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22일 금요일

‘간혹’ 가능한 것들을 향한 믿음: 극단 풍경 ⟪간혹, 기적을 일으킨 사람⟫의 원작, 브라이언 프리엘 ⟪Faith Healer⟫에 대하여


이예은

  언젠가 드라마-인에 김현탁 연출의 작품을 드라마투르기하면서 관객의 입장으로 돌아가 작품 비평문을 기고한 적이 있다. 이 글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맥락의 글이다. 최근에 번역 및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한 한 공연을 통해 역으로 공연 작품의 원작에 대해 새로이 발견한 생각들을 정리하는 글이다. 희곡을 공연으로 세우는 과정 안에서 경험했던 자기 반성적 질문들과 그 질문들을 통해 다시금 발견한 희곡에 대한 새로운 발견들을 정리하며. 

  비평할 작품은 극단 풍경의 박정희 연출이 각색한 ⟪간혹, 기적을 일으킨 사람⟫의 원작인 브라이언 프리엘의 ⟪Faith Healer⟫이다. 프리엘의 작품은 진실과 허구, 그 사이 어딘가 쯤에서 각자 웅크리고 앉아서는 한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움직이지 않는 시선들로 가득하다. 특히 ⟪Faith Healer⟫는 이렇게 각자의 작은 무덤들 속에 고여서 나름의 구원을 내다보는 세 인물의 입김과 체온이 섞여 이러 저러한 파문을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하는 작품이다. 

⟪Faith Healer⟫는 동일한 현실을 공유한 프랭크, 그레이스, 테디 세 인물이 그 현실을 서로 다른 무게 중심을 지닌 기억들로 재편해 가는 과정이다. 이들의 기억 속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소재만 동일할 뿐 그 크기와 질감, 온도, 앵글은 제각기 다르다.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의 무대 위에 세운다면 무대는 아마도 기형적인 그림이 될 것이다. 그래서 프리엘은 이 세 명의 이야기를 각기 홀로 등장케 하는 형식을 택한다. 원작은 프랭크. 그레이스, 테디, 프랭크의 순서로 각각의 인물이 홀로 등장하여 자신의 기억을 발화하는 장면으로 연쇄된다. 하나의 무대 위에서는 함께 지속될 수 없는 저마다의 균열된 이야기일 것이나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허락된 고독한 무대 공간 위에서 이들 각자는 스토리텔링이라는 고백적 양식으로 관객에게 자신의 진실성을 호소한다. 우리가 믿는 모든 진실이란 한 데 모아 놓고 보면 이토록 기형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혹은 각자가 호소하지만 전모를 들여다보면 기형적인 것이 되는 진실이라는 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진실의 본성 혹은 진실의 존재 여부를 질문케 하며 이 작품이 표면적으로 집중하는 것은 오히려 진실보다는 균열이다. 그러나 균열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 작품이 정작 질문코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또 다른 진실의 영역이다. 허구적 기억이 가진 진실의 가치에 주목하며 프리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실을 발설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방식이다. 그렇게 발설된 진실은 그 어떠한 것보다도 중요하고 가치 있다. (공연 전단 드라마투르그의 글에서)

  이 세 인물은 어쩌면 끝내 한 곳에 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평생을 산다. 그러나 이 세 인물이 결국에는 가 닿아 보려고 힘을 다해 쏟아내는 믿음, 그 지향의 강도는 팽팽하다. 이들이 각자 지니고 있는 믿음의 방향은 상이하지만 그 지향의 강도는 동일하기에 결국 이 세 인물은 한 보도 나아갈 수 없는 곳에 머무르고 만다. 그렇다, 이들은 철저히 머물러 있는 상태로 평생을 고군분투한다. 지극히 가까운 동반자의 지향이 나의 그것과 다른 방향에 있을 때, 그러나 그와 나는 헤어질 수 없는 애착의 관계에 있을 때 우리는 마치 한 보도 나아가지 못하는 곳에서 서로를 욕망함과 동시에 자아를 꿈꾸게 되는 상태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들은 평생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유랑하지만 결국 꿈쩍 않고 부동하는 시간대를 산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프랭크와 신의 관계, 그리고 그레이시와 프랭크의 관계 또한 그러하다. 프랭크는 신을 좇아 유랑하고, 그레이시는 프랭크를 좇아 유랑하지만 결국 이 둘은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정박 당한 시간을 사는 것이다.   

  원작을 읽었을 때 이 작품은 하나의 세계 안에 공존하는 이질적인 힘들의 팽배하는 운동성으로 다가왔다. 하나의 세계는 서로 다른 힘들로 구성되어 있어 그 전모가 기형적으로 보이나, 그와 동시에 그 힘들은 서로 다른 힘들이기에 또한 서로를 벗어날 수 없다. 어쩌면 그 전모가 기형으로 판명되는 것은 사실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 이상적인 화합을 이루기를 기대하는 우리의 순수한 기대 탓이리라. 서로가 서로를 반사하며-나의 존재가 너의 존재를 반사하고 나의 믿음이 너의 믿음을 반사하며- 만들어내는 다면적인 입체 조형이 우리라는 ‘예기치 못한’ 한(≠‘기형적인’) 공동체를 구성하고 그 구성 안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게 깔려 있는 힘이 발견될 때, 혹은 보이는 것 너머의 힘이 발견될 때 비로소 진실이라는 것에 대해 말하게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진실이라면, 진실은 허구와 대립하는 항목이 될 수 없다. 허구와 허구 사이의 균열들 그 너머에 있는 것, 혹은 그 아래에 깔려 있는 것, 혹은 그 전체를 감싼 것. 물질이나 언어로는 증명할 수 없으나 그 이상 혹은 이면의 것으로 체감할 수 있는 것. 

  원작 ⟪Faith Healer⟫는 아닌 척 하고 있지만 말 그대로 'faith', 즉 신 혹은 신적인 것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들 사이의 허구와 허구와 허구를 바라보면서 결국 인간과 인간 그 이상의 차원에서 가능한 어떤 진실을 바라본다. 프랭크가 자기 자신에게 기대했던 것, 그레이스가 프랭크에게 기대했던 것은 모두 인간과 인간 그 이상의 차원에서 가능한 어떤 진실이었다. 독백으로 진행되는 프랭크, 그레이스, 테디의 균열된 이야기들을 소환하여 결국에는 그 너머의 진실을 바라보려 하는 이 작품의 구조(형식)는 결국 인간의 가시 영역을 넘어서 어떠한 다른 차원에 다다르고자 하는 이 작품의 주제와 합치된다.     

  공연 ⟪간혹, 기적을 일으킨 사람⟫은 원작을 ‘개별적 기억들의 균열’에 의거한 ‘총체적 진실의 부재’로 읽는 것에 집중한다. ‘각자는 자신의 뇌의 편향성에 따른 기억에 의존하여 산다’ 고로 ‘기억을 담보로 한 존재들 사이의 화해는 불가능하다’ 고로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결론으로부터 시작된 연습 과정에서 진실과 허구는 양분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이상하게도 그 이야기는 논리를 가지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진실과 허구는 대립 항이 아니라 서로 차원을 달리하면서도 상호적이고 연쇄적이며 개방적이고 동반자적인 관계를 맺어가는 화두들이기에 논리를 빌린 언어 구조로는 호소력 있게 설명될 수 없다. 진실과 허구는 끊임없이 상이하면서도 지침 없이 서로를 포섭하는 예기치 않은 관계인 것이다. 

  연출자와 함께 원작의 제목을 ‘간혹, 기적을 일으킨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수정하며 무엇보다 ‘간혹’이라는 단어에 맺힌 절묘함에 기뻐했던 그 순간에는 돌이켜보니 그러한 기대감이 있었다. ‘간혹’ 어떠한 순간에는 진실과 허구가, 인간과 인간이, 인간과 신이 빗겨가지만은 않으며 그 순간이 ‘간혹’ 있는 이상 많은 순간에는 진실과 허구가, 인간과 인간이, 인간과 신이 어떠한 식으로든 서로를 욕망하거나 체념하리라는 이 모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간혹’이라는 단어에는 어느 것도 편들지 않는 무심함이 있어서 좋았다. 알 수 없는 미래가 비로소 과거가 된 이후에나 말해질 수 있는 겸허한 회고의 무심함. 사실 이 ‘간혹’이라는 화두 안에 깔린 것들, 상이한 것들이 부딪치지 않을 수 있는 경지에 대한 고요한 믿음, 그 믿음을 가능케 하는 기다림과 고독, 그리고 겸허함과 항구함은 내가 요즘 가장 치중하고 있는 가치이기도 하다. 연극이 만들 수 있는 진실, 예술이 만들 수 있는 진실, 예술을 전하는 강의와 논문이 만들 수 있는 진실, 나아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진실, 존재가 만들 수 있는 진실, 진실이 만들 수 있는 진실. 이러한 것들이 진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그것이 고작 (혹은 무려) ‘간혹’ 실현될 수 있는 것에서부터 나오며 바로 그러한 세밀한 맥락에서 나는 ‘진실’이라는 단어를 단단하게 발음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가, 글은 다 끝나가지만 이 글의 초점은 여기에 있다. 진실이란 왜 발설되기 어려운가.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는 힘의 정체는 무엇인가. 발설되기 어려운 진실을 발설하는 일에 대해서. 아니 그 일의 효력에 대해서. 사실 이 질문은 작품을 읽고 바라보고 세워내려 하던 과정에서 독자로서 관객으로서 드라마투르그로서 고뇌한 것이지만 동시에 작품 안에서 프랭크와 그레이시가 고뇌한 질문과 동일하다. ‘간혹’ 존재할 수 있는 진실로부터 발휘될 수 있는 효력은 진실의 편을 옹호하는 호소력이나 진실의 편을 부정하는 폭력으로 환원될 수 없다. 단지, 간혹 깊어질 수 있는 개별자들의 내면과 만나는 질문의 형태로 공유될 뿐이다. ‘간혹’ 가능하기도 한 것이라는 진실의 정체성이 곧 그 효력을 발생시키는 형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실의 정체성이 진실 나름의 형식으로 공유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프랭크의 신을 향한 믿음이기도 했고, 그레이스의 프랭크를 향한 믿음이기도 했던 그것-이 바로 원작의 제목에 놓여진 'faith'의 의미이다. 프리엘의 ⟪Faith Healer⟫는 진실이 가진 가냘픈 내면과 형식의 흐름을 조용히 따라가는 가운데 그 주변을 유랑하는 이들의 애타는 삶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작품이다. 여기에는 진실을 호소하는 힘도, 진실을 부정하는 힘도 없다. 단지 어떠한 가녀린 가능성에 대한 지향이 있을 뿐이며, 그 가능성을 향한 마음이 끔찍이도 열렬할 뿐이다. 

2017년 6월 11일 일요일

셰익스피어 일러스트 소극장

임승태

희곡은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이름난 작품들도 막상 책을 펼치면 쉽게 읽을 수가 없다. 좋은 소설은 ‘단숨에 읽었다’,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라는 독자들의 반응을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희곡은 그렇지 않다. 나만 이런 경험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하도 명성 있는 작품이라 마냥 안 읽고 버틸 수 없어서 드디어 책을 펼쳤다가 1막을 겨우 읽고 서둘러 인터미션을 가지는 그런 경우 말이다.

등장인물이 많고 플롯이 복잡할수록 이런 문제는 심각해진다. 소설도 희곡도 모두 작가의 머리 속에서 구상한 결과이지만, 소설가가 서술자를 통해 인물의 겉과 속을 두루 우리에게 알려주는 반면, 극작가는 철저히 인물의 겉만 다룬다. 우리는 희곡을 읽을 때 인물이 내뱉는 말을 통해 각 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욕망을 품는지 추측하고 상상해야 하는데, 작품을 처음 읽을 땐 이 작업을 하다가 이내 머리에 과부하가 걸리기 십상이다. 심지어 누가 누구인지조차 입력이 쉽지 않은 경우도 많다. 셰익스피어의 사극이나 체홉 같은 러시아 작가의 작품처럼 등장인물 목록(dramatis personae)에 쓰여진 이름과 장면에서 사용되는 이름이 제각각일 경우엔 더욱 그러하다.

그게 희곡이다. 웬만큼 훈련받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한 번에 작품의 진가를 충분히 파악하는 건 여간 어렵지 않다. 어쩌면 처음 읽었을 때 다 파악되지는 않더라도 어딘가 강렬한 힘이 느껴져서 다시 읽고 싶어진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희곡은 많은 것이 비워져 있고, 또 감춰져 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희곡의 활자는 매번 배우들의 말과 몸짓을 통해 독특하게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희곡을 쉽게 읽는 비법이 있을까?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지금껏 내 경험상 희곡은 소설이나 영화와는 달리 스포일러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물론 나는 소설이나 영화도 재탕 삼탕에서 진정한 맛과 멋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지만, <식스 센스>를 보고 나오는 길에 극장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결말을 외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영화가 정말 좋은 영화라면 결말을 다 알고 봐도 재미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어쨌거나 희곡은 이런 점에서도 시에 더 가깝다. 한번 읽고 좋지 않은 시가 있을 수는 있어도 좋은 시를 한번만 읽지는 않는다. 좋은 희곡은 줄거리, 플롯, 인물, 결말 등을 다 알고서 읽어도 흥미롭다. 아니 알고 봐야 특정 상황에서 특정 인물이 내뱉는 대사의 적절성과 탁월함을 비로소 느낄 수 있다. 리허설은 수개월 동안 이 과정을 반복하는 작업이라서 그런지 한창 리허설 중인 배우들은 그 희곡의 아주 세밀한 부분에까지 매료되고 공연이 끝나고 한참 지난 후에도 예전에 했던 공연의 대사 한 토막을 가지고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한다.

읽고 또 읽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초행길에는 가이드가 함께 하는 것 또한 유익하다. <셰익스피어 일러스트 소극장>은 스스로 표방하는 바 “위대한 작가의 대표작이 한눈에 펼쳐진다”는 말을 제법 실현하고 있다. 이 책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역사적 배경, 작가의 전기 및 당시 공연장 환경 등 셰익스피어를 읽는 데 유용한 기본 정보를 시작으로 그의 주요 작품을 역사극, 비극, 희극 순으로 소개한다. 개별 작품으로 들어가면 작품 소개를 간단히 한 다음, 등장인물과 줄거리가 깨알같은 일러스트와 함께 제시된다. 그림책의 특성상 이 책은 어린이 청소년용으로 분류되겠지만, 이 정도 내용이면 대학생이나 성인 독자들에게도 꽤 유용할 것 같다. 이 책에 소개된 셰익스피어 작품 중 4대 비극과 <로미오와 줄리엣> 정도를 제외하면 책 좀 읽는 독자들이라도 이런 다이제스트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읽다보면 의외로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작품들에서도 새롭게 느껴지는 세부 사항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어떤 경우에는 무대 밖에서 일어난 사건을 요약적으로 정리하다보니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설명들도 있다. (그럴 때에라도 찰스 램의 <셰익스피어 이야기>보다는 원작에 가깝다.) 예를 들어 <리어 왕> 항목에서 “코딜리어는 감옥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된다”는 문장은 오독의 소지가 있다. 한 문장으로 써야 한다면 나는 이렇게 쓰겠다. “코딜리어는 감옥에서 몰래 처형된다.”  

여전히 더 좋은 셰익스피어 번역이 필요하다. 그런데 최근 급증한 번역서의 양과 질을 고려한다면 이제는 이런 입문서가 더 확충될 차례가 온 것 같다. 다른 작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이 책의 저자 카롤린 기요(Caroline Guillot)가 올해 동일한 컨셉으로 <몰리에르 일러스트 소극장>을 프랑스에서 출간했다고 하니, 이 또한 우리 서점에서 보게 될 날을 기다려 본다.


<셰익스피어 일러스트 소극장>
카롤린 기요 지음, 김자연 옮김, 클, 2017.




덧붙임) 출판사에서 출간 기념으로 종이 인형을 부록으로 끼워준다. 인물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일러스트 종이 인형을 무대에 직접 세워볼 수 있고, 다른 작품 속 인물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도 있는 흥미로운 선물이다. 다만 기왕 무대에 세울 수 있도록 하려면 삽화 중 글로브 극장 이미지를 함께 제공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드윅 홀이 선택된 것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