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7일 토요일

빛: 육체를 과묵히 관통하는 처음과 나중

조혜인


에릭 아르날 부르취(Eric Arnal-Burtschy)는 빛이 수행자로서 무한함을 환기하는 방식으로 <빛 퍼포먼스: 심연의 숲>을 고안하였다. 그리하여, 무한으로부터 상기할 수 있는 삶과 죽음의 경계로 관객을 초대한다. 공연장에 입장하기 전에 관객은 자기 신발을 벗는다. 그리고 입구 바닥 정사각형들이 분할된 형태로 구역을 이루고 있는 곳에 가지런히 놓는다. 이는 마치 무덤 혹은 납골당을 환기하며 신발이 벗겨진 상태는 가장 원초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즉 더 이상 삶이 지속되지 않을 때로 상정할 수 있다. 관객이 벗어놓고 간 신발로부터 마르틴 하이데거(M. Heidegger)의 존재론적 관점이 떠오른다. 하이데거는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구두>(1886)를 분석하며, 낡은 구두를 통해 농촌 여인의 고단한 삶이 탈은폐(Aletheia)되고 있음을 고찰한 바 있다. 본 공연에서 벗어놓은 관객의 신발 또한 마찬가지다. 신발은 무(無)가 아닌 ‘존재’이며, 신발 주인의 인생을 함축한다. 관객의 신발은 그들 스스로에 대해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상징’이다.


이러한 신발 벗기 행위와 공연장으로의 입장은 장례 절차를 상기시킨다. 신발을 벗고 공연장에 들어감으로써 관객은 삶과 죽음 사이에 자신을 위치시키게 되고, 바닥에 누워 고요 속에서 자기 몸을 관통하는 빛을 경험한다. 공간은 온전히 빛만이 존재하는 상태로, 사면이 막혀 있는 블랙박스가 아닌 영원히 확장되는 우주와도 같고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빛줄기는 마치 이승 저편에 있는 어떠한 세계처럼 감각된다. 빛 줄기는 제리 주커(Jerry Zucker) 감독의 영화 <사랑과 영혼>(Ghost, 1990) 엔딩에서 등장하는 저승으로 가는 찬란하고도 밝은 입구처럼, 쉽사리 가 닿을 수 없는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낯선 초대 앞에서 이승에 대한 미련이 소멸하는 것 같이, 관객들은 그 빛에 손을 뻗어 보기도 하고, 소실점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보기도 한다. 촉각으로 결코 감각될 수 없는 빛에 대한 육체적 갈망은 커져만 간다. 빛은 과묵하게 관객의 몸을 관통할 뿐이다. 반면에, 편안과 평온의 한 지점에서 관객은 계속 누워있는 행위를 선택하기도 한다. 관객마다 빛을 맞이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그 빛에 자기 육체를 기꺼이 내어준다는 점에서 빛과 모종의 관계를 맺는다.


어둠 가운데에서 발산되는 빛과의 만남은 수면 행위와도 연관된다. 필자는 빛의 수행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졸음을 느꼈다. 지루해서도 아니고, 그 누구도 ‘출연자’로 명명된 채 스펙터클에 대한 충실한 재현이 부재해서도 아니었다. 본 공연이 구축해놓은 환경에 온전히 몰입되어 공연장 밖의 소란에서 해방되는 감각이 느껴질 때, 육체적 나른함을 맞이한 것이다. 수면은 매일 맞이하는 작은 죽음이다. 공연장 안에서도 이러한 순간의 죽음을 체험한다. 저 빛 앞에서 말이다. 짧은 죽음의 시간 동안에도 여전히 빛은 육체를—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강렬하게—쓰다듬는다. 이러한 경험의 근간에는 관객이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침묵, 가장 편안한 자세, 빛과의 접촉’을 수행함이 있다. 이 지점이 바로 <심연의 숲>이 가진 미적 유효함이다. 특정한 시간 동안 특정한 리듬과 템포를 가진 빛은 관객의 실제적 감각을 자극하여, 삶과 죽음이라는 문지방 영역에 놓인 관객을 행위자가 되게 한다.


필자는 이 공연의 공간성(Räumlichkeit)에 주목한다. 에리카 피셔-리히테(Erika Ficher-Lichte)는 공간성에 관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간성 역시 찰나적이고 단기적이다. 공간성은 공연 전이나 후에 존재하지 않고 (…) 공연 중에, 공연을 통해서 존재한다” (Ficher-Lichte, 240). 블랙박스와 빛, 그리고 관객은 찰나적이고 순간적인 공간성을 형성한다. 관객이 빛으로 인해 행위하기 시작할 때, 공간은 변주를 거듭한다. 빛을 향한 관객의 발걸음 소리, 빛에 닿는 관객의 서로 다른 신체 일부들은 블랙박스가 수행적 공간임을 나타내준다. 빛과 ‘관객’이라는 또 다른 행위자 사이의 관계가 맺어지며, 관객이 이러한 빛을 지각하는 방식에 의해 공간성이 창출된다. 즉, 같은 빛을 보더라도 관객의 지각 경험에 따라 공간성의 다양한 양태들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관객은 빛을 통해 무엇을 보았을까? 관객은 빛을 만져보는 행위를 통해 무엇을 경험하고 싶었을까? 관객은 이 빛 자체를 무엇이라고 느꼈을까? 김일송은 이 공연의 리뷰에서 “태초에 빛이 있으라 했고, 그 빛이 보기에 좋았다. 빛과 어둠, 침묵으로 충만하다”(김일송)라고 씀으로써 본 공연의 빛을 태초 즉, ‘처음’과 연결지었다. 반면에, 필자는 이 빛을 통해 천국의 문, 즉 ‘가장 나중’을 상상한다. 저 빛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세상의 삶 이후에는 또 다른 삶이 있을까? 죽음이라는 과정이 본 공연에서 시시각각으로 느슨해지는 육체적 과정처럼 정말로 편안한 것일까? 구약성서 전도서에는 다음과 같은 서술이 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12:7, 개역개정). 이 서술은 지혜자가 청년에게 전하는 말이다. 죽음은 인생의 가장 확실한 사건인데, 삶은 인생의 가장 불확실한 사건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 가장 불확실한 삶의 순간은 공연장에서도 이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기억하게 하는 빛이 사라지면 관객과 공연장은 함께 허무한 태초의 상태로 돌아온다. 관객은 신발을 다시 신고 나가 각자의 삶을 이어 나간다. 본 공연에서 선사한 ‘처음과 나중’은 삶을 관통하고, 수없이 많은 문을 열어가며 살아야 한다는 통찰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 마지막 문은 천국의 문이 될 수도 있다는 직관이 스쳐 지나간다.


인용문헌


Fischer-Lichte, Erika. 김정숙 옮김. 수행성의 미학. 문학과지성사, 2018.

김일송. “연극in 꽃점”. 2022. https://www.sfac.or.kr/theater/playinfo_list.do 


공연 정보


<빛 퍼포먼스: 심연의 숲>

연출: Eric Arnal-Burtschy

관극 일시: 2022-10-29 18:00

장소: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https://theater.arko.or.kr/product/performance/257838


필자 소개


조혜인

퍼포먼스와디자인사이언스연구소 연구원. 실험극과 노원구의 로컬예술에 관심이 있다. 딱히 밝은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휴머와 갬동을 좋아한다.

누가 보려나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누가 분명 보고 있는 브런치 퍼포먼스 매거진을 운영한다.

https://brunch.co.kr/@hichothea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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