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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31일 토요일

리타: 진짜 중요한 건 내가 원하는 게 뭔지 그걸 아는 거더라구요

글쓴이_산책

리타, Educating Rita 


  공효진, 강혜정의 더블캐스팅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리타>의 원제는 Educating Rita로,대체 언제 결혼했는지 26세에 이미 주부이며, 미용사인 리타가 평생 교육원 수업을 들으면서 변화하는 이야기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리타의 촌스러운 드레스와 화장은 품위 있는 그것으로 바뀐다(놀랍게도 공효진은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었을 때는 귀엽고 사랑스러우며, 품위 있는 옷을 갖추어 입었을 때는 아름답다. 연말 연시 많은 관객에게 그녀의 모습은 다이어트, 운동 계획을 세우게 했으리라). 또한 배움이 쌓일수록 삼류 작가의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 했던 리타는 그 이름을 부끄러워하게 되며, 대학생들과 캠퍼스에 앉아 자유롭게 문학에 대해 토론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 집에 초대 받았을 때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그녀가 이제는 프랑스로 떠나자는 초대를 받는 아름다운 여성으로 변화한 것이다. 리타는 배움을 통해 변한다. 리타의 변화가 값진 것은 책을 읽고 에세이를 쓰고, 프랭크 교수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 스스로 이뤄낸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러한 리타의 변화는 무기력하게 술로 세월을 보내던 교수 프랭크마저 변화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가르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가르치는 상생일 것이다. 무대 위에서 자신의 무지, 무기력함, 허세를 드러내고, 서로 싸우던 그들은 두 시간 내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애쓴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다. 무언가 되는 것보다 자기 자신에 다다르는 것이 내 삶을 꾸려나가는 데 가장 어려운 도전인 것 같다. 그래서 지루하고 장황한 토론 속에 숨겨진 그들의 분투가 마음에 깊이 남는다.

 다른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이 작품은 1991년에는 <리타 길들이기>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 초연되었다. 연극열전시리즈 중 한 편으로 2008년 재연되기도 했다. 초연작과 재연작 모두 <리타 길들이기>라는 제목으로 공연되었다. ‘Educating’을 ‘길들이기’로 번역한 것은역자가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까? 천방지축 소녀가 지적이며 아름다운 여성이 되어 가는 과정과 그것을 이끈 남자 주인공(남성, 제도) 서사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 아닐까(무지한 남성과 여자 교수의 이야기로 바꾸어 생각해 볼 수 있을지, 불끈 의문이 솟지만 이 글에서 성 논쟁까지는 가지 말자). 그러나 앞서 서술한 것처럼 리타는 누군가에 의해 길들여진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다. (교육학 개론 시간에 배울 법한 이야기지만) 프랭크는 리타의 내면에 잠재된 욕구, 의지를 밖으로(ex) 끄집어 내준(ducare) 교육자이자 동반자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Educating을 번역하지 못하고 포기했다 해도 <리타>라는 제목이 훨씬 마음에 든다.

  그러나 프랭크가 리타를 길들이고 싶었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조금 남는다. 리타가 변화할수록 프랭크는 그녀의 변화에 질투를 느끼며, 그녀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자 친구와도 헤어진 프랭크가 리타에게 기대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리타의 열정과 저급한(혹은 비속한) 취향이 정의 상관관계를 이루는 것도 아닐 터인데, 그녀의 예전 모습에 애착(또는 집착)을 보이며, 이전에는 알지도 못했던 삼류 소설가의 작품을 상찬하는 프랭크의 욕망은 무엇일까? 리타의 욕구가 직설적으로 무대 위를 종횡무진 날아다니는 동안, 프랭크의 욕망은 (술을 사랑했던 그의 욕망까지도) 숨겨지고 사그라진다. 프랭크도 가르치면서 자기 자신에게 도달했어야 했을 터인데, 그러지 못한 한계를 가진 인물이라는 것이 아쉽다.

(유명) 배우의 무대 연기 


  공효진 배우의 연기는 기대보다 훨씬 좋았다. 결국 얼마 전 종영한  TV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의 '지해수'를 떠올리게 했으나, 리타라는 인물과 그녀의 변화를 설득력 있게 연기했다. 과거에도 유명한 배우들이 출연한 작품을 관극한 적이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어땠을지 궁금하다. 나의 경우, 무대 위의 배우들도 어색하고, 객석에 앉은 나도 그들의 연기를 보는 것이 민망했던 경험들이 떠 오른다.

  TV나 영화에서 연기로 호평을 받는 배우들이 무대에 설 때, 어딘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이유는 그들의 연기력이 문제가 아니라 스크린 연기와 무대 연기 사이에 (나름대로) 커다란 차이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스크린 연기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프레임 밖에 있는 배우는 연기를 지속하지 않아도 되며, 카메라, 편집, 스크린에 의해 매개되어 감상자에게 도달할 때까지 그 과정이 매우 복잡하다. 하지만 관객이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아주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배우들의 작은 동작이나 표정만으로 감정, 극적 표현을 전달하기 쉽다. 그러나 무대는 그와 다르다. 배우는 한정된 공간에 머무르며 가만히 서 있다고 해도 무대 위에서 연기를 지속해야 한다. 또한 그 가운데 객석과 호흡하고 소통해야 하는데, 영상매체에 비해 배우와 관객 사이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과장된 표현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TV에서 자주 보던 배우를 무대 위에서 만나는 순간, 배우도 관객도 서로 견디기 힘든 경험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다시 <리타>로 돌아와보자. 많은 관객들은 공효진 배우와 강혜정 배우를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점에 가장 큰 매력을 느꼈을 것이며, 나 역시 그러했다. 무엇보다 그녀들의 연기가 너무 궁금했다. 과연 그녀들이 무대 연기를 어떻게 해낼 것인가?  공효진은 프랭크(황재헌 분)와 무대를 등지고 서 있어야 할 때, 혹은 별다른 대사나 행동 없이 무대에 남아 있어야 할 때에 무대석(무대 위의 일부 좌석)에 앉은 관객들과 눈을 맞추거나 미소를 지어 보이는 여유를 보여주었으며, 특유의 발랄한 연기로 부자연스러워 질 수 있는 과장된 무대 연기를 자연스럽게 감추었다. 특히 무대석은 배우와 객석의 거리를 좁혀주며, 무대의 크기마저도 줄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08년 재연 작품보다 훨씬 줄어든 무대의 크기는 배우들의 움직임을 최소화할 수 있게 했다. 공효진 뿐 아니라 프랭크 역의 황재헌 역시 무대 연기에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다. 프랭크 역에 캐스팅된 배우가 건강상의 문제로 공연 직전 하차하게 되면서 연출이 대신 무대에 섰기 때문이다. 좁은 무대는 무대 연기에 익숙하지 않은 두 명의 배우가 무대 위를 움직이며 만들어 낼 수 있는 부자연스러움을 사전에 차단해준다.  TV나 영화와 (그나마) 익숙한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거의 가만히 서 있는 배우들 대신 무대 자체가 회전하거나, 연극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마저도 쉽게 눈치챌 수 있는 조명의 변화 등은 무대를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공효진의 연기, 연출의 전략은 무척 영리했던 것 같다(강혜정의 연기도 그랬으리라).

 앞서 밝혔듯이 기대보다 배우의 연기는 훌륭했고, 공연의 다른 요인들은 영리했다. <리타>로 인해 공효진 배우의 다른 무대 작품, 또 다른 유명한 배우들의 무대 연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2014년 10월 10일 금요일

<황금 연못>과 사랑의 올바름

에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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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조재현이 대학로에 세운 새 극장에서 <황금연못>이란 미국 드라마를 하고 있다. 이순재와 신구라는 걸출한 시트콤 스타 원로 배우가 더블 캐스트로 주인공 역할을 맡고, 여기에 그들의 부인 역으로 맞춤한 나문희가 출연한다. 덕분에 평소 대학로 극장에서는 보기 드문  중년 부부나 가족 단위의 손님들이 객석을 채우고 있었다. TV는 연극 무대에서 관객과 배우를 빼앗아 가기도 하지만 다시 데려오는 요물임에 분명하다.

스키장 리조트를 운영하는 기업의 극장이라 그런지 객석은 초보용 슬로프처럼 길고 완만하게 펼쳐져 같은 규모의 극장보다 많은 관객을 받을 수 있는 반면, 무대 폭은 좁아 무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이 자못 가파르게 펼쳐진다. 그곳을 자주 왕래해야 하는 노만 역의 신구 선생에게는 물론 누구에게도 인체공학적인 계단이 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미국 응접실 연극의 환경을 갖추고 있는 무대에 또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뒷무대 전체에 그려져 있는 커다란 '연못'의 이미지이다. 제목에서 즉각적으로 환기되는 것이지만, 엄밀히 말해 그 이미지가, 그리고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과연 연못이라 할 수 있는지는 조금 더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전에 따르면 연못이란 "연꽃을 심은 못"이고, 다시 못이란 "넓고 오목하게 팬 땅에 물이 괴어 있는 곳", 간단히 말해 작은 물 웅덩이를 일컫는다. 못이란 늪보다 작고, 늪은 다시 호수보다 작은 규모의 웅덩이를 지칭한다는 국어사전의 기준을 한편에 두고, 다른 한편으로는 pond를 영어사전에서 찾아본다. Webster 사전에 따르면 pond란 보통 lake보다 "작은" 물 웅덩이를 일컫는 것이다. 실제로 극에서는 집배원 찰리가 보트를 타고 우편물을 배달하고 있고, 첼시는 거기서 수영을 하고 있으며, 노만과 빌리는 릴 낚시를 하고 있다. 무대 배경 그림 역시 이러한 활동이 가능한 정도의, 그래서 우리가 보기엔 분명 호수로 보이는 것이 그려져 있다는 것 또한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확성을 기하고자 "황금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원작 제목의 전치사까지 살리지 않는 이상 황금못은 같은 색상의 망치가 먼저 떠오르고 말 것이다. 번역의 옳고 그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제목을 옮기는 것도 이렇게 복잡한 일이라면, 미국에서 만들어진 이 연극이 한국 배우에 의해 한국어로 공연되는 순간 상당히 다른 의미로 전달되고 변형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예를 들어, 극중에서 노만은 펜실베니아 대학 영문과 명예교수로 소개되고 있는데, 대부분의 한국 관객에게는 그 대학의 학풍은 커녕 그곳이 좋은 곳인지 아닌지도 전달되지 못한다. 또한 노만이 비록 자신에게 곧 다가올 죽음을 의식하면서 냉소적인 말들을 내뱉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부인의 아름다움에 반해있는, 꽤나 전형적인 가정적인 미국남자임을 머리로 알 수 있지만, 그러면서도 신구를 통해 (그리고 아마도 이순재를 통해) 내 눈 앞에 나타나는 노만이 자꾸만 한국의 아버지상과 겹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이 문제는 이 극의 중심 갈등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는다. 노만은 자기가 사랑하기로 선택한 여자에게 순정을 바치며 그 사랑을 표현하지만, 선택하지 않고도 사랑하는 또 다른 여자인 자신의 딸과는 잘 지내지 못한다. 첼시는 마흔이 넘도록 유년 시절에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은 아버지에게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고, 노만 역시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상태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네 상황에서는 딸바보란 말이 유행하듯 부인에게는 인색해도 딸에게는 너그러운 아버지들이 더 많다는 점에서 이런 상황이 낯설 수도 있다. (물론 대학교수는, 게다가 명문대 교수는, 누구든 잘 인정하지 못한다는 점을 덧붙이면 충분히 납득가능한 이야기가 된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기 까지가 어려울 뿐 갈등은 별로 특별한 계기 없이 해결된다. 미국의 한 리뷰에서 이 극을 "소박하고 아름답다"고 했다면 바로 이 심심한 갈등 해결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짧은 극은 사랑이란 주제를 다층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보다 문제적인 작품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 이 극에는 부부 간의 사랑이라는 적법하고 '정상적인' 사랑이 중심에 놓여 있으나, 그 주변으로는 실패한 사랑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랑도 함께 배치되어 있다. 에셀을 통해, 사실은 찰리의 전언을 다시 한번 중계하는 형태이긴 하지만, 언급되는 레즈비언 커플은 정도에 있어서는 노만과 에셀에 뒤지지 않고 시간에 있어서는 더 오랫동안 사랑하고 이제 세상을 떠나지만,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사랑이라 그들의 삶도 사랑도 이 황금못가에 숨기고 있어야 했다.

찰리와 첼시의 관계는 그저 찰리가 첼시에게 몇 차례 추파를 던지고 첼시가 거절하는 것 이상의 서브텍스트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공연에선 생략된 것으로 기억되지만) 찰리와 첼시는 어릴 적 서로에게 관심과 호감을 가지고 있던 사이였으나, 명문대 교수 아버지에겐 시골 마을에서 신문이나 배달하는 집배원이 결코 자기 딸의 짝으로 생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에셀이 찰리의 (이상한) 웃음까지도 사랑스럽게 보고 그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것은 이처럼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해 어머니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상 같은 것으로 보인다. 서양 드라마 전통에서 전령messenger이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줄 뿐 극의 중심에 놓여질 수 없는 운명이니(실제로는 그래선 안되겠지만) 찰리의 실연은 드라마적으론 대단히 정당한 일이다. 자꾸만 실없이 내뱉는 그의 웃음은 결코 웃을 수 없는 그의 심적 상태를 반어적으로 표현하는데, 다만 이번 공연에서는 그에게 주어진 얼마 되지 않는 출연 분량을 보충하기 위한 제스쳐로 느껴지기도 한다.

비록 영화 버전에 대한 리뷰이긴 하지만 로저 에버트가 이 극에서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은 부분은 첼시의 남자 친구 빌 레이가 노만과 둘이서 나눈 대화이다. 여기서 빌은 노만에게 그의 딸과 같은 방에서 자도 되냐고 허락을 구하는데, 여기서 빌이 구하는 것은 사랑의 적법성을 다시 한번 환기시킨다. 이 이상한 대화가 필요한 이유는 이후로 드러나듯이 두 사람의 사랑은 일반적이지도 적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유럽 여행 중 브뤼셀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돌아온 다음 빌은 그제서야 자기 아들의 엄마, 그러니까 전 부인과 관계를 정리하러 떠난다. 막장 드라마로 발전할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이 상황은 노만이 그 둘을 아무렇지 않은 듯 받아줌으로써 별일 아닌 것으로 정리된다. 노만이 자기 커플도 처음부터 적법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 결코 가볍지는 않다. 하지만 이 문제가 최소한의 정보만으로 어물쩍 넘어가지 않았더라면, 관객들의 비난을 면하긴 어려웠을 테지만, 이 극이 노년 커플의 소박한 사랑 이야기 이상으로 기억될 수 있었을 것이다. 입센 이후로 사실주의극은 언제나 관객을 불편하게 (해야) 한다. ㉦

로저 에버트의 영화 리뷰 링크
http://www.rogerebert.com/reviews/on-golden-pond-1981

한편, 진선미 의원이 동거를 법으로 인정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http://omn.kr/ahcw

postscript

이 글을 공개하고 난 뒤 뭔가 석연치 않아서 급기야 구글 맵에서 메인 주에 있다는 Golden Pond를 찾아보았다. 실제로 이 이름의 못은 검색되지 않지만, 이 지역은 크고 작은 pond와 lake가 아주 많이 있다. 아마도 석양에 황금빛이 된다고 해서 Golden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이를 통해 이 지역이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노만과 에셀 부부에게 매우 적합한 장소임도 밝혀진다. 흥미로운 것은 각각의 물 웅덩이의 이름들이다. 그곳에는 백두산 천지호 만한 크기에 버젓이 "pond"란 이름을 붙이고 있다. 물론 그것도 오대호에 비하면 연꽃이나 심을 작디작은 못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