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9일 목요일

[특별 기획] 《손님》 합평

기획 및 정리: 산책


드라마인 필진들이 함께 <손님>을 보았습니다. 심하경이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함께 공부하고, 질문하고 때로는 서로의 의견에 반박하고 함께 투덜거리며 같이 감동하기도 합니다. 공연예술을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공연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지 같이 고민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과정일 것입니다. 우리의 글을 읽고 때로는 동의하고, 때로는 동의하지 못했을 독자들에게는 이 글이 또 다른 즐거움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드라마인은 이미 <손님>에 대한 에스티의 리뷰를 게재한 바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지난 리뷰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각자가 주목한 방식으로, <손님>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김재영
이 작품은 ‘손님’을 새로운 가족 구성원으로 맞이하는 어느 ‘이상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장님 딸과 신체가 불편한 두 아들, 그리고 비장애인 엄마로 구성된 이 가족이 왜 이상한지 공감이 잘 되진 않지만(단지 세 자녀가 장애가 있다고 이상한 가족이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엄마는 ‘손님’에게 그들 스스로를 ‘이상한’ 가족으로 소개한다. 이렇게 엄마가 자신의 가족을 이상하다고 소개하는 순간부터, 관객은 계속 의아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데, 등장인물 중 이상한 사람은 바로 비장애인인 엄마뿐이기 때문이다. 극의 전반부에 두 형제가 마음껏 뛰어 다니고 싶다거나 여자와 자고 싶다는 소망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의 모습은 정상적이고 솔직한 것으로 보이며, 그들에게서 특별히 이상한 징후는 발견되지 않는다. 장님인 딸 역시, 결혼할 사람을 만나기 위해 몸치장을 하며 설렘을 느끼는 모습이 순수해 보일 뿐, 그녀가 괴팍한 꿍꿍이를 감추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따라서 관객은 ‘이상한’ 엄마가 마치 자신은 정상인데, 애들이 이상해서 우린 이상한 가족이다라는 식으로 얘기할 때, 어리둥절해 진다.


이우정
극 중 엄마가 스스로를 ‘이상한’ 가족으로 소개하는 것은 진담이었을까, 아니면 농담이었을까?
실없이 놀리거나 장난으로 하는 말. 농담의 사전적인 정의다. 의례 이 실없는 말끝에 웃음과 질타가 쏟아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극 <손님>에서 두 장애인 배우가 주고 받는 빈번한 농담에는 그저 웃을 수만은 없다. 걷기도 힘든 상태에서 그들은 뜀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뜀을 넘어서 뛰는 순간에 맞는 바람을 원한다. 이 바람을 가지려면 절벽에서 뛰어내려야 한다. 뛰어내린 이후에는? 결국은 뻔한 죽음일 테고, 어쩌면 그들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절실함일 것이다. 그리고 극은 이 순간을 극은 그 뻔한 뮤지컬 넘버인 <지금 이 순간>으로 덮어둔다. 어이없게도 결혼식 축가 1위라는 이 넘버가 이 순간처럼 적절하게 쓰였던 적은 없었다. 스스로를 넘어야 하는 비통하고도 달콤한 순간이니 말이다. 물론 이러한 이해가 그들을 향한 일정부분의 연민이 근거하는 곳에서 발원함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스스로를 이해하고 삶을 보듬으려 웃음과 농을 생각하는 그들의 노력마저 가릴 수는 없다. 그래서 그들의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은 현학적인 시구처럼 바뀌어 우리에게 스민다. 그리고 마주 선 우리에게 되묻는다. 느껴지지 않지만 잊지 말고 느껴야하는 바람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최희범
백우람이 부른 <지금 이 순간>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하고 싶다. 고등학교 시절, 컴퓨터 수업 한 시간동안 조승우가 "지금 이 순간"을 부르는 동영상을 무한 리플레이하며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의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목소리, 클라이맥스 부분에서는 시원하게 올라가는 고음에 전율을 느끼며, 더불어 수려한 외모에도 마음을 빼앗기며 자신의 선택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를 노래하는 지킬이 된 조승우를 동경심 가득한 눈으로 보고 또 본 것이다.
  백우람도 같은 노래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도 참 좋다. 중후한 음색과 깊은 울림이 있는 것 같다. 그의 발음은 조승우만큼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의 노래는 조승우 못지않게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대사를 말할때보다 노래할 때의 발음이 더 정확한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노래를 더 많이 연습한 결과일까? 그의 노래는 조승우의 것만큼 힘차지는 않다. 좀 더 느리고(노래 직후 암전동안 조승우의 노래가 장면전환 노래로 사용되어 바로 비교할 수 있었다!!) 수수하다. 그러나 한 음절 한 음절이 정성스럽게 발음되고 불려지는, 말하는 듯한 노래이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려왔던 이 노래의 가사가 전혀 다른 맥락에서 매우 서글프게 들려왔다. 노래의 한마디 한마디가 달릴때 만들어지는 바람을 느껴보고자 절벽에서 뛰어 내리겠다는, 그리고 절벽에서 뛰어내리고자 먼저 절벽 위로 기어 올라가는 연습을 하겠다는 두 장애인 형제들의 말이 되어 마음을 찌른다. 불편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동정심이 고개를 들라치면, 그런 자신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저들은 나의 동정을 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책망하게 된다. 이러는 마음 속 혼자만의 왈가왈부 가운데, 내가 저기서 노래부르는 그 이를 더 이상 인물이 아니라 그 배우 자신으로 보고 있음을 깨닫는다. 백우람 배우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일까? 그냥 그렇다고 치부하고 이 생각을 끝내고 싶기도 하다.


심하경
백우람 배우 뿐 아니라 하지성 배우의 연기도 좋았다. 그렇다면 장애인 배우가 장애인을 연기하는 것과 비장애인 배우가 장애인을 연기하는 것은 다를까? <오아시스>에서의 열연한 문소리의 장애인 연기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라면 정말 실제 장애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럴듯하게 연기했을 것이 분명하다. 영화에서든 드라마에서든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연기하는 것(시각장애, 언어장애, 정신지체 등 다양한 장애 연기)에 우리는 이미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비장애인이 연기하는 장애인들을 보는 것은 어쩐지 서글프다. 아마도 장애인이 극에 등장하는 것에는 늘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 전제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손님>에서 휠체어에 앉거나 보조 기구를 사용해 겨우 서있는 지체장애인을 연기한 장애인 배우들은 실제 자신들의 장애보다 더한 장애를 연기했고, 자신들을 포함한 장애인들 전반의 현실적(신체적) 제약들에 대해 얘기하고 실제로 눈 앞에서 보여주었음에도 나는 그들의 연기를 보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 동정을 받고자 무대에 서있는 것이 아니었고, 배우로서 연기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적어도 자신들이 하고자 한 것을 잘 하고 있었다. 

산책 
심하경과 달리 나는 장애인에 대한 어떠한 편견이나 고정관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고 싶었지만, 무대 위에서 장애인을 연기하는 장애인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들 연기는 물론 진정성이 차고 넘쳤지만, 우리가 그들의 진정성을 이렇게 소비해도 될까, 하는 (죄책감에 가까운) 생각이 들었고 너무 힘들지는 않을까, (괜한) 걱정도 했다. 그런 걱정이 편견일 뿐이라고, 그들은 남들과 똑같은 배우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이렇게 10여 분간 나는 내 마음과 싸우면서 무대 위의 그들을 마주해야 했다. 무대 한 편에 수화 통역사가 계셨는데, 차라리 그분의 자유로운 움직임만 쳐다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극 후반부에 비장애인 배우가 등장하면서 나의 이런 불편한 마음은 그들에게로 옮겨갔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 장애인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이 비장애인과 다르기 때문에 불편할 수도 있지만, 이해해달라는 안내가 있었다. 이 안내가 무색하게 장애인 배우는 그들이 맡은 인물을 모두 보여주었다. 그러나 비장애인 배우들의 연기는 (정말 놀랍게도) 그렇지 못했고, 내가 가지고 있었던 어쩔 수 없던 한계는, 비장애인 배우 덕분에 넓어졌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무대 위에서는 똑같은 존재, 배우라고 생각하기에 극단 애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장애인에게 무대에 서는 기회를 주기 위해 극단이, 오늘의 무대가 존재했다고는 절대 믿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왜 비장애인 배우들은 완성도 있는 연기를 보여주지 못했나? 한 쪽에서는 장애인이 아니라, 등장인물이 되어 무대를 끌어가는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비장애인 배우들은 준비되지 않은 채 무대에 올라 그들의 밥상에 숟가락만 얹으려는 듯 보였던 걸까? 

김재영
비장애인 배우들이 등장하는 후반부에 대해서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엄마는 손님을 세 자녀의 노예이자, 희생물로 굴복시키는 과정을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데, 이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장애인을 강제하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냉소로 읽힌다. 극의 마지막, 개처럼 변한 손님이 엄마의 손에 이끌려 무대를 기어 다니는 모습에서 시니컬함은 최고조에 다다른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는, 엄마가 비록 가족을 위해 손님을 굴복시켰지만, 장애인 가족에게 ‘손님’과 같은 비장애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전제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이다. 엄마가 손님에게 ‘우릴 위해서 여기서 영원히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대사에서 어쩔 수 없이 비장애인인 손님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장애인 가족의 현실이 드러난다. 이처럼 이 극은 비장애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을 협박하여 굴복시키고자 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또한 엄마의 손님에 대한 투쟁(?)은 철저히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진행되는데, 정작 장애를 가진 세 남매는 손님을 굴복시키는 과정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으며, 그럴 의지조차 없어 보인다. 비장애인인 엄마가 비장애인인 손님을 개처럼 끌고 다니는 동안, 무대 양쪽 사이드에 위치한 장애인 형제는 엄마와 손님을 무기력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엄마의 일방적인 강요와 손님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탄생한 새로운 가족은 이전보다 더욱 위태로워 보인다. 영화 ‘가족의 탄생’에서 혈연 관계가 아닌 사람들이 가족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가족 간의 갈등과 불화를 해결해나가는 방식이 어느 한쪽의 인내와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보듬으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는 이러한 과정 없이, 가족의 필요에 의해 외부로부터 새로운 구성원을 일방적으로 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관객의 동의를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도 극 후반부의 괴기스러운 전개 방식과 엄마의 원맨쇼로 인해, 전반부에 나타난 두 형제의 소박하지만 솔직한 대화들이 빛을 잃어버린 것 같아 아쉽다.

산책 
‘괴기스러운 전개 방식과 엄마의 원맨쇼’라는 표현에 동의한다. 또한 비장애인 배우들이 장애인 배우들보다 덜 준비된 것처럼 보이는 데 조금 실망했다. 극단 애인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어떤 잣대로 나누지 말자고, 누구나 똑같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심하경 
나 역시 공연 진행이나 작품 선택에 있어서 정말 극단 애인이 장애에 대한 편견 없는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이미 그들 역시 "장애인 연극"을 보러 오는 관객들에 대한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