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6일 수요일

그래도 키마이라는 불을 뿜는다: 言語, 소리, music의 창극 <서편제>

by 이진주
 
국립극장, 2013년 9월 18일 15시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가 영화와 뮤지컬을 거쳐, 이번에는 국립창극단의 품에서 창극으로 재탄생했다. 공연 시작 전, 국립창극단의 김성녀 단장은 최초의 창극이 공연된 지 110여년이 흘렀으며 파격과 실험을 통해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렇다. 창극은 백여 년 전 그 탄생 시점부터 현재까지도 실험 중이다.

  사자의 머리에 염소의 몸, 그리고 뱀의 꼬리, 서로 다른 형상을 한 존재들의 결합인 키마이라(Chimaira). 창극 <서편제>는 유서 깊은 판소리의 눈대목들로 이루어진 소리와 극작가 김명화가 써낸 탄탄한 대본, 그리고 전체 줄거리의 배경을 이루는 양방언의 아름다운 기악곡들이 각각 머리, 몸통, 꼬리를 이루고 있었다. 극작과 두 종류의 음악은 서로 역할을 분명하게 나눠서 맡고 있으면서, 각각이 가진 훌륭한 장점을 순간순간 충실히 드러내었다. 말로 된 대사는 사건을 발생시키고 이야기를 만들어나갔고, 판소리 대목들은 극중에서 음악이 필요한 부분에서 실제 음악으로 쓰였으며, 양방언의 음악은 배경을 이루면서 빈 곳을 메워주었다. 다만 세 요소가 역할을 분명하게 나눠서 맡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는 서로가 역할을 넘겨줄 때 충돌을 일으켜 매끄럽게 맞물리지 못하는 경우에 발생했다. 이 때 생기는 균열들은 창극이 이종 세포들 간의 혼종임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만 놀고 있다고 여겨지던 혹은 서로 불협하고 충돌한다고 여겨지던 각각의 요소가 조화롭게 만나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고 그 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앙상블로 큰 감동을 주었다.

   창극은 사실 남도창을 한다는 것 외에는—극작술, 무대 위 재현 방식과 미장센, 음악의 배치와 악기의 구성, 배우술 등에서—판소리와 겹치는 구석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창극 <서편제>는 판소리와 소리광대를 다루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기에, 기존 판소리의 음악을 가져와서 서사를 버무려내는 데 크게 무리가 없었다. 연기 역시 실제 소리광대의 삶을 살고 있는 배우들의 몸에 잘 맞았다.

  특히 기존 판소리의 눈대목을 장면 곳곳에 배치한 것은 그간 음악극임에도 불구하고 들을만한 음악이 없다는 비판을 받은 다른 창작 창극에 비추어 볼 때 훌륭한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눈대목들이 불릴 때마다 관객석에서 따라 부르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던 것도 관객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어서 흥미로웠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눈대목들이 극의 서사를 풍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기존 판소리의 일관된 이야기 속에서 어떤 특정한 의미를 전달하던 소리가 전혀 다른 이야기 속에 들어와서 다르게 배치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전달하게 될 때 관객은 분명히 또 다른 재미를 느낄 것이다. 물론 좋은 창작곡을 계속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이 만났을 때 느낄 수 있는 재발견의 재미라든가 또 다른 파격의 재미가 있기 마련이다.

  그 중에는 단순히 극중 상황과 판소리의 노랫말이 맞아 떨어지는 경우—동호가 떠돌아다니며 흥얼거리는 <심봉사 황성 가는 대목>, 늙은 유봉이 송화어미를 그리워하며 부르는 <갈까부다>—도 있지만, 극 자체에 다층적인 계기를 부여하는 경우가 특히 흥미로웠다.
  대표적으로 송화가 눈을 잃은 직후 <심청이 팔려가는 대목>을 송화와 유봉이 나누어 소리하는 장면은 이 극의 다층적 음악 서사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극중 상황에서 장님이 된 것은 송화이지만 소리 안에서는 유봉이 앞 못 보는 심봉사로서 창을 한다. 딸을 큰 소리꾼으로 키우려는 욕심과 자신의 곁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하려는 간절함 그리고 눈을 잃게 만든 것에 대한 죄책감이 한 데 얽혀서, 유봉은 자신이 눈을 잃은 것보다 더 처참하고 괴로운 심정을 노래로 토해내게 된다. 얼마 전 중국에서 누군가 아이의 눈을 적출한 잔인한 사건이 있던 터라 더욱 끔찍하게 여겨지는 유봉의 행동은, 이 장면이 없었다면 결코 송화로부터도 관객으로부터도 용서받을 수 없지 않았을까? 한편 이 대목은 눈을 잃은 송화의 절규를 표현하기에는 딱 맞아 떨어진다고 볼 수 없지만, 결국 자기를 바쳐 아버지의 뜻을 잇고 스스로 성장하게 될 심청의 현신으로서의 송화를 예견하게 하는 소리이기에 또한 의미가 있다.

  사실 이 장면은 작심하고 관객을 향해 최루탄을 던지는 지점이다. 그러나 분명히 최루성 신파라고 매도될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멋진 장면으로 기억되는 것은 유서 깊은 판소리 음악의 단단함이 정서를 고양시키고, 극중 서사와 판소리 심청가의 서사가 교차하면서 다층적 서사를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극 초반에 유봉과 혼령인 금산댁이 <쑥대머리>를 함께 부르는 부분은 배경으로만 존재하던 양방언의 음악이 판소리의 피아노 반주로 들어오면서 독특하고 묘한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선율악기이자 타악기이면서 작은 오케스트라인 피아노는 단순히 반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살아있는 고수처럼 창자와 대화하면서 소리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춘향가≫에서 <쑥대머리>는 옥에 갇힌 춘향이 임과 헤어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부르는 대목이다. 창극의 장면에서는 이승과 저승이라는 공간에 가로막혀 있기에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듯한 유봉과 금산댁의 처지를 비춰주고 있다. 걸쭉한 남도창이 이승에 발붙이고 있는 유봉이라면 신비하면서도 이질적인 선율을 연주하는 피아노의 음색은 금산댁인 듯했다.

  금산댁의 영혼은 창극 <서편제>에만 있는 독특한 캐릭터이다. 원작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금산댁이 죽기 전 상황에 대한 묘사만 있기 때문이다. 동호의 엄마이자 송화의 엄마이기도 한 그녀는 송화를 낳다가 죽었기 때문에—심청어미가 심청을 낳다가 죽은 것처럼—, 송화를 심청으로 치환하려는 극 전략의 시발점이 된다. 또한 유봉, 송화, 동호 세 사람의 인연의 끈이면서, 죽어서도 그들의 감정과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주요 인물이다. 그녀는 언어가 있는 소리를 하기도하지만, 뜻을 전달하기보다는 구음을 통해서 독특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가사 없이 창자의 즉흥성과 시김새에 의해서 불리는 구음은 일종의 비존재로서의 영혼을 제시하는 데 주효했다. 그녀가 가진 힘은 음악의 미묘한 분위기에 의해 상승되며, 이 때문에 다른 인물들의 심경 변화에 대한 타당성을 관객으로부터 허가 받는다.

  그러나 그녀를 선학동의 학이자 바다의 은유로, 즉 육체를 갖지 않는 소리로 상상하는 것이 관객에게 더 신비감을 주었을 거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그런 점에서 사실 그녀가 등장할 때마다 공포물 같다며 킬킬댔던 뒷좌석 청소년들의 반응은 솔직한 것이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줄 수 있는 신비스러운 효과는, 자극적인 붉은 조명과 육체의 등장으로 인해서 크게 반감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편 마지막에 송화가 동호가 재회할 때 부르는 <심봉사 눈 뜨는 대목>도 서사와 음악의 조화가 깊이 인상에 남는 장면이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각각의 매체가 가진 묘사적인 장치를 통해서 송화가 동호를 알아봤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여기서는 어린 송화와 동호가 예전에 불렀던 이 노래를 노년의 송화와 동호가 주고받는 장면이 반복되면서, 관객이 송화가 동호에 대해 눈치 챘음을 인식하게 된다. <심봉사 눈 뜨는 대목>의 ‘눈을 뜨다’가, 상대가 누군지 ‘알게 되다’라는 인식의 개념으로 환유적으로 맞물리면서 서사가 한층 풍부해진다. 다만 ≪심청가≫ 소리 안에서 이 대목은 심봉사가 딸과 재회할 뿐 아니라 실제로 눈을 뜨기 때문에 희망과 기쁨에 찬 하이라이트 장면이다. 하지만 극중 송화는 물리적으로 눈을 뜨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관객이 알고 있다는 점에서 송화의 소리는 더욱 애잔하게 들린다.

  또한 득음을 한 노년의 송화를 실제 명창으로 칭송받는 안숙선이 맡으면서, 관객은 <심청가>와 <서편제>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어느새 극 바깥에서 안숙선 명창의 소리 자체를 인식하게 된다. 판소리 애호가라면 앞서 젊은 배우들의 소리가 성에 차지 않았겠지만, 이 마지막 장면 하나로 충분히 만족했을 것이다. 기존 판소리의 너무 유명한 눈대목으로 극을 구성하다보니, 앞의 여러 장면에서 젊은 창극 배우들이 부르는 소리는 기존 명창들과 비교가 되어 음악적으로 미성숙한 느낌을 주는 측면이 있다. 그렇기에 득음한 송화인 안숙선의 소리는 장면에서 두드러지게 튀어나와서 소리광대 자체를 조명하게 된다.

  아름다운 양방언의 음악과 안숙선의 깊이 있는 소리가 만들어내는 앙상블은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긴 여운을 남겼다. 특히 이 장면에서 안숙선의 소리를 감아들면서 점점 고조되는 양방언의 음악은 마치 판소리가 이제는 그것 자체만으로는 완전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하여 더욱 의미심장하다. 이 장면은 서양음악의 기세에 눌려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는 판소리를 저 후경에 아련한 향수로 남겨 놓는다. 소리광대가 <서편제>의 시공간을 살아가며 보여준 소리에 대한 엄청난 열정이, 현재의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지 못하고 어딘가에 그냥 묻힐지 모른다는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양방언의 음악이 항상 판소리와 절묘하게 어울리지는 않았다. 창극은 얼마 전부터 꾸준히 판소리 음악 외에 다른 형태의 음악을 받아들이고 있다. 꼭 남도창이 아니라도 우리말과 감성이 잘 표현될 수 있다면 어떤 음악이든지 극 속에 들여와서 한국의 대표 음악극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래 새롭게 작곡된 창극의 음악은 다채로운 시도를 통해 외연을 넓히는 데에는 많은 노력을 하지만, 그 노력들이 우리말과 감성을 담을 수 있는 음악에 초점을 두는 것 같지는 않다. 동양적인 색채를 지닌 양방언의 음악은 물론 매우 아름답긴 하지만, 그의 음악이 우리말과 감성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소리인가에는 의문이 든다. 그의 음악은 동양적이면서도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아이리쉬 음계나 일본식 음계를 많이 사용한다. 5음계라고 다 국악은 아니다. 음의 진행이나 시김새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음악이 만들어진다. 그는 물론 국악의 요소들을 적용하려는 시도도 많이 하기 때문에 그의 음악만 따로 연주되는 경우에는 우리 정서에 익숙하다는 느낌을 갖지만, 창극에서 판소리와 함께 병주될 때에는 오히려 차이점이 더욱 두드러졌다. 이 대비의 느낌이 멋진 효과를 줄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기존에 있던 판소리에 어울리도록 양방언의 음악이 짜 맞추어진 몇몇 경우만으로 한정된다. 반대로 양방언의 음악에 이어 판소리가 나올 때는 칼로 벤 듯한 단절이 있었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조율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은 창극이 음악극임에도 불구하고 대사에만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것이다. 창극 <서편제>에서 배우가 노래를 하는 경우는 극 중에서 실제 노래를 부르는 경우에 국한되었다. 즉 관객 뿐 아니라 극중 인물들도 노래를 노래 자체로 들을 수 있는 경우에만 노래가 나온 것이다. 소리를 연습하거나 소리경연을 할 때, 무당이 굿음악을 부를 때, 혹은 혼자 신이 나서 노래를 흥얼거리는 때 등이다. 극 초반에 임방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극중극인 창극과 비교하면, <서편제>가 무엇을 놓쳤는지가 드러난다. 극중극인 창극에서는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인물의 대사도 모두 노래로 처리하고 있다. 일상에서 사람들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노래로 하지 않지만, 음악극에서는 그것이 받아들여지도록 관객과 약속이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위에서 나는 기존 판소리와 서사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몇 군데 장면에 대해 예로 들며 감탄했지만, 음악극에서 관객은 드라마와 음악의 완벽한 조합만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음악이 주는 감동을 위해서 음악이 서사를 방해하고 초월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는 현실에서도 노래할 법한 장면에서만 노래하도록 함으로써 음악에 대해서 지나치게 사실적인 기준을 적용했다.

  또한 배우가 부르는 노래를 기존 판소리(혹은 남도민요)에서만 뽑아서 가져왔기 때문에 여러 감정과 상황을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자연히 서사의 진행은 대부분 말로 이루어졌는데, 대사는 상황을 설명하면서 앞으로 내달리기만 했고 심리를 드러내도록 머물러주지 않았다. 감정의 극대화를 위해 음악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에서도 한 줄의 대사로 설명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송화를 아끼고 그리워하는 동호의 마음이나, 송화가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용서하며 득음에 이르는 내면의 변화가 모두 대사로 짧게 설명될 뿐이어서 아쉬웠다.

  키마이라는 각기 다른 종의 결합이지만 그 때문에 위협적이며 매력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괴물을 하나의 존재로 인식하도록 만든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감각적인 것 사이의 균열(판소리-양방언 음악)은 안타깝게도 음악극에서 치명적이다. 반면에 극중 인물도 노래로 인식하는 장면에서만 노래를 하고 기존 판소리에서 눈대목만 가져와서 상황에 맞는 장면에 삽입한 것은 분명 흥미로운 드라마터지이며, 덕분에 극의 구성이 치밀해졌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노래하는 극(唱劇)에서 음악이 빈약해진 점은 아쉽기만 하지만, 창극 <서편제>는 신구(新舊)의 조화 및 서사와 음악의 결합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통해서 풍부하고 아름다운 음악극을 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