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15일 토요일

믿음을 주입하는 사람, 믿음에 압도된 사람.



두산 아트랩 <앵커>, <양질의 단백질>

글쓴이_장영지

 

2020년 두산 아트랩 공연이 시작되었다. 꽤 오래 전부터 아트랩을 알고 있었으나 관극은 올해가 처음이다. ‘실험적인 시도’, ‘날 것의 쇼케이스는 궁금증을 자극하지만, 한편으로는 실망감만 안고 돌아올까 걱정하며 관극을 망설여 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서정완 작, 연출의 <앵커>, 김연주 작, 연출의 <양질의 단백질> 두 작품을 관극했는데, 그간의 우려는 어느 정도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하지만 분명 흥미로운 점이 분명 있었고, 어떤 가능성도 엿보았다.

 

<앵커>는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재창작한 작품이다. 몇몇 대사를 원작에서 그대로 가져올 정도로 원작에 충실하다. 그러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앵커>는 피해자이자 살인자인 K(원작의 카타리나)보다 뉴스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과 그 과정에 주목한다. 뉴스 스튜디오를 무대 위에 구현했으며, 공연도 뉴스의 형식을 거의 그대로 따른다. (뉴스 후 일기 예보까지 보여 준다) 이런 무대와 구성 덕에 뉴스가 만들어지는 현장감을 느낄 수 있으며, 극장에서 늘상 접하는 뉴스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앵커> 무대
출처: 두산아트센터


그런데 <앵커> 속 뉴스는 현실적인듯 하면서도 비현실적이다. 앵커, 현장 연결, 짧은 리포팅에서 보여준 말투, 형식, 내용 모두 뉴스의 그것과 흡사하다. 하지만 몇몇 설정이 무리하게 느껴진다. 대표적으로 앵커가 피의자를 신문하고, 그것을 생방송으로 송출한다는 설정이 그렇다. 다수의 종합편성 채널에서 보았던, 이것을 과연 뉴스라고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만든 뉴스들이 분명 있으니 이런 구성도 어쩌면 사실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여하튼 앵커(혹은 뉴스)는 한 여성의 사생활을 낱낱이 파헤쳐 그녀를 참고인에서, 공범으로, 공범에서 살인자로 만든다. 국민의 알 권리라는 미명하에 그녀가 타고 다닌 차, 그녀가 살던 고가의 아파트, 그녀의 직업을 보도한다. 그녀의 전남편, 그녀를 잘 모르지만 이런 저런 소문을 주워섬기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사실인 듯, 사실이 아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보들은 그녀에 대한 사실을 만들어 낸다. 이런 뉴스는 보다 유튜브를 통해 자극적인 가십으로 재생산된다. 뉴스 중간 중간 삽입되는 유튜브 영상은 현실의 그것과 너무나 닯아 있어 더욱 끔찍한 인상을 준다. <앵커>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실이 아닌 것을 믿게 만드는, 미디어의 힘, 믿음을 주입하는 그런 권력의 문제를 뉴스의 형식을 빌어 지적한다. "가짜 뉴스"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지금, <앵커>의 이런 문제 의식이 더욱 중요하게 느껴진다.


<앵커>, '용의자 얼굴을 막 공개하네요?'
출처: 두산아트센터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반복되는 장면들은 분명 언론의 민낯을 보여주지만, 일방적인 문제제기에 그치고 만다. 관객은 어디에 있는가? 관객은 그저 <앵커>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면 되는가? 비판적으로 보아야 하는 인물만 제시되기 때문에 연극적인 재미가 떨어지는 문제도 있다. 관객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럴듯하게 구현된 뉴스 현장, 영상을 보면서 가끔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을 뿐이다. 극적인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지금의 미디어 현실, 그것을 소비하는 관객의 태도를 성찰하게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
<앵커>가 잘못된 믿음이 생산되고, 그것을 주입하는 상황을 문제 삼았다면, <양질의 단백질>은 잘못된 믿음에 압도된 아이들을 보여준다. 오디와 머루는 완벽한집에서 완벽한음식을 먹으며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오디와 머루는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를 입고 접시에 예쁘게 담긴 무엇인가를 얌전하게 썰어 먹는다. 하지만 그녀들의 집은 완벽과 거리가 멀고, 그녀들이 먹고 있는 완벽한 단백질은 분홍색의 통조림 햄이다.

<양질의 단백질>
출처: 두산아트센터


그녀들의 이런 믿음은 점점 위태로워진다. 그녀들이 완벽하고 안전하다고 믿는 집에 바퀴벌레가 출몰하고, 방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어느날 갑자기 찾아 온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과는 너무나 다르다. 그는 불쾌한 냄새를 풍기고, 잘 생기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만을 먹일 뿐 아니라 거짓말을 하고 있다. 게다가 "귀여운" 오디와 머루를 버리고 떠날 마음도 먹고 있다. 하지만 오디와 머루는 어머니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어머니의 규칙과 말에 압도되어 눈 앞의 현실을 보지 않으려 한다.

<양질의 단백질>,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
출처: 두산아트센터


뿐만 아니라 오디와 머루는 그녀들의 믿음을 가장 크게 훼손시킨 사람들, 아버지와 집주인을 제거한다. 예의바르게 햄을 썰어 먹던 그 칼로, 한 사람씩 사이좋게(?) 해치운 오디와 머루는 이제 어떻게 될까? 또 그녀들의 집은 계속 안전한 곳이 될 수 있을까? <양질의 단백질>은 이런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며 극적 긴장감을 유지한다.

  (아버지일 것으로 추측되는) 이제까지 먹던 것과 다른 고기를 먹고 오디와 머루는 훌쩍 컸다. 자란 만큼 의심도 커졌다. 하지만 아직 여전히 혼란스럽다. 어머니는 자신을 사랑하고, 우리 집은 안전하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계획대로 될 리가 없다. 아무 것도 먹지 않는 가혹한 다이어트로 몸무게를 줄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커버린 키를 줄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한" 집에 남을 것인가? 굳건한 믿음을 유지할 것인가? 작가는 집에 남는 오디와 집을 떠나는 머루를 보여주면서 관객에게 묻는 것 같다. 이제까지의 믿음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갈 수 있냐고 말이다.

  물론 <양질의 단백질>이 믿음의 문제만을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이야깃거리도 많이 있다. 여성의 변화, 모순적인 상황이 만들어 내는 블랙 코미디의 특성들도 중요하게 다뤄볼 만하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 보여주는 방식은 보다 정교화되었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오디와 머루 외 다른 인물들은 보다 현실감을 지니면 어떨까? 모든 인물이 어딘가 이상해 보이니, 오디와 머루의 변화가 두드러지 않아 아쉬움이 있다. 배송 지연 사은품으로 퀵보드가 배달되는 설정은 탈출 장면을 위해 삽입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또 머루의 탈출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본 작품이 사실적인 재현에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머루의 탈출이 조금 더 진지하게 보여져야 여성의 변화가 가능한 것으로, 또 필요한 것으로 느껴질 것 같다.


덧붙임_ 글을 완성한 후에야 두 작품을 믿음의 문제로 보려던 것이 무리한 기획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글을 쓰는 동안은, "믿음"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니까 며칠 동안  나는 굶어죽어가며 집에 남은 "오디"였던것이다.


<앵커>, 서정완 작, 연출, 2020.1.30 - 2.1. 두산아트센터 Space 111
<양질의 단백질>, 김연주 작, 연출, 2020. 2.6-2.8. 두산아트센터 Space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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