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8일 금요일

스즈키 다다시 <리어왕>

by 최희범

1.
몇 년 전에 스즈키 메소드 워크샵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다. 무엇을 위함인지도 잘 모르면서, 몸과 마음의 중심을 아래로 이동시키는(grounding) 낮은 자세, 상하좌우 흔들림 없이 걷는 연습 등을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도 이런 훈련이 실제 공연에서 어떤 효과를 발휘할지 궁금했었고, 워크샵 진행자들의 스즈키 메소드와 공연에 대한 열광어린 찬사를 보며 호기심이 더욱 커졌었다. 그 후 이번에 처음으로 스즈키 다다시 연출의 공연을 직접 보게 되었다. 오래 마음에 담아둔 호기심에 기대가 컸는데 나와 비슷한 기대를 품은 이들이 많이 있었는지, 공연 시작 전부터 객석의 분위기는 조용히 요동치고 있었다. 심지어 공연 시작 전 암전 상황에서 큰 박수와 함성이 쏟아지는 해프닝(!? 이전에는 공연 시작 할 때부터 관객들의 박수를 받는 공연을 본 적이 없었다.)까지 벌어졌다. 공연이 시작되고 배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흔들림 없었고, 극도로 정제되어 있었다. 그런 움직임을 하기 위해 몸 전체를 의식하고 통제하고 있을 배우들을 보며 그들이 자신의 몸 전체로 뻗치고 있는 에너지가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했다.
작은 움직임까지 통제하는 이 에너지는 관객들이 그들의 표정 변화 하나까지도 포착하고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전체적으로는 마치 정지 화면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는데, 그들이 대사를 말하거나 천천히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을 때도 반쯤은 정지된 화면을 보는 느낌이 나는 것이 신기했다. 그들이 중심을 낮추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중심을 위로 띄우는 움직임은 사진을 찍어 놓아도 그 속에서 뛰는 듯한 인상을 준다. 발레리나들의 사진을 보면 사진 속에 그들 몸의 가벼움이 녹아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반대로 중심을 낮춘 이 배우들의 몸은 움직이고 있어도 정지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정제되고 무거운 육체 에너지는 배우들이 쉽게 몸으로, 말로 모든 감정을 표출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말투와 표정은 오히려 모호했다. 대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힘차게 쥐어짜는 것 같은 발성으로 처리했고, 감정이라는 것이 그 음성의 질과 색을 크게 바꾸지 않았다. 그와 함께 관객으로서 내가 느끼는 감정 역시 순간순간 표출하는 배우를 보며 나도 해소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끈끈하게 계속해서 무겁게 쌓이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초반부터 쌓였던 이러한 에너지는 리어가 코딜리어의 시신을 안고 나오는 장면에서 봉인해제 하듯 감정의 물결로 터져 나왔다. 조명을 사방으로 반사해대는 흰 옷의 코딜리어를 마치 피에타 상의 성모마리아처럼 안고 나오는 리어의 모습. 그 장면에서 느껴지는 무너진 마음이 내 마음에 눌러두었던 에너지마저 무너뜨려 감정과 뒤섞여 흘러나오게 만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스즈키의 카타르시는 감정과 에너지의 배출과 정화인 것일까?

2.
이 연극에서 단연 주목되는 역할은 간호사이다. 간호사들은 의상부터가 눈에 띈다. 철저한 고증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딘가 고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다른 인물들의 의상과는 달리 간호사들은 흰색 유니폼과 스타킹을 신고 있다. 마치 다른 이들이 속한 세계의 밖에 있는 듯 색도 질도 너무나 이질적이다. 특히 리어의 옆에 계속해서 붙어있는 간호사는 원작의 바보 어릿광대의 대사를 읊는다. 계속해서 손에 든 책을 보고 있어서, 그 대사가 자신의 말인지 책에서 나온 말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녀는 가끔씩 아주 기괴하게 “하-하-하-!” 하며 웃어댄다. 스즈키 다다시는 자신의 연극을 세계의 축소판이자 정신병원이라고 했다. 연극의 곳곳에서 이러한 메타포를 발견할 수 있는데, 무대 후면에서 한 무리의 간호사들이 노래하며 행진하는 장면은 이 무대의 끝선을 보여주며, 온갖 색의 두께와 질감이 마구 뒤섞인 광적인 무대의 배경과 일체가 된 모양이다. 또 광인 행세를 하는 에드거와 광증이 불거진 리어가 만나는 장면은 마치 정신병원에서 산책하던 두 병자가 만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는 세계라는 정신병원에는 의사도 간호사도 없는 것 같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이 세계에는 간호사가 있다. 그것도 버젓이 간호사 가운을 입고 미친 리어의 휠체어를 끌며 등장한다. 이 인물은 무엇일까? 간호사가 어릿광대의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러니 간호사가 광대이자 바보인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바보 광대들이 ‘바보’소리를 들으면서도 어느 현자보다 똑똑한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다른 이들이 속한 세계, 그 이해관계로 얽힌 세계에 속하지 않은 타자이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이 극의 간호사들은 극에서 명백한 외부인처럼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 그네들의 차림새가 그 이질성을 보여주며, 이 세계에 일말의 관심이 없어 보인다. 리어와 책 이외의 것들에 잘 눈길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원작의 바보 광대가 했던 대사들을 읊을 자격은 간호사에게 주어졌다. 또한 그렇기에 이 비극의 상황에서 그녀들은 “하-하-하-!” 웃음을 터뜨린다. 웃음은 그 대상을 자신으로부터 타자화 할 때 가능하다. 바보들은 타자로서 세상을 바라보기에 그들을 보고 웃을 수 있다. 그러나 간호사들의 웃음이 마냥 유쾌한 웃음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기괴하고 불쾌하기 짝이 없는 그런 웃음이다. 공연의 마지막 장면의 불이 꺼지면서 헨델의 “라르고”의 느린 선율과 함께 들려오는 그녀의 웃음까지 보면, 그녀가 이 비극적 세상을 웃음으로 논평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해진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결국 이 극에서 간호사들은 외부인이자 바보라는 것이다. (그녀들의 외양과 행동, 말투 등에는 확실히 병적이어 보이는 낯설음이 있다.) 그러니 미친 리어를 바보 광대가 인도하는 것처럼, 이 극의 정신병자 리어를 또 다른 병자가 간호하는 셈이다. 결국 스즈키 다다시 자신이 말한 것처럼 이 연극에는 정신병자를 치료해줄 진정한 의미의 의사나 간호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이질성을 인정하고 숨기지 않음으로 세상에 대해 한 두 마디 논평을 던지기도 하고 웃기도 할 수 있는 그런 간호사는 존재한다. 어쩌면 “나도 내 스스로가 병자가 아닐까하고 의심하고 있다. 또 그 원인은 무엇에 기인한 것일까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다. 그 고찰 혹은 분석의 결과물의 하나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만든, 이 <리어왕>인 것이다.”라고 말한 그가 자신의 분신을 이 극에 심어 놓은 것 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