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9일 화요일

‘문명’이라는 새빨간 거짓말: 노다 히데키의 “THE BEE"

by 시뫄
“적의, 잔인함과 박해, 습격이나 변혁이나 파괴에 대한 쾌감 - 그러한 본능을 소유한 자에게서 이 모든 것이 스스로에게 방향을 돌리는 것, 이것이 ‘양심의 가책’의 기원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1)

보통의 도덕관념을 가진 인간은 죄의식, 혹은 양심의 가책을 갖게 마련이다. 그 양심의 가책은 우리로 하여금 소위 비이성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스스로를 억제하게 한다. 우리가 그러한 양심의 가책을 가지는 것은 문명의 발달에 의한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양심의 가책은 인간이 결국 사회와 평화의 구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압력 때문에 빠져드는 심각한 병이다. 이것은 인간이 동물적인 과거를 강제로 떼어놓은 결과이며, 말하자면 새로운 상태나 생존조건으로 뛰어들어 추락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한 희생을 기반으로 이루어낸 “이성, 진지함, 감정의 통제, 숙고... 인간의 이러한 모든 특권과 사치”2)는 다시 말하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획득해낸 우리의 문명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노다 히데키 작, 연출의 <THE BEE>3)에서는 종잇장처럼 구겨져버린다. 잔인함과 폭력성만 남은 이 폐허에서 우리가 굳게 믿어왔던 문명이란 것은 새빨간 거짓말과 같다.

일본의 현대 사회를 배경으로 한 이 극에서, 평범한 회사원인 이도는 귀갓길에 경찰들과 기자들이 자신의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곧 탈옥범인 오고로가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인질로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건의 내막을 알아보니 스트리퍼로 일하는 오고로의 아내가 이혼을 요구한다는 것에 분노한 오고로는 탈옥 후 아내를 만나려 하지만 거부당하고, 무고한 이도의 가족을 인질로 잡고 자신의 가족을 만나게 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도는 오고로의 집을 찾아가 그의 아내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자신의 가족을 위해 오고로와 만나줄 것을 부탁하지만 거절당하고,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경찰과 자극적인 스토리에 몰려드는 언론에 분노하여 자신도 오고로의 가족을 인질로 잡게 된다. 시종일관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일본인의 예의 바르고 신중한 모습이던 이도는 순식간에 단호한 인질범의 모습을 나타내고,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채로 어린아이와 여성에게 폭력을 가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의 원리로 시작되었던 이도의 폭력은 어느새 그 순환에 선행하게 되고 스스로의 악순환을 만든다. 결국 서로의 가족을 먼저 풀어줄 것을 두고 오고로와 대치중이던 이도가 먼저 상대의 아이를 해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폭력성을 발화시킨다. 즉 이도의 폭력은 더 이상 자신에게 소중한,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게 되며, 결국에는 길 잃은 그의 폭력성이 이도 바로 자신까지도 대상으로 삼게 된다.



뉴스로 접했더라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이러한 잔인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극의 시작 후 중반부까지는 우스꽝스러운 코미디에 웃음을 멈출 수 없다. 노다 히데키가 재기 넘치는 무대와 소품의 사용, 총 네 명의 배우들을 운용한 모든 등장인물의 소화, 크로스 젠더 캐스팅 등으로 희극적인 효과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THE BEE>의 무대 위에 올려지는 세트는 바닥과 벽이 이어지는 커다란 갈색 종이로 만들어져서 필요에 따라 찢기고 잘리고 결국에는 하나의 큰 덩어리로 구겨진다. 벽의 중앙에 프로젝터로 투사된 텔레비전 모양을 따라 종이가 오려지고 그 구멍 뒤에서 배우가 나타나 텔레비전을 형상화하는 노다 히데키의 연극적 상상력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 엉뚱한 재치에 감탄하며 웃게 한다. 주인공인 이도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노다 히데키를 포함한 세 명의 배우들이 적절히 운용되어 연기되는데, 특히 오고로의 어린 아들 역할은 어린이의 노란 모자라는 단순한 오브제 하나로 기호화되어 사물과 배우를 오가는 인물의 발현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경찰을 연기하던 배우가 모자를 뒤집어씀으로써 순식간에 어린이가 되는 등의 변신의 장면은 관객들의 “불신의 자발적 멈춤”에 의해 가능해지며 웃음을 유발한다. 이 연극의 또 다른 관람 포인트는 크로스 젠더 캐스팅인데, 남자인 이도를 여배우 캐서린 헌터가 연기하고 오고로의 아내를 노다 히데키가 연기하는 것의 비자연적인 그림에서 유발되는 희극성이 있다.

<THE BEE>의 서울 공연은 영어로 상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각적 요소들을 통해 대다수의 내국인 관객들은 자막의 언어보다는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극적 상황을 보는 것만으로 코미디로 인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코미디가 블랙코미디가 되는 것 역시 시각적인 요소가 큰 역할을 했다. 주인공 이도가 노다 히데키는 갈색 종이로 만들어진 세트 위에 빨간색 조명을 이용해 이도의 폭력성을 강조했다. 이도의 방향 없는 분노, 폭력, 그리고 공포라는 감정과 피라는 물질로 나타나는 피해자들의 정신과 신체의 파괴, 그 모두가 그 빨간 조명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된 것이다. 또한 그러한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를 사용하는 동안에는 인물들에게 대사나 섬세한 연기를 부여하지 않은 노다 히데키의 선택은 탁월한 것이었다. 붉은 빛으로 물든 무대 위에서는 폭력에 물들어 그것이 일상화된 가해자와 피해자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단순하고 기호화된 마임 연기만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눈을 피로하게 하는 강렬한 빨간 빛이 장시간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눈을 뜨고 무대를 바라봐야만 했고, 노다 히데키는 그러한 자극적인 색과 성폭력을 나타내는 움직임으로 극적 상황의 선정성을 극대화시켰다. 그리고 극 중에서 벌떼처럼 몰려들었던 기자들이 장시간 이어진 이도와 오고로의 대치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떠나가듯이, 관객들 역시 계속되는 빨간 조명과 폭력을 재현하는 마임 연기의 반복에 어느 순간 무뎌지기 시작하는 자신들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노다 히데키의 빨간 조명은 단순히 잔인성, 폭력성, 분노, 피 등의 이미지들을 나타내는 수단이 아니었다. 현대 사회에서 자극성과 선정성이 불러일으키는 폭발적 관심과, 그 자극이 극한에 이르러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게 되었을 때 역설적이게도 찾아오는 무관심 역시 생생히 드러났다.

이도의 변화가 섬뜩한 이유는 단지 그가 겸손하고 신중한 일본인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폭력적 행동이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에 대한 반동이라는 정당성을 잃어가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에는 폭력은 먼저 행해진 폭력에 대한 방어적 기제이거나 보복일 경우에는 어느 정도 용납된다는 논리가 있다. 앞서 언급한 함무라비 법전의 원리가 바로 그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죄(Schuld)’라는 도덕의 주요 개념은 ‘부채(Schulden)’라는 극히 물질적인 개념에서 유래되었으며, 형벌은 일종의 보복으로 의지의 자유와 부자유에 관한 어떤 전제와도 전혀 무관하게 발전해왔다고 한다.4) 하지만 이도의 폭력성은 발전된 인간이 발명해낸 자기 자신에 대한 고통에서 벗어나 동물의 과거로 돌아간 본능이었다. 양심의 가책 없이 서로에게 폭력을 가하는 이도와 오고로 같은 사람들은 노다 히데키의 무대 위에서 극적으로 과장되었을지언정 그들을 통해 재현되는 이 사회의 야만적 잔인성은 거짓이 아니다. 안구를 위협하는 붉은 빛의 자극적 무대에 현혹되어 바라보며 시선의 권력을 취하다가도 일순간 지루함을 느끼는 관객 한 명 한 명이 바로 그 야만적 잔인성의 증인, 혹은 증거 그 자체다. 그에 비해 오히려 우리 사회가 문명화된 사회라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쪽에 더 수긍이 가는 것은 이 연극이 남기는 씁쓸한 뒷맛에 일조한다. 이성과 도덕으로 쌓아올려진 문명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라는 틀 안에서 공격 본능을 스스로에게 돌리고 있었던 사람들이 사실은 독침을 품고 있는 벌처럼 단지 어떤 계기만을, 방아쇠가 당겨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1) 프리드리히 니체, 김정현 역,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2002, pp. 431-2.
2) 프리드리히 니체, 위의 책, p. 402.
3) 노다 히데키, 콜린 티번 작/노다 히데키 연출, 2006년 런던 초연, 도쿄예술극장/NODA·MAP 제작. 본고는 <THE BEE>의 2013 월드 투어 중 서울 공연인 6월 8일 오후 1:30 공연(명동예술극장)을 기준으로 작성함.
4) 프리드리히 니체, 위의 책, p. 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