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13일 월요일

뜨거움의 ‘형식’, 혹은 형식의 ‘뜨거움’에 대해서 : 오태석 작, 김현탁 각색/연출 <자전거>

이예은의 푼크툼 너머에

어떤 정의할 수 없는 경계에 서서 작품을 바라본다는 건.
작품의 안과 밖에서, 
믿고 싶었던 소망과 와 닿지 않는 허망 사이에서,
뜨거운 열렬함과 물적인 에너지 사이에서.

창작과 감상, 
감상과 비평, 
그 사이 사이에는 모호한 틈새가 있어서 작품을 보고나서는 그저 입을 다무는 것이 상책이야. 라고 생각하다가...   

  누군가의 작품을 내적으로 응원하고 소망하는 입장에서, 외적으로 기대하고 관찰하는 입장으로 굴절되는 지점에는 과연 어떠한 전승과 어떠한 변수가 있는 걸까. 김현탁 연출의 작품은 내게 여전히 정의 내려지지 않는 어떤 경계 선상에 서 있다. 분명히 절실하고 번뜩이는 대화로, 아니 대화 이상의 교감으로 어떤 언덕의 지점들을 함께 바라보았던 순간들을 여전히 믿고 있는데... 관객으로 돌아 간 나는 그의 작품 안에서 분명히 어딘가에서는 잠재하고 있을 어떤 열기의 흔적들을 찾으며 작품에 집중하는데... 분명 무대 위에서는 형식을 넘어서는 에너지의 열기가 구현되고 있는데... 무대 위의 후끈한 기온이 피부에 와 닿아 스미기도 하는데... 그런데도 그 열기와 에너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되는 이유는 무얼까. 그 열기와 에너지에 대한 나의 질문은 다시 말해 이런 종류의 것이다. 이토록 무대 위에서 ‘진실로’ 에너지를 구현하고 있음에도, 심지어 무대 위의 열기가 객석 너머로 불어오고 있음에도, 그 에너지가 관객에게 ‘물적’인 에너지로 ‘보여지는’ (‘체험되는’이 아니라) 이유는 무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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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대의 양 옆선에 자전거 대열이 배치되어 있고, 이 자전거들은 불특정 관객들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돌려진다. (이들 중 한 명이라도 무성의하게 자전거가 돌려졌을 때에는 이 공연이 멈추게 된다.라는 경고성 메시지와 함께) 관객의 ‘비’자발적인 참여로 인해 둘러싸여진 이 무대는 시작부터 어떤 출구 없는 테두리 안에 갇혀지는 느낌이다. 어떠한 에너지의 강요. 그것의 시작. 그리고 무대의 앞 선에는 무엇이든 극도로 직시하겠다는 결의를 다진 듯한 과장된 광원이 배치되고, 무대의 뒷 선에는 이 광원에 의해 투사된 배우들의 그림자가 매 장면마다 흐릿하게 확장된 채 어른거린다. 이렇게 사방이 과장되고 강요된 에너지의 edge로 둘러싸여진 그 한가운데에 무대가 있다. 출구 없이 증폭된 에너지가 조장되는 그 한 가운데에.
  배우들이 등장하고, 이따금 그들은 오태석 원작의 <자전거>의 대사들을 읊는다. 장면의 구성은 <메데아 온 미디어>와 <열녀춘향>에서 시도된 바 있었던 다양한 채널들의 연출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작품만의 특이점이 있다면 다양한 채널들 속에 공통적인 시선이 있다. 이를테면 각종 담화의 ‘주변’ 담화들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기가 모두 끝난 이후에 이루어지는 공식적인 선언문, 수술대 위에 환자를 올려놓고 주고받는 뒷이야기, 지하철에서 구걸을 호소하는 걸인에서부터 선거장에서 표를 호소하는 운동가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그 사건의 진실이 아닌, 그것들을 에워싸고 둘러싼 주변의 담화와 액션들, 어떠한 핵심의 ‘나머지’ 상황에 집중하는 일관된 모습을 보여준다. 누구도 실제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려 하지 않고, 그것을 둘러싼 것들에 저마다 집착의 지점들을 붙들고 있는 모습들을 보여주려 하는 듯이.

  이 연극의 매 장면들은 형식을 위한 ‘의도적인’ 형식으로 보여진다. 구태여 형식들에 또 다시 형식들을 덧대고 있는 느낌. 그가 마지막 장면에 배치한 세월호 사건의 ‘주변’을 둘러싼, ‘나머지’ 상황들이 얼마나 형식적으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연극 안에서 말하고자 함이었을까? 모든 장면들이 어떠한 전시를 위한 형식들로 다가왔다. 여기에서 잠깐, 주의를 당부하고 싶은 것은 ‘형식’이라는 단어에 대한 편견이다. 김현탁의 형식을 놓고 말들이 많다. 그의 연극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냐 아니면 진정성이 있는 형식을 구현하느냐 라고. 형식이냐, 진정성이냐의 문제가 마치 이분법적인 구분선을 지닌 답인 것처럼. 그러나 그 어떠한 작품인들 형식과 진정성 사이에서 자기만의 명확한 좌표를 표명할 수 있을까? 작가는 형식과 진정성 내지 철학, 그 사이에서 자신만의 시선을 보여주어야 하고, 그 시선이 어떠한 지점에서든 정당성을 가질 때 비로소 작품과 관객이 교감할 수 있게 된다. 김현탁을 옹호하든, 거부하든, 그 이유가 단지 그가 지닌 ‘새로운 형식’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 단지 ‘새로움’을 옹호하거나 거부하기 위함이 비평의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오늘 새로운 것을 보았노라” 라며 작품을 칭찬하거나 폄하하는 정도의 감상이 비평이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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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형식‘성’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해 보겠다. (보다 편견을 벗은 단어로서의 형식’성‘에 대해서) 형식 그 자체를 표면적으로 전시하고 있는 형식성 그 자체에 대해서. 형식 자체를 신봉하는 형식성의 절실함에 대해서. 무대의 시작 형식이 그러했고, 그리하여 매 장면들 마다 매번 무대는 배우들의 땀으로 움씬 적셔졌다. 그런데 이 배우들의 그 절실한 땀과 기운은 관객에게 촉각적인 감화로 전해지기보다는, 시각적인 imagery로 물화되어 저 무대 위에 고여 있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작품의 형식‘성’에 주목하려고 한다.
  이를테면 이런 느낌. 마주 보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친구가 슬픔 혹은 분노로 몸을 떨고 있는데, 미안하게도 나는 저 친구의 슬픔 혹은 분노를 코앞에 놓고도 바라보고만 있다. 미안하게도 힘들겠다 라는 가식적인 말조차도 안 나온다. 심지어는 네가 몸을 떨고 있는 그 슬픔 혹은 분노가 어리석고 한심하게 ‘보인다’. (‘느껴진다.’가 아니라) 그것은 가만 생각해 보면, 그의 슬픔 혹은 분노의 ‘내용’ 때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의 소유이고 개인의 몫인 모든 감정 가운데, 옳은 것이 어디 있고 틀린 것이 어디 있으랴. 문제는 그 친구가 울어대는 ‘방식’에 있다. 너는 내가 울 테니 한 번 꼼짝 말고 거기 앉아서 나를 봐, 너는 내가 화를 낼 테니 한 번 거기 앉아서 그냥 나를 봐. 라는 식의 태도 때문이다. 아무리 아끼는 친구라도 그런 태도로 내 앞에서 술잔을 들이킨다면 싸대기를 한 대 날려줄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는 그 꼴이 보기 싫어 그 친구가 울어대는 내용에까지 시비를 걸고 싶어질 것이다. 만일 그 친구가 힘들어하는 대상이 헤어진 남자친구라면, 이렇게 시비를 걸 것이다. “네가 그 딴 식으로 울어대니까, 그런 놈이나 만나지.” 혹은 “진짜 사랑이나 했냐?”라고.

  다시 형식과 내용의 문제다. 어느 작품에서나 형식과 내용은 그 작품만의 시선과 질서 안에서 어느 정당한 지점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정당한 지점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관객과 함께 호흡되어야 한다. 그 정당한 지점은 마치 선원근법화의 소실점과 같아서 분명히 존재하나, 무어라 정의할 수는 없다. 피카소가 말했듯 ‘내용과 형식, 그 가운데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한 데 섞이는 지점’이다.
  따라서 형식과 내용의 문제에 대해서 이분법적인 사고를 강요하는 창작 혹은 비평에 반대한다. 즉, 단지 언어를 해체하고 드라마를 해체하고 장면을 해체하면 실험(형식)‘적’ 연극이요, 휴머니즘을 이야기하고 정치 사회 이슈를 거들먹거리면 주제(내용)‘적’ 연극이라고 이분화하는 시선을 전제로 깔고, 어떤 작품의 기여도를 위계화하는 것에 반대한다. 어느 작품에서나 형식과 내용은 뜨거운 소실점을 향해 함께 달려가는 상보적 경쟁자이다. 중요한 것은 작품마다 그 뜨거운 소실점이 어디에 위치하며, 그 소실점을 향해 형식과 내용이 어떠한 각도의 선을 긋고 있는가이다. 그리고 정작, 그 소실점이 관객에게 어떻게 반향되는가이다. 다시 말해 형식과 내용 가운데 무엇 하나를 택하라는 말이 아니다. 형식과 내용이 만나는 그 뜨거운 지점을 망각하지 말아달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 뜨거운 지점의 불가항력적인 힘 안에서, 관객을 포섭해달라는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연극의 형식과 내용의 상관관계를 읽어낸다면, 이 작품은 형식 안에 내용을 달구어내려고 한 연극이다. 전작들에 비해 형식에 더욱 형식들이 ‘덧’대어졌다. 그리하여 형식의 구조가 더욱 고도화되었다. 그것은 형식이 보다 집중적으로 탐구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형식의 뜨거움으로 결국 내용을 형식화하려고 했다. 형식 안에 내용이 환원되어 있다. (형식 안에 내용이 ‘치환’되었다는 말로 오해하지 말기를) 심지어는 마지막 장면에 구명조끼를 입은 여학생이 절규를 하고, ‘흐린 기억 속의 그대’를 BGM으로 깔고 모두 구명조끼를 입고 나와 기계춤을 추며 커튼콜을 하는 장면에서는 분명 두 가지의 축이 충돌하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일텐데. (고도로 형식화된 시선으로 내용을 전시하는 태도와 그 태도 안에 서려 있는 내용에 대한 풍자가) 그것이 ‘지나친’ 가학성으로 다가왔다. 과연 이토록 아프고 현재적인 정서까지도 형식‘화’할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라고. 아픔을 전시하는 이러한 가학성은 지나친 것 아닌가? 여기에서 ‘지나친’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는, 과연 이 작품에는 어떠한 뜨거운 소실점의 좌표가 있었을까? 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하도 고함을 쳐 대니까 정작 고함치는 이의 마음이 궁금해지는 연극이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일행과 대학로에서 가장 지저분한 술집을 찾아 가 막걸리나 마시자, 라고 입을 모았다. 우리는 동시에 어떤 ‘숨김없는’ 것들이 갑작스럽게 그리워졌나보다. 형식과 내용을 불문하고 <메데아 온 미디어>나 <열녀 춘향>에 서려 있던 어떤 즐거움이 사라졌다. <혈맥>과 <세일즈맨의 죽음> 안에 갇혀 있던 에너지가 더욱 갇혀진 상태로 고도화되었다. 그 어떤 전작들보다도 냉소적이고 악다구니가 되었다. 그래서 더욱 뜨겁고 치열해지기도 했다. 혹자는 진심으로 이 공연을 보고 퉁퉁 부을 만큼 울면서 나왔다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분명 이 연극의 모든 표현이 열렬한 뜨거움으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혹자는 그의 전작들과 비교하여 이 작품이 보다 현실에 가까워졌노라고 평하기도 한다. 그래서 다시 어지러워졌다. 다시 한 번 비평의 ‘불’가능함을 절감하면서. 모든 작품은 개개인의 가치관과 꿈과 욕망과 맞닿아 있는 문제이므로, 우리는 비평 이상의 감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단, 비평과 감상이 어떤 구분법에 의존하는 것만은 아니기를 바란다. 형식 혹은 내용으로 구분된 원리랄지, 새로움이라는 단순한 지표에 의한 원리만은 아니기를. 김현탁 연출이 빚어내는 현상을 필두로 극단적 욕망들이 교차하는 감상의 형식들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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