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10일 금요일

<황금 연못>과 사랑의 올바름

에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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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조재현이 대학로에 세운 새 극장에서 <황금연못>이란 미국 드라마를 하고 있다. 이순재와 신구라는 걸출한 시트콤 스타 원로 배우가 더블 캐스트로 주인공 역할을 맡고, 여기에 그들의 부인 역으로 맞춤한 나문희가 출연한다. 덕분에 평소 대학로 극장에서는 보기 드문  중년 부부나 가족 단위의 손님들이 객석을 채우고 있었다. TV는 연극 무대에서 관객과 배우를 빼앗아 가기도 하지만 다시 데려오는 요물임에 분명하다.

스키장 리조트를 운영하는 기업의 극장이라 그런지 객석은 초보용 슬로프처럼 길고 완만하게 펼쳐져 같은 규모의 극장보다 많은 관객을 받을 수 있는 반면, 무대 폭은 좁아 무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이 자못 가파르게 펼쳐진다. 그곳을 자주 왕래해야 하는 노만 역의 신구 선생에게는 물론 누구에게도 인체공학적인 계단이 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미국 응접실 연극의 환경을 갖추고 있는 무대에 또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뒷무대 전체에 그려져 있는 커다란 '연못'의 이미지이다. 제목에서 즉각적으로 환기되는 것이지만, 엄밀히 말해 그 이미지가, 그리고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과연 연못이라 할 수 있는지는 조금 더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전에 따르면 연못이란 "연꽃을 심은 못"이고, 다시 못이란 "넓고 오목하게 팬 땅에 물이 괴어 있는 곳", 간단히 말해 작은 물 웅덩이를 일컫는다. 못이란 늪보다 작고, 늪은 다시 호수보다 작은 규모의 웅덩이를 지칭한다는 국어사전의 기준을 한편에 두고, 다른 한편으로는 pond를 영어사전에서 찾아본다. Webster 사전에 따르면 pond란 보통 lake보다 "작은" 물 웅덩이를 일컫는 것이다. 실제로 극에서는 집배원 찰리가 보트를 타고 우편물을 배달하고 있고, 첼시는 거기서 수영을 하고 있으며, 노만과 빌리는 릴 낚시를 하고 있다. 무대 배경 그림 역시 이러한 활동이 가능한 정도의, 그래서 우리가 보기엔 분명 호수로 보이는 것이 그려져 있다는 것 또한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확성을 기하고자 "황금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원작 제목의 전치사까지 살리지 않는 이상 황금못은 같은 색상의 망치가 먼저 떠오르고 말 것이다. 번역의 옳고 그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제목을 옮기는 것도 이렇게 복잡한 일이라면, 미국에서 만들어진 이 연극이 한국 배우에 의해 한국어로 공연되는 순간 상당히 다른 의미로 전달되고 변형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예를 들어, 극중에서 노만은 펜실베니아 대학 영문과 명예교수로 소개되고 있는데, 대부분의 한국 관객에게는 그 대학의 학풍은 커녕 그곳이 좋은 곳인지 아닌지도 전달되지 못한다. 또한 노만이 비록 자신에게 곧 다가올 죽음을 의식하면서 냉소적인 말들을 내뱉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부인의 아름다움에 반해있는, 꽤나 전형적인 가정적인 미국남자임을 머리로 알 수 있지만, 그러면서도 신구를 통해 (그리고 아마도 이순재를 통해) 내 눈 앞에 나타나는 노만이 자꾸만 한국의 아버지상과 겹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이 문제는 이 극의 중심 갈등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는다. 노만은 자기가 사랑하기로 선택한 여자에게 순정을 바치며 그 사랑을 표현하지만, 선택하지 않고도 사랑하는 또 다른 여자인 자신의 딸과는 잘 지내지 못한다. 첼시는 마흔이 넘도록 유년 시절에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은 아버지에게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고, 노만 역시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상태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네 상황에서는 딸바보란 말이 유행하듯 부인에게는 인색해도 딸에게는 너그러운 아버지들이 더 많다는 점에서 이런 상황이 낯설 수도 있다. (물론 대학교수는, 게다가 명문대 교수는, 누구든 잘 인정하지 못한다는 점을 덧붙이면 충분히 납득가능한 이야기가 된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기 까지가 어려울 뿐 갈등은 별로 특별한 계기 없이 해결된다. 미국의 한 리뷰에서 이 극을 "소박하고 아름답다"고 했다면 바로 이 심심한 갈등 해결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짧은 극은 사랑이란 주제를 다층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보다 문제적인 작품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 이 극에는 부부 간의 사랑이라는 적법하고 '정상적인' 사랑이 중심에 놓여 있으나, 그 주변으로는 실패한 사랑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랑도 함께 배치되어 있다. 에셀을 통해, 사실은 찰리의 전언을 다시 한번 중계하는 형태이긴 하지만, 언급되는 레즈비언 커플은 정도에 있어서는 노만과 에셀에 뒤지지 않고 시간에 있어서는 더 오랫동안 사랑하고 이제 세상을 떠나지만,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사랑이라 그들의 삶도 사랑도 이 황금못가에 숨기고 있어야 했다.

찰리와 첼시의 관계는 그저 찰리가 첼시에게 몇 차례 추파를 던지고 첼시가 거절하는 것 이상의 서브텍스트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공연에선 생략된 것으로 기억되지만) 찰리와 첼시는 어릴 적 서로에게 관심과 호감을 가지고 있던 사이였으나, 명문대 교수 아버지에겐 시골 마을에서 신문이나 배달하는 집배원이 결코 자기 딸의 짝으로 생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에셀이 찰리의 (이상한) 웃음까지도 사랑스럽게 보고 그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것은 이처럼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해 어머니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상 같은 것으로 보인다. 서양 드라마 전통에서 전령messenger이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줄 뿐 극의 중심에 놓여질 수 없는 운명이니(실제로는 그래선 안되겠지만) 찰리의 실연은 드라마적으론 대단히 정당한 일이다. 자꾸만 실없이 내뱉는 그의 웃음은 결코 웃을 수 없는 그의 심적 상태를 반어적으로 표현하는데, 다만 이번 공연에서는 그에게 주어진 얼마 되지 않는 출연 분량을 보충하기 위한 제스쳐로 느껴지기도 한다.

비록 영화 버전에 대한 리뷰이긴 하지만 로저 에버트가 이 극에서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은 부분은 첼시의 남자 친구 빌 레이가 노만과 둘이서 나눈 대화이다. 여기서 빌은 노만에게 그의 딸과 같은 방에서 자도 되냐고 허락을 구하는데, 여기서 빌이 구하는 것은 사랑의 적법성을 다시 한번 환기시킨다. 이 이상한 대화가 필요한 이유는 이후로 드러나듯이 두 사람의 사랑은 일반적이지도 적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유럽 여행 중 브뤼셀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돌아온 다음 빌은 그제서야 자기 아들의 엄마, 그러니까 전 부인과 관계를 정리하러 떠난다. 막장 드라마로 발전할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이 상황은 노만이 그 둘을 아무렇지 않은 듯 받아줌으로써 별일 아닌 것으로 정리된다. 노만이 자기 커플도 처음부터 적법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 결코 가볍지는 않다. 하지만 이 문제가 최소한의 정보만으로 어물쩍 넘어가지 않았더라면, 관객들의 비난을 면하긴 어려웠을 테지만, 이 극이 노년 커플의 소박한 사랑 이야기 이상으로 기억될 수 있었을 것이다. 입센 이후로 사실주의극은 언제나 관객을 불편하게 (해야) 한다. ㉦

로저 에버트의 영화 리뷰 링크
http://www.rogerebert.com/reviews/on-golden-pond-1981

한편, 진선미 의원이 동거를 법으로 인정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http://omn.kr/ahcw

postscript

이 글을 공개하고 난 뒤 뭔가 석연치 않아서 급기야 구글 맵에서 메인 주에 있다는 Golden Pond를 찾아보았다. 실제로 이 이름의 못은 검색되지 않지만, 이 지역은 크고 작은 pond와 lake가 아주 많이 있다. 아마도 석양에 황금빛이 된다고 해서 Golden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이를 통해 이 지역이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노만과 에셀 부부에게 매우 적합한 장소임도 밝혀진다. 흥미로운 것은 각각의 물 웅덩이의 이름들이다. 그곳에는 백두산 천지호 만한 크기에 버젓이 "pond"란 이름을 붙이고 있다. 물론 그것도 오대호에 비하면 연꽃이나 심을 작디작은 못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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