정에서 갈수록 작아진다. 예술이 어떤 가상인 한, 그러니까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도 직접 행동은 아닌 한, 검사가 요구하는 현실적인 효과를 증명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연극이라는 닫힌 세계


예술가가 겨우 생각해 내는 항변 하나는 자신의 작업이 역사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마뜩찮은 대답인 모양이다. 기록 자체라면 영상이나 사진이 더 잘 해낸다. 어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촉구하는 일이라면 대규모 관객을 대하는 영화가 더 용이해 보인다. 정말로 어떤 효과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연극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윤동주의 시집처럼 다시 읽히지 못한다. 영상을 통해 남긴다고는 해도 이는 더 이상 연극이 아니다. 연극이란 그저 찰나의 가상일뿐이다.

그 가상이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그리고 관객을 그 세계에 들임으로써 현실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에서의 삶을 ‘연습’할 수 있게 한다면, 아무리 찰나의 가상이라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건대, 공연이 끝나면 관객이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 버리는, 작가가 관객과 직접 대화하지 않는 연극의 특성상 그런 효과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확인할 수 없는 이 희망이, 연극을 부여잡을 정당한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물어야 할 것이다. 연극은 정말로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는가를 말이다. 피고의 말대로 작가는 등장인물의 세세한 습관 하나하나까지도 창조해 낸다. 한 인물을 창조한다는 것은 한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독립적인 어떤 세계인가, 단순히 이 세계의 보잘것없는 한 구석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은 아닌가를 여전히 물을 수 있다. 한 역사적 사건을 다룬다고 할 때조차, 그것이 망각되지 않는,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과, 그저 그것을 소비하는, 현실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관객들


12월 11일 오후 두 시, 인천의 한 공가(空家)에 모인 배심원들은 호의적이었다. 재생산이 용이한 영화를 연극과 비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복되어 피로감을 주는 뉴스와 달리 공연을 통해 와 닿는 무언가가 있다고 한 배심원은 주장한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그는 밝히지 않았다. 또 다른 배심원 또한 호의적이다. 개인이 가지는 파급력 자체에 이미 한계가 있기에, ‘의도’를 보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한 사람에게 너무 큰 파장을, 한 예술가에게 직접 세계의 파국을 막기를 바라는 것은 부당하다고 그는 말한다. 스스로를 예술하는 사람이라고 밝힌 세 번째 배심원은 더더욱 적극적이다. 예술가가 직접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음에도 그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으로서 예술가가 누구보다도 더 그 사건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예술가의 존재, 그의 작업이라는 존재는 그 자체로 기쁘고 감사한 일이라고 그는 평한다.

첫 번째 배심원은 덧붙였다. 파급력이 작지조차 않은 것이라고. 마음을 움직이는 연극을 사람은 반복해서 보게 된다고, 주변인을 동반해 몇 번이고 보게 된다고 그는 말했다. 연극을 보고서 움직인 마음이 겨우 다시 극장을 찾는 데에 쓰일 뿐이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인지를 묻는 이는 없었다. 극장 밖에서 관객이 무엇을 하는지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배심원들은 아무래도, 닫힌 세계로서의 연극을 그 자체로 지지하고 있는 듯했다. 피고는 맞장구치며 반기지 않았다. 검사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 않았다. 관객들 ― 네 명이었다 ― 은 모두 무죄 판결을 내렸고, 연극은 그렇게 끝이 났다. 재판정에 따르면 온라인 투표가 또한 이어질 것이다. 배심원의 평결과 온라인 투표 결과를 합산해 최종적인 평이 내려진다. 1622번째 재판에서, 그 결과는 발표될 것이다.

연극은 그렇게 끝이 나고, 이제 다시 물을 차례가 왔다. 연극에 대한 재판이라는 이 연극이 하나의 세계로서 무엇을 창조해 냈는지, 관객들에게 무엇을 제시해 냈는지를 말이다. “시간 예술”인 연극의 특성상, 이 연극 또한 정해진 시간에 끝나야 했고, 그래서(인지) 배심원들과 검사는 추가적인 토론을 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예술가의 편이라는 것 이상을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다음번의 재판은 어쩌면, 이 ‘뒹굴’이라는 집단을 피고로 삼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연극계라는 닫힌 세계


이 날 채택되지 않은 증거, 토의되지 않은 주제가 한 가지 있다. 피고는 자신의 공연이 세계에 미친 영향의 증거로 두 편의 평론을 제시한다. 검사는 그것이 피고의 지인들이 쓴 것임을 지적한다. 피고는 좁고 좁은 연극계의 특성상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항변한다. 검사는 그렇다면 그것이 연극계의 구조적인 문제는 아니냐고 문제 삼는다. 판사는 연극계의 구조에 대해 논하려면 별도의 재판을 청구하라고 지시한다.

어쩌면 판사가 다른 재판으로 미루었으므로, 검사도 배심원도 이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배심원들에게 주어진 숙제가 하나 있다면, 어쩌면 1622번째 재판의 주제가 될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일 것이다. 객석의 반나마를 채우는 지인 관객들, 동문수학한 평론가들, 이렇게 서로 아는 사이에 주고받는 호평들 속에서 어떻게 한 공연의 핵심을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텅 빈 호평들 속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그저 재생산되는 연극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나 또한 피고를 옹호했던 한 명의 배심원으로서 여기에 덧붙여 본다.

거리시위에서 행인을 설득하는 일과 극장에서 관객을 설득하는 일이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 점에서 거리시위에 나가지 않은 예술가는 무죄다. 그러나 그가 눈물 이상의 증거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가 정말로 설득을 시도한 것인가 하는, 지금으로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이 남는다. 그가 어딘가로 숨어들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작업실이라는 골방이 아니라 연극계라는 골방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가 유죄라고 한다면 그것은 지하 공연장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관객과 자신을 가르고 있던 벽을 넘어서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세계의 비극을, 한낱 소재로 전락시켜도 아무 비난 않을 사람들 앞에서만, 자신의 공연을 선보였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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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연극 <바로 그 얘기>
연극 비슷한 소통 프로젝트 ‘뒹굴’ (성지수, 김정은, 심하경, 진영화, 최희범)
인천문화재단, 바로 그 지원 주최 “바로 그 시장” 참가작
2016.12.11. 오후3시
인천 중구 신포로 15번길 22-1 임대 중인 건물 2층 한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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