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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2일 금요일

별일없이 화려했던

이파리드리, 별일없이 화려했던

에스티의 첫날밤에

약 4개월 간의 휴식이 끝나고 아트랩 공연이 재개되었다. 그 4개월 동안 대한민국은 밑바닥으로 계속 가라앉고 있다. 애써 감춰왔던 우리의 밑낯이 그야말로 낱낱이 드러난 것만 같다. 40일간 단식을 하는 사람, 그와 함께 단식을 하는 사람, 그를 대신해서 단식을 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러한 시위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 이제 그만 지겹다고 하는 사람도 목소리를 높인다. 온 나라가 짜증과 분노와 우울증에 빠져들고 있다.

맛있는 걸 먹는 것도, 아니 배고프다고 느끼는 것도 미안한 상황이다보니, 주변 사람에게 연극 보러 간다고 말하기 민망할 뿐더러 나 자신도 마음이 흥하지 않는다. 관객들만의 느낌은 아닌 것 같다. 영화인들에 이어 연극인들마저 광화문에서 단식에 들어갔다. 영화 <명량>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관객들이 영화속에서나마 현실의 리더쉽 부재를 보고 싶어서 뿐만 아니라, 이 영화가 단 한순간의 희극적 이완도 허락하지 않을만큼 엄숙하기에 이 상황에서 영화를 보며 즐긴다는 게 그나마 덜 미안하게 느껴져서이리라.

이파리드리의 "별일없이 화려했던"은 내 또래의 두 남자가 살아온 10여년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사소한 부분들이 너무나도 친숙하다. 오늘 극장을 찾은 관객의 절반 정도는 아마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것 같다. 장면 마다 최소 한번 쯤은 공감의 웃음을 이끌어 낸다. 그야말로 별일 없지만 80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무대 위에서 특별한 '극적' 사건은 벌어지지 않지만, 11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은 조금씩 벌어져 있다. 원하는 것을 하고 살지만 뜻한 대로 잘 되지 않는 것 같은 기현과, 인생 재미로 사는 게 아니라며 순응하되 열심히 살고 번듯한 직장을 얻은 성우. 이 둘은 매 장면마다 옷을 바꿔 입으면서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상대에게도 관객에게도 속내를 직접 털어놓지는 않는다. 관객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기현에게서 좋은 직장에서 돈을 많이 버는 성우를 부러워하는 기색을 읽을 수 있고, 직장도 있고 이제 가장이 되는 남부럽잖은 성우가 청춘이 마감됨을 안타까워 하는 것도 눈치 챌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게 특별한 것도 아니다. 좋게 말하면 보편적 정서를 섬세하게 다루는 것이지만, 다르게 말하면 "줄거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텅빈 무대에서 장면마다 큐브를 통해 장소를 암시한다. 연출은 "지극히 일상적인 극을 몇 가지 큐브로만 표현한다는 것이 자칫 위험한 선택일 수"도 있다는 우려를 표했는데, 기타, 노트북에 서류 더미들을 비롯하여 카스 맥주, 맛동산, 신라면과 같은 세세하고 리얼한 소품이 위험성을 다 덮어 버린다. 그러한 소품들이 관객들에게 즉각적으로 정서를 불러 일으키는 데 효과적인 건 사실이지만, 한입 먹고 남겨진 신라면처럼 일회적으로 소모된다면 큐브를 통해 얻고자 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 의문이 든다.

이야기는 2010년에 시작해서 1999년으로 갔다가 다시 2010년에 끝을 맺는다. 각 에피소드에서는 그 해를 기억하게 하는 인물들, 물건들이 언급된다. 몇년 후 이 작품이 다시 공연되면서 2014년, 그들이 서른 넷이된 해가 덧붙여지면 어떨까? 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로 그려질까? 그때 그들이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오늘은 어떤 모습일까?㉦

사진제공: 두산아트센터

2014년 6월 26일 목요일

바보 햄릿

에스티의 첫날밤에



대학로에 문제적인 포스터가 하나 걸렸다. 공연 포스터라는 이름을 하고 있지만 사실상 초상화 그 자체이다. 밀집모자를 쓴 한 남자가 웃고 있다.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그려져 있다. 한국 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이 도상을 그저 한 시골 촌부로 여길 순 없을 것이다. 여기에 초상화 상단에는 그의 별명 ‘바보’가 쓰여져 있으니 이 그림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너무나 명백해진다.

그(의 얼굴)에 대한 반응은 극명하게 나뉜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얼굴이 들어간 달력이나 걸개 그림을 자신의 가정이나 일터에 두고 지내고 있다. 이런 행동이 그에 대한 추모의 방식이라면, 반대로 그를 혐오하는 사람들 또한 나름의 방식으로 그를 소비한다. 이들은 주로 포토샵이라는 기술을 통해 그를 전혀 새로운 맥락 속에 배치시킨다. 그들은 가라앉는 세월호 유리창에서도 그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한다. 망자를 욕보임으로써 쾌감을 얻는 그들의 심리는 한편으로는 屍姦症(necrophilia)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어느 곳에나 그의 얼굴을 기입하는 충동을 느끼는 그들은 표면적으론 그를 조롱하는 듯 하지만 사실상 누구보다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해 말 <변호인>이란 영화가 개봉했을 때 제작사 측에서는 실존 인물의 이름을 좀처럼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감독이나 주연배우는 가급적 그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 않음으로써 이 작품이 특정 정치인과 세력의 전유물이 되지 않도록, 그래서 그를 지지하거나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의 노력은, 비록 뒤이어 개봉한 <겨울왕국>이 알 수 없는 대흥행을 이루면서 약간 빛이 바래긴 했지만, 관객수 1100만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반면, 지난 5월에 김기덕 감독은 <일대일>이라는 영화를 극장에 걸면서 이 영화가 “[그 분]에게 드리는 고백이자 자백”이라 밝혔다. 이 영화는 그를 직접 언급하거나 그의 일대기를 그린 것도 아니지만 감독은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라는 의제가 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불행히도 이 영화는 크게 실패했다. 관객수 7000명이라는 초라한 숫자로 개봉 8일차에 영화를 내려야 했다. 실제로 <일대일>은 감독이 말하듯 우리 사회에 결여된 상식에 대해 이야기 한다. 비록 때로는 영화밖 현실을 너무 노골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변호인>을 본 1%도 공감하지 못할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극장을 찾을 7000명이 김기덕의 팬인지 영화에서 그가 꿈꾸던 세상을 보고 싶었던 사람들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분명한 건 그 변호인의 실명을 직접 거론한다고 해서 관객들이 김기덕이라는 문턱을 쉽사리 넘어오진 않는다는 점이다.

<바보햄릿>은 이러한 흐름의 연장에 있다. 일단 첫날 공연에서는 포스터가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한 것 같다. 객석은 거의 만석이었고 적지않은 관객이 그에게 우호적인 그룹에서 단체로 극장을 찾은 것 같았다. 공연 중 객석은 더웠다. 난방도 냉방도 되지 않는 이 무렵 소극장이 늘 그럴 수도 있지만 배우들이 내뿜는 에너지에 관객들은 열심히 반응했다.

추모의 성격이 강한 공연임에는 분명했다. 극의 말미에는 그가 남긴 유명한 연설이 동영상으로 재생된다. 이미 관객들은 전반부에서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모난 돌이 정맞는다.”가 언급될 때 그 영상을 떠올릴 수 있는데, 마지막에 오리지널 버전이 재생되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에 무대 바닥에 놓여진 국화는 그를 추모하는 직접적인 제스쳐이기도 하고,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것이기도 하다.

<햄릿>의 주제를 애도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연결은 꽤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를 애도하는 것은 단순히 그를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으로 머물지 않는다. 극에서 직접 언급되기도 하거니와 그는 햄릿의 아버지 처럼 “나를 기억하라”하지 않고 “나를 버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버리는 일은 그대신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기억하고 슬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이번 공연에서 바깥 프레임을 이루는 기사 정정 에피소드는 결국 한 소시민의 각성과 변화된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실천을 강조한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겠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이 시점에서 이 연극은 먼저 간 그들을 남은 자들이 어떻게 기릴 것인지 질문한다.

“햄릿” 그 자체는 새롭지 않았다. 최근 트렌드에 따라 Shakespeare retold 방식의 설정, 테넌트의 <햄릿>에서 집중적으로 사용된 CCTV 등이 이 공연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무엇보다 이윤택의 <햄릿>과 닮은 점이 많다. 극 초반에 햄릿이 벗은 몸을 보여준다든지, 왕과 오필리어의 관계, 그리고 Closet Scene에서 햄릿이 어머니를 겁탈하려는 모습 및 왕비가 왕자를 달래주는 장면은 이윤택 버전의 되풀이라 할 수 있다. 햄릿이 오필리어에게 보내는 편지의 문구에서도 닮은 점을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 연출 자신이 이윤택 <햄릿>의 초대 햄릿이란 사실을 기억할 때 이런 아이디어들을 단지 이윤택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해아래 새로운 햄릿은 없다. 하지만 꿈이라는 상황 설정이 이 점을 가중시키는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러한 장면들의 정당성이 쉽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

7월 20일까지
대학로 아름다운극장 (070-8776-1356)

2014년 5월 9일 금요일

국립극단 <템페스트> 프레스 리허설

에스티의 첫날밤에

국립극단 450년만의 3색 만남 III <템페스트>
2014년 5월 9일(금)-25일(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연출 김동현
무대 여신동
조명 최보윤

일부러 폭풍을 일으켜 배를 조난 시키는 이야기. 어쩌면 이 시점 아니 시국에 도저히 해선 안될 연극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든 걸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프로스페로의 힘은 그저 부럽기만 하다. 한동안 우리는 연극을 보면서 바다, 배, 침몰 등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우리의 상처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 공연이 이번 사고를 맞춰서 기획된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이 시국에 '이런 연극'을 하는 것 또한 우리 사회가 아픔을 기억하는 한 방식이 되길 기대한다. 그리고 앞으로의 <템페스트>는 2014년 4월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이나 <템페스트>를 통해 연극을 죄지은 사람을 반성하게 만드는 힘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 힘은 주로 말을 통해 전달되는데, 특히나 이 작품은 "말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작품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에서 윤색을 맡은 김덕수 작가에 따르면 그 이유는 이 작품 자체가 "프로스페로 연출의 연극"이기 때문이다:

바다 한가운데 섬에서 벌어지는 <템페스트>의 모든 사건은 섬주인 프로스페로의 말에서 시작하고 그의 말로 끝난다. 나폴리 왕 일행의 배가 난파당하는 첫 장면을 비롯해 작품 전체가 프로스페로 연출의 연극이기 때문이다. 내 말대로 하라는 연출자 프로스페로의 지시와 말씀대로 했다는 무대감독 에어리얼의 보고가 사건들마다 반복된다. 둘이 주고받는 말은 부부의 눈짓과도 같은 신뢰의 언어이다. 친밀한 신뢰의 말은 처음 만난 청춘남녀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조난당한 나폴리 왕자 페르디난드는 낯선 섬에서 만난 미랜더가 자기 나라 말을 쓰는 것을 듣고서야 그냐가 여신이 아니라 지상의 처녀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그 말로 사랑을 나눈다. (프로그램, 4)
아쉽게도 8일 오후에 있었던 프레스 리허설에서는 세 장면 정도를 부분적으로 시연했기에 그 말들이 구체화되는 모습은 부분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배가 난파되는 첫 장면에서 그 긴박한 상황을 배우들이 무대 앞에 있는 마이크 앞으로 나와 '말함으로써' 보여준다는 점이나, 캘리번이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 '스피커'라는 점은 그의 '괴물성'을 말에서 찾고 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오달수의 캘리번에 대해 많은 관객들이 궁금해할 것임이 분명하지만, 이날 리허설에서는 맨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 아주 잠깐 출연할 뿐이었다.) 그외에 여러 배우들이 함께 약속된 움직임을 사용해서 장면을 만들어가는 방식이나 다양한 소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은 김동현 연출의 이전 작품들의 스타일을 공유하고 있다. 무대에는 쓰러져 가는 극장 무대가 펼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또한 이 작품이 프로스페로의 연극임을 드러내고 있다. 프로스페로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서 옷을 갈아입는 것 역시 지극히 '연극적'이다. ㉦







2014년 4월 18일 금요일

<알리바이 연대기> 리뷰를 대신하여

by 에스티

지난 해 많은 관심과 호평이 있었던 <알리바이 연대기>의 재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월초에 오늘 첫공연을 예약했었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극장에 갈 기분이 아니었지만 공연을 보고 나왔습니다. 가는 길에도 새로운 뉴스를 열어보고 무소식에 실망하는 일을 반복했었습니다. 화가 났고 지금도 화가 납니다. 이것 밖에 되지 않는 우리 모습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 부끄럽고, 아이들이 어른들의 잘못을 떠안는 게 너무 미안합니다. 기자들은 이번 사건과 관련한 모든 팩트들을 찾느라 분주합니다. 정치인들은 자기를 뽑아주면 이런 일이 없을 것처럼 기웃거립니다. 죽은 자들과 유가족 앞에서 자기들은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역겹습니다. 하지만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것밖에 되지 못하도록 만들고 방치해온 우리들 모두의 탓입니다. 천안함, 공주사대부고 해병대 캠프, 경주 리조트 붕괴 사고 때 내 잘못은 아니라며 우리가 만들었던 알리바이의 결과를 우리는 오늘 보고 있습니다.

ⓒ권은비 http://omn.kr/7u4h

2014년 4월 5일 토요일

[에스티의 첫날밤에] 노래하는 샤일록

450년만의 3색 만남 II - 노래하는 샤일록

공연기간 2014년 4월 5일(토)-20일(일)
화-금 20시, 토/일 15시, 월 쉼
원작 윌리엄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극본/연출 정의신

국립극단의 셰익스피어 연작. 지난 달 <맥베스>에 이어 이번에는 <베니스의 상인>이다. <베니스의 상인>은 셰익스피어의 국내 수용 초기에 가장 인기 있었던 작품이기도 한데, 특히나 이 작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인 샤일록은 지금도 거의 주인공처럼 여겨진다. 사실 나머지 인물들의 이름은 상당히 까다롭다: 안토니오, 밧사니오, 포샤, 로렌조, 제시카 정도가 그나마 기억할만 하고 나머지 이름들―그라시아노, 사리니오, 사루니오, 네릿사 (프로그램에 따라 표기)―은 발음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그라치아노Gratiano 라든지, 레오나르도Leonardo 같은 이름들은 이 이야기의 배경이 베네치아라는 점과 코미디라는 사실을 강하게 드러낸다. 아마 지금 우리식으로 하면 인물의 이름이 카푸치노, 마키아토 정도일테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아무튼 중요한 것은 우리는 <베니스의 상인>하면 샤일록이 먼저 떠오른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누가 샤일록이 제목에서 말하는 바로 그 베니스의 상인이라고 말하더라도 이상한 점을 쉽게 눈치채지 못한다. 그만큼 비록, 프로그램에서 강태경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베니스의 '상인'은 안토니오이고, 샤일록은 '고리대금업자'이지만, 우리에게는 이 작품에서 샤일록이 중요하게 느껴진다는 말일테다.



3색 만남의 제목이 <베니스의 상인>이 아닌 바람에 서두가 길어졌다. 정의신 연출은 이번 공연의 제목을 <노래하는 샤일록>이라 이름 붙였는데, 결과적으로 이 제목은 공연의 특징을 잘 요약하고 있다. 기본적인 이야기 줄거리는 원작을 따라가지만 샤일록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고자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고, 일부 장면은 뮤지컬에 준할 정도로 노래와 음악 사용이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번 공연은 이 작품이 흔히 비판받는 반유대주의적 시각을 수정하기 위해 극작가이기도 한 연출가가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고쳐쓰고 있으며, 그에 따라 제시카와 로렌조의 서브 플롯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아버지의 재산을 훔쳐 로렌조와 함께 달아났던 제시카는 로렌조의 망나니짓에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고 아버지 곁으로 다시 돌아간다. 원작에서 샤일록이 딸의 도주보다 재산을 잃은 것을 더 마음 아파했다면 이번 공연은 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좋은 아버지로 그려진다. 심지어 돈 대신 안토니오의 살점을 떼내는 일에 있어서도 원작에서는 안토니오의 반유대주의적 고리대금업 방해 행위에 대한 앙심을 동기로 설정했다면, 정의신의 샤일록에게 있어 그의 살을 요구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망가진 딸에 대한 복수로 그려진다. 반면 로렌조는 사랑하는 여자의 재산을 도박으로 탕진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샤일록의 인간미가 부각되는 만큼 로렌조는 나쁜 남자가 될 수밖에 없다.




정의신 연출은 인터뷰에서 안토니오의 우울증을 설명하기 위해 동성애를 가져왔다고 밝히고 있다(25). 동성애는 직접적인 언급이나 재현으로 나타나기 보다는, 안토니오가 밧사니오를 비롯한 친구들이 보이는 유대인 혐오에 동참하지 않고 오히려 샤일록에게 연민을 보이는 태도에서 그 또한 또다른 의미에서 소수자임을 표명한다. 포샤 또한 죽은 아버지가 남겨놓은 유언 때문에 자기 뜻대로 삶도 사랑도 누리지 못한 불만을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희극이 이렇게 진지해도 되는 걸까? "희극적 카타르시스"를 바라고 온 관객들이 결말에 당황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정의신은 상관 없다며, 오히려 관객이 당황하기를 바란다고 답했다(24). 어쩌면 정의신의 이름을 보고 극장을 찾는 관객들은 이 정도로 당황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재일교포 출신의 작가가 이 문제에 무감각하다면 더 이상하게 느껴졌을 테니까. 대신 이 진지함과 함께 공연은 시종일관 웃음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어릿광대 란슬롯은 원작의 재담 대신 슬랩스틱으로 관객에게 웃음을 제공한다. 여기에 안토니오의 네 친구들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가며 관객들을 즐겁게 해준다. 그리하여 전체적인 정서적 흐름은 희극과 비극을 오가는 걸로 느껴지는데, 그만큼 그 두 장르는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임을 보여준다.

이번 작품에서 모로코는 보라색 의상을 입고 있지만, 원작에서는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모로코 군주에 대해서만 "위아래로 흰옷을 입은 황갈색의 무어인"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Enter Morochus a tawnie Moore all in white,"   

그중에서도 단연 큰 웃음을 선사하는 인물은 구도균이 연기한 그라시아노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웃음은 무대 위에 구현된 베니스의 지형 지물 (다리와 곤돌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만들어진다. 또한 전반부에서 연기했던 모로코대공의 강렬한 이미지가 후반부의 그라시아노에게 겹쳐짐으로써 그의 말과 행동은 하나 하나가 웃음을 만들어낸다. 코미디를 기대하고 온 관객들에게는 그의 연기만으로도 세 시간이 즐거우리라. 하지만 모로코대공이 만들어내는 웃음은 가장 성공적이기에 곧바로 이번 공연의 방향성과 직결되는 질문을 만들어낸다. 샤일록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과 모로코대공에 대한 웃음은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단순히 구도윤의 뱃살과 헐떡거리는 숨소리에서 웃음을 참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검게 칠한 몸 색깔과 손에 쥔 언월도, 수건으로 대충 말아 올린 터번이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는 반아랍 정서를 건드리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고 해도, 배 나온 사람은 웃음거리가 되어도 괜찮은 걸까? 과연 도덕적으로 완벽한 웃음이란 가능한 것일까? ㉦

덧붙임
벨몬트 포샤의 집으로 설정된 공간에 등장하는 촛대는 그 형태가 유대인의 상징인 메노라(Menorah)를 강하게 시사한다. 혹시나 싶어 관계자에게 포샤를 유대인으로 설정한 것인지 물어보았으나,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들었다. 애초 샤일록의 집에 사용될 것으로 만들어졌다가 리허설 과정에서 새주인을 만난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공연 사진 더보기:
https://www.facebook.com/media/set/?set=a.541617609290750.1073741830.472276802891498&type=3&uploaded=26


2014년 3월 8일 토요일

450년만의 3색 만남 1 - <맥베스>

국립극단 <맥베스>

2014년 3월 8일(토)~23일(일)
명동예술극장
공연문의 1688-5966 (국립극단)

에스티의 첫날밤에 (프레스 리허설)


(재)국립극단에서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작품 세 편을 연속해서 무대에 올린다. <맥베스>는 그 선두 주자로 3월 8일부터 23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이병훈 연출은 텍스트에 직접적인 변형이나 가공없이 원작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전달한다. (이 작품에서 인물들의 거짓말 연기를 강조하지 않는 이상 말콤과 맥더프의 대화 장면이 생략된 것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 "유혹"을 중심 키워드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유혹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세 마녀들은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내는 의상과 짙은 화장을 한 팜므 파탈 무리로 그려진다. 



물론 맥베스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여성은 언제나 그의 부인 레이디 맥베스이다. 지난 겨울 국립극단에서 해경궁홍씨 역을 맡았던 김소희가 이번에는 사도세자보다 더 무서운 남편을 둔 여성을 연기한다. 사실 이 역할은 여배우라면 누구나 한번쯤 도전하고 싶은 배역이지만, 인물의 심리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연출의 말을 통해 이 공연이 어떤 방향을 선택했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맥베스 부부는]사랑하는 ... 사이지만 아이가 없음으로 해서 끈끈한 유대관계를 갖기 어렵다. 관계 유지를 위해 아이를 대체할 조건을 찾아야 한다. 게다가 남편이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전쟁터에 나가있는데다 아이가 없으니 맥베스 부인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무기력과 외로움에 젖어있던 맥베스 부인에게 마녀의 유혹은 재밌는 것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일순간 불이 붙을 수밖에 없다. 남편에 대한 맥베스 부인의 사랑은 강력할수록 파괴력도 크다. ...악행을 저지르던 맥베스 부인은 왜 두려워졌을까.  저 깊은 곳에서 왕좌를 얻었으나 물려줄 사람이 없다는 두려움이 몰려왔을 것이다. 남편이 등을 돌리는 순간 철저히 혼자로 남게 되는 그 고적감,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프로그램 내 "연출 인터뷰" p.29)

글래머러스한 여인을 마녀로 설정하고, 아이가 없는 무기력한 여인이 왕을 죽이는 모험을 감행한다고 해서 이번 공연이 연출가의 여성혐오가 두드러진다고 말하지는 말자. (작가가 이미 그런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비극은 온전히 맥베스가 책임질 일이지 마녀나 부인 때문에 파멸했다고 말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유혹"이 아니라 "핑계"라 말하고 싶다.) 물론 덩컨 왕을 시해하기까지, 그리고 그 직후까지도 맥베스는 갈등하고 손에 묻은 피를 보며, 그리고 그 순간 들려오는 문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괴로워하면서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부터 맥베스는 아주 능청스러운 연기를 거뜬히 해내고 왕좌에 오른다. 박해수가 연기한 맥베스는 이 장면에서 탁월한 연기를 보여준다. 그 이후로 맥베스의 마음이 편안한 것은 아니다. 누가 자신에게 잠재적인 위협이 되는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 양심에 괴로워하지는 않는다. 맥베스는 잠을 대가로 내놓음으로써 범인들의 도덕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반까지 등장하던 침대는 이후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맥베스의 자리는 이제 침대가 아니라 왕좌로 고정된다. 비록 잠시 동안이라도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기 어렵고 오히려 그 자리를 쳐다보는 시간이 더 많다는 데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  

소품으로 사용되는 검이나 방패, 그리고 타공된 철제 패널로 만든 스크린 등이 관객들에게 무게감을 전달한다. (핵심 관계자에 따르면 검이 상당히 무거워 벌써부터 한쪽 팔만 점점 두꺼워지고 있다고 한다.) 철제 스크린에는 이미지나 영상이 투사되기도 하고, 움직이는 버남 숲 또한 철제 방패 위에 영상으로 만들어진다. 얼핏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요즘 시대에 영상을 사용하는 게 어느 누군가의 독점적인 아이디어일 수는 없듯이, 그것이 어떤 면에 투사되느냐 또한 누가 먼저인지를 굳이 따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말컴의 병사들은 군인이라기 보다는 시위를 진압하는 기동대를 연상하게 한다. 시국에 민감한 관객은 이 장면이나 몇몇 대사들에서 우리의 정치 현실과 접점을 찾고 싶을 수도 있고, 그래서 더 노골적이지 못한 게 아쉬울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갑갑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인류의 보편적 유산인 셰익스피어를 보러 왔는데, 극장안에서마저 바깥의 지리멸렬을 떠올려야 하는 게 피곤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정치 싸움이야 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임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맥베스>인 것을. ㉦


드라마인 페이스북 페이지로 오시면 더 많은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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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28일 금요일

[두산아트랩-6] 바바서커스 <외투, 나의 환하고 기쁜 손님>

by 에스티


처음엔 좀 의아했다. 두산아트랩 공연이 만7세 이상 관람가일 이유는 없는데 말이다. 실제로도 오늘 공연에는 7세 어린이가 참석하지 않았고 앞으로 남은 이틀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다. 의문은 공연을 보고나니 금새 해결되었다. 바바 서커스는 남녀노소 다 즐길만한 공연을 만들 수 있는 팀이라는 것을.


노문학도들은 기뻐해야 한다. 신체극을 지향하면서 가면까지 손수 만드는 이 재능 많은 연출가가 하필 고골을 좋아한다는 것을 말이다. 고골 이야기의 그로테스크함은 그런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가면들로 전달되고, “공중에 붕 떠서 흔들거리는 [고골의] 도시와 사람”을 표현하고자 배우들은 무대에 매달린 공중그네를 타고 논다. 뿐만 아니라 첫 장면에서 무대 뒷 벽면에 투사된 눈송이들 사이를 다 헤어진 외투로 힘겹게 헤쳐나오는 아까끼 아까끼에비치의 모습은 흡사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는 듯한 환상을 만들어 내면서 관객을 극속으로 인도한다. 그동안 아트랩에서 신체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여러 팀을 봐온 터라 움직임 자체가 특별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오래전 읽었던 소설을 되뇌이게 하는 솜씨가 퍽 유쾌하다. 아까끼가 새외투를 입게되는 시점까지가 대략 공연의 전반부인데, 후반부에 비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1) 초저녁잠이 많은 나의 탓도 있을 테고 2) 또한 아까끼가 새 외투 하나 장만하는 일이 뭐가 그리 어렵고 고된 일인지 요즘같이 옷이 흔한 시대에는 실감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연에서 밝혀준 대로 하급 공무원 연봉의 대략 3분의 1이라고 환산해보면 결코 작은 돈이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옷은 옷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공감하기 어려운 일이다.

복사기가 없던 시절 인간 복사기 노릇을 했던 하급 관리 아까끼의 인생은 외투를 입는 그 순간 아주 잠시 행복의 극치를 맛본다. 영화 <매트릭스> 셋째 편에 보면 네오와 트리니티가 기계 도시(the Machine City)로 비행해 가는 길에 아주 잠시 구름 위를 솟구쳤다가 다시 내려오는 장면이 있는데, 시종일관 어두웠던 그 장면에서 단 한순간 밝은 빛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트리니티의 감탄사가 인상적이었던 그 순간을 지나면 그들은 다시금 어두 침침한 아래로 내려가게 된다. 아까끼 또한 잠시잠깐 지복(至福)의 상태를 경험하고선 이내 그 옷을 빼앗기고 마는데, 새옷을 강탈당하는 그 모습보다 우리를 더 안타깝게 하는 것은 아까끼가 다음날 (실제로는 다음다음날) 예전 외투를 입고 다시 출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장면 이후로부터는 이 이야기가 결코 먼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뻬쩨르부르그에서외투를 강탈당한 아까끼는 소치에서 금메달을 빼앗긴 김연아와 겹쳐진다. 아까끼의 탄원을 듣고도 자기 머리 만지기에 바쁜, 공약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건 잘하지만 정작 그 자리(공중그네)에 앉아 있는 것도 잘 하지 못하는, 그 여 기관장에 대한 불만은 우리 사회에서도 낯익은 모습이다. 공연은 아까끼는 외침으로 끝난다. 새 외투를 강도당했다고. 좀더 크게 한번 더 "새 외투를 강도당했다"고. 난 이게 열린 결말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외투는 빼앗겼고, 다시 찾을 방법은 없는데 무슨 가능성이 있단 말인지 모르겠다. 김연아는 금메달을 빼앗겼고 올림픽은 끝이 났다. 선거는 끝이 났고 김연아를 본받아 결과에 승복하라 한다. 다른 가능성이 있는가?




(두산아트랩 2014 상반기 연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2014년 2월 22일 토요일

헤이노니 타루: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

by 에스티

(전날 또 다른 판소리를 봐야하는 바람에 첫공연을 아쉽게 놓쳤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틑날밤에"입니다. )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소개하던 날 그는 당시 대세였던 스마트폰 블랙베리의 물리적 키보드가 가진 지저분함을 디스하면서 아이폰의 터치스크린 시대가 올 것을 예견했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고 심지어 블랙베리 역시 터치스크린 폰을 생산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왔다. 비록 그날 이후 우리는 고질적인 오타에 때로는 심각한 사고를 치는 일도 겪고 있으며,  급기야 아이폰에 블랙베리식 키보드를 붙일 수 있는 케이스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터치스크린은 출력과 입력이 공간적 구획으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던, 그래서 우리의 사고 또한 거기에 맞춰 움직여야 했던 시절에서, 이제는 커다란 (점점 더 커지는) 스크린이 필요에 따라 입력 장치가 되기도 하고 출력 공간이 되는 유연함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국악뮤지컬집단 타루(www.taroo.com)의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에서 나는 아이폰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유연함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햄릿>을 판소리로 한다. 그리고 네 사람의 배우 또는 소리꾼이 때로는 다같이 햄릿을, 또 때로는 이야기 속 인물들을 연기하기도 한다. 이 시도는 <햄릿> 하면 떠올리게 되는 ‘정통적’인 이미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하지만 <햄릿>의 비평사나 공연사를 조금 살펴보기만 해도 이런 시도 자체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 폴란드 출신의 저명한 연극 평론가 얀 코트에 따르면, “<햄릿>에 관한 연구 논문 목록은 바르샤바 전화번호부 보다 두 배나 두껍다”라고 한다. 아직도 전화번호부가 만들어지는지 의문이지만, 그리고 그때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은 전화번호도 많이 늘었겠지만, <햄릿>에 대한 연구 목록은 거의 작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만큼 학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다양한 시도가 끊이지 않는 이 <햄릿> 판이다 보니, 판소리 <햄릿>이 만들어진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클로디어스가 말하는 자연의 순리(“This must be so.”)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사실 단순히 국내 인지도를 생각할 때 판소리 브레히트보다는 판소리 셰익스피어가 먼저 등장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뮤지컬 <햄릿>이라는 범주에서 놓고 비교하더라도 이번 작품은 뛰다의 <노래하듯이 햄릿>이 전통문화를 적극 활용한 음악인형극이나 체코에서 제작되어 국내에서 오랫동안 공연된 뮤지컬 <햄릿> 의 뒤를 잇는 것이다. 따라서 후발 주자로서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는 단순한 형식적 변신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어야 했는데, 다행히도 텍스트에 접근하는 방식이나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에서 기존의 작업들로부터 발전된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14년 2월 21일 금요일

이자람의 비극하는 마음을 응원하며: 두산아트랩-5 판소리 단편선 <추물/살인>

(질문할 기회를 놓쳐 공개 서신 형식을 빌어 씁니다.)

이자람 예술감독님께,




저는 오늘 이런 질문을 가지고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과연 창작 판소리에서 제대로 된 추임새라는 게 가능할까?사실 저의 질문은 '처음 듣는 소리에 어떻게 추임새로 반응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지만, 오늘 공연 중 <살인>에 대해서는 아티스트 토크 시간에 얘기가 나왔던 대로 (다른 의미에서) ‘없다’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여전히 판소리 듣기에 익숙하지 않은데다가 원작을 읽고 가지 않아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 만으로도 꽤 바빴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사실 이 질문을 하는 저에겐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과서적인 정답이 먼저 설정되어 있었던 것 같네요. 소리꾼과 고수 그리고 관객들이 에너지를 (소리로) 교류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판소리가 가진 매력이고 생명이지만, 이 당연한 명제도 질문에 붙여봐야 한다는 걸 오늘 깨달았습니다. 사실 저같이 추임새도 하지 못하면서 판소리의 생명을 이야기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공연을 보고 난 후, 그리고 아티스트와의 대화 시간에 오고간 이야기를 들으며, 감독님의 실험에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추임새 할 수 없는 이야기는 판소리로 만들면 안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약속하신 대로 앞으로도 ‘벨칸토 판소리’ ‘고수 없는 판소리’ 등 모던 판소리 실험을 계속 이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적지 않은 관객들이 좀더 밝은 이야기를 요청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 사람들은 비극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괜히 전통 판소리도 대부분 해피엔딩으로 마감되는 걸 보면 이건 꽤 오래된 습관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비극적 판소리가 없었다는 점만으로도 더 실험이 필요한 장르라 생각됩니다. 사실 감독님의 작품이 이미 <사천가>에서 <억척가로>, 그리고 이번에 <살인>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을 보아왔기에 감독님은 이미 그길에 한참 들어와 계신 거죠. <살인>은 말할 것도 없고, <추물> 역시 마지막에 약간의 희망을 열어 빠져나가긴 했지만 저에겐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어두운 이야기에 더 끌리는 것을요. 밝고 경쾌한 이야기는 또 다른 소리꾼들이 만들어가면 되겠지요.



<살인>을 보고나서 한 10년 전에 샤를리즈 테론이 주인공으로 나온 <몬스터>라는 영화가 생각났습니다.(비록 샤를리즈 테론이 그 영화를 위해 살을 찌워야 했던 반면, 이승희님은 얼마 전 <비빙> 공연 때와 비교해도 헤쓱해진 모습이었지만 말입니다.) 그 영화를 보고 왔더니 제 친구가 그런 영화는 왜 만드는 거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전 그때, 단지 연극을 공부한다는 이유로 제가 만들지도 않은 그 영화의 정당성을 설명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소용없더군요. 설명하고 심지어 수긍시킬 수도 있지만 보러 가게 할 수는 없더라구요. 아마 아리스토텔레스 선생이 틀렸나봅니다. 좋은 플롯은 “눈으로 보지 않고, 사건의 경과를 듣기만 하여도 그 사건에 전율과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끔 구성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듣기만 해도 전율하니 보러 가지 않게 되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요. 그저 끌리는 사람이 만들고 또 끌리는 사람이 보러 가나 봅니다.



마지막으로 <살인> 텍스트를 구하기 쉽지 않다고 해서 그냥 부정확한 상태로 먼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실 전 오늘 <살인>의 음악이 좋았다는 몇몇 분들의 말에 완전히 수긍할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음악 자체나 악사님들의 연주는 제가 감히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을 넘습니다. 훌륭했고 그 자체로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살인>의 텍스트, 특히나 텍스트의 문체와 소리가 과연 어울리는지, 어울릴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아마도 이것은 단편소설이라는 특수한 문학 장르와도 관련되어 있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물론 단편소설로 연극도 하고 영화도 만드는데, 판소리라고 안될 이유는 없겠지요. 그런데 오늘 <살인>의 문체는 제게는 상당히 건조하게 들렸습니다. (원작 소설의 텍스트가 얼마나 사용되었는지 확인이 필요합니다만, 남윤일PD님께 잠시 여쭤본 바로는 많은 부분이 다시 쓰여졌다고 들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텍스트는 이승희님이 아무런 음정을 넣지 않고 평이하게 읽어주시던 부분이 가장 듣기에 편했습니다. 특히나 짧게 끊어지는 건조한 문장들은 그 자체로 매우 절제된 하드보일드 소설의 문체 같아서 거기에 음악적인 요소가 첨가되는 게 제게는 꽤 이질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물론 텍스트는 의미를, 소리는 감정을 각각의 채널로 전달할 수도 있겠지만, 소리와 텍스트가 좀더 긴밀하게 맞붙기 위해선 양자가 서로를 좀더 닮아가야 했던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더 만들고 더 보다보면 알게 되겠지요.

2014년 2월 21일 밤에

임승태 드림

2014년 2월 7일 금요일

[두산아트랩-4] 지호진 작/연출 "왕의 의자"

by 에스티



불 구경과 싸움 구경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연극을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만들어내는 액션 스펙터클로 설명하는 지호진은 야망이 큰 연출가이다. 두산아트랩의 2014년 네 번째 공연 <왕의 의자> 또한 그가 지향하는 “피지컬 씨어터”의 노정에 있는 작품이기에 관객은 영화에서나 보던 ‘액션 활극’을 코 앞에서 펼쳐지는 ‘라이브’로 본다는 기대를 하기에 충분했다.


연출이 설명한 대로의 “피지컬리티”, 즉 배우들의 합을 통해 만들어내는 액션은 양보다 질을 추구하는 편이었다. 70분 공연의 마지막 10분에 가서야 비로소 등장하는 화려한 액션은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충분했지만 앞서 60분의 공백이 그만큼 크게 느껴지게 하기도 한다. 물론 공백이란 표현이 꼭 적합하다고 할 수는 없다. 앞에서도 배우들의 군무와 아크로바틱이 장면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으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몇몇 배우들은 뺨을 적잖이 맞기도 하고 등짝을 맞기도 한다. 왕에게 주어진 장검은, 비록 이가 나간 게 보이는 모조품이라 하더라도, 꽤 근사한 바람소리를 만들어내고, (실수로 보이긴 하지만) 잘못 휘두른 칼은 객석으로 향해 날아가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반대편 객석에 앉은 관객은 코 앞에서 풀스윙으로 휘두르는 골프채 때문에 적지않은 ‘신체적’ 긴장감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문제는 서사이다. 짧은 공연 시간과 프로덕션의 목적을 고려할 때 서사는 “피지컬한” 재미를 만들어내는 데 봉사하는 보조적 역할에 머물러야 할텐데 지나치게 많은 시간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 할애되고 말았다. 연출이 제작노트에 쓴 다음의 문장에는 많은 고민이 들어 있다:

“더욱 간결해진 서사로 전형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움직임과 무대 활용을 통해 피지컬 씨어터의 특징을 극대화시키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사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작품 제목에 완벽하게 압축 요약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게다가 객석에 앉은 이후 약 15분 가량 무대 벽면에 이글거리는 형상으로 영사된 제목을 보고 난 후에는 더더욱, 이 작품에서 전개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에서는 특별한 흥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작가이기도 한 연출의 입장에선 할 수 있는 한 간결하지만 전형적이지만은 않은 이야기를 담고 싶었겠지만, 공연의 목적이 이야기의 재미에 있는 게 아니었다면 관객이 당혹스러울만큼 불친절한 스토리텔링이어도 괜찮지 않았을까?불면증에 시달리는 왕은 나로서는 맥베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차라리 <맥베스>를--<햄릿>이나 <보리스 고두노프>라도 상관없다--필요한 만큼만 가져와 신체 움직임을 충분히 보여주는 것도 좋았을 것 같다.


짧은 공연이라도 이야기를 완결되어야 한다는 부담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모든 극작가에게 던져진 저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 고전적 올가미는 결국 드라마가 연극 전체를 지배하고 나머지 요소들은 이야기를 재현하는 데 봉사하도록 이끄는데,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탈춤의 쓰다만 듯한 스토리텔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탈 속에서 웅얼웅얼하는 대사들은 잘 알아듣기도 힘들고 앞뒤 설명도 없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관객이 알아야 할 이야기는 대체로 명쾌하게 전달되고 그 속에서 연희자들의 몸과 춤사위는 빛을 발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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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24일 금요일

[두산아트랩3] 비빙의 젊은 연주자들이 바라본 굿

비빙의 젊은 연주자들
"굿을 바라보는 3인의 시선"
1월 23일 두산아트랩 쇼케이스



by 에스티

공연 시작 전부터 덧마루 여섯 널을 붙여 만든 무대 위에는 장구, 징, 해금등의 악기들이 악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마이크와 스피커 및 음향 장비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전통’ 악기와 ‘첨단’ 전자 장비가 함께 놓여져 있는 모습에서부터 과거와 현재는 만나고 있었고, 이 모습은 ‘젊은’ 연주자들이 굿을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제목의 이 공연에 대한 하나의 은유적 오브제로 기능하고 있다.

‘이 정도 규모의 극장에서 왜 마이크가 필요할까’라는 의문은 마지막 연주에서 풀렸다. (사실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소리가 그다지 편하지는 않았다.) 신원영은 자신이 주도한 푸너리에서 사용한 기법이 ‘샘플링’이라고 소개했는데, 장구나 징에서 나온 소리를 기계를 이용해 곧바로 녹음한 다음 이 소리를 재생하면서 다른 악기를 연주하고, 이런 식으로 여러 악기 소리를 중첩시켜 크고 복잡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신통방통한 대목이었다. 클럽에서 디제이들이 해야할 것 같은 이 일을 장구로 동해안별신굿의 그 복잡한 장단을 치면서 해내는 그의 재주가 그저 놀라웠다.


공연이 끝나고 되짚어 보니 샘플링이란 기법이 이 공연 전체에서 두루 사용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첫부분에서는 진도 씻김굿과 함께 무속인들의 소회가 담긴 육성 나레이션으로, 두번째 올림채 장단에서는 다른 종교 지도자들의 설교 혹은 설법을 가려 뽑는 방식으로 병치는 이어진다. 더 나아가 여러 지역의 무속 장단에서 몇가지를 뽑아 청신-오신-송신이라는 굿의 기본 구조로 이어붙인 공연 전체의 형식 또한 일종의 샘플링, 혹은 샘플러라 부를 수 있다.

이 세 젊은 연주자들이 굿을 대하는 태도는 대단히 학구적이었다. 작가와의 대화 시간에 그들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번 공연은 굿에 대한 ‘스터디’의 결과물이다. (그들이 오랫동안 배우고 익힌 굿 음악을 차치 하고라도) 무녀의 삶에 대한 인류학적 관심과 무속에 대한 비교종교학적 관점, 그리고 한국 사회에 만연한 무속에 대한 편견을 고발하는 사회비판적 태도가 나타나는 것만 보아도 짧은 시간 동안 상당히 열심히 공부했는지 알수 있다. 어쩌면 굿(음악)은 머리로 공부해서 아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 속에서 경험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체득해야 마땅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굿이라는 종교 혹은 문화는 공연자도 관객도 공부하지 않고서는 접근할 수 없는 낯선 대상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이 극장에서 실험될 필요도 없었다는 점을 인정하자.


마지막으로 대화 시간에 했던 이야기를 조금만 더 덧붙이고 싶다. 연주자의 문제의식에 매우 공감하고 이것이 우리 나라와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은 굉장히 의미 깊은 일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연주자 자신이 인정한 것처럼 이 문제를 풀어내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민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오늘 공연에서 부각된 그 특정 종교인이야 말로 무속과 기독교를 접목시킨 대표적인 인물이라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공연이 유력한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냉소나 기성 종교의 메시지를 압축하여 병치하는 것은 별로 효과적인 접근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마음이 종교간에 유사한 가르침이 있는 걸 몰라서 생기는 건 아니다. 또한 무속에 대한 편견과 반감이 서구화 근대화 과정에서 증폭된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이 반무속적 편견은 무속이 주류 민간 신앙이던 시절에 편만했던 여러가지 내적 모순과 문제점들로부터 생성되었다는 점 또한 기억해야 한다.

세습무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 굿 음악을 학습한, 심지어 스스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근대적 예술가들이 굿 음악을 옹호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일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또 다른 실험으로 접근 경로를 다르게, 어쩌면 좀더 범위를 좁히는 건 어떨까? 무속이 여타 기성 종교들과 동등한 진리를 설파한다고 주장하면 그것을 입증해야 할 책임이 연주자들에게 주어진다. 대신 굿 음악이 다른 종교의 음악만큼이나 뛰어나고 몇몇 종교의 음악보다는 더 월등한 미학과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연주자들의 기량으로 볼 때 무대에서 충분히 입증가능할 것이다. 굿을 바라보는 단계를 넘어 굿(음악)의 미적 탁월함을 관객에게 더 전달할 수 있다면 연주자들이 바라는 인식의 변화도 낙관할 수 있지 않을까?

2014년 1월 11일 토요일

[두산아트랩] 양손프로젝트 <오셀로> 쇼케이스

양손프로젝트 <오셀로>
by 에스티


두산아트센터의 창작지원프로그램 두산아트랩이 시작되었습니다. 아트랩은 일종의 중간 보고회 같은 성격을 가집니다. 그래서 아직은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들도 있을 수 있지만, 하나의 공연이 완성되는 중간 단계를 (예비) 관객들과 공유하고 여기서 나온 피드백을 통해 최종 버전에 반영하는 흥미로운 실험입니다. 필자는 이번 아트랩의 모니터 회원으로 선정되어 전체 공연을 볼 예정입니다. 첫 공연을 보고 글을 쓰지만, 공연 기간이 짧은 탓에 글은 공연이 끝난 후에 공개될 수도 있는 점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합니다. 

오늘 아침에 난생 처음 충치 치료를 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선 치과에 별로 도움되지 않는 건치라고, 그런데 왜 그 어금니만 그렇게 썩었을까라면 의아해 하셨다. 생각해보면 오래 전에 이미 그 부위에 충치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그냥 방치해 뒀던 게 화근이었다. 그러나 잘 보이지도 않고 통증이 있지도 않은 어금니를 일부러 쳐다볼 일은 거의 없었다.

마취 주사를 맞았다. 잇몸에 바늘이 들어가니 아픈 게 당연하겠지만 마취 주사라는 게 원래 그런건지 주사약이 들어가면서 바로 마취가 시작되어서인지 약간 따끔하더니 이내 감각이 없어진다. 잠시 후 얼굴에 수건이 얹어지고 연장들이 입 속으로 들어가더니 공사장에서 돌 갈아낼 때 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따금 골이 울릴 정도의 진동이 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통증은 없다.

이처럼 마취라는 건 마술과도 같다. 아직 절반 이상은 남아 있는 생니가 갈려 나가는 순간에도 통증이 없고, 치료가 잘되어서인지 마취가 깨고 나서도 별로 아프지 않다. 그러나 이가 있던 자리엔 어느새 나로선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물질이 채워져 있다. 한동안 나라를 떠들석하게 한 우유 주사라는 마취제 또한 비슷한 마술을 부린다. 듣자하니 이 주사를 맞으면 숙면을 취할 수 있고 그래서 깨고 나면 피로한 몸에 상쾌함이 채워져 있다 한다. 다만 문제는 이 약품을 피로회복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점인데, 여기서도 또 다른 마술이 펼쳐진다. 시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몇몇 여자 연예인이 프로포폴 주사를 맞은 게 적발된다. 그들의 이름은 비밀에 부쳐지고 이니셜로만 나타나는데, 그러면 이 수수께끼를 푸는 데 전국민이 집중하게 되고 결국은 포탈 실시간 검색어에 정답이 표시된다. 그러는 동안 정치 사회적 이슈는 몇 페이지 뒤로 감춰진다. 우유 주사를 온 국민이 맞고 잠드는 일이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진다.

베니스의 원로 브라반시오는 (장래) 사위 오셀로가 마술, 혹은 “마약”으로 자기 딸의 마음을 빼앗아갔다고 규탄한다. (… thou hast practised on her with foul charms, /Abused her delicate youth with drugs or minerals /That weakens motion. 1.2.73-5) 브라반시오와 같은 인종차별주의자에겐 오셀로가 마술을 쓰지 않고선 데스데모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다만 불행한 것은 그 사회에 만연한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데스데모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부정한 여인으로 전락하고 자신이 사랑한 남자의 손에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데스데모나가 등장하지도 않을 뿐더러 3막에서 마감되었기에 죽지도 않고 죽을 수도 없는 언데드(undead) 같은 상태에 있다.) 따라서 브라반시오의 대사가 가진 중요성은 뒤에서 오셀로가 당하는 진짜 마술과 마약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으로 볼 때 유의미하다. 물론 이 마술을 베푼 마술사는 이아고이고, 그(녀)는 질투와 의심이라는 치명적인 마취제를 사용한다.

2013년 12월 6일 금요일

극단 애인, 《손님》

by 에스티

<리어 왕> 4막에서 글로스터는 이제 그만 절벽에 몸을 던져 죽을 작정에 미치광이 톰에게 자신을 도버 해협으로 인도해달라고 부탁한다. 사생아 아들이자 배다른 동생인 에드먼드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글로스터-에드거 부자는 황야에서 그렇게 다시 만난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도버 근처의 들판에 도착하는데, 두 눈을 잃은 자신을 언덕 위로 데려가 달라는 글로스터에게 에드거는 이미 언덕에 도착했다며 언덕 아래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해준다:
자, 바로 여기입니다. 가만히 서 계십시오.
저 밑을 내려다보니 무섭고 현기증이 납니다.
하늘 중간에 날고 있는 까마귀나 갈까마귀는
딱정벌레 크기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반쯤 밑에는
바다 바위 틈에 나는 미나리를 캐는 사람이 매달려 있는데 —
그것은 참 위험한 직업이군요! 제 생각으로는
그의 크기가 자기 머리밖에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바닷가를 거니는 어부들은 생쥐같이 보입니다.
저기에 닻을 내리고 있는 큰 배는 그 배에 달려 있는
작은 보트의 크기밖에 안 됩니다. 그 작은 보트는 또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 부표와 같습니다. 이리저리로 밀리고 있는
수많은 자갈들에 부딪치는 파도소리도 별로 크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아물거리어
거꾸로 굴러떨어질까 두렵습니다. (<리어 왕>, 4막 6장, 이경식 역)

이 순간 무대는 가상의 들판이었다가 높은 언덕 위가 된다. 몸도 마음도 약해진 글로스터는 그 말을 믿고 몸을 던지지만 실체없는 절벽은 그의 생명을 가져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아들인지도 모르는 사내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열 개의 돛대를 이어 맨 것보다 높은 절벽에서 곤두박질해 떨어졌지만 기적같이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살아 났다고.
상상력이 제대로 발동된다면 이 대목은 셰익스피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엄청난 장면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시시한 장면에 불과할 것이다. 나에겐 이 장면이 약간은 마술과도 같이 느껴진다. 실제로는 아무 일도 없지만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개막한 극단 애인의 다섯 번째 작품 <손님> (윤정환 작/연출, 대학로 달빛극장)을 보면서도 이 장면이 다시 생각났다.

2013년 11월 16일 토요일

지독한 밀리터리 가스펠 뮤지컬: <해피 투게더>

by 에스티
이수인 작, 연출 <해피 투게더>
2013.11.15-12.15
아트센터K 동그라미극장

이전에도 같은 제목을 사용한 영화와 드라마가 있었지만, 난 그 둘 다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내 주변에는 아직도 장국영을 기억하고 그리워 하는 여자들이 많지만, 나란 남자는 그에게 한번도 마음을 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병헌과 전지현이 남매로 나왔던 연속극의 제목 또한 그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 또한 이병헌이 2군 야구선수로 나왔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전 해에 방송된 <미스터Q>의 경우 본방사수를 할 수 없어 비디오로 녹화까지 해서 봤었지만, 서울에 상경한 이듬해 나는 그만 TV드라마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혹시 더 있을까 싶어 위키백과를 검색해보니 예전에 노래하다가 틀리면 머리 위에 쟁반이 떨어지던 그것 역시 같은 이름을 사용한 예능 프로의 한 꼭지라고 한다. 다함께 행복을 누리는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함께 있어서 행복하고 나의 행복을 함께 나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원대한 포부가 없더라도 이정도는 누구나 꿈꾸는 소망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고, 이 이름이 여러가지 형태의 예술 작품의 제목으로 반복되는 것은 우리 주변에 이 소망이 결핍되어 있음을 반증해준다. 11월 15일 개막한 동명의 연극은 이 제목을 가장 반어적으로 사용한 경우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