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일 토요일

구일만 햄릿

by 에스티

이 글은 첫 인상을 중심으로 서술했습니다. 아래 링크의 글에서는 보다 상세한 공연 분석을 시도했습니다. 

"<구일만 햄릿>과 동시대 한국 다큐멘터리 연극의 스펙트럼", <안과밖> 제39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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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햄릿>을 택한 것은 무척이나 잘한 선택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어, 뭔가 어설픈데, 괜찮은걸!' 보는 당시에도 돌아오는 길에도 마음에 드는 공연을 보았을 때만 얻는 어떤 쾌감이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 마음 한켠이 계속 불편하고 무겁다. 

해고된 지 7년. 그날은 정확히 2469일째 날이었다. 아마 내가 그들 주변인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제 그만 새 일자리를 찾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으리라. 이 순간 나는 이제 그만 상복을 벗어버리라고 말하는 거트루드가 된다. 

"햄릿, 그 어두운 상복을 벗어버리고 폐하께 좀 더 정답고 부드러운 눈길로 대하거라. 언제까지나 그렇게 눈을 내리깔고 돌아가신 아버님만 흠모할 것이 아니다. 누구나 한 번은 이승에서 영겁의 세계로 떠나는 법이다." (신정옥 역)

아마도 연습과정 중 이 대사에 승복되었다면 이 연극은 무대에 오르지 못했을 것 같다. 어쩌면 그들의 투쟁 자체를 그쳐야 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한 번 살고 갈 인생, 이미 정리해고된 직장을 붙잡고 유별나게 그럴 것 뭐 있느냐? 그럼에도 그들은 용케도 이 씁쓸한 대사를 견뎌냈다. 어쩌면 그들에게 이 질문은 지난 7년간 매일 같이 받아온 것이기에 거트루드의 대사에 흔들리기는 커녕 이 작품을 해야 한다는 '운명'같은 걸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평생 연극 한번 제대로 본 적없는 사람들이 무대에 섰다.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지만 그동안 해온 일들을 생각하면 큰 일도 아니다. 같이 투쟁한 동료는 분신을 했고, 철탑 위에서 고공 농성을 했다. 천막에서 먹고 자며 법원과 경찰서를 드나들던 그들에게 연극은, '대사 암기'만 빼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들의 연기는 어색했다. 어색한 대사 처리와 자세가 진지한 순간에도 웃음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이 웃음이 또다시 내게 비수가 되어 돌아온다. 이번에는 나 자신을 햄릿에 투영하게 된다. 

"아, 난 이다지도 못돼먹고 비열한 얼치긴가! 배우란 참, 엄청나단 말이야, 단지 꾸민 이야기 속에서, 정열의 꿈속에서, 자기의 영혼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며, 그 결과, 창백한 얼굴, 눈물 고인 눈, 미친 듯한 표정, 비탄에 잠긴 목소리 등, 일거일동을 자기가 상상하는 모습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모두가 있지도 않은 것 때문에! 헤큐바를 위해서 말이다! 헤큐바가 그자에게 무엇이기에, 그자가 헤큐바에게 무엇이기에, 그자를 위해 울어야 한단 말인가! 나와 같은 동기와 분노의 계기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할까? 그만 무대를 눈물로 흥건히 적시고, 핏발 서린 대사로 관객들의 귀청을 찢을 것이며, 죄지은 자는 미치게, 무고한 자는 겁먹게, 무지한 자는 넋을 잃게 되고, 눈과 귀의 기능을 혼돈 속에 빠지게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허방한 무지렁이, 꿈꾸듯 허벙대며, 큰일에는 야멸차게 손도 못 대고 긴요한 말 한 마디도 뇌까릴 줄 모르고, 왕의 일은 아예 입에 담지도 못하니, 왕권과 소중한 목숨이, 사악한 자에게 무참히 빼앗겼는데 말이다. 내가 겁쟁이인가?"

이 대사 자체가, 그리고 더 나아가 극중 배우와 극중극 장면 전체가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일단 그들은 겁쟁이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자문은 나 같은 사람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대체로 원작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면서 극중극 전체를 건너 뛰어 버리는 경우는 <햄릿> 공연사에서 상당히 이례적이다. 그동안 내가 봐온 바로는 많은 경우 배우들이 등장하는 대목에 심적 동일시가 이루어지고 극중극은 강조되는 게 일반적이다. 이런 점에서도 <구일만 햄릿> 팀의 배우들은 그야말로 임시직이며 배우로서의 자의식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극중극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장면 사이 암전에는 그들이 지금까지 투쟁해온 이력이 인포그라픽으로 보여지기도 하고, 이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은 영상이 들어오기도 했다. 심지어 햄릿이 오필리어를 만나는 장면에서는 대사를 하는 도중 암전이 되고 그 장면을 연습하던 영상이 보여진다. 배우들은 그 영상을 보고 감정을 가다듬고 다시 대사를 반복하며 조금씩 향상된 연기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이 공연이 단지 <햄릿>이라는 예술 작품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해고 노동자들의 <햄릿> 하기"라는 성격을 부각시킨다. 극중극을 하지 않지만 각색된 형태로도 원작의 메타연극적 성격이 유지된다. 

앞서 말한 쾌감이 바로 이 부분에서 산출된다. 그리고 마음 한켠에 이 공연이 '9일' 이상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정당화도 이어진다. '그들의 투쟁을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라도 공연이 지속되는 게 좋지 않을까'라든지, '해외 연극제에 초청된다면 얼마나 파급력이 크겠는가'라는 식의 생각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과연 '구일만'이라는 말의 무게가 고려되고 있기나 한 걸까? 연극이 투쟁이 될 때 (그 투쟁에 공감하는) 비평가가 그 연극에 대해 해야 할 말은 무엇일까? 적어도 '콜트콜텍 노동자들이니 리코더 대신 기타를 이용하면 좋겠다' 따위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p.s. 

12월에 앵콜 공연이 잡혔다고 합니다. 자세한 공연 소식은 <구일만 햄릿> 팀의 트위터에서 확인하세요. https://twitter.com/nocorthamlet

http://www.youtube.com/watch?v=XsJiXb3XB5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