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6일 토요일

지독한 밀리터리 가스펠 뮤지컬: <해피 투게더>

by 에스티
이수인 작, 연출 <해피 투게더>
2013.11.15-12.15
아트센터K 동그라미극장

이전에도 같은 제목을 사용한 영화와 드라마가 있었지만, 난 그 둘 다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내 주변에는 아직도 장국영을 기억하고 그리워 하는 여자들이 많지만, 나란 남자는 그에게 한번도 마음을 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병헌과 전지현이 남매로 나왔던 연속극의 제목 또한 그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 또한 이병헌이 2군 야구선수로 나왔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전 해에 방송된 <미스터Q>의 경우 본방사수를 할 수 없어 비디오로 녹화까지 해서 봤었지만, 서울에 상경한 이듬해 나는 그만 TV드라마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혹시 더 있을까 싶어 위키백과를 검색해보니 예전에 노래하다가 틀리면 머리 위에 쟁반이 떨어지던 그것 역시 같은 이름을 사용한 예능 프로의 한 꼭지라고 한다. 다함께 행복을 누리는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함께 있어서 행복하고 나의 행복을 함께 나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원대한 포부가 없더라도 이정도는 누구나 꿈꾸는 소망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고, 이 이름이 여러가지 형태의 예술 작품의 제목으로 반복되는 것은 우리 주변에 이 소망이 결핍되어 있음을 반증해준다. 11월 15일 개막한 동명의 연극은 이 제목을 가장 반어적으로 사용한 경우에 해당한다.




2009년 중국 현장학습에 스텝으로 따라간 적이 있었다. 처음 가본 북경의 거리는 예상 외로 크고 깨끗했는데, 당시 현지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이전 해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정비와 정리가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이 정리에는 거리의 노숙자, 걸인들을 일괄적으로 어딘가로 보내는 작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얘길 들으면서 그 정도야 중국에서 ‘흔한 일’이겠거니 생각했지, 20년전 대한민국에서도 똑 같은 일이 벌어졌을 거라는 상상은 할 수 없었다. 인터넷도 트위터도 없던 그 시절 TV 화면은 지금의 PC 모니터 보다 작았지만, 내게는 세상을 보는 거대한 창이었다. 물론 그 창이 실제로는 ‘아직도 살아계신’ 그분이 원하는 것만 골라서 보여주는 필터였다는 사실은 그분의 지역기반에서 자란 내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 연극은 ‘형제복지원’이라는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보여준다. 그곳에서 일어난 일이 궁금하다면, 한종선씨가 쓴 <살아남은 아이>를 읽어볼 수도 있고, 이 책을 소개하면서 사건 전반을 보도한 <한겨레 21>의 기사를 읽어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우선 연극을 먼저 봐 보라고 권하고 싶다. 단언컨대 책이나 기사를 먼저 보고 나면 그 사건이 무대 위에서 어떻게 재생되고 있는지 궁금해질텐데, 공연이란 한번 지나가면 좀처럼 다시 보기가 어려우니 말이다. 공연은 이 사건이 괜히 ‘부산판 도가니’라고 불리는 게 아님을 충분히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은 다소 엉뚱하다. 다름 아니라 이 사건의 가해자라 할 수 있는 복지원 원장에게 말할 기회를 아주 넉넉하게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도가니>가 관객들로 하여금 피해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하기 위해 교장 및 교직원의 표정마저 악독하게 그리고 있다면, 이 연극에서는 복지원 원장을 화자로 내세우고 그에게 자기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연출자 노트에 따르면 유태인을 학살한 나치의 만행을 다룬 TV 프로를 보며 이수인 연출은 “히틀러의 말을 들어보고 싶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아, 물론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그가 어릴 적부터 엉뚱했다는 사실뿐, 형제복지원 원장이 히틀러 같은 인간이었다는 것도 아니고, 이 연극에 나오는 원장이 형제복지원의 박인근이라는 것도 아니다. 공연 앞 부분에서 그렇게 강조했던 것처럼 이 연극은 그저 허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복지원 원장이 주의 이름으로 하는 거룩한 사업을 표방했기에, 이 공연에서는 그 주님도 적지않게 욕을 "자신다". 이 공연에는 가스펠과 찬송가가 넘쳐난다. 복지원 사람들을 연기하는 남자배우들은 군가처럼, 때로는 군가와 함께, 가스펠을 부르고, 실시간 주석과 배경음악을 담당하는 여자 배우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성가를 부른다. 밀리터리 가스펠 뮤지컬이라는 이 기묘한 장르가 관객들에게 무리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단지 원장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세상’의 기대에 훨씬 못치지는 교회의 수준 때문이리라. 혹시라도 이 글이 와전되는 과정에 ‘가스펠 뮤지컬’이라는 말만 전달되는 상황에 대비해 나도 disclaimer를 붙여본다. 나는, 또는 우리 교회는, 안 그런데라고 생각할 사람들도 이 작품을 보며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보며 느꼈을 낯뜨거움을 다시 만날지 모른다고 말이다.

원장 역할의 배우(신안진)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며 시작하는 이 연극은 애초에 제4의 벽 같은 환영주의 연극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무대와 관객 사이, 또는 복지원에 감금된 그들과 그렇지 않은 우리 사이에 엄청난 벽이 있음을 확인했다. 크리넥스 화장지가 눈이 되어 무대에 내리던 어느 크리스마스 날, 원장은 복지원 ‘형제들’에게 이 희귀한 눈으로 눈싸움이라도 할 것을 권한다. 형제들은 바닥에 떨어진 눈을 뭉친 다음 힘차게 달려나와 무대 쪽으로 던진다. 그러나 그 눈덩이는 제1열에도 다다르지 못한 채 제자리에 내려 앉는다. 100분간 퇴장 한번 없이 부단하게 움직이는 배우들의 몸짓은 이처럼 허망하게 끝나지만, 이를 통해 그 거대하고 두터운 벽에 작은 균열이라도 만들 수 있는 걸까? 연출자 노트의 마지막 문장은, 다행히, 이 점에 대해 낙관적이다.

“그럼으로 관객은 과거의 어떤 이들의 불행과 자신의 행복이 서로 연결되어있으며 결국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같이 행복하기 위한 길을 찾아야 한다는 평범한 진실을 깨닫게 된다.” 


* 이 글이 올라오기 전 딴지이너뷰에서 이 공연의 제작자 장영승 대표의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공연 제작과 관련된 흥미로운 뒷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뒤늦게 확인하고 링크를 공유합니다. (내용 중 할인 정보가 포함되어 있으니 적극 활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