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1일 수요일

15년을 살아 낸 <휴먼코메디>

by 산책


휴먼코메디 (c)사다리움직임연구소 2013.
출처: 코르코르디움 블로그 http://corcordium.tistory.com/

  한 해 동안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극장에 갔다. 신선하고 기지가 넘치는 공연에 감탄하고, 조금은 질투심을 느끼며 넉넉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 온 적도 있고, 희곡에 감동받은 적도 있고,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에,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린 적도 있다. 괜히 친구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가 무척 미안한 적도 있었고, (본인은 한 번 해 본적도 없으면서) 연출을 욕하고 싶거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공연도 물론 있었다. 모아 둔 표와 프로그램을 꺼내 보고, 깜깜한 공연장에서 뭐라도 써 보려고 끄적거렸던 노트의 기이한 문자들을 해독하면서 올 한 해를 돌아보니, 나름 재미있다. 연극은 책이나 영화처럼 돌려 볼 수 없고, 같은 작품을 여러 번 보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을 때가 있다. 두 눈과 두 귀로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 움직임을 다 보고 들을 수 없고,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처럼 순간적으로 한 장면이, 그 공연이 지나가버린다. 어떤 인상만을 남기고.

   올 한 해 가장 재미있게 본 연극은 지난 7월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휴먼코메디>이다. 정말 신나게 웃었고, 배우들의 연기에 감탄했다.  <휴먼코메디>는 <가족>, <냉면>, <추적> 이렇게 세 가지 짧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가족>은 하나 남은 아들이 배 타러 가는 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보여준다. 아들이 죽을 것을 예상하기나 한 듯이 갑자기 가족 사진을 찍고, 아들이 떠나는 시간을 자꾸 미루기 위해서 밥을 먹이고, 사건을 만들어 내는 과정 중에 소소한 웃음이 만들어 진다. 두 번째 이야기인 <냉면>은 노래 경연대회에 참가한 한 팀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노래와 안무를 외우지 못한 소위 ‘구멍’멤버가 계속해서 동작을 놓치는 모습을 통해 웃음을 유발한다(조금 더럽긴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웃을 수 있다). 마지막 <추적>은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경찰청 사람들을 패러디하며 모텔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과 스캔들 등이 얽히면서 진행되는 이야기이다.



  세 이야기 모두 무엇인가 어긋나면서 웃음을 만들어 낸다. 한 걸음 떼는 데에도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한 발 잘 못 내딛어 무대를 순식간에 가로질러 버리는 할아버지의 모습이나, 저 여배우의 배에 들어 있는 것이 스펀지가 아닐 것이라고 애써 믿어주는 관객들의 노력을 무시하고, 남편을 안기 위해 배를 엉덩이로 돌려 버리는 장면 (<가족>), 노래를 따라가지 못하고, 율동을 놓치고, 결국 코로 나온 냉면을 혼자 먹어야 남자의 안타까움(<냉면>), 6명의 배우가 14명을 연기하면서 (약속된 것이지만) 서로 역할을 헷갈려 하는 모습이나, 반복되면서 조금씩 어긋나는 사건(<추적>)은 모두 관객들을 웃게 한다(사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웃음은 훨씬 많다. 그러니 <휴먼코메디>가 또 공연된다면 꼭 보러 가시길!).
 
  지난 7월 처음 이 작품을 봤을 때 나는 박장대소를 했다. 기립박수를 친 관객도 기억난다. 대학로에서 재공연을 한다기에, 또 한 번 실컷 웃고 오고 싶다는 욕심에 예매를 했다. 그러나 반복된 경험이 첫 번째와 같을 수 없는 것은 어떤 일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두 번째 관극 때는 처음처럼 순수하게 웃지는 못했다. 도리어 생각은 많아 졌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웃을까? 또 왜 웃을까? 베르그손은 경치가 아름답거나, 단아하거나, 장엄하거나, 평범하거나 보기 흉할 수는 있지만 결코 우스꽝스러울 수는 없다고 설명하며 희극성은 언제나 인간적인 것 안에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인간적인’이라는 말에 포함된 헤아릴 수 없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웃음이 얼마나 복잡하고, 부조리한지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자꾸만 어긋나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낄낄, 때로는 실실 웃지만 한편 찝찝하고 슬픈 마음도 든다. <가족>에서 아들의 출발을 지연시키기 위해 가족들이 벌이는 해프닝은 우리를 웃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아들이 대문을 나서면 죽게 될 것임을 알고 있다. 아들이 동그란 창문에 끼어서 오도가도 못한 채, 한 손에는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씨익 웃고 있었다는 친구의 진술에 가족들은 슬며시 웃음을 짓는다. 우리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을 수 있는 것일까?

(c) 사다리움직임연구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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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먼코메디>가 1999년 초연되었다고 하니, 무려 15년을 살아 남았다. 이제 어떤 관객들은 “경찰청 사람들”을 전혀 알지 못할 것이고, 모텔 로비에 놓인 공용 전화기를 사용하려고 애쓰는 인물들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웃음을 만들어 내는 중요한 지점인데, 이것이 납득되지 않을때, 작품의 희극성은 일부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시간은 무엇인가를 낡은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지난 7월 백원길 배우와 조재윤 배우를 비롯한 초연배우들의 무대를 보는 행운을 누렸다. 공연과 함께 15년을 살아 남은 초연 배우들은 무대에 꼭 맞았고, 관객과 무대 위의 시간을 가지고 놀았다.  나는 그때 감동을 받았고, 또 멋있다고 생각했고, 덕분에 많이 웃을 수 있어서 무척 감사했다. 대학로에서 젊은(?) 배우들을 만나고 나니, 지난 번 관극이 행운이었음을 다시 느끼게 된다(자신이 무대를 정말 사랑하고, 관객과 소통하면서 큰 힘을 얻는다고 말해주었던 백원길 배우를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휴먼코메디>가 계속 공연되고, 공연되고, 시간이 흐르면, 지금의 배우들도 꼭 맞은 옷을 입은 것 같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그들의 공연을 본 것이 행운이 될 것이다. 시간은 무엇인가를 낡게 만들지만 동시에 깊게 만든다. 이렇게 시간은 우리를 살아 내게 하는 것 같다.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언제부턴가 시간이 흐른다는 것에 엷은 슬픔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안도감을 느낀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이 가버리지만, 일 년이라는 시간을 또 한 번 잘 견디어 냈고, 새로운 시작과 결심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년에도 열심히 보고, 열심히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