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5일 화요일

범죄 이후에 오는 것들, <크라임(Zbrodnia)>

by 서유미

크라임 Zbrodnia (The Crime)
장소 /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연출 / 이벨리나 마르치니약  Ewelina Marciniak
단체 / 떼아트르 폴스키 비엘스코-비야와 Teatr Polski Bielsko-Biała

“입장은 공연 시작 5분 전부터 가능합니다”

폴란드 연극 단체 떼아트르 폴스키의 <크라임>은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의 해외 초청작들 중 유일하게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객석이 여러 층으로 분리되어 있고 무대의 높이가 상대적으로 높아 배우와 관객의 공간을 분리시키는 대형 극장과는 달리, 소극장은, 특히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은 무대와 객석 사이 경계가 거의 불분명하고 객석의 높이가 비교적 고른 편이라 마치 큰 방 안에 연극을 구성하는 사람들, 즉 배우들과 관객들이 뒤섞여 모여 있는 공간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공간적 특징을 선호했던, 이 극단의 <크라임>이라는 연극이 분명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지레 짐작으로 공연장을 찾았다.

8시 시작인 공연의 입장이 5분 전부터 가능하다고 한다. 공연 준비가 덜 되었겠거니, 했던 것은 나의 착각. 연극은 5분 전부터, 즉 관객이 입장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무대의 가운데에는 마루 바닥이 설치되어 있으며, 이를 기준으로 왼쪽에는 커다란 칠판이 걸린 벽, 오른 쪽에는 여러 장의 사진들이 걸린 벽과 그 아래 황금색 해골들이 쌓여 있다. 중년의 여성과 그의 딸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마루 바닥 위를 배회한다.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의 그들은, 차례로 입장하는 관객들을 불안한 시선과 몸짓으로 마주한다. 자리를 찾아 들어오는 관객들에게 때로는 자리 안내를 하기도 하고, 빨리 착석하도록 재촉하기도 한다. 왼쪽에는 부동 자세의 한 남성이 서 있고, 오른 쪽에는 비교적 자유로워 보이는 남성이 관객인 마냥 앉아 있다. 무대 위에 이미 현존하는 배우들, 그리고 불안하고 그로테스크한 음악과 조명은 관객들을 그들의 세계로 초대하면서, 연극 <크라임>은 공연 시작 5분 전, 이미 시작되었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왜?”

8시. 대문 두드리는 소리에, 엄마와 딸의 불안은 더욱 고조된다. 그들은 그 작은 무대를 질서 없이 움직이면서 내면 가장 깊은 곳의 공포를 끄집어 내어 온 몸으로 표현한다. 불청객은 한동안 직장에 나오지 않은 남자의 행방을 찾아 나선 형사. 그들의 대화로 미루어 보아 가장이 사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죽음을 야기한 주체가 누구인지, 또 그 죽음의 대상이 누구인지 정확히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관객의 혼란이 시작된다. 범죄에 대한 단서(?)는 연극 중간 중간에 인물들의 입을 통해서 들리는 신문 기사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기사에 나오는 이름들은 무대 위, 그들의 이름과 일치한다. 하지만 신문 기사들 속 범죄의 주인공과 범죄의 대상, 그리고 범죄의 방법은 전혀 일관성이 없고, 따라서 어느 것이 진짜인지 판별할 방법이 없다. 범인은 아내였다가, 아들이었다가, 또 여동생이 된다. 또, 어머니였다가, 고모이기도 했다가 오빠도 된다. 가장만 죽었다가, 때로는 온 식구가 모두 죽기도 한다. 도대체 형사의 심문에 답하는 이 사람들의 논지는 무엇인지? 아니 도대체 이들은 대답을 하기는 하는 건지. 무대 위 불안의 케미스트리와 동시에 관객들의 혼란은 더욱 가중된다.


극이 점차 진행되면서, 이 집안에서, “누가, 누구를, 어떻게, 왜 죽였나”라는 질문 자체의 의미가 상실됨을 깨닫는다. 무대 위에서 보이는 혼란, 고통, 불안이 야기된 가장 최초의 원인은 이 극의 제목인 크라임, 범죄 그 자체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범죄의 본질이며, 범죄가 야기하는 수많은 관계, 그리고 잇따르는 모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극을 이어나간다. (누가 그 주체이든) 범죄를 저지른 이후에 느끼는 그들의 감정 상태는 다양한 연극적 요소들을 통해서, 가장 비논리적이고 무질서한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다. 갑자기 형사에게 식사를 하자고 제안한 엄마는 스파게티 생면을 입안에 마구 쑤셔 넣으면서 때로는 객석을 향해 던지기도 한다. 딸은 상상 속 친구가 연주하는 악기와 음악에 맞춰 노래를 하며 옷을 벗더니, 급기야 벽을 쳐서 뚫고 퇴장한다. 무대 양 끝을 전력질주 하는가 하면, 이유 없이 반복적인 행동을 하거나 알 수 없는 춤을 추기도 한다.
범죄에 대한 끊임 없는 질문들, 추리 소설이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범인 검거의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범죄, 그 이후에 인물들이 느끼는 모든 공포, 고뇌, 두려움과 압박 등 논리적인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는 수백만 가지 복잡 무쌍한 감정들. <크라임>이 포착하려는 것은 바로 이 감정의 조각들이다.
즉,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는 순간 깨닫게 되는 결정적 진실.” 
이것이야말로, 이 연극의 핵심이다.

이미지들

무대 오른편에 사진들이 걸려 있는 벽 아래 금색 해골들이 보인다. 무대 자체의 색상이 워낙 강렬해서 못 보고 지나칠 것을 우려했던지, 그들은 가장 구석에서 가장 빛나고 있었다. (앞서 여러 번 언급했듯), 연극에서 진짜로 죽은 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가정 내부에서 일어난 알 수 없는 불화를 기점으로 범죄가 일어났으며, 누군가는 죽었을 것이다. (극에서는 아버지가 죽었다고 하지만 이 또한 불분명하게, 혹은 그리 중요치 않게 다가온다.) 반짝 반짝 빛나는, 가장 예쁜(?) 소품이었던 해골은 죽음의 메타포를 괴기스러운 방식으로 전달하는데, 딸과 형사가 몸싸움, 혹은 애정 행각을 벌이면서 해골들을 벽에 마구 던지는 장면이 특히 이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아들은 무언을 고집하며 칠판에 낙서를 한다. 칠판 위 그의 현란한 손놀림으로 조정되고 있는 흰 분필이 나타내는 그 그림은 고대 이집트 동굴벽화 같기도 하고, 뉴욕 뒷골목 그래피티 같기도 하다. 그림은 점차 형상을 찾아가고, 결국 이 말도 안 되는 콩가루 집안의 자화상이 된다. 살인, 섹스, 혼돈 등의 이미지는 75분의 <크라임>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무대 위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퍼즐 조각들은 – 물론, 이 조각들을 완성했을 때의 결과물은 불완전하지만 – 하나 하나의 이미지로 나타나 칠판 위에 형상화된다. 연극의 가장 마지막 부분, 칠판의 가장 상단에 서툰 글씨체로 한글 “아빠”라고 쓰던 (결코 잊을 수 없던) 그의 모습. 이 가정에서 끊임없이 순환될, 끝나지 않을 ‘크라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사진출처: SPAF 공식 홈페이지)

http://youtu.be/YdhRpCz_BX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