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3일 월요일

<셜리에 관한 모든 것> - 시(詩) 쓰기의 어려움에 대하여

by 이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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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퍼의 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말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호퍼의 회화가 어떠한 느낌이며, 그 느낌이 왜 좋은지. 그것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마치 한 편의 ‘시(詩)’를 설명하라 했을 때 결코 그 ‘시’가 다른 언어로 설명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작년 뉴욕 여행을 하는 기간 동안 휘트니 뮤지엄에서 호퍼의 작품들을 직접 눈으로 만져 보고 온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 그 많은 습작들에서 완성작으로 발전되는 호퍼의 빛, 어둠, 색, 구도, 정서의 추이를 보는 것은 마치 한 편의 연극이 완성되는 과정을 보는 것 같다. 실제로 호퍼의 회화 연출법은 많은 부분이 연극 작업의 연출법과 닮아 있다. 인물들의 블로킹을 구성해 내는 섬세한 표현력하며, 치밀하게 계산된 구도와 명암으로 프레임의 정서와 상황을 창조해내는 능력은 아무런 대사 없이도 표현이 가능한 연극의 장면 연출법 같다. 호퍼의 회화는 운동성이 없어도 이미 연극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짧은 트레일러에서 호퍼식의 구도가 영상 프레임 안에서 정말로 이미지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보고 어떻게 이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있겠나.


트레일러, 혹은 메이킹 필름 


+ 작년 그의 작품들 앞에 서서 썼던 메모들


• Gas, 1940

빛이 안 닿은 곳이 없다. 서 있는 남자가 마치 조각상 같다. 그만큼 빛의 명암이 입체적으로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다. 빛의 과장된 표현이 인물을 실물처럼 느끼게 한다. 이 모든, 곳곳마다에 닿은 빛들이 경건하고, 엄숙하게 느껴져서 그림 전체가 숭고한 조각상처럼 우뚝 서 있는 느낌이다. ‘빛’이 ‘형’의 숭고한 부분(순간)을 빚어낼 수 있는 매체라는 것을 알게 한다. 


• Nighthawks, 1942

빛과 어둠의 영역의 구획이 마치 몬드리안의 도안처럼 정교하게 디자인되어 있다. 가장 ‘비’인간적인 부분, 가장 할 말 없는 부분, 가장 불필요한 부분이 가장 환하게 강조되어 있다. 종업원의 신산한 표정-> 신사의 ‘또’다른 고단한 표정 -> 여자의 먼 곳을 응시하는 표정으로 관객의 시선의 동선을 이끈다. 이 세 명은 마치 한 공간에서 대화를 해야 마땅한 듯한 블로킹을 이루고 있으나 저마다 홀로 있다. 이 세 명의 분열된 정서가 축적되어 있다가 마지막으로 시선이 맺히는 곳은 왼편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이다. 이들의 분열된 정서는 점차 ‘축적’되어 왼편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의 (하필이면) ‘뒷’모습에 맺히는 것이다. 각자 분열되고 따로 노는 표정과 정서들이 이제, 관객을 철저히 외면하기로 한 어느 외딴 남자의 ‘뒷’모습에 맺혀 그 분열감의 정점을 이룬다. 결국 이 그림에서 가장 강조된 것은 가장 할 말 없어 보이는, 가장 흥미 없어 보이는, 가장 이야기(서사) 없어 보이는 벽면이다. 모여는 있으나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세 명의 무리와 그들과 동떨어진 한 명의 남자는 저마다 상대에게 할 말이 없어 보인다. 이들의 분열감의 고조는 가장 할 말 없는 곳이 가장 highlight된 벽면의 ‘공백감의 강조’와 어우러지면서 결국 ‘다다를 곳 없는’ 곳을 향해 있는 느낌이다. 다다를 곳 없는 곳을 향해 농밀하게 축적된 외로운 에너지들의 모임을 그린 것만 같다.

• Manhattan Bridge Loop, 1928

호퍼는 지평선 구도를 좋아한다. 끝나지 않는, 그래서 그것의 한 부분을 표현할 뿐이라는 듯한 구도의 그것. 그 끝나지 않는 수평선 속에서 ‘작게’ 스쳐 지나가는(머물다 가는) 인물을 함께 그린다. 공간 안에 함몰된 인간 생존 조건의 외로움을. 


• New York Movie, 1939

영화관은 암실인데 암실에서도 잔존하는 빛들에 집중하는 아이러니. 가장 있어서는 안 될 빛들-영화관 내부의 몰입도를 방해하는 빛, 단일 광원의 빛과 상충하는 여백의 빛들이 강조된다. 어셔 직원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빛이 가장 강조가 되고, 그 빛은 여자의 머리 위에서 매우 환하게 빛난다. (마치 이 빛은 렘브란트의 빛처럼 어둠 속을 철저히 밝힌다.) 그 다음으로 중요하지 않은 객석 보조등의 빛이 강조가 되고, 그 빛을 따라 ‘혼자’서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의 머리가 반사된다. 혼자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의 얼굴 앵글들 또한 세심하다. 특히 이 사람들의 얼굴 앵글과 어셔의 얼굴 앵글이 서로 대조를 이룬다. 호퍼 속의 인물들은 그 누구도 서로를 마주보거나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이렇게 영화관이라는 공간 안에서 ‘여백’을 차지하는 빛이 가장 전면적으로 강조가 되고, 영화관이라는 군집된 인간들의 틈바구니에서 가장 ‘홀로’인 사람들이 강조가 되는 쓸쓸한 관찰력


• Room For Tourists, 1945

이방의 빛, 
여행의 순간. 
빛으로 할 말을 다 하는구나. 


+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



  호퍼의 회화를 영화화했다기보다는 호퍼의 회화에 ‘시’를 덧입힌 작업을 보는 것 같다. 마치 단편의 ‘시극’들이 모여 회화첩을 이루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회화에 서사를 덧대어 영화화하지 않고, 회화에 시를 덧대어 영화화한 것은 어쩌면 옳은 선택이었다. 회화와 시가 긴밀하게 공유하는 진공의 순간들, 시간과 시간 사이를 섬처럼 떠도는 공백의 순간들이 서사의 자리를 대신해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흐름의 지속보다는 정지된 순간들이 대부분이다. 정말로, 영화의 대부분은 ‘정지’되어 있다.
  이 영화가 호퍼를 ‘영화화’했다고 말하기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도 영화를 보고 난 기분이 안 들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영화의 대부분이 정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pause된 한 순간, 그 순간의 포착, 그 포착의 수직성, 수직의 초월성, 초월의 틈입. 사진과 회화에서 추구하는 대상의 표현‘력’을 최대한 놓치지 않고 영화라는 형태로 재창조하려 한 노력이 역력하다.

  그러면 이 영화에서 이룬 것은 무엇인가? 회화에서 구현해 놓은 수직적 초월의 순간을 굳이 ‘덜’ 완전한 순간으로 지연시킴으로 인해서 이 영화가 이룬 것은? 각색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결절점이, 원작의 생명력을 ‘재’창조해내는 것인데, 이 영화는 그 부분에서 어느 정도를 이루었는가를 질문한다. 원작인 회화에 내재된 호퍼‘적’ 시를 이 영화는 이 영화‘적’ 시로 과연 재창조해내었는가? 영화는 호퍼에서 연상되는 시가 아니라, 이 영화 자체의 시를 창조했어야 했다. 이 영화 자체만으로도 시여야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분명히 예상했던 종류의 쾌감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회화’가 단지 영상 이미지로 ‘운동’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설렘이 약동한다. 마치 매우 은밀한 것과 매우 능수능란한 것이 교합된 듯한 느낌. 이것은 마치 내가 좋아하는 ‘시’의 전문을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육화된 목소리로 들었을 때의 설렘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는 조금 이상한 부끄러움 같은 것이 있다. 시와 회화가 만들어내는 정서의 은밀한 작동은 음악이나 소설이나 연극과 같이 시간의 흐름을 토대로 하는 매체가 주는 것과는 조금 ‘다른’ 설렘이다. 그 단편적이고도 내면적인 소요. 그것은 ‘단지’ 그것이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그 내면적인 소요가 실제로 입 밖의 소란스러운 육성으로 터져 나오고 말 때에 우리는 이상한 쾌감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낀다. 마치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의 은밀한 이름이 물질로 체현된 것을 본 것만 같은 화끈거림이다.

  시를 소리내어 읽는 일, 회화를 영화로 풀어내는 일. 그것은 왜 ‘부끄러운’ 일일까? 십 이 년 동안 가보지 못했던 추억의 장소에 십 이 년 만에 찾아 가 ‘그것’으로 그리워하던 것이 정말로 ‘그것’으로 실재하고 있음을 맞닥뜨렸던 경험이 있다. ‘그것’의 실재는 기이한 반가움이면서 동시에 맹렬하고도 선정적인 폭력이었다. 그토록 향수하고 꿈꾸어 온 ‘그것’은 어쩌면 ‘그것’이 될 수 없는 것을 향한 그리움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문학을, 그래서 연극을, 그래서 예술을 갈망하는 만큼 ‘그것’을 이야기해 버려서는 안 된다는 희미하고도 긴 강박관념은 아직까지도 날 에워싸고 있다. ‘그것’을 말하는 순간 ‘그것’은 상처받기 때문이다. 대학교 국문학과에만 진학하면 문학도, 예술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부푼 열망만을 가지고 살아 온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그토록 열망하던 국문학과에 진학했는데, 그 누구도 문학‘과’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고, 이런 저런 방법으로 문학‘을’ 강간하는 법만 알려주더라. 하며 동기들과 소주잔을 붙들고 울던 때가 생각난다. 예술과 ‘첫’사랑하고, 제도에 ‘첫’상처를 받았던,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그 어린 시절의 진지함. 우리는 정말로 ‘그것’을 말하고 싶지 않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말하지 않으면서 말을 하는 ‘시 쓰기’는 그래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우주를 아우르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호퍼의 회화를 영화화한다는 그 매혹적인 기획은 좋았으나 그 기획이 꼭 넘고 가야만 했던 연출법, 영화의 방법으로 ‘호퍼라는 시’를 쓰는 작업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호퍼를 영화화함으로써 내면적 은밀함을 육화시키는 묘한 쾌감을 주었을지는 몰라도, 이 영화는 ‘그것’을 지켜내지 못했다. 사실 기획이 과하게 매혹적일 때에는 실제 작업이 그 기획을 못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단지 그것이 기획의 단계에 머물렀을 때에만 유효한 매력‘점’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기획의 콘셉트를 체화해내야만 하는 창작의 몸체는 우리의 몸과 같이 연약하고 유동적이다. 그래서 늘 기획 작업을 할 때에는 머리와 입술을 조심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꾸만 연역하려들지 말고 귀납해서 아래로부터 올리고, 올려서 기획을 하는 습관이 중요하다. 기획자는 연출자보다 더 연출자여야 하고, 무엇보다 상상력이 탁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야기가 너무 멀리 갔다. 시를 시로 남겨두어야 하는 것. 순간을 순간으로 남겨두어야 하는 것. 그것이 예술을 가능케 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또 무엇을 기대하고 호퍼를 영화로 보고 싶어 했을까. 이 영화의 연출력에 실망을 하면서도 호퍼의 잔상에 집중했던 그 시간은. 무언가 너머의 것을 창작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 어려움을 함께 알고 있기에 호퍼를 이미 영화로 만든 이 작업 앞에서 또 다른 ‘말’을 보태고 싶지는 않다. 시를 쓰는 이에게 시를 타박하는 말들을 덧붙여 시 ‘쓰기’의 작업을 망쳐버리고 싶지 않은 탓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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