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2일 수요일

To be or not to be ‘Hamlet’, that is the question!

글_김신록

안녕하세요. 배우 김신록입니다. 지난 8월 17일부터 9월 1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된 연극 <비평가>에서, 여자배우인 저는 남자 옷을 입고 ‘스카르파’라는 남자작가를 연기했습니다. 지적이고 밀도 높은 2인극의 리딩 캐릭터를 연습하면서는 ‘내 깜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다’는 두려움과 걱정이 앞섰지만, 막상 공연이 올라가고 관객을 만나고 마무리되는 과정을 거치면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런 인물을 앞으로도 연기하고 싶고, 할 수 있겠다’는 은근한 용기가 생겼습니다.   

작가인 ‘스카르파’는 인정욕구, 정복욕, 승부욕, 명예욕이 강한 인물입니다. 자신의 작품을 좋아하는 대다수의 관객들 뿐 아니라 자신의 작품에 찬사를 보내지 않는 마지막 한 명의 관객인 비평가까지 녹다운 시키지 않고는 견디지 못합니다. 물론 그 욕구의 저변에는 사랑받고 싶은 연약한 마음, 낮은 자존감 등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으나, 겉으로 보기에 그는 오만하고 도발적입니다.

스카르파가 짧게 구현하는 ‘권투경기장면’을 연기하기 위해 저는 잠깐 동안 권투를 배우러 다녔습니다. 관장님은 제게 ‘성격이 남자 같아서 우직하게 시키는 대로 해내니까 실력이 빨리 는다’며 칭찬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제가 기대 혹은 편견과는 다른 모습을 보일 때 ‘남자같다’고 말합니다.

공연기간 중 지인들이 남성인물을 연기하는 어려움에 대해 묻곤 했는데, 저는 스카르파가 ‘남성이기 때문에’ 어려웠던 점은 몇몇 기술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없었습니다. 사실, 10년 동안 절필하다시피하며 스승에게 인정받는 걸작을 쓰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스카르파는 저와 많이 닮았습니다. 우리 모두 ‘세상이 나를 몰라준다’는 억울함이나 패배감, 이겨버리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주는 불안과 고독을 알고 있지 않나요? 제 성격이 특별히 ‘남자 같아서’ 스카르파를 이해하는 건 아닐 겁니다.

오히려 연습 때 ‘남성인물을 표현해야 한다’는 심리적인 부담감이 문제였지요. 부담감을 안고 첫 공연을 올렸을 때, 공연을 본 선배가 ‘남자처럼 하려고 하지 말고 작가처럼 해봐!’라고 조언해 줬는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 이 인물의 핵심은 남자라는 게 아니라 작가라는 거지!’ 그 날 이후 실체 없는 ‘남자처럼 연기해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니 많은 것이 명쾌해졌습니다. ‘남자’가 아니라 ‘작가’를 연기하는 것이 중요했던 겁니다.

<비평가> 공연 내내 여자배우가 남성인물을 연기하는 ‘젠더 프리 캐스팅’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과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여러 SNS에 올라 온 후기와 촌평들을 보면 관객들이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이건 화자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 아닌가?’, ‘이런 이야기를 그동안 왜 굳이 남성인물들이 해왔을까?’하는 의문이 생긴 겁니다. 저 역시 마치 개안하듯, ‘그렇지, 내가 왜 그동안 햄릿이 아니라 오필리어를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라는 신선한 의문을 갖게 됐습니다.

평들 중에는 ‘여자배우가 남성인물을 연기하면서 극이 새로운 관점에서 완성되었다’는 내용도 다수 있었습니다. 관객들의 해석을 접하면서, 어쩌면 이런 방식의 젠더 프리 캐스팅이 고전작품, 혹은 기존의 전반적인 드라마 연극으로 하여금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동시대적 말 걸기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직관적인 방법론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평가> 공연을 통해, 배우와 인물 간의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창작자의 텍스트 해석과 구현, 관객의 해석과 감상에 있어 다층적 관점의 다양한 소통 가능성이 열리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스카르파는 마음의 스승이자 혹독한 비평가인 볼로디아의 마음에 드는 작품을 쓰려다 실패하고, 그에게 대항하는 작품을 쓰려했지만, 결국 극의 말미에 이르러서는 이 역시 그에게 얽매이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저는 그동안 수동적으로 쓰여 진 희곡 속 여성인물들을 조금이라도 더 주체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고 표현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주체적인 오필리어’를 고민하는 것을 넘어, ‘인간 햄릿’을 연기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한 인간으로서, 한 명의 배우로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존재론적인 고민을 무대에서 발화해보고 싶습니다. 저에게는 그 말이 ‘데이지 꽃, 제비꽃, 당신에게 드릴게요’라는 말보다 더 매력적입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데이지 꽃이나 제비꽃이 더 매력적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권이 있느냐 하는 문제겠지요. 무대 위에서 이 선택권이 발현될 때 관객들은 또 설레는 마음으로 여자배우가 발화하는 ‘사느냐 죽느냐’에, 혹은 남자배우가 발화하는 ‘데이지 꽃, 제비꽃’에 존재론적인 사유와 감상을 더해 줄 것입니다.

To be or not to be ‘Hamlet’, that is the question!
이 시대에 여자배우가 햄릿이 될 수 있을까 없을까, 그것이 문제로다!
이 시대에 여자배우가 오이디푸스가, 리처드3세가, 파우스트가, 바냐가, 쟝이, 프락터가, 에스트라공이, 알런이, 살리에리가, 쥬코가 될 수 있을까요?
정말이지, 존재론적인 질문이지요!

<비평가>에서 스카르파를 연기한 김신록 배우
사진 더보기 https://photos.app.goo.gl/WPjvkdtUMUk3pN1B6


<비평가> 프로그램북에 수록된 김신록 배우의 글
(위 앨범 링크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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