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2일 월요일

몰래 먹는 사탕 같은 달콤함: 인피니트와 뮤지컬 <인 더 하이츠>

글쓴이_시뫄

출처: 뮤지컬 <인 더 하이츠> 페이스북 페이지

나는 뮤지컬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다만 확실한 것은 뮤지컬이 다른 공연예술 장르에 비해 전반적으로 화려하다는 것이다. 가끔 뮤지컬을 보고나면 내가 눈과 귀를 마비시키는 스펙터클에 현혹되기만 하지는 않았나, 하고 자기반성을 하게 될 정도다. 우연히 버스 정류장에서 <인 더 하이츠>(이하 <하이츠>)라는 뮤지컬의 포스터를 봤을 때도 랩과 비보잉이 가미된 신개념 뮤지컬이라는 홍보 문구가 눈에 띠기는 했지만, 그 이유만으로는 그 작품에 흥미가 생기지는 않았다. 이미 모든 요소가 자극적인 뮤지컬 무대 위에서는 힙합의 자유로운 느낌이 잘 살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힙합 음악과 문화가 오늘날의 한국 대중문화에서 방송을 통해 전에 비해 손쉽게 소비되고 있는 것을 봤을 때, 뮤지컬에 힙합을 접목시킨다는 것 자체도 화제성과 관객몰이를 위한 전략으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닐까, 기대보다는 의심이 더 많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금 13만원을 주고 결국 뮤지컬계의 소위 “듣보잡”이라고 할 수 있을 그 공연을 보고 왔다. 단 하나의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인피니트라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두 명이나 나오기 때문이었다! <하이츠>는 뉴욕의 히스패닉 할렘이라고 불리는 워싱턴 하이츠라는 지역을 배경으로, 빈곤하고 차별받는 라틴계 이민자들의 삶에 대한 희망을 그린 뮤지컬이다. 2008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후 토니상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한국 초연인 이번 공연에는 인피니트의 메인보컬인 김성규와 래퍼 장동우가 각각 베니와 우스나비 역에 캐스팅되어 출연했는데(더블캐스팅을 넘어 트리플, 콰드러플 캐스팅이었지만), 특히 주로 랩을 하는 우스나비는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극을 이끌어가는 역할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VIP석 예매를 감행하게 됐다. 인피니트는 힙합 그룹이 아닌 댄스 그룹으로서의 정체성이 조금 더 분명한 그룹이고, 따라서 팀 내 래퍼의 위상도 그다지 높지는 않다. (활동 다양화의 일환으로 래퍼 두 명이 유닛을 결성해서 따로 앨범을 두 차례 내기는 했지만.) 따라서 인피니트의 일곱 멤버들을 두루두루 좋아하는 팬의 입장에서는 노래의 파트가 많지도 않고, 연기활동을 병행하거나 예능에 활발하게 얼굴을 내비치지도 않는 장동우에 대해 늘 어딘가 그리운 구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나 또한 그가 주인공 격의 배역을 맡은 뮤지컬을 결국에는 보게 될 것이었는데, 비싼 티켓 가격에 한번, 그리고 보고 나서 실망할 걱정에 두 번, 그렇게 몇 번이나 예매를 망설이기는 했다. 결국 망설이다 뒤늦게 예매전쟁(피의 티켓팅을 줄여 “피켓팅”이라고도 한다)에 참전해 12열에 VIP 좌석을 구했다. 괘씸하게도 공연장 1층 전체가 VIP석이라서 내 자리는 성에 찰 만큼 무대와 가깝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눈코입이 분명하게 보일 거리에서(“면봉”만 실컷 보고 오는 것은 면할 거리에서) 내 아이돌을 볼 수 있다는데, 종국에는 예매 전 망설임에 허비해버렸던 시간이 후회스러웠다.

아무도 캐스팅보드 앞에 서서 사진을 찍지 않는다. 팬질하러 왔다고 머글(팬이 아닌 사람) 친구들에게 자랑할 것도 아니고, 사실 인증샷이 필요 없기도 하다.

  사실 나는 그간 인피니트에 대한 나의 팬심을 일종의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로 여겨왔다. 공연예술을 공부하다 보니 “좋은” 퍼포먼스에 대한 내 나름의 관점과 기준이 생기게 됐는데, 종종 인피니트가 퍼포먼스로서가 아니라 멋지고 귀여운 이미지로 소비될 수밖에 없도록 자신들을 내보이는 것 같은 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그들을 여전히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인피니트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데뷔 초 내세웠던 칼군무 때문이었다. 사실 멤버 7명 중 2명을 제외하면 모두가 몸치에 가까워서, 제작자는 깔끔한 무대를 위해 칼군무를 하나의 전략으로 채택할 수밖에는 없었다고 한다. (인지도도 없고 춤을 잘 추지 못하는 신인 아이돌 그룹이 무대에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일곱 명 사이의 호흡뿐이었을 것이다.) 인피니트의 칼군무는 단지 일곱 명이 한 치의 오차 없이 박자에 맞춰 안무를 하는 것에 머무르기보다는, 마치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절묘한 타이밍을 맞춰 무대 위에 하나의 유기적인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제는 데뷔 6년차의 꽤 노련한 아이돌이 된 인피니트는 예전의 퍼포먼스와는 사뭇 다른 무대를 보여준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몇 번의 월드 투어를 거치며 안무 동작은 세련되고 여유로워졌지만, 안무 구성의 치밀함과 촘촘함은 예전 같지 않다. 화려해진 무대와 360도 카메라 같은 최신 기술을 사용한 최근의 “Bad” 뮤직비디오(https://youtu.be/BNqW6uE-Q_o에서 유튜브 앱으로 시청해야 체험 가능!)는 여전히 “칼군무”라고 할 만한 것을 보여주지만, 멤버 사이의 호흡과 퍼포먼스의 구성을 강조해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인피니트를 보여주기 보다는, 현란한 시각적 요소와 더불어 멤버 각각을 멋있는 모습으로 보여내는 것에 치중한다. 전보다 출연이 잦아진 예능 방송과 라디오, SNS 등 무대 밖의 연예활동 역시 멤버 각각의 귀엽고 친근한 모습을 강조한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데뷔 초에 인지도가 없는 상태의 신인가수로서 인피니트가 퍼포먼스를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면 이제는 다른 내세울 것들이 많아졌다는, 그들로서는 긍정적인 변화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의 멋있고 귀엽고 잘 나가는 모습이 대견하고 자랑스럽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다른 아이돌과는 달랐던 인피니트의 무대를 기억하는 (세련되지 못한) 나는, 요즘 유행한다는 EDM 비트의 감각적인 사운드와 시크한 안무를 보면서 퍼포먼스보다는 인피니트 자체를, 보다 정확히는 인피니트가 대표하는 “멋지고 좋은 것”만을 보게 되는 현상에 오히려 죄책감이 든다. 아이돌 스타로서, 멋지고 귀여운 환상을 제공하는 대가로 이익을 창출하는 아이돌 산업의 논리 속에서 인피니트 역시 그럴 수밖에는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그들이 “상품”이 아니라 “아티스트”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상처를 입는다.

출처: 뮤지컬 <인 더 하이츠> 페이스북 페이지

  마찬가지로, 뮤지컬이 언제나 화려하고 멋진 이미지로 가득한 무대로 관객을 한바탕 홀리고 마는, 그리고 막대한 관객 동원력과 값비싼 가격을 자랑하는 “문화상품”이 아니라, 그 장르 고유의 감각을 자극하는 방식으로써 감동과 울림을 주고 관객에게 각인되는 “예술작품”이기를 바라는 내 마음은 자주 좌절되어 왔다. 하지만 의심을 안고 잔뜩 경계한 채로 단지 인피니트를 보기 위해 관람한 <하이츠>는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라틴계 이민자 캐릭터들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랩과 비보잉은 어떻게 녹아들었을까, 걱정했던 부분들을 눈여겨보았지만, 보는 내내 크게 거슬리는 부분은 없었다. 인피니트를 제외하고는 실력파 뮤지컬 배우들이 주요 역할을 맡았고, 그들이 노련한 연기로 납득 가능한 세계를 구축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늘 지나치게 화려하다고만 느꼈던 뮤지컬 무대가 <하이츠>에서는 작품의 배경에 걸맞게 비교적 소박하고 친근하게 만들어져있어서 좋았다. 까칠하고 말이 많지만 속정이 깊은 동네 미용실 원장 다니엘라 역을 맡았던 최혁주 배우는 작지만 다부진 외모와 특유의 된소리가 두드러지는 말투까지 완벽한 라티나latina를 구현해냈고, 주요 여자 캐릭터인 니나를 맡은 김보경 배우는 귀에 꽂히는 발성과 다듬어진 톤으로 뮤지컬의 정석 같은 노래와 연기를 보여줬다. 뮤지컬 무대에 처음 서는 장동우도 본인에게 맞는 가사를 스스로 써서 랩을 해서 그런지 억지스럽게 들리지는 않았다. 물론 가끔 어쩔 수 없이 김성규의 발성이 듀엣 중 상대역인 김보경의 뮤지컬 식 발성과 두드러지게 대조되기도 했고, 연기가 처음인 장동우의 대사가 잘 전달되지 않는 등 인피니트의 연기가 살짝 튀게 되는 순간들은 있었다. 그리고 우려했던 대로 비보잉은 아주 짧게만 삽입되고 대부분의 춤은 뮤지컬 특유의 군무로 채워져서, 힙합 뮤지컬을 표방하기에는 랩과 비보잉이 그다지 매력적으로 구현되지는 않았고 심지어 구색 맞추는 정도로만 동원된 것처럼 보였다. 또 그 외에도 음향이나 안무의 사소한 부분들이 내 심장을 가끔 조여들게 했지만, 결국엔 학예회에 참석한 학부모처럼 그저 너그럽고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게 됐다. 내 아이돌의 학예회를 흐뭇하게 지켜보는 것, 나는 애초에 바로 그것을 하러 간 것이기도 했다.

  갈수록 많은 아이돌 스타가 뮤지컬에 캐스팅되고 있는 요즘, 뮤지컬 팬들 사이에서 그들의 실력에 대한 논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 인피니트를 좋아하고 아끼면서도 무대 위의 김성규와 장동우를 보며 그들과 뮤지컬 배우들과의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어쩌면 인피니트 팬이 아닌 다른 관객들보다 그 차이에 더 민감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뮤지컬 그 자체보다는 그 아이돌을 좋아하는 누군가에게는 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되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뮤지컬과 아이돌의 조합은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일단 무엇보다 뮤지컬 산업은 아이돌 캐스팅을 통해 유명한 뮤지컬 배우가 출연하지 않는 회차에도 평타 이상의 관객을 확보한다. 나처럼 학예회를 본다는 마음으로 예매하는 팬들은 공연의 이모저모를 뜯어보며 연출이나 작품에 대한 평가에 가혹하지도 않을 것이다. 게다가 한 번 이상 관람하는 팬도 많을 것이니, 뮤지컬 산업에서 아이돌 캐스팅이란 괜찮은 수익모델일 것이다. 나도 뮤지컬 자체에는 기대보다는 의심을 안은 채, 작품보다는 인피니트를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공연장에 갔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게 된 <하이츠>는 내가 보려고 하지 않았던 공연 형식에 대한 거부감을 조금은 완화시켜주었다. 예상했던 대로 새로운 형식의 혁신은 없었고 엄청나게 매력적인 뮤지컬 고유의 예술적 순간도 없었지만, 다음에 또 보고 싶을 만큼 노래와 연기를 아주 잘하는 뮤지컬 배우들의 퍼포먼스를 보았고 가장 중요하게는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이(우리 애들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보았다. 콘서트 무대나 예능 방송에서는 맏형이랍시고 다른 멤버들에 비해 애교 같은 것을 잘 보여주지 않던 성규가 “기싱꿍꼬또”부터 인피니트 대표 개인기인 전갈춤까지 보여줄 때, 나는 성규가 자신을 보러 온 팬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우스나비가 복권에 당첨되어 귀향을 앞둔 채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할머니를 그리워하며 울 때, 나는 (비록 손발이 오그라들기는 했어도) 우스나비를 연기하는 장동우가 귀여웠고, (그 슬픈 감정에 동화되거나 감동을 받지는 못했어도)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장동우가 자랑스러웠다. 다른 무대라면 메인보컬인 성규에 가려졌을 동우가 주인공이라니! 힙합 뮤지컬이라는 말도 안 되는 것을 할부 3개월로 예매까지 해가며 봤어도 그걸 봤으니 됐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들이 나를 대중문화의 노예로 여겨도 어쩔 수 없다. 예술이 아니면 어떻고, 길티 플레저면 또 어떠랴, 이렇게나 달콤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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