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8일 수요일

침투하는 비체들 (김연재 × 신효진 미니 좌담 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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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미니 좌담] 김연재 × 신효진  

일시_2022년 12월 5일 

장소_대학로 혜윰 창작실

참석자

  • 김민조 / 모더레이터
  • 김연재 /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 작가
  • 신효진 / <머핀과 치와와> 작가
  • 임승태 / 《드라마인》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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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침투하는 비체들 


1. 팬데믹 이후 혹은 이전

민조

2022년 9월 《한국극예술연구》에 「이후의 신체를 조형하는 포스트휴먼 극작술-신효진 희곡 <머핀과 치와와>(2021), 김연재 희곡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2021)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소논문을 실었는데요. 논문을 구상할 때 당연히 ‘비인간’, ‘동물-되기’ 이런 화두가 있었어요. 그런데 사실 저한테 더 중요했던 것은 두 작품들 내에서 소위 ‘서사적 종말’이나 인간 사회 내부의 어떤 거대한 ‘공동(空洞)’이 엿보인다는 점이었어요. 장르상의 차이가 조금 있는데도요. 비인간 개념을 넘어서 우리의 현실, 관계, 사회를 보는 시각의 변화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아요. 

최근에 포스트휴머니즘이 사이버네틱스 기술을 통한 인간의 보완이나 향상 프로젝트로 오해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저는 팬데믹 위기 이후에는 정반대로 돌아서는 경향이 있다고 봐요. 최근 몇 년 사이에 제가 봤던 작품들 중에는 인간이 향상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안의 어둠이나 구멍으로 더 들어가려 하고, 그 구멍을 통해서 비인간 존재자들과 만나려 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두 분의 작품을 보면서도 그 생각을 많이 했고요. 

신효진 작가님께 먼저 여쭤볼게요. 다른 인터뷰 자리에서도 <머핀과 치와와>가 사회적 거리두기 상황을 연상시킨다는 의견이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마침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고 있던 2021년에 나온 작품이기도 하고요. 


효진

맞아요. 그 시기에 제가 넷플릭스에서 <소셜 딜레마>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소셜미디어가 얼마나 사람들의 관심사를 분리시키는가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이제는 기업들이 인간의 관심사를 사고 팔기 때문에 실은 노예 시장이랑 다를 바가 없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도 있었고요. 서사도 점점 파편화되어가고. 사람들이 금방 보고 말 것들을 선호하는 요즘의 동향이 장기적으로 인간들한테 어떤 영향을 미칠까를 생각을 하다 보니 진짜 각자가 편리한 세상이 오겠구나 싶었어요. 본인의 취향과 관심사에만 몰두하고, 각자의 마이붐이 있고, 의도적으로 관심을 확장하거나 하지 않으면 이쪽 너머의 사람들이 무엇을 관심을 갖고 있고 뭘 소비하는지는 영원히 알 수가 없겠구나. 더군다나 팬데믹이 지속된다면… 그런 생각으로 <머핀과 치와와>를 썼던 것 같습니다. 


민조

요새는 아이돌 그룹에 입문하기가 예전보다 훨씬 어려워졌죠. 이제 아이돌은 대중의 영역이 아니라 덕후의 영역이라는 말도 있고요. <머핀과 치와와>는 팬데믹 상황을 가속화시켜서 고립된 서클로 이루어진 미래를 빨리 도착하게 만든 작품이라는 느낌도 있어요. 


효진

그 사회의 이면에는 알고리즘이 있어요. 결국 자기 관심사를 타고 타고 가는 거죠. 예컨대 제가 친구랑 니트 얘기를 했는데, 다음날 바로 인스타그램에 니트 광고가 뜨는 거예요. 진짜로 도청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내가 보고 싶은 것들만 볼 수 있는 세상이 진짜 도래하겠구나, 그러면 서로가 필요가 없겠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그런 미래를 그렸죠. 


민조

<상형문자>는 2021년에 공연되었지만 제가 알기로는 훨씬 전부터 구상되었던 작품으로 기억해요. 아마도 코로나가 발발하기 전부터? 


연재 

저도 <상형문자>가 팬데믹 이후의 상황을 일면 비추고 있다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저는 미래의 모습을 상상해서 그렸다기보다는 제가 지금의 세계를 감각하는 주관적인 방식을 아예 문법으로 만들어서 그 문법으로 진행되는 희곡을 써보자 하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서로 인과 관계가 없는 사건들, 제각기 떨어져 파편적으로 존재하는 이들이 하수구라는 시공간에서 우연적으로 공존하는 세계를 그리려고 했어요. 이 우연성, 동시성을 자세히 성찰해보니 실제의 세계에서 탈피하려는 저의 열망, 기원을 향해 가려는 향수를 발견할 수 있었어요. 제도나 질서나 노동이나 이름 등등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지금 제가 처해 있는 사회 바깥을 보려는 시도였어요.


민조

저는 두 분의 차이가 재밌는데, 예컨대 ‘내가 친구한테 니트 얘기를 했는데 인스타에 니트 광고가 뜬다’ 라는 상황을 놓고 효진님은 알고리즘을 떠올리는데 연재님은 세계의 우연성을 떠올리시는. (웃음) 딱 나눌 수는 없지만 사회적 관점으로 접근하느냐, 실존적 관점으로 접근하느냐 하는 차이가 보이는 것 같아요. 

김민조


2. 건축, 폐허, 자동차

민조

두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서로 고립되어 있지만, 사실 굉장히 말을 하고 싶어하죠. 그래서 혼잣말이나 장광설을 늘어놓고, 부조리극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방식이지만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서로 혼잣말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위장된 대화’ 형식도 즐겨 쓰이는 것 같아요. 가령 <상형문자>에 나오는 산불감시원과 캐셔는 도대체 어떻게 부부로 살아왔나 싶을 정도였죠. 


연재 

그런데 재미있는 건, 저희 공연 연습할 때 배우 분들 중에 부부가 계셨어요. 그런데 산불감시원과 캐셔의 사이가 좋다고 하시는 거예요. 이 정도면 좋은 부부다. (다들 웃음) 


민조 

<머핀과 치와와>에 나오는 자자도 혼자 하염없이 먹방을 보잖아요. 두 작품 모두 인간에 대한 리얼한 관찰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작품 같은데요. 


효진

극작가만큼 인간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이상한 생각이… 계속해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소환해야 하는데, 결국 애정이 없으면 관찰을 할 수가 없잖아요. 가령 저는 택시기사님이 약간 정치적으로 안 맞고 ‘빻은’ 얘기를 해도 재미있게 얘기하면서 가는 편이에요.


민조 

인류학자처럼 택시 안에 들어가서 관찰을 하시는군요.


효진 

그렇지는 않은데… 그 상황 자체가 연극이라고 생각하면 재밌어요. 자기 방어 기제도 약간 있는데 그 사람이 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면 스트레스를 덜 받더라고요.  


민조

연재님은 건축설계도에 관심이 있다고 하셨죠. 얼마 전에 신촌극장에서 공연된 <낙과줍기>도 서술자가 거주하는 아파트가 어떻게 생겼는지 묘사하고 있는데요. 아파트가 네 개의 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가운데에는 중정, 뒤편으로는 숲이 있다는 식으로 관객이 그려볼 수 있도록 시작하는 게 재밌더라고요. 


연재

<낙과줍기>는 검색하면 진짜 ‘태풍 피해’, ‘낙과줍기 봉사’ 같은 결과만 떠요. 희곡 제목을 잘 지어야 하는데… (웃음) 저는 건축 설계, 정확히는 사라진 근대 건축물이나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건축 자재들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어요. 삶 속에서 매혹되는 이미지가 있고 그것에서 글쓰기를 시작할 때가 있는데요, 뼈대만 남은 황량한 건축물이나 창고, 굴뚝, 알 수 없는 버려진 공장 같은 것들에 공간적으로 영감을 많이 받아요.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관심과 연결되는 지점도 있는 것 같고요. 소비재나 자원으로 격하되었던 사물들의 위상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제가 개인적으로 끌리는 물질이 철(金)인데, 길가에 떨어져 있는 철재만 봐도 너무 좋은 거예요. 자연의 바위 속에서 오래전부터 존재해온 것, 채굴되고 용해되고 제련되고 쓰이고 버려지고 다시 부식되는 어떤 것. 아주 단단해 보이는 이 사물이 지니고 있는 광활한 시간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올해 초에 했던 <불완전 운동>이라는 전시에서 아예 철의 이미지만 탐구해보기도 했고, 동상해체공이 나오는 <매립지>라는 희곡을 쓰기도 했어요. 

아, 그리고 의정부 쪽에 가면 강가에 다리 상판은 없고 기둥만 있는 건축물이 있는데 용의 이빨을 닮았다고 해서 용치(龍齒)라고 하더라고요. 원래는 탱크가 못 내려오게 만들었던 군사 시설, 그러니까 전쟁의 흔적인 거죠. 거기에 새들도 앉았다 가고 하는데 군사 시설이다 보니까 지도에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은 거예요. 이름을 잘 알 수 없고 기록되지 않는 시설물들의 지도를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러한 사물들, 버려진 폐허에 대한 관심사가 전면적으로 드러난 작품은 최근에 공연했던 <복도 굴뚝 유골함>이었고요. 미국으로 이주한 아시아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예요. 주인공은 자신을 버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피살된 엄마의 흔적을 찾아다녀요. 창고의 벽돌, 용도를 알 수 없는 사물들, 난간의 페인트, 벽에 발린 회, 지하철 타일, 서울의 동상, 88올림픽 도시미화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시설물들을 단서로 엄마의 삶을 추적하게 돼요.

김연재


효진

저는 건축물은 아니지만 공터나 의미 불명의 토지에 관심이 있어요. 공터에 혼자 남아 있는 자동차나 버려진 사물들에도 관심이 있는데, 예를 들면 길가에 떨어져 있는 신발이나 장갑 같은 게 제 눈에는 잘 보이더라고요. 아기가 신발을 벗어놨는데 엄마가 미처 줍지 못하고 가버린 신발도 있고, 아무튼 영문을 알 수 없는 버려진 사물들의 이미지가 저한테는 강렬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무대 위에 차를 올리는 게 꿈이에요. <7번 국도> 정도의 스케일이 아니면 어려울 수도 있지만요. (웃음)


민조

대학 시절 때 페르난도 아라발의 <자동차 묘지>라는 부조리극을 올린 적이 있는데, 이게 세계대전 이후에 독일군이 남기고 도망간 자동차들을 호텔 삼아서 지내는 노숙자들의 이야기에요. 투숙자와 웨이터의 관계성도 있고, 그 안에서 다시 사회가 생겨나죠. 팀원들이 아버지 차를 끌고 오거나 렌트를 해가지고 학교 주차장에 자동차 극장을 만들었는데, 효진님 말씀대로 황량한 주차장 공간에 자동차만 덩그러니 있으니 묘하게 하드보일드한 느낌이 나더라고요. 


승태

저는 가끔 길 가에 세워진 자동차 사진을 찍어요. 자동차가 그냥 하나의 조각품 같기도 하고, 특히 단종돼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차들의 경우에는 최신 자동차들에게서 잘 느낄 수 없는 특별한 느낌들이 있어요.


효진

저도 해체되기 직전이라든가 더는 달릴 수 없게 된 자동차처럼 기능을 잃은 사물들에 관심이 가는 것 같아요. 다른 세계로 연결되는 그런 느낌들도 너무 좋아서 자동차를 가지고 희곡을 써볼까 고민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3. 호러, 우울, 역겨움

연재

저는 호러 장르와 오컬티즘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요. 정확히는 호러물에서 재현되는 여성의 몸과 공포에 관심을 가지고 ‘여성적 호러’가 무엇일지를 좀 고민하고 있어요. 고전 호러물의 클리셰적 코드들을 모방하고 비틀면서 공포의 감각을 전환하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전통적 공포물에서는 남성 주체의 언어와 법, 공동체를 위협하는 두려운 타자가 여성 비체(非體)의 모습으로 드러나잖아요. 그런데 여성인 저는 저의 몸을 낯선 타자라고 느끼고 공포증을 앓고 비체라고 인식할 때가 있어요. 나의 몸을 향한 공포, ‘나의 암컷 됨’의 공포랄까요. 


민조

여성적 호러에 관한 레퍼런스를 입수하기가 수월한 편인가요?


연재

연극으로는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다만 최근에 했던 <2022 코미디 캠프: 파워 게임> 편에서 배선희 배우님이 공연한 <비행 기술: 토미에 해방의식>이 좋은 영감을 주었어요. 개념적으로는 크리스테바와 엘렌 식수를 참조하려고 하고, 서사물로서는 라스 폰 트리에의 <안티 크라이스트>, 쥘리아 뒤쿠르노와 아리 애스터의 영화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소설들이 레퍼런스가 될 것 같아요. 


효진

저는 요즘에 우울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중적일까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고 있어요. 약간 호러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한데, 본인의 존재를 의심하는 우울감이 어느 정도로 대중한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가 저한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생각인 것 같아요. 우울감이 특별하고 특이한 병적인 증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지 않아요. <넥스트 투 노말>처럼 정신과 치료는 별로다, 이런 쪽의 얘기가 아니라 내가 인간이라는 타이틀로 존재하기 때문에 저질러야 되는 것들에 대한 본연적인 슬픔이 있잖아요. 그걸 공포 연극으로 풀어내고 싶기도 하고, 굉장히 불쾌하고 역겨운 이미지를 주는 작품을 쓰고 싶다는 이상한 욕구가 있기도 해요. 그게 비인간에 대한 관심사와 연결되기도 하고요. 


민조

저희 대화에서 키워드들이 묘하게 지그재그로 실뜨기가 되는 느낌이네요. 요새는 ‘역겹네’라는 말을 유행처럼 많이 쓰기도 하는데, ‘디스거스팅(disgusting)하다’는 것은 내가 감각한 대상이 너무 싫어서 게워내고 싶다는 반응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아까 연재님이 크리스테바의 비체 개념을 이야기하셨는데, 그럼 무엇이 그렇게까지 뱉어내거나 게워내고 싶게 만드는가를 생각해봤을 때 저는 ‘잘못 기능지워진’ 어떤 것을 봤을 때 드는 즉각적인 혐오감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예컨대 저는 동성애 혐오자들이 동성애에 대해 ‘역겹다’고 했을 때 대체 어떤 버튼이 눌리는 것인지 자꾸 상상해보게 되는데요. 남성처럼 생긴 외양과 남성적인 기능의 불일치가 그런 반응을 유발하는 것일까? 싶기도 해요. 


승태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이 생각나네요. 다들 자기만의 체제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데,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나 어떤 이질적인 감각이 거기에 침투해서 들어오면 마치 자기가 세워놓은 방어벽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그걸 다시 내보내고 싶어하는 마음이 역겨움으로 이어지는 것 같고요.


민조

연재님의 <낙과줍기>에서도 갈라진 껍질 틈으로 새어나오는 끈적한 생명에 대한 묘사가 있었죠? 서술자가 그걸 보고 새하얗게 질렸다는 표현도 있었고요. 그 장면을 생각하니까 아까 말씀하신 여성적 호러가 무엇인지 더 이해가 되는 것 같아요. 


연재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이었던 것 같은데요, 저는 종종 ‘자연이 나한테 침투한다’는 느낌을 받아요. 낙과처럼 짓무르고 습한 것들, 이끼나 버섯처럼 슬고 피고 돋고 치고 퍼지는 생명들을 마주칠 때요. 숲에게 잡아먹히거나 몸에 곰팡이가 슬거나 철이 피부를 뒤덮는 상상을 자주 해요. 이런 걸 ‘식물 컬트’라고도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제가 여성이기에 자연이 침투해오는 감각에 무방비하고 예민하다고 생각해요. 신체의 훼손과 변화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그 금기성에 매혹되는 거죠. 끔찍하고 역겹고 잡아먹힐 것 같은 감각, 다른 몸이 되는 일에 대한 두려움과 매혹이 바디 호러나 비체 개념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되었어요. 


효진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몸의 테두리가 얇아지거나 섞이는 것이 중요한 감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탈피>라는 희곡에서 여성성을 염두에 두고 뱀을 연기하도록 지시했던 적이 있어요. 단순히 인간이 동물을 흉내내길 원했던 것이 아니라 구성 요소의 면에서 인간과 동물의 공통성이 굉장히 크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4. 신, 인간, AI

민조

파생되는 얘기들이 많겠지만 ‘신’이나 종교적인 감각에 대한 쪽으로 넘어가 볼게요. 꼭 신이 아닐지라도 인간보다 더 높은 위상을 갖고 있는 존재에 대한 감각이라 해야 할까요. 가령 효진님의 <머핀과 치와와>에서는 인류의 지성적 기능들을 다 가져가 버린 초인공지능 ‘라이카’라는 존재가 등장하죠? 


효진 

저는 신성이라는 게 외부의 다른 존재에 있다기보다는 결국 인간에게서 보이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라이카도 인간을 통합하거나 궁극적인 해답이 되어주지는 않죠. 


승태 

저는 <머핀과 치와와> 읽으면서 <에일리언: 카버넌트> 생각이 났었어요. 외계의 존재가 인간을 만들고 인간이 다시금 AI를 만들었는데, AI가 자기도 무언가의 창조주가 되고 싶어서 결국 에일리언을 만들고 그 에일리언이 다시 인간을 죽이는 연쇄적인 구도. 사실 신이 인간을 만들고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했다면 이제 인간은 신을 부정하거나 배반하는 영역에 와 있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형상을 닮은 AI를 만들어놓고 이 존재가 자기를 무너뜨리거나 지배할까 봐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는데, <머핀과 치와와>에서는 AI가 인간을 대신해서 과연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실존적인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게 저는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효진

맞아요. <머핀과 치와와> 쓸 때도 저한테는 의아했던 게 사람들이 왜 AI를 두려워할까였어요.  두려워하거나 숭배하거나. 사실 공존이라는 개념이 잘 안 보이는 것 같아요. 이미 공존하고 있는데도 말이죠. 기본적으로 우리가 만든 존재들을 약간 격하시켜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고 AI도 ‘갑자기 나를 죽일 수도 있는 노예’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신과 인간의 구도랑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네요. 


민조

논문에도 썼지만, 라이카는 초월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상대하는 인간에 따라 수준을 맞춰주기 때문에 그때그때 인간과 다른 관계를 맺는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가령 자자처럼 라이카를 하인처럼 부려먹는 인물이 있고 라이카가 거기에 군말없이 맞춰주죠. 그렇게 AI가 신이기도 하고 반려동물이기도 하고 서비스 로봇이기도 한, 복합적인 위상으로 나타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재미있는 설정이었어요.  


승태

라이카라는 이름을 붙여준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효진

라이카는 러시아가 우주에 쏘아올렸던 강아지 이름이에요. 인간을 위해서 희생된 다른 종들을 대표하는 존재의 이름을 AI에 붙인다는 것 자체가 저는 이 세계관에 어울리는 기괴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중앙 라이카는 작품 내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데요, 작중 배경인 F구역 사람들은 (개인용으로 보급된) 라이카를 수준 낮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작품 내에서는 라이카가 기가지니나 시리 같은 존재처럼 보이도록 만들었죠. 사람들은AI가 작품 내에서 조금만 우월하게 등장하면 인간의 적으로 인식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 발에 치이는 인공지능 정도로 설정해놔야 되겠다 싶었어요. 

신효진


승태

최근에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AI들도 나오고 있고, AI로 그림을 그리고 문장을 만드는 일도 가능해져서 정말 AI가 SF가 아니라 현실의 영역으로 성큼 다가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시험삼아 해봤는데, 햄릿을 연기하는 배우를 그려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려놓은 거예요. 해골의 이미지와 배우의 이미지, 로렌스 올리비에나 그동안 유명했었던 햄릿 배우들을 조합해서 이렇게 제시를 하고 있는 수준인 거죠. 재밌어서 더 해보려고 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결제를 하라고. (웃음)민조돈을 이렇게 벌어야지. (웃음)


효진

일러스트를 그려주는 AI에게 연어를 그려달라고 했더니 먹을 수 있게 썰려 있는 연어만 그릴 수 있더라고요. AI는 사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정보를 조합하는 건데, AI가 어떤 종을 식재료로만 인식한다는 것은 결국 살아있는 연어의 이미지보다 먹는 연어의 이미지를 사람들이 훨씬 많이 찾고 소비한다는 뜻이잖아요. 그게 너무 기괴했어요. 


연재

제가 쓴 작품에서 인간과 위상이 다른 존재가 등장하는 장면이 하나 기억났는데요, 2018년에 공연한 <우리가 고아였을 때>라는 작품에서 고립되어 있는 아이가 밤마다 커다란 그림자를 보면서 자신을 구원하거나 벌하러 온 신이라고 상상을 해요. 그런데 사실 그 존재는 쥐의 그림자였어요. 저의 작품들에는 기독교적 신의 형상과 그것의 빈자리가 있어요. 절대자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절망 같은 거요. 태초, 기원을 망각한 자가 신을 그리워하며 구원을 기다리는 정서가 있는 것 같아요.


5. 분해, 쓰레기, 침투

효진

예전에 어떤 그림을 본 적이 있는데, 불교 사상을 믿었던 중국의 왕비가 자기가 죽고 나면 장례를 치르지 말고 죽어서 분해되는 과정을 그림으로 그려서 꼭 후대에 남기라고 주문을 한 거예요. 이 몸이 얼마나 의미가 없는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죠. 그림을 보면 처음에는 구더기가 끓고, 그러다가 정말 금방 분해가 되더라고요. 마치 자동차가 흔적도 없이  자연에 삼켜지는 것처럼요. 그림을 보면서 인간의 몸이 기계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조립되고 분해된다는 감각이 인간에게도 있다. 


연재

저한테 강렬한 기억이 하나 있는데요, 겨울에 등산을 갔었어요. 그런데 그 산에서 제가 처음으로 공황이 온 거예요. 제 몸의 테두리가 사라져서 이 산에 막 잡아 먹힐 것 같은 느낌? 제 감각이 너무 날카롭게 곤두서서 지나치게 주변이 잘 보이는 거예요. 바위를 보면 다닥다닥 알갱이가 붙은 게 너무 잘 보이는 식으로요.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제가 했던 행동이 앞에 가는 사람의 비닐 봉지를 보는 거였어요. 그 비닐 봉지가 저한테 안도를 주더라고요. 투과되지 않는 비닐의 성질이 나의 테두리를 지켜준다는 감각. 내 몸이 분해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나무 같은 자연물은 너무 다른 모습으로 섬세하게 자라잖아요. 그런데 비닐이나 옷 같은 인공물을 봤을 때는 그렇지 않은 거예요.


민조

두 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문득 플라스틱의 물성에 대해 생각하게 됐는데요, 플라스틱은 투과시키지 않는 인공물이면서 가소성이 높은 재료잖아요. 요새 제작되는 ‘만족감을 주는 영상(satisfying video)’들을 보면 사람들은 자기 형태를 갖고 있었던 사물이 아름답고 깔끔하고 조용하게 분해되는 모습에서 쾌감을 느낀다는 생각이 들곤 해요. 어떤 형태로든 성형될 수 있다는 점에서 플라스틱은 유연한 분해에 대한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재료로 선망받는 것 같고, 반대로 1980~90년대 시절에는 인간적인 것을 흉내내는 싸구려 모조품의 상징으로서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죠. 


승태

그래서 지금도 ‘플라스티키(plasticky)’라는 형용사는 싸구려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죠. 


효진

저는 쓰레기에도 오랫동안 관심이 있었는데요, 페허의 모습과는 다르게 쓰레기더미는 뭔가 ‘투머치한’ 느낌이 있잖아요. 매립장이나 쓰레기로 가득한 도시처럼 정말 끔찍할 정도로 많은 물건들이 쌓여 있는 모습이 제게는 이상한 충격을 주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죽은 사람이 사용하던 사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재밌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 경우에는 쓰레기라고 생각하지 않고 죽은 사람이 남긴 고유한 물건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죠. 결국 물성이라는 개념도 인간이랑 만나서 생기는 것이 아닌가 싶고요.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정말 기상천외한 쓰레기들이 많이 보이는데 저는 그런 쓰레기들을 통해서 남들이 나한테 침투한다는 감각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나는 알고 싶지 않았는데 이 사람이 뭘 쓰다가 버렸는지를 알아버리게 되니까요. 


민조

보고 싶지 않은 남의 내장을 보는 느낌?


효진

네. 쓰레기가 결국 집의 내장 같은 거잖아요. 그리고 망가진 인간들이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습성이 있다는 사실도 제게는 흥미롭게 느껴져요. 집안에서 함께 쓰레기화되어서 사는 것인데, 저도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것 자체가 힘들 때가 있거든요. 결국 집안에 방치된 쓰레기들이 나를 덮치고 침투해온다는 느낌을 받아요. 


승태

요새는 버리스타라는 말도 있지요. 코로나 때문에 배달이나 택배를 시키는 일이 늘었고 박스 같은 포장재 쓰레기들이 엄청나게 많이 나오다보니, 그걸 버리는 일도 점점 전문화되고 있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런데 사실 내 공간에서 이 쓰레기들을 빨리빨리 치우는 게 과연 잘하는 일인가, 이게 과연 어디로 가는 걸까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일회용품이나 각종 비닐용품 등을 안 쓰려고 하면 또 뭔가를 갖춰야 하고, 그렇게 누군가가 생산을 계속하고 누군가가 소비를 하고 누군가는 그걸 치워야 하는 경제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점을 체감하고 있어요. 


- 2부에서 계속됩니다. 

녹취 및 정리: 김민조
사진: 임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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