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5일 목요일

<셰임>: 자학하는 몸의 ‘바디 호러’


by 시뫄

여름에는 마치 공식처럼 호러 영화 포스터 한 두 개 정도는 영화관에 걸려 있기 마련이다. 계절에 상관 없이 일년내내 호러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특히 여름처럼 심신을 지치게 하는 무더운 날씨에는 시원한 영화관에서 온몸의 털이 쭈뼛 서고 등골에 서늘한 기운이 흐르게 하는 호러 영화 한 편이면 여느 피서지 부럽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호러 영화는 소재와 내용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되는데, 물론 이 글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감독의 <셰임> (Shame, 2011)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호러 영화는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 속 깊은 곳, 혹은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했던 무의식 속의 공포를 끄집어 올리게 하고 그 공포로 몸서리치게 한다는 점에서 호러 영화의 본질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공포가 몸의 생생한 파괴와 타락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셰임>은 '바디 호러' 영화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롱 테이크로 스크린 위에 펼쳐진 주인공 브랜든의 몸은 잘생긴 남자의 나체가 불러일으킬 만한 시각적 자극을 주지 않는다. 그의 눈이 가끔가다 깜빡이고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시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다. 그가 덮은 천이 서늘한 파란 색인데다가 영상의 톤이 푸르스름한 것도 그의 살을 시체의 그것으로 보이게 한다. 아무런 경고도 없이 눈 앞에 보여진 몸은 생동감 있고 역동하는, 자아를 형성하는 신체가 아니라 그저 물질로서의 육체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러한 몸의 이미지는 영화의 인물들이 자신들의 몸을 대하는 태도를 나타낼 것이다.

맥퀸 감독은 영상의 색채를 통해 신체 이미지를 잘 표현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푸른 톤을 사용한 영화의 첫 장면이 브랜든의 몸을 마치 영혼 없는 시체처럼 보이게 한다면, 영화 전반에 걸쳐 사용된 회색 톤은 암울하고 고독한 도시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 회색 빛의 도시 안에서 생동감 넘치게 표현되는 신체는 브랜든이 보는 '먹잇감'으로서의 여성뿐이다. 씨씨는 샛노란 색의 금발과 창백한 피부로 마치 깨질 듯 위태롭게 그려지며, 결국은 위험을 울부짖는 빨간 색의 피가 그녀의 몸을 감싼다. 이처럼 파랑과 빨강, 대비되는 두 가지 색으로 나타난 브랜든과 씨씨의 몸은 그들이 자신의 몸을 학대한 그 끝에 이르는 정신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을 각각 그린다. 그리고 파란 몸과 빨간 몸은 그 자체로 호러가 된다.

브랜든은 성 중독자(sex addict)다. 회사 컴퓨터, 벽장 할 것 없이 음란물이 가득하고 콜걸을 부르거나 실시간 음란 채팅으로 자위하는 것은 브랜든의 일과이다. 그런 생활을 하던 브랜든에게 들이닥친 그의 여동생 씨씨는 의존증을 앓는 관계 중독자다. 전화에 대고 자신을 떠난 남자에게 사랑한다고 울부짖는 씨씨의 모습과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여자와도 관계를 진전시키지 못하는 브랜든은 얼핏 반대의 상황에 처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남매는 영화 속에서는 말해지지 않은 어떤 아픔과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상처 입은 영혼들이다. 그리고 그 둘은 그 정신적 아픔으로부터 자신들의 몸을 스스로 학대함으로써 벗어나려 발버둥친다는 점에서 꼭 닮았다.

정상적인 사회적 관계를 맺지 못하는 브랜든은 사회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갈등 혹은 욕구들을 성적 행위들을 통해 해소하려 하고, 자존감이 낮고 관계의존적인 씨씨는 손목을 긋는 자해 행위를 통해 우울한 삶 자체에서 도피하려 한다. 브랜든과 씨씨 남매의 몸은 미셸 푸코의 "유순한 몸(docile body)"을 떠올리게 한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유순한 몸을 (사회나 체제에 의해) 대상화되고 사용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고, 그 개념 안에 개별적인 몸, 혹은 인간 주체의 힘을 가진 몸은 없다. 그저 철저한 피해자로서의 몸인 것이다. 브랜든과 씨씨는 자신들의 몸을 학대하는 가해자임과 동시에, 사회에 의한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그들의 몸을 통해 드러난다.

 
아일랜드로부터 이주해 뉴저지에서 자란 남매는 현재 뉴욕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영화에서는 늘 황금빛으로 비춰지던 뉴욕이라는 도시는 맥퀸의 영상 속에서는 회색일 뿐이고, 씨씨가 부르는 "New York, New York"은 뉴욕의 찬가라는 흔한 인식에 반해 더할 나위 없이 쓸쓸하고 외로운 노래로 들린다. 노래하는 씨씨의 그늘진 얼굴에 클로즈업한 롱 테이크 후에 비춰지는 브랜든의 얼굴에서는 눈물 한 줄기가 흐르고, 그로부터 우리는 남매의 말해지지 않은 사연을 짐작할 수 있다. 겉으로는 뉴욕의 고층 건물에서 광고 혹은 브랜드와 관련된, 소위 말해 돈 되는 일을 하지만, 브랜든은 자신의 침대에서 씨씨와 정사를 나누는 유부남 상사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약자이다.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애원하고 매달려도 (아마도 반복적으로) 버려지는 씨씨는 정해진 거처 없이 부유하는 몸이다. 뉴욕이라는 대도시에서 약자이며 타자인 그들의 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분노와 욕구의 에너지는 갈 곳이 없고, 오직 자기 자신의 몸의 학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브랜든과 씨씨의 자학은 단순한 개인의 정신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 의한 폭력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떨궈진 손목으로 피바다에 누워있던 씨씨는 또 하나의 흉터를 추가한 채 살아난다. 죽어가는 동생을 발견하고 살려낸 브랜든 역시 회색빛 도시 속을 달리고 아스팔트 위에 스스로를 내던지며 또 다시 몸을 학대하면서도 이번에는 삶을 향한 가능성을 암시한다. 영화 내내 감정의 정상적인 표출 대신 성적 행위를 통한 비정상적인 기제로 작동하던 그가 온몸으로 절규할 만큼 그토록 괴로워한다는 것이 바로 그 가능성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생겨나는 일말의 희망은 100분 가량의 바디 호러를 지켜본 관객들에게는 마치 카타르시스와 같은 쾌감으로 이어지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