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2일 일요일

[두산아트랩] 몸-주체로서 여성, 소리-주체로서 소리꾼: 판소리 단편선 <추물 / 살인>

by 백인경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영혼, 그대의 이름은 ‘배우’!

그러나 ‘체화(embodiment)'라는 개념이 서양 연극사에 등장했던 18세기부터 무대 위의 배우들에게 요구되는 자유란 일종의 속박과도 같았다. 그 체화의 개념이란 한 인간으로서 배우 자신을 비워내고 텍스트가 묘사하는 등장인물로 온전히 다시 태어나도록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그 사이의 어딘가에서 나도 그도 아닌 그 즈음에서, 주어진 시공간 안에서 또 다른 시공간을 창출해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무대 위의 생명체들; 배역을 창출해내는 정신적 주체이자 그 자체로 물질적 재료로서 무대 위에 봉헌되는 배우의 신체는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존재이자 그만큼 더 가혹하고 냉철한 시선들을 온 몸으로 견뎌내야만 하는 여린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텅 빈 무대 위에서 우뚝 서서 홀로 이야기를 끌고가는 판소리의 창자(唱者)는 어떠한가? 심청이도 되었다가 심봉사도 되었다가 돌연 제 3자의 입장에서 부연설명도 곁들이며 관객들을 들었다 놨다 판을 끌고가는 소리꾼에게도 철저히 누군가가 되어야'만' 하는 그런 종류의 고충들이 있었을까? 이번 두산아트랩에서 진행된 판소리 단편선 <추물/살인>은 공연예술의 특정 장르를 떠나 무대 위의 다양한 존재 양태에 대한 가능성들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녀 스스로가 노래하는 소리꾼으로서, 또한 한 명의 배우로서 판소리와 연극에 대한 오랜 고민과 실험을 무대화했던 이자람(@jjjjjam)은 양손프로젝트의 박지혜 연출과 손을 잡고 주요섭의 단편 소설들을 무대 위에 올렸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는 이자람 그녀가 아닌 또 다른 그녀들이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이자람의 공연’을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비슷한듯 또 다른 다양한 소리들을 만날 수 있었던건 오히려 관객의 입장에서는 감사하고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김소진과 이승희는 각각 <추물 / 살인>의 소리를 맡아 두 여성의 이야기를 전혀 다른 분위기로 끌고 나갔다.





이자람은 창작자로서 인간이 역경에 부딫히는 순간 그것을 극복해 나가나는 방법과 과정에 관심이 있다고 밝혔지만 그녀 자신이 여성인 까닭에 우리는 그녀의 작품을 통해 여성이 겪는 여러가지 고난사(?)들을 접해왔다.

<추물 / 살인> 또한 여성의 몸과 정신 사이의 타협될 수 없는 간극을 이야기한다. 사랑받고 싶지만 너무 못생긴 외모 때문에 결혼이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는 추물 언년이는 시골을 떠나 서울로 탈출도 해보고, 다음 세대에 간곡히 희망도 걸어보지만 불만족스러운 자기 신체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어린 나이에 매음굴로 보내져 창녀 생활을 하던 우뽀는 창 밖을 지나는 청년에게 마음을 빼앗긴 후 부터 자신의 몸이 수치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여성의 몸(외모 또는 순결)이 정신(사랑)에 대한 문제로 직결되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며, 이는 사회 체계에 대한 비판보다는 인간의 더 본질적인 고민들을 들춰낸다. 밝은 곡조의 노래와 코믹한 에피소드들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이 쉬이 추임새를 넣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공연에서 창자는  극 중 인물과 쉽게 동일시되어 관객들에게 인식되었다.

실제로 창작자들은 <살인>을 모노드라마로 구성하고 싶었다고 언급했는데, ‘마치 뮤지컬을 보는 것과 같았다’는 반응은 비단 음악적 측면 때문만이 아니라 관객이 등장인물로서 ‘화자’에게 얼마나 잘 동화될 수 있었는가를 설명한다. <추물/살인>은 비록 주인공의 독백으로만 구성된 모노드라마는 아니었지만, 그리고 창자들 역시 언년이와 우뽀로서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관객들이 그녀들을 그녀들로 인식하게 되는 데 있어서 소리꾼들은 또한 ‘배우’였고 '판소리 비극’이 가능해지는 순간이었다.

‘판소리에 연출이 필요한가?’하는 연출의 초기 질문은 ‘연극 무대에서는 배우가 빛나야 하고, 판소리 무대에서는 소리가 빛나야 한다’는 통찰로 그 답을 대신했다. 소리꾼의 손짓 하나만으로도 공간이 바뀌고 그곳에 다양한 인물들이 소리와 함께 채워지는 마법은 모든 무대적 요소들이 자신을 죽이고 소리 에너지로의 집중을 위해 조심스럽게 조율되었기에 더욱 빛났을 것이다.

‘소리’를 한다는 것은 어떠한가. 득음을 위해 폭포수와 싸우는 것은 물론이며 좋은 소리꾼이 되기 위해 눈을 멀게 했다는 이야기(서편제)도 전해진다. 실제로 모든 소리꾼들이 그렇게 연습을 하는건 아니라고 하지만 그만큼 소리는 혼의 물질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벗고 등장인물을 입는 18세기의 체화의 개념은 수행성(performativity)의 시대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오히려 배우는 자신의 현상적 신체와 기호적 신체 사이에서 나오는 긴장과 에너지로 무대 위에서 특별해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전수 받아 자신의 소리로 만드는 것에서 직접 자신의 소리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판소리의 가능성은 앞으로 더욱 무궁무진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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