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일 화요일

20주년, 《날 보러와요》

글쓴이_산책

극장 로비는 분주했고, 많은 사람들로 혼잡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구면인 것처럼 인사를 나누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공연 시작을 알리고, 객석의 불이 꺼지자마자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20주년 <날 보러와요>의 OB 팀 공연 날이었다. 연극 <날 보러와요>의 20주년 공연에는 1996년 초연부터 참여했던 김뢰하, 유연수 배우를 비롯하여 권해효, 이대연, 황석정 배우까지, 많은 사람들이 쉽게 알만한 유명 배우들이 출연하며,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진 공연이다.

관극도, 글쓰기도 꽤 오래 쉬었다.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해도 변명을 수십 가지 늘어놓고 싶다.) 번뜩임보다는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승부하자고 생각해왔는데, 그마저도 하지 못했더니 극장은 너무나 멀고, 글은 그 보다 더 멀리 느껴진다. 더구나 20주년을 맞은 작품을 마주하자니, 20년이라는 그 시간의 두께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530만 관객이 관람했지만, 영화 <살인의 추억>을 – 자본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 20년간 극장에서 상영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어떻게 20년이라는 두터운 시간을 살아 내면서, 계속 그리고 또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것일까?

무대에는 형사들 뿐.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우리는 2시간 내내 무대 위에서 범행 장면을 목격할 수 없다. 다만 첫 장면에서 무대 뒤로 움직이던 용의자의 그림자, 여자의 비명, 용의자의 신음 소리 등을 들었을 뿐이다. 무대 위를 가득 채우는 것은 형사들뿐이다. 그들은 고군분투하지만, 수사에는 별 소득이 없다. 용의자와 설전을 벌이고, 전화를 받고, 기자와 싸운다. 미스 김이 배달해주는 커피를 마시며 이따금 실없는 소리를 던지며 쉬기도 하지만, 며칠씩 집에 가지 못한다. 범행 장소의 흙을 몰래 퍼 와 터럭 하나 라도 찾아내려고 하는 모습은 우스우면서도 애잔하다. 형사들에게 뾰족한 수가 없는 것처럼 관객들은 용의자에 대한 별다른 힌트를 얻을 수 없다. 여러 힌트를 준다면 나름대로 추리라도 해보겠지만, 그저 형사들이 들려주는 단서를 듣고, 그들의 수사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범죄를 다루는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가 사건 장면, 용의자의 실루엣, 형사들의 현장 수사 장면 등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것과 달리 <날 보러와요>는 경찰서 안에서만 이야기가 진행된다. 중요한 단서라도 찾아내려면 형사는 무대 밖으로 사라져야 한다. <날 보러와요>의 관객들은 끔찍한 살해 장면들을 피할 수 있지만, 용의자를 적극적으로 추리할 수도 없고, 흥미로울 법한 형사들의 수사 과정도 지켜볼 수 없다. 경찰서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연극이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보다 관객을 끌어 들일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보여주는 것 그 이상의 힘은 무엇일까?

여기서 좋은 대답을 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객석에 앉을 때면, 늘 이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사람들은 왜 극장에 올까, 어떻게 극장에 오게 되었을까.

보이지 않는 것들

영화 <살인의 추억>은 연극보다 훨씬 더 잘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연극 <날 보러 와요>에서 형사들은 무대에 매여 있어야 하지만 영화 속 형사들은 어디든 갈 수 있었다. 그러면서 형사들의 고단한 일상은 효과적으로 그려졌고, 언론이며 검찰의 압박들도 더 실감나게 묘사되었다. 전화 한 통, 신문을 보며 터트리는 형사의 분통으로 그러한 것을 모두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연극보다 영화는 훨씬 사실적이며 생생하다. 형사나, 피해자에게 품게 되는 안타까움의 감정도 더 강렬하게 유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이 남기는 순간순간의 인상은 매우 강렬하다. 무대 위에 내리는 비, 빗소리, 범인이 저벅저벅 걷는 소리, 여자와 범인의 신음 소리는 어떤 것도 거치지 않고 그대로 관객의 귀에 꽂히고 만다. 이 소리들은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비, 젖은 길을 걷는 사람의 무게감, 공포의 질감들을 느끼게 한다. 또 김 형사가 사건 장면을 묘사하면서 용의자 정인규를 압박할 때, 용의자 정인규의 점차 일그러지는 표정, 이제 곧 범행을 자백할 것만 같은 용의자의 긴장감, 혐의를 벗었을 때, 소름끼치도록 안도하는 모습도 압권이다. 이러한 장면들은 무대에서 관객에게 직접 전달된다.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실감나는 장면을 볼 때, 공포감을 느끼지만 영화관을 나서면 이 세계는 영화 속 세계보다 안전하다는 안도감을 준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 어떤 상황에서 직접 받은 그 인상을 쉽게 가시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주고받는 기운의 강렬함 때문인 것 같다.

관객들이 자꾸 웃는다.

사건을 목격할 수 없다 해도, 이야기 자체는 끔찍하다. 강간에 연쇄 살인, 그리고 영구 미제 사건이다. 용의자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고, 희생자 가족들은 아직도 원통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날 보러 와요>를 보면서 자주 웃게 된다. 어울리지 않게 형사가 시를 읊는 장면이나, 서랍 속에 자작시를 숨겨 두었다가 들키는 것도 웃음을 야기한다. 불쑥 튀어나오는 욕설들, 미스 김의 애절한 사랑 표현(경찰서에 목소리 변조를 해서 전화한다거나, 말없이 끊어 발신지 추적을 당하는 장면 등), 형사들끼리 주고받는 말도 안 되는 대화와 농담 때문에 관객들은 자주 웃는다. 류태호 배우(용의자 역)의 바보 연기, 술 취한 연기들도 웃음을 자아낸다. <날 보러 와요>와 마찬가지로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tvN의 드라마 <시그널>에서는 도무지 웃을 기회가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더욱 의아한 것이다. 정신 지체인 용의자가 범행 장면을 묘사할 때, 우리는 범행 장면을 들으면서 웃고 있다. 관객들은 웃는 그 순간에, 혹은 결국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고 패잔병처럼 뿔뿔이 흩어진 형사들의 마지막 모습을 몬 후에, 자신과 객석의 웃음을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위에서 말한 것처럼 무대 위에서 만나게 되는 인물 사건은 매우 직접적인 자극이고, 그래서 관객들을 긴장하게 만든다. TV 드라마는 언제든 내가 원할 때 채널을 돌리거나, 꺼버릴 수 있지만, 극장에서는 그 장면이, 그 이야기가 싫다고 해서 벌떡 일어나 나갈 수 없다. 따라서 연극은 그 어떤 서사 장르보다 관객과의 밀당에 능해야 하는데, 밀고 당기기의 한 전략으로 웃음은 매우 효과적인 것 같다. 관객들은 웃으면서 긴장을 풀게 된다. 형사들의 고단함, 풀리지 않는 사건의 답답함 속에서 종종 웃음을 터뜨리면서 여유를 유지할 수 있다. 이 여유는 작품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게 한다.

낡은 것들, 그리고 여전한 것들

20년 전 초연 작품이기 때문에 극중 상황은 꽤 낡은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낯선 풍경이다. 김 형사는 FBI의 과학 수사 기법을 독학해서 가설을 제기하는데, 96년 그때 이 방법은 그 당시로서는 쉽게 용인되지 않는 것이었다. 초등학생도 프로파일링이라는 단어를 아는 지금, 이러한 과거는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라디오에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신청한 용의자의 엽서를 찾기 위해서는 서울로 가야만 하는 장면도 그러하다. 레퀴엠이 흘러나오고 있는 지금, 김 형사의 추론대로라면 곧 살인이 벌어질 터인데, 형사가 경기도 화성에서 서울 방송국까지 가야 한다니. 지금이라면, 범인이 라디오에 사연 같은 걸 보낼 리도 없겠지만, 더 빨리, 더 쉽게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 초고속 인터넷 시대에 익숙해진 관객에게 <날 보러 와요>의 호흡은 꽤 길고 촌스럽게 느껴졌을지 모른다. 빠른 속도의 에피소드식 구성으로 장면들을 진행하며, 빈번하게 암전을 끼워 넣는 작품들과 달리, 장면 장면이 느긋하게, 진행되고, 장면과 장면 사이의 암전이나 무대 전환도 느슨하다. 무대 위에 놓인 성냥, 포터블 카세트, 미스 김의 커피 배달, 과학 수사에 대한 못미더움들 뿐 아니라 극의 진행 속도도 20년이라는 세월을 느끼게 한다.

초연 이후 출연했던 배우, 연출이 같이 한 무대에서 작업할 수 있다는 것, 그들의 작품 생활이 20년을 넘어 서고 있다는 것에 존경심을 표하고 싶다. 시간이 흘러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여전함은 아름답고, 또 의지가 되는 무엇인 것 같다. 시간을 잘 살아내고, 견디어 내면 어딘가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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