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1일 금요일

이자람의 비극하는 마음을 응원하며: 두산아트랩-5 판소리 단편선 <추물/살인>

(질문할 기회를 놓쳐 공개 서신 형식을 빌어 씁니다.)

이자람 예술감독님께,




저는 오늘 이런 질문을 가지고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과연 창작 판소리에서 제대로 된 추임새라는 게 가능할까?사실 저의 질문은 '처음 듣는 소리에 어떻게 추임새로 반응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지만, 오늘 공연 중 <살인>에 대해서는 아티스트 토크 시간에 얘기가 나왔던 대로 (다른 의미에서) ‘없다’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여전히 판소리 듣기에 익숙하지 않은데다가 원작을 읽고 가지 않아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 만으로도 꽤 바빴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사실 이 질문을 하는 저에겐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과서적인 정답이 먼저 설정되어 있었던 것 같네요. 소리꾼과 고수 그리고 관객들이 에너지를 (소리로) 교류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판소리가 가진 매력이고 생명이지만, 이 당연한 명제도 질문에 붙여봐야 한다는 걸 오늘 깨달았습니다. 사실 저같이 추임새도 하지 못하면서 판소리의 생명을 이야기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공연을 보고 난 후, 그리고 아티스트와의 대화 시간에 오고간 이야기를 들으며, 감독님의 실험에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추임새 할 수 없는 이야기는 판소리로 만들면 안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약속하신 대로 앞으로도 ‘벨칸토 판소리’ ‘고수 없는 판소리’ 등 모던 판소리 실험을 계속 이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적지 않은 관객들이 좀더 밝은 이야기를 요청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 사람들은 비극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괜히 전통 판소리도 대부분 해피엔딩으로 마감되는 걸 보면 이건 꽤 오래된 습관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비극적 판소리가 없었다는 점만으로도 더 실험이 필요한 장르라 생각됩니다. 사실 감독님의 작품이 이미 <사천가>에서 <억척가로>, 그리고 이번에 <살인>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을 보아왔기에 감독님은 이미 그길에 한참 들어와 계신 거죠. <살인>은 말할 것도 없고, <추물> 역시 마지막에 약간의 희망을 열어 빠져나가긴 했지만 저에겐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어두운 이야기에 더 끌리는 것을요. 밝고 경쾌한 이야기는 또 다른 소리꾼들이 만들어가면 되겠지요.



<살인>을 보고나서 한 10년 전에 샤를리즈 테론이 주인공으로 나온 <몬스터>라는 영화가 생각났습니다.(비록 샤를리즈 테론이 그 영화를 위해 살을 찌워야 했던 반면, 이승희님은 얼마 전 <비빙> 공연 때와 비교해도 헤쓱해진 모습이었지만 말입니다.) 그 영화를 보고 왔더니 제 친구가 그런 영화는 왜 만드는 거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전 그때, 단지 연극을 공부한다는 이유로 제가 만들지도 않은 그 영화의 정당성을 설명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소용없더군요. 설명하고 심지어 수긍시킬 수도 있지만 보러 가게 할 수는 없더라구요. 아마 아리스토텔레스 선생이 틀렸나봅니다. 좋은 플롯은 “눈으로 보지 않고, 사건의 경과를 듣기만 하여도 그 사건에 전율과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끔 구성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듣기만 해도 전율하니 보러 가지 않게 되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요. 그저 끌리는 사람이 만들고 또 끌리는 사람이 보러 가나 봅니다.



마지막으로 <살인> 텍스트를 구하기 쉽지 않다고 해서 그냥 부정확한 상태로 먼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실 전 오늘 <살인>의 음악이 좋았다는 몇몇 분들의 말에 완전히 수긍할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음악 자체나 악사님들의 연주는 제가 감히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을 넘습니다. 훌륭했고 그 자체로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살인>의 텍스트, 특히나 텍스트의 문체와 소리가 과연 어울리는지, 어울릴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아마도 이것은 단편소설이라는 특수한 문학 장르와도 관련되어 있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물론 단편소설로 연극도 하고 영화도 만드는데, 판소리라고 안될 이유는 없겠지요. 그런데 오늘 <살인>의 문체는 제게는 상당히 건조하게 들렸습니다. (원작 소설의 텍스트가 얼마나 사용되었는지 확인이 필요합니다만, 남윤일PD님께 잠시 여쭤본 바로는 많은 부분이 다시 쓰여졌다고 들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텍스트는 이승희님이 아무런 음정을 넣지 않고 평이하게 읽어주시던 부분이 가장 듣기에 편했습니다. 특히나 짧게 끊어지는 건조한 문장들은 그 자체로 매우 절제된 하드보일드 소설의 문체 같아서 거기에 음악적인 요소가 첨가되는 게 제게는 꽤 이질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물론 텍스트는 의미를, 소리는 감정을 각각의 채널로 전달할 수도 있겠지만, 소리와 텍스트가 좀더 긴밀하게 맞붙기 위해선 양자가 서로를 좀더 닮아가야 했던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더 만들고 더 보다보면 알게 되겠지요.

2014년 2월 21일 밤에

임승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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