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9일 화요일

[괄괄×괄괄 인터뷰 ①] 김진희×이소연 - 극작가 동인 ‘괄호’와 창단 공연에 대한 수다


※ [괄괄×괄괄 인터뷰]는 극작가 동인 ‘괄호’ 멤버들 간의 내부 인터뷰를 기록한 시리즈입니다. ①편에는 김진희 작가와 이소연 작가의 이야기를, ②편에는 도은 작가와 신효진 작가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인터뷰의 기획 및 진행은 ‘괄호’의 드라마투르그 김민조가 맡았습니다. 


<괄괄괄괄>을 올리기까지 


민조: ‘괄호’ 창단 공연 <괄호는 괄호와 괄호 사이 괄호가 될 수 있을까>(이하 <괄괄괄괄>)에서 진희 작가님은 <DELETE>라는 작품을, 소연 작가님은 <조약돌은 상상한다>라는 작품을 각각 올리시잖아요. 처음에 네 개의 작품을 어떻게 하나의 공연으로 엮어낼 수 있을까 고심하다가 저희가 글쓰기 규칙이라는 것을 정했었는데, 그 이후에는 작가님들이 이 규칙에 맞는 이야기를 어떻게 지어낼 것인지 각자 고민하셨을 것 같아요. 그 과정을 들려주실 수 있나요?

진희: 제가 극작을 할 때 책상 앞에 앉아서 아무것도 못 쓰고 있을 때가 가장 힘들었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착착 쓰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진도가 못 나가고 있는 것 같고, 쉽게 쓰면 되는데 왜 쓰지 못할까 스스로를 비난하는 게 있었어요. 그래서 ‘작가 역’과 ‘인물 역’이 등장한다는 글쓰기 규칙이 정해졌을 때 자연스럽게 제가 자기검열을 통해서 지워버렸던 사람들이 떠올랐고, 그 사람과 만나는 순간을 이야기로 써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워진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거죠.

민조: <DELETE>에 ‘영기 할매’를 비롯해서 지워진 인물들이 여러 명 거론되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로 쓰셨던 인물들의 이름인가요?

진희: 완전히 똑같은 이름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휴지통에 모여 있는 친구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실제로 ‘성진’ 역의 정대경 배우님이 휴지통 안에 모여 있는 친구들을 가지고 <DELETE 2>를 만들어도 재밌겠다고 하시더라고요. 태어나지 못한 존재들이 자기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이야기로 확장될 수도 있겠다 싶어요.

민조: 소연님이 올해 2월달에 올린 <희곡상을 위한 희곡쓰기> 공연에서도 극작가가 타이핑한 글자들을 모두 선택 > 삭제해버리는 퍼포먼스가 있었잖아요. 글을 쓰다가 지워버리는 작가적 노동의 피곤함이 <DELETE>에 잘 나타나 있는 것 같아요. 

소연: 저는 제가 글을 왜 쓸까, 생각해보면 결국 ‘이상형’을 만나기 위해서 쓰는 것 같아요. 저는 글을 쓸 때 출발하는 지점이 늘 인물이거든요.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며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하고 부딪힘이 생길 때 제가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을 많이 느끼는 것 같더라고요. <조약돌은 상상한다>도 거기서 출발했던 것 같아요.

민조: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면서 부딪혔던 암초 같은 게 있을까요? 작가님들이 초고, 수정본, 최종본, 최최최종본을 거쳐서 여기까지 오셨잖아요. (웃음) 그 과정에서 경로 변경이 조금 있었죠?  

진희: 초고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인물 역의 ‘성진’ 캐릭터예요. 초고의 ‘성진’은 신적이고 초월적인 존재, 작가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었어요. 수정 과정에서 보다 ‘등장인물’이 된 것 같아요. 작가 역과 상호작용하는 존재로 바뀐 거죠. 이 이야기가 나 혼자만의 징징거림으로 들리지 않았으면 했는데, 이 작품이 과연 객관적으로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 우려가 들기도 해서 배우님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초반에 동인 기획회의를 할 때도 극작가의 이야기를 하되 극작가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지는 말자고 했잖아요. 그 고민이 제일 컸어요. 

민조: 네, 저희가 보편성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죠. 연극계에서 극작가가 얼마나 왕따인지를 보여줄 수도 있지만, (웃음) 한편으로는 관객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고 확장될 수 있는 이야기이길 바란다는 결론이 중요했던 것 같아요. 소연님도 비슷한 고민을 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소연: 네. 저도 초고 때는 좀 더 극작가 이소연에 집중하고,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려 했어요. 이상형이라는 존재가 출현하게 되는 계기 자체가 ‘나랑 맞는 연출이 없어서’였던 거죠. 내 작품을 제일 잘 이해하고 완벽하게 연출해줄 파트너를 찾는 과정에서 이상형이 만들어지는 얘기였는데, 진희님과 비슷한 고민을 하게 되더라고요. 나라는 존재가 극작가 정체성만으로 이루진 것은 아니잖아요. 차라리 나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가야 극작가로서 가지고 있는 동시대적 고민들을 조금 더 진솔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좋은 연출이 아니라 나를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 내 삶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이상형을 찾는 이야기로 바뀌게 된 것 같아요. 
제 경우에는 진희님과 정반대일 수도 있는데, 초고 때는 ‘이상형’이 뚜렷한 자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인물로 쓰여 있지 않았어요. 수정 과정에서 ‘이상형’이 보다 주체적으로 ‘이소연’과 상호작용을 주고받게 되었죠. 그래놓고 보니 ‘이상형’의 캐릭터를 결정하는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이상형’ 역을 맡은 배우가 과연 어떤 상태로 과연 무대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인지, 어떤 상태로 이 극에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제일 많이 하고 있어요. 

민조: 두 분 다 상호작용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셔서 흥미롭네요. 작가가 인물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 인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한다는 점. 어쩌면 이번 <괄괄괄괄> 작품들은 모두 ‘주고받음’에 대한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도 같네요.

극작가 동인 괄호, <괄호는 괄호와 괄호 사이 괄호가 될 수 있을까>(2020) 포스터
극작가 동인 괄호, 
<괄호는 괄호와 괄호 사이 괄호가 될 수 있을까>(2020)


극작가가 인물을 만나는 과정 


민조: 자연스럽게 인물 만들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극작가는 인물을 계속 만들어내는 사람들이잖아요. 개인적으로는 늘 궁금했던 점이 있었어요. ‘극작가는 이름을 어떻게 짓지?’ (웃음) 인물 이름이 불현듯 번개처럼 떠오르는 것인지, 아니면 사흘밤낮을 고민해서 지어내는 것인지 궁금했어요. 

진희: 개인적으로 소연님이 이름을 정말 잘 짓는 작가라고 생각해요. 이름 짓는 걸 되게 좋아하고… 

소연: 맞아요. 좋아해요. (웃음) 

진희: 반대로 저는 이름 짓는 걸 힘들어하는 타입이에요. 이름에는 나름대로 인물의 성격이나 특성이 반영되기 마련이잖아요. 그런 걸 생각하는 과정이 어려워서 보통은 이름 없는 역할을 많이 썼던 것 같아요. 예전에 효진님, 소연님과 학교에서 같이 공연을 올렸던 적이 있었는데, 저는 남자 두 명이 나오는 2인극을 썼고 거기에 이번 공연의 ‘성진’과 비슷한 인물이 있었어요. 이름은 따로 짓지 않고 배우의 성씨로 대체했었죠. 설명충에다가 오타쿠 기질이 있고 혼자 생각하는 걸 좋아하는 캐릭터. 그런데 제가 써온 작품들을 생각해봤을 때, 그런 캐릭터가 꼭 한 명씩 있었던 것 같아요. 성진이라는 인물이 그들의 결정체가 아닐까 해요. 

민조: 저는 진희님이 쓰셨던 <그 어딘가의 영주>에서 주인공 ‘영주’의 이름이 굉장히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라진 딸을 찾아 도시의 공장, 마트, 원형의 도로 등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인물인데 이름이 ‘영주권’ 할 때의 영주잖아요. 아이러니한 작명이라 생각했어요. 

진희; 그런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웃음) 그 나이대의 여성에 대해 생각했을 때 ‘영주’라는 이름이 떠올라서 그렇게 지었던 것 같아요.

민조: 사람의 이름이라는 게, 이름에 담긴 의미보다 글자 자체가 갖고 있는 느낌이나 뉘앙스가 더 중요할 때도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최근의 예술작품에서 ‘영지’라는 이름이 자주 발견된다는 점을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거든요. 한 시대의 언어망 속에서 각각의 글자가 특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영주’의 경우에도 그런 위치성이 확 다가오는 이름이었던 것 같아요. 소연님은 아까 이름 짓기를 좋아하신다고 했는데, 이름이 빨리 떠오르는 편이신가요?

소연: 그런 편이에요. 인물을 생각하면 무조건 이름부터 짓고 시작해요. (웃음) 보통은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 떠오르거나 내용과 의미적으로 연결되는 이름을 짓게 돼요. 나만 알 수 있는 의미라 할지라도 그걸 이름에 심어놓는 것도 좋아하고요. 기억에 남는 이름은 아무래도 등단작이었던 <마트료시카>의 ‘윤경’이에요. 캐릭터 자체도 저희 엄마한테서 영감을 받았고 이름도 엄마의 성함에서 성만 바꿔서 그대로 갖다 썼어요. 2018년도에는 ‘상아’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43kg만큼의 상아>라는 작품을 공연했는데, 작중에 코끼리와 이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상아’라는 이름을 짓고 나서 코끼리에 대한 내용이 떠올랐던 것 같기도 하거든요. 저는 그런 식으로 인물과 이름이 딱 매치되는 걸 좋아해요. 

민조: 제가 이번에 4개 팀 연습실 사이를 날아다니는 호그와트 부엉이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잖아요. (웃음) 도은님 연습에 가보니 ‘배우는 인물과 어떻게 만나는지’에 대해 듣는 시간을 갖고 계시더라고요. 그 작업을 지켜보다가 극작가에게는 인물이 어떻게 오는지가 거꾸로 궁금해졌어요. 

진희: 극작과 수업에 들어가보면 정말 인물의 전사(前史)를 A4 몇 장에 걸쳐서 세세하게 짜는 분들이 계세요. 저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몇 번 시도해봤는데 너무 힘들더라고요. 제 경우에는 일단 작품 내에 인물을 등장시키면 어떻게든 성격이 구체화된다고 해야 하나, 이야기를 진행시키면 인물들이 알아서 반응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 인물이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 거죠.

소연: 저는 정해놓고 쓰는 편이거든요. 대부분 인물을 먼저 정한 다음에 인물이 겪게 될 주요 사건을 짜놓고 시작해요. 인물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제가 주변 사람들에게서 인상 깊게 느꼈던 면을 많이 가져오는 것 같아요. 저는 사람을 관찰하면서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혼자 생각해보는 걸 좋아하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인물을 만드는 방식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면 좋겠다’를 먼저 정한 뒤에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왔던 걸까?’ 하고 반추하며 되짚어가는 방식으로 작업하는 것 같아요.

민조: 관찰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작가님들은 평소에 사람들을 관찰할 때 유심히 보시는 포인트가 있나요? 

진희: 저는 행동이나 습관 같은 걸 보게 돼요. 눈을 자꾸 깜빡거리면서 얘기를 한다거나, 말 사이에 자꾸 기침을 자주 한다거나. 

민조: 진희님 전작인 <EXIT>나 <그 어딘가의 영주>를 보면서도 느낀 건데, 진희님 작품에는 ‘손사래 치며’라는 지시문이 유독 자주 나오더라고요? 이번 <DELETE>에서도 나왔던 것 같은데… (웃음) 소연님은 어떠세요?

소연: 저는 여러 명이 있는 자리에서 말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을 보는 걸 좋아하거든요. 좀 변태 같지만… (웃음) 보통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한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다른 사람들은 듣거나 다른 일을 하잖아요. 그럴 때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게 좋아요. 왜일까 생각해보니,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지 않는 진짜 그 사람의 모습이 드러날 때라 그런 것 같더라고요. 관심을 안 가지면서 가지는 척을 하고 있다거나, 말로는 리액션을 하면서 딴짓을 하고 있다거나. 또 저하고 얘기할 때 말고 다른 사람이랑 얘기할 때 어떤 모습인지 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제게 가장 큰 원천이 되는 건 연애 이야기인 것 같아요. 제가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연애 이야기를 늘 예민하게 듣게 되는 것 같아요. 연애하는 스타일이 각자 너무 다르잖아요. 연애에 대한 사소한 말 한 마디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나, 싸울 때의 생각에 대해 이야기 등등. 사람들이 열렬한 감정으로 열심히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하고 거기에 영감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그간의 작품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


민조: 자연스럽게 인물형(形)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 같네요. 소연님 작품을 보면 사랑이나 소유의 문제, 관계의 딜레마로 인해 시달리는 인물들이 많이 보이는 것 같아요.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 위해>나 <라고, 누가, 말을, 했던가>의 경우에도 그렇고요. <조약돌은 상상한다>에 나오는 대사이지만 “짜장 맛이 나는 짬뽕”을 동시에 원하기에 번민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되는 것 같거든요. 그런 인물형을 만들어 낼 때 에너지가 소모되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부분은 없나요? 

소연: 그런 이야기를 많이 쓰는 건 저 또한 해결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인 거잖아요. 저랑 가까이 닿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쓰고 나면 오히려 속이 시원하거나 해소감을 느낄 때가 많은 것 같아요. 

민조: 제가 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까 생각했냐면, 소연님 작품에서는 연애 관계에 있는 두 인물 중 어떤 한 쪽이 일방적으로 나쁜 사람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별로 없는 것 같았거든요. 누가 상처 입히고 누가 상처받는 식으로 원사이드하게 전개하기보다는 ‘사랑의 회전문’ 같은  관계의 구조 전체를 보여주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양쪽의 입장을 종합적으로 본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니까요. 그런데 도리어 후련하다고 하시니… (웃음) 
한편 진희님 작품을 보면서 느낀 점 중 하나는 좁은 공간에 혼자 있는 인물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느낌이었어요. <EXIT>는 전면적으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고요. <그 어딘가의 영주>도 기본적으로는 영주가 여러 공간을 돌아다니지만, 외롭게 외따로 있는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잖아요. ‘작가의 방’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삼는 이번 <DELETE>도 마찬가지고요. 

진희: 저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해요. 혼자 있음에 대한 이야기를 희곡을 썼던 적도 있어요. 사람들은 왜 혼자 있기를 싫어하면서 자꾸 고독을 즐긴다는 말을 할까. 나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걸 싫어하는데 왜 그 과정에서 외로움을 느낄까에 대해 생각하곤 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한적인 공간에 대해 쓰게 되고, 전부 다른 공간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같은 공간으로 연결되는 이미지가 제 안에 있는 것 같아요. 

민조: 개인적으로는 진희님의 <EXIT>를 읽다가 “문이 안에서 안으로 통한다” 라는 대사에 꽂혔던 적이 있어요. 문은 당연히 안에서 밖으로 나가게 해주는 매개라고 생각해왔는데, 안에서 안으로 통한다는 대사 때문에 문 밖으로 나가느냐, 나가지 않느냐 하는 선택을 스스로 감당하는 인물들의 모습들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게 되었던 것 같아요. 
진희님이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으니 말인데, 소연님 작품에는 ‘바다’라는 공간이 자주 등장하잖아요. 비 오고 번개 치고 파도가 철썩철썩 치는. (웃음)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 위해>는 배경 자체가 한적한 바닷가로 설정되어 있었고, 이번 <조약돌은 상상한다>도 바다와 조약돌의 이미지가 매우 중요했죠. 

소연: 바다도 있지만, 요즘에 많이 꽂혀 있는 공간은 황야예요. 인간을 압도시키는 자연의 모습으로부터 제가 느끼는 게 많은 것 같아요. 아득한 공간 속에 있을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사색하게 되잖아요. 작품 속에 그런 공간들을 넣어놓으면 제 머릿속에서 이미지들이 많이 떠오르는 것 같아요. 인물의 경우에도 저는 대부분 바다나 황야, 공터, 들판 같은 곳에 서 있는 사람의 이미지로 많이 다가오곤 하고요. 



‘괄호’다운 프로덕션에 대한 이야기


민조: 이제 <괄괄괄괄> 프로덕션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요? 이번에 극작가가 배우와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프로덕션을 경험하게 되셨는데, 어떠셨어요? 

진희: 저는 예전에 스탭으로 공연에 참여했을 때나 작가로서 참여했을 때나 연습실을 자주 찾아가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예전에 제가 연습실에 가서 할 수 있는 건 주로 연습을 보거나, 제게 말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말하는 것뿐이었어요. 제 의견이 직접적으로 반영되기 어렵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번에 작/연출을 해보면서는 제가 생각했던 그림을 배우들에게 바로바로 이야기할 수 있었어요. 물론 배우님들은 보통 연출의 언어를 들으면서 작업을 해오셨으니까 제 말이 바로 전달되기가 힘든 것도 있었죠. 저는 연출의 언어를 사용하기보다는 ‘이런 느낌으로 해주세요’, ‘여기서는 이런 감정이었으면 좋겠어요’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니까요. 그런 과정이 힘든 것도 있었지만, 배우님들이 제가 의견을 드리면 바로 시도를 해주셨기 때문에  ‘아, 내가 생각했던 게 이런 거였지’, ‘이 그림으로 갑시다’ 하고 픽스를 할 수 있었어요. 이래서 많은 극작가들이 작/연출을 하는 거구나… (웃음)

소연: 저는 반대인 것 같아요. (웃음) 일단 저는 원래 연습실에 잘 안 가는 작가였고, 이번 연습 과정에서는 종종 제가 쓴 텍스트라서 오히려 힘들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어요. 아마 저는 명확하게 그림을 상상을 하면서 쓰는 편이 아닌가 봐요. 제게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그림으로도 표현할 수도 없기 때문에 글로 쓴다는 느낌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 텍스트를 제가 장면으로 만들고 심지어는 누군가를 설득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 제게는 꽤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배우님들에게 명확하게 요구하거나 결정하기가 어려운 지점도 있었고요. 오히려 저는 다른 작가가 쓴 작품을 연출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민조: 연출가로 발돋움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내시는 건가요? (모두 웃음) 

소연: 아, 저 재미있는 에피소드 있어요. 저희 연극이 한 명은 상상을 하고 한 명은 그 상상 속의 인물로서 움직이는 거잖아요. 얼마 전에 연습실에서 얘네가 어떤 식으로 상상을 하느냐를 가지고 토론을 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지켜보시던 무대감독님께서 웃으시더니 작품 속에 나오는 두 인물의 관계가 저와 배우님들의 관계처럼 보인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저랑 배우님들도 그 말을 듣고 순간 ‘그러네?’ 싶었어요.  

민조: 저도 사실 옆에서 그런 생각 많이 했어요. (웃음) 글쓰기 규칙이 그렇다 보니 작품과 작품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메타적으로 겹쳐지더라고요. 아까 이야기했던 작가와 인물 사이의 ‘양방향적인 상호작용’이라는 것도 연습실에서 이미 구현되고 있는 거잖아요. 진희님도 기억에 남는 연습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진희: 이게 작가의 이야기이다 보니, 배우님들이 이 작품 속에 제 자전적인 이야기가 들어갔을 거라고 당연히 생각을 하시더라고요. 가끔씩 연습을 하다가 ‘진희야, 괜찮지?’ 하고 물어보세요. (웃음) 아니, 이거 전혀 제 이야기 아니고 상상해서 지은 거다, 라고 말씀드리고 넘어갈 때가 종종 있었어요. 배우님들은 조심스러워하시는데 저는 그 상황이 재미있는 거죠. 

소연: 신기한 순간은 그런 거예요. 제가 쓸 때는 몰랐던 것을 배우님들이 먼저 발견하는 경우. 제가 잊어버렸거나 놓치고 지나갔는데 배우님들이 먼저 이야기를 해주시는 순간 갑자기 ‘맞아, 나 이래서 이렇게 쓴 거였지’ 하고 떠오를 때가 있더라고요. 분명 제가 쓴 텍스트이지만 배우님들과 소통을 하다 보면 텍스트를 쓸 때와는 다른 플러스 알파가 발견될 때가 있어서 그게 가장 재미있고,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진희: <DELETE>에 나오는 작가의 마지막 대사가 원래는 이 작품에서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한 번 더 짚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쓴 대사였어요. 그런데 ‘성진’ 역할의 정대경 배우가 이걸 다시 한 번 말해주는 게 설명적이지 않느냐고 얘기를 해주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저희가 다 웃었어요. 왜냐하면 이 작품은 ‘설명하면 안 된다’는 이유로 지워져버린 ‘성진’의 이야기이기도 한데, ‘성진’ 역의 배우가 이 부분은 설명적이니까 끊는 게 좋지 않을까 제안하는 상황 자체가 재미있었던 거예요. 결론적으로 그 대사는 빠지게 되었지만, 제게는 뭔가 여러 차원의 인물이 오는 느낌이었어요. (웃음)

민조: 이번 공연은 동인 4명의 작품을 연달아서 올리는 준(準) 페스티벌의 형태를 띠고 있잖아요. 이번 창단 공연의 형태 자체에 대한 생각, 그리고 창단 공연 이후 ‘괄호’라는 플랫폼을 통해 해보고 싶은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신다면?

진희: ‘괄호’의 이름으로 다시 공연을 올리게 된다면, 반드시 우리 4명이 모두 대본을 써야 할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을 해봤어요. 우리가 장기적으로 갈 수 있다면 동인 한 명이 대본을 쓰고 다른 동인들은 극작가의 역할을 내려놓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해요. 함께 공연을 올리는 것에 의의를 두고, 다른 역할을 서로 해보는 거죠. 오히려 극작가 동인이라는 팀 안에 있으니까 조명이나 연출 같은 극작 이외의 요소에 관심을 갖고 작업을 할 수 있더라고요. 

민조: 인상적이네요. 극작가들이 모인 팀이니까, 오히려 서로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다른 역할을 맡아볼 수 있는 가능성을 상상해보게 된다는 거군요. 

소연: 제가 하고 싶은 건 일종의 극작 워크숍이에요. 배우님들은 워크숍을 많이 하잖아요. 여러 명의 극작가들을 모아서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어요. 저는 오히려 연출이나 배우 친구들이 더 많고, 동료 극작가들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거든요. 이왕 극작가 팀을 만들었으니 이 팀을 통해 연극계에 별로 많지 않은 극작가들의 커뮤니티를 모색하거나 개발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민조: 저희가 ‘극작가들이 소외되지 않는 프로덕션’이라는 말을 창단 공연의 소개글에 내걸고 있잖아요. 진희님과 소연님 말씀을 들으니 생각보다 이 프로덕션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팀이 극작가가 다른 일에 도전해볼 수 있는 안전한 기반이 되어줄 수도 있고, 외부로 확장해나갈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번 공연 과정을 거치면서 창단 당시에는 다소 막연하게 느껴졌던 ‘괄호’의 가능성 자체가 좀 더 구체적으로 손에 잡혀가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늘 인터뷰 수고 많으셨습니다. 

김진희
2019 <EXIT: 탈출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
2019 <그 어딘가의 영주>
2020 <DELETE>

이소연
2017 <마트료시카> 
2018 <43kg만큼의 상아> 
2018 <어제의 당신이 나를 가로지를 때> 
2019 <최후의 마녀가 우리의 생을 먹고 자라날 것이며> 
2019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 위해> 
2020 <희곡상을 위한 희곡쓰기> 
2020 <조약돌은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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