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2일 수요일

네 진심은 이게 아니잖아: 데이빗 해어 작, 김광보 연출, <은밀한 기쁨>

by 산책

<은밀한 기쁨 Secret Rapture>,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데이빗 해어 작, 김광보 연출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 (1895년)>을 본 초기 관객들은 정말 기차가 자신들에게 달려드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들은 스크린에 투사된 기차의 영상을 “진짜”로 믿었고, 그래서 “진짜”로 반응한 것이다. 그러나 더이상 우리는 영화를 보고 그것이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 또는 진짜라고 믿지 않는다. 연극의 경우 그것을 진짜로 믿는 것이 더욱 어렵다. 아무리 사실적으로 장면을 재현하려고 해도, “무대”는 사람들을 어떤 시간과 공간에 묶어 놓을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 해도, 이야기 속에 빠져 같이 울고, 웃고 기뻐하고, 때로는 두려워하며 영화와 연극을 본다. 스크린에 투사된 세계, 무대에서 보여지는 세계는 현실의 우리에게 거짓이지만, 그 안에서는 나름의 세계과 그 세계의 진실성을 보여주기에 그 세계로 기꺼이 들어가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공연장에 들어가기 전 어떤 관객(아름다운 여자분)이 <은밀한 기쁨>의 원어 희곡을 찾았다고 기뻐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 분께 다가가서 뭐하시는 분인지 묻고 싶었다. 그 마음과 열정에 감탄하며, 이명행 배우의 잘나온(?) 사진에 흐뭇해 하며 극장으로 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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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이 시작되기 전 암전이 참 좋다. 조용하고 깜깜한 아주 잠깐의 그 시간 동안 다른 세계로 옮겨갈 준비를 하고, 조명이 팍! 켜지는 순간 마법처럼 무대 위에 나타난 배우를 다른 세계의 어떤 인물로 만나게 된다. 이것은 극장에서 내가 느끼는 큰 기쁨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은밀한 기쁨>은 조명이 꺼진 상태도, 그렇다고 환하게 켜진 상태도 아닌채 시작된다. 생각보다 너무 가녀린 추상미 배우가 조용히 무대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극장이 떠나가라 소리친 배우가 테이블 위의 책을 챙겨 나가고, 소파를 옮기고 벽을 민다. 물론 이런 공연이 처음은 아니다. 그런데 유독 장면 전환 되는 순간, 일을 하는 배우를 보는 것이 참 편치 않다.

극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 어윈(이명행 분)이 이자벨(추상미 분)에게 “진심같은 것은 없는 여자”라고 소리친 순간 나는 알 수 없이 불편하던 내 마음의 이유를 찾은 것 같았다. 나는 등장 인물들의 진심, 그 인물들을 연기하는 배우의 속내를 느끼기 어려웠다. 그들에게 공감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기꺼이 그들의 세계로 옮겨갈 마음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히려 나 역시 그들에게, 진심이 무엇인지, 이게 네 진심은 아니지 않냐고 묻고 싶었다.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면서도, 자신과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고 하는 이자벨의 답답함 때문이거나, 마리온, 톰, 캐서린, 어윈이 보여주는 이상한 성미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캐릭터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어윈이 더 날뛰었으면, 이자벨은 답답하지만 그렇게라도 하면서 지키고 싶은 그 마음을 더 느끼게 해줬으면 하고 바랬으니까. 톰은 차라리 더 웃겼으면, 론다는 진짜 카오스를 가져왔으면, 캐서린은 더 구제불능이고, 엉망 진창이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은밀한 기쁨>의 서사에서 말은 무척 중요하다. 그들은 끊임없이 말을 한다. 그러나 과거를 복기하고, 자신의 마음을 설명하고, 남을 설득하는 그들의 말에는 무엇인가가 빠진 것 같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건지 알수 없이 어색하고 멍청한 표정으로 무대 한 켠에 서 있다. 또 울부짖는 한 사람을 보며 미동도 않고, 에너지와 감정을 바닥으로 바닥으로 가져가는 두 인물의 케미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또 배우들은 각자 자신의 에너지를 내뿜는데, 그 에너지의 파동이 서로 다르고,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소리내고 말하는 방법 조차 각기 다르다.

파멸 직전, 총을 보고 놀랐지만, 총성은 장난감 총의 그것 같아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인척 하는 가짜들을, 가짜라고 배짱부리는 순간에도 진짜인척 하고 싶어하는 장면들은 작품에 온전히 몰입하는 것도, 연극을 연극으로 보는 것도 방해하고 만다. 하지만 진심은 그게 아니었을 것이라 믿고 싶다. 순간 순간의 보여준 표정과 그 말들은 진짜로 느껴졌고, 마음으로 불쑥 들어왔으니까.

작품을 보고 하루가 지난 후, 말을 듣는 사람과 관계 없이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 말하는 사람을 신경쓰지 않는 것이 작가, 또는 연출의 의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내 말을 들어 달라고, 혹은 날 그냥 내버려 두라고 소리치고, 협박하고, 울부짖어도 내 말은 그에게 가 닿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가족이고, 연인이었나보다. 물론 그런 가족과 연인은 실재할 것이다. 또 하나, 가족이라고, 연인이라고, 그리고 함께 연기한다고 해서 조화로운 앙상블을 이루어야 생각했던 것도 내 짧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가족,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우리가 늘 조화롭게 사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할 거리들이 작품 곳곳에 숨어 있다. 이 작품은 정치, 종교, 가족, 사랑, 이런 중요한 가치들에 도전하고 질문을 던진다. 작품을 보고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집요하게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자세히보기:
http://youtu.be/CKRyhyJswqc
덧붙임. 원서로 읽을 마음은 없지만, 그들의 진심을 더 이해하기 위해 번역된 희곡은 읽어보려고 한다. 한국어 번역서 제목은 <남모르는 환희>이다. 데이빗 해어는 “남모르는 환희(The Secret Rapture)”를 수녀가 죽음의 순간 예수와 일치할 기대에 차 느끼는 기쁨이라고 설명한다. 저 유명한 베르니니의 성데레사 조각에서 볼 수 있는 기쁨인가 보다.

그렇다면, 이자벨은 마지막 순간, 아무도 모르는 극도의 기쁨을 느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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