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9일 목요일

다양한 신체, 다양한 ‘이완’: 극단 애인의 <무무> 연습 참관기

글쓴이_최희범

지난 11월 7일 토요일, 극단 애인의 2015년 신작 <무무>의 연습실을 방문했다. 극단 애인은 “연기를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극단이다. 연기에 대한 탐구는 애인 작업의 큰 축을 이룬다. 대표 김지수씨가 “배우가 성장하는 극단을 만들고 싶었다”고 극단 창단의 이유를 밝힌 것을 보면, 이 극단에게 장애인 단원들이 연기자로서 성장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연습 참관의 목적은 극단 애인이 작품 연습 이외의 배우 훈련을 어떻게 진행하는지를 직접 보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공연이 임박한 시기라서 그런지, 아쉽게도 장면 연습과 런쓰루(도중에 끊지 않고 전체 작품을 연습하는 것) 외에 내가 보고자 했던 기본적인 배우 트레이닝을 볼 수는 없었다. 대신에 (무려!) 두 번의 런쓰루와 연출과 배우들이 서로 의견을 나누며 장면을 다듬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무무> 연습실, 내가 방문한 날이 극장에 들어가기 전 연습실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하지성 배우의 발전된 모습을 보게 된 것은 이번 연습 참관에서 얻은 의외의 수확이었다. 이 배우는 그를 무대에서 처음 본 2년 전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고, 표정은 풍성해졌으며, 호흡도 안정적이었다. 신체적 특성들로 인해 “원활하게” 말하고 움직이는 것에 ‘장애’가 있는 그의 목소리는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렁차지는 않았고, 발음도 부정확했다. 그가 갑자기 휠체어를 박차고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된 것도 아니고, 그의 근육들이 엄청나게 힘이 붙어서 전보다 확실한 제스처를 수행할 수 있게 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차이, 이런 성장을 만들어낸 것인가? 그는 무엇을 잘하게 되었기에, 나는 그가 연기를 더 잘하게 되었다고 느낀 것일까?

배우들이 트레이닝 하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강예슬 연출에게 평소 배우 훈련을 어떻게 진행하는지를 물어보았다. 강예슬 연출은 주로 “이완”을 목표로 신체 및 발성 훈련을 한다고 답해 주었다. 특히 연습의 초반에는 연습 시간 대부분을 할애할 만큼 이완 훈련을 중요시한다고 한다. 훈련을 통해 배우들은 매 연습에서 실질적인 신체 및 정신적 이완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몸과 마음의 상태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알게 된다. 공연이 가까워지면 신체, 발성 훈련은 배우 개인들에게 맡겨지는데, 초반의 훈련을 통해 자신의 몸에 대해 충분히 인지할 수 있게 된 배우들은 스스로 몸과 마음을 정비하는 시간을 가진다고 했다. 하지성을 비롯한 극단 애인의 배우들이 연기자로서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완’ 훈련 덕분인가? 관객 앞에 서는 배우가 마냥 몸이 늘어지는 식으로 “이완”할 수는 없을진대, 그렇다면 배우에게 있어서 이완이란 어떤 것인가?

<무무> 장면 연습, 오른쪽 뒤가 하지성 배우(스테판 역), 왼쪽 앞이 최종혁 배우(가브릴라 역)

이완 훈련은 극단 애인만의 독특한 훈련 방식은 아니다. 대부분의 배우 및 연출가들이 이를 중요하게 여기며, 많은 연기론이나 연기 훈련법들이 배우의 이완을 목적으로 명상, 호흡, 움직임을 접목시킨 트레이닝 방법들을 제시한다. 최초로 사실주의 연기 훈련법들을 체계화시킨 것으로 평가받는 스타니슬랍스키(Constantin Stanislavsky)는 ‘신체 이완(physical relaxation)’을 자연스럽고 진정성 있는 연기의 전제 조건으로 삼는다. 그는 스스로도 이완을 위해 요가 등을 훈련(수련)했으며, 이를 자신의 훈련법에 포함시킨다. 스타니슬랍스키의 전통을 따르는 많은 사실주의 연기 방법론들이 ‘이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과 유사하게, 코포(Jacques Copeau), 르코크(Jacques Lecoq) 등의 비사실주의 연기론들은 ‘중립(the neutral)’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 두 개념은 모두 어떤 ‘상태’를 지칭하는데, 많은 연기 방법론들에서 이런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적절한” 혹은 “좋은” 연기를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전제 조건이다.

장애 퍼포먼스 이론가이자 활동가인 캐리 샌덜(Carrie Sandahl)은 그녀의 논문 “중립의 독재: 장애와 연기 훈련(The Tyranny of Neutral: Disability & Actor Training)”에서 연기 양식과 상관없이, 한 배우가 인물을 연기하기 위한 기본 조건으로 간주되는 ‘이완’, ‘중립’과 같은 개념들이 장애인 연기자에 대한 배제의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녀는 특히 “중립 상태”라는 비유적 표현이 신체 외형, 움직임의 아름다움과 유연함, 자연스러움 등 이상화된 신체적 지표들에 의해서 평가된다고 말한다. 이로 인해 선천적으로 비대칭적이고 유연하지 못한 근육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 혹은 후천적으로 복구가 어려울 정도로 손상된 몸은 “적합하게 이완할 수 있는 신체(a body able to relax properly)”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적절하게 이완할 수 없는 신체는 연기를 위한 기본 조건이 충족될 수 없는, “연기 불가능한(disabled) 신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연기 교육 방법들에 내재되어 있는 이러한 논리가 장애인 배우들이 겪는 불평등을 “은밀하게” 심화한다고 말한다.

누군가 선천적인 호흡기 질환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깊고, 안정적이고, 자연스러운 “이완된 호흡”을 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다. 또한 선천적으로 굽은 등을 가진 누군가는 아예 운동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고, 아무리 운동을 해도 유연한 근육이 있는, 그래서 아름다워 보일뿐 아니라 안정되어 보이는 어깨 라인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인들에게 ‘이완’이란 도달할 수 없는 무엇인가? 애인의 배우들이 하는 ‘이완’ 훈련은 정확히 어떤 목표를 가지고 수행되는 것인가?

우리는 폴란드의 연출가 그로토프스키(Jerzy Grotowski)의 연기론에서 이 문제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약 어떤 여자의 흉곽이 길고 좁다면 그 여자는 연기를 하면서 대체로 횡경막을 시각적으로 통제하는 호흡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그 여자는 오히려 호흡에 척추를 이용하는 방법을 연구해야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물론 척추를 너무 의식하면 안 되고, 반응과 동시에 척추를 사용해야한다. 마치 뱀이 그러하듯이. 그것이 바로 생명의 반응이다. 척추를 막대기처럼 뻣뻣하게 경직시키면 결코 안 된다. 척추를 유연하게 하면 호흡도 자유로워질 것이다.”(예지 그로토프스키, 『그로토프스키 연극론』, 현대미학사, 2007, 나진환 편역, 84면)

이 부분에서 그로토프스키는 독특한 신체 조건으로 인해 연기자 호흡의 정석이라고 간주되는 복식 호흡이 불가능한 배우의 경우를 제시하고, 그녀의 신체에 맞는 호흡 및 발성법을 통해서 ‘생명의 반응’으로서의 자유로운 호흡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로토프스키는 연기 훈련 메소드를 고정시키고 “기술을 얻기 위한 기술”을 연마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러한 그의 연기론은 두 가지 측면에서 장애인 연기자들을 위한 훈련법 개발의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모든 훈련은 연기자 개인의 신체, 정신적 조건에 맞추어 개별화되어야 한다는 것과, 궁극적으로 모든 훈련은 고정된 형태 혹은 방식의 신체, 목소리, 말투, 호흡, 움직임과 같이 이상화된 목표를 얻어내기 위한 반복 연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두 가지이다.

그로토프스키는 고정된 목표를 추구하며 자신의 신체 작동 메커니즘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려는 것을 기계화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기계화는 부자연스러운 연행이나 가식적인 허행을 낳을 뿐 좋은 연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는 기계화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유기화를 주장하는데, 이는 배우의 신체가 무대 위에서 “본래적”(혹은 “일상적”) 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을 막는 ‘방해물(blocks)’을 제거함으로써 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이 방해물은 배우 개인이 가진 신체적 “약점” 혹은 특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배우들이 특정한 말투, 호흡, 이미지, 나아가 특정한 감정에 매몰되어 훈련이 습관적이고 상투적인 것이 됨으로써 훈련 자체가 방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로토프스키는 배우가 상투적인 연기가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자기폭로(self-revelation)’로서의 연기를 하려면, 매 순간 자신의 ‘방해’를 초월하는 경험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배우의 연행에서 진정한방해 요소는 물리적 약점 자체가 아닌, 무대 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가로막는 모든 신체, 심리, 정신적인 요소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로토프스키의 연극론에서 연기 훈련의 궁극적인 목표는 관객들 앞에서 자기-폭로를 실행하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배우를 양성하는 것이다. 배우의 자기-폭로가 연극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연극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그로토프스키의 연극론은 종종 “다른 사람들 앞에 있는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배우의 현존(즉, 자기-폭로)은 영적, 정신적 해방을 가능하게 한다”는 믿음에 근거한다고 해석된다(Phillip Auslander, From Acting to Performance: Essays in Modernism and Postmodernism, London; Routledge, 1997). 비록 그로토프스키의 연기론은 불확실한 형이상학에 불과하다고 비판받기도 하지만, 그의 연기론은 여전히 다양한 연기 양식을 시도하는 많은 배우 및 연기 교사들에게 활용되고 있다. 특히 그가 특정한 훈련법들이 절대적 효과를 지닌다고 간주되는 것을 경계한다는 점은 기술 및 ‘메소드’에 매몰되어 자칫 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는 연기 훈련들에 제동을 걸며 연기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준다.

그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훈련법들은 장애인 연기자들에게 바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로토프스키와 작업한 배우들의 대다수는 비장애인이었을 것이며, 이로 인해 그가 제시하는 훈련법들은 그와 함께 작업한 배우들의 신체 및 정신적 능력의 범위를 기준으로 만들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연기론은 이상화된 연기 훈련의 목표들, 방법론들을 거부하고 메소드의 개별화를 주장함으로써 다양한 특성 혹은 “약점”을 지닌 몸들 역시 이완된 무대 위 현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나아가 ‘이완’ 혹은 ‘중립’을 특정한 신체적 외형이나 소리, 말투 등의 시청각적 특성들에 국한시키지 않음으로써, 다양한 ‘중립’, 각기 다른 ‘이완’의 상태가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장애인 극단들이 그로토프스키 연기론을 배우 훈련에 적극적으로 도입해야한다거나, 하지성 배우가 틀림없이 이 같은 ‘이완’ 훈련을 통해서 연기자로서 성장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샌덜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그로토프스키를 포함한 기존의 연기 훈련들이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고, 사용되는 용어들로 인해 장애인 연기자들이 겪는 불평등을 심화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들을 앞에 놓고 장애인 배우들 혹은 극단들이 취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기존의 연기론이나 훈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훈련법들이 다양한 신체를 고려하는 부분들을 눈여겨보고 재해석하여 연기 훈련의 방식과 대상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이 아닐까? ‘주변화(marginalization)’된 신체가 무대에 오를 때 찾아오는 인식의 변화야 말로 극단 애인의 작업에서 찾을 수 있는 핵심적 가치이다.


애인에 의해 각색된 <무무>는 지적 장애인인 “게라심”(한정식 分)이 자유를 박탈당한 농노로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빼앗길 수밖에 없던 상황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또 다른 농노인 “에로쉬카”(백우람 分)의 대사, “나는 한 번도 무엇을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해봤단다.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내가 갖지 못한 건 사랑하는 마음이었어. 자유가 없었던 거지. 이 큰 저택에 몸만 묶여있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 갇혀 있었던 거야.”라는 말이 여운을 준다. 배우들의 말과 몸짓이 인간의 자유와 선택에 대한 이야기와 만나, 삶과 연극 및 연기 예술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에게 많은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무>는 11월 13일 금요일부터 12월 5일 토요일까지 성북마을극장에서 공연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