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수
공연예술 작품이 막강한 힘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이 ‘힘’이란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겠지만, 지금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권위’란 단어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막강한 권위를 가진 작품은 관객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이에 대한 답은 근래에 상연되는 ‘고전’의 사례를 생각해보았을 때 잘 드러난다. 먼저 관객은 극장을 찾기 전부터 관극 경험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신뢰를 가질 수 있다. 작품의 힘이 세니, 적어도 아주 망작은 아니겠지, 하는 기대 말이다. 또 하나, 관객은 암묵적으로 약속된 관람 태도가 정해져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정서적으로든 인지적으로든 이런 장면은 이렇게, 저런 장면은 저렇게 받아들이고 반응해야만 한다는 느낌. 약속되어 있는 것과 다른 관극 경험은 (예를 들어 감동을 받아야 할 장면에서 아무 감흥이 없다거나) 공연 탓이 아니라, 철저히 ‘이 작품을 잘은 모르는 관객인 나 개인의 문제’가 된다. 이렇듯 관객은 권위 있는 공연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뭘 좀 알아야’ 겨우 입을 뗄 수 있는 입장이 된다. 꼭 ‘고전’이 아니더라도 관객들에게 지속적으로 사랑 받으며 10년 이상 장기 공연을 해 온 작품도 그렇다. ‘뭘 모르는’ 관객은 오랜 기간 그 작품을 사랑한 수많은 관객들과, 오랜 기간 같은 작품을 상연한 제작진 및 배우들 앞에서 감히 무어라 말하기 어려워진다.
뮤지컬 <빨래>를 보고 온 나의 입장이 지금 그러하다.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의 졸업공연으로 시작하여 2005년 국립극장 별오름극장에서 상업 작품으로 정식 초연된 이래로 오픈 런에 가깝게 공연 중이며, 제11회 한국뮤지컬대상 작사상 및 극본상, 제4회 더 뮤지컬 어워즈 작사, 작곡상 및 극본상을 수상했고, 하는 기타등등 기타등등의 정보는 어렴풋이 알고, 오랜 공연 기간을 걸쳐 생겼을 작품에 얽힌 에피소드와 추억 등등은 전혀 알지 못한 채 공연장을 찾았던 나는, 지금 입을 다물어야 한다. 십여 년 째 꾸준히 극장을 찾는, 또는 다양한 캐스팅 조합 별로 같은 차수 공연을 몇 번이고 다시 보는, 그래서 어떤 자리를 예매해야 공연 도중 남자 주인공의 사인을 받기 쉬운지 등을 너무도 잘 아는 <빨래> 팬들 앞에서 나 같은 ‘빨래 초짜 관객’의 불평은 그 자체로 예의가 없는 짓이 된다. 그런 것들이 이미 창작 뮤지컬 <빨래>의 ‘힘’, 권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게 허락된 관람 평은 “좋았어요.” “감동 받았어요.” “노래들이 귀에 계속 맴돌아요.” “배우들이 멋져요.” 정도인 것만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한마디 하려고 드는 것은 현재 이 작품이 가진 결함 때문이다. 이 글은 공연이 가진 젠더 이슈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시작하여, 이것이 어떻게 작품 전체의 구성을 망가뜨리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부디 이 쓴소리, 아니 어쩌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껄이는 헛소리가, 뮤지컬 <빨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 많이 아프게는 하지 않기를 바란다.
<빨래>에서 가장 도드라지게 강조된 서사는 몽골 노동이주청년 ‘솔롱고’와 강원도 여자 ‘나영’의 러브라인이다. 그런데 이들의 사랑이 그려지는 과정에서 나영은 끊임없이 대상화된 여성으로만 그려지면서 나영은 하나의 인물로서 주체성을 갖지 못한다. 솔롱고와 나영의 ‘사랑’은 줄곧 솔롱고의 시각에서 그려진다. 솔롱고에게 언제부터 호감을 가졌는지, 이 호감이 언제 이웃사람에 대한 친절로 발전했는지, 그리고 이 친절이 도대체 언제부터 ‘사랑’이 되었는지와 같은 감정의 변화에 대해 나영은 스스로의 목소리로 말할/노래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 두 사람이 상냥한 말을 주고받는 장면은 참 많이도 나오지만, 그 정도 상냥함이야 살면서 주변사람들에게 얼마든지 베풀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영의 직장동료가 “무슨 좋은 일 있냐. 얼굴이 좋아보인다.”라고 하는, ‘썸’이나 연애를 시작할 때 주변인물들이 하는 스테레오타입의 대사에도, 그것이 나영이가 솔롱고와 좋은 관계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연결고리가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
내가 관람한 날의 ‘나영’의 연기가 능숙하지 못해서 대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없지 않은, 그 섬세한 감정 변화가 충분히 표현되지 못했던 것일 수 있다. 실제로 내가 본 나영은 끝까지 솔롱고에게 ‘타인에 대한 친절’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니 옥상에서 함께 빨래를 널다가 솔롱고가 나영의 손을 덥썩 잡는 장면에서, 아 이제 따귀를 날리면 딱 좋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남자 주인공 솔롱고의 경우 배우 개인의 연기가 부족하더라도 <빨래>의 대표곡인 “참 예뻐요”를 솔로로 부르는 등 자기 감정을 표현할 기회가 여러 차례 있는 반면, 나영에게는 그럴 솔로곡, 그럴 장면이 주어지지 않는다. 대사 처리를 어찌 하느냐에 따라 끝까지 상대에게 마음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말 몇 마디만을 가지고, 나영은 러브라인의 여자 주인공 자리를 지켜야 하는 처지인 셈이다. (그러니 두 사람이 곧이어 키스를 하더니 살림방을 합치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솔롱고의 노래 “참 예뻐요” 장면은 나영에 대한 대상화의 절정을 보여준다. 나영이 이사를 오다가 떨어뜨린 책을 솔롱고가 주워주었을 때 한 번, 옥상에서 빨래를 널며 인사를 했을 때 한 번 만나고 나서 그들이 세 번째로 마주치는 장면에서, 솔롱고는 공장장, 또 다른 이주 청년 ‘마이클’과 함께 슈퍼 앞에서 오징어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고 있다. 무대 한켠에서 이들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을 때 무대 다른 쪽에서 나영이 슈퍼에 가기 위해 등장한다. 나영이 그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슈퍼에 들어갔다 나오고, 그곳에 놓고 간 책을 슈퍼 주인으로부터 넘겨받는 그 시간동안 솔롱고, 마이클, 공장장은 나영을 빤히 쳐다본다. 여기까지야 나영이 너무 예뻐서 그런 거고, 그러므로 그건 칭찬이고, 이 정도면 시선 강간 축에 끼지도 못한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시선 강간은 단순히 음흉한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상대를 훑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성은, 사람은 ‘꽃’이 아니기 때문에 이유를 막론하고 충분히 가깝지 않은 타인을 대놓고 쳐다보는 것은 그 자체로 무례한 행동이다. 이 무례함을 무례함으로 인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여기에 젠더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후에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철저하고 명백하게 나영에 대한 대상화가 이뤄진다. 갑자기 조명이 어두워진다. 주변은 모두 어두워지고 무대 한쪽 구석의 솔롱고와, 막 집에 가던 중인, 그래서 무대 한가운데에 있는 나영에게만 국부조명이 떨어진다. 시간이 멈춘다. 음악이 시작된다. 솔롱고가 노래를 시작하며 홀로 움직인다. 나영은 동작이 멈춰진 채로 환한 조명을 받으며 무대 중앙에 ‘놓여있다.’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것은 솔롱고 뿐이니 동작이 멈춰진 사람은 나영 혼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마치 실험대에 올려진 것처럼 밝은 조명 아래에 타의(솔롱고의 의도)에 의해 고정되어 전시되는 것은 나영 뿐이다. 노래를 부르며 서서히 나영에게 다가가는 솔롱고는, 남성의 시선에서는 사랑하지만 가 닿을 수 없는 이를 향한 간절함을 표현한 것일 수 있지만, 여성의 시선에서는 폭력 그 자체이다. 몇 번 얼굴을 본 것이 전부인 사람이 나를 해부용 실험동물처럼 속박하고 전시하더니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어딘가 만지기라도 하려는 걸까. 마침내 그의 손이 거의 나영의 손에 닿을 때 쯤, 나영을 강조하던 조명은 꺼지고 나영이 먼저 솔롱고의 손을 잡는다. 솔롱고의 환상 속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이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나영의 움직임과 말은 주체적인 것이 아니다. 관객들은 나영의 말과 행동이 솔롱고의 기대일 뿐임을 안다. 이제 나영은 고정된 객체에서 남성의 환상대로 반응해주기까지 하는 (그것도 아주 ‘주체적으로’ 데이트를 이끄는 것으로 그려지는) 객체가 된다.
작품의 큰 소재 줄기인 연애에서 주체가 되지 못한 여자 주인공 나영의 입지는 자연스레 작품 내에서도 애매모호해진다. 아무리 직장에서 불의에 맞서려 하는 주체적인 인물이려 해도, 귀가만 하면 솔롱고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분명 사건의 배경이 되는 장소들, 인물이 사용하는 동선 등을 보면 나영이 주인공임이 확실한데도, 과연 이 역을 주연이라 해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나영이 지워진 자리, 즉 주연이라는 자리에는 주인 할매, 희정 엄마, 그리고 솔롱고가 남는다. 그리고 이 두 여자와 한 남자의 조합은 상당히 이상하다. 차라리 솔롱고까지 사라져버렸다면 ‘참 열심히 사는 두 여자와, 그들 주변의 다양한 사람들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겠는데(이렇게 되면 나영과 솔롱고는 조연이 됨), 작품에서 솔롱고의 자리는 여전히 견고하다. 연애라는 작품의 큰 줄거리의 유일한 적극적 주체이자, 이 감정을 솔로곡인 동시에 작품의 대표곡을 부르며 이끌어나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주인 할매의 장애를 가진 딸이 한밤중에 많이 아팠을 때, 나는 당연히 솔롱고가 이 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줄 거라 생각했었다. 그래야 중심인물인 세 사람 간의 끈끈한 관계 형성이 비로소 시작될 테니까 말이다. (정말로, 나는 이 작품에 대해 문외한이었고, 여전히 그러하다.) 그렇지만 할매의 딸을 들쳐 업고 새벽을 달려 병원에 간 것은 희정 엄마였다. 솔롱고는? 철저히 대상화된 나영을 ‘얻는 데’ 성공할 뿐이다.
왜 나영 없이 솔롱고의 자리만 견고한 것이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남은 솔롱고가 다른 주연들과 어떠한 관계인 건지 작품이 섬세히 그려내지도 않기 때문이다. 솔롱고는 그저 주인 할매, 희정 엄마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는 사이, 그들로부터 나영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얻는 데 도움을 받는 정도의 얕은 관계만을 유지한다. 이 남자의 이야기를, 굴곡진 인생을 서로 나누고 위로하는 주인 할매와 희정 엄마 사이 어디 즈음에 위치시켜야하는지, 이 셋의 관계는 서로 어떻게 얽혀있는 것인지 <빨래>는 답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솔롱고가 나영이를 ‘데리고 살게 되는’ 얘기(두 사람이 방을 합치는 것은 나영이가 솔롱고의 방으로 이사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상하다, 나영은 어쨌든 파주 공장으로 일을 나가고, 솔롱고는 또 임금을 떼먹혔댔는데... 솔롱고의 방이 더 넓은거겠지. 그래, 그런 것이어야만 하겠지, 하는 추측은, 무지한 관객인 나만의 몫으로 남는다)랑, 저 두 여인의 기구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삶의 이야기는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작품에서 주체가 되지 못한 나영이 지워지고 솔롱고-주인 할매-희정 엄마라는 ‘연결고리가 미약한 조합’이 중심이 되어버린 <빨래>는 정리되지 못한 산발된 에피소드의 나열이 되어버린다. 관객이 이 서로 관계 없는 이야기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봐야 할 이유가, 그것도 결코 안락하다고 할 수 없는 의자에 160분 동안이나 앉아서 봐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정말로 <빨래>에 대해 무지한 관객이지만, 이 작품의 대본을 쓰고 작사를 한 사람, 이번 시즌에도 연출을 한 사람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안다. 그에게 작품을 통해 여성주의적 관점을 선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여성 연극인의 작/연출 작품에서 여성에 대한 대상화된 시선 때문에 작품의 구성이 위태롭게 여겨지는 현상이 발생했다는 것은 공연예술을 사랑하는 여성 관객으로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은 후, 약간의 조사를 통해 이 작품이 2003년 이후에 많은 변화를 겪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90분이었던 공연 길이는 160분으로, 삽입곡은 7곡에서 18곡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 변화의 양상이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하지만, ‘상업화’ 과정에서의 러브라인 강화, 이로 인한 솔롱고 비중의 강화 등이 일어났다는 얘기를 듣고 슬펐다. 더 많은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작품을 다듬는 과정에서 고려된 그 ‘많은 관객’이, 소위 ‘뮤덕’이라 불리며 흥행의 열쇠를 쥐고 있는 20-30대 여성 관객임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 주인공 서나영을 지워버린 것은 여성 연극인 추민주 혼자가 아니다. 이것이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는 헛소리에 가까울 관람평을 굳이 작성하고 굳이 게재하는 이유이다. 나는, 뮤지컬 <빨래>는 심각한 젠더 폭력을 재생산하고 있으며, 주요 인물 구성의 측면에 미숙함이 있어서 작품의 서사 구조의 안정성마저 떨어지는, 그래서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2015년 11월 2일 월요일
몰래 먹는 사탕 같은 달콤함: 인피니트와 뮤지컬 <인 더 하이츠>
글쓴이_시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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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뮤지컬 <인 더 하이츠> 페이스북 페이지 |
나는 뮤지컬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다만 확실한 것은 뮤지컬이 다른 공연예술 장르에 비해 전반적으로 화려하다는 것이다. 가끔 뮤지컬을 보고나면 내가 눈과 귀를 마비시키는 스펙터클에 현혹되기만 하지는 않았나, 하고 자기반성을 하게 될 정도다. 우연히 버스 정류장에서 <인 더 하이츠>(이하 <하이츠>)라는 뮤지컬의 포스터를 봤을 때도 랩과 비보잉이 가미된 신개념 뮤지컬이라는 홍보 문구가 눈에 띠기는 했지만, 그 이유만으로는 그 작품에 흥미가 생기지는 않았다. 이미 모든 요소가 자극적인 뮤지컬 무대 위에서는 힙합의 자유로운 느낌이 잘 살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힙합 음악과 문화가 오늘날의 한국 대중문화에서 방송을 통해 전에 비해 손쉽게 소비되고 있는 것을 봤을 때, 뮤지컬에 힙합을 접목시킨다는 것 자체도 화제성과 관객몰이를 위한 전략으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닐까, 기대보다는 의심이 더 많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금 13만원을 주고 결국 뮤지컬계의 소위 “듣보잡”이라고 할 수 있을 그 공연을 보고 왔다. 단 하나의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인피니트라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두 명이나 나오기 때문이었다! <하이츠>는 뉴욕의 히스패닉 할렘이라고 불리는 워싱턴 하이츠라는 지역을 배경으로, 빈곤하고 차별받는 라틴계 이민자들의 삶에 대한 희망을 그린 뮤지컬이다. 2008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후 토니상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한국 초연인 이번 공연에는 인피니트의 메인보컬인 김성규와 래퍼 장동우가 각각 베니와 우스나비 역에 캐스팅되어 출연했는데(더블캐스팅을 넘어 트리플, 콰드러플 캐스팅이었지만), 특히 주로 랩을 하는 우스나비는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극을 이끌어가는 역할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VIP석 예매를 감행하게 됐다. 인피니트는 힙합 그룹이 아닌 댄스 그룹으로서의 정체성이 조금 더 분명한 그룹이고, 따라서 팀 내 래퍼의 위상도 그다지 높지는 않다. (활동 다양화의 일환으로 래퍼 두 명이 유닛을 결성해서 따로 앨범을 두 차례 내기는 했지만.) 따라서 인피니트의 일곱 멤버들을 두루두루 좋아하는 팬의 입장에서는 노래의 파트가 많지도 않고, 연기활동을 병행하거나 예능에 활발하게 얼굴을 내비치지도 않는 장동우에 대해 늘 어딘가 그리운 구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나 또한 그가 주인공 격의 배역을 맡은 뮤지컬을 결국에는 보게 될 것이었는데, 비싼 티켓 가격에 한번, 그리고 보고 나서 실망할 걱정에 두 번, 그렇게 몇 번이나 예매를 망설이기는 했다. 결국 망설이다 뒤늦게 예매전쟁(피의 티켓팅을 줄여 “피켓팅”이라고도 한다)에 참전해 12열에 VIP 좌석을 구했다. 괘씸하게도 공연장 1층 전체가 VIP석이라서 내 자리는 성에 찰 만큼 무대와 가깝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눈코입이 분명하게 보일 거리에서(“면봉”만 실컷 보고 오는 것은 면할 거리에서) 내 아이돌을 볼 수 있다는데, 종국에는 예매 전 망설임에 허비해버렸던 시간이 후회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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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캐스팅보드 앞에 서서 사진을 찍지 않는다. 팬질하러 왔다고 머글(팬이 아닌 사람) 친구들에게 자랑할 것도 아니고, 사실 인증샷이 필요 없기도 하다. |
사실 나는 그간 인피니트에 대한 나의 팬심을 일종의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로 여겨왔다. 공연예술을 공부하다 보니 “좋은” 퍼포먼스에 대한 내 나름의 관점과 기준이 생기게 됐는데, 종종 인피니트가 퍼포먼스로서가 아니라 멋지고 귀여운 이미지로 소비될 수밖에 없도록 자신들을 내보이는 것 같은 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그들을 여전히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인피니트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데뷔 초 내세웠던 칼군무 때문이었다. 사실 멤버 7명 중 2명을 제외하면 모두가 몸치에 가까워서, 제작자는 깔끔한 무대를 위해 칼군무를 하나의 전략으로 채택할 수밖에는 없었다고 한다. (인지도도 없고 춤을 잘 추지 못하는 신인 아이돌 그룹이 무대에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일곱 명 사이의 호흡뿐이었을 것이다.) 인피니트의 칼군무는 단지 일곱 명이 한 치의 오차 없이 박자에 맞춰 안무를 하는 것에 머무르기보다는, 마치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절묘한 타이밍을 맞춰 무대 위에 하나의 유기적인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제는 데뷔 6년차의 꽤 노련한 아이돌이 된 인피니트는 예전의 퍼포먼스와는 사뭇 다른 무대를 보여준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몇 번의 월드 투어를 거치며 안무 동작은 세련되고 여유로워졌지만, 안무 구성의 치밀함과 촘촘함은 예전 같지 않다. 화려해진 무대와 360도 카메라 같은 최신 기술을 사용한 최근의 “Bad” 뮤직비디오(https://youtu.be/BNqW6uE-Q_o에서 유튜브 앱으로 시청해야 체험 가능!)는 여전히 “칼군무”라고 할 만한 것을 보여주지만, 멤버 사이의 호흡과 퍼포먼스의 구성을 강조해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인피니트를 보여주기 보다는, 현란한 시각적 요소와 더불어 멤버 각각을 멋있는 모습으로 보여내는 것에 치중한다. 전보다 출연이 잦아진 예능 방송과 라디오, SNS 등 무대 밖의 연예활동 역시 멤버 각각의 귀엽고 친근한 모습을 강조한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데뷔 초에 인지도가 없는 상태의 신인가수로서 인피니트가 퍼포먼스를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면 이제는 다른 내세울 것들이 많아졌다는, 그들로서는 긍정적인 변화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의 멋있고 귀엽고 잘 나가는 모습이 대견하고 자랑스럽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다른 아이돌과는 달랐던 인피니트의 무대를 기억하는 (세련되지 못한) 나는, 요즘 유행한다는 EDM 비트의 감각적인 사운드와 시크한 안무를 보면서 퍼포먼스보다는 인피니트 자체를, 보다 정확히는 인피니트가 대표하는 “멋지고 좋은 것”만을 보게 되는 현상에 오히려 죄책감이 든다. 아이돌 스타로서, 멋지고 귀여운 환상을 제공하는 대가로 이익을 창출하는 아이돌 산업의 논리 속에서 인피니트 역시 그럴 수밖에는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그들이 “상품”이 아니라 “아티스트”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상처를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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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뮤지컬 <인 더 하이츠> 페이스북 페이지 |
마찬가지로, 뮤지컬이 언제나 화려하고 멋진 이미지로 가득한 무대로 관객을 한바탕 홀리고 마는, 그리고 막대한 관객 동원력과 값비싼 가격을 자랑하는 “문화상품”이 아니라, 그 장르 고유의 감각을 자극하는 방식으로써 감동과 울림을 주고 관객에게 각인되는 “예술작품”이기를 바라는 내 마음은 자주 좌절되어 왔다. 하지만 의심을 안고 잔뜩 경계한 채로 단지 인피니트를 보기 위해 관람한 <하이츠>는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라틴계 이민자 캐릭터들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랩과 비보잉은 어떻게 녹아들었을까, 걱정했던 부분들을 눈여겨보았지만, 보는 내내 크게 거슬리는 부분은 없었다. 인피니트를 제외하고는 실력파 뮤지컬 배우들이 주요 역할을 맡았고, 그들이 노련한 연기로 납득 가능한 세계를 구축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늘 지나치게 화려하다고만 느꼈던 뮤지컬 무대가 <하이츠>에서는 작품의 배경에 걸맞게 비교적 소박하고 친근하게 만들어져있어서 좋았다. 까칠하고 말이 많지만 속정이 깊은 동네 미용실 원장 다니엘라 역을 맡았던 최혁주 배우는 작지만 다부진 외모와 특유의 된소리가 두드러지는 말투까지 완벽한 라티나latina를 구현해냈고, 주요 여자 캐릭터인 니나를 맡은 김보경 배우는 귀에 꽂히는 발성과 다듬어진 톤으로 뮤지컬의 정석 같은 노래와 연기를 보여줬다. 뮤지컬 무대에 처음 서는 장동우도 본인에게 맞는 가사를 스스로 써서 랩을 해서 그런지 억지스럽게 들리지는 않았다. 물론 가끔 어쩔 수 없이 김성규의 발성이 듀엣 중 상대역인 김보경의 뮤지컬 식 발성과 두드러지게 대조되기도 했고, 연기가 처음인 장동우의 대사가 잘 전달되지 않는 등 인피니트의 연기가 살짝 튀게 되는 순간들은 있었다. 그리고 우려했던 대로 비보잉은 아주 짧게만 삽입되고 대부분의 춤은 뮤지컬 특유의 군무로 채워져서, 힙합 뮤지컬을 표방하기에는 랩과 비보잉이 그다지 매력적으로 구현되지는 않았고 심지어 구색 맞추는 정도로만 동원된 것처럼 보였다. 또 그 외에도 음향이나 안무의 사소한 부분들이 내 심장을 가끔 조여들게 했지만, 결국엔 학예회에 참석한 학부모처럼 그저 너그럽고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게 됐다. 내 아이돌의 학예회를 흐뭇하게 지켜보는 것, 나는 애초에 바로 그것을 하러 간 것이기도 했다.
갈수록 많은 아이돌 스타가 뮤지컬에 캐스팅되고 있는 요즘, 뮤지컬 팬들 사이에서 그들의 실력에 대한 논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 인피니트를 좋아하고 아끼면서도 무대 위의 김성규와 장동우를 보며 그들과 뮤지컬 배우들과의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어쩌면 인피니트 팬이 아닌 다른 관객들보다 그 차이에 더 민감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뮤지컬 그 자체보다는 그 아이돌을 좋아하는 누군가에게는 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되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뮤지컬과 아이돌의 조합은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일단 무엇보다 뮤지컬 산업은 아이돌 캐스팅을 통해 유명한 뮤지컬 배우가 출연하지 않는 회차에도 평타 이상의 관객을 확보한다. 나처럼 학예회를 본다는 마음으로 예매하는 팬들은 공연의 이모저모를 뜯어보며 연출이나 작품에 대한 평가에 가혹하지도 않을 것이다. 게다가 한 번 이상 관람하는 팬도 많을 것이니, 뮤지컬 산업에서 아이돌 캐스팅이란 괜찮은 수익모델일 것이다. 나도 뮤지컬 자체에는 기대보다는 의심을 안은 채, 작품보다는 인피니트를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공연장에 갔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게 된 <하이츠>는 내가 보려고 하지 않았던 공연 형식에 대한 거부감을 조금은 완화시켜주었다. 예상했던 대로 새로운 형식의 혁신은 없었고 엄청나게 매력적인 뮤지컬 고유의 예술적 순간도 없었지만, 다음에 또 보고 싶을 만큼 노래와 연기를 아주 잘하는 뮤지컬 배우들의 퍼포먼스를 보았고 가장 중요하게는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이(우리 애들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보았다. 콘서트 무대나 예능 방송에서는 맏형이랍시고 다른 멤버들에 비해 애교 같은 것을 잘 보여주지 않던 성규가 “기싱꿍꼬또”부터 인피니트 대표 개인기인 전갈춤까지 보여줄 때, 나는 성규가 자신을 보러 온 팬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우스나비가 복권에 당첨되어 귀향을 앞둔 채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할머니를 그리워하며 울 때, 나는 (비록 손발이 오그라들기는 했어도) 우스나비를 연기하는 장동우가 귀여웠고, (그 슬픈 감정에 동화되거나 감동을 받지는 못했어도)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장동우가 자랑스러웠다. 다른 무대라면 메인보컬인 성규에 가려졌을 동우가 주인공이라니! 힙합 뮤지컬이라는 말도 안 되는 것을 할부 3개월로 예매까지 해가며 봤어도 그걸 봤으니 됐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들이 나를 대중문화의 노예로 여겨도 어쩔 수 없다. 예술이 아니면 어떻고, 길티 플레저면 또 어떠랴, 이렇게나 달콤한데.
2014년 3월 2일 일요일
[두산아트랩] 몸-주체로서 여성, 소리-주체로서 소리꾼: 판소리 단편선 <추물 / 살인>
by 백인경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영혼, 그대의 이름은 ‘배우’!
그러나 ‘체화(embodiment)'라는 개념이 서양 연극사에 등장했던 18세기부터 무대 위의 배우들에게 요구되는 자유란 일종의 속박과도 같았다. 그 체화의 개념이란 한 인간으로서 배우 자신을 비워내고 텍스트가 묘사하는 등장인물로 온전히 다시 태어나도록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그 사이의 어딘가에서 나도 그도 아닌 그 즈음에서, 주어진 시공간 안에서 또 다른 시공간을 창출해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무대 위의 생명체들; 배역을 창출해내는 정신적 주체이자 그 자체로 물질적 재료로서 무대 위에 봉헌되는 배우의 신체는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존재이자 그만큼 더 가혹하고 냉철한 시선들을 온 몸으로 견뎌내야만 하는 여린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텅 빈 무대 위에서 우뚝 서서 홀로 이야기를 끌고가는 판소리의 창자(唱者)는 어떠한가? 심청이도 되었다가 심봉사도 되었다가 돌연 제 3자의 입장에서 부연설명도 곁들이며 관객들을 들었다 놨다 판을 끌고가는 소리꾼에게도 철저히 누군가가 되어야'만' 하는 그런 종류의 고충들이 있었을까? 이번 두산아트랩에서 진행된 판소리 단편선 <추물/살인>은 공연예술의 특정 장르를 떠나 무대 위의 다양한 존재 양태에 대한 가능성들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녀 스스로가 노래하는 소리꾼으로서, 또한 한 명의 배우로서 판소리와 연극에 대한 오랜 고민과 실험을 무대화했던 이자람(@jjjjjam)은 양손프로젝트의 박지혜 연출과 손을 잡고 주요섭의 단편 소설들을 무대 위에 올렸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는 이자람 그녀가 아닌 또 다른 그녀들이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이자람의 공연’을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비슷한듯 또 다른 다양한 소리들을 만날 수 있었던건 오히려 관객의 입장에서는 감사하고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김소진과 이승희는 각각 <추물 / 살인>의 소리를 맡아 두 여성의 이야기를 전혀 다른 분위기로 끌고 나갔다.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영혼, 그대의 이름은 ‘배우’!
그러나 ‘체화(embodiment)'라는 개념이 서양 연극사에 등장했던 18세기부터 무대 위의 배우들에게 요구되는 자유란 일종의 속박과도 같았다. 그 체화의 개념이란 한 인간으로서 배우 자신을 비워내고 텍스트가 묘사하는 등장인물로 온전히 다시 태어나도록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그 사이의 어딘가에서 나도 그도 아닌 그 즈음에서, 주어진 시공간 안에서 또 다른 시공간을 창출해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무대 위의 생명체들; 배역을 창출해내는 정신적 주체이자 그 자체로 물질적 재료로서 무대 위에 봉헌되는 배우의 신체는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존재이자 그만큼 더 가혹하고 냉철한 시선들을 온 몸으로 견뎌내야만 하는 여린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텅 빈 무대 위에서 우뚝 서서 홀로 이야기를 끌고가는 판소리의 창자(唱者)는 어떠한가? 심청이도 되었다가 심봉사도 되었다가 돌연 제 3자의 입장에서 부연설명도 곁들이며 관객들을 들었다 놨다 판을 끌고가는 소리꾼에게도 철저히 누군가가 되어야'만' 하는 그런 종류의 고충들이 있었을까? 이번 두산아트랩에서 진행된 판소리 단편선 <추물/살인>은 공연예술의 특정 장르를 떠나 무대 위의 다양한 존재 양태에 대한 가능성들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녀 스스로가 노래하는 소리꾼으로서, 또한 한 명의 배우로서 판소리와 연극에 대한 오랜 고민과 실험을 무대화했던 이자람(@jjjjjam)은 양손프로젝트의 박지혜 연출과 손을 잡고 주요섭의 단편 소설들을 무대 위에 올렸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는 이자람 그녀가 아닌 또 다른 그녀들이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이자람의 공연’을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비슷한듯 또 다른 다양한 소리들을 만날 수 있었던건 오히려 관객의 입장에서는 감사하고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김소진과 이승희는 각각 <추물 / 살인>의 소리를 맡아 두 여성의 이야기를 전혀 다른 분위기로 끌고 나갔다.
2014년 2월 22일 토요일
헤이노니 타루: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
by 에스티
(전날 또 다른 판소리를 봐야하는 바람에 첫공연을 아쉽게 놓쳤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틑날밤에"입니다. )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소개하던 날 그는 당시 대세였던 스마트폰 블랙베리의 물리적 키보드가 가진 지저분함을 디스하면서 아이폰의 터치스크린 시대가 올 것을 예견했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고 심지어 블랙베리 역시 터치스크린 폰을 생산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왔다. 비록 그날 이후 우리는 고질적인 오타에 때로는 심각한 사고를 치는 일도 겪고 있으며, 급기야 아이폰에 블랙베리식 키보드를 붙일 수 있는 케이스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터치스크린은 출력과 입력이 공간적 구획으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던, 그래서 우리의 사고 또한 거기에 맞춰 움직여야 했던 시절에서, 이제는 커다란 (점점 더 커지는) 스크린이 필요에 따라 입력 장치가 되기도 하고 출력 공간이 되는 유연함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국악뮤지컬집단 타루(www.taroo.com)의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에서 나는 아이폰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유연함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햄릿>을 판소리로 한다. 그리고 네 사람의 배우 또는 소리꾼이 때로는 다같이 햄릿을, 또 때로는 이야기 속 인물들을 연기하기도 한다. 이 시도는 <햄릿> 하면 떠올리게 되는 ‘정통적’인 이미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하지만 <햄릿>의 비평사나 공연사를 조금 살펴보기만 해도 이런 시도 자체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 폴란드 출신의 저명한 연극 평론가 얀 코트에 따르면, “<햄릿>에 관한 연구 논문 목록은 바르샤바 전화번호부 보다 두 배나 두껍다”라고 한다. 아직도 전화번호부가 만들어지는지 의문이지만, 그리고 그때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은 전화번호도 많이 늘었겠지만, <햄릿>에 대한 연구 목록은 거의 작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만큼 학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다양한 시도가 끊이지 않는 이 <햄릿> 판이다 보니, 판소리 <햄릿>이 만들어진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클로디어스가 말하는 자연의 순리(“This must be so.”)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사실 단순히 국내 인지도를 생각할 때 판소리 브레히트보다는 판소리 셰익스피어가 먼저 등장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뮤지컬 <햄릿>이라는 범주에서 놓고 비교하더라도 이번 작품은 뛰다의 <노래하듯이 햄릿>이 전통문화를 적극 활용한 음악인형극이나 체코에서 제작되어 국내에서 오랫동안 공연된 뮤지컬 <햄릿> 의 뒤를 잇는 것이다. 따라서 후발 주자로서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는 단순한 형식적 변신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어야 했는데, 다행히도 텍스트에 접근하는 방식이나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에서 기존의 작업들로부터 발전된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날 또 다른 판소리를 봐야하는 바람에 첫공연을 아쉽게 놓쳤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틑날밤에"입니다. )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소개하던 날 그는 당시 대세였던 스마트폰 블랙베리의 물리적 키보드가 가진 지저분함을 디스하면서 아이폰의 터치스크린 시대가 올 것을 예견했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고 심지어 블랙베리 역시 터치스크린 폰을 생산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왔다. 비록 그날 이후 우리는 고질적인 오타에 때로는 심각한 사고를 치는 일도 겪고 있으며, 급기야 아이폰에 블랙베리식 키보드를 붙일 수 있는 케이스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터치스크린은 출력과 입력이 공간적 구획으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던, 그래서 우리의 사고 또한 거기에 맞춰 움직여야 했던 시절에서, 이제는 커다란 (점점 더 커지는) 스크린이 필요에 따라 입력 장치가 되기도 하고 출력 공간이 되는 유연함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국악뮤지컬집단 타루(www.taroo.com)의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에서 나는 아이폰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유연함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햄릿>을 판소리로 한다. 그리고 네 사람의 배우 또는 소리꾼이 때로는 다같이 햄릿을, 또 때로는 이야기 속 인물들을 연기하기도 한다. 이 시도는 <햄릿> 하면 떠올리게 되는 ‘정통적’인 이미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하지만 <햄릿>의 비평사나 공연사를 조금 살펴보기만 해도 이런 시도 자체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 폴란드 출신의 저명한 연극 평론가 얀 코트에 따르면, “<햄릿>에 관한 연구 논문 목록은 바르샤바 전화번호부 보다 두 배나 두껍다”라고 한다. 아직도 전화번호부가 만들어지는지 의문이지만, 그리고 그때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은 전화번호도 많이 늘었겠지만, <햄릿>에 대한 연구 목록은 거의 작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만큼 학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다양한 시도가 끊이지 않는 이 <햄릿> 판이다 보니, 판소리 <햄릿>이 만들어진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클로디어스가 말하는 자연의 순리(“This must be so.”)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사실 단순히 국내 인지도를 생각할 때 판소리 브레히트보다는 판소리 셰익스피어가 먼저 등장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뮤지컬 <햄릿>이라는 범주에서 놓고 비교하더라도 이번 작품은 뛰다의 <노래하듯이 햄릿>이 전통문화를 적극 활용한 음악인형극이나 체코에서 제작되어 국내에서 오랫동안 공연된 뮤지컬 <햄릿> 의 뒤를 잇는 것이다. 따라서 후발 주자로서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는 단순한 형식적 변신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어야 했는데, 다행히도 텍스트에 접근하는 방식이나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에서 기존의 작업들로부터 발전된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14년 2월 21일 금요일
이자람의 비극하는 마음을 응원하며: 두산아트랩-5 판소리 단편선 <추물/살인>
(질문할 기회를 놓쳐 공개 서신 형식을 빌어 씁니다.)
이자람 예술감독님께,
저는 오늘 이런 질문을 가지고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과연 창작 판소리에서 제대로 된 추임새라는 게 가능할까?사실 저의 질문은 '처음 듣는 소리에 어떻게 추임새로 반응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지만, 오늘 공연 중 <살인>에 대해서는 아티스트 토크 시간에 얘기가 나왔던 대로 (다른 의미에서) ‘없다’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여전히 판소리 듣기에 익숙하지 않은데다가 원작을 읽고 가지 않아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 만으로도 꽤 바빴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사실 이 질문을 하는 저에겐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과서적인 정답이 먼저 설정되어 있었던 것 같네요. 소리꾼과 고수 그리고 관객들이 에너지를 (소리로) 교류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판소리가 가진 매력이고 생명이지만, 이 당연한 명제도 질문에 붙여봐야 한다는 걸 오늘 깨달았습니다. 사실 저같이 추임새도 하지 못하면서 판소리의 생명을 이야기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공연을 보고 난 후, 그리고 아티스트와의 대화 시간에 오고간 이야기를 들으며, 감독님의 실험에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추임새 할 수 없는 이야기는 판소리로 만들면 안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약속하신 대로 앞으로도 ‘벨칸토 판소리’ ‘고수 없는 판소리’ 등 모던 판소리 실험을 계속 이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적지 않은 관객들이 좀더 밝은 이야기를 요청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 사람들은 비극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괜히 전통 판소리도 대부분 해피엔딩으로 마감되는 걸 보면 이건 꽤 오래된 습관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비극적 판소리가 없었다는 점만으로도 더 실험이 필요한 장르라 생각됩니다. 사실 감독님의 작품이 이미 <사천가>에서 <억척가로>, 그리고 이번에 <살인>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을 보아왔기에 감독님은 이미 그길에 한참 들어와 계신 거죠. <살인>은 말할 것도 없고, <추물> 역시 마지막에 약간의 희망을 열어 빠져나가긴 했지만 저에겐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어두운 이야기에 더 끌리는 것을요. 밝고 경쾌한 이야기는 또 다른 소리꾼들이 만들어가면 되겠지요.
<살인>을 보고나서 한 10년 전에 샤를리즈 테론이 주인공으로 나온 <몬스터>라는 영화가 생각났습니다.(비록 샤를리즈 테론이 그 영화를 위해 살을 찌워야 했던 반면, 이승희님은 얼마 전 <비빙> 공연 때와 비교해도 헤쓱해진 모습이었지만 말입니다.) 그 영화를 보고 왔더니 제 친구가 그런 영화는 왜 만드는 거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전 그때, 단지 연극을 공부한다는 이유로 제가 만들지도 않은 그 영화의 정당성을 설명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소용없더군요. 설명하고 심지어 수긍시킬 수도 있지만 보러 가게 할 수는 없더라구요. 아마 아리스토텔레스 선생이 틀렸나봅니다. 좋은 플롯은 “눈으로 보지 않고, 사건의 경과를 듣기만 하여도 그 사건에 전율과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끔 구성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듣기만 해도 전율하니 보러 가지 않게 되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요. 그저 끌리는 사람이 만들고 또 끌리는 사람이 보러 가나 봅니다.
마지막으로 <살인> 텍스트를 구하기 쉽지 않다고 해서 그냥 부정확한 상태로 먼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실 전 오늘 <살인>의 음악이 좋았다는 몇몇 분들의 말에 완전히 수긍할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음악 자체나 악사님들의 연주는 제가 감히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을 넘습니다. 훌륭했고 그 자체로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살인>의 텍스트, 특히나 텍스트의 문체와 소리가 과연 어울리는지, 어울릴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아마도 이것은 단편소설이라는 특수한 문학 장르와도 관련되어 있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물론 단편소설로 연극도 하고 영화도 만드는데, 판소리라고 안될 이유는 없겠지요. 그런데 오늘 <살인>의 문체는 제게는 상당히 건조하게 들렸습니다. (원작 소설의 텍스트가 얼마나 사용되었는지 확인이 필요합니다만, 남윤일PD님께 잠시 여쭤본 바로는 많은 부분이 다시 쓰여졌다고 들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텍스트는 이승희님이 아무런 음정을 넣지 않고 평이하게 읽어주시던 부분이 가장 듣기에 편했습니다. 특히나 짧게 끊어지는 건조한 문장들은 그 자체로 매우 절제된 하드보일드 소설의 문체 같아서 거기에 음악적인 요소가 첨가되는 게 제게는 꽤 이질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물론 텍스트는 의미를, 소리는 감정을 각각의 채널로 전달할 수도 있겠지만, 소리와 텍스트가 좀더 긴밀하게 맞붙기 위해선 양자가 서로를 좀더 닮아가야 했던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더 만들고 더 보다보면 알게 되겠지요.
2014년 2월 21일 밤에
임승태 드림
이자람 예술감독님께,
저는 오늘 이런 질문을 가지고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과연 창작 판소리에서 제대로 된 추임새라는 게 가능할까?사실 저의 질문은 '처음 듣는 소리에 어떻게 추임새로 반응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지만, 오늘 공연 중 <살인>에 대해서는 아티스트 토크 시간에 얘기가 나왔던 대로 (다른 의미에서) ‘없다’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여전히 판소리 듣기에 익숙하지 않은데다가 원작을 읽고 가지 않아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 만으로도 꽤 바빴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사실 이 질문을 하는 저에겐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과서적인 정답이 먼저 설정되어 있었던 것 같네요. 소리꾼과 고수 그리고 관객들이 에너지를 (소리로) 교류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판소리가 가진 매력이고 생명이지만, 이 당연한 명제도 질문에 붙여봐야 한다는 걸 오늘 깨달았습니다. 사실 저같이 추임새도 하지 못하면서 판소리의 생명을 이야기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공연을 보고 난 후, 그리고 아티스트와의 대화 시간에 오고간 이야기를 들으며, 감독님의 실험에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추임새 할 수 없는 이야기는 판소리로 만들면 안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약속하신 대로 앞으로도 ‘벨칸토 판소리’ ‘고수 없는 판소리’ 등 모던 판소리 실험을 계속 이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적지 않은 관객들이 좀더 밝은 이야기를 요청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 사람들은 비극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괜히 전통 판소리도 대부분 해피엔딩으로 마감되는 걸 보면 이건 꽤 오래된 습관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비극적 판소리가 없었다는 점만으로도 더 실험이 필요한 장르라 생각됩니다. 사실 감독님의 작품이 이미 <사천가>에서 <억척가로>, 그리고 이번에 <살인>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을 보아왔기에 감독님은 이미 그길에 한참 들어와 계신 거죠. <살인>은 말할 것도 없고, <추물> 역시 마지막에 약간의 희망을 열어 빠져나가긴 했지만 저에겐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어두운 이야기에 더 끌리는 것을요. 밝고 경쾌한 이야기는 또 다른 소리꾼들이 만들어가면 되겠지요.
마지막으로 <살인> 텍스트를 구하기 쉽지 않다고 해서 그냥 부정확한 상태로 먼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실 전 오늘 <살인>의 음악이 좋았다는 몇몇 분들의 말에 완전히 수긍할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음악 자체나 악사님들의 연주는 제가 감히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을 넘습니다. 훌륭했고 그 자체로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살인>의 텍스트, 특히나 텍스트의 문체와 소리가 과연 어울리는지, 어울릴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아마도 이것은 단편소설이라는 특수한 문학 장르와도 관련되어 있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물론 단편소설로 연극도 하고 영화도 만드는데, 판소리라고 안될 이유는 없겠지요. 그런데 오늘 <살인>의 문체는 제게는 상당히 건조하게 들렸습니다. (원작 소설의 텍스트가 얼마나 사용되었는지 확인이 필요합니다만, 남윤일PD님께 잠시 여쭤본 바로는 많은 부분이 다시 쓰여졌다고 들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텍스트는 이승희님이 아무런 음정을 넣지 않고 평이하게 읽어주시던 부분이 가장 듣기에 편했습니다. 특히나 짧게 끊어지는 건조한 문장들은 그 자체로 매우 절제된 하드보일드 소설의 문체 같아서 거기에 음악적인 요소가 첨가되는 게 제게는 꽤 이질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물론 텍스트는 의미를, 소리는 감정을 각각의 채널로 전달할 수도 있겠지만, 소리와 텍스트가 좀더 긴밀하게 맞붙기 위해선 양자가 서로를 좀더 닮아가야 했던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더 만들고 더 보다보면 알게 되겠지요.
2014년 2월 21일 밤에
임승태 드림
2014년 2월 12일 수요일
사라진 이야기를 찾아라! 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
by 사이
어릴 적 먹던 영양제 생각이 난다. 겉에는 달콤한 무언가가 얇게 발리고 단맛이 가시면, 또는 단맛에 혹하여 함께 넘어가도록 들어 있었던 약은 기발했다. 하루에도 몇 개씩 스스로 챙길 만큼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후에 조금 더 영악하게도 달콤한 맛이 지나고 나면 눈치를 봐서 꼭 뱉어냈던 것도 그 약이었다. 의도도 방법도 좋았지만 따지고 보면, 아쉽게도 영양제는 정작 중요한 목표는 달성하지 못한 셈이다. 제목에서부터 아린 역사의 향기가 묻어 날 것만 같았던 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를 보고 나서도 비슷하게 그랬다. 첫 맛은 재치와 발랄함이었지만 달달함은 시간이 지나 달아나버린 또 한 번의 경험. 하지만 이번엔 스스로 뱉어낸 것이 아니라 사라져 버린 게 다를 뿐이다.
극 장면의 운용과 배열도 조각보의 부분인 서로 다른 자투리 조각들 같다. ‘믿거나 말거나’로 운을 떼며 시작한 극은 시종 픽션임을 강조하면서 극 중의 시간과 공간들을 조각내어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1888년의 조선에 1901년에 초청된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가 존재하며 연회에 모셔온 요리사는 조선 중기의 장금이다. 심지어 1960년대 영국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는 내관(內官)으로 등장한다. 이렇게 어긋나고 조각난 시간이 동시에 뒤죽박죽으로 섞여 발생하는 혼란과 모순은 이 극의 재미를 만들어낸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은 극 속의 인물과 배우 자신을 넘나들며 의도적으로 극을 조각낸다. 특히 극 전체의 해설을 겸하는 내관의 역할은 가장 적극적이다. 그는 관객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무대와 관객석의 1차적인 경계를 허물어낸다. 또 무대감독처럼 다른 배역에게 등장할 시간을 알려주고, 쇼 사회자처럼 “명성황후가 부릅니다, 세자가 떠나고 부터”라며 이어지는 노래를 소개하기까지 한다. 극 내용의 안과 밖을 드나들며 장면 장면을 조각조각 자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잘려진 조각의 장면들은 하나의 색에서 옆 칸의 다른 색과 형으로 급변하는 조각보처럼 장면 점핑의 효과도 가진다. 이것은 많은 설명과 시간이 걸리는 장면에서 영상 편집 기술을 차용한 것과 유사한 방법을 활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길게 반복해야 하는 설명은 “관객이 지루할 텐데 또 해?”와 같은 물음으로 이미 들은 것이 된다. 이렇듯 극에서 보이는 장면과 장면 사이의 점핑(jumping)은 생략에 강하고 빠른 전개를 가능하게 하여 극 초반의 시선을 끌고 흥미를 유지하는 데 유리했다.
게다가 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의 조각난 각 장면들은 저마다의 색을 가지고 톡톡 튀며 기발하다는 매력을 더한다. 특히 극 내내 활용되는 언어유희는 이 극의 재치와 발랄함을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다. 요즘에 유행하는 통신 기술인 SNS를 ‘애수앵애수’로 표현하거나 영어 단어인 ‘Some’과 두꺼비를 뜻하는 한자어 ‘섬(蟾)’을 연결하는 재기에는 그저 감탄하며 웃음 지을 수밖에는 없다.
더하여, <라스트 로얄 패밀리>에는 역사의 옷을 입힌 보편적인 이야기를 깔끔하게 펼쳐내고 싶은 욕심이 가득하다. 그래서 현재 우리 주변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 배경을 백여 년 전으로 이동시켰고, 거기에 모두가 알만한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들의 가족관계를 덮었다. 그리고 현재적 웃음을 주고 공감을 살만한 장면의 조각으로 포장해 두었다. 활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지만 이 모든 욕심을 가진 조각들이 정확하게 이어져 정작 무엇을 전달하려는지 혼란하다는 데 큰 아쉬움이 자리 잡는다. 앞서 재기로 가득했던 독특한 색을 가진 장면의 조각들은 그저 흩뿌려 늘어놓아 지기만 할 뿐, 그 뿐이다. 완성된 조각보처럼 전체를 바라보고 연결되어 있지 못하다. 게다가 역사의 이야기도, 가족의 이야기도, 성장의 이야기도, 우정과 사랑의 이야기도 모두 건드리고 품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 어느 하나도 분명히 펼치고 있지는 못하다. 이렇게 모든 이야기를 해야 하니 불필요한 장면들이 파생되고 삽입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단지 오르골을 손에 쥔 채 부르는 이중창 하나로 가늠해야 하는 왕세자 척과 꼭지의 로맨스 장면은 급작스럽고 인형으로 벌이는 꼭지와 꼭도의 줄타기 장면 역시 왕세자와 함께 성장시켜야 하는 캐릭터들의 무게를 맞추기 위해 할애한 지루한 선택이 되었다. 쏟아진 장면의 조각들을 잇지 못하는 극을 보면서 그렇다면 굳이 역사 소재를 들여올 이유가 있었는가 하는 의문도 또한 생겨난다. 내용은 의도적으로 대한제국의 시대일 필요도 없고 대상이 마지막 왕가의 가족일 필요는 더더군다나 없다. 역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비춰보고 싶었다는 변명이 이어질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제목에서 풍기는 역사의 냄새를 이용해서 기대감을 갖게 하지는 말았어야 한다는 반론 역시 존재할 것이다. 이 극에서 역사와 사극을 표방한다는 이들의 제목은, 그리고 소재는 소모되고 있을 뿐이다. 박수칠만한 부분이 많음에도 돌아오는 발걸음이 아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는 반짝이는 재치를 가득 안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작품이 꽉 찬 재치만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구름처럼 흘러가는 시간에 현재의 유머는 언제든 빛 바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이 관객과 소통하고자 하는 분명한 것에 집중하는 것이 이 작품에 주어진 숙제다. ‘척’하지 않고 조각으로 부서지지 않는 이야기로 걸음을 옮기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진정 ‘라스트’ <라스트 로얄 패밀리>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어릴 적 먹던 영양제 생각이 난다. 겉에는 달콤한 무언가가 얇게 발리고 단맛이 가시면, 또는 단맛에 혹하여 함께 넘어가도록 들어 있었던 약은 기발했다. 하루에도 몇 개씩 스스로 챙길 만큼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후에 조금 더 영악하게도 달콤한 맛이 지나고 나면 눈치를 봐서 꼭 뱉어냈던 것도 그 약이었다. 의도도 방법도 좋았지만 따지고 보면, 아쉽게도 영양제는 정작 중요한 목표는 달성하지 못한 셈이다. 제목에서부터 아린 역사의 향기가 묻어 날 것만 같았던 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를 보고 나서도 비슷하게 그랬다. 첫 맛은 재치와 발랄함이었지만 달달함은 시간이 지나 달아나버린 또 한 번의 경험. 하지만 이번엔 스스로 뱉어낸 것이 아니라 사라져 버린 게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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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정보: http://goo.gl/LhqvmF |
재치와 발랄함의 첫 맛
픽션 사극 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의 재치와 발랄한 달콤함은 무대와 극의 장면 곳곳에서 즐길 수 있다. 작은 극장을 들어서서 처음 마주한 것은 무대뿐만 아니라 객석의 일부까지 톡톡한 역사의 향기로 채워주고 있는 조각보의 형상이다. 조각보의 매력은 각각 다른 형태와 색을 가진 자투리 천들이 잇대어져 전체를 만들어내는 품(榀)에 있다. 역사를 소재로 끌어들였다는 극은 전반적인 모티프로 이러한 조각보의 이미지를 십분 활용한다. 인물들이 드나드는 문으로, 옷장으로, 의자로, 서가로도 변신하는 무대 도구들은 모두 다른 크기의 입체 조각(爪角)이다. 이것들의 방향을 바꾸고 위치를 옮기면서 새로이 다른 조각보의 모양을 입체적으로 무대에 만들어 둔다. 여기에 각 도구의 표면 역시 비단조각과 한지조각을 이어 붙여 모티프에 있어 일관성을 더한다.| 사진출처: http://page1207.tistory.com/archive/20140127 |
극 장면의 운용과 배열도 조각보의 부분인 서로 다른 자투리 조각들 같다. ‘믿거나 말거나’로 운을 떼며 시작한 극은 시종 픽션임을 강조하면서 극 중의 시간과 공간들을 조각내어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1888년의 조선에 1901년에 초청된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가 존재하며 연회에 모셔온 요리사는 조선 중기의 장금이다. 심지어 1960년대 영국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는 내관(內官)으로 등장한다. 이렇게 어긋나고 조각난 시간이 동시에 뒤죽박죽으로 섞여 발생하는 혼란과 모순은 이 극의 재미를 만들어낸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은 극 속의 인물과 배우 자신을 넘나들며 의도적으로 극을 조각낸다. 특히 극 전체의 해설을 겸하는 내관의 역할은 가장 적극적이다. 그는 관객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무대와 관객석의 1차적인 경계를 허물어낸다. 또 무대감독처럼 다른 배역에게 등장할 시간을 알려주고, 쇼 사회자처럼 “명성황후가 부릅니다, 세자가 떠나고 부터”라며 이어지는 노래를 소개하기까지 한다. 극 내용의 안과 밖을 드나들며 장면 장면을 조각조각 자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잘려진 조각의 장면들은 하나의 색에서 옆 칸의 다른 색과 형으로 급변하는 조각보처럼 장면 점핑의 효과도 가진다. 이것은 많은 설명과 시간이 걸리는 장면에서 영상 편집 기술을 차용한 것과 유사한 방법을 활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길게 반복해야 하는 설명은 “관객이 지루할 텐데 또 해?”와 같은 물음으로 이미 들은 것이 된다. 이렇듯 극에서 보이는 장면과 장면 사이의 점핑(jumping)은 생략에 강하고 빠른 전개를 가능하게 하여 극 초반의 시선을 끌고 흥미를 유지하는 데 유리했다.
게다가 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의 조각난 각 장면들은 저마다의 색을 가지고 톡톡 튀며 기발하다는 매력을 더한다. 특히 극 내내 활용되는 언어유희는 이 극의 재치와 발랄함을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다. 요즘에 유행하는 통신 기술인 SNS를 ‘애수앵애수’로 표현하거나 영어 단어인 ‘Some’과 두꺼비를 뜻하는 한자어 ‘섬(蟾)’을 연결하는 재기에는 그저 감탄하며 웃음 지을 수밖에는 없다.
단맛과 함께 사라지다
하지만 이러한 찰나의 감탄은 극 전체에 대한 경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재기발랄함을 이끌었던 언어유희는 가볍고 일회적이라는 치명적인 단점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극에서 그러모은 언어유희의 대상들은 요즘의 우리가 즐기는, 소위 현(現)시대에 ‘유행’하는 것이다. 유행은 한정된 시간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극의 포인트인 언어유희는 순간의 웃음으로 피었다 사그러지는 위험에 필연적으로 노출되어있다. 또한, 지속적으로 같은 표현방법이 반복되면 이러한 언어유희는 생각보다 빨리 간파당하여 읽힌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무장된 극의 전개가 어떻게 흘러갈 것이다 정도는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가능하다. 중반을 지나면서 극에서 덜어진 웃음은 이런 탓이기도 하다.더하여, <라스트 로얄 패밀리>에는 역사의 옷을 입힌 보편적인 이야기를 깔끔하게 펼쳐내고 싶은 욕심이 가득하다. 그래서 현재 우리 주변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 배경을 백여 년 전으로 이동시켰고, 거기에 모두가 알만한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들의 가족관계를 덮었다. 그리고 현재적 웃음을 주고 공감을 살만한 장면의 조각으로 포장해 두었다. 활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지만 이 모든 욕심을 가진 조각들이 정확하게 이어져 정작 무엇을 전달하려는지 혼란하다는 데 큰 아쉬움이 자리 잡는다. 앞서 재기로 가득했던 독특한 색을 가진 장면의 조각들은 그저 흩뿌려 늘어놓아 지기만 할 뿐, 그 뿐이다. 완성된 조각보처럼 전체를 바라보고 연결되어 있지 못하다. 게다가 역사의 이야기도, 가족의 이야기도, 성장의 이야기도, 우정과 사랑의 이야기도 모두 건드리고 품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 어느 하나도 분명히 펼치고 있지는 못하다. 이렇게 모든 이야기를 해야 하니 불필요한 장면들이 파생되고 삽입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단지 오르골을 손에 쥔 채 부르는 이중창 하나로 가늠해야 하는 왕세자 척과 꼭지의 로맨스 장면은 급작스럽고 인형으로 벌이는 꼭지와 꼭도의 줄타기 장면 역시 왕세자와 함께 성장시켜야 하는 캐릭터들의 무게를 맞추기 위해 할애한 지루한 선택이 되었다. 쏟아진 장면의 조각들을 잇지 못하는 극을 보면서 그렇다면 굳이 역사 소재를 들여올 이유가 있었는가 하는 의문도 또한 생겨난다. 내용은 의도적으로 대한제국의 시대일 필요도 없고 대상이 마지막 왕가의 가족일 필요는 더더군다나 없다. 역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비춰보고 싶었다는 변명이 이어질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제목에서 풍기는 역사의 냄새를 이용해서 기대감을 갖게 하지는 말았어야 한다는 반론 역시 존재할 것이다. 이 극에서 역사와 사극을 표방한다는 이들의 제목은, 그리고 소재는 소모되고 있을 뿐이다. 박수칠만한 부분이 많음에도 돌아오는 발걸음이 아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몸에 좋은 영양제가 되려면
이렇게 흩어진 이야기와 장면의 조각들을 의미 있게 봉합하는 노력은 이제 오롯이 배우들의 손에 맡겨진다. 작품의 완성도가 배우의 조각을 살리는 역량이나 개인기(?) 또는 팬덤에 의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배우에 따라 희비가 교차하는 극이라면 관객의 입장에서도 창작자의 입장에서도 좋을 것이 없다. 관객은 극을 완전히 즐길 수 없고 창작자는 흔들리는 작품의 질에 고뇌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고종역의 배우 지혜근은 제몫을 다한다. 극을 보는 눈이 둔감해서 일지는 모르나 극의 종반까지 그가 1인 2역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지척의 거리에서 빤히 보일 법한 역할의 변화를 잠시 나마 숨겨준 배우의 능력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그 배우가 매 공연에서 스스로의 역량을 다해 주는 것은 이 극으로서 정말 다행이다.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는 반짝이는 재치를 가득 안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작품이 꽉 찬 재치만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구름처럼 흘러가는 시간에 현재의 유머는 언제든 빛 바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이 관객과 소통하고자 하는 분명한 것에 집중하는 것이 이 작품에 주어진 숙제다. ‘척’하지 않고 조각으로 부서지지 않는 이야기로 걸음을 옮기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진정 ‘라스트’ <라스트 로얄 패밀리>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2014년 1월 24일 금요일
개리의 <조금 이따 샤워해> MV가 안타까운 이유
by 시뫄
얼마 전 리쌍의 래퍼이자 작사가인 개리의 첫 솔로 앨범이 나왔다. 어려웠던 시절을 “벚꽃처럼 잠시 피고 졌다”고 추억하고 (‘회상'), 연인에게 “너에게 난 사랑이자 때로는 아픈 가시”라고 고백하던 (‘너에게 배운다’) 리쌍의 노래를 떠올리며, 나는 다른 힙합 음악보다 그의 가사와 랩 방식에 특별히 더 서정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했고, 방송을 통해 본 개리의 이미지는 친근한 외모, 세련된 유머감각과 적절한 겸손함, 즉 이 시대 ‘훈남’의 미덕을 모두 가진 남자의 그것이었다. 개리의 음악와 뮤직비디오를 전혀 듣거나 보지 못한 상태에서, 곽정은 기자(https://twitter.com/ohitwaslove)가 앨범의 타이틀곡인 '조금 이따 샤워해'의 뮤직비디오에 대해 “미학적으로 옳지 않다”고 평한 코멘트가 소위 ‘디스’라고 여겨지며 꽤나 큰 파장을 일으켰다는 뉴스를 먼저 접했다. 곽정은 기자는 코스모폴리탄의 피쳐디렉터, 섹스 칼럼니스트이자 현재 가장 핫한 연애, 성 관련 토크쇼인 <마녀사냥>(JTBC)에 고정 패널로 출연 중이며, 젊은 여성들의 성 관련 전문가로도 불릴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미학’을 운운하며 개리의 뮤직비디오를 비판했다면, 분명 여성의 입장에서 불편하다는 것을 예술의 문제로 돌려서 말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개리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거부감을 느꼈을 여성이 곽정은 뿐만은 아니겠지만, 그렇다면 모든 남성들이 이 뮤비를 반겼을까? 이게 단지 이 뮤직비디오의 선정성 때문일까? 리쌍의 이전 뮤비 역시 19금 판정을 받은 바 있는데다가(‘TV를 껐네’), 그렇다면 UV의 '설마 아닐거야' 뮤직비디오(http://www.youtube.com/watch?v=1xKy_6QUibQ)의 선정성은 어떤가. 가사마저 대놓고 성적인 UV의 그 뮤직비디오가 비록 방송사에서는 부적합 판정을 받았을지언정 대중에게는 큰 거부감 없이 (혹은 상당한 호응과 함께) 수용되었다는 사실에는 단지 성적인 것을 웃음으로 승화시킨 해학성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통 ‘키치’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캠프’인 예술 양식 - 수잔 손택에 따르면 키치가 순진한 캠프, 즉 그것이 세련되지 않다는 사실에 무지한 상태라면, 의도적 캠프는 키치의 전복적인 형식으로서 키치한 것에 대한 개념들을 의도적으로 활용하는 미학이다 - 으로 '설마 아닐거야'의 뮤직비디오가 이해될 여지가 있다면, '조금 이따 샤워해'의 뮤직비디오는 심지어 ‘세련되지 못한’ 것마저 오히려 그 반대로 꽤나 고차원적인 예술로 볼 수 있게 해주는 키치의 기준으로도 가늠할 수 없는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다.
하지만 '조금 이따 샤워해' 뮤직비디오가 범한 가장 큰 오류는 Benny Benassi의 'Satisfaction' 뮤직비디오(http://youtu.be/V5bYDhZBFLA)를 패러디하거나 그것에 대한 오마주로서 연출한 것도 아니라 그저 일부 베낀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원작을 비틀고 조롱함으로써 희화화하는 것인 패러디나 원작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방식인 오마주, 그 어느 쪽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남의 답을 베끼는 학생들이 종종 그러듯이, 개리의 뮤직비디오는 'Satisfaction' 뮤직비디오가 가진 매력의 핵심을 놓치고 말았다. 두 작품 모두에서 몸을 노출한 섹시한 여성들이 연장을 사용하는 모습, 혹은 노동하는 여성의 신체가 클로즈업 되고 반복적으로 비춰지는 등 감각적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Satisfaction'에서의 여성들은 자신들의 몸을 스스로 소유하고 소비하는 주체들로 보인다면, '조금 이따 샤워해'에서의 여성들은 소비되고 대상화되는 성으로서의 몸, 즉 철저히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몸만을 가진다. 전자에서 아주 강하게 제시했던 여성성을 후자에서는 그 반대로 밑바닥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더군다나 전자에서는 여자 모델들의 아무리 수위 높은 노출이라도 그 시각적 자극이 Benny Benassi의 리듬과 어우러져 공감각적인 경험으로 이어지지만, 후자의 비주얼은 개리의 노래와 어울리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음악 감상을 방해하는 요소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뮤직비디오를 본 후 개리의 노래를 ‘듣기 위해’ 다시 음원을 재생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이 뮤직비디오가 그것의 목적 혹은 기능에 합당한가에 대한 의구심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의구심은 개리의 뮤직비디오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뮤직비디오가 음악에 대한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예술형식으로 시작해서 1980년대 MTV의 설립 이후 점차 독립적인 예술장르로 발전해왔다면, 현대의 뮤직비디오는 큰 부분에 있어서 상업적인 목적, 즉 마케팅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라디오보다는 비디오의 시대인 지금, 뮤직비디오는 대중이 음악을 더 풍부하게 감상하고 아티스트의 음악외적인 감각이나 표현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형식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개리의 이 뮤직비디오는 그저 자극적이며 사람들과 언론의 이목을 끌기 위한 노이즈마케팅 수단으로 보일 지경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미 음악으로도 인정받았고 예능방송으로도 대중적 인지도가 충분한 개리가 그런 선택을 해야만 했다면,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현상태가 안타깝고, 만약 정말 이 뮤직비디오가 순수하게 개리의 예술적 창의성의 결과라면, 그건 또 그것대로 참 안타까운 일이겠다.
[두산아트랩3] 비빙의 젊은 연주자들이 바라본 굿
비빙의 젊은 연주자들
"굿을 바라보는 3인의 시선"
1월 23일 두산아트랩 쇼케이스
by 에스티
공연 시작 전부터 덧마루 여섯 널을 붙여 만든 무대 위에는 장구, 징, 해금등의 악기들이 악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마이크와 스피커 및 음향 장비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전통’ 악기와 ‘첨단’ 전자 장비가 함께 놓여져 있는 모습에서부터 과거와 현재는 만나고 있었고, 이 모습은 ‘젊은’ 연주자들이 굿을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제목의 이 공연에 대한 하나의 은유적 오브제로 기능하고 있다.
‘이 정도 규모의 극장에서 왜 마이크가 필요할까’라는 의문은 마지막 연주에서 풀렸다. (사실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소리가 그다지 편하지는 않았다.) 신원영은 자신이 주도한 푸너리에서 사용한 기법이 ‘샘플링’이라고 소개했는데, 장구나 징에서 나온 소리를 기계를 이용해 곧바로 녹음한 다음 이 소리를 재생하면서 다른 악기를 연주하고, 이런 식으로 여러 악기 소리를 중첩시켜 크고 복잡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신통방통한 대목이었다. 클럽에서 디제이들이 해야할 것 같은 이 일을 장구로 동해안별신굿의 그 복잡한 장단을 치면서 해내는 그의 재주가 그저 놀라웠다.
공연이 끝나고 되짚어 보니 샘플링이란 기법이 이 공연 전체에서 두루 사용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첫부분에서는 진도 씻김굿과 함께 무속인들의 소회가 담긴 육성 나레이션으로, 두번째 올림채 장단에서는 다른 종교 지도자들의 설교 혹은 설법을 가려 뽑는 방식으로 병치는 이어진다. 더 나아가 여러 지역의 무속 장단에서 몇가지를 뽑아 청신-오신-송신이라는 굿의 기본 구조로 이어붙인 공연 전체의 형식 또한 일종의 샘플링, 혹은 샘플러라 부를 수 있다.
이 세 젊은 연주자들이 굿을 대하는 태도는 대단히 학구적이었다. 작가와의 대화 시간에 그들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번 공연은 굿에 대한 ‘스터디’의 결과물이다. (그들이 오랫동안 배우고 익힌 굿 음악을 차치 하고라도) 무녀의 삶에 대한 인류학적 관심과 무속에 대한 비교종교학적 관점, 그리고 한국 사회에 만연한 무속에 대한 편견을 고발하는 사회비판적 태도가 나타나는 것만 보아도 짧은 시간 동안 상당히 열심히 공부했는지 알수 있다. 어쩌면 굿(음악)은 머리로 공부해서 아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 속에서 경험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체득해야 마땅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굿이라는 종교 혹은 문화는 공연자도 관객도 공부하지 않고서는 접근할 수 없는 낯선 대상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이 극장에서 실험될 필요도 없었다는 점을 인정하자.
마지막으로 대화 시간에 했던 이야기를 조금만 더 덧붙이고 싶다. 연주자의 문제의식에 매우 공감하고 이것이 우리 나라와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은 굉장히 의미 깊은 일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연주자 자신이 인정한 것처럼 이 문제를 풀어내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민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오늘 공연에서 부각된 그 특정 종교인이야 말로 무속과 기독교를 접목시킨 대표적인 인물이라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공연이 유력한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냉소나 기성 종교의 메시지를 압축하여 병치하는 것은 별로 효과적인 접근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마음이 종교간에 유사한 가르침이 있는 걸 몰라서 생기는 건 아니다. 또한 무속에 대한 편견과 반감이 서구화 근대화 과정에서 증폭된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이 반무속적 편견은 무속이 주류 민간 신앙이던 시절에 편만했던 여러가지 내적 모순과 문제점들로부터 생성되었다는 점 또한 기억해야 한다.
세습무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 굿 음악을 학습한, 심지어 스스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근대적 예술가들이 굿 음악을 옹호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일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또 다른 실험으로 접근 경로를 다르게, 어쩌면 좀더 범위를 좁히는 건 어떨까? 무속이 여타 기성 종교들과 동등한 진리를 설파한다고 주장하면 그것을 입증해야 할 책임이 연주자들에게 주어진다. 대신 굿 음악이 다른 종교의 음악만큼이나 뛰어나고 몇몇 종교의 음악보다는 더 월등한 미학과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연주자들의 기량으로 볼 때 무대에서 충분히 입증가능할 것이다. 굿을 바라보는 단계를 넘어 굿(음악)의 미적 탁월함을 관객에게 더 전달할 수 있다면 연주자들이 바라는 인식의 변화도 낙관할 수 있지 않을까?
"굿을 바라보는 3인의 시선"
1월 23일 두산아트랩 쇼케이스
by 에스티
공연 시작 전부터 덧마루 여섯 널을 붙여 만든 무대 위에는 장구, 징, 해금등의 악기들이 악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마이크와 스피커 및 음향 장비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전통’ 악기와 ‘첨단’ 전자 장비가 함께 놓여져 있는 모습에서부터 과거와 현재는 만나고 있었고, 이 모습은 ‘젊은’ 연주자들이 굿을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제목의 이 공연에 대한 하나의 은유적 오브제로 기능하고 있다.
‘이 정도 규모의 극장에서 왜 마이크가 필요할까’라는 의문은 마지막 연주에서 풀렸다. (사실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소리가 그다지 편하지는 않았다.) 신원영은 자신이 주도한 푸너리에서 사용한 기법이 ‘샘플링’이라고 소개했는데, 장구나 징에서 나온 소리를 기계를 이용해 곧바로 녹음한 다음 이 소리를 재생하면서 다른 악기를 연주하고, 이런 식으로 여러 악기 소리를 중첩시켜 크고 복잡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신통방통한 대목이었다. 클럽에서 디제이들이 해야할 것 같은 이 일을 장구로 동해안별신굿의 그 복잡한 장단을 치면서 해내는 그의 재주가 그저 놀라웠다.
공연이 끝나고 되짚어 보니 샘플링이란 기법이 이 공연 전체에서 두루 사용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첫부분에서는 진도 씻김굿과 함께 무속인들의 소회가 담긴 육성 나레이션으로, 두번째 올림채 장단에서는 다른 종교 지도자들의 설교 혹은 설법을 가려 뽑는 방식으로 병치는 이어진다. 더 나아가 여러 지역의 무속 장단에서 몇가지를 뽑아 청신-오신-송신이라는 굿의 기본 구조로 이어붙인 공연 전체의 형식 또한 일종의 샘플링, 혹은 샘플러라 부를 수 있다.
이 세 젊은 연주자들이 굿을 대하는 태도는 대단히 학구적이었다. 작가와의 대화 시간에 그들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번 공연은 굿에 대한 ‘스터디’의 결과물이다. (그들이 오랫동안 배우고 익힌 굿 음악을 차치 하고라도) 무녀의 삶에 대한 인류학적 관심과 무속에 대한 비교종교학적 관점, 그리고 한국 사회에 만연한 무속에 대한 편견을 고발하는 사회비판적 태도가 나타나는 것만 보아도 짧은 시간 동안 상당히 열심히 공부했는지 알수 있다. 어쩌면 굿(음악)은 머리로 공부해서 아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 속에서 경험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체득해야 마땅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굿이라는 종교 혹은 문화는 공연자도 관객도 공부하지 않고서는 접근할 수 없는 낯선 대상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이 극장에서 실험될 필요도 없었다는 점을 인정하자.
마지막으로 대화 시간에 했던 이야기를 조금만 더 덧붙이고 싶다. 연주자의 문제의식에 매우 공감하고 이것이 우리 나라와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은 굉장히 의미 깊은 일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연주자 자신이 인정한 것처럼 이 문제를 풀어내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민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오늘 공연에서 부각된 그 특정 종교인이야 말로 무속과 기독교를 접목시킨 대표적인 인물이라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공연이 유력한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냉소나 기성 종교의 메시지를 압축하여 병치하는 것은 별로 효과적인 접근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마음이 종교간에 유사한 가르침이 있는 걸 몰라서 생기는 건 아니다. 또한 무속에 대한 편견과 반감이 서구화 근대화 과정에서 증폭된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이 반무속적 편견은 무속이 주류 민간 신앙이던 시절에 편만했던 여러가지 내적 모순과 문제점들로부터 생성되었다는 점 또한 기억해야 한다.
세습무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 굿 음악을 학습한, 심지어 스스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근대적 예술가들이 굿 음악을 옹호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일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또 다른 실험으로 접근 경로를 다르게, 어쩌면 좀더 범위를 좁히는 건 어떨까? 무속이 여타 기성 종교들과 동등한 진리를 설파한다고 주장하면 그것을 입증해야 할 책임이 연주자들에게 주어진다. 대신 굿 음악이 다른 종교의 음악만큼이나 뛰어나고 몇몇 종교의 음악보다는 더 월등한 미학과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연주자들의 기량으로 볼 때 무대에서 충분히 입증가능할 것이다. 굿을 바라보는 단계를 넘어 굿(음악)의 미적 탁월함을 관객에게 더 전달할 수 있다면 연주자들이 바라는 인식의 변화도 낙관할 수 있지 않을까?
2014년 1월 18일 토요일
1482년, 파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이 글은 2013년 <노트르담 드 파리> 재공연에 맞춰 쓰여진 글입니다.
1482년, 파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There’s Something about Paris in 1482)
: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by 이우정
2013년 올해, 서울에서 여러 번의 파리Paris를 만났다. 핏빛 혁명으로 안타까운 삶이 드러나는 도시 파리를, 대도(大盜)가 누비는 물에 젖은 도시 파리를, 듀티율이 벽을 넘어 드나드는 도시 파리를, 유령의 사랑이 남아있는 도시 파리를. 수많은 이야기들을 품은 이 도시는 무대 위에서 노래와 사랑으로 다듬어져 날마다 아름다워져 간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한 번의 ‘아름다운 도시 파리’를 노트르담 성당에서 만난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는 1998년 파리의 팔레 데 콩그레에서 초연된 프랑스 뮤지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5년에 프랑스 배우들의 내한공연을 시작으로, 2007년에는 우리 배우들로 무대화 되었다. 그러니 거의 20년 전에 태어난 이 작품은 대략 10년 넘게 회자되고 사랑받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다시 2013년에 돌아와 해를 바꾸어 내년에도 이어갈 예정이다. 뮤지컬을 보고 즐김에 있어서 저런 숫자며 국적을 묻고 따짐이 무슨 상관인가. 곱지 않은 물음이 되돌아 올 수 있다. 하지만, 분초의 단위로 유행과 기호가 휩쓸어 들고나는 현재에도, 시간 앞에 퇴색되어 스러지지 않고 고스란히 감동을 전하는 작품인 <노트르담 드 파리>에게는 이러한 숫자며, 말들이 결코 의미 없지 않다. 그렇다면 도대체 <노트르담 드 파리>의 지속적인 힘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더해 고민할 때 이러한 작업은 더 이유 있는 국적묻기와 나이세기가 된다.
1482년, 파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There’s Something about Paris in 1482)
: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by 이우정
2013년 올해, 서울에서 여러 번의 파리Paris를 만났다. 핏빛 혁명으로 안타까운 삶이 드러나는 도시 파리를, 대도(大盜)가 누비는 물에 젖은 도시 파리를, 듀티율이 벽을 넘어 드나드는 도시 파리를, 유령의 사랑이 남아있는 도시 파리를. 수많은 이야기들을 품은 이 도시는 무대 위에서 노래와 사랑으로 다듬어져 날마다 아름다워져 간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한 번의 ‘아름다운 도시 파리’를 노트르담 성당에서 만난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는 1998년 파리의 팔레 데 콩그레에서 초연된 프랑스 뮤지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5년에 프랑스 배우들의 내한공연을 시작으로, 2007년에는 우리 배우들로 무대화 되었다. 그러니 거의 20년 전에 태어난 이 작품은 대략 10년 넘게 회자되고 사랑받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다시 2013년에 돌아와 해를 바꾸어 내년에도 이어갈 예정이다. 뮤지컬을 보고 즐김에 있어서 저런 숫자며 국적을 묻고 따짐이 무슨 상관인가. 곱지 않은 물음이 되돌아 올 수 있다. 하지만, 분초의 단위로 유행과 기호가 휩쓸어 들고나는 현재에도, 시간 앞에 퇴색되어 스러지지 않고 고스란히 감동을 전하는 작품인 <노트르담 드 파리>에게는 이러한 숫자며, 말들이 결코 의미 없지 않다. 그렇다면 도대체 <노트르담 드 파리>의 지속적인 힘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더해 고민할 때 이러한 작업은 더 이유 있는 국적묻기와 나이세기가 된다.
2014년 1월 14일 화요일
‘사랑하기 때문에……’
뮤지컬 <베르테르>
by 이우정
그로부터의 편지가 닫혔다.* 이내 마음을 흐르는 또 하나의 음악이 떠올랐다.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는 한 줄의 유행가가 마음과 마음을 더 잘 전달하기도, 공감의 농도를 짙게 하기도 한다.
by 이우정
그로부터의 편지가 닫혔다.* 이내 마음을 흐르는 또 하나의 음악이 떠올랐다.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는 한 줄의 유행가가 마음과 마음을 더 잘 전달하기도, 공감의 농도를 짙게 하기도 한다.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은 혼자만의 오해였던가요.그녀의 해맑은 미소면 되었다. 그는 그렇게 바보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불어오던 미소가 그에게는 힘겨웠다. 결국 그는 삶과 사랑의 무게를 내려놓는다. 슬픈 청년 베르테르의 이야기다. 독일의 대문호(大文豪)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무대화 한 뮤지컬 <베르테르>가 작년에 이어 다시 돌아왔다. 첫 사랑처럼 잊지 못하고, 오래 두고 보아야 할 작품이 다시 공연되는 것이 무척 반가웠다. 더해서 일 년의 지난 시간 동안 새롭게 해끔한 모습으로 단장하여 돌아와 준 것에 고맙기까지 하다. 다시 돌아온 그대, <베르테르>,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다.
해맑은 미소로 나를 바보로 만들었소.
2013년 12월 20일 금요일
모두가 외로운 사람들, <혜경궁 홍씨>
by 서유미
<혜경궁 홍씨>
장소 / 백성희장민호극장
연출.작 / 이윤택
극단 / 국립극단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그 아들 정조의 이야기는 꽤 많은 텔레비전 드라마의 소재로 사용되어 왔다. <대왕의 길>에서는 임호가 뒤주 속에 갇혀 죽기까지의 사도세자를 연기했으며, 이서진이 분한 정조가 주인공인 <이산>에서는 사도세자 역으로 이창훈이 특별 출연하여 회상 장면에서만 잠깐씩 등장한다. <무사 백동수>에서는 오만석이 효종의 북벌지계를 계승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사도세자를 연기한다. (출처: 지식백과) 아마도 광기에 둘러싸인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했던 아버지의 이야기가 꽤나 자극적인 소재였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두 눈으로 똑똑히 제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왕의 남모를 슬픔이 대중의 연민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리라.
사실 역사극은 이미 정해진 결말로 꾸며나가는 이야기이며, 반전의 요소가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최근 나의 관극 리스트에서 자주 제외되곤 했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 포스터를 가득 채우는 김소희 배우의 얼굴, 포스터 지면을 뚫고 나오는 그녀의 눈빛이 무언가를 말하려 했고, 그 말을 듣고 싶었다. 역사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던 남성의 눈이 아니라, 그들을 지켜보고 그들과 함께 할 수 밖에 없던 운명을 지닌 한 여인의 눈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극장을 찾았다.
<혜경궁 홍씨>
장소 / 백성희장민호극장
연출.작 / 이윤택
극단 / 국립극단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그 아들 정조의 이야기는 꽤 많은 텔레비전 드라마의 소재로 사용되어 왔다. <대왕의 길>에서는 임호가 뒤주 속에 갇혀 죽기까지의 사도세자를 연기했으며, 이서진이 분한 정조가 주인공인 <이산>에서는 사도세자 역으로 이창훈이 특별 출연하여 회상 장면에서만 잠깐씩 등장한다. <무사 백동수>에서는 오만석이 효종의 북벌지계를 계승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사도세자를 연기한다. (출처: 지식백과) 아마도 광기에 둘러싸인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했던 아버지의 이야기가 꽤나 자극적인 소재였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두 눈으로 똑똑히 제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왕의 남모를 슬픔이 대중의 연민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리라.
사실 역사극은 이미 정해진 결말로 꾸며나가는 이야기이며, 반전의 요소가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최근 나의 관극 리스트에서 자주 제외되곤 했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 포스터를 가득 채우는 김소희 배우의 얼굴, 포스터 지면을 뚫고 나오는 그녀의 눈빛이 무언가를 말하려 했고, 그 말을 듣고 싶었다. 역사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던 남성의 눈이 아니라, 그들을 지켜보고 그들과 함께 할 수 밖에 없던 운명을 지닌 한 여인의 눈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극장을 찾았다.
2013년 12월 19일 목요일
[특별 기획] 《손님》 합평
기획 및 정리: 산책
드라마인 필진들이 함께 <손님>을 보았습니다. 심하경이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함께 공부하고, 질문하고 때로는 서로의 의견에 반박하고 함께 투덜거리며 같이 감동하기도 합니다. 공연예술을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공연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지 같이 고민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과정일 것입니다. 우리의 글을 읽고 때로는 동의하고, 때로는 동의하지 못했을 독자들에게는 이 글이 또 다른 즐거움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드라마인은 이미 <손님>에 대한 에스티의 리뷰를 게재한 바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지난 리뷰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각자가 주목한 방식으로, <손님>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드라마인 필진들이 함께 <손님>을 보았습니다. 심하경이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함께 공부하고, 질문하고 때로는 서로의 의견에 반박하고 함께 투덜거리며 같이 감동하기도 합니다. 공연예술을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공연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지 같이 고민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과정일 것입니다. 우리의 글을 읽고 때로는 동의하고, 때로는 동의하지 못했을 독자들에게는 이 글이 또 다른 즐거움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드라마인은 이미 <손님>에 대한 에스티의 리뷰를 게재한 바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지난 리뷰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각자가 주목한 방식으로, <손님>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2013년 11월 16일 토요일
지독한 밀리터리 가스펠 뮤지컬: <해피 투게더>
by 에스티
이전에도 같은 제목을 사용한 영화와 드라마가 있었지만, 난 그 둘 다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내 주변에는 아직도 장국영을 기억하고 그리워 하는 여자들이 많지만, 나란 남자는 그에게 한번도 마음을 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병헌과 전지현이 남매로 나왔던 연속극의 제목 또한 그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 또한 이병헌이 2군 야구선수로 나왔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전 해에 방송된 <미스터Q>의 경우 본방사수를 할 수 없어 비디오로 녹화까지 해서 봤었지만, 서울에 상경한 이듬해 나는 그만 TV드라마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혹시 더 있을까 싶어 위키백과를 검색해보니 예전에 노래하다가 틀리면 머리 위에 쟁반이 떨어지던 그것 역시 같은 이름을 사용한 예능 프로의 한 꼭지라고 한다. 다함께 행복을 누리는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함께 있어서 행복하고 나의 행복을 함께 나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원대한 포부가 없더라도 이정도는 누구나 꿈꾸는 소망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고, 이 이름이 여러가지 형태의 예술 작품의 제목으로 반복되는 것은 우리 주변에 이 소망이 결핍되어 있음을 반증해준다. 11월 15일 개막한 동명의 연극은 이 제목을 가장 반어적으로 사용한 경우에 해당한다.
![]() |
| 이수인 작, 연출 <해피 투게더> 2013.11.15-12.15 아트센터K 동그라미극장 |
이전에도 같은 제목을 사용한 영화와 드라마가 있었지만, 난 그 둘 다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내 주변에는 아직도 장국영을 기억하고 그리워 하는 여자들이 많지만, 나란 남자는 그에게 한번도 마음을 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병헌과 전지현이 남매로 나왔던 연속극의 제목 또한 그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 또한 이병헌이 2군 야구선수로 나왔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전 해에 방송된 <미스터Q>의 경우 본방사수를 할 수 없어 비디오로 녹화까지 해서 봤었지만, 서울에 상경한 이듬해 나는 그만 TV드라마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혹시 더 있을까 싶어 위키백과를 검색해보니 예전에 노래하다가 틀리면 머리 위에 쟁반이 떨어지던 그것 역시 같은 이름을 사용한 예능 프로의 한 꼭지라고 한다. 다함께 행복을 누리는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함께 있어서 행복하고 나의 행복을 함께 나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원대한 포부가 없더라도 이정도는 누구나 꿈꾸는 소망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고, 이 이름이 여러가지 형태의 예술 작품의 제목으로 반복되는 것은 우리 주변에 이 소망이 결핍되어 있음을 반증해준다. 11월 15일 개막한 동명의 연극은 이 제목을 가장 반어적으로 사용한 경우에 해당한다.
2013년 11월 6일 수요일
우리가 노래하는 당신의 비극을 목격하라 : 음악극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
by 이우정
입장하는 관객은 무대로 오른다. 공연시간이 다 되어 채워져 있어야 할 관객석에는 희미한 조명만이 흐른다. 한 가운데 놓인 원형(圓形)을 둘러 내리꽂는 시선으로 차곡히 앉으면 아무 것도, 아무도 아닌 것처럼 무리가 줄지어 등장한다. 그리고 빛으로 끊어내던 시간의 경계 따위는 없이 코러스의 입으로부터 바람소리가 찾아든다. 언제나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과 배우, 모두에게 ‘무대 위 같은 공간, 우리 모두 함께’의 낯선 경험을 주는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의 새롭고 신기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리스 비극의 대표작이며 심리학적 용어로도 빈번하게 회자되는 오이디푸스의 이름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 적어도 요 몇 년간의 공연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름 있는 연출가에 의해서 과감한 시도로 제작되었던 적도, 희랍극 페스티벌로도, 기본으로 돌아가는 극적인 요소로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오이디푸스인가.’라는 물음에 서재형 연출의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는 다시 한 번의 관람 횟수를 늘리는 것 이상의 의미를 준다. 그의 시도는 ‘오래되었지만 새로운’ 형식에 있기 때문이다.
입장하는 관객은 무대로 오른다. 공연시간이 다 되어 채워져 있어야 할 관객석에는 희미한 조명만이 흐른다. 한 가운데 놓인 원형(圓形)을 둘러 내리꽂는 시선으로 차곡히 앉으면 아무 것도, 아무도 아닌 것처럼 무리가 줄지어 등장한다. 그리고 빛으로 끊어내던 시간의 경계 따위는 없이 코러스의 입으로부터 바람소리가 찾아든다. 언제나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과 배우, 모두에게 ‘무대 위 같은 공간, 우리 모두 함께’의 낯선 경험을 주는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의 새롭고 신기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리스 비극의 대표작이며 심리학적 용어로도 빈번하게 회자되는 오이디푸스의 이름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 적어도 요 몇 년간의 공연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름 있는 연출가에 의해서 과감한 시도로 제작되었던 적도, 희랍극 페스티벌로도, 기본으로 돌아가는 극적인 요소로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오이디푸스인가.’라는 물음에 서재형 연출의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는 다시 한 번의 관람 횟수를 늘리는 것 이상의 의미를 준다. 그의 시도는 ‘오래되었지만 새로운’ 형식에 있기 때문이다.
2013년 10월 16일 수요일
그래도 키마이라는 불을 뿜는다: 言語, 소리, music의 창극 <서편제>
by 이진주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가 영화와 뮤지컬을 거쳐, 이번에는 국립창극단의 품에서 창극으로 재탄생했다. 공연 시작 전, 국립창극단의 김성녀 단장은 최초의 창극이 공연된 지 110여년이 흘렀으며 파격과 실험을 통해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렇다. 창극은 백여 년 전 그 탄생 시점부터 현재까지도 실험 중이다.
사자의 머리에 염소의 몸, 그리고 뱀의 꼬리, 서로 다른 형상을 한 존재들의 결합인 키마이라(Chimaira). 창극 <서편제>는 유서 깊은 판소리의 눈대목들로 이루어진 소리와 극작가 김명화가 써낸 탄탄한 대본, 그리고 전체 줄거리의 배경을 이루는 양방언의 아름다운 기악곡들이 각각 머리, 몸통, 꼬리를 이루고 있었다. 극작과 두 종류의 음악은 서로 역할을 분명하게 나눠서 맡고 있으면서, 각각이 가진 훌륭한 장점을 순간순간 충실히 드러내었다. 말로 된 대사는 사건을 발생시키고 이야기를 만들어나갔고, 판소리 대목들은 극중에서 음악이 필요한 부분에서 실제 음악으로 쓰였으며, 양방언의 음악은 배경을 이루면서 빈 곳을 메워주었다. 다만 세 요소가 역할을 분명하게 나눠서 맡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는 서로가 역할을 넘겨줄 때 충돌을 일으켜 매끄럽게 맞물리지 못하는 경우에 발생했다. 이 때 생기는 균열들은 창극이 이종 세포들 간의 혼종임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만 놀고 있다고 여겨지던 혹은 서로 불협하고 충돌한다고 여겨지던 각각의 요소가 조화롭게 만나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고 그 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앙상블로 큰 감동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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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극장, 2013년 9월 18일 15시 |
사자의 머리에 염소의 몸, 그리고 뱀의 꼬리, 서로 다른 형상을 한 존재들의 결합인 키마이라(Chimaira). 창극 <서편제>는 유서 깊은 판소리의 눈대목들로 이루어진 소리와 극작가 김명화가 써낸 탄탄한 대본, 그리고 전체 줄거리의 배경을 이루는 양방언의 아름다운 기악곡들이 각각 머리, 몸통, 꼬리를 이루고 있었다. 극작과 두 종류의 음악은 서로 역할을 분명하게 나눠서 맡고 있으면서, 각각이 가진 훌륭한 장점을 순간순간 충실히 드러내었다. 말로 된 대사는 사건을 발생시키고 이야기를 만들어나갔고, 판소리 대목들은 극중에서 음악이 필요한 부분에서 실제 음악으로 쓰였으며, 양방언의 음악은 배경을 이루면서 빈 곳을 메워주었다. 다만 세 요소가 역할을 분명하게 나눠서 맡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는 서로가 역할을 넘겨줄 때 충돌을 일으켜 매끄럽게 맞물리지 못하는 경우에 발생했다. 이 때 생기는 균열들은 창극이 이종 세포들 간의 혼종임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만 놀고 있다고 여겨지던 혹은 서로 불협하고 충돌한다고 여겨지던 각각의 요소가 조화롭게 만나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고 그 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앙상블로 큰 감동을 주었다.
2013년 7월 17일 수요일
생의 한가운데, 붉은 깃발을 나부껴라.
생의 한가운데, 붉은 깃발을 나부껴라.
- 연극 <푸르른 날에>와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 본 혁명과 사랑.
by 백인경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만큼의 분노와 절망이 페스트처럼 온 도시로 번져나간 곳에서 인간은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 세계와 함께 멸망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일어나든지. 1832년, ‘불행한 사람들’<Les Misérables>로 득시글거리는 파리 뒷골목에서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운명적으로 마주친다. 1980년, 사랑만 하기에도 모자란 민호와 정혜의 <푸르른 날에> 광주에 울려퍼진 계엄군의 총소리는 평화롭던 이들의 일상을 뒤흔든다. 한국에서 (이제서야) 초연된 빅토르 위고 원작의 뮤지컬 <레 미제라블>과 벌써 세 해째 뜨거운 5월을 보낸 정경진 작, 고선웅 연출의 연극 <푸르른 날에>는 각각 ‘1832년 파리 6월 항쟁(June Rebellion, Paris Uprising of 1832)’과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날의 사건들은 이미 역사에 환원되었지만 그날을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도 공명한다. 거기에는 시대와 국가를 초월하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를 ‘혁명’이라는 특정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개별적 주체들의 ‘반항’, 즉 삶을 향한 태도에 관한 이야기로 읽고싶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굴어야 하는 것, 본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생을 살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버텨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지키고 싶은 가치와 반짝거리는 진실들이 있기에, 행복에 대한 인간의 뜨거운 갈망과 이에 냉담한 세계 사이의 영원한 대립은 인간 실존이 가진 근본적인 상황이다 - 생은 그 자체로 거대한 부조리다. 부조리의 인간 상태를 통찰했던 알베르 카뮈는 이를 부정하거나 무기력하게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바라보고”, “끝까지 살게 하는 것으로써 삶에 주어진 부조리한 전제를 극복하고자 했다. 어떠한 도피도(신체적 자살) 마취제도(철학적 자살) 거부하고 부조리를 직시하며 이와 더불어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반항적 삶에 의해 실천된다.
- 연극 <푸르른 날에>와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 본 혁명과 사랑.
by 백인경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만큼의 분노와 절망이 페스트처럼 온 도시로 번져나간 곳에서 인간은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 세계와 함께 멸망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일어나든지. 1832년, ‘불행한 사람들’<Les Misérables>로 득시글거리는 파리 뒷골목에서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운명적으로 마주친다. 1980년, 사랑만 하기에도 모자란 민호와 정혜의 <푸르른 날에> 광주에 울려퍼진 계엄군의 총소리는 평화롭던 이들의 일상을 뒤흔든다. 한국에서 (이제서야) 초연된 빅토르 위고 원작의 뮤지컬 <레 미제라블>과 벌써 세 해째 뜨거운 5월을 보낸 정경진 작, 고선웅 연출의 연극 <푸르른 날에>는 각각 ‘1832년 파리 6월 항쟁(June Rebellion, Paris Uprising of 1832)’과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날의 사건들은 이미 역사에 환원되었지만 그날을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도 공명한다. 거기에는 시대와 국가를 초월하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를 ‘혁명’이라는 특정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개별적 주체들의 ‘반항’, 즉 삶을 향한 태도에 관한 이야기로 읽고싶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굴어야 하는 것, 본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생을 살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버텨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지키고 싶은 가치와 반짝거리는 진실들이 있기에, 행복에 대한 인간의 뜨거운 갈망과 이에 냉담한 세계 사이의 영원한 대립은 인간 실존이 가진 근본적인 상황이다 - 생은 그 자체로 거대한 부조리다. 부조리의 인간 상태를 통찰했던 알베르 카뮈는 이를 부정하거나 무기력하게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바라보고”, “끝까지 살게 하는 것으로써 삶에 주어진 부조리한 전제를 극복하고자 했다. 어떠한 도피도(신체적 자살) 마취제도(철학적 자살) 거부하고 부조리를 직시하며 이와 더불어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반항적 삶에 의해 실천된다.
2013년 7월 2일 화요일
카르멘
by 산책
왜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인지, 알려주세요.
공연은 극중극중극의 다소 복잡한 구조이다. 카페 주인이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카르멘』을 읽어 주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카페주인은 『카르멘』의 극중 화자, 죠반니가 된다. 돈 호세와 카르멘의 이야기는 죠반니가 돈 호세를 만나 듣게 된 이야기인 것이다. 카페 주인 박준석이 책을 펴 읽어 내려 가다가 옷을 바꾸어 입고, 안경을 쓰고, 모든 준비를 마치면, 또박또박 읽어 주던 글은 이제 죠반니의 말이 된다. 글에서 말로, 카페 주인에서 극중 화자로 변모하는 장면은 매우 신선했다. 박준석이 읽던 책은 나비처럼 날아가고, 카페는 스페인의 한 도시가 된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관객들은 죠반니의 안내에 따라 돈 호세와 카르멘을 만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돈 호세와 카르멘이 처음 등장할 때, 모두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것이다. 관객에게 마치 네 마음 속의 돈 호세와 카르멘을 불러 내라는 것처럼, 결국 무대에서 보여지는 것은 관객 자신의 눈에 달려있다고 하는 것처럼. 그러나 나의 경우 이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두 사람 모두 얼굴을 드러냈을 때,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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