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 왕> 4막에서 글로스터는 이제 그만 절벽에 몸을 던져 죽을 작정에 미치광이 톰에게 자신을 도버 해협으로 인도해달라고 부탁한다. 사생아 아들이자 배다른 동생인 에드먼드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글로스터-에드거 부자는 황야에서 그렇게 다시 만난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도버 근처의 들판에 도착하는데, 두 눈을 잃은 자신을 언덕 위로 데려가 달라는 글로스터에게 에드거는 이미 언덕에 도착했다며 언덕 아래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해준다:
자, 바로 여기입니다. 가만히 서 계십시오.
저 밑을 내려다보니 무섭고 현기증이 납니다.
하늘 중간에 날고 있는 까마귀나 갈까마귀는
딱정벌레 크기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반쯤 밑에는
바다 바위 틈에 나는 미나리를 캐는 사람이 매달려 있는데 —
그것은 참 위험한 직업이군요! 제 생각으로는
그의 크기가 자기 머리밖에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바닷가를 거니는 어부들은 생쥐같이 보입니다.
저기에 닻을 내리고 있는 큰 배는 그 배에 달려 있는
작은 보트의 크기밖에 안 됩니다. 그 작은 보트는 또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 부표와 같습니다. 이리저리로 밀리고 있는
수많은 자갈들에 부딪치는 파도소리도 별로 크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아물거리어
거꾸로 굴러떨어질까 두렵습니다. (<리어 왕>, 4막 6장, 이경식 역)
이 순간 무대는 가상의 들판이었다가 높은 언덕 위가 된다. 몸도 마음도 약해진 글로스터는 그 말을 믿고 몸을 던지지만 실체없는 절벽은 그의 생명을 가져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아들인지도 모르는 사내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열 개의 돛대를 이어 맨 것보다 높은 절벽에서 곤두박질해 떨어졌지만 기적같이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살아 났다고.
상상력이 제대로 발동된다면 이 대목은 셰익스피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엄청난 장면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시시한 장면에 불과할 것이다. 나에겐 이 장면이 약간은 마술과도 같이 느껴진다. 실제로는 아무 일도 없지만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개막한 극단 애인의 다섯 번째 작품 <손님> (윤정환 작/연출, 대학로 달빛극장)을 보면서도 이 장면이 다시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