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7일 화요일

<햄릿>, 사유하지 않는 삶에 대한 공포

by 시뫄

<햄릿>
오경택 연출
명동예술극장
2013/12/11

비극적 영웅은 치명적인 성격의 결함(hamartia)을 가지며 그 결함이 그를 파멸시킨다는 것이 전통적인 그리스 비극의 토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리스 사람들은 자신과는 다른 영웅이 자신과 같이 어떠한 결함을 가지기 때문에 결국엔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되는 것을 보며 카타르시스, 즉 정화 효과를 얻었다고 한다. 햄릿은 그리스 비극의 전형적인 영웅과는 다르다고 하지만, 내가 그동안 서구문화에 뿌리내린 수많은 햄릿과의 대면을 통해 느낀 것은 카타르시스와 비슷하다. 연민과 공포, 즉 그에 대한 연민을 통한 자기연민과 그의 고통에 대한 공포를 통한 또 한 번의 자기연민으로 늘 어디엔가 호소하고픈 내 영혼이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동안 책으로만, 혹은 기타 매체로 간접적으로만 접했던 <햄릿>을 드디어 무대에서 만나러 가는 내 기대는 미친 햄릿을 마주하는 카타르시스에 대한 그것이었다.


아버지의 (심지어 형제에 의한) 죽음, 어머니의 근친상간, 친구의 배신 – 햄릿을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가장 멀쩡해 보이는 것은 어쩌면 그가 16세기에 태어난 21세기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사회문화적 맥락에서라면 끔찍하게 여겨질 법한 일이 태연하게 일어나는 엘시노어의 그 세상 속에서 햄릿은 미치광이 취급을 당하고 (혹은 정말 미치고), 그 와중에서도 ‘내가 느끼는 나’, ’아버지가 원하는 나’, ‘어머니가 원하는 나’, ‘연인이 원하는 나’, ‘감시당하고 관찰당하는 나’를 포함한 수많은 자신들 사이에서 진정한 의미의 실존을 사유하는 햄릿이 나는 좋았다. 꼭 하이데거 식으로 "현존재의 존재적 관심사"로 이해하는 실존이 아니더라도, "무엇(what; 나는 누구인가)"이 아니라 "어떻게(how; 나는 어떤 삶을 사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는 햄릿은 비극적일지언정 숭고했다. 혹자는 우유부단한 성격, 즉 비극적 결함의 결과라고 보는 행동의 지연이 나에게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그래서 더 괴롭고 그로테스크한 그의 온몸의 절규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임에도 햄릿은 자신의 존재 혹은 운명이 “요구”하는 어떤 행동과 그로부터 "생겨나야만 하는"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했고, 그 탐색과 고민이 나는 참 안쓰러우면서도 사랑스러웠다.

그래서일까,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 사랑받는 만큼 남용되고 심지어는 자주 오용되는 <햄릿> 의 이 대사가 명동예술극장에 울려 퍼졌을 때, 세련된 무대와 조명, 그리고 감각적이고 조형적인 미쟝센과 배우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든게 시시해졌다. 많은 이가 기다렸을 햄릿의 이 독백이 연극 내내 들리지 않았다는 것(텍스트로 사용한 판본의 차이일까?)을 그때야 알아차렸을 뿐만 아니라, 저녁 내내 보아온 햄릿이 자신의 실존, 즉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 하지 않는 햄릿이었다는 사실이 나를 참 실망시켰기 때문이다. 이미 햄릿을 포함한 모든 주요 등장인물들이 죽어버리고 난 후, 어둠 속에서 시체들이 좀비처럼 일어나 중얼거리는 소리 위로 깔리는 햄릿의 나레이션은 이 대사에 담긴 실존에 대한 사유를 충분히 고민하지 않은 연출이었다. 죽음, 모든 것이 파멸한 후의 그 어떤 고민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비극이지만 희극적 요소를 잃지 않으려고 했다는 연출의 말처럼, 내가 그 저녁,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높아서 무대도 겨우 보이는 명동극장의 3층 좌석에서 몸을 앞으로 쭉 빼고 지켜본 햄릿은 관객을 웃기고 슬프게 하려 노력하기에 급급해 정작 자신에게 닥친 시련과 고통에 대해서는 고민할 겨를이 없어 보였다. “유쾌하게 살기라도 하지 않으면 어찌할 수 없는” 인생이 아니라, 사유하기를 회피하는 인생처럼 보였다.

마치 그가 고민을 내게 떠넘기기라도 한 것처럼, 연극을 본 후 내 삶은 갑갑해졌고 억울해졌고 그러다가는 급기야 시시해졌다. 나름 공연예술을 공부하는 학생이랍시고 무대 위의 신체며 소품 사용이 어쨌다느니 포스트드라마의 왜곡된 시도라느니 하며 잘 알지도 못하는 말을 궁시렁댔지만, 결국 내게 그 공연이 불만스러웠던 본질적인 이유는 마치 햄릿이 인간 삶의 고민을 모두 내게 떠넘긴 것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현실도피를 준비하는 나는, 일단 이 현실의 삶이 시시하다고 느끼는 것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며칠이 지난 지금, <햄릿> 의 관극 경험은 내 삶을 시시하기는 커녕 훨씬 더 재미있고 쫄깃하게 만들어줬다. 고작 연극 한 편에 이렇게까지 울고 웃는 내 삶도 썩 나쁘지 않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고 느낀 것에 대해 열정적으로 얘기하고 질문하고 때로는 서로의 의견에 반박할 수 있는 동료들이 있다는 감사한 사실을 새삼 알게 된 것이 더 큰 이유다. 역시 고민은 나만의 몫이 아니라는 이 당연한 삶의 진리를 우리는 자주 잊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