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22일 목요일

세 여자의 자서전적 몸 <치마, 살>

by 이흔정

2013 박소정 콜렉티브 콜라보
2013. 8. 5(Mon)~6(Tue) pm8:00
강동아트센터 소극장 드림

텅 빈 무대에 세 개의 서로 너무나 다른, 그러나 또 같은 ‘몸’이 있다. 관객은 세 명의 무용수 박소정, 정정아, Christine Fletcher의 몸을 만난다. 처녀의 붉은 치마에 감춰진 속살을 들여다보는 듯한 공연 포스터를 보고 약간의 호기심을 느꼈던 관객이라면, 세 명의 몸은 자못 실망스러울 수 있다. 매력적으로 잘 가꾸어져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그런 몸을 상상했다면 말이다. 정정아와 박소정의 몸은 현대무용으로 다져져 다부지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중년여성의 몸이다. Christine은 키가 족히 180cm는 돼 보이고 머리는 백발에 가까우며 탄력을 잃고 주름진 몸이다. 우리가 무대에서 장시간 ‘보고 싶은’ 몸들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공연을 볼수록 점점 그들의 몸이 궁금해지고 또 사랑스러워진다.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 조금 다르게 반복되고.” 박소정은 일련의 동작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이렇게 말한다. “This is not my place. This is my place. No. This is not my place.” 다음은 크리스틴 플레처이다. 세 명의 들릴 듯 말 듯한 중얼거림이 뒤섞여 사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또, 그들은 몸을 움직이고 있었으나 그것 역시 관객에게 보이기 위한 움직임 같지 않았다. 무대 위 세 명은 일종의 ‘자기 탐구’를 하고 있었고, 관객은 그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첫 번째 몸. 기계음으로 녹음된 정정아의 인생 이야기를 그녀의 몸을 보며 듣는다. 키 작고 까무잡잡한 동양의 무용수 정정아는 캐나다로 건너간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태 영어 이름이 없단다. 그녀가 처음 무용을 하던 순간, 무대에서의 부상으로 관객과 같은 방향으로 주저앉았던 그 순간, 임신으로 점차 배가 불러오던 그 때. 그녀는 무대 위에서 그녀가 지금껏 살아온 시간과 거쳐온 공간들을 되새김질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과 공간들이 녹아 만들어진 현재 그녀의 ‘몸’을 우리는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무대에 재생된 녹음테이프는 중간중간 끊기기도 하고, 뛰어넘기도 하고, 갑자기 앞으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타인이 바라보는 한 개인의 역사는 순차적이며 일정하게 반복되는 시간일지 모른다.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그러나 우리가 각자 몸으로 체험한 역사와 시간은 그렇지가 않다. 끊겨버린 녹음테이프처럼 지우고 싶은 기나긴 고통의 시간, 계속해서 떠올리고 싶은 소중한 시간, 그녀를 변화시킨 중요한 시간. 시계상으로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이지만, 개인이 몸으로 체험하는 시간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분명 천차만별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전 그녀의 ‘몸’은 그저 하나의 대상이었지만, 이제 그 ‘몸’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그 몸에 새겨진 시간, 흔적, 사건, 사람을 함께 본다.

두 번째 몸. 박소정은 자기 몸을 움직이는 데에 어떤 ‘아낌’도 ‘꾸밈’도 없다. 바닥에 머리를 거꾸로 박고서 무대 위를 거침없이 쓸고 다니고, 그녀의 몸은 땀이 범벅 되도록 바쁘게 움직인다. 그러나 분명 처음 무대에 그녀가 등장했을 때보다 땀이 범벅 된 그녀는 더욱 생기 있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거침없이 무대에서 몸을 굴리면서, 점차 활력을 찾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누구보다 자기 몸을 사랑한다는 걸 보여주었다. 그런 그녀가 전문무용수지원센터 제1호 상해재활수혜자라는 사실은 그녀의 거침없는 움직임에 더욱 감탄하게 한다. 그녀는 공연 중 부상으로 왼쪽십자인대가 파열되는 큰 사고를 겪었다고 한다. 무용수에게 부상은 치명적이고 아픈 기억임이 분명할 텐데, 그녀는 무대 위에서 오히려 그것을 유머와 웃음으로 승화시켰다. 그녀는 마치 ‘시련과 굴곡 없는 인생이 무슨 재미가 있겠냐’ 하며 웃어넘기는 것 같았다. 부상을 겪고 세월의 흔적이 물씬 느껴지는 중년 무용수의 몸은 아름답지 않을 수 없었다.

세 번째 몸. 크리스틴 플레처는 낮게 떨어진 조명 아래 통기타를 메고 앉아 나지막이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한다. 하이힐을 신으면 190cm가까이 되는 큰 키 때문에 그녀는 구두를 신을 수 없었고, 자신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려던 남자는 큰 키에 놀라 달아나 버렸고, 그녀를 따라오던 남자는 뒤돌아선 그녀의 얼굴을 보고 그 자리에 놀라 멈춰 섰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녀는 후렴구를 되뇐다. 그녀는 자신이 겪은 조금은 특별한 경험을 관객에게 털어놓는다. ‘성전환 수술’을 한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해 방황했던 시간들처럼 무대 위를 방황한다. 그녀는 전문적인 무용수는 아니지만 다른 두 무용수와 함께 무대 위에서 이리저리 자기 몸을 탐색하고, 그녀들은 자신의 옷 속을 그리고 서로의 옷 속을 들여다보며 언어와 인종을 넘어 같은 ‘여자’이자 ‘인간’으로 교류한다. 서로의 몸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고 또 진지하게 들여다보며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크리스틴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리라”하면서 “왜 이렇게 늦었을까”하는 약간의 후회 섞인 깨달음의 기쁨을 노래한다. 성전환 수술 후 그녀는 <Hybrid: A Viewing>, <Passport Revised>등의 글과 여러 노래를 통해 성적 중간자의 위치에 놓인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 및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녀의 몸은 누구보다 감추고 싶은 몸일지 모르나, 그녀는 이제 숨기지 않고 자기 몸을 진정으로 직시하고 사랑으로 감싸 안는다. 그녀의 용기와 자기애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고, 그들이 춤과 몸으로 하는 소통이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관객들은 이렇게 세 개의 몸을 보았다. 그러나 그 몸은 타자와 사회에 의해 대상화된 몸이 아니었다. 여기서 대상화는 단순히 남성이 여성의 몸을 성적인 대상으로 대상화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상품논리와 미디어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의 몸 모두를 하나의 상품으로 대상화하고, 우리는 이미 그것에 너무 익숙해 져있다. 내 몸이지만 내가 주체가 아니라 타자의 시선이 내 몸을 규정한다. 이는 곧 타자에 의한 대상화 일뿐 아니라 자기대상화(self-objectification)로 이어진다. 자신을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자신에 대한 타인의 관점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인식 아래에서 우리는 결코 똥배 축 쳐지고, 점점 주름이 늘어가는 내 몸을 견딜 수가 없다. 일반인도 이러한데 항상 관객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는 무용수가 중년이 된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 세 여성이 보여준 몸은 그런 대상화된 몸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들여다보고 발견하여 드러낸 몸이었다. 이렇게 이번 공연에서 그들이 보여주고자 한 것은 예술적 기교도, 몸의 아름다운 움직임도, 철학적인 메시지도 아니었다. 관객이 본 것은 ‘그들이 자기 몸과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자각하는 그 시간 자체’ 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관객과 교류하고 경계를 허무는 방법이었다. 공연을 소개한 한 기사는 ‘관객과의 대화를 도입하였으며, 대화 내용이 즉석에서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인터랙티브한 공연으로 관객이 작품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고 써놓았는데 공연에서 그런 부분은 없었다. 아마도 수정된 모양인데 내심 ‘다행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관객을 끌어들여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으로 그들은 충분히 경계를 허물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한 시간 남짓 이루어진 공연이었지만, 이번 공연은 이러한 가장 기본적인 ‘인간 소통 방식’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기에 충분한 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