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3일 목요일

그럼에도, '인사이드' 르윈

by 이예은



  코엔 형제의 ‘최초의’ 음악 영화가 상영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궁금했던 것은 ‘음악이라는 소재가 어떻게 코엔 화되었을까?’였다. 음악이라는 감각적 달콤함도, 예술이라는 열정적 사명도 비껴갈 것이 분명한 ‘코엔 식’의 음악 영화의 전개가 궁금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영화는 지극히 코엔적이면서도, 기존의 코엔적인 것을 비껴가며 그들 나름의 ‘관용’을 베풀었다고 말하고 싶다. ‘음악 영화’라고 말을 하기에 이 영화에는 음악적 순간들이 지극히 빈약하다. 이 영화는 지극히 빈약한 음악적 순간들을 둘러싼, 그 나머지 것들의 팽배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의 제목이 ‘인’사이드 르윈이지만, 정작 영화의 대부분은 ‘아웃’사이드 르윈을 그리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이다.  

영화를 못보신 분을 위한 예고편: 

+ 사실은, ‘인사이드’가 아닌 ‘아웃사이드’ 르윈    


  클럽 공연 무대로 시작되는 오프닝 씬. 무대를 비추는 흔들리지 않는 노란 핀 조명은 건조하고도 안전하다. 안온한 이국성을 풍기는 작은 클럽의 무대. 한 곡의 노래를 긴 테이크로 잡는데, 사실 이 장면은 영화에서 ‘르윈’(오스카 아이삭)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노래를 하게 내버려두는 두 장면 가운데 한 장면이다.



  그 노란 조명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오로지 현실이다. 그 현실은 조금 엉뚱하고 어리둥절한 폭력들로 연쇄된다. 공연을 마치고 나오자 한 낯선 남자가 다가와 다짜고짜 그를 구타하고, 친구 ‘짐’(저스틴 팀버레이크)의 여자 친구 ‘진’(캐리 멀리건)이 르윈의 아이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임신을 했다며 다짜고짜 욕설을 퍼붓는다. 영문을 모르는 폭력들로 르윈과 함께 영화의 시작을 맞는 관객들은 이 모든 상황들이 조금 갑작스럽다.

  영화의 제목은 ‘인사이드’ 르윈이지만, 영화의 시작부터 조명되는 것은 ‘아웃사이드’ 르윈이다. 이어지는 장면들도 줄곧 르윈에게 행해지는 ‘아웃사이드’의 추궁들로 가득하다. 잠 잘 곳 하나 없이 사는 오빠를 추궁하는 동생, ‘화음들’로 낭자한 포크송의 틈바구니에 함께 서지 못하는 르윈을 비웃는 음악 동료들. 이들은 르윈과 ‘비’협화음들을 만들어내는 온갖 종류의 바깥 세계 현실을 보여주는 다양한 얼굴들 같다.

  짐과 진(이들의 이름이 비슷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은 엘리야 우드의 얼굴만큼이나 비현실적인 환타지를 머금은 얼굴로(짐 역할을 한 저스틴 팀버레이크에게 이토록 코엔 식의 신화적 상징성이 서려 있는 얼굴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알았을까?) 가증스러우리만큼 매끄러운 화음을 넣어 중창을 한다. 영화 이곳저곳에는 비현실적으로 매끄러운 ‘협화음’들이 음악적으로 배치된다. 짐과 진 뿐 아니라 실 짜임까지 똑같은 하얀색 스웨터를 맞추어 입고 나온 네 명의 중창단 역시 그렇다. 과도하게 인공적으로 조합된 이들의 화음은 르윈의 바깥 세계와 르윈 사이의 ‘비’협화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지나치게 완벽하다.      

  ‘인사이드’ 르윈의 내면은 매번 건조와 냉담 속에서 차갑고 거칠고 갑작스럽게 조명되는데, 그러한 갑작스러운 조명에는 과장된 사운드가 큰 몫을 한다. ‘비’협화음으로 가득 찬 인물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혼자 남겨진 르윈을 카메라가 잡을 때마다 빈번하게 삽입되는 지하철 사운드, 칼바람 사운드의 지극한 과장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관객의 고막에 상처를 낼만큼이나 과장된 사운드의 삽입은 르윈의 ‘인사이드’-매번 울어도 좋을 만큼 너무하지만, 너무도 길고 지속적인 것이라 한 번도 울 이유가 없는 오래된 인생의 격리-를 말 못할 폭력으로 전하는 것이다. 이 과격한 사운드들로 영화 속 인물은 한 번도 울지 않았으나, 여러 번이고 고함을 지른 것과 같다.

+ 고양이와 르윈,
순환 고리로 연결되어있는, 그러나 헤어지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율배반적인 동반자 


  르윈은 진의 낙태를 위해서 2년 전 여자 친구의 낙태 수술을 해 주었던 의사를 찾아가는데, 거기에서 그 전 여자 친구가 낙태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딘가에서 소리 없이 자라고 있을 생명의 존재. 이 대목에서 이 영화가 시작한 이래 지속적으로 영화의 행간을 습하게 추적해 온 ‘길 잃은 고양이’의 자취를 떠올리게 된다.

  영화 시작 부분에서 멜 교수 집에서 하룻밤을 잔 르윈은 그 집 고양이가 문틈을 타고 나오는 바람에 하룻동안 그 고양이를 데리고 다닌다. 그러다가 고양이를 잃어버리고, 몇 일 간 찾지 못한 채로 있다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비슷하게 생긴 고양이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 고양이는 ‘그’ 고양이가 아니다. 사실 르윈에게는 이 고양이가 ‘그’ 고양이든, ‘그’ 고양이로 오인된 고양이이든 아무런 상관없다. 고양이는 문틈만 생기면 나갈 곳을 찾고, 그리고는 어딘지 모를 곳에서 돌아올 수 없는 삶을 지속하며, 하루하루 몸 눕힐 정도의 공간만을(르윈이 매일 밤 찾아다니는 동그란 카우치와 고양이에게 내어주는 동그란 우유 접시는 닮은꼴이다.) 전전하는 르윈의 또 다른 생명성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고양이로 추적된 르윈의 라이프는 축적된 망각 내지 단지 오늘 하룻밤의 수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고양이는 ‘그’ 고양이든 ‘그’ 고양이가 아니든 상관이 없다.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르윈의 아이,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그’ 고양이는 사실 어느 곳에 살고 있든 그곳이 ‘어딘가’의 삶인 것처럼 막막하고 불연속적인 르윈의 삶을 들여다보게 하는 기제이다. 어딘가에서 살아남아 살고 있을,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 생명은 어느 누구의 것이 되어도 상관없고, 또한 그 삶은 단지 간헐적인 생명이 되어도 상관없다. 이 영화에서는 고양이의 것이든, 인간의 것이든 그러한 정도의 삶을 지속적으로 조명한다.

  고양이로 연결된 르윈의 생명성은 그가 멜 교수의 ‘그’ 고양이로 오인된 또 다른 고양이를 데리고 시카고 행의 차 안에 탔을 때 가장 도드라진다. 전 여자 친구가 수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의 낙태 비용을 굳히게 된 르윈은 그 돈으로 시카고 행에 몸을 싣는다. 소속사 메니져가 말을 했던 시카고의 한 클럽 메니져를 만나볼까 해서이다. 빗속에 한 대의 차가 르윈 앞에 서고, 르윈은 차체의 일부분인 것처럼 차 안에 몸을 정박시켜 놓은 두 남자가 앉아 있는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이 씬을 기점으로 영화는 마치 액트를 넘긴 연극처럼 전반적으로 다른 영화로 진입하는 느낌을 준다. 이 씬으로 인해 영화가 두 덩어리로 나뉘는 느낌을 받는 이유는 이 씬에서 이제까지와는 달리 길고 지속적인 테이크가 개입이 되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사막의 어딘가를 달리고 있는 듯한 차 속의 건조한 공기는 ‘액트 1’의 소리 없이 쌓여 온 르윈의 하찮음과 ‘비’협화음들의 세계를 지층화시켜 공간적으로 증폭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차 자체는 마치 하나의 지루한 공간처럼 연출된다. 그 차 안에서 오고가는 극대화된 ‘비’협화음의 대사들은 이제까지 르윈과 르윈을 둘러쌌던 인물들의 ‘비’협화음들을 마치 실물의 소우주처럼 팽창시킨다.

  여기에서 문득, 생각한다. ‘아! 이 영화 코엔 영화였지!’ 어느 틈에라도 뒤에서 후려치는 갑작스러운 잔인성이나, 무료한 듯 저질러버리고 마는 관조어린 파멸 같은 것이 이 시퀀스의 틈과 틈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베어 나온다. ‘나는 이 작품에서만큼은 과격한 걸 보고 싶지 않아’라면서 그 아슬아슬한 어조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오해였다. 이 영화에서 코엔은 결코 ‘르윈의 서사’를 이탈하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화장실에서 한 사내(존 굿맨)가 쓰러지고, 길 위에서 ‘문득’ 또 다른 한 사내(가렛 헤드룬드)가 경찰차에 호송되어 가지만, 두려워했던 코엔 식의 파격은 이 씬을 비껴간다. 코엔 식의 문법을 염두에 둔다면 매우 관용 있는 도전이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르윈의 서사에 집중한다. 한 사내는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고, 다른 한 사내는 차 키를 가진 채 경찰차에 호송된다. 버려진 차에 버려진 사내, 르윈은 가방을 들고 차 밖으로 나온다.

  이제 오로지 버려질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되어야 할 것은 고양이이다. ‘그’ 고양이, 아니 ‘그’ 고양이로 오인 받아 여기까지 우연히 동행하게 된 고양이. 이 씬에서 르윈과 고양이는 서로를 잠깐 응시한다. 이 영화를 떠올릴 때 오로지 한 장면만을 기억하게 된다면 바로 이 장면이 될 것이다. 르윈은 그 고양이를 마치 태어나서 처음 보는 자신의 얼굴인 양 불안하고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그런 르윈을 바라보던 고양이의 시선이 압권이다. 밤빛에 흔들리는 빗줄기가 고양이의 털 하나하나에, 잦아드는 눈썹 두덩이에, 빛나는 두 동공에 맺혀서 과장되게 흔들린다. 결국 차 문을 닫고 르윈은 떠나지만 그는 과연 ‘떠나는’ 자일까? 사실 이 장면에서 남겨지는 이도, 떠나는 이도 없다.

  작품의 후반부에 ‘그’ 고양이는 멜 교수 집에 ‘스스로’ 찾아오고, 알고 보니 그 고양이의 이름이 ‘율리시스’(오딧세우스의 라틴어 이름, 혹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였다는 설정은 내러티브의 과잉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고양이의 이름을 ‘율리시스’라고 명명함으로 인해 간헐적이고도 지속적이었던 이 영화 속 모든 방황과 습기를 ‘현대인의 표류하는 일기’로 못 박아 버린 것은 아닌가하여 아쉽다.

  그리고 그 고양이의 ‘귀환’으로 영화의 서사 역시 다시 첫 장면으로 ‘귀환’하여 르윈이 낯선 사내에게 얻어맞은 경위를 설명해 낸다. 이 대목은 관객이 같은 장면을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각각 다르게 맞닥뜨렸을 때 그 장면의 서사가 얼마나 다르게 보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표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낯선 사내에게 다짜고짜 구타를 당하는 르윈의 장면이 시작 부분에서는 그저 ‘비’협화음으로 존재하는 르윈과 르윈의 세계상으로 다가왔다면, 마지막 부분에 다시 삽입된 이 장면에서는 르윈의 ‘아웃사이드’와 매 순간 그 아웃사이드에서 버텨왔을 ‘인사이드’의 삶이 함께 보인다. 영화의 서사도, 영화의 형식도, 그리하여 르윈의 삶도, 처음과 마지막이 순환적으로 연결되어 ‘다시금’ 이 모든 간헐적인 삶의 순간들은 지속적으로 반복될 것이다.

  어딘가에서 ‘실은’ 자라나고 있을 르윈의 아이, ‘실은’ 멜 교수의 ‘그’ 고양이가 아니었던, 차에 남겨진 고양이, 그리고 르윈이 갑작스럽게 자신의 아이가 자라고 있을 도시로 핸들을 꺾어 길에 진입했을 때 차로 치고 말았던 또 어느 길고양이. 이들은 모두 ‘어딘가’에서 부유하고 있을 핏자국의 증기처럼 갑작스럽고, 어리둥절하고, 습하다. 어딘가에서 각기 살고는 있으나, 다시금 ‘그’ 아이를, ‘그’ 고양이를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다시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린다.

  이 영화에서 코엔이 그려내는 ‘르윈의 서사’는 ‘율리시스’(오딧세우스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 영화의 고양이 ‘율리시스’이기도 한)의 귀환처럼 ‘다시금’ 반복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다시’ 반복점을 찾는 그 순간, 그것은 ‘그’ 순간과는 다른 순간으로 귀착된다. 마치 ‘그’ 고양이를, ‘그’ 아이를 잃어버리고 나면, 결코, 다시는, 절대로, ‘그’ 고양이를, ‘그’ 아이를 만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 그럼에도, ‘인사이드’ 르윈


  그럼에도, 이 영화의 에필로그는 ‘인사이드’ 르윈이었다고 기억하고 싶다. 르윈이 시카고의 한 클럽을 찾아 가 자신의 노래를 처음에서 끝까지 부르는 장면이 이 영화에서 르윈의 ‘인사이드’가 침범 받지 않는 두 번째의 온전한 장면이다. 이 장면은 영화의 오프닝의 장면과 닮은꼴이다. 공기 중의 지극히 건조한 먼지 분자까지도 모조리 포착해내는 카메라의 침묵 어린 어조가 비슷하고, 노래가 시작되고 끝이 나기까지 온전히 르윈의 음악, 그것만을 카메라에 담도록 내버려두는 관용 어린 시선이 비슷하다. 특히 이 장면에서 르윈은 약간 눈물을 글썽거린다.

  이 장면은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숙명적이다. 이 장면에서 왜 눈물이 났을까? 그것은 르윈의 진심, 르윈의 ‘인사이드’가 이 순간만큼은 공고하게 다루어지도록 허락된 영화적 순간에 대한 숙연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분명, 금방 끝이 날 것이라는 이 순간의 숙명에 대한 수긍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결국 이 노래가 냉담한 평가로 사그라져버릴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 노래가 부디 끝이 나지 않기를’이라고 바라기까지 하게 된다. 오프닝 씬과는 또 다른 지점에서 ‘인사이드’에서 르윈을 말해주는 유일한 씬이다.

  ‘인사이드’ 르윈을 영화의 제목으로 내세우지만, 사실 영화 서사의 대부분은 ‘아웃사이드 르윈’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리고 ‘인사이드 르윈’은 오로지 전체 영화의 몇 컷트에 지나지 않았던 것. 그리고 ‘아웃사이드’ 르윈은 ‘인사이드’ 르윈과 지극히 화합하기 어렵고, 아니 이 둘은 결코, 살면 살수록, 점점 더 그 접점을 찾을 수 없게 된다는 것. 영화는 이렇게 ‘인사이드’와 ‘아웃사이드’ 경계 너머의 사실들 그 자체를 바라보고 있다. 매우 짧고도 예외적인 순간. 순간. 그래서 그것에 당도한 순간만큼은 지독히 느릿하고도, 아름답게 지속되는 순간. 순간. 그리고 전반적인 건조 속에서 이내 고독하게 소멸되기를 반복하는 순간. 순간.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고양이처럼 드문드문 살아지고 있는 순간. 순간. 순간.

댓글 1개:

  1. 본인이 직접 쓰신 건가요? 필력이 좋으시네요 잘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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